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⑪<흥선대원군 효유문> : 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
<흥선대원군 효유문>은 1894년 8월~9월에 걸쳐 전국 각지에 전달된 문서로 대원군이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즉각 해산할 경우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필사본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으며, <수록>, <미나미 고시로 문서>, <소모사실>(정의묵), <뮈텔문서> 등의 자료에도 수록되어 있다. 각 문서에 따라 일부의 글자에 차이가 있으나 내용은 동일하다. <효유문>을 내린 날짜도 <수록>과 <뮈텔문서>에는 ‘개국 503년(1894) 8월’로 되어있고, <소모사실>에는 ‘개국 503년(1894) 9월 10일로 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의 해산을 명하는 이 효유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문서 자체의 진위 문제, 그리고 대원군의 원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다. 이는 대원군과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 간의 관계에 대한 논란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효유문>은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전봉준과 대원군 간의 ‘밀약설’은 동학농민혁명 당시부터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제기되었으며, 대원군이 실권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일제시대에도 대부분의 글에서 이 문제가 언급되어 왔으나, 1945년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양자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100주년을 맞은 이후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새로운 연구들이 발표되면서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었음은 거의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봉준과 대원군이 언제부터 관계를 가졌고,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다. 대원군과 동학과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이미 1893년 2월 동학교도들의 광화문 복합상소가 일어났을 때부터 중앙정계와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의 외교관들 사이에 동학교도의 배후에는 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돈 바 있다. 또 정교(鄭喬)의 <대한계년사>도 이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해두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발발 이후 동학농민군의 요구에 대원군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4월 16일 영광에서 '창의소' 명의로 완영유진소(完營留陣所)에 보낸 통문이다. 이때 농민군은 자신들의 의거가 “탐관오리를 개과혁신케 하고 국태공(國太公)을 감국(監國)케 하여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데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어 4월 18일 함평에서 나주 공형(公兄)에게 보낸 통문과 4월 19일 초토사(招討使)에게 보낸 정문(呈文), 5월 4일 역시 초토사에게 보낸 소지(所誌)와 그 무렵부터 제시한 27개조의 폐정개혁안 등에서 대원군의 섭정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2차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에도 대원군 측이 보낸 밀사들과의 만남을 비롯하여 몇 차례 직간접적인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료들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과 대원군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을 추측케 하지만, 언제부터, 또 어떤 관계였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다만 여러 자료를 통해 볼 때 대원군은 1894년 6월 21일의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 강제 점령을 계기로 집정한 직후부터 이미 농민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를 위해 준비해 나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 언론이나 일제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봉준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았거나 대원군의 비호를 기대하여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전봉준 혹은 농민군 측에서 대원군을 이용하려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지도부는 동학농민혁명에 임하기 이전부터 ‘반봉건’ 뿐만 아니라 ‘반외세’의 과제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러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일찍부터 다양한 세력과의 연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대원군을 접촉한 의도도 대원군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가장 풍부한 기사를 생산한 일본 「二六新報」의 1894년 11월 14일자에는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동도가) 그들이 믿는 대원군과 미리 기맥을 통하였느냐 여부는 의문이지만, 전봉준의 인물됨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처음 기포가 반드시 대원군을 기대하였기 때문은 아님이 명확하다. 다만 그의 지략이 풍부하고 동도의 의기(義氣) 역시 한계가 있으므로 이에 대원군이라는 목상(木像)을 대중의 눈앞에 세움으로써 조종(操縱)의 편리로 삼으려 한 것 같다. 전봉준은 동학농민혁명에 임할 때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란을 일으킨 다음 그 힘을 모아 전주감영을 점령하고, 나아가 매관매작을 일삼는 민씨 척족세력을 타도하면 팔도가 하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중들은 고을범위를 벗어나는 ‘반란’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자신들의 행위가 ‘반란’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다. 아직 반란의 대열에 동참하기를 꺼리던 민중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지지기반의 확대를 도모한 것이다. 이 점에서 대원군은 중요한 전술적 가치가 있었다. 대원군은 이미 실세한 정치가로 1885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운현궁에 유폐된 채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국왕의 아버지이자 당시 대중들로부터 가장 호평을 받던 정치가였고, 또 이미 10여년간 섭정을 한 경력이 있으며, 임오군란 시에도 일시적으로 섭정을 하여 정권을 장악한 경험이 있는 등 대중적 신망을 한 몸에 안고 있었다. 전봉준은 이러한 대원군을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이 결코 반란이 아님으로 강조할 수 있었다. 이점은 5월 4일 홍계훈에게 보낸 <피도소지(彼徒訴志)>에서 “국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맡기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늘 어찌 불궤라 하느냐”라고 한데서도 엿볼 수 있다. 또 전봉준은 생각과 행동은 대원군의 농민군 동원기도나 ‘정변계획’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전봉준이 제2차 기포를 결심하게 된 데는 농민군의 기포를 요구하기 위해 보낸 대원군 측의 밀사와 접촉한 것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이 보낸 밀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일본군의 일본의 침략의도와 일본군이 진압하러 온다는 계획, 일본이 친일적 개화파를 내세워 내정개혁을 추진하려 하나 그 진의가 의심스럽다는 점 등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대원군이 농민군의 재기포를 요구하는 밀사를 파견한 직후 또 다시 <효유문>을 보내 농민군의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전봉준으로서는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재차 봉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강점 사실을 알고 나서도 중앙정국의 동향과 청일전쟁의 추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재기포를 유보하여 왔으나, 대원군 측의 밀사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전봉준으로서는 농민군의 역량이 일본군에 맞서기에는 취약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국가가 멸망하면 생민이 어찌 하루라도 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국가와 멸망을 함께할 결심”으로 반일항쟁을 시작한 것이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