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사 100인 열전] 양녕대군 폐세자를 주청한 유정현
유정현은 고려말 전라도안찰사와 조선건국후 태조대 전주부윤을 역임하고, 태종 4년(1404) 전라감사에 임용된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조선건국후 공신이 아닌 순수 관리출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태종의 뜻을 받들어 양녕을 폐위시키고 충녕을 세자에 올렸다. 유정현(柳廷顯, 1355~1426)의 본관은 문화, 자는 여명(汝明). 호는 월정(月亭)이다. 첨의중찬을 지낸 유경(柳璥)의 4대손이며, 아버지는 문화군(文化君) 유구(柳丘)이다. 경기도 안양이 출신지라는 말이 있는데, 그의 묘소가 안양 동안구 비산동에 있다. 그는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음사(蔭仕)로 등용되어 전라도안렴사를 지내고, 양근군(楊根郡) 수령과 대간인 장령ㆍ집의, 국왕의 비서인 좌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공양왕 4년(1392)에 정몽주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 개국 후 풀려났다. 태조 2년 그의 두 아들이 감시(監試)에 합격하였다고 하여 직첩을 돌려받았다.
조선건국후 태조 3년 상주목사에 임용되었고, 이후 병조전서ㆍ완산부윤 등에 제수되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태종대 이후이다. 태종 4년 전라도관찰사에 임용되었고, 이후 경기도관찰사ㆍ충청도관찰사ㆍ판한성부사ㆍ형조판서ㆍ예조판서ㆍ대사헌ㆍ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어 태종 16년 5월 좌의정에 올랐으며 그해 11월에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세종 원년 대마도 정벌 때에는 삼군도통사로 활약하였다.
그는 세종 18년 6월 양녕을 폐세자하고 충녕을 세자로 올리고 난 후에 영의정에서 물러났다가 세종 즉위년에 다시 영의정에 임용되어 세종 6년까지 재임하였다. 태종말에서 세종초까지 8년여를 영의정으로 재임한 것이다. 세종 6년 영돈령부사에 임용되고, 세종 8년 3월 좌의정에 임용되었다가 그해 5월 사직하였으며 며칠 후 졸하였다. 유정현은 고려말 우왕 11년(1385) 가을과 겨울 추동번(秋冬番)으로 전라도안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조선건국후 태조대에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전라감사에는 태종 4년(1404) 3월 10일 임명을 받고 4월 5일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8월 27일경 이임하였다. 4개월 정도 짧은 기간 전라감사로 있었다.
태종은 유정현을 비롯해 각 도의 신임 관찰사들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인구의 많고 적은 것을 몰라서는 안 된다. 경들은 군현을 순행하면서 조사하여 후일의 물음에 대비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부임한 직후인 태종 4년 4월 25일 의정부에서 전국의 전답과 호구수를 아뢰었는데, 전라도는 전답이 17만3990결, 호수가 1만5703호, 인구수가 3만9151명이었다.
이 수치는 당시 전국의 전답 78만2543결의 22%, 호수 15만3404호의 10%, 인구 32만2786명의 12%에 해당한다. 전라도의 토지는 전국의 1/4정도이고, 이에 반해 호수와 인구수는 1/10정도이다. 이 수치가 역을 당당하는 남자들만을 조사하는 등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전라도가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살기 좋았음을 보여준다. 태종은 국왕 중심체제 육조직계체제를 그의 재위 14년에 완성하고 이어 18년에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봉한 다음 양위하였다. 태종의 뜻을 받들어 이를 주도 했던 사람이 유정현이다. 태종 18년 6월 2일에 태종이 양녕을 폐세자 시킬 뜻을 비치자 당시 영의정 유정현과 좌의정 박은은 백관을 이끌고 양녕을 폐할 것을 주청하였다.
다음 날 양녕을 폐하고 누구를 세자로 삼을 것인가를 태종이 묻자 한상경 이하 군신들이 양녕의 아들을 세우자고 하였으나 태종의 의중을 읽은 유정현은 박은과 함께, 어진 사람을 택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태종비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禍亂)의 근본이 된다고 반대하였다.
태종이 어진 사람을 골라 아뢰라고 명하자, 유정현은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것은 군부(君父)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효령은 자질이 미약하고, 중국사신을 접대하려면 술을 좀 해야 하는데 한 모금도 못하고, 충녕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병이 날까 염려될 정도로 밤새 책을 읽으며, 술은 잘못하지만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면서 충녕을 세자로 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擇賢]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정현은 태종대 2인자 하륜과 세종대 2인자 황희 중간에서 영의정으로 8년간 재임하면서 태종대에서 세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재상이다. 지금까지 태종에서 세종대 정치를 논할 때 하륜과 황희를 대표적으로 생각했지만 그 중간에 유정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유정현은 태종이 총애한 태종의 사람인 것 같다. 태종은 정치적 혼돈을 수습하고, 세종을 세워 새 시대를 열어가는 구도를 짤 때 이 일을 맡아 수행할 적임자로 공신이 아니면서 역량을 갖춘 유정현을 택하였던 것 같다. 고려말 태종과 유정현은 관직생활을 같이하여 절친했다고 한다. 또 태종과 유정현은 친인척이 된다. 태조의 이복형 완풍대군 이원계의 딸이 변중량에게 시집갔다가 유정현에게 재가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8년 유정현의 졸기에, 사람됨은 엄의 과단(嚴毅果斷)하고 검약 근신(儉約謹愼)하여, 일을 조리 있게 처리하고 논의에 강정(剛正)하여 피하는 바가 없었다. 태종이 양녕을 폐하고 나라의 근본을 정하지 못하매,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의심스럽고 위태하게 여겼는데[疑危] 정현이 맨 먼저 어진 이를 택해야 된다는 의논을 내었다. 임금이 그의 소신을 중히 여겼으나, 정치를 함에 가혹하고 급하여 용서함이 적었고, 집에서는 재물에 인색하고 재화를 늘이어 비록 자녀라 할지라도 일찍이 마되[斗升]의 곡식이라도 주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호조를 맡고 있으면서 출납하는 것이 지나치게 인색하였다.라고 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이동희(예원예술대학교 교수, 전 전주역사박물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