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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오전 11시가 되면 정읍시 수성동 근린공원에는 어르신들이 북적인다. 자장면 무료급식에 초대된 어르신들과 장애인등 500여명이 천막과 정자 밑 벤치에 자리를 잡고 맛있는 자장면을 기다린다.바로옆 임시 그늘막에서는 열댓명의 주부들이 더운 열기를 마다않고 가스버너 옆에서 자장면을 만들며 구슬땀을 흘린다. 무료 급식에 자원봉사를 나온 주부들은 정읍농협(조합장 유남영) 주부대학 동창생들과 부녀회장들로 구성된 '사랑나눔봉사단' 회원들이다. 자원봉사 회원들은 수입밀가루가 아닌 쌀로 반죽한 웰빙 면발에 사랑과 정성을 담은 양념까지 더하며 맛있는 자장면을 만들어낸다. 인근 주공아파트에서 왔다는 한 어르신은 "무료로 준다고 해서 대충 만들어내는 자장면이 아니라며 맛있는 자장면을 먹고나면 후식으로 뻥튀기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른 노인들과 함께 대화도 나눌수 있어 일주일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장면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운 어르신들의 고맙다는 인사말에 자원봉사자들은 피로를 잊고 바로 설거지와 뒷정리를하며 무료급식봉사를 마무리한다. 정읍농협 사랑나눔봉사단의 사랑과 온정이 넘치는 자장면 봉사활동은 지난 2004년 4월부터 시작되었다.자장면 무료급식 봉사를 이끌고 있는 김순임 봉사단장(65)은 "돈 주고 사먹자면 4000원밖에 안되지만 형편이 어려운 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통해 이렇게라도 별식 한끼 대접해 드릴 수 있어 우리가 더 기분 좋다"라고 말한다.사랑나눔봉사단의 자장면 봉사는 2004년부터 시작됐지만 사랑나눔경력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0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창기부터 회원 90명이 모여 발대식을 갖고 출범해 현재까지 자원봉사를 실시해 오고 있다.자원봉사단은 약 11년 동안 매일 점심도시락을 만들어 60여명의 독거 노인들에게 전달했으며, 지금은 매월 2회 밑반찬을 만들어 전달하고 있다. 또한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소년소녀가장들에게 교복을 맞춰주고 매년 김장김치를 담가 사회복지시설에 전달하기도 하며 사랑의 쌀독을 설치해 무료로 퍼 가도록 하는 등 다양한 사랑나눔활동을 펼치고 있다.봉사한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재미있고 즐겁다는 주부단원들의 한결같은 마음 씀씀이는 이들에게 농협중앙회 문화복지대상과 초아의 봉사대상을 안기기도 했다. 또 다른 나눔의 실천장소인 정읍농협 행복한 가게에서는 봉사자들이 재활용판매에 쓰일 헌 옷을 직접 수거하고 세탁하느라 손길이 바쁘다. 행복한가게의 단골 고객은 다문화가정의 이주여성들로 중고물품이 새로 들어오면 연락을 달라며 전화번호를 남겨놓고 간다.6년전 베트남에서 시집온 휴티하이(31)씨는"1000~2000원 싼 값에 물건을 구입할 수 있고 이 돈으로 남을 도울 수 있다니까 더 좋다며 친정에도 가지고 간다"고 말했다.지난 2006년에 개장한 행복한가게는 매년 2만여점의 중고물품들이 봉사자들의 손길을 거쳐 새 주인을 만난다. 기증하는 사랑나눔과 건전한 소비문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실천의 장이되고 있다.사랑나눔봉사단의 아름다운 이웃사랑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정읍농협 유남영 조합장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매년 소요되는 운영비 1억원 중 정읍농협에서 50%가 지원되고 나머지는 임직원들의 후원금과 행복한가게 수익금으로 충당한다. 유조합장은 "기업의 이익은 반드시 지역사회에 환원하여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며 정읍농협도 수익의 일부를 환원사업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사회적기업을 강조하는 유남영 조합장과 김순임봉사단장을 비롯한 90명의 주부봉사단은 어려운 이웃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며 다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랑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끝〉
"나눔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가정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이나 그 가족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의료기사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전북대학교병원 방사선사와 임상병리사, 치위생사, 치과기공사, 물리치료사, 작업치료사 등으로 구성된 '의기회(의료기사협의회회장 이규춘)' 회원들이 그 주인공이다. 병원과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고 실천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는 의기회는 현재 회원들만 2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지난 2005년 설립된 의기회는 올해로 8년째 병원을 찾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 등을 위해 휠체어와 유모차를 기증하고, 병원을 찾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등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의기회 회원들은 환자들의 진료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진료를 지원하는 부서에서 근무한다. 이렇다 보니 병원에 근간을 이루고는 있지만 직접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아닌 환자 치료를 위한 서포터 역할만을 하는 것으로 인식돼 있다고 한다.이규춘 의기회 회장은 "회원들이 환자 진료에 영향을 주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진료를 지원하는 부서이다 보니 회원들의 존재감이 부각되지 않는다"며 "처음 병원과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다 병원 근무자들의 학술발표 등 학습지원과 친목도모를 위해 출발해 현재는 봉사활동까지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의기회는 앞으로 회원들의 추천을 받아 주위에 어려운 이웃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또 병원 해외 의료봉사팀에게도 각종 지원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회장은 "남을 돕는 일은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이 더 기분 좋은 일이며, 주위에 알려지는 것보다 남들이 모르게 할 때 더 내실 있는 봉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처음 봉사활동을 병원 내부에서 시작해 이제는 회원들 모두 봉사에 대한 토대는 마련됐으며, 공감대도 어느 정도 형성된 것 같다"면서 "앞으로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 후배들이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청곡 임만주 선생(72)은 전주 한옥마을에서 '가훈 할아버지'로 통한다. 명절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면 1년 365일(명절 제외) 전주 한옥마을 은행로 사거리로 가방 꾸러미를 들고 출근한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썼던 관(冠)'정자관'(程子冠)을 쓰고 한복에 하얀 고무신까지 차려입은 모습이 꼭 서당 훈장 같다. 지난 7일 오후 1시, 선생은 어김없이 한옥마을로 나왔다. 무더위에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글로 더위를 이겨먹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간 써왔던 작품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행차했다. 비치파라솔 세운 뒤 뒤에 쳐둔 빨랫줄에 그간 써온 작품을 걸고, 글씨 쓰는 데 필요한 벼루먹화선지붓 등과 함께 열 댓가지 가훈(家訓) 샘플을 내놓는다."전주가 전통문화중심도시라고 하는데, 한옥마을에 전통적인 게 별로 없잖아. 어떻게 알고 전주시가 아트마켓 작가로 나를 선정했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매일 나오는 거여."다른 작가들은 관람객들이 북적이는 주말에만 나오는 반면, 선생은 날씨만 좋으면 무조건 나온다. 물론 요즘 같은 성수기를 제외하면 평일엔 파리 날리는 일이 다반사. 그렇다 해도 이곳에 나와 매일 글씨를 쓴다. 한 달에 먹을 세 개나 쓸 정도로 쉼 없이 매진 중. "아버지가 서당 훈장이셨거든. 7살 때 서예를 배웠지. 근데 평생 돈도 안 되는 글씨만 쓴다고 마누라나 새끼들이 안 좋아했어. 그래도 나이 들고 보니, 서예야말로 나를 살린 일이 아닌가 싶어." 스승 없이 글을 혼자 깨치다 보니 세간의 관심은 받지 못했으나, 평생 사명감을 갖고 해온 일. 지난해 한옥마을에 나오면서부터 작업이 더 즐거워졌다. 작업실에 갇힌 작가들이 대중들과 소통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면서 서예의 대중화에 한계를 보였지만, 작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가훈 써주기를 오히려 열심히 하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보람도 느끼게 된 것. 선생은 "고고한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어려운 서예 대신 한글을 병용하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서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특히 가정이 붕괴되는 현대사회에서 가정의 소중함을 깨치도록 하는 가훈 써주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개가 부귀영화, 소원 성취하는 문구를 써달라고 해. 결국 건강하고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건데 서로 너무 비슷하잖아. 그래서 샘플을 만들었지. 많이 추천해주는 건 '기산심해(氣山心海). 기운은 산과 같이 높고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어지라는 거지. 부모부부자식하고 맨날 다투면 쓰겠어? 이 글씨 써주면 다 좋아해." 이처럼 선생을 신기하게 보는 외국인 혹은 관광객들이 가훈을 써달라고 오면, 만원을 받는다. '공짜'로 해주면, 귀한 줄 모르기 때문이라나. 하지만 기분이 내키면 무료로 써주고, 전주예총의 전주예술상 시상식처럼 문화예술계 공을 세운 이들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선뜻 내주기도 한다. 어려운 여건에서 작업하는 이들에 대한 이신전심(以心傳心) 때문이다. 창암 이삼만 선생 추모 전국 서화대전 입선특선, 전국 서화 백일장 대상전 20여 차례 특선 등 수십여 차례 수상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도전을 멈출 줄 모른다.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지론 덕분에 초서에 있어 최고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서다.
독거노인과 조손가정 등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힘을 북돋우고, 웃음을 선물하는 소방관들이 있어 화제다.군산소방서 소방관들로 구성된 '행코(행복을 나누는 코끼리)' 회원들이 그 주인공이다.행코는 대야119안전센터 정은애 센터장(48여)과 소방관 2~3명이 지난 2009년 만든 봉사동아리로 어려운 이웃들의 집수리나 생필품, 학습비 등을 지원해오고 있다. 이들은 현재까지 독거노인 가정 등 집수리 12차례와 연탄배달, 조손가정 아이들에게 공부방 비용 등을 지원했다. 또 재능이 있는 학생들에게는 학습비 등을 장기 지원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봉사활동에 드는 비용은 모두 행코 회원들의 회비로 이뤄지고 있다.구조구급 출동 당시에 형편이 어려운 독거노인 가정 등을 눈으로 확인한 뒤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정 센터장이 동료들과 함께 행코를 만들었고 지금까지 자원봉사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는 게 회원들의 설명이다.현재 행코에는 20여명의 소방관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2009년부터 이 동아리에서 나눔 활동을 펼친 소방관만 1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직접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회원들은 성금을 모아 동아리에 전달하거나 가족들이 대신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는 것.정 센터장은 "홀로 사는 할머니의 집을 수리해 드릴 때에는 행코 회원들과 회원들의 가족, 지인 등이 참여했다"면서 "아이들도 봉사활동을 하며 보람을 느끼는 등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 가족들의 참여율도 높일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처럼 행코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소방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나눔을 몸소 실천해오면서 가족이나 지인 등의 참여를 유도하는 등 나눔 문화를 확산하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행코 회원인 대야119안전센터 오옥수 소방교(39)는 "행코의 모든 회원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면서 "보여주기 위한 봉사활동이 아니라 회원들의 마음에서 우러나 하는 것인 만큼 주변의 많은 도움도 필요하다"고 말했다.정 센터장은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등 나눔에 대한 씨앗은 가지고 있지만 계기가 없어서 못하는 것 같다"면서 "나눔은 할수록 재미있고 사람들이 많이 참여할수록 더 잘된다"며 많은 사람들의 봉사활동 동참을 기대했다.한편, 올해로 4년째인 행코는 오는 22일 군산에서 '행코 일일호프 자선바자회'를 열어 지금까지의 행코 활동을 돌아보고 재정비를 한다고 한다. 이날 자선바자회의 수익금 역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될 예정이다.
1987년은 한국 민주화에 큰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서울대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눈을 감았고, 6·10 대회 전날엔 연세대 이한열 군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를 계기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바로 6월 항쟁이다. 6월 항쟁 25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임숙정(30·한국고전문화연구원 연구조교)씨를 만났다. 임 씨는 10여 년 간 민족문제연구소에 관심을 갖고 소액 기부와 회원 활동을 해오면서 도내 친일파들을 재조명하는 논문과 연구에 매진 중이다. 결혼·연애가 거의 전부인 것처럼 비춰지는 20~30대와 좀 멀찍이 떨어져 있다. 효순이·미선이 사건에 항거하는 관촌 중학교를 응원하기 위해 직접 방문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엔 교내에 자신의 노트북으로 노 대통령 영상을 틀어놓고 그가 사둔 국화로 학생들이 헌화하게 하는 등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그를 두고 주변에선 '좌파 아니냐'면서 정치색으로 덧씌웠다."심지어 탄핵 반대 촛불시위에서 발언을 한 게 뉴스에 찍혔는데, 다음날 보니까 제가 '노사모' 회원으로 나가더라구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옳다고 생각하는 걸 이야기한 것 뿐인데…."서정주 시인을 존경하는 그는 본래 권정생 선생 같은 아동문학가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대학교 입학까지 그 꿈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전주대 언어문학부에서 접한 친일문학론은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서정주 시인이 친일시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분노가 치밀었어요. 학교 교육 과정에선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서정시도 썼지만, 친일시도 썼다고 했으면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이대론 문학을 할 수 없겠다 싶었죠. 그래서 사학을 전공하게 됐어요."역사의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다. 일제 식민의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결과 우리 사회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그는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존경할 수 없는 부의 재생산·존경할 수 없는 지도자의 양산 등은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 중 하나"라고 여겼다. 그가 전북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주 시인의 친일시 알리기, 친일파로 고창의 대지주였던 홍종철 만행 재조명 등에 힘을 쏟은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같은 활동은 연구로도 연결 돼 박사논문을 쓰기 위한 밑작업이 되고 있다. 이들이 나라를 팔아 축적한 부가 어떻게 세습됐으며, 권력을 유지해올 수 있었는지 밝히는 게 관심사. "교육과정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학생들에게 떠오르는 독립운동가를 대보라고 하면, 김좌진 유관순 안중근 등만 꼽거든요. 독립운동가였음에도 좌익 색깔을 띠는 사람들은 철저히 잊혀집니다. 친일파 문제를 비롯해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알려주는 교육자가 되고 싶습니다."상대를 공존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으로 본 세월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또는 우리에게 '근대사'는 넘어야 할 대상이다. 근대사를 통해 죽이지 않으면 죽는 약육강식의 사회가 아니라, 약자를 보듬고 서로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그는 요즘 최고의 직업으로 꼽히는 교사직도 만류해놓고, 완벽한 박사논문을 위해 2년 째 연구 중이다. "국립대도 아닌 지방 사립대를 나왔지만, 일제 강점기 국내 최고 연구자가 되고 싶습니다. 우리 학생들의 꿈과 희망이 되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것으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상대적으로 쉽잖아요. 매달 조금씩 계속해서 내기만 하면 되니, 육체적으로 찾아가서 하는 봉사활동보다 훨씬 수월하지 않은가요?"3년째 매달 1만원씩 개미기부를 하고 있는 전주 서신중학교 홍남정 교사(여44과학)는 나눔활동이 별로 어려운 게 아니라며 손사래부터 쳤다.홍 교사가 이처럼 남을 돕게 된 것은 지난 2010년. 당시 같은 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하던 김용추 교사의 뜻하지 않은 제안으로 시작됐다.김 교사는 "우리 학교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있으니, 가까이에 있는 우리들부터 조금씩 내서 도와주는 게 어떻겠냐"고 동료 교사들에게 제안했다.이에 홍 교사 등 전주 서신중에 근무하던 동료교사 7명이 동참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작지만 질긴 개미기부가 시작된 것이다."당시 참여 교사 대부분이 체육 교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생각에서 좀 어색하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그리고 홍 교사는 지지난해와 지난해, 올해 매달 한번도 빠짐없이 월급 봉투에서 1만원씩 떼어내 전라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전달하고 있다.월 1만원에 불과한 적은 금액이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이 있듯이 나눔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에 의미를 둔 채 참여하는 것이다.이 돈은 처음 손을 잡은 7명의 교사들이 낸 기부금과 합쳐져, 처음 지원했던 학생(현재는 모 고교 재학)에게 매달 7만원씩 지원되고 있다."의미도 있고, 워낙 소액인지라 부담도 안되고, 월급에서 떼어내는 것이라 번거롭지도 않으니, 중간에 그만 두어야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홍 교사는 가정에서도 큰 아이의 기부를 돕고 있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인 딸이 '굿네이버스'를 통해 매달 1만원씩 기부하는 것을 후원한다.이 또한 작은 금액이고, 이마저 자신의 용돈 5000원에 홍 교사가 도와주는 5000원을 합친 것이지만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현재 유치원생인 둘째 딸도 엄마와 누나의 기부선행을 보고, "자신도 하겠다"며 계속 조른다고 한다. 온 가족이 나눔문화 확산에 나서는 셈이다.약간의 정성으로 참여하는 '개미 기부'이지만 집안 모두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에 감사하고, 적극적으로 나눔 전도사로 활동하게 됐다."앞으로는 학생들과 함께 나눔활동을 전개하고 확산시킬 계획입니다. 이 또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본분이자 의무라고 생각하니까요."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이발봉사에 전력을 쏟는 일명 '가위손 경찰관'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주간 근무 날을 제외하곤 매일 같이 이발봉사에 나서고 있는 전주 덕진경찰서 역전파출소 김종후 경위(51)가 그 주인공이다.김 경위가 이발봉사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 정읍경찰서 태인파출소 근무할 때부터 이발봉사를 시작한 그는 전주와 정읍을 오가면서 틈틈이 시간을 내 이발봉사에 참여했다.올 2월 전주 덕진경찰서로 발령이 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에 임한 그는 한 달에 주간 근무 날 열흘을 제외하고 야간 근무 날 오전이나 비번 날 오전오후 2~4시간 씩 요양원 등을 찾아 머리 손질을 해주고 있다.그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장인어른과 교통사고 후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숙부를 위문하러 요양원을 찾았다가 한 봉사단체에서 이발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군 복무 당시 3년 동안 소대 이발병으로 소대원들의 이발을 책임졌다는 김 경위는 "요양원에 계신 노인들을 위해 이발봉사를 하는 봉사자들을 보고 고마움을 느꼈다"면서 "군 시절 소대원들의 이발을 도맡아했던 경험이 있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김 경위가 본격적으로 이발봉사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전북 한사랑봉사단 이성기 회장(63지체장애4급)을 만나면서부터다.이미용사 자격증이 없던 김 경위는 한사랑봉사단의 35사단 신병교육대 훈련병을 대상으로 한 이발봉사에 참여해 이 회장으로부터 소질을 인정받은 것.이후 봉사단의 일원으로 이발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그는 김제 신세계 요양병원과 완주 마음사랑 요양병원, 전주 참사랑 낙원 요양병원, 전주 효사랑병원 등 노인요양병원과 요양원, 35사단 신병교육대 등에서 봉사 단원들과 함께 이미용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올 들어 4월말 현재 45차례에 걸쳐 500여명의 노인들과 군인들에게 무료 이발 봉사를 펼쳤다고 한다.쉬는 날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이 더 피곤하다는 그는 "이발봉사를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하다"면서 "내가 집에 있으면 가족들이 '봉사활동 안 하냐'고 할 정도로 이발봉사는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고 설명했다.천주교 신자인 김 경위는 평소에 남을 배려하고 친절을 몸소 실천하는 경찰관으로 소문이 자자하다.그의 봉사활동 소식이 경찰 내에 알려지면서 매년 덕진경찰서에 선정하는 '자랑스러운 덕진경찰'에 올해의'봉사왕'으로 선발돼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봉사회 일원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돕는 것뿐이라는 김 경위는 "뜻이 맞는 경찰관들과 함께 경찰 내부적으로 이미용 봉사대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펼치는 게 목표다"면서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치는 게 진정으로 주민과의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지난 19일 오전 11시 전주 경기전 앞. 매주 주말 관광객들에게 자전거를 무료로 빌려주는 큰바위자원봉사회 회원 박창환(46·전북장애인체육회 총무과장)씨를 만났다. 6년 째 국제교류협의회·큰바위자원봉사회 회원으로 궂은일을 도맡아 오던 그는 "남들도 다 이만큼은 한다"면서 인터뷰를 부담스러워했다. 거액을 기부한 것도, 자원봉사단체를 조직해 두각을 드러내 활동해온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정성 있는 활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고 있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 뒤 직장을 구하기 위해 처음 접했던 게 레크리에이션 수업이다.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직장 보다는 편안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싶었다. 수줍음이 많은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1991년 레크레이션 강사 자격증을 따면서 도내 소외지역을 찾아다니게 됐다. 어찌 보면 자원 봉사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셈이다. 자원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국제교류협의회·큰바위자원봉사회에 가입하면서부터. 레크레이션 강사로 각종 행사 사회를 보는 일부터 시작해 빨래·청소, 나무 심기, 자전거 대여 등 거창하지 않고 소소한 일까지 다양하다. 각 시설별로 연계돼 있는 봉사단체들이 있으나,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예상보다 많기 때문이다. "장애인 체육회에 와서 보니까, 이동권 보호가 가장 중요한 일이더라구요. 그런데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침상에 누워있는 어르신들은 얼마나 답답하실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목욕시키는 일이 가장 보람된 일 같습니다."그가 생각하는 봉사는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참여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 그는 "봉사활동을 하면 내가 위안을 받고 마음이 평안해진다"면서 "누구를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7년 째 전주지방검찰청 범죄예방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 달에 한 번 보호관찰자들을 상담·관리 감독을 해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학교 폭력과 같은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하지만 최근 여론에서 집중 보도되고 있는 학교 폭력이 사회 폭력·정치 폭력 등에 대한 관심을 끄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도 학교 폭력은 존재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죠. 하지만 어른들이 사회 생활하면서 휘두르는 언어·정치 폭력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도, 그로 인해 심리적·물리적 고통을 겪는 학생도 둘 다 피해자입니다. 문제라는 인식도 중요하지만, 가정교육을 바로 잡는 처방을 찾으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가정에서 해오고 있는 일은 매주 가족회의를 진행하는 것. 그는 "아이들의 억눌린 감정을 관찰하고 충분히 소통할 시간과 공간을 필요하다고 판단해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물론 매주 이 자리에서 가족들과 봉사활동 일정을 짜곤 한다. "가끔 전 나중에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재평가될까를 떠올려보곤 합니다. 돈을 많이 번 재벌을 기억하게 될까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박애주의자를 더 기억하게 될까요. 저는 후자라고 봅니다. 다들 어렵게 여기지 말고, 주변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손을 건네는 일부터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누군가는 그 도움으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니까요."
"기독교인은 십일조(十一租)를 합니다. 나도 내가 가진 것의 10분1을 나누자는 생각에서 이렇게 내가 가진 재능을 사회에 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사단법인 달란트 연극마을 최경식 대표(48). 마임이스트로 불리는 그가 판토마임 공연활동을 통해 나눔 활동에 나서는 이유다.최 대표가 마임을 통해 사회봉사에 나서게 된 것은 지난 2006년, 10여 년간 천직으로 여겨 온 연극배우 활동을 접고, 마임에 눈을 돌리면서다.이에 앞서 최 대표는 극단 '황토'에서 10년간 연극을 했다. 연극을 그만두기까지 그는 이 분야에서 나름대로 명성이 있는 배우였다."마임은 대사가 없습니다, 따라서 언어장벽이 없습니다. 또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희망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이 든 것이죠"그는 마임을 가지고 외로움에 떨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이나 병마와 싸우는 말기암 환자들을 찾아간다. 연간 200회 정도 공연하고 있다.여기에서 희망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는 당신들을 사랑한다' '당신들은 사랑받기에 충분하다' '희망을 가지고 살라'등을 몸으로 얘기하고 노래한다.때로는 물방울로 때로는 풍선으로 때로는 삐애로 복장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지만 결국은 '희망'이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역은 물론 국내에서도 마임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인지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니까요"그는 마임협회 선배 등 국내 전문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녔지만 당시 우리나라 마임수준이 열악한 터리 별로 신통치가 않았다.또, 폴란드 출신의 스테판 니즈알코프스키의 공연 등 세계적인 마임아티스트의 공연을 찾아다녔지만 최고 수준의 마임 기술을 배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따라서 혼자 밤을 새우며 책을 보고 공연을 보면서 마임 기술을 하나하나 습득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마임이스트로 발전하게 됐다."마임기술이 일정수준 올라왔다고 생각되는 순간, 제 본연(?)의 길이 생각났죠. 희망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그는 2010년 달란트 연극마을을 만든다. 혼자가 아닌 집단으로 나설 경우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가는 데 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여기에는 연극배우는 물론 교육자, 목사, 직장인, 시민사회단체 활동가까지 각계각층에서 일하는 10여 명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이어 연말마다 '워밍 투게더'란 공연을 통해 기업체와 불우이웃이 만나는 공간을 마련한다. 기업체는 공연티켓을 구입하고, 수익금은 불우이웃에 지원하는 것."2년째 이어온 이 행사는 13일간 계속해서 진행됩니다. 이를 통해 거둬들인 수익금으로 하루에 한 가정씩 50만원을 지원해주구요"그는 앞으로 생명과 환경, 생태계 등을 주제로 한 공연을 만들고 싶어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는 물론 우리가 처한 환경을 알려주고 싶어서다.그동안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가면 만드는 사람(체인지업)' 등 소외계층이나 사건사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작품을 선보여왔다.하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처한 지구의 현실을 고발하고,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보다 행복하게 살수 있는 방법을 판토마임을 통해 전달하겠다는 생각이다."나눔문화 확산, 그 것이야 말로 제가 마임 활동을 하는 이유고, 세상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또 하나의 정답이 아닐까요"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게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다문화가정의 부모와 아이들에게 전통매듭과 규방공예를 가르쳐 우리 전통 문화를 알리고, 전통공예품 판매 수익으로 저소득층 등 차상위계층의 집을 고쳐주는 등 나눔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박정란 대표(45·여).지난 1989년 매듭을 시작한 박 대표는 한옥마을 내에서 공방 '세요각시'를 운영하며 나눔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해 오고 있다."'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에 가진 것은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재능을 나눠주는 것은 결코 큰 일이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그는 올해 초 공방식구들과 함께 '선물'을 주제로 한 '세요각시 회원전'을 열었다. 평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주변인들에게 정성스레 수놓은 작품을 '선물'로 주겠다는 취지였다. 전시회를 통해 얻은 수익금은 이웃들을 위해 쓰기로 결정하고 한 차상위계층 가정을 선정해 집을 리모델링 해줬다고 한다.박 대표는 또 다문화가정의 부모와 아이들에게 전통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그는 오는 6월에도 임실 다문화가정을 방문해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개할 계획이라고 한다.박 대표가 나눔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대학교 시절 한 장애인시설에서 입양을 기다리고 있던 구순구개열(언청이)이라는 질병이 있는 아이를 만나면서부터다. 당시 그 아이는 언청이라는 이유로 입양이 되지 않고 있었으며 수술비는 100만원 정도로 시설에서는 병원비를 감당하기 힘든 형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박 대표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수술비를 모금해 시설에 전달했고 수술을 마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양이 됐다고 한다.이와 함께 매년 5~6차례 가난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놓치는 학생들을 선발해 전액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경남 산청 지리산고등학교에서 지인들과 함께 전통자수, 목공예, 북아트, 규방공예 등을 가르친다고 한다.'나눔은 어려운 게 아니다'고 말하는 박 대표는 "사람들 모두 나눔을 실천하려는 마음은 있는데 연결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 같다"면서 "누구나 재능과 배울 점 등이 있으며 자신이 잘 하는 것을 나누면 그게 바로 기부"라며 미소 지었다.
문성숙(41)씨는 어린 시절부터 말수가 적고 숫기가 없었다. 어머니는 내성적인 그를 무릎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넋을 잃고 이야기에 푹 빠졌다. 고향인 경남 거창을 떠나 남편 따라 전주에서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그가 예전의 그처럼 이야기를 좋아하던 아이들을 보면서 뒤늦게 동화 구연을 시작했다.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우리 아이들이 유년 시절을 즐겁게 보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저처럼 후회하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도록 동화 구연의 필요성을 알리는 성인 강의를 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004년부터 전주시립도서관에서 동화 구연아동미술 지도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중급 지도자 과정까지 수료한 그는 동화 구연가로 활동하는 선후배들과 함께 2005년 열린어린이연구소를 차렸다. 이곳저곳에서 활동하는 동화 구연가들이 정보도 나누고 힘을 모아 봉사도 하자는 소박한 취지. 30여 명의 회원들은 동화를 쉽고 재밌게 접하는 강연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무리 재밌는 책을 가져다 줘도, 안 읽으면 소용이 없잖아요. 진짜 눈앞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하면, 저 멀리서 놀던 아이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달려와요. 1시간이 후다닥 지나가 버립니다."지역에서 활동하는 동화 구연가 상당수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아주 다른 목소리로 내는 법, 띄어 읽는 법 등을 지도 받고 대회에 나가 수상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내 일처럼 기뻤다". "전 '거북이'였거든요. 동화구연대회에서 입상하기까지 '삼수'나 했어요. (웃음) 연단에 올라갔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거예요. 동화가 생각이 안 나서 버벅거리다 내려오고 이듬해 같은 실수로 또 내려오고. 다들 대회 나가서 떨어지면 창피해서 안 나간다는데, 교수님께서 격려해주셔서 포기할 수가 없었어요." 동화 구연에 관한 오해 중 하나가 단순히 동화를 대신 읽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술체인 동화를 대화체로 바꾼 뒤 구연자가 등장인물을 자신에게 맞게 각색하는 작업을 거친다. 그는 "교훈적인 걸 가르치는 동화가 아니라, '내가 동화 속 주인공이 된다면 어떨까'하는 데 주안점을 둬야 한다"면서 "열등감이 심한 아이에게는 열등감을 다룬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위로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는 "동화 구연에 한 번 빠지면 다들 전도사가 된다"면서 "할아버지는 물론 며느리까지 봉사활동을 다니는 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관심을 가장 많이 가져야 할 젊은 남편들이 동화 구연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는 게 아쉽다고도 했다. 그는 "남성들은 목소리가 굵은 데다 안정감 있는 저음이기 때문에, 귀를 확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면서 "엄마보다도 아빠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자녀들이 안정적인 정서를 갖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편들이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면, 학교 폭력왕따 등과 같이 정서적으로 장애를 겪는 아이들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문제가 크게 줄 수 있다고도 했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연구소는 동화 구연을 널리 알리는 일 외에도 시민단체 '굿네이버스'와 성폭력 예방을 돕기 위한 인형극도 정기적으로 올리고 있다. 보통의 인형극이 배우가 무대에 오르는 대신 인형만 조작하는 걸 보여주는 데 반해 이들의 인형극은 배우들이 직접 무대에 서서 인형을 다룬다는 게 차이점. 그는 "동화책을 읽고 싶어도 읽기 어려운 문화 소외계층 아이들을 위해 순회 인형극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전주삼천지역아동센터(5월23일)를 시작으로 인형극을 보여주면서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싶다"고 했다. 돌아오는 어린이날, 어린이들에게 동화책을 선물하면서 동화 구연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 그는 "동화는 누구에게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열쇠"라면서 "아이들과 마음의 빗장을 열고 소통하는 날이 됐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우리지역에 다양한 영상인프라가 산재해 있습니다. 이를 청소년들의 올바른 정서 함양과 기회 제공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덤벼들었죠."도내 청소년 영화의 산파역이자 지킴이인 이병노 전북청소년영화제 집행위원장(55·전주공고 미술 교사)은 전북과 청소년 영화의 필연성부터 설명했다.이 집행위원장이 전북청소년영화제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3∼2004년.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 스탭(편집 분야)으로 참여하면서 큰 영화제(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우리 지역에서도 충분히 승산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됐다."우리 지역은 국제영화제란 큰 자산이 있습니다. 이를 활용할 경우 청소년들에게 재미 있는 영화 놀이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특히 미디어교육의 경우 잘만 활용하면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보다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아이들이 우선 시나리오를 쓰면서 문학에 대한 능력을 키우게 되고, 사진과 미술분야를 대하면서 비주얼 분야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서로 간에 팀워크를 이루면서 협동심과 의견조율 능력도 기를 수 있기 때문.이후 그는 주변 교사들을 모아 지난 2005년 '전북영상교육연구회'란 교과연구회를 만든다. 여기에는 나이, 출신, 성별을 불문하고 평소에 영화나 청소년에 관심이 있는 교사 20∼30명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전주영상위원회와 전주영상정보진흥원 등의 전문가들로부터 영화와 관련된 지식과 기술을 배우게 된다.교육은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오후 6∼7시부터 새벽 1∼2시까지 하루고 빠지지 않고 거의 매일 이어졌다."당시 저는 고창지역 학교에 근무했습니다. 집은 고향인 부안에 있었고요, 고창에서 부안으로, 전주로 미친 듯이 영화를 배우기 위해 뛰어다녔죠."뿐만 아니다. 또 다른 한 축인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영상분야에 관심을 보이는 학생들이 많은데도 불구, 이들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기 때문. 또 청소년 영화제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만들 줄 아는 청소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방과 후에 아이들을 학교(전주공고)로 불러 영화기술을 전수했다. "모두들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선생님들, 학생들 모두 청소년 영화제 하나만 보고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전북청소년영화제가 지난 2007년 첫 발을 내딛는다.너무 튀거나 화려한 영화제는 아니었지만 지역 청소년들이 영화를 통해 서로 호흡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영화제가 만들어진 것.그리고 현재 국내에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다음으로 큰 청소년영화제로, 다른 지역에서 부러워하는 청소년영화제로 전북청소년영화제를 키워냈다.실제 연간 30∼40편이 출품되는 전북청소년영화제는 경기와 부산, 전남 등 다른 지역 청소년들이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전국규모 청소년영화제로 몸집이 커졌다."때론 힘이 듭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능력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생각하니 너무나 행복합니다."그는 한국사진작가협회에 가입할 정도로 사진분야에 관심이 많다. 이것이 영상분야의 관심으로 이어졌고 전문가 수준까지 성장했다.이를 통해 전북청소년영화제를 만들었고, 전주국제영화제에는 민간홍보에 참여하고 있으며, 전북독립영화제 감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뿐만 아니다. 부안시민문화모임 '노을'을 만들어 지역 주민들에게 미술과 조각, 도예, 서예, 사학 등을 가르키고 있다.다양한 나눔활동으로 힘 들만도 하건만 아직은 괜찮다는 그다."내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우리 사회가 보다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면 제2의 제3의 청소년영화제를 만들고 또 만들 것입니다."
음악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하는 경찰관들이 있어 화제다.그 주인공은 전북지방경찰청 소속 6인조 경찰관밴드 '패트롤(patrol)'.지난 2010년 5월에 결성된 패트롤은 아직 새내기 밴드지만 각오만큼은 프로밴드 못지않다. 패트롤은 전주 덕진경찰서 박성엽 경사(47베이스회장)와 김주희 경장(32보컬여), 전주 완산경찰서 김용국 경사(40드럼)와 홍정욱 경사(43보컬기타), 완주경찰서 신창옥 경사(49기타), 지방청 오현정 주무관(28키보드여)이 멤버다.지난 14일 찾은 전주 송천동의 한 상가 지하연습장에서 이들은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개인의 연주 실력을 내세우기보다는 누군가를 위한 공연을 준비한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뿌듯해지기 때문이란다.당초 이 밴드는 전북경찰 홍보 차원에서 결성됐지만, 홍보뿐만 아니라 주변의 소외계층을 돕기로 영역을 확대해 어려운 이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구성원들은 모두 음악에 관심이 있어 개별 연습을 해오다 밴드를 결성한 뒤에는 공동으로 연습을 하고 도내 복지시설 등을 찾아 위문 공연을 벌이고 있다. 비록 정기적인 공연은 아니지만 서로가 시간이 맞고 짬이 나면 곧바로 위문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의 하루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다.각종 사건 사고현장에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를 보내는 패트롤은 매주 1차례씩 정기 모임을 갖고 호흡을 맞출 정도로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고 한다. 아직 노련미와 완성도를 높이지 못해 사람들 앞에서 공연한다는 게 쑥스럽기도 하다는 이들은 "우리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웃고, 즐기면서 근심과 걱정을 잠시나마 떨쳐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며 "공연을 자주 하지는 못하지만 틈틈히 복지시설 등을 방문해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고 있다"고 밝혔다.베이스 기타를 담당하는 박 경사는 "시간이 부족해 위문공연을 많이 하지는 못하지만 틈틈이 연습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있다"며 "정기공연을 열어 시민들과 함께하는 경찰관밴드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보컬 겸 기타를 맡고 있는 홍 경사는 "부족한 게 많지만 앞으로는 위문공연뿐만 아니라 학교폭력 예방 홍보 차원에서 학교 축제나 길거리 공연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이들은 위문공연에서부터 경찰 홍보활동까지 진행하다 보니 여러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밴드 공연으로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를 보고 있다는 설명이다.이들은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점, 소외된 이웃들에게 기쁨을 주는 점, 시민들과 소통하며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음악이 딱딱한 경찰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주민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디딤돌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이들은 경찰이 주민들과 소통하다보면 범죄는 자연히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주 고사동 일대가 전북 인디밴드의 '분만실'이 돼가고 있다. 쇠락한 구도심(전주 프리머스 극장 일대)에 인디밴드 공연장 겸 클럽'레드 제플린'이 고꾸라졌다가 2010년 재개업했고, 2009년 문을 연 'Deepinto'는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개방적 분위기의 클럽으로 입소문이 나 있다. 2년밖에 안 된 '몽크'는 재즈 풍에 가까운 인디음악과 가벼운 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카페나 클럽이긴 해도 무대에 서고, 판매량이 시원찮아도 꼬박꼬박 앨범을 내는 인디밴드들의 실체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레드제플린'을 운영하면서 도내 인디밴드계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 정상현씨(40)가 2002년 인디밴드 공연기획사'아트 스페이스 레드제플린'을 연 것도 이런 착잡한 심정에서 저지른 일이다. '아트 스페이스 레드 제플린'은 가수를 만들고 키워내는 기획사가 아니라, 가뭄에 콩 나듯 의뢰해오는 인디밴드 공연을 기획주선해주거나, 앨범 제작을 도와주는 인큐베이터에 가까운 곳. 서른이 넘으면서 밴드'크리에이션' 활동을 접은 그는 아이돌 댄스 가수와 수십 년 경력의 록밴드, 실험정신 강한 인디밴드가 대중의 사랑을 고르게 나눠 먹고 자라는 생태계가 없는 우리나라에선, 더구나 지방에선 "인디밴드로 살아간다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도 현재 악기를 판매하고 대여하는 '기타 플랜트' 등을 운영하면서 어려운 밴드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악기를 빌려주는 일도 하고 있지만, 돈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 "악기와 장비 모두 싣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설 수 있는 무대가 많지 않아요. '비주류 음악'이라는 편견 때문에 음악이 돼도 '헐값'에 팔립니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인디밴드들이 전용 공연장 겸 클럽을 차리는 겁니다. 하지만 돈이 안 되니까, 그게 문제죠."현재 전북에 있는 인디밴드는 '레이디스앤젠틀맨'(Ladies & Gentlemen),'휴먼스'(Humans),'크림'(Cryim) 등 10개 팀. 그는 "전북에는 '10cm'나 '장기하와 얼굴들' 등처럼 이러다할 인지도를 갖춘 팀은 아직 없지만, 발전 가능성을 믿는다"고 했다. 대개 음악학원 대표, 대학 강사, 회사원 등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10년 이상을 이 바닥에서 버텨온 밴드들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처음 기획한 콘서트'메이드 인 전주'로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등을 돌면서 전주의 인디음악을 알리게 된 그는 "다른 지역에 비해 딱히 '튀는' 음악은 없지만, 각자의 색깔과 느낌이 각각 다른 음반적 색깔을 완성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이들의 공연장에 40~50대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는 "70~80년대 락이나 팝에 심취돼 있던 이들이 돈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니까 뒤늦게 이곳을 찾는 것 같다"면서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을 고민해 인디가 어떻게 영토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 지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달에도 그는 또 한 차례 판을 벌였다. 전주국제영화제 기간(27일~5월3일)에 '레드제플린', 'Deepinto', '몽크'가 서울의 유명한 인디밴드들과 전북의 인디밴드들이 다양한 음악을 펼쳐놓는 무대를 마련하는 것. 1만원 짜리 티켓만 사면, 누구든지 이 세 곳에서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번 무대엔 최근 '나가수'에서 출연해 더 유명세를 탄 5인조 밴드'비갠 후'와 윤도현 밴드도 실력을 인정한 3인조 여성 밴드'러버더키' 등이 전주를 찾는다. 전북에서는 세련된 영국 락을 구사하는 '레이디스앤젠틀맨'과 잔잔한 모던락을 소화할 '휴먼스'(Human's), 락힙합일렉트로닉까지 두루 섭렵하는 '나인이얼즈'(9 Years) 등 실력파 밴드들이 대거 출사표를 냈다. 이들이 인디음악에 관한 편견을 깨고, 한국 대중음악의 굵은 줄기를 잇는 그 '무엇'이 돼주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줄곧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해온 가운데 재능기부로 참여하는 게 수월할 것 같아서 이렇게 나서게 됐습니다. 특히나 문화 쪽은 제 관심분야 중 하나고요."지난 25일부터 1일까지 전주공예품전시관 기획관에서 재능기부 기획 전시회 '창(窓)을 열다'를 연 천주교 전주교구 김봉술 신부(47)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김 신부는 23년 전부터 주변 사람들과 기부관련 모임을 가져왔다. 그러던 중 지난해 연말, 크리스마스 때 쯤 '놀자 재능기부'라는 모임을 만들어 기부 실천을 본격화한 것.그리고 첫 기부가 이번 기획전시회다. 서예가와 양초공예가, 닥종이 인형작가, 한국화가, 도예가 등 8명이 `참여한 이번 행사는 판매 수익금을 기부하는 형태로 운영된다."첫 프로젝트로 한센인을 정했습니다. 단순히 그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이들이 거주하는 정착지의 환경 개선과 이들이 보다 편안하게 지내도록 공동체를 조성하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김 신부가 주도하는 '놀자 재능기부' 모임에는 요리사에서 플로니스트, 건축사, 음악가, 서예가, 화가 등 4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전문성에 국한하지 않고 참여했다. 이들은 매해 또는 매달, 매주 시간에 관계없이 기부에 나서기로 했다. 모두 다 바쁜 몸이지만 각자 가진 재능이나 특기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남다른 뜻을 가지고 의기투합한 것이다.그리고 첫 활동지를 고창의 한 한센인 정착 마을로 정한 가운데 앞으로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한센인과 소통하고 함께 해 나간다는 계획이어서 주목받고 있다."꽤 쏠쏠합니다. 저희 회원들이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 알려졌는지, 많게는 하루에 500600명까지 시민과 관광객이 찾아와서 이것저것 많이들 사가지고 가니까요."이번 전시회에는 주로 서예작품과 양초 부채 등을 판다. 작품 당 몇백만원까지 나가는 비싼 작품도 있지만 개당 1000원에 불과한 저렴한 부채나 컵까지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덧붙여 크로키 등 다양한 참여행사와 체험행사도 펼쳐지고 있다. 김 신부도 직접 자신의 사인과 그림을 넣은 컵을 만드는 등 팔을 걷어부친 가운데 성황을 이루고 있다.여기에서 판매되는 것은 생활자기와 도자기에서 부채, 그림, 양초공예, 글씨 등 다양하다. 돈으로 따지기가 뭐하지만, 좋은 일을 위해 쓴다는 것이니 그 가치는 무한하다."신부의 길에 들어선 때부터 이미 남을 위해 살겠다는 것 즉, 사회 봉사를 생각했습니다. 특별하다기 보다는 이미 평소에 생각해온 것을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셈이죠."김 신부는 지난 1993년, 28살의 나이에 신부의 길에 들어섰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영향도 있겠지만, 부모님의 남다른 '따뜻한 사랑'이 그의 큰 운명을 결정했다.농사로 8남매를 키우던 그의 부모님은 누구에게나 관대했다. 자신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보부상 등 외부인이 찾아오면 식사 대접은 물론 잠까지 재워주는 관대함을 잃지 않았다.이를 보고 자란 김 신부는 나도 크면 누군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정식으로 신부의 길에 들어서며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다."사회복지를 전공으로 택했습니다. 제가 신부의 길에 들어선 것도, 전공으로 사회복지를 선택한 것도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결정하게 된 것이죠."신부에 들어선 이후에도 그는 기부 또는 나눔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 신부 등 45명과 함께 지난 2005년부터 해비다트(사랑의 집 짓기)와 같은 운동을 벌이고 있다.천주교전주교구 사회사무국 내 카리타스봉사단의 지도신부를 맡고 있다. 지난 2006년 만들어진 이 봉사단은 신부와 시민 등 100여 명이 참여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친다.뿐만 아니다. 정읍에서는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을 위해 성당 안에 카페를 만들었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장학금과 복지시설 후원금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또한 문화 소외지역의 하나인 정읍 신태인에서 7년여간 살면서 음악이나 미술, 연극 등 전시회를 자주 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기부문화에 동참하고 확산시키고 있다."당분간은 한센인을 도와나갈 계획입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최근 남북관계 경색으로 어려움에 처한 새터민들을 도와나가는 등 앞으로도 기부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입니다."
한동안 안 보이는가 싶던 그가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했다. "노송천 일대를 열심히 걷고 다닌다"던 그를 만난 게 지난 16일 전주 시내 한 찻집. 얼굴이 더 새까맣게 그을려진 그는 자신의 몸집 만한 커다란 배낭을 메고 등장했다. 시시때때로 그의 일상을 밀고 들어오는 동네 아이어르신들의 '민원' 해결을 위해 그의 가방엔 묵직한 노트북을 비롯해 온갖 서류 등이 가득했다. 도심재생지원센터 연구원으로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채성태(38문화공간 싹)씨는 '문화 코디네이터'다. 그는 시민들과 예술가들의 가교 역할을 해주는 프로그램을 기획해 '판'을 벌이곤 한다. "'돈'이 없으니까 사업 못한다"는 핑계가 무색할 만큼 직접 발로 뛰어서 자칭 '대박' 프로그램을 내놓곤 했다. 전주 서신동 10~20번지 일대에 위치한 재뜸마을이 그 대상. 그는 마을 공동체 문화를 회복하기 위한 문화적 접근을 시도해왔다. 이를 테면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이를 예방하기 위한 연극을 만들게 하고, 도서관 개관을 축하하는 노래를 만들어 학생들이 달달 외우도록 하는 경연대회를 여는 방식. '과연 통할까?'하고 의구심을 품었던 이들에게 다양한 시도가 그 일대 학교 동아리 프로그램 등에 반영되면서 "진심은 결국 통하게 마련"이라는 동화책 같은 교훈을 던져줬다. 물론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9년엔 문화공간 싹이 장애우를 보호하자 땅값 떨어진다며 항의하는 주민들과 갈등이 빚으면서 각종 지원금이 끊겨 전기가 중단될 상황까지 처했다. 그 때 그는 지원을 포기하는 대신 지역민과 나누면서 변화를 일궈가는 방식을 배웠다. 결국 주인은 주민들이고, 전문가들은 이들을 위한 협조자 역할만 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은 그때 생겼다.그렇다면 그가 노송천으로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뭘까. 전주시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추진한 노송천 복원과 중앙시장 현대화 사업을 보면서 정작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주 한옥마을에 온 관광객들은 야간 볼거리가 없다고 불만이고, 노송천에 볼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서 그는 노송천 길목에 위치한 중앙시장이 저녁만 되면 문을 닫아 그 입구가 차단돼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바로 주민상인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 목소리로 요구한 것은 시장에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는 것.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지역 예술가들을 불러들여 각종 사업을 추진하도록 제안한 이유다. 그 결과 누구나 와서 인디밴드 등 음악에 맞춰 '부비부비' 댄스를 즐길 수 있는 파티(4월말 예정)를 기획해냈다. 밤마다 문을 닫던 상인들은 이 일대에서 군것질거리를 판매토록 제안했다. "시민들뿐만 아니라 예술가들도 더 이상 '들러리'가 아닌 이 동네를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는 예술가들이 모여 노송천과 중앙시장 일대를 '문화의 수목원'으로 변모시켰으면 한다고 했다. 전주 한옥마을의 급속한 상업화로 자칫 지루하고 푸석하기 쉬운 전주에서 이 일대가 문화의 환기구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는 것.가까스로 월급 받는 직장을 잡았으나, 그의 호주머니는 좀처럼 불어나지 않는다. 이 같은 일들을 가담할 지역 예술가들을 위해 밥 사는 데 쏟아 부어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사심이 없다. 그럼에도 그가 행복하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 누구나 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원하고, 이를 위해 노력할 거라는 굳은 믿음 때문이다. 실제로 이 사소한 발견이 주민들을, 예술가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기독교인으로 무언가 봉사를 해야 한다는 늘 생각을 해왔는데 때마침 제가 가진 재능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니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우석대 한의과대학 기독교 선교단체인 CMF(Christian Medical Fellowship)의 김보현 회장(24한의학과 2년)이 동료들과 봉사활동에 나서게 된 이유다.김 회장이 봉사활동을 하게 된 것은 지난 2009년. 재수 끝에 어렵게 대학에 입학 한 뒤 한의예과 1학년 2학기부터 동아리활동을 시작하게 됐다.원래부터 대학에 들어가면 기독교와 관련된 단체에 들어가서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지라 그리 어렵지 않게 현장에 뛰어들 수 있었다."재수하면서 대학에 들어가면 교회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리고 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 선교단체인 CMF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 것이고요"김병하씨(56)와 김선옥(52)씨 사이의 2남 중 둘째인 그는 독실한 크리스찬었으나 중고등학교에 들어 공부 때문에 교회를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초중고 시절 반에서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초등학교때까지는 매주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교회에 빠지지 않고 다닌 것으로 전해졌다.하지만 재수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안식처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우게 됐고, 대학에 들어와서 교회에 다시 관심을 가지면서 CMF를 만났다."같은 학과 동료들과 선배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의료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저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예정대로 발을 담기기 시작한 것이죠"CMF는 의대, 치대, 한의대, 간호대 등 의대생으로 구성된 기독교 선교단체. 전국 39개 의과대학, 9개 치과대학, 11개 한의과대학 등 3300명이 참여하고 있다.우석대 CMF는 지난 1980년 한의대와 간호대의 예비 기독의료인 100여명으로 구성된 가운데 의료봉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이들은 정기예배 모임에서 조별 성경공부, 기도모임, 전국 수련회, MT 및 소풍, 예과 한의학 스터디, 농촌 의료봉사활동, 해외 의료선교 등의 활동을 한다."대표적인 게 의료봉사활동입니다. 회원들이 모두 예비 한의사이고 간호사이기 때문이고, 현장에서도 의료봉사를 더욱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되는 의료봉사는 한번 나가면 3박4일 일정으로 간다. 장소는 교인들의 추천으로 주로 이뤄지고 있다.이들은 현장에서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을 하루 평균 100여명 씩 침을 놔주거나 뜸을 떠준다. 그에 앞서 철저하게 진료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처방도 내려준다.다소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봉사활동이지만 이들에게는 직업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라 어려움이 없다.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다.얼마 전부터는 캄보디아, 인도, 필리핀 등으로 해외 의료선교를 떠나고 있다. 이 또한 방학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고, 한번 나가면 9박10일정도 활동한다."솔직히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엄살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잘난 체 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저희들에게는 누구 못지않게 공부해야할 것들이 널려 있거든요"김 회장은 현재 한의학과 2학년이다. 앞으로 2년을 더 다녀야 대학을 졸업한다. 이에 앞서 한의예과 2년을 마쳤다. 모두 6년을 다녀야하는 셈이다.한의학과 학생들은 매일 오전 9시에서 오후 5-6시까지 수업이 잡혀 있다. 다른 학생들이 누리는 캠퍼스의 아름다운 추억 따위는 이들에게 사치일 뿐이다.그는 지금 전주에서 완주 학교까지 오가는 1시간 정도의 통학하는 시간이 아까워 학교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할 만큼 매일매일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따라서 동아리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기 힘들지만, 기독교인의 정신을 가지고 한번 봉사활동을 나가면 전력적으로 매달릴 만큼 성심성의껏 활동하고 있다.김 회장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재능 기부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며 우리 사회는 아름다운 물결이 넘실되게 될 것"이라고 소박한 바람을 나타냈다.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말이 있다. 이는 '화목한 집안에 복이 온다, 웃음이 많은 집안에 복이 온다'는 뜻이다. 웃음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Cortisol)'의 양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웃음은 또 스트레스를 진정시키고 혈압을 낮추며, 혈액순환을 개선해주고 면역체계와 소화기관을 안정시켜 세균의 침입이나 확산을 막아준다고 한다.'웃음'으로 우리 주변에 '희망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는 '웃음 전도사'가 있다.그 주인공은 가정폭력 등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머무는 쉼터와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있는 요양병원 등지에서 웃음으로 희망을 전파하고 있는 한국웃음놀이치유협회 전북지부 강정애(37웃음치료사여) 전임 강사. 강 강사는 우리 주변에서 소외받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다가가 '희망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그는 2007년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웃음 강의에 나섰다.강 강사는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이 머물고 있는 쉼터에서 상처받은 여성들의 고통을 함께 하고 웃음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강의를 한다고 한다.가정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은 여성들이어서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아 힘이 든다는 그는 "피해여성들의 손을 잡고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니 닫혀있던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면서 "속내를 이야기하며 정이 들고 웃음을 찾게 되는 것을 보며 웃음치료사로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뿐만 아니라 강 강사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생활하는 요양병원이나 복지시설, 노인대학, 스포츠센터를 찾아가 행복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다. 게다가 문화센터 등에서 도형분석상담 및 미술심리상담을 통해 청소년들의 진로 상담도 병행하고 있다.'금맥보다 소중한 것이 인맥'이라는 그는 "강사는 보람으로 일하는 것 같다"면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즐거워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끼고, 힘을 얻으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사실 강 강사의 나눔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학창시절 병들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생활하는 복지시설에서 와상환자들의 기저귀를 갈고, 목욕, 안마 등 봉사활동을 해왔다. 또 대학을 졸업한 뒤 1998년부터 3년 동안은 야학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청소년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강 강사의 웃음 강의 재능기부가 알려지면서 주변에서도 나눔 문화에 동참하는 등 기부문화 확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강 강사로 인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는 김유진씨(29자영업)는 "강 선생님을 알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조그마한 나눔이라도 마음과 정성이 전해지면 받는 사람들의 기쁨은 더욱 커진다"고 말했다.사는 동안 많은 나눔을 하고 싶다는 강 강사는 "내가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부자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주고 베풀 수 있는 게 부자라고 생각한다"면서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감동과 웃음을 줄 수 있는 강의를 계속하고 싶다"며 웃음을 지었다.
박성광 전북대 신장내과 교수(57장기이식센터장)는 휴대폰이 없다.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휴대폰은 거의 응급환자 호출용으로만 쓴다. 새벽 2시에 잘못 걸려온 전화가 있다면, 되려 감사해한다. 환자들이 위급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2년 전 전북대병원 장기이식센터장을 맡은 그는 손꼽는 신장 전문의면서 장기기증운동 전도사다. 내과 전문의로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말기 신부전증 환자를 치료하면서 장기기증의 필요성을 적극 공감했다. "말기 간암이면 시한부 생명이고, 콩팥이 나빠지면 평생 투석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환자에게 누군가 신장을 기증했다, 수술만 잘 되면 2주 뒤 웃으면서 퇴원합니다. 의사인 나로서도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이식학회에 따르면 국내 사후 장기기증 희망자는 1991년 이후 80만 명이 넘었으나 여전히 이식 대기자들의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엔 전국적으로 770명이 이식을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를 강조하는 유교 사상으로 장기기증 희망자가 늘지 않았다가 3년 전 김수환 추기경 선종(善終)으로 생명 나눔 희망자가 크게 늘었다는 대목이다. "장기기증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기관을 떼어내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모여 '뇌사' 판정을 내리면, 90% 이상 일주일을 못 버텨요. 대신 장기기증을 하면 누군가의 삶을 열어주게 됩니다. 신으로부터 인간이 받은 최고의 선물을 나눠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1989년 최초로 생체 신장이식 수술을 시작한 전북대병원은 1998년부터 뇌사자 장기이식 수술에 성공한 뒤 전국적으로 이를 활발하게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지난 24일까지 전북대병원이 집계한 전국 장기기증자는 54명. 이 중 7명(12.9%)이 전북대병원 기증자다. 신경외과 의료진의 생명 나눔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협조, 코디네이터들 덕분이다. 아쉬운 대목은 뇌사자 가족들이 병원으로부터 기증을 권유받으면, 본인이 생전에 그런 언급이 없었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전주대 영상애니메이션학과에 재학했던 이근우씨를 떠올리곤 한다. 그는 "새벽까지 졸업작품전을 준비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뇌사에 빠졌는데, 부모님께 장기기증을 제안했더니 하루도 안 돼 선뜻 내줬다"고 기억했다. 그는 새 생명을 얻게 된 환자들을 보면서 전주대에 그를 위해 명예졸업장을 수여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뇌사자 장기기증을 활성화하기 위한 대안은 없는 걸까. 그는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 의사를 표시할 것을 제안했다."미국 뉴욕 운전면허증의 뒷면 절반은 장기 일부 혹은 전부 기증 여부를 서명하는 난이 차지합니다. 미국 버지니아주는 자동차면허증 소지자 절반 이상이 면허증에 기증 의사를 표시하죠. 지난해 기준으로 2658만명이 자동차 면허를 취득했는데, 운전면허증 왼편 하단에 장기기증 여부를 적는 제도를 아는 이들은 극소수입니다. 또 절차가 까다로워 알고도 안하는 이들이 상당수죠."때문에 "운전면허증 신청서에 운전자가 장기기증 의사 여부를 표시하는 칸을 만들어놨으면 한다"고 주장해왔으나 제도화되지 못했다면서 언론이 앞장서서 인식이 전환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신장내과 전문의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담배로 인한 해악을 절실히 체감한 그는 27년 전 10년 간 피우던 담배를 끊고 금연 전도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20여 년 간 금연교실을 운영하며 청소년 흡연 예방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2011)을 수상한 바 있으며, 대한신장학회 회장도 역임했다.
완주에서 '빨간 모자'를 모르면 간첩(?)으로 통한다. 과학적 농사를 주창해 유기농법을 전파했고, 전국에서 직거래 장터를 처음 기획해 활성화시켰으며, 완주 골프장 건립까지 막아냈다. 전혀 일관성 없어 보이는 그의 행보는 '괴짜'의 객기가 아닌, 농촌을 살리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농민 운동가 구윤회(58산하농원 대표)씨는 서른여섯, 혈기 방장한 나이에 행정안전부를 박차고 나왔다. 농촌에 희망이 있다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완주 부농 집안에서 자란 그는 '논밭뙈기가 재산이고 농사가 깊은 공부'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런데 주말에 도시 사람들이 이곳에 놀러오면, 주민들이 그렇게 욕을 했어요. 왜 저럴까 했는데, 그게 다 피해의식이더라고. 농민들도 돈 벌게 해줘야겠다 싶었습니다. 일본 사례를 분석해보니, 20년 간 농산물 중 가격 변동이 가장 적은 게 딸기였어요. 고소득 작물이 답이었지."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물은 있었다. 몸에 해로운 농약을 뿌리지 않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했다. "'풀약'을 안 뿌려 논을 '피바다' 만든다"고 손가락질 하던 농가들은 2차 피해를 우려해 그의 논에 물마저 대주지 않았다. 그 때 접한 게 미생물 농법이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쌀값이 폭락할 거라고 전혀 상상을 못했다고. 그 때 하우스 재배가 퍼지기 시작한 거야. 초반에는 좋았는데, 3년 지나니까 농사가 안 돼." 그는 "정부도, 대학 교수도 뾰족한 이유를 찾지 못해 실패하는 농가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 때 만난 한국퇴비농업기술인협회(옛 미생물농법연구회)는 농사가 실패한 것은 농약을 치거나 화학 비료를 뿌리면서 염료가 누적 돼 미생물이 살지 못하게 된 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때부터 그는 농약화학 비료 대신 유기물을 발효시켜 만든 '액비' 사용을 통한 유기농법 알리기에 주력했다. 그 결과 그를 '천덕꾸러기' 취급하던 농민들도 조금씩 유기농법에 눈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농사는 무조건 밑지는 장사"다. 태풍이라도 오면 논밭은 쑥대밭이 됐고 그는 빚더미에 앉았다. "연초엔 까맸던 머리가 연말만 다가오면, 농협에서 빌린 이자 갚느라 하얗게 새버렸다"고 했다. 그 때 완주군 농민회를 만났다. 그는 농민회를 통해 "미국이 식량과 석유를 내세워 세계를 재패하려는 야욕을 위해 우르과이라운드(UR)나 세계무역기구(WTO) 등을 통해 식량 주도권을 쥐고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2001년부터 완주군 농민회장, 전북농민회총연맹 조국통일위원장, 가톨릭농민회 고산분회장 등을 맡아 농민 운동의 선봉에 선 것도 그런 배경이다. 하우스에 들어갈 때마다 떨어지는 이슬비를 막기 위해 쓰기 시작한 '빨간 모자'는 농촌 데모 현장에서는 더욱 빛을 발했다. 농촌 시위 때에는 '강성파'로 통하는 그지만 마을에선 '웃는 얼굴'이 명함이다. 자녀 교육 문제로 떠나려는 농민들을 위해 컴퓨터영어서예 강사를 초빙해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수업을 진행시키기도 했다. "마을을 되살릴 밑천이라는 생각에 농민들이 떠나는 건 막아야 했다"고 말했다.그는 이제 산하농원(www.sanhafarm.co.kr)을 통해 '상생 농법'을 전파하고 있다. 산하농원은 농작물을 키우는 단순한 농장이 아니라, 도시민들까지 즐길 수 있는 정원을 갖춘 곳. 페이스북트위터는 물론 온라인 홈페이지에 '영농일기'를 써가며 38가지 품목으로 검증 받은 유기농법을 널리 알리고 있다. 농민을 살리고, 밥상 안전까지 지킬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마케팅에 취약한 농민들을 위한 '농민 직거래 장터'(The Farmer's markets)를 전국 최초로 기획해 '농업인의 날'에 '대한민국 산업 포장'(1999)을 탔던 그는 2003년 전국 최초로 제주도까지 생딸기 택배도 이뤄냈다. "더이상 물러날 곳도, 더 잃을 것도 없다"는 그는 "그러나 20년만 지나면 농사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장사(將士)처럼 대화를 이어갔던 그는 기자가 산하농원을 나설 무렵 다시 기운 뻗친 청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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