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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산악인들이 고봉에 오르는 힘 - 박범신

산악인들은 왜 명줄을 걸고 산에 오를까.특히 7천,8천이 넘는 고봉들은 직벽에 가까운 벼랑이 많은데다가 만년빙하가 쌓여 있기 때문에, 8천 미터 이상되는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그곳을 일찍이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다. 산소가 모자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고, 빙벽은 물론 위험한 크레바스가 거미줄같이 깔려 있으며, 극한의 추위와 눈사태 등의 위험이 상존하니 그야말로 죽음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는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오늘도 수많은 산악인들이 일상의 희생을 무릅쓴 채 돈을 모으고 시간을 모아서 그 '죽음의 지대'에 기꺼이 도전하고 있다.왜 그들은 산에 오를까.돈이나 어떤 명리를 위해서?아니면 좋아서? 미쳐서?산악인들이 고산에 올라서 돈을 벌거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은 극히 소수가 누리는 부가가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자기 명줄을 걸고 정상에 올라도 현실적인 어떤 보람도 거두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등반가는 이르기를, 고산등반을 하려면 첫째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 둘째 가족과 직장으로서 버림받아도 견뎌낼 수 있는 용기, 셋째 등반을 끝내고 돌아와 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추어야 비로소 프로등반가라 할 수 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참으로 비장한 출정사가 아닐 수 없다.그렇다면 좋아서 그들은 오르는 것일까.단순히 좋아서, 라고만 말하고 말면, 위의 비장한 출정사에 비해 그 낱말이 너무 범박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또 미쳐서, 라고 말하면 표현의 천박함 때문에 산악인들이 혹시 화를 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저렇게 따져 보면, 산악인들의 고산등반엔 확실히 어떤 합리적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순수한 쾌락의 추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야성적인 등반가였던 쿠쿠츠카는 고산 등반에서의 '몇일'은 일상에서의 '몇년' 혹은 '몇십년'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그 어떤, 내적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내적가치의 전제조건은 말할 것도 없이, 반대급부에 대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전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고싶은 인간 본연의 욕구와 맞닿아 있다.일상의 삶은 어떠한가.우리는 매순간 자유로운 존재로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고 느끼지만, 알고 보면 자본주의적 경쟁심이 부추기는 욕망과 알량한 수준의 안락을 추구할 뿐인 '습관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한마디로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이고, 그래서 거의 평생 우리는 관행과 습관에 의지해 삶을 상투적으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혹하게 말해서 '나의 삶'이 아니다.하지만 빙벽에 들러붙은 산악인은 다르다.그는 빙벽에 붙는 순간 습관과 권태로울 뿐인 안락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다. 그는 완벽한 단독자이고 모든 선택권을 쥔 절대적인 자유인이며 자신과 빙벽과의 관계만으로 승부하는 실존적 존재가 된다. 한순간 한순간이 놀랍게 생생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서 감각과 야성과 이성적 판단이 한통속으로 완벽하게 융합하는 전에 없는 경험 속으로 빠진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과 능동성을 발휘해 그를 가로막는 온갖 장애를 과감하게 분쇄해 나간다. 허위의식으로 무장할 필요가 없고, 엉뚱한 유혹에 빠져 길을 잃어서도 안되고, 타인의 어떤 조력도 구할 수 없다. 그에게 욕망과 모랄이 있다면 철저히 자신의 목숨값이 기준이다. 그러니 이성에 눌려있던 감각이 최고조에 이를 것이고, 합리성과 구조에 눌려 있던 야성이 빅뱅으로 터져나올 것이다. 쿠쿠츠카가 말한 바, 고산에서의 몇일이 일상에서의 몇십년을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과장이 아니라고 본다.그렇다면, 산 아래에서 사소한 안락과 기득권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만을 나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습관적 일상의 눈으로 볼 때, 아무런 명리에의 소득도 없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는 그들은 '미쳤다'.안락은 좋은 것이지만 권태롭다.위험한 시간은 우리에게 단독자로서의 강한 의지를 불러오고 집중력과 능동성을 드높이며 최종적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확인시킨다. 티베트에선 이런 위험한 순간을 '거꾸로 매달린 틈'과 같다 하여 '바르도'라고 부른다. 어떤 것은 끝나고 어떤 것은 시작되는, 또 어떤 것은 추락하고 어떤 것은 상승하는 과도기의 시간이다.요즘 경제가 나락으로 빠지고 있다 한다.야수와 같이 갈 용기가 있다면 불리한 조건들을 기회의 병풍으로 삼을 수도 있다. 길게 보면 영원한 추락은 없다. 빙벽에 들러붙어 제 몸의 이성과 감성과 야성을 완전히 융합해 마침내 한 봉우리를 넘어서고마는 산악인들의 의지를 배울 때가 아닌가./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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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31 23:02

[금요칼럼] 이순신 장군의 붓 - 정목일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고 숭배하는 인물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다. 한 때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이 세워져 있었다.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고 좋은 정치를 편 대왕으로, 이순신은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민족의 태양' '성웅'으로 불려진다. 이순신장군상에는 어김없이 긴 칼을 잡고 있다.경상남도는 역점사업으로 '이순신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순신 장군을 세계화하고 남해안 시대 문화관광을 선도하기 위해서 1천500여 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알리기, 거북선 건조 등 세계화작업과 이충무공 정신선양, 거북선 탐사 등 19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이 사업은 전라남도에서도 함께 추진하고, 일본에서도 참여 의사를 밝혀오고 있다.이순신 프로젝트 중 흥미로운 것은 거북선 찾기이다. 경상남도에서 이번에 거북선을 찾는 본격적인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거북선이 수장된 된 곳으로 예측되는 거제 칠천량 해저를 샅샅이 뒤져 거북선 잔해를 찾아내자는 것이다.이순신 장군은 광화문 대로에 긴 칼을 든 구국의 영웅으로 서있다. 이순신의 손은 칼만을 잡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한 손은 붓을 들고 있었다. 그는 해군의 사령관으로서 칼을 들고 작전지휘를 수행해 23전 전승으로 조선을 구하고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찬란한 기록을 남겼다.이순신은 칼을 들고 작전지휘를 하였지만, 한 손은 붓을 들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령관으로서 어느 누구보다 휴식과 수면이 필요했다. 그의 건강은 곧 국가존망과 결부돼 있었다. 밤이면 보초 이외에 모든 군졸들이 취침해 내일의 전투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장군만은 잠들 수가 없었다. 그가 수행한 전투와 전쟁 상황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군졸들이 잠에 빠진 밤중에 장군은 먹을 갈고 붓을 들어야 했다. 장군은 정신의 피로 먹을 갈았다. 칼보다 더 날카로운 붓을 들었다. 전투를 수행하면서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전투 상황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함을 느꼈다. 기록하지 않으면 시간이 망각의 바이러스를 풀어 사실과 진실을 퇴색시키고 소멸시켜 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임진왜란은 조선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했고, 전쟁 중에 가장 고단하고 고뇌하고 잠 못 들어 했던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그는 7년간의 전쟁 중에서 단 하루라도 마음 놓고 잠 들 수 없었다. 그의 손엔 칼과 함께 붓이 들려져 있었다. 그가 수행한 전투가 기록되지 않아 훗날 입으로 전해지는 것을 경계했다. 한낱 전설이 되고 설화가 되어 떠도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과장되고 와전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장군이 잠들지 못하고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기록해 놓은 '난중일기'는 그의 일생 전부이자 생명이나 다름없었다.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국난을 수습한 인물을 가려 공신을 책봉했다. 일등공신에 오른 인물은 육군에 권율 장군, 해군에 이순신, 원균 장군이었다. 이 세 사람은 당시 무무백관들에 의해 일등공신으로 책봉됐다. 그러나 4백여 년이 흐른 지금 이순신과 원균의 평가는 너무 대조적이다. 이순신은 민족의 태양, 성웅, 불멸이라는 최상의 상징성으로 추앙되지만, 원균의 경우는 기억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순신과 원균을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없지만,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통해 자신의 기록을 남겼고, 원균은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점이 큰 차이를 만든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난중일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1592년(선조 25)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한 달 전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일기이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으므로 본래는 이름이 없었으나, 1795년(정조 19)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찾기는 해저 속에 묻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다만 금속은 시간에 의해 녹슬고 형체도 없이 해체되고 소멸되는 것이어서 그 잔해를 건져낼 수 있을까 관심이 쏠린다. 이순신장군이 남긴 '난중일기' (국보 제 7호)는 영원 속에 그대로 남아 그를 역사의 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왜곡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위대성은 구국의 영웅에 그치지 않고, 그가 치룬 전쟁을 기록함으로써 역사와 진실을 증언하고자 한 점이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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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24 23:02

[금요칼럼] 생각대로 쓰다 - 김용택

미국산 쇠고기 파동, 유가의 급등과 미국 발 금융위기, 그리고 중국산 분유 사태는 우리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랜 가뭄과 늦더위는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고 이러한 기후변화의 낌새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바꾸려 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 위기가 우리 살림살이의 위기가 될 줄을 우리 같은 것들이 어찌 알고, 어마 어마하게 잘 사는 나라의 은행이 망할 지를 우리 같은 것들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런 사태에 대응하는 나라 일군들의 긴장된 얼굴들을 화면으로 보며 우린 그냥 덜컥덜컥 겁이 날 뿐이었습니다. 넥타이 풀고 회의하는 그들의 입과 얼굴을 살피는 언론들도 모두 정신 차리지 못하고 숨이 차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아우성만 칠 뿐 이 명백한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그 어떤 현실적 타개책도 장기적 계획도 대안도 없이 슬그머니 위기의 꼬리가 사라지려고 합니다.▲일상 속에 다가온 위기위기는 문제의 핵심과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라고 말하지요. 이런 위기를 맞아 모두들 입을 모아 어렵다고 하고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 그러나 거리에 차량의 물결은 넘치고 주말이면 차들이 고속도로와 산과 들을 매웁니다. 식당과 술집은 사람들로 넘치고, 거액을 쏟아 부은 지자체들의 내용 없는 축제의 에드벌룬은 이 고을 저 고을의 가문 하늘에 둥둥 뜬, 뜬 구름을 잡습니다. 위기라는 말이 뻥 같지요. 혹 이 위기의 국면만 모면하면 된다는 생각인지도 모르지요. 에라, 모르겠다. 그러려면 그러라는 똥 뱃장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위기는 또 옵니다. 다시 올 위기의 파고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구체적일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혼돈과 공포의 파고는 일순간에 우리들의 일상을 덮칠 수 있다는 것을 우린 알아야합니다. 이번 금융위기는 말 그대로 우리가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글로벌하게 실감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글로벌하다 해도 문제의 단초는 우리에게 있고, 그 해결 방법의 실마리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지금까지의, 경제 성장을 제일로 치는 가치와 덕목을 재고할 때가 왔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교육도 문화도 예술도 진정한 자기 혁신이 필요 합니다. 글로벌이란 무엇입니까. 지식과 자본의 세계적인 공유를 의미합니다. 지식은 세계화 되고 다국적 시장에 맡긴 자본은 큰 물방울로 쉽게 빨려갑니다. 자본과 지식의 공유는 이제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사고를 요구합니다. 큰 문제는 교육의 틀을 바꾸는 일입니다. 시험만 잘 보는, 나 홀로 똑똑한 사람을 기르는 교육은 이미 그 생명력을 다 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는 풍요로운 인간정신에서 오는 창조적인 인간이 요구 됩니다. 더불어 자본에 기댄 삶의 가치척도는 폐기되고 자연과 생태와 순환에, 그리고 땅에 대한 투자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영혼이 없는 돈은 인간정신을 끝없이 파괴합니다. 지속발전 가능한 삶과 자연! 친화적인 가치와 다양한 문화의 가치에 가까이 다가갈 때입니다.▲영혼이 없는 돈은 인간정신 파괴새로운 세기의 날은 밝은지 오래 되었는데 우리는 지금 눈을 감은 채 몽당 빗자루를 붙잡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구시대적인 낡은 가치에 기댄 모든 장치는 새롭게 수리되거나 폐기 되어야 합니다. 자본의 독점은 한군데가 무너지면 다 함께 망한다는 뜻입니다. 왜 아직도 우리는 새로운 가치 창출에 이리 인색합니까. 왜 아직도 우리는 낡은 이념들을 붙잡고 안간힘을 씁니까. 사회의 모든 독점세력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음모지요. 경제의 민주화는 인류 생존의 가장 큰 가치입니다. 우리 인류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의 시대를 거쳐 기후변화에 대처해야하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다다랐습니다. 한정된 지구 자원 고갈은 인류의 미래를 약속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 빛나는 태양/ 맑은 물,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 이것만 있거든 낙심하지 마라.' -괴테의 시입니다. 지금 음미할 만한 내용입니다./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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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17 23:02

[금요칼럼] 이땅의 교육은 어디로 - 장인순

지구상에서 이 땅의 학생과 학부형 같이 힘든 삶을 사는 나라가 또 있을까!세계에서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고, 정부 예산 10%를 초과(1년간 20조원)하는 세계 제일의 사교육비를 쓰는 나라에 남은 것은 좌절감과 허탈감 그리고 무기력뿐이라니. 진정 교육의 왕도는 없는 것인지?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 크게는 자연의 질서로 가르치는 것, 지성과 감성을 조화롭게 키우는 건, 작게는 교육 그 자체는 머리에 처넣은 것이 아니고 머리에서 커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의력과 상상력 그리고 사고력을 높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초, 중, 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고학력이 될 수록 질문이 적을 뿐 아니라 학교수업이 점점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70%이상이 4년 동안 한 번도 질문을 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다면 이런 교육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고학력으로 갈수록 입시에 매달려 암기 위주의 반복적인 학습과, 문제를 이해하지(why)않고 푸는 방법(how)만을 강요하는 일률적인 강의로 학생들이 흥미를 잃은 재미없는 교실로 전략되었기 때문이다.▲ 질문과 토론의 교실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 보낼 때 하는 말의 거의 전부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이다. 한편 유대인 부모들은 "학교 가서 질문을 많이 하라"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엄마가 아이들의 입술에 달콤한 꿀을 발라주고 "배움이란 이렇게 달콤한 거야"라고 가르친다. 지극히 적은 소수민족인 유대인이 모든 학문분야에서 세계정상에 우뚝 서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정에서 어떻게(how)가 아니고 왜(why)라고 하는 접근 방법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유도하게 되고 거기에서 창의력과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동시에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해서 사고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교육은 일률적으로 머리에 처넣는데만 급급한 반면 유대인들은 머리에서 꺼내는 교육으로 교실이 토론과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한 곳으로 학생들이 가고 싶고 머무르고 싶은 진정한 교육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열정과 용기 있는 교육자란우리말에 용장 밑에는 졸장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훌륭한 교육자 밑에는 훌륭한 학생들이 있다는 뜻이다. 훌륭하고 경쟁력 있는 교육자 밑에는 학생들이 변화 할 수밖에 없으며 반드시 경쟁력 있는 학생이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경쟁력 있는 교육자의 덕목은 무엇일까? 첫째는 학생들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그 꿈을 이루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그리고 열을 알아서 하나로 가르칠 생각을 해야 한다. 한두 개를 알고 하나를 가르치면 선생님도 학생도 모두 피곤할 수밖에 없다. 많이 알수록 지도하기 쉽고 배우는 학생도 쉽게 이해한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은 예술 (Teaching is art)이라고 한다. 교육자의 가르치는 행위는 예술가가 새로운 자기 작품에 영혼을 불어 넣은 것과 같은 것으로 새로운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며 곧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기를 되돌아 볼 줄 아는 용기이다. 진정한 교육자는 가르치는 학생이나, 동료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그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서 자신의 장단점을 깨달음으로써 좋은 점을 더 좋게, 부족한 점을 개선할 수 있어 자신을 더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육자의 경쟁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은 모든 교육자가 교원평가제에 기꺼이 참여하며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동료들의 평가가 어떤 것인지 자기를 돌아보고 변신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생과 교육자와 학부형이 하나 되는 것으로 즐거운 교실을 만드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쟁력이 있는 교육자이다.▲ 마르지 않은 교육의 샘이 시대를 시간이 뜨거운 시대 바로 무한경쟁시대이며, 자원전쟁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한다. 이는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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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10 23:02

[금요칼럼] 우리가 잊은 가난 - 박범신

지난 해, 멀고 먼 터키에서 독자가 찾아온 일이 있었다. 베이한 도안즈. 터키의 중부도시 카르세르에 있는 에르지에스 대학 한국어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번역원이 주최한 한국문학 독후감대회에서 일등상을 받고 그 부상으로 변역원이 초청해 방한의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아름답고 단정한 외모에다가 눈이 커서 더욱 영민해 뵈는 이 터키처녀가 선택한 텍스트는 나의 초기 작품 '우리들의 장례식'. 단편 '우리들의 장례식'을 쓴 것은 아마 서른 살 무렵, 1976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서 일주일에 서른 시간 넘게 수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밤에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퇴근하고 대학원에 갈 때는 매번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면 늘 졸기 바빴다. 그날도 졸다가 제때 내리지를 못하고 그만 대학 앞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졸다 깨고 보니, 아주 낯선 곳이었다. 나를 내려놓고 버스가 부르릉 하며 사라지고나자 갑자기 적막해졌고, 그 적막 속으로 개천을 끼고 끝없이 펼쳐진 낮은 지붕과 판잣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초겨울이라서 개천은 벌써 얼어있었고, 루핑으로 된 판잣집 지붕들 위로 고압선이 도도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때마침 히끗히끗 진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곳이 장위동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나는 무엇에 홀린 듯, 대학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대신 장위동 달동네 안길로 들어섰다. 고압선 전신주들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러니까 고압선 철제 전신주 사이로 뚫려진 길이었다. 어둑신한 길을 따라 오십여 미터를 들어갔을까. 판잣집 추녀 밑에 싸구려 나무관 하나가 기대 세워져 있는 게 눈에 띄었는데, 나무관의 아랫도리는 가린 것이 없어 골목길에서 그대로 진눈개비를 맞고 있었다.삐죽이 열린 좁은 재래식 부엌에서 늙수구레한 부부가 쭈그려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노모가 죽었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라서 조문객은 물론 이웃사람 하나도 와있지 않았다. "눈을 맞는데, 왜 관을 방에 들여놓지 않나요?" 나는 그만 묻지 말아야할 것을 묻고 말았다. 남자가 말없이 방문을 열고 어둡고 비좁은 방안을 보여주었다. 노모의 시신이 아랫목에 뉘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방이 너무 작아서 기성품 나무관을 도저히 방 안에 들여놓을 수 없었다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나는 다음날 대학원 수업에 가지 않았다. 하루 여섯 시간이 넘는 수업에 지칠 대로 지쳤으나 나는 퇴근해서 곧장 내 셋방에 돌아와 앉아 '분노'로 밤새워 소설을 썼다. 발표할 곳도 없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70년대의 혹독한 가난과 사회구조적인 불평등에 대한 분노로 내 자신이 이미 '화염병'이 되었으므로, 난 이틀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우리들이 장례식'을 썼다. 노모가 죽었으나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한밤중 달동네 복판을 가르고 지나가는 개천 바닥에 노모를 남몰래 묻는다는 이야기였다."이 작품을 쓸 땐 당신처럼 먼 데에서 비행기를 타고 찾아오는 독자를 만날 날이 있을 줄 꿈에도 몰랐어요. 소설 속 이야기는 당시로선 단순한 픽션이 아니었거든요"나는 터키에서 온 처녀에게 말했다.놀랍게도 그녀는 내가 쓴 우리나라의 '70년대 풍경'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죽어간 자기 친구의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나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지금의 젊은 제자들보다 멀고 먼 터키의 작은 도시에서 날아온 처녀와 말이 더 잘 통한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내 젊은 제자들과 내 '새깽이'들이 다 잊어버린, 이해하지 못하는, 그렇지만 불과 30여년밖에 안되는 그 역사를 터키의 처녀로부터 비로소 이해받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고 당황하기도 했다.당신은 지금 어떤가?세상은 이제 남의 가난이나 불행에 대해선 아무도 분노하지 않을 만큼 발전했다. 그렇지만 때로 나는 묻는다. '발전'한 것이 맞기는 맞는가. 고통 받았던 과거를 기억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꿈꾸는 것은 어쩌면 '꿈'이 아니라 천박한 '욕망'에 불과할는지 모른다. 허겁지겁 욕망을 쫓다 아우성치며 달려가다가도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애당초 출발했던 그곳으로 돌아가 가난이 오히려 선(善)이라고 말했던 세월을 한번 쯤 굽어볼 일이다. 우리가 가진 게 아직도 터무니없이 적을 뿐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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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10.03 23:02

[금요칼럼] 나비의 삶 - 정목일

이 세상에서 나비처럼 아름다운 삶은 없을 듯하다. 몸통보다 몇 배가 큰 날개로 춤추듯이 나르는 모습만으로 환상과 행복을 느낀다. 몸 자체가 예술품이다. 형형색색 무늬와 현란한 색채미학, 두 장의 날개는 대칭미의 완성품이다.나비의 삶은 우아하며 평화롭다.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투지도 않는다. 꽃을 사랑하면서 희망과 미래를 준다. 꽃에게 꿀을 얻는 대신 식물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와 씨앗으로 번성과 풍요를 갖게 만든다.나비는 언제나 무도복 차림새이고 걸음걸이는 곧 춤이다. 꽃에 다가갈 때도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벌과는 달리, 곡선을 그으며 다가간다. 다짜고짜로 꽃 속으로 파고드는 벌과는 다르다. 소리 없이 다가가 꽃에 눈 맞추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춘다. 오래도록 밀어를 속삭인다.나비는 꽃의 빛깔을 가장 잘 안다. 꽃의 향기를 가장 잘 맡는다. 나비야말로 빛깔과 향기를 알아내는 기막힌 감별사이다. 신이 보낸 미의 천사, 평화와 사랑을 위한 사자(使者)가 아닌지 모른다. 인간은 나비의 황홀한 빛깔과 무늬를 갖고 싶어 한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삶을 갖길 원한다.꽃이 어여쁘다고 한들 나비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무료와 슬픔이 느껴진다. 꽃에 나비가 앉는 모습이야말로 평화와 행복의 표정이다. 유토피아의 구성 요소는 숲과 물, 여기에 꽃과 나비가 있어야 한다. 꽃과 나비는 사랑, 행복, 번영을 상징한다.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 빠져나올 수 없는 게 생명체의 숙명이며 한계이다. 그런데도 나비만은 살상을 하거나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고, 모든 생명체를 이롭게 한다.꽃가루받이를 통해 식물의 번식을 도모함으로써 생명체 모두에게 이로움을 안겨준다. 가장 연약하고 무능해 보일지라도 나비는 모든 종(種)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타고 난 예술가이다. 나비가 꽃에서 꿀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일만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삶과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고 있다.꽃은 열매와 씨를 맺고, 열매와 씨는 다시 대지에 생명을 틔운다. 속씨식물은 동물을 유혹해 자기 씨를 멀리 퍼트리게 하려고 당분과 단백질을 생산해낸다. 그 덕에 세상의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온혈동물인 포유류가 번성할 수 있다.꽃이 없었다면 인간도 나타날 수 없었다. 인간은 꽃의 종류를 엄청나게 늘리고 꽃씨를 세상 곳곳으로 퍼트렸다. 그 대가로 과일과 씨앗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했으며 감각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인간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꽃과 나비의 사랑과 공생이 있었기 때문이다.기상학에서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나비의 날개 짓처럼 작은 변화가 폭풍우 같은 커다란 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기상학이 아닌 생태학에서도 나비효과가 있음을 깨닫는다. 꽃을 찾는 나비의 날개 짓은 부드럽고 미약하지만, 인류와 전 생명체의 삶과도 유기적인 관계가 있으며 도움을 준다.나비의 모습과 삶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어떻게 하면 유익한 나비 같은 삶을 가질 수 있을까. 나비처럼 모든 관계와 삶에 이로움과 축복을 주는 효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비처럼 경쟁, 대립, 갈등, 시기, 모함이 없는 사랑과 평화의 삶을 가질 수 있을까.가끔 한 사람의 좋은 삶, 작은 선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일으켜 큰 힘이 되는 것을 본다. 말없이 쓰레기를 줍는 사람, 자신의 처지가 딱한 데도 이웃을 돕는 사람,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다.권력자는 권력이 없는 사람을 위해, 부자는 빈자를 위해, 지식이 있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을 위해, 건강한 사람은 병약한 사람과 장애자를 위해, 스스로 베풀고 봉사한다면 '나비의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선행 하나씩으로 사랑의 등불을 켜면. 서로서로 도움을 주며 살 수 있는 나비의 삶을 취할 수 있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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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26 23:02

[금요칼럼] 이 가을에 시 한편 - 김용택

날씨가 가물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가을은 가을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은 높고 눈이 부시게 푸르기만 합니다. 그 하늘아래 나무와 풀들은 있는 힘을 다해 햇살과 바람을 빨아들이며 익어 갑니다. 강변이나 논두렁이나 밭가에 구절초 꽃이며 쑥부쟁이며 고마리 꽃이며 물봉선화 꽃들이 만발 했습니다. 강아지풀도 억새도 갈대도 바라구 풀도 수크렁도 다 이삭을 피워냅니다. 밤송이들이 쩍쩍 벌어지고, 감은 붉은 얼굴을 세상에 내밉니다. 야산에 가보면 작은 오솔길에 밤과 상수리와 도토리들이 발아래 툭툭 떨어집니다. 차를 타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차창으로 언 뜻 눈길을 주면 거기에 가을꽃들이 그렇게 피어 있습니다. 오! 저 꽃들 좀 봐라! 누가 가꾸지 않았어도 우리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도, 나와 언제 그러마고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마치 지상의 모든 것들과의 굳은 약속인양 그렇게 눈이 시리게 피어납니다. 낮은 산자락 작은 마을 어느 집에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키 발을 딛고 낮은 슬레이트 지붕 난간에다가 호박쪼가리를 한 개 한 개 널고 있습니다. 오래 된 마을의 오래 된 저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고향 같은 굳은 약속입니다.시인은 그런 사람일 터입니다. 저기 저렇게 꽃이 피어 있다고, 저기 저렇게 산과 들에 곡식들이 익어간다고, 저기 저렇게 푸른 하늘이 있다고, 저기 저렇게 노을이 붉게 사위어 간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사람일터입니다. 크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위대하고 찬란하고 높은 지위와 권력과 돈을 쥐고 세상을 흔드는 자들에게 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 뜨기 전부터 해질 때까지 1톤 트럭에 잡화를 싣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해가 지면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젊은 가장의 어깨에 내리는 어머니같은 눈길일 것입니다.발아래 떨어진 햇살 한 조각을 사랑해야 할 가을입니다. 정말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캄캄한 절망이, 때로 그런 삶의 난간 앞에 서서 우린 몸서리를 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절망 속에 서서 고개를 한번 돌려 보면 거기 마른 풀잎이 작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의 시든 풀잎에 바람이 되는 사람이 또한 시인일 터입니다. 이 가을에는 여러분들이 다 시인입니다.가을바람이 부내요. 시 한편 실어 보내드립니다.'우리들이 살고 있는 별에는/모든 이들을 배부르게 할 만큼/충분한 음식이 있음을/나는 믿습니다.//모든 사람들이/함께 어우러져 평화롭게 사는 것이/가능함을/나는 믿습니다.//우리들이/총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며/모든 이들이/똑같이 소중함을/나는 믿습니다.//선한 기독교도와/선한 이슬람교도가/선한 유대교도와/선한 무신론자들이 있음을/그리고 내가 신뢰하는/모든 이들의 마음에 선함이 깃들어 있음을/나는 믿습니다.//만일 믿지 않는다면/어떻게 시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요./날마다/목마름에 슬피 우는 아이들이 있음을/그리고 날마다/싸움을 벌이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있음을/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어린아이들은 피부색과 상관없이/서로 어울려 뛰어놀고 있음을/나는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그리고 부디 이와 같은/희망을 간직한 이들? ?많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소망하는 것이며/동시에 내가 믿는 것입니다./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진심으로 말입니다.'벤자민 스바냐의 시-아름다운 소망-전문.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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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19 23:02

[금요칼럼] 나의 독서 일기 - 장인순

살갗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으로 계절을 느끼는 가을은 농부들에게는 땀 흘려 일군 수확의 계절이며, 동시에 많은 수험생에게는 고통과 인고의 계절이기도하다. 우리 국민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추석이라는 황금연휴가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추석 연휴에 조상의 묘를 찾는 것 외에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할 것이다. 황금연휴라고 하는 황금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자. 이 아름다운 연휴가 황금알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시간을 창조하는 삶 '독서'나는 일 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황금연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고향이나 혹은 멀리 여행을 가지 않는 생활 철학이 있다. 이 기간 동안 적어도 하루 12시간이상을 집중적으로 책을 읽는다. 이런 연휴에 움직이면 많은 시간과 돈을 길에 버리는 것이 너무나 아까울 뿐만 아니라, 긴 연휴 후에는 심신이 피곤하여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며칠씩 책을 읽으면 피곤한 것도 사실이지만,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넘길 때의 즐거움, 특히 연휴 끝자락에서 느끼는 지적포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감이다. 인생의 삶의 가치는 감격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생명력이 있고 살아있는 글을 통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현재를 결단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혜안을 기르는 것은 우리들의 존재 의미를 더욱더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독서는 간식 아닌 주식많은 사람들은 항상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읽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바빠서 매끼니 식사를 거르는 사람이 많지 않듯이, 현대를 사는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이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간을 만드는 삶, 다시 말하면 숨어있는 시간을 찾고 시간을 창조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한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만의 작은 시공간에 갇혀 살지만, 책을 읽고 지적 배고픔을 채워가는 사람은 시공간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는 지적 체력을 가짐으로서 담대하고 정직하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선진 시민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독서는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간식이 아니고 우리 삶의 주식이 되어야 한다.독서가 곧 황금알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책 읽는 것 같이 쉽고 재미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쉬운 책 읽기를 위해서 우선 책사는 연습을 열심히 하자. 나는 평소에 시간이 있거나 혹은 출장을 갔을 경우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미술관이나 특히 대형 서점에 들러서 책을 보고 많은 책을 산다. 그리고 출장 중에 남는 출장비는 모두 책을 사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책을 선물 하는 것은 인격을 전하는 것이며, 존경하는 사람이나 좋은 사람에게만 하는 것으로 가격에 전혀 개의치 않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독서의 중요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토마스 바트란 의 "책이 없다면 신도 침묵을 지키고, 정의도 잠자며, 자연과학은 경직되고, 철학도 문학도 말이 없을 것이다." 바로 책이 없는 사회는 배만 부르면 행복한 동물의 사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황금연휴에 책을 읽어 황금알을 낳자./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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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12 23:02

[금요칼럼] 가을엔 '혼자'가 되자 - 박범신

가을을 가리켜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노래한 사람은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다. 유난히 예민한데다가 퇴폐적이었던 그는 마흔 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가을은 '초토'(焦土)이며 그래서 '무참하다'라고도 그는 썼다. 여름이 '샹들리에'라고 한다면 가을은 '등롱'(燈籠)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 사람이다. 언젠가 작은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사진을 통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 한 여자가 지친 듯 앉아있는 것을 들여다 보고나서 그는 또한 이렇게 썼다.'나는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이 처참한 그 여자를 그리워했다. 사나운 정욕까지 느꼈다. 비참한 것과 정욕은 등과 배 같은 것인 모양이다.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웠었다. 황폐한 벌판에서 코스모스를 만나면 나는 또 그것과 똑같은 고독을 느낀다'가을이 주는 감성적 칼날이 이보다 더 날카롭게 드러난 표현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고보면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윤동주의 감수성도 깊은 가을 한 가운데에서 느끼는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연민에 닿아 있었던 모양이다.여름은 연민을 느낄 겨를이 없다.일광은 타오르고 녹음은 무섭게 뻗어나가고 사람들은 전투적으로 걷는다. 문을 있는대로 열어젖혀야 하고 우두자국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게 여름이다. 한낮의 시간처럼 모든 것이 아낌없이 열리고 불타오르니 우리들의 영혼은 작열하는 일광 밑에서 숨을 곳이 없다. 혼자 있으면서도 고독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달려가면서도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소리치면서도 그 소리의 메아리가 무엇을 울리고 되돌아오는지 가려보지 못한다. 영혼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지고 내면의 뜰은 횡경막에 눌려 비지땀을 흘릴 뿐이다.그러나, 지금 돌아보라.낮에는 햇빛이 아직 뜨겁지만, 저물녘이 오면 어느새 풀벌레가 울고 소슬한 바람이 분다. 흰옷을 찾아입고 창문을 하나씩 닫는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 소스라쳐 돌아보면 당신은 '혼자' 창가를 서성거리고 있다.'그리고 나는 뼛속까지 내가 혼자인 것을 느낀다. 정말로 가을은 모든 것의 정리의 계절인 것 같다. 옷에 달린 레이스장식을 떼듯이 생활과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을 모두 떼어버려야겠다'선구적이었으나 고독하게 살았던 전혜린(田惠麟)의 문장이다. 가을이 주는 첫 번째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혼자'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 이제 머지않아 나뭇잎은 물들고 들녘의 곡식은 익고 하늘은 끝간데 없이 높아질 것이다. 그때가 돼도 천지간에 당신이 한 존재로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당신에겐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 셈이 된다. 그것은 곧 성숙하지 않았다는 뜻이다.지난 여름에 나는 어디에 있었던가.성숙한 가을에 '혼자'인 것을 깨닫고 나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서 솟아날 수밖에 없다. '촛불'과 '올림픽'과 '고소영'같은 낱말들이 여름 복판을 관통하고 있는게 보일 것이다. 성숙을 통해 혼자가 된다는 것을 과거를 깊은 성찰로 뒤돌아본다는 것이고 동시에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뚜렷이 인식하고 포기할 수 없는 본원적인 꿈으로 앞날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가을은 그런 힘이 있다. 외부로 열린 문을 닫으면 내면의 뜰이 넓어지는게 인지상정이다. 잎새를 흔들고 가는 바람 소리가 가슴에 사무치고 오래 전 헤어진 첫사랑의 그림자가 불현듯 나를 덮칠 때, 그리하여 숨가쁘게 달려오느라 미처 보지못한 내 삶의 물집들이 눈물겹게 시선 속으로 들어올 때, 바로 그런 가을에 이야말로, 마실나갔던 본성이 내 영혼 속으로 되돌아와 나를 깨우는 축복의 시간이다.가을 깊어지면 그러하니, '혼자'가 되자. 그리고 자신에게 묻자. "괜찮은가. 내 삶이 지금 이대로좋은가"/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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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9.05 23:02

[금요칼럼] 우포늪에서 띄우는 편지 - 정목일

창녕 우포늪에 오면 1억 4천년만 전 태고의 시공간을 만날 수 있다. 여름의 우포늪은 온통 개구리밥, 마름, 생이가래 등 수생식물들로 덮여 초록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늪가엔 수양버들이 군락을 이루고 늪은 꿈을 꾸는 듯 평화롭다. 여름의 늪은 왕성한 생명의 숨결로 차 있다. 자동차의 매연과 소음으로 하늘을 볼 수 없는 도시인에게 우포늪은 태고의 공간과 숨결과 맥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소벌(우포), 나무벌(목포), 모래벌(사지포), 쪽지벌 등 4개 늪을 총칭하는 우포늪은 창녕군 유어면, 이방면, 대합면의 230만㎡에 걸쳐 분포하는 국내 가장 큰 내륙습지이다.낙동강 유역 창녕, 함안지역은 늪지지역이 굉장히 넓었으나 대부분 매립되어 늪의 90%가 소실되었다. 그런데도 우포늪이 이나마 남아 있는 것만도 천만 다행이다. 우포늪이 시멘트 공간으로 변하지 않고, 대단위 공업단지나 아파트단지가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어딜 가서 우포늪 같은 태고의 공간을 찾으며, 생명의 보고(寶庫)를 볼 것인가.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사박물관이다.금년 1월에 세계적인 자연사박물관인 워싱톤국립자연사박물관에 가 본 적이 있다. 공룡연구소까지 갖춘 이 자연사박물관엔 과학적인 시설과 자연계와 인류 역사를 테마로 한 1억 2400만 점의 소장품이 있다. 선사시대 각종 동. 식물을 비롯해 전 세계 각국의 자연사 유물들이 전시돼 관람객을 압도하지만,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자연사박물관은 이미 '자연'과 '생명'을 상실했다. 거대한 야수에서부터 작은 곤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는 생명을 상실하여 표본과 박제품이 되어 진열돼 있을 뿐이다. 관람객들은 동물들의 주검을 보면서 그들이 살았던 숲과 늪지를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자연사박물관을 메운 관람객 중에 6세의 소녀가 어머니 품속에서 울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소녀는 "이곳에 있는 동물들이 모두 죽어 있어요."라며 울먹이고 있었다. ! 자연사박물관엔 살아있는 게 없다. 거대한 생명체의 무덤, 아니 주검의 박제품을 보여주는 삭막한 공간에 불과할 뿐이다.우포늪은 얼마나 신비한 자연과 생명의 궁전인가. 1억년 생명의 유전자와 숨결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람사협약(습지보전 국제협약)에 등록된 세계적인 습지로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인 삵, 고니, 가창오리, 가시연, 순채 등 1천여 종 동 .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우포늪에선 멸종 위기의 세계적인 희귀종인 가시연꽃이 피고 있다. 어찌 동물의 박제품을 진열한 자연사박물관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경남에선 우포늪에 따오기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돼 있고, 1970년 이전엔 흔한 겨울철새였으나 최근에 거의 멸종이 된 따오기를 중국에서 가져와 정착시키려는 프로그램이다. 오래 전에 지리산에 곰을 방목한 일이 있지만, 먼저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부터 복원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우포늪에 외래종인 베스와 황소개구리에 의해 고유종인 물고기가 멸종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오는 10월엔 창원에서 람사총회가 열린다. 람사협약은 '철새 서식지 보호'라는 것만을 협약하자는 게 아니다. 종(種) 다양성의 보존과 인류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습지를 보존하고 현명하게 이용하자는 데 있다. 환경올림픽이라 불리는 람사총회를 앞두고 우리는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앞으로의 대책에 진지한 검토와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다.전 인류의 반을 먹여 살리는 신의 은총인 쌀이 습지인 논에서 생산된다. 습지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놀라운 생명성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우포늪 등 육지 습지와 낙동강 하구언의 을숙도 등 바다 습지를 생명의 자궁으로 인식하고 보존해야 한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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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29 23:02

[금요칼럼] 가을의 문턱에서 - 김용택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햇살은 지구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가며, 지상에 따가운 햇볕을 내리 쬔다. 가을이 오고 있다. 인간들이 아무리 '철'없이 곡식을 가꾸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생태와 순환을 조정하려 해도 오고 가는 여름과 오는 가을은 어떻게 하지 못한다. 어김없는 저 가을 앞에, 계절 앞에 고개 숙여라. 저 위대한 자연의 질서와 순환 앞에 무릎 끓어라.올해는 소낙비가 유독 많았다. 비가 하도 국지적으로 그것도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기상청도 두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기상청의 날씨 오보를 가지고 말도 많았다. 그러나 기상청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우리 인간이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구의 기후가 변해버린 것이다.뜨거운 여름날 소낙비는 모든 곡식에게 거름이고 약이다. 특히 벼가 동 베어가는 8월 중순을 넘어서서 소낙비가 쏟아지다가 날씨가 확 들어버리면 햇살은 정말 뜨겁게 대지를 내리쬔다. 어른들이 그런 날씨를 보며 "하따, 벼가 한 뼘씩은 커 불것다." 하시며 좋아 하신다. 아닌 게 아니라 소낙비가 뚝 그치고 난 후 벼를 보면 벼가 쑥쑥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1년 중 가장 늦게 씨를 뿌리는 배추와 무씨를 뿌리고 쪽파를 심을 때다. 대게의 곡식은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을 하는데, 그 중에 무와 배추와 쪽파는 한 여름에 씨를 뿌려 가을 늦게 거둔다.어렸을 때 어머니와 배추 씨를 땅에 묻으며 물었다. "어매, 왜 이렇게 한구덩이에 여러 개의 씨를 묻어?" "한 개는 날아가는 새들이 먹고, 한 개는 땅에 있는 벌레가 먹고 땅위로 솟은 싹은 사람들이 먹는다."고 하셨다. 이제 그 말도 옛말이 되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벌레와 병충해가 극성을 부리고, 날짐승 들 짐승들이 곡식을 '공격'한다.농부들만큼 자연과 생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도 드물다. 동네 앞 정자나무에 잎이 피는 것을 보고, 소쩍새 우는 소리를 듣고 그해의 흉년과 풍년을 점친다. 달의 모양, 바람 부는 방향과 몸에 느껴지는 바람결로 비가 오는 것을 안다. 이 때 쯤 어디를 가면 강물에 다슬기가 많다는 것을 알았고, 짐승과 곤충들의 움직임을 보고도 날씨를 점쳤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것을 오랜 전통으로 전해 주었고, 그렇게 자연에서 배우고 자연이 가르쳐 준 교육내용을 고스란히 물려주고 물려받았다.하늘이 높고 파랗다. 지상의 모든 나무와 풀과 짐승들이 부지런히 가을을 준비한다. 위대하고 성스러운 자연의 약속을 농부들은 믿고 살았다. 그것이 농사였다. 농부들은 땅에 곡식을 심어 곡식을 키우고 곡식이 익으면 거두어 자기도 먹고 세상으로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땅을 살리고 곡식을 살리고 자기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농부들, 그들의 저 오랜 삶을 우리들 삶의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다. 동네 어른들이 맑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 속에 자라는 벼와 곡식들을 보며 한탄한다. 우리들이 농사지은 것은 값이 땅이 꺼지게 떨어지고 우리가 사오는 것들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고. 그러기를, 그런 세월이 얼마나 오래 되었던가. 가을의 문턱에 서서 농부들의 한숨이 우리 땅을 꺼지게 한다./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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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22 23:02

[금요칼럼] 어머니의 태극기 - 장인순

광복 63주년과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을 맞은 8월이다. 연구실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언덕의 대형 태극기는 하늘에 계신 어머님과 태극기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와함께 태극마크를 단 한국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삼 조국의 의미를 생각한다. 과거 우리나라는 수없는 외침으로 짓밟히고 갈갈이 찢겨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우리 국민 특유의 민족혼이 자유민주주의와 맞물려 그 많은 상처를 치유했다. 아직은 분단의 아픔은 있지만 세계 11번째 경제대국이 된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바로 이 땅에서 살아온 우리들의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보릿고개와 배고픔이 상식으로 통했고 국민소득 100불 시대였던 1960년대, 한국 젊은이들에게 외국유학은 꿈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목표였다. 결핵으로 힘들었던 것을 털고 1969년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쥐어줄 100불(당시 정부에서 허용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힘들어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쩌면 아들의 유학은 유일한 희망이었고, 가난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삶의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어렵게 마련해주신 100불은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님의 애틋한 사랑 그 자체였다.그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았던 유학길에 오르기 전날 밤 어머니께서 내방에 들어오셨다. 떠나기 전 어머니께서는 내게 눈물과 정감을 나누어 주시는 대신 하얀 종이에 곱게 싼 것을 건네주시고는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순간 내 손안에 들려진 무게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것은 무엇일까? 평소에 말씀이 적으셨고, 아무리 힘들어도 7남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주신 종이를 풀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깨끗한 태극기' 한 장이 얌전히 접혀 있었기 때문이다. 태극기를 펼쳐들고 오랫동안 어머니 마음 앞에서 가슴이 메는 통증을 느꼈다. 교육을 받지도 못한 어머니가 단돈 100불을 가지고 유학을 떠나는 아들에게 주신 태극기에는 어떤 의미와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십여 년 이상 일본에 사시면서 국가가 없는 국민의 슬픈 비애를 몸소 체험하셨던 어머니이기에, 더 큰 땅에 가서 공부 마치고 빨리 귀국하여 조국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라는 어머님의 민족혼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내가 학위를 받을 때 그렇게 기뻐하시던 어머니! 그 후 일 년 만에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 이 나이에도 변하지 않았다. '어머니'란 언어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하고 우리들의 삶에 가장 가까운 단어이기 때문 아닐까!1999년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장으로 취임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연구원 입구 언덕 위에 12X9m짜리 대형 태극기를 걸 수 있는 국기 게양대를 만든 것이었다. 태극기는 지금도 1년 내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대한민국의 얼과 함께 휘날리고 있다. 미국에서 태어난 두 딸을 유학 보낼 때 가방 속에 몰래 태극기를 하나씩 넣어 보낸 적이 있다. 그 후 딸아이들이 머무른 곳에 가보니 놀랍게도 아이들 공부방 벽에 태극기가 걸려있지 않는가. 내가 그 시절 어머니께 전해 받았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그 곳에 걸려 있는 듯 숙연함에 목이 멨다. 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마음의 선물은 무엇일까! 어느 시인의 "엄마는 눈물을 진주로 만든다"는 말처럼 여리면서도 따뜻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강한 우리들 어머니들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뜨거운 교육열이 있었기에 조국근대화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태극기는 하나인데 왜 이렇게 분열되고 촛불집회 속에 반국가, 반민주주의 구호가 나오는 걸까. 참으로 안타깝다. 8월 광복절, 올림픽 경기장에서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뛰는 우리 선수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이 땅의 민주주의 꽃을 피우는, 그러면서 남을 배려하고 질서있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하나의 태극기 아래 힘을 합쳐서 작지만 강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여주었으면 한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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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15 23:02

[금요칼럼] '제3의 눈' - 박범신

티베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일대의 사원에 가면 사원꼭대기에 커다랗게 한개의 눈이 그려져 있는 걸 흔히 보게 된다. 기념품 가게에서도 이 외짝눈이 새겨진 T셔츠나 돌 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사원 입구에서 쭉 찢어진 커다란 눈을 만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한다. 마치 숨기고싶은 내 오장육부를 투사하는 듯한 눈빛이다.이 눈을 흔히 '제3의 눈'이라 부른다.이는 영혼의 눈이다. 티베트에서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은 일반적으로 존재의 근원인 절대적 본성을 똑바로 보는 정견이 그 첫째이고, 정견을 확고히 다져 끊이지 않는 체험으로 다지는 명상이 그 둘째이며, 그러한 정견과 명상을 우리의 실재, 또는 현실적인 삶 전체와 합일시키는 행위가 그 셋째이다. '제3의 눈'이란 말할 것도 없이 정견을 위한 눈이다.사람에겐 눈이 두개 있다.좌우에 눈이 있는 것은 넓게 보자는 것보다 오히려 똑바로 보자는 뜻에 더 부합된다. 한쪽눈만 가지고선 아무래도 사물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개의 눈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믿는 현상에 불과하다. 객관적 현상을 똑바로 보자는 사실주의적 세계관이 바로 이 두개의 눈에서 비롯된다.그렇다면 현상은 곧 진실인가.사실주의적 세계관의 문제는 진실이 항상 사실이나 현상과 완전히 부합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고약하게도 사람은 보는 데로만 알고 보는 데로만 느끼고 보는 데로만 삶을 운영하지 않는다. 사람은 두개의 눈으로 현상을 보지만 보이지 않는 ' 제3의 눈' 으로 현상 너머의 다른 본질을 또 본다. 그것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거창하게 본성을 꿰뚫는 영혼의 눈이라고까지 갖다 붙일 것도 없다. 문화적 인간과 야만적 인간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는 '제3의 눈'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억의 눈과 상상력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사물을 볼 때 사람은 어떻게 보는가.사람이 생물학적 시각으로 보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지만 은밀한 내적 통로를 통하여 그는 그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지않고 기억과 상상력을 보태어 해석한다. 이를테면 숲을 보면서 수목장이란 장례문화를 생각하고, 장례문화를 통해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아버지를 통해 평생 나무꾼이나 다름없이 살아온 아버지의 가난한 생애에 닿는다. 가난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도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기억의 총체성을 부과해서 그는 숲을 보고 해석하는 셈이 된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더 열심히 뛸 수도 있다.상상력도 마찬가지 힘을 발휘한다.숲을 보고 자연의 원리를 상상할 수 있고 자연의 원리를 짚어 우주를 내다볼 수도 있다. 지구조차 떠날 수 없는 인간이 신을 찬양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신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은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조건은 따져보면 식욕과 성욕조차 이길 수 없는 동물의 층위에 놓여있지만, 그와 동시에 신적인간에 이를 수 있을 만큼 그 층위가 넓은 것이 또한 사실이다. 어떤 이는 그 자신 부처가 된다. 인간이 지상에서 하늘까지 그토록 넓은 층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기억과 상상력이라는 '제3의 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각설하고.단지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은 오로지 생물학적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의 삶을 운영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잘 먹고 어떻게 잘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비로소 기억과 눈과 상상력의 눈이 작동한다. 짐승의 층위로부터 하늘의 층위에 이르기까지, 거의 무한대의 스펙트럼 앞에 존재하는 인간이 어떤 층위에다 자신의 삶은 내려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기억과 상상력으로 요약되는 '제3의 눈'에 달려 있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우리가 세계에서 최상의 정보화 국가를 이룬다고 해도 이 모든 정보가 오히려 기억과 상상력을 도태시키거나 감금시키는 방향으로만 확장된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성공'이라고 부르는 '신화'도 마찬가지다. '제3의 눈'을 감금시키는 정보화나 성공은 우리를 다만 물질의 감옥 속에 가둘 뿐이다./박범신(소설가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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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08 23:02

[금요칼럼] 인터넷과 광장 - 정목일

도시엔 광장, 집에는 거실이란 소통 공간이 있다. 도시나 가정이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인터넷시대가 되자 광장, 거실이란 소통 공간이 퇴조하고 만다. 한 공간에 함께 모여 의사교환을 나누던 방법에서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의사교환을 나누는 시대가 된 것이다.이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은 인간의 삶과 사회에 일찍이 상상할 수 없던 변화를 가져왔다. 대중에게 가려지기 마련이었던 개인의 생각과 의견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여론을 주도한다. 익명성을 지닌 인터넷이 온갖 의견과 생각을 쏟아 붓고, 성인이라면 거의 하나씩 휴대하고 있는 휴대폰과 디지털카메라가 순간을 포착하여 인터넷을 통해 유통시킨다.광장과 거실이란 소통 공간의 효용성이 차츰 줄어들게 되었지만,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소통의 양(量)은 증폭되고 시. 공간을 초월한다. 대표자를 뽑아서 민의를 반영하는 간접민주주의 제도에서, 인터넷시대의 도래는 소통의 혁명을 몰고 왔다. 대표자의 입 하나만을 바라보던 종전과는 달리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입이 생겨난 셈이다. 인터넷은 이제 소통의 광장이고 삶의 숨결이고 표정이다.그러나 인터넷은 사이버 광장이다. 직접 만나 얼굴 표정을 보면서 나누는 소통감과는 거리가 멀다. 소통의 원활과 거리낌 없는 방법에도 불구하고 현장과 체감의 결핍을 느낀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교감과 소통에서 늘 부족감을 지녔던 직접 만남과 소통의 결여를 보완한 형태가 다름 아닌 '쇠고기 촛불 집회'이다.이번 촛불시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의 사회적인 문화적인 혁명의 조짐을 지닌 이 현상을 두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충돌이라고 보는 견해,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서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우리나라에 이 같은 현상이 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인구밀도가 좁은 데다 인터넷 이용자가 많은 점, 정치 관심도가 높은 국민성, 보수와 진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이번 촛불집회의 시발로 앞으로 빈번하게 촛불이 시청 광화문 광장을 덮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요한 이슈나 국가적 사회적인 사안에 대해 정부와 정치권이 제대로의 대안을 내놓지 못할 때, 촛불이 켜지게 될 것이다. 국민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것이며, 민심을 전달하겠다는 의식으로 촛불을 들 것이다.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높아질수록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질 전망이다. 인터넷과 광장이 결합된 새 소통장치로써 '촛불집회'가 나타난 이상, 이에 대한 효율적인 대안과 방법론이 필요하다. 광장의 촛불집회는 정부, 국회, 정치권이 제 몫을 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인 만큼 지금부터라도 제 역할을 수행하고 신뢰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우리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인쇄매체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던 타고난 정보유전인자를 지닌 민족답게 인터넷과 광장을 결부시켜 새로운 소통 방법인 '촛불집회'를 창출해 냈다. 촛불집회가 그동안 시위, 항의, 부정의 함성을 토해냈지만, 이 새로운 소통장치를 긍정적으로 전개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끌어낸 붉은 악마의 응원집회처럼 긍정적으로 작동하여 신바람을 내게 된다면 국력은 활기를 띨 것이지만, 국정과 민생을 마비시키고 지루하게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면 피로감이 생기게 될 게 분명하다. 촛불집회가 민족의 단합과 결속과 애국심을 바탕으로 축제의 신바람으로 타올라 국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 돼야 한다.인터넷의 소통 방법과 광장을 연결시킨 촛불집회를 소통문화의 진화라고 볼 것인지, 우리는 이쯤에서 바람직한 방법과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에 출현한 이 소통장치가 건전하게 작동하고 국가 발전을 위한 새 동력이 돼야 한다./정목일(수필가창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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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8.01 23:02

[금요칼럼] 정자나무 밑이 텅텅 비어간다 - 김용택

남도 쪽 마을을 지나다 보면 마을 앞에는 여지없이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정자나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 정자를 짓기도 했기 때문이다.마을 앞에 있는 정자나무는 마을의 앞을 지켜주고 마을 뒤에 있는 느티나무는 마을의 뒤를 지켜 준다. 마을 앞 들 가운데에도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이 있는데, 이 나무는 들을 지켜 주는 나무다. 마을과 마을의 경계나 산마루에도 느티나무를 심어 가꾸기도 했다. 마을 앞 허전한 곳에 이 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주기도 했고, 마을 강가에 심어 강물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준다. 작고 조촐하고 가난한 마을의 뒤나 앞에 심어진 느티나무는 수령이 오래 가고 또 모양이 풍성해 보여서 봄여름 가을 겨울 마을을 풍요롭게 가꾸어주기도 한다. 정자나무라고 하고 당산나무라고도 하는 이 나무의 종류는 대개 느티나무, 팽나무, 또는 서 나무가 많다. 어떤 마을은 소나무나 참나무로 정자나무나 당산 나무를 삼은 마을도 있다.우리 마을에는 네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마을 앞 강 언덕에 심어 가꾼 이 느티나무를 정자나무라고 부른다. 이 정자나무는 한 15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평생을 홀로 사셨던 서춘 할아버지가 심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여름이 되면 마을의 모든 남자들은 점심을 먹고 다 이 나무 아래로 모여 들었다.잎이 무성한 이 나무는 그늘이 넓고 짙었다.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이 나무 아래 들면 바람이 일고 땀이 개었다. 나무 아래는 넓적한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서 사람들이 편히 누워 낮잠을 잘 수 있었다. 잠을 자지 않은 사람들은 짚신을 삼기도 했고, 장기를 두기도 했고, 아이들은 모래를 가지고 놀기도 했고, 고누를 두기도 했고, 또 어 떤 날은 마을의 일로 대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이 나무 아래에서는 마을의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다가 오랜 시간 동안 마을 사람들 입줄에 오르내린 후 이 나무 아래에서 또 해결이 되었다.비유하기가 좀 '거시기' 하지만 이 나무는 마을의 '국회의사당'이었다. 우리 마을의 모든 역사를, 우리 마을 사람들의 모든 비리를 다 알고 있을 이 나무 아래서는 그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나무가 마을 사람들의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 마을에 순창 양반이라고 부르는 분이 살았었다. 얼굴이 하얗고 걸음걸이가 무척 조심스러운 분이셨다. 정자나무에서 우는 시끄러운 매미 소리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이 다 잠이 들어도 이 분은 늘 앉는 나무 가양자리 그 자리 그 그늘 아래 앉아 맑은 강물과 앞산을 무심히 바라보며 시조를 하셨다. 청사안이이이이이이이, 으으으으으으, 이이이이이, 아아아아아아, 하시다가 한음을 낮추거나 높여 또 으으으으으으, 아아아아아아, 이이이이이 하셨다. 내가 듣기에는 참으로 지루한 아아나, 으으나, 이이이였다. 그 어른의 노래가 너무 단조롭고 지루했던 내가 어느 날 시조를 듣고 있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근데요, 할아버지 왜 맨 날 청산만 하세요?" 그랬더니, 그 어른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시끄럽다. 이놈아!" 하시고 또 그 '청산이이아아아으으으' 였다.눈이 맑으신 분이셨다. 홀로 깨어 앉아 그렇게 청산을 찾다가 그 어른은 햇살 속으로 가만가만 걸어가 강변에서 소똥을 주워 바제기 가득 담아 짊어지고 집으로 가셨다. 그 시끄럽고 무덥던 여름날의 그 정자나무 밑이 텅텅 비어가면서 농촌 공동체는 사라졌다.매미들만 무성한 정자 나뭇잎 속에서 귀가 따갑게 울고 있다.▲ 약력*1948년 전북임실 출생*1982년 '창비'로 등단*시집"섬진강. 맑은날. 나무,그여자네 집"등이 있고, 산문집 "섬진강 이야기"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등이 있다.*소월시 문학상과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지금은 고향마을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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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7.25 23:02

[금요칼럼] 인문서적외 과학책도 읽자 - 장인순

이 시대를 과학기술이 역사를 선도하는 시대라 한다. 다양한 과학기술의 빠른 발달은 일반 대중은 물론 때론 과학자들의 생각마저 앞질러 갈만큼 엄청나게 빠르게 발전 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백 년 전에는 일상생활용품이 2백 여개였는데, 지금은 3만2천 개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불확실성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그 불확실성의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모든 분야에서 균형감각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환경문제, 자원문제 등 모든 것은 인간의 욕심으로 야기된 균형감각의 상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왜 무지개는 아름다운가!어느 날 文史哲科 600이란 글을 읽고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면서, 좀 아쉬웠던 것은 과학기술이 역사를 선도하는 시대에 과학이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文史哲科 700을 권하고 싶다. 이는 문학서적 300권, 역사서적 100권, 철학서적 100권 그리고 과학서적 200권 프러스 좋은 시집들을 이삼십대에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文史哲에서 문학은 언어의 보고, 역사는 체험의 보고, 철학은 초월의 보고라고 한다면 과학은 전적으로 자연의 오묘한 질서에 의한 것으로 신비의 보고 혹은 진리의 보고라고 하고 싶다. 모든 학문을 통해서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인문?사회?과학 등 다양한 책들을 접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가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하며 건강을 유지하듯이, 우리들의 생각도 다양한 지식을 통해서 균형감각을 가지며 우리의 사고력과 상상력을 향상시켜, 지식을 지혜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지혜는 지식보다 입체적이고 균형 감각이 있어 사물을 단순한 흑백논리보다도 다양한 색을 가진 무지개논리로 판단하는 것이다. <참고로 빛은 작게는 7가지 색으로 많게는 수천가지의 색을 가지고 있으며, 빛 속의 여러 가지 색으로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이는 곧 우리들의 생각에 아름다운 무지개 색깔을 칠하는 것으로 균형 감각이 있고 법과 질서를 지킬 줄 아는 성숙한 선진 시민이 되기 위해서이다. 무지개색깔이 흑백보다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무지개 색깔의 아름다운 심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하는 인격의 동반자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언론이 순화되어야 국민정서가 순화된다국가의 근본을 흔들어 놓은 촛불 시위를 보면서 왜 우리는 이런 문제를 정치 논리가 아닌 과학적인 논리로 풀지 못할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흑백논리가 아니고 모든 것은 아우르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논리 말이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시위현장에 나온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면서, 쇠파이프와 물대포가 난무하는 곳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울까 하는 것이다. 언론이 국익을 최우선으로 한다면 이런 것을 외면할 용기는 없는 것인지! 文史哲科 700을 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이 책을 가까이 하고, 특히 국민을 고객으로 하는 정치인이나 언론인 들이 공부를 한다면 이런 사회논란은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임 있는 언론인이 되려면, 국민을 위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는 먼저 공부하는 언론인이 되어야하고, 반드시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자세, 흑백논리가 아닌 다양한 색깔을 가진 무지개논리로 무장된,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왜곡 했을 때에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언론인 그가 바로 지혜 있고 용기가 있는 언론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론인은 언론이 순화되면 국민정서가 순화되고 선진시민이 된다는 것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기 바란다.▲ 시어가 가진 언어의 생명력내 서재에는 수백 권의 시집이 있다. 힘들었던 유학시절 시를 읽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것은 시처럼 순수하고, 시처럼 아름답고, 시처럼 예리한 언어는 없다, 왜냐하면 시어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언어의 생명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시를 많이 읽으면 작은 촛불은 있을 수 있어도 쇠파이프나 물대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이 땅에 사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들과 정치인 그리고 언론인에게 文史哲科 700은 물론 시를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아름다운 시를 통해서 우리들의 생각에 우리들의 마음에 아름다운 무지개 색깔을 입히자. 왜냐하면 시는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지혜로 끝나기 때문이다./장인순(한국원자력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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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7.18 23:02

[금요칼럼] '보리밥' 에서 생각나는 것들 - 박범신

등산로 입구엔 '보리밥집'이 꼭 있다. 손님들은 주로 장년과 노년층이다. 그들은 보리밥이 꼭 좋아서 먹으러 온다기보다 보통 추억을 쫓아서 보리밥집에 온다. 절대빈곤의 시절 눈물로 비벼먹던 보리밥에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내게는 위로 누나들만 네 분이었다.어린시절, 어머니는 겉보리를 앉힌 무쇠 솥 한가운데 쌀을 한줌이나 될까 말까 하게 얹고 밥을 해서 쌀쪽만 푹 퍼내어 내 밥그릇에 담았다. 당연히 누나들은 모두 보리곱삶이 밥을 먹었고 나는 보리가 섞인 쌀밥을 먹었다. 한 번은 불만에 가득한 막내누나가 자신의 밥을 잿간에 내다버린 적도 있었다. 막내누나로선 억울한 분풀이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보리곱삶이래도, 복터진 줄 알아야지!"어머니는 종주먹을 들이대며 말하곤 했다. 방귀 한두 번 뀌고 나면 뱃속이 툭툭 가라앉고 마는 게 보리밥이었다. 그러나 보리밥조차 배불리 못 먹을 땐 보리가루나 밀가루 등으로 풀떼기를 쑤어먹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맹물이나 마시며 끼니를 그냥 걸렀다. 어머니 젊었을 때는 왜인들이 거름으로 실어온 상한 깻묵으로 죽을 끓여먹기도 했다고 했다.나는 보리밥을 좋아하지 않는다.누나들한테 뒷통수를 쥐어 박히면서 쌀 섞인 보리밥을 먹고 컸지만, 어쨌든 보리밥은 여러모로 내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태도는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뉜다. 누구는 가난에 대한 상처 때문에 한사코 보리밥을 피하고, 또 누구는 일부러 그걸 사먹으러 등산로 밑에까지 간다. 이제 웬만하면 다 '쌀밥'을 먹고 사는 세상이 됐지만, 그러나 세계를 이끌고 가는 중?장년층의 심리 속엔 아직도 절대빈곤에서 겪었던 상처들이 남아있다. 남아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것들이 행동양식이나 세계관에 결정적인 영행으르 미치기도 한다.식량폭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카메룬에선 식량문제에 따른 폭동으로 수십 명이 죽었고 아이티 역시 사람이 죽고 총리까지 해임됐다. 식량폭동은 중남미와 아랍지역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까지 도미노처럼 나날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름값이 치솟는데 따라 식량 값은 더욱 더 오를 것이다. 식량 생산비의 90% 이상이 석유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트랙터 운행은 물론이고 농약과 비료생산, 수확과 운송 저장 등 모든 생산과 유통과정에 기름이 필요하다. 오일쇼크는 보나마나 식량쇼크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더구나 석유고갈에 대비해서 곡물을 발효시켜 자동차 등에 연료첨가제로 사용하는 마이오에탄올 개발에 선진국들은 이미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 곡물생산량의 40%를 선진국에서 가축들에게 이미 먹이고 있는 참인데, 이제 자동차가 사람이 먹어야 할 식량을 먹어치우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단기고수익을 목표로 움직이는 국제투기 자본들이 석유와 함께 식량이라는 먹잇감을 쫓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맹렬히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우리 먹거리의 70% 이상은 이미 우리가 생산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 치면, 식량생산에 천문학적 돈을 들이는 것보다 수출을 늘려 그 남은 이익으로 식량을 사다먹는 게 수지맞는 장사로 보인다. 지금까지 역대정권이 밀고나온 정책방향도 이런 계산속을 전제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미국과의 FTA도 농업에선 좀 손해 볼망정 자동차 등을 팔아먹는데 유리하도록 정부가 머리를 많이 썼을 것이다.그러나, 만약 돈이 있어도 식량을 살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징후는 충분하다. 전문가들조차 머지않아 식량이 무기가 되는 시대가 온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우리보다 앞서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나 중남미, 한때 식량수출국이었던 필리핀, 인도 등의 예를 보라. 그들의 농업기반은 최근 십여 년 사이 완전히 몰락하다시피 했고, 그 결과 강대국의 식민지배 상태를 자동적으로 불러왔다.'보리밥'과 '풀떼기'의 상처는 모두 아문 것이 아니다. 쇠고기문제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할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검역주권'이 아니라 '식량주권'이다. 죽어도, 다시 '보리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안전한' 먹거리의 계속적인 보장이고 문화적인 식탁이다. '식량주권'을 튼튼히 확보하는 길을 하루빨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 박범신 작가는 출생 1946년 8월 24일 (충청남도 논산) 소속 민족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 학력 고려대학교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수상 2005년 제11회 한무숙문학상 경력 민족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2007년 1월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특이사항 블로그 연재소설 '촐라체'의 작가./박범신(작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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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7.11 23:02

[금요칼럼] 촛불의 현상학 - 정목일

2008년의 우리 화두는 '촛불'로 집약된다. 한국에는 지금 촛불뿐인 듯하다. 촛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형국이다. 촛불 때문에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도 없다.'당신들도 조용하게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침착하게 빛의 일을 하고 있는 경쾌한 불꽃 앞에서 가만히 숨 쉬어 보라'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가스똥 바슐라르(1884~1962)가 그의 저서 '촛불의 미학'에서 한 말이다. 촛불이 방안에 켜지는 순간, 촛불이 놓인 자리는 우주와 사색의 중심점이 된다. 촛불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바라보도록 강요하고 있다. 촛불을 함께 응시함으로써 우리는 이 순간 한 공간에 있음을 인식한다."창조에 있어서 '삶'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모든 형태, 모든 존재를 통하여 오직 하나의 동일한 정신, 즉 유일한 불꽃이다."바슐라르는 촛불을 보면서 몽상과 철학과 존재의 미학을 탐구했다.촛불은 아픈 사람을 간호한다든가, 누가 죽었을 때 추모하기 위해 밝혔다. 제의에서도 촛불은 사용된다. 초를 태워 빛을 만드는 것을 보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며 집중력과 정신의 심지에서 촛불이 되어 타오르는 걸 느끼게 된다.우리나라에서 촛불은 어느새 제의적이거나 미학적인 의미를 벗어나 항의, 저항, 농성의 시위행위로 바뀌었다. 큰 사건 때마다 촛불을 들고 모이게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촛불문화나 촛불정치라는 말이 등장하고, 이제 이러한 집단행동이 정당화되고 미화되고 있다. 무슨 일에나 촛불만 들고 나가면 정당하고 의미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현실이 놀랍다. 이 촛불행사는 '촛불시위' 또는 '촛불집회'라고 하다가 이제는 '촛불문화(제)' '촛불정치'라는 말까지 등장했다.바람에 꺼질듯 가냘프고 여린 의미의 촛불이 한국에서 시위나 저항, 공격 등의 거친 의미로 바뀌게 된 것은 한국인들의 강한 집단저항 성향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정부의 쇠고기 협상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여 촛불을 들고 나오는 사람도 많겠지만,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촛불시위의 소득으로는 미국과 재협상의 길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켤 것인가?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촛불은 이제 바람에 꺼질 듯한 약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할 듯한 거센 파도로 밀려들고 있다. 촛불집회라는 군중심리 속에는 개개인의 정체가 가려지게 되는 익명성이 도사리고 있다. 신속성과 보편성에 익명성이 곁들여진 인터넷이 한국인의 집단 쏠림현상을 부추기고 있다고 본다.촛불 앞에 국회도 없고 정치도 없다. 중재도 조절도 없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적마다 성명서와 입장을 밝히던 사회단체와 지식인들은 침묵하고 있다. 타오르는 촛불의 군중심리에 자신이 탈까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사이, 우리 사회는 전진을 멈추고 방황과 혼동의 회오리 속에 빠져있다. 난국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과 방안을 내놓기 위해 정치권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가야 한다. 지금은 각계각층이 앞서서 지혜의 촛불을 켜야 할 때다. 촛불의 군중심리에 눈치만 보지 말고 중의를 모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촛불집회는 소통의식의 일면이 있다. 인터넷상으로만 소통하던 행위에서 오는 체감적인 면의 부족감을 촛불집회를 통해 보충하고 확인하는 심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지금 촛불의 방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켤 것인가? 끌 것인가? 촛불에 가려져 있는 민생과 경제의 표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 분야에서 성찰과 반성 속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찾는 논의가 절실하며, 상생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정목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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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7.04 23:02

[금요칼럼] 다시, 유마거사를 생각하다 - 김탁환

촛불로 뜨거운 6월이다. 거리로 내려온 별무리처럼 총총 빛나는 불꽃을 따라, 어느 가난한 병자를 떠올린다. 그의 이름은 유마다.작년 여름 인도를 떠돌 기회가 있어 바이샬리란 도시에 들렀다. 흙탕물 속을 헤엄치는 물소 곁에서 일분을, 한 시간을, 한 나절을 흘려 보냈다. 홍수 탓에 길이 끊긴 저 건너 마을이 바로 내가 꼭 방문하고 싶었던 참 맑은 영혼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유마다.1980년대 유마는, 종교적 색채와 무관하게,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민중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지식인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마경> 곳곳에 보살의 대비심(大悲心)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뜨거웠다. "자식이 병들면 부모도 병들고 자식이 나으면 부모도 낫습니다. 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중생을 마치 외아들처럼 사랑합니다. 중생이 병들면 보살도 병들고,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유마의 목소리는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에서 놀라운 사랑 고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 /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같은 병을 앓고 싶다는 말보다 더 가슴 절절한 말이 있을까. 같이 '죽는' 일은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같이 '앓는' 일은 서로를 품고 이해하는 제법 긴 '동안'이다. 그의 병까지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에 감내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리. 흔히 사랑 이야기에 질병이 동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병이 결핵이든 암이든, 사랑 이야기에는 궁극적으로 함께 아파하고픈 갈망과 더 이상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절망이 교차한다. <늙어가는 아내에게>를 읽은 후,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을 펼쳐드는 것도 이 도저한 은유에 매혹된 탓이다.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 놓았는지 모르잖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질병일지라도, 사랑하는 이로부터 나왔고, 하여 그와 함께 앓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 이보다 더 정직한 사랑의 자세를 나는 알지 못한다.2008년 6월, 대한민국의 화두는 '소통'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법을 이야기했고 관례를 거론했고 논리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런 말들의 잔칫상은 지루하고 식상하다. 소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국민과 같은 자세로 국민과 같은 병에 걸려 잠시라도 앓아보기를 권한다. 그 아픔이 얼마나 지독한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말도 헛것이며 소통은 불가능하다.정부 대표단이 미국에 가서 추가 협상을 마치고 돌아왔는데도 촛불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할 만큼 했다는 소리도 들려오고 계속 더 목소리를 높이자는 주장도 있다. 과연 정부는 이 난제를 어찌 풀어야 할까. 지금이야말로 유마거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는 중생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먼저 살피고, 중생을 그 지위나 능력의 단면에 따라 미리 예측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대도(大道)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작은 길을 제시하지 마십시오. 햇빛을 저 반딧불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큰 바다를 소 발자국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사자후를 들짐승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취급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집회의 사소한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늘 기쁘게 하면서 전혀 후회가 없는" 바로 그 크나큰 기쁨[大喜]을 추구할 때다./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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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6.27 23:02

[금요칼럼] 장마를 기다리나? - 김민영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진 지 한참 지났다. 한자리 수로 떨어졌다는 충격적인 여론조사 결과도 나오고 있다. 국민 열 명 가운데 한 두 사람만 지지하는 대통령이라면 이미 정상적인 통치행위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듯하다. 국민들은 지난 한달 보름여 동안 촛불을 들고 미국산쇠고기의 전면수입을 반대하며 대통령의 성의 있는 조치를 촉구했다. 급기야 6월 10일에는 전국적으로 1백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이명박 대통령의 충심어린 사죄와 쇠고기 재협상, 반서민적 정책의 전면적 전환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제껏 변화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한 달 보름, 그리고 연인원 수백만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이명박 대통령의 대답은 여전히 엇박자다. 예정되었던 국민과의 대화도 연기하고 내각과 청와대의 총사퇴도 미뤘다. 국민 앞에 머리 숙이며 대통령 스스로 내세우던 소통과 쇄신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오히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이 사태를 정치적 좌우대결이라는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보고 있으며 보수의 결집을 통해 상황을 돌파해보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 같다. 예컨대 친박연대, 자유선진당과의 정치적 딜을 추진하며 보수연합을 가시화하고 있다. 친박연대의 복당을 추진하고, 자유선진당에는 총리 자리를 내민 것이다. 이와 더불어 KBS에 대해서는 감사원 감사를 실시하고 정연주사장을 검찰이 소환하는 등 퇴진압력을 가하고 있다. YTN이나 MBC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방송장악 의도를 감추려 하지 않고 있다. 보수논객들은 이심전심으로 촛불집회를 좌우대결, 정치투쟁으로 몰아가고 촛불을 든 국민들을 조롱하며 강경진압을 대통령에게 요구하고 있다.우선 보수적 정치세력과 적절한 권력나누기를 통해 보수지지층을 결집시킨 다음, 정부가 내세우는 것처럼 미국과 잘 협의하여 30개월이상 쇠고기만 당분간 안 들어오게 하고 이를 친정부적 신문들과 순치된 방송이 여론몰이를 해나간다면 상황을 충분히 반전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조금만 더 버티면 장마가 다가오고 있다는 계산도 깔려있지 않겠는가? 장마에 촛불은 꺼지고 신문과 방송이 앵무새처럼 정부입장을 대변하면 하나로 뭉쳤던 시민들은 흩어지고 자포자기 하지 않겠느냐는 그럴듯한 시나리오이다.과연 그럴까? 원인 진단이 틀렸으니 그 대책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선 미국산쇠고기의 안전성 문제를 놓고 좌우, 진보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확실한 안전성에 대한 담보가 없다면 국민들이 쉽게 수긍할리 만무하다. 시민들은 누구나 쇠고기 문제는 이념적 정치적 문제를 떠나 나 자신, 내 가족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문제라 생각하는데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일부 보수논객들만 이를 이념적, 정치적 문제로 보고 있다. 한마디로 이는 남의 다리 긁는 대책이라 하겠다. 또한 과거 권위주의 통치시대처럼 신문, 방송을 장악할 수 있다는 발상도 한심하다. 언론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여 사회적 비판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국민적 합의이자 원칙이라 할 것이다. 그 어떤 정당성도 없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보니 국민들의 저항만 커지고 있다. 나아가 인터넷 공간에서 거의 무제한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오고 가고 있으며 토론을 통해 진실과 왜곡을 갈라내는데 익숙한 네티즌들이 존재하는데 몇몇 대형 언론사를 장악하면 다 된다는 발상은 낡을 대로 낡은 것이다.시민들이 지쳐가고 장마가 겹치면 광장의 촛불은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 있지 않겠냐는 계산도 오판이다. 지금 국민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숨을 고르며 지켜보고 있다. 그 대책에 진정성이 담겨있으며 신뢰할 만 하다면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또다시 꼼수와 미봉책의 연속이라면 절대 스스로 촛불을 끄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국민주권, 국민을 위한 정책은 결코 공짜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난 한 달 보름동안 촛불을 들고 밤을 세우며 몸으로 깨달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광장에 나온 국민들은 신뢰할 수 없으며 반서민적 정책으로 일관하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OUT'을 외치고 있지 않은가? 더 늦기 전에 이명박대통령은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대책, 국정운영의 근본적 변화로 화답해야 할 것이다.보수세력을 결집시키고 홍보만 잘하면 된다는 발상 아니겠는가? 지금 상황을 좌우대결이라는 이념적 프레임으로 보는 한 이같은 황당한 대책 말고 내세울 게 없을 것이다./김민영(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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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6.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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