[사람과 사람] 도내 양복점 맥 잇는 미복사 장원용 사장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오거리 광장 부근에 있는 '미복사 양복점'의 장원용 사장(57)은 기성 양복이 시장을 석권한 요즘에도 예복을 중심으로 한 맞춤 양복을 고집한다.맞춤 양복을 찾는 손님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나, 그가 성인이 된 후 줄곧 재단사로 일해오면서 간직했던 장인 정신과 소위 '손맛'을 잊을 수 없기에 혼신을 다해 자신의 일에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다.도내에선 유일하게 노동부가 발급한 1급 기능사 자격증을 갖추고 옷을 만드는 사람, 장원용 사장을 만나 그가 왜 맞춤 양복을 고집하는지 들어봤다.<편집자 주>미복사는 당초 전주 한성여관 사거리에서 여명철씨(70)가 창업, 한때 10여 명의 종업원을 두고 하루에도 20∼30벌의 주문을 받던 도내 대표적 양복점이었다.당시에는 마치 중국음식점에서 종업원이 주문을 받듯 어깨, 허리, 길이 등을 부르면 척척 받아적느라 눈코뜰 새가 없었다고 한다.워낙 주문이 밀려 밤샘 작업을 해도 고객이 옷을 맞춘지 한달을 기다려서야 찾아야 할 만큼 성업을 이루기도 했다.미복사가 한창 잘나가던 1974년도에 장원용씨는 재단사 보조로 취업한다.그때부터 장 사장은 한눈 팔지 않고 양복 맞추는 일에 전념했고 여명철 사장으로부터 양복점을 넘겨받아 지금에 이르렀다.순창 동계중을 졸업한 뒤 학원에서 재단일을 배우던 장원용에게 양복점 재단사는 너무나도 멋진 일이었다고 술회한다.한번 일을 맡으면 워낙 집중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종종 한석봉 어머니에 비유하곤 했다.눈을 감고 원단에 선을 그어도 워낙 반듯하고 정확하게 재단일을 해냈기 때문이다."타고난 재주가 있었겠죠, 하지만 내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한다는 자부심으로 인해 더 열중했던 것 같습니다"장 사장은 처음엔 재단이 전부인줄 알았다.하지만 경력이 쌓일수록 맞춤 양복을 제대로 소화해내려면 재단, 재봉, 가격 등 3요소를 정확하게 배합해 내야 한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익혔다.자로 잰 듯한 정확함을 토대로 재단이 이뤄지더라도 누에가 집을 짓듯 완벽한 재봉이 더 중요함을 터득한 것이다.요즘 그의 일손이 돼 주고 있는 부인 김보남씨(52)는 "흔히 올 하나로 다툰다고 하죠, 그만큼 섬세한 미학이 담겨있는게 바로 맞춤 양복"이라고 기자에게 귀띔했다.가격과 관련해서는 일부 부유층만 입을 수 있는 고가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윤을 줄여 요즘엔 한벌에 50∼60만원대의 맞춤양복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가고 있다.기성복보다는 맞춤양복이 인기를 끌던 70∼80년대만 해도 전주시내 양복점 수는 100곳이 넘었으나 요즘엔 수선이 아닌 순수 맞춤 양복을 하는 곳은 고작 3곳 남짓하다.유명 브랜드를 중심으로 한 기성복이 완전히 맞춤 양복을 대체하면서 이젠 옛 멋을 지키고자하는 중년신사, 결혼을 앞둔 신랑, 기관장이나 그럴듯한 업체 사장들이 주로 찾는다.그만큼 고객층이 엷어진다는 얘기다.하지만 장원용 사장은 요즘에도 자신의 가치관을 고수하면서 직업에 대한 긍지를 잃지 않고 있다. 대다수 고객들은 매장을 둘러본 뒤 그 자리에서 옷을 사입는 기성복에 비해 맞춤양복이 번거롭다고 느끼지만 자신의 '손맛'을 알아주는 단골이 아직도 수백명이나 되기 때문이다."제가 정성을 다해 맞춘 옷을 입고 흐뭇해하며 가게문을 나서는 고객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뿌듯할 수가 없다"는 장 사장은 올초 한 단골손님의 아들이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말을 듣고 무료로 대학생에게 멋진 양복 한벌을 선사하기도 했다.그의 재능과 성의에 감동받은 고객 중에는 대전, 서울 등 타지로 이사하고도 수십년씩 미복사를 찾는 손님들이 있는 것도 그런 연유다.장 사장이 전북대 교환학생으로 온 한 중국 학생의 소개로 중국 베이징, 소주, 천진을 방문해서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의 옷을 맞춰주고 돌아온 일화도 두고두고 업계의 화제다.시대가 변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가봉'이라는 말도 알아듣지 못할만큼 맞춤 양복이 사라지고 있지만 장 사장은 "정성과 손맛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수제 양복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