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사 100인 열전] 프롤로그 - 연재를 시작하며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 전라감영이 복원되면서 전주와 전북의 역사적 위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본보는 전라감영 복원을 계기로 전라감영을 이끌었던 전라도 관찰사들의 활동상을 들여다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원고 집필은 전주 역사를 꿰뚫고 있는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이 맡았다. 이동희 관장은 2005년부터 전주역사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박물관 차원의 전라도천년사 연구에 열정을 쏟아왔다. 이 관장은 전라감사 100인 열전을 통해 전라감사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전라도지역사와 민족사를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기획은 격주로 연재된다. △전라감영의 복원
복원된 감영 건물은 전라감사 집무처 선화당을 비롯하여 감사의 제2정청이라고 할 수 있는 관풍각, 감사의 처소 연신당, 감사 가족의 살림집 내아,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행랑채 등이다. 앞으로 감영의 서편 영역과, 남쪽편 영역까지 단계적으로 순조롭게 복원되어 전라감영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라감영은 전주와 전북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주는 통일신라 때 행정의 중심지로서 주(州)가 설치된 이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라도 내지 전북의 중심 거점도시로서 위상을 이어오고 있으며, 그 중심에 전라감영이 있다. 전라감영은 문화관광시설로서만이 아니라 그 대단했던 감영의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 전주와 전북 사람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지역을 끌어가는 보다 크고 근본적인 것이다. △전라감영의 설치
지방장관격인 관찰사가 임용되어 일도를 통괄하는 감사제가 마련된 것은 고려말이다. 1388년, 창왕 즉위년에 위화도회군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지방제를 정비하면서 안찰사를 혁파하고 도관찰출척사를 신설하여 일도를 통괄하게 하였다. 이러한 고려말의 도관찰사제가 조선건국후 감영제로 이어졌다.
고려의 안찰사는 5,6품의 하위직으로 6개월을 임기로 일도를 순력하며 군현 수령들을 규찰하는 봉명사신격의 관리였다. 고려시대에 도제(道制)가 마련되었지만 지방장관이 임용되어 일도를 통괄하는 행정도제는 아니었다. 행정도제로서의 도(道)는 고려말 대신급의 도관찰출척사가 신설된 것에서 비롯되어 조선건국후 새왕조의 지방제로 확립되었다.
전라감영은 처음부터 전주에 설치되었다. 그것도 고려조 전라도안찰사영이 전라감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역사성이 더 깊다. 고려시대 안찰사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군현을 순력하다가 머무는 본영 안찰사영이 설치되는데, 전라도안찰사영은 전주에 설치되었다. 전라감영은 조선건국후 그대로 전주에 설치되어 임진왜란후에도 경상감영, 충청감영과 달리 다른 군현으로 이전되지 않고 전주에 있었다. △전라감영의 관아시설
전라감영 관아건물들이 건립되는 것은 조선후기의 일이다. 선화당도 선조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건국후의 감영운영은 고려 안찰사에 이어 도관찰사가 감영에 머물지 않고 군현을 순행하면서 도정을 처결하는 행영제(行營制)였다. 따라서 별도의 감영시설이 필요 없었다.
임진왜란을 거쳐 17세기에 감사가 감영에 머물며 도정을 처리하는 유영제(留營制)로 개편되면서 관아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번에 복원된 연신당도, 내아도 마찬가지이다. 감사가 머물게 되면서 가족을 데려올 수 있게 되어 내아가 필요했고, 감사의 처소 연신당도 필요했다. 대형 병풍형지도 「전주부지도」와 「완산부지도」에 나타난 전라감영의 모습은 모두 조선후기 유영제하의 전라감영이다.
유영제 하에서 전라감영 동편에 선화당을 비롯한 전라감사 영역이 자리했고, 지금 평지로 남아 있는 서편에 감사의 도정을 보필하는 아전들의 관서 영리청을 비롯한 실무관서들이 자리했다. 대사습놀이의 주역 통인청도 전라감사 영역 서쪽 가까이에 있다. 남쪽편 현 완산경찰서 자리에 감사의 군사권을 보좌하는 중군의 집무처 주필당을 비롯한 군사시설과 감영사무를 담당하는 아전들이 집무처 작청 등이 자리했다.
전라감영의 특색으로 논해지는 문화시설인 종이를 관리하는 지소, 책 출간을 관장하는 인출방, 약재를 관리하는 감사의 보좌관 심약의 집무처 심약당 등은 서편에 있었다. 남쪽편의 서쪽으로는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이 자리했다. 전라감영의 서편과 남쪽편이 복원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전체부지를 복원하는 것이고 모든 건물을 복원하는 것은 아니다. △전라감사와 감영 조직
전라감사는 종2품의 문관직이다. 정3품의 통정대부가 부임한 경우도 많고, 또 문관이 아닌 무관이나 음관이 임용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문관이다. 전라감사의 임용실태를 조사해 보면, 임용시 품계가 종2품이 47%로 절반정도이고,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가 전체의 37%로 매우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라감사의 출신은 문과출신이 전체의 90%에 이른다.
전라감사의 보좌관으로는 종5품의 도사, 정3품 당상관 무관 중군, 종9품의 심약과 검율이 있다. 도사는 감사를 보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감사를 견제하는 역할이 있었으며, 지방관들의 고과를 매기는 포폄에도 참여하였다. 심약은 약재와 의료를 보좌하고, 검율은 법률을 보좌하였다. 종5품의 판관은 엄밀한 의미에서 감사의 도정 보좌관은 아니고, 전라감사가 전주부윤을 겸하면서 실질적으로 전주부의 일을 맡아 보는 관리이다.
감영에는 이들 보좌관 외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아전들이 있었다. 아전에는 도정을 보필하는 영리(營吏)와 감영사무를 담당하는 인리(人吏)가 있다. 18세기말 『전라감영지』에 보면 영리는 39명이고, 인리는 149명이었다. 이외에 심부름 등 미천한 잡무를 맡아 하는 사령은 18명이고, 죄인을 다루는 군뢰(軍牢)는 115명이며, 호위와 전령격인 순영수(巡令手)는 30명이다. 기생은 31명이고, 노비는 54명(남자종 41명, 여자종 13명)이다. △전라감사로 부임한 총인원
전라감사 명부로는 대표적으로 전북도청에 소장된 『호남도선생안』과 『관찰선생안-호남』 등이 있다. 『호남도선생안』은 1875년에 작성된 필사본으로 이후에 부임한 감사들도 추기되어 있다. 고려말에 도관찰사로 개편된 후 첫 번째 전라감사는 1388년에 부임한 최유경이다. 이로부터 고려말까지 전라도관찰출척사로 부임한 인원은 4명이고, 1392년 조선건국 직전에 다시 안찰사제로 돌아가 임용된 인물이 1명이다.
1392년 조선건국후부터 1895년 23부로 개편될 때까지 임용된 전라감사는 안렴사 2인을 포함해 총 467명이다. 이후 23부제하에서 전주부관찰사, 남원부관찰사, 나주부관찰사, 제주부관찰사로 총 7명이 부임하였다. 1896년 13도제로 개편되어 전라북도관찰사로 임용된 인물이 10명, 전라남도관찰사로 임용된 인원이 13명으로 이를 합치면 23명이다.
조선건국후의 전라감사, 1895년 23부제하의 관찰사, 1896년 분도후의 관찰사를 다 합쳐보면 조선시대 전라도지역에 관찰사로 부임한 연인원은 총 497명이다. 이 숫자는 미부임자를 제외한 것이며, 중임을 포함한 연인원이다. △전라감사 열전 집필 방안
전라감사 100인 열전을 연재하는 것은 이를 통해 전라감사를 이해할 수 있고, 조선의 역사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전라도천년사 연구의 하나로 전라감사의 이력들을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라감사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앞서 살다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전라도지역사와 민족사를 전라감사를 통해 풀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본 연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었다.
전라감사 중 선별하여 연재하겠지만, 여기에서 빠졌다고 하여 전라감사로 주목받지 못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지면과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으로 모든 전라감사를 다 소개하지 못하고, 100인정도를 선정해 기술할 뿐이다. 이번 연재는 전라감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소개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라감사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라감사를 대표하는 인물들만을 소개하는 것도 아니고, 또 대표적인 인물로 보기에 어렵더라도 감사 이야기를 위해 필요한 경우 연재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연재에서 빠진다고 하더라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전주어진박물관장을 겸하고 있으며,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 위원, 전북사학회장, 전북박물관미술관협의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