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야구의 등장과 최관수 감독
무엇인가를 잘 하고자 하는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장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할 터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까지 하다가 내려온 이곳 전주. 이미 전주사람이 되어버린 내가 10년이 넘게 방송국 PD라는 업무를 담당하다 문득 지금의 우리를 뒤돌아본다. "과연 전라북도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무엇일까?"'음식', '국악', '야구'.첫째와 둘째는 이견이 없을 테고, 야구는 왜일까?무엇이든 그 분야의 두각을 나타내려면 특출한 능력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 기저에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역사와 철학이다.그렇다. 전라북도는 야구의 역사와 철학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고장이다. 1905년 질레트 선교사가 이 땅에 야구라는 스포츠를 도입한 이후, 가장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무엇일까? WBC에서 미국대표팀을 이기고,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순간도 있겠지만, 여전히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교훈을 알려주는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의 역전 스토리이다.1972년 7월 19일 서울운동장. 전통의 강호 부산고에게 4대 1로 뒤지던 호남의 신생팀 군산상고는 9회말 기적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김준환이 치고 김일권이 달렸다. 결과는 5대 4, 역전이다!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이 야구이며, 40년간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이후에도 군산상고는 연이은 전국대회 우승으로 72년 황금사자기 역전 우승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게 된다. 12만 인구의 호남의 작은 도시 군산에서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일까?그 신화에는 두 사람의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당시 군산에 공장이 있었던 경성고무 이용일 사장과 70년 새로 부임한 최관수 감독이다.1943년 인천에서 태어난 최관수는 인천 동산고 시절 4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두는 명투수였으며, 고교야구 최고 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고교 3학년 때 아시아선수권에 국가대표 투수로 선발되는 영예를 맞이하게 되는데, 최관수 이전과 이후 고교생이 국가대표로 선발된 기록이 없다고 하니 당시 최관수의 기량을 가늠해 볼 수 있다.1루에 진루한 주자가 후속타자의 안타에 3루까지 뛸 생각을 못하고 2루에 멈춰서야만 했던 '안타 하나에 한 베이스' 야구를 하던 아이들에게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최관수의 부임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해준다. 접해보지 못했던 빠른 공과 낙차 큰 변화구로 단련된 김봉연은 더 이상 치지 못할 공이 없는 강타자로 변신하였으며, 국가대표급 전술을 터득한 김일권은 어떠한 작전도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게 되니, 군산상고 야구부가 70년대 최고의 야구팀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60 - 70년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과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권만이 존재하던 야구계에 군산상고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었다. 군산상고의 등장이 곧 호남야구의 등장이 되어버린 것으로, 이는 고교야구의 전국화를 가능하게 하였다.1982년 15명의 선수로 시작한 프로야구단 해태타이거즈의 선수 중 8명의 선수가 군산상고 출신이었다. 말 그대로 해태타이거즈는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으로 대표되는 군산상고의 팀이었다.오늘날 프로야구가 최고 흥행기를 맞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역 연고제'를 정착시켰다는 점이다. 해태와 롯데가 맞붙고, 영남과 호남이 경쟁하는 구도는 원하건 원하지 않았건 전국민이 프로야구를 사랑하게 만드는 촉매가 될 수 있었으며, 그 '호남'과 '타이거즈'의 태동이 전북 군산에서 시작되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배후에 최관수라는 명감독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면, 2013년 야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자명한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홍 PD는 현대차그룹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2001년 2월 전주방송 PD로 입사.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전라북도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