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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경제성장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전홍택

이명박 당선인이 선거 공약으로 내 건 연 7% 경제성장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인수위는 고유가 등 대외 여건의 악화를 감안하여 올해 성장목표를 6%로 하향조정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경제성장이 외환위기 이후 10년 만에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우리가 원하는 성장은 대다수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오는 성장이다. 이러한 성장은 개인의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거의 예외 없이 더 많은 기회, 다양성에 대한 관용, 사회적 신분 상승 가능성 증대와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 등 사회정치문화 나아가서는 개인의 도덕적 성격을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배양하는 최상의 토양이다.미국에서는 2차 대전 후 60년대 전반까지의 활발한 경제 성장이 토대가 되어 케네디 대통령 이래 흑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되고 빈곤층 대상 복지 프로그램이 확대 되었으며, 소수자의 가치관 존중 등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확산되었다.반면, 1970년대 들어 지속된 경제침체의 영향으로 1980년대에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들의 흑인에 대한 대학입학 할당제 폐지 등 소수자에 대한 배려 축소, 이민에 대한 반감 증가 등 그 동안의 정치사회문화적 발전을 되돌리는 현상이 나타났다.우리나라는 70년대 이후 외환위기 전까지 연 7%를 넘는 성장을 통해 1960년 50세에 불과하던 기대수명이 1980년 65.7세, 2000년 76세로 늘어나는 등 대다수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크게 향상시켜 왔을 뿐만 아니라 성장의 토대 위에 정치 민주화에 성공하였고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 배려 등 다양성에 대한 관용, 사회적 신분상승 기회제공 등 바람직한 정치사회문화적 발전을 이룩해 왔다.그러나 외환위기 후에는 경제성장이 연 4% 수준으로 크게 둔화된 가운데 일자리 창출도 연 30만개 이하로 줄어든 결과, 청년층 경제활동 인구가 2004년부터 4년 연속 감소하였으며, 15세 이상 인구의 고용률이 선진국에 크게 못 미치는 6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에 따라 청년층은 취업걱정, 장년층은 실직걱정에 시달리는 고달픈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연 6%에 달하던 1인당 소득 증가율이 외환위기 후 거의 절반으로 줄어 든 데다 경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됨으로써 서민중산층은 성장의 혜택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성장 둔화가 지속된다면 향후 정치사회문화 발전도 정체될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청년층의 경제활동 참여와 15세 이상 인구의 고용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여 성장의 혜택이 서민과 중산층으로 확산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연 40만개 정도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경제 성장이 연 6%대로 상승해야 한다.이를 위해 새 정부는 잠재성장률을 현재의 4% 후반에서 6%대로 끌어 올리는 것을 경제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만약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쓴다면 성장률은 당장 올라갈 수 있지만 실제 성장률이 잠재 성장률 보다 높아지면 큰 후유증을 겪게 되는 것은 우리 경제가 여러 번 경험한 사실이다. 잠재 성장력을 확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이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인기 있는 정책은 아니다. 미국이 90년대 중반부터 '신경제' 호황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정보통신 분야의 기술 혁신이 이루어진데 기인한다.그러나 80년대에 이루어진 광범위한 규제완화로 경제시스템의 효율이 높아지고 또한 90년대 초 클린턴 대통령의 강력한 재정 적자 감축 추진으로 미래인플레에 대한 우려가 불식되어 장기 금리 하락이 이루어진 것도 90년대 경제 호황의 큰 요인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저소득층 교육 기회 확대 프로그램 등 민주당의 야심찬 정책을 선거 공약으로 하였으나 당선 후 재정 적자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재정지출 프로그램을 대폭 삭감하는 인기 없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명박 정부도 단기적 성과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번영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규제완화와 교육 개혁,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등을 통해 잠재 성장력 확충을 꾸준하게 추진하기를 기대해 본다./전홍택(한국개발연구원 경제정보센터소장)전홍택 소장은 재경부 금융발전심의위원, 정보통신부 정책심의위원,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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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1.18 23:02

[금요칼럼] 戊子年의 국제정세 전망 - 이서항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시간을 재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달이 지고 해가 뜨는 자연현상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여하여 달력을 만들고 해(年)를 구분하는 것은 우리 인간만이 할 수 있으며 해가 바뀔 때 사람들은 앞일을 예측하면서 새 희망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무자년 새해도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바램을 안고 기지개를 편지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벽두부터 국제유가가 배럴당 1백달러를 넘어서고 있어 국민 모두를 안타깝게 하고 있지만 아직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10년만의 정권교체로 새 정부가 출범하는 우리에게 올 한해동안 국제정세는 과연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인간만이 갖고 있는 예측력을 동원하여 앞을 내다본다면 다음과 같은 네가지의 전망이 가능하다.우선 첫째,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프랑스?일본?호주 등 세계 주요국에서 정권교체 내지 정부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곧 이들 국가의 대외정책 노선 변화로 이어져 새로운 국제안보 환경이 전개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2009년 미국 행정부가 공화당에서 민주당의 그것으로 바뀔 가능성은 이라크를 포함한 중동문제, 북핵문제, 기후변화문제에의 대응 등 주요 국제현안에 대한 정책기조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중국?러시아 등 이른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부상함에 따라 미국중심의 단극적 국제질서에도 일정한 변화가 예고된다.안보환경의 변화 속에서 국제사회가 직면할 가장 중요한 현안은 기후변화에의 대응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구온난화를 포함한 기후변화가 환경?안보?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온실가스 배출 감축문제는 선진국의 에너지 사용, 경제구조 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그 목표 설정과 이행방법을 둘러싸고 국가들간의 치열한 논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둘째, 세계경제 측면은 새해초부터 나타난 고유가 행진이 보여주듯 불안정성과 불균형성이 내연하는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 고유가와 함께 중국?인도 등 신흥시장국가의 자원수요 급증, 유동성 과잉에 따른 투기적 수요의 확산, 달러화의 가치 하락 및 이에 따른 세계적 불균형 조정의 어려움 등 위험요인들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경제도 판도 자체가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목이 필요한 이러한 시나리오를 그릴 수 있는 배경으로는 미국이 갖는 경제적 위상의 약화, 단일경제권 유럽연합(EU)의 영향력 증대, 중국을 비롯한 이른바 BRICs 의 급속한 부상, 그리고 동아시아의 세계경제의 중심지역으로의 부상을 들 수 있다.셋째, 동북아로 눈을 돌려보면 이 지역이 앞으로 당면할 구조적 도전의 요소는 변환하는 미국 (transforming U.S.), 부상하는 중국 (rising China), 보통화하는 일본 (normalizing Japan), 그리고 복귀하는 러시아 (returning Russia)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에서는 기존의 패권국가, 신흥국가, 그리고 재도약?재부상을 는 국가군(群)간의 경쟁과 견제가 표면화되면서 새로운 세력구도가 형성되고 그 결과 지역안보정세의 유동성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끝으로 한반도를 보면, 북한에 있어서는 대내외적으로 체제변화를 향한 필요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구도 공고화 작업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또한 시장경제요소를 도입하여 경제발전을 시도할 것이나 회복이 부진한 경제는 향후 국제사회의 지원에 그 추이가 영향 받게 될 것이며 핵무장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경제재건을 위한 환경 조성은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비핵화에 우선순위를 두는 한국의 실용정부 출범과 중국의 대북 피로감이 영향을 미쳐 북한이 핵폐기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국제사회의 지원과 교역은 크게 줄 것이며 이는 북한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평화체제 구축을 포함한 남북관계도 핵문제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남북관계는 협력과 갈등의 이중성 속에서 진전과 정체를 반복하는 이상한 형태의 발전추세를 보일 전망이다. 앞으로 펼쳐질 우리 주변의 국제정세를 보면, 어느 하나도 쉽게 해결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을 세우고 준비태세를 갖출 수 있는 것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능력인 만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혼란과 불행은 없을 것이다.△이서항 실장은 핵확산금지조약 평가회의 한국대표,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아태안보협력이사회 한국위원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이서항(외교안보연구원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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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1.11 23:02

[금요칼럼] 여행과 인생 - 김탁환

새해 첫날, <삼국유사>를 편다. 고전(古典)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게는 읽어도 읽어도 또 읽고 싶은 책이 바로 고전이고, <삼국유사>는 항상 첫머리에 놓인다. 올해 내 눈길을 끈 대목은 인도까지 다녀온 신라 승려들이다. 아리나, 혜업,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 등이 당나라를 거쳐 인도로 갔고, 현태를 제외하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유학길에 올랐던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신 후 발길을 돌린 일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왜 어떤 승려는 죽을 각오로 그 먼 오천축(五天竺)까지 가고 왜 어떤 승려는 토굴 안에 스스로를 가둔 채 몇 년을 두문불출할까. 마르코 폴로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읽을 때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이들을 평생 떠돌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지구촌 가족이니 글로벌 시대니 하는 단어들이 유행해도, 집 떠나면 고생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철저히 준비하고 나선 여행길도 작은 방심이나 뜻하지 않은 실수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때마다 따뜻한 고향 인심과 내 가족의 밝은 얼굴이 그립다. 당장 돌아갈 마음이 굴뚝같은데도, 여정을 접지 못하는 것은 낯선 길로 뛰어든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일상을 벗어던지고 이곳까지 왔는가. 자문자답의 밤이 길어진다.2007년 내내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여행가 혜초의 발길을 좇느라 분주했다. <왕오천축국전>을 펴들고 여름에는 2주 동안 인도를 돌았고 가을에는 또 2주 동안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지 못한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따라 길게 뻗은 실크 로드를 다녔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혜초가 여행을 시작한 중국 광저우와 숨을 거둔 오대산을 살필 예정이다. 답사여행을 통해 나는 혜초의 단정하고 깊은 문장에 새삼 감탄했다. 가령 혜초는 이렇게 적는다. 다시 소륵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소륵의 현재 지명인 카슈가르에서 구자국의 현재 지명인 쿠차까지는 기차로 15시간이 넘게 걸린다. 긴 사막 길을 가는 동안 혜초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다. 현재 서점에 진열된 각종 여행기에는 낯선 길의 고통과 신기한 체험, 독특한 풍광을 묘사하는 문장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 갈라 터진 발바닥과 주린 배를 안고 걷고 또 걸었을 혜초는 단 한 줄의 불평도 없이 담담하게 길의 방향과 기간만 적고 만다. 고통을 안으로 삭히는데 익숙한 혜초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만은 감추기 어려웠다. 남인도로 가던 길에 혜초는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로 시작하여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려 계림으로 날아가리라는 시를 지었다. 계림은 신라의 다른 이름이다.우리네 인생은 흔히 시간을 따라 회고된다. <서른 즈음에>와 <내 나이 마흔 살에는>,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처럼, 10년 단위로 나이를 먹는 감회를 잔잔히 읊는 노래도 많다. 우리네 인생은 또한 공간을 따라 그 의미를 탐색할 수도 있다. 맹모삼천지교의 예에서 보듯 어디에 살았고 살고 살 것인가가 한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그 동안 내가 정붙이고 오간 동네를 떠올려보라. 그 꾸불꾸불한 길모퉁이 집에 처음 닿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적어보라. 한 살 더 먹은 내 나이가 어색하듯 처음 이사 간 집도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나이와 집에 적응하는 과정을 우리는 또한 인생이라고 불렀다. 시간과 공간을 겹쳐서 삶을 반성하면 더더욱 금상첨화이리라.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참으로 옳다. 때로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낯선 곳으로 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이끌리기도 한다. 계기가 무엇이든, 길 위에 올라선 다음에는 과정 자체를 즐기며 최선을 다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공자님도 길 위에서 배우고 길 위에서 가르치며 길 위에서 자고 먹고 마시며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올 한 해 독자 여러분은 어떤 낯선 곳을 찾아가시려는가. 그곳은 마을일 수도 있고 분야일 수도 있고 또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곳이 어디든 부디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김탁환 소설가(40)는 경남 진해 출신으로,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와 디지털스토리텔링학회 총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불멸의 이순신'열하광인'파리의 조선궁녀 리심' '나 황진이' 등이 있다./김탁환(소설가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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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1.04 23:02

[금요칼럼] 표절과 대작(代作)이라는 속임수 - 한승헌

연말의 대선 등 정치기사에 치어서 크게 부각은 안 되었지만, 박사학위를 둘러싼 온갖 비리를 알리는 기사가 내 마음을 또 한 번 어둡게 하였다. 모 체육대학 강사로 일해 온 아무개 씨가 그 학교의 박사과정을 둘러싼 금품 거래와 논문 대필 등 비리 내막을 수사당국에 고발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체육계의 지도급 인사들도 여러 사람 연루되어 있다니, 예사롭지가 않다. 미술계 중진인 유명한 화가 한 분의 박사학위 논문 대필 의혹도 기사화되어 널리 알려졌다. 그런 보도 내용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떠나서 박사 학위를 둘러싼 불미한 행태가 적지 아니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심 봉사 개천 나무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박사라는 명예가 문제의 근원이다. 그리고 정당한 노력과 성과 없이 가짜를 탐하는 그 허욕이 문제다. 그러지 않고서야 체육인이나 미술인까지도 굳이 그런 시비의 여지를 무릅쓰고 박사가 되려고 할 리가 없다. 심지어 성직이라 할 목사들 중에도 편법 내지 가짜 박사가 적지 않다고 하니, 할 말이 없다.거기에는 표절이나 대필이 으레 한 몫을 하기마련이다. 표절은 남의 글을 훔쳐다가 제 것처럼 써먹는 문화절도행위다. 대필은 남을 시켜서 대신 글을 쓰게 하는 수법으로서, 대개 특수관계나 금전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표절하는 만큼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한층 더 나쁘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비법이 작용한다. 석, 박사의 92%가 논문 부정을 저질렀거나 본 적이 있다고 하는 통계도 나왔었다.저작권법 분야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올해에 적지 않은 충격을 경험했다. 일년 내내 저작권 관련 기사가 매스미디어를 장식했다. 그 중에는 에프티에이협상에 연관된 저작권법 개정 논의나 정보의 디지털화에 따른 법적 분쟁 대응 등 전향적인 내용도 있었지만, 낯부끄러운 구시대적 고질도 만만치 않았다. 표절과 대작의 치부가 언론과 사회의 일대 관심사로 부각되어 심지어 대대적인 톱뉴스로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특히 부총리나 대학 총장 같은 고위직 인사의 표절 의혹에 대한 융단폭격식 성토 기사는 우리나라 저작권 풍토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에 안 드는 상대방(고위직)을 무너트리는 데 저작권문제를 악용한 선례도 남겼다. 우선 특정 인물들이 고위직에 오르기를 전후하여 표절 의혹에 휩싸였으며, 그들이 그 자리를 물러나자 공세는 그날로 중단되었던 것이다. 표절문제가 진상과 책임의 규명보다는 마땅치 않은 상대방에 대한 요격용 신병기로 위력을 발휘하여 그때마다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두어 가지 생각이 났다.우리나라 학계를 비롯한 각 분야에 표절이 광범하게 고질화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개탄을 했다. 불운하게도 표적이 되어 밀려났던 인사들은 우리나라 학계에서 실력과 명망으로 널리 알려진 학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리고 그런 병마를 어떻게 하면 퇴치시킬 수가 있을까?우선, 가짜 박사의 허상을 버리라고 충고하고 싶다. 학위와 무관한 저술에서의 표절과 대필에서는 장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길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일 뿐이어서 효험을 기대하기 어렵다. 부득이 타율적인 방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데, 부정이 드러난 경우에는 어떤 종류이든 불이익이 가해져야 한다. 여기에는 인사상으로나 행정상으로그래야 하고, 사안에 따라서는 민사상 형사상의 책임까지도 물어야 한다. 근자에 한국행정학회가 학술논문 표절방지규정을 마련하여, 만일 표절이 밝혀질 경우에는 공개사과, 5년 이하 학회지 기고 게재금지, 회원자격정지 등의 불이익을 주기로 한 것은 하나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또한 학교교육이나 사회교육에서 저작권 존중에 대한 계몽교육을 하는 방안도 필수적이다. 최근 서울대학교가 오는 새 학기부터 학문과 과학 연구윤리 과목을 신설하여 전교생(학부)의 교양과목으로 수강을 하도록 한 것은 다른 대학이나 연구단체 및 조직에서도 모범이 될만한 선례라고 할 것이다.새해에는 무엇보다도 이런 문화적 절도와 문화적 사기행위가 뿌리 뽑히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위장, 위계, 위선 따위는 자신을 속이면서 세상을 속이는 중첩적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 때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무슨 이득을 얻을지 몰라도, 마침내는 실체가 들어나 엄청난 재난으로 되돌아온다는 인과법칙을 알아두어야 한다./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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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28 23:02

[금요칼럼] 새로운 정권 정책의 과제 - 이우영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번 선거과정은 후보자의 도덕성 논란에 휩싸여 제대로된 정책 점검이 이루어지 않았다는 문제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앞으로 정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부터 당선자의 정책에 대한 보다 꼼꼼한 검토와 비판 그리고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정책은 핵심적인 논란거리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두번의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가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의 중심에는 핵개발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북한의 태도가 있었지만, 보다 꼼꼼히 따져보면 정권에 대한 반감이 대북정책을 매개로 표출된 점도 없지 않다. 다행히 북한의 태도변화와 미국의 정책 전환으로 핵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점증되고 있고, 더 나아가 북미관계 정상화 그리고 한반도 지역의 평화정착의 분위기가 강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들어서는 새로운 정부는 어떤 면에서 북한핵문제와 동거(?)하였던 현 정부보다 훨씬 유리한 입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NLL문제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고 북한 핵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착단계에 들어선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등 기존 정부의 성과도 고스란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사실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남남갈등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사회적 분란이 적지 않았지만, 평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통일을 추진한다는 전략은 노태우 정부시절에 확정된 한민족공동체방안에서 한번도 바뀐적이 없다. 213합의 이후 한나라 당에서 현정부의 대북정책도 근본은 자신들의 통일방안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올바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대북정책을 정쟁의 도구로 삼았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오히려 정권이 교체되면 대북정책을 정쟁화하는 분위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권의 몇 차례 바뀌면서도 통일방안의 근본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은 평화를 바탕으로하는 단계적 통일방안의 대안이 없다는 것, 그리고 국민 대다수가 이러한 방안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새로운 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질 수 있지만, 특히 대북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정서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기존 정부가 이룩한 대북관계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보다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발전적인 대안을 모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경우와 같이 미국이 북한문제에 대하여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가운데 혹시라도 새로운 정부가 반동적인 정책을 지향함으로서 또 다른 한미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경계하여야 한다. 구체적인 대북정책은 정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보다 철저히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나, 우선 새로운 정책을 펴기위한 국내적 인프라에 대한 검토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은 정부내에서 통일업무의 분장문제일 것이다. 남북관계가 확대되면서 다양한 부처의 개입이 불가피한 현실에서 대북정책을 부서별로 어떻게 나눌 것인지 그리고 조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정리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정부의 대북정책이 바람직 방향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수립되기 위해서는 당선자나 당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언론이나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선거의 구호로서 혹은 정권 획득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들을 위한 실질적 정책 수립에 매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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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21 23:02

[금요칼럼] 나와 남, 우리와 남, 그 관계는 - 김열규

'우리가 남이가!'  지난 날, 어느 대통령이 내놓고 큰소리 친 말이다. 그전서부터 누구나 자주 쓰던 이 말이 그 뒤로 새삼 유행어가 되다시피 하면서 사람들의 입길에 곧잘 오르내리기도 했다.  '우리가 남이가!', 이 발언은 물론 얼마든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 동지나 동료들 또는 동학들의 합심이 나쁠 턱이 없다. 친한 친구끼리 마음 합치면 안 될 일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남이가!'를 함부로 나무랄 수만은 없다. 흉볼 수만은 없다. 그 말로 해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경구(警句)가 힘을 얻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남이가!', 바로 그 말을 일방적으로 칭송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이 배타적인 뉘앙스도 강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남이야 어떻든 우리가 (내가) 알 게 뭐야!'  '우리만 잘 어울리고 잘되면 그만이야. 남들이야 죽을 쑤든 밥을 굶든 우리완 아무 상관없어' 이런 따위 뜻도 거기 진하게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남을 강하게 갈라 치고는 남에서 등 돌리고 마는 낌새가 거기 진하게 풍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이가!'  그 말이 지난 양지와 음지, 그건 원칙적으로는 반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한국 사회 속에 껴들고 보면, 양지보다는 음지가 더 짙게 끼쳐져 있는 게 사실일 것 같다.  거리에서, 지하도 계단에서, 광장에서 또 수퍼나 마트에서는 그 음지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면 과장일까?  도시의 횡단보도에서 좌우 통행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좁은 계단 오르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무질서다.  앞에서 오고 있는 사람, 계단을 밟고는 마주 보고 오는 사람, 그들은 거의 안중에 없다. 나만 알아서 제 빨리 차고 나가면 그걸로 그만이다. 서로 부딪치건, 상대방 앞을 가로지르건 전혀 무관심하다. 제 갈 길 제 멋대로 가면 그걸로 그만이다. 공공건물의 문을 드나드는 풍경은 더 문제가 많다. 들고 나는 사람 가운데 자신을 양보 하거나, 비껴서거나 하는 사람은 보기는 어렵다. 하물며 자신이 들어서려다 말고 안에서 나오는 상대방을 위해서 이미 열린 문을 잡고는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기적이다. 다들 제 깜냥대로다. 나만 있고 우리만 있고 남이 없다.  '남 그 따위 내가(우리가) 아랑곳할 게 뭐야!'  적잖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없이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온 사회에 오직 나뿐이고 다만 우리뿐인 게 아닌지 모르겠다.  나만 설치고 우리만 나부대는 곳에는 사회가 없다. 공중(公衆)은 없고 잡동사니 군중이나 어중이떠중이의 우중(愚衆)이 있을 뿐이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우리는 남을 더불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남은 나나 우리의 기틀이고 터전이다. 남들이 없어지면 그 순간에 나도 유야무야하게 된다. 이럴 때, 당대의 대표적인 서구 철학자의 한 사람인 E. 레비나스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남은 또 다른 나고 나는 또 다른 남이다' 그렇게 말했다. 나와 남이 따로 별 개 일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거기 인간 윤리의 궁극이 있노라고 그는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 철인은 윤리학을 철학의 최정상에 올려 세우려 들었다. 형이상학이나 존재론 등이 종래에 차지하고 있던 철학의 안방에다가 윤리학을 자리 잡게 한 것이다. 그의 윤리는 동양인들이 전통적으로 해 온 것처럼 부모 자식, 형제자매, 어른 아이, 스승 제자 사이에 국한시킬 수는 없다. 사회 구성원 사이의 관계가 바로 윤리다. 나와 남, 우리와 남의 관계야말로 윤리다. 그 점을 우리는 레비나스에게서 배워도 좋을 것이다. 말로는 그래도 실제로는 어려워 할 것 없다. 횡단보도나 계단에서는 좌우 통행 지키면서 남을 비껴 가 보자. 어디든 좋다. 공공 건물의 문에서는 상대방을 위해서 열린 문 한번쯤 잡고 서 있어 보자. 그러면서  '먼저 가시죠!' 말해 보자.  그걸로 우리 사회의 윤리는 환히 틔고 밝게 여릴 것이다. 내가 또 다른 남이 될 것이고 남이 또 다른 내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 드디어는 '남도 우리야!'  그렇게 따뜻하게 다사롭게 말하게 될 것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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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14 23:02

[금요칼럼] 처음 대통령을 뽑는 딸에게 - 안도현

사랑하는 딸아, 설레느냐? 12월 19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느냐? 그날은 너의 손으로 처음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참 많이 컸구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아비로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너의 작은 손으로 정부를 세울 수 있으니 말이다.한편으로는 답답한 심정도 숨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일찌감치 후보의 정책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고 투표할 기회를 빼앗겨버린 탓이다. 오로지 후보의 이미지와 구호로만 편을 가르는 선거판을 지켜보며 나도 솔직히 흥이 나지 않는다. 어쩌겠느냐? 그 누구를 탓할 것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혹세무민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엄중히 한 표로 판단하는 일뿐이다. 너와 나의 한 표만이 희망이다.딸아, 머지않아 너에게 투표통지서가 배달될 것이다. 내가 너만 한 나이였을 때는 국가가 나에게 그 용지를 전해주지 않았다. 나는 국민이었으나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없었다. 군부독재자들이 허용하지 않았다. 투표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철퇴가 내려졌다. 죽음의 시대였다. 죽음을 삶으로 가까스로 변환시킨 게 1987년 6월이었다. 그 당시 다섯 살 먹은 너를 안고 시위대 뒤를 쫓아가던 일 아느냐? 우리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게 해달라는 것이었지. 항쟁이었다. 국민들의 염원을 최루탄으로 잠재우려던 세력들을 잊으면 안 된단다, 딸아. 그때 흘린 눈물을 단지 추억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단다. 눈물은 핏물이었다.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를 참고해야 한다. 너는 결코 역사의 무뇌아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는 부디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한 표를 던져라.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다. 민족이 갈라선지 60년이 넘었다. 60년이 넘게 싸우고 으르렁대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세월을 보냈다. 남북의 체제와 이념과 문화의 이질성은 모두 분단으로부터 나왔다. 치고받고 싸우면서 둘 다 가슴에 멍이 들고 말았다. 가까스로 정신 차리고 손을 잡아보자고 한 게 겨우 10년이다.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10년이다. 아직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앞으로도 더 많은 약을 상처에 발라야 한다. 경제나 국방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북한은 남한하고 맞장 붙을 상대가 아니다. 가난하고 피곤해진 형제에게 발을 거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 같으면 동생한테 그리 하겠느냐? 딸아, 여전히 북한에 대해 각을 세우고 삿대질하는 자들이 있단다. 냉전시대로의 회귀를 존재의 목표로 삼는 자들이란다. 그들의 언행을 유의해서 관찰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너는 부디 이 민족의 사랑을 위해 한 표를 던져라.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청년백수로 지내고 있는 딸아, 대통령이 일자리를 만들어준다고 믿지 마라.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환상에 속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게 일자리가 생긴다면 대통령 선거를 해마다 한 번씩 해도 좋겠지. 청년실업이란 말이 쏙 들어가게 될 터이니까. 너의 일자리는 대통령이 만드는 게 아니라 너의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공약에 넘어가서는 안 된단다.이와 함께 제발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왜곡된 경제 논리를 그대로 추종하지 마라. 부동산 투기로 얻은 재산을 재투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한 이 땅에 희망은 없단다. 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왜 좀 더 많이 나누어야 하는지, 경제적인 부가 왜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못하는지, 진정 경제에 관한 총체적인 사유와 토론이 필요한 때다. 모든 것을 경제 탓으로 돌리면서도 온 국민이 경제숭배주의에 빠져 있는 오늘날의 모순을 직시하기 바란다. 딸아, 이제 너의 한 표가 중요하다. 너의 한 표가 투표율이고, 너의 한 표가 정부고, 너의 한 표가 혁명이고, 너의 한 표가 너의 권력이다. 부디 너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마라. 만약에 투표하는 날 다리를 다치게 된다면 기어가서라도 투표해라. 모처럼 쉬는 날이니 여행을 가자고 어떤 친구가 제의해오면 그 친구하고 절교를 하더라도 투표해라. 내가 먼 데 좀 다녀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아비의 말을 거역하더라도 투표해라./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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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2.07 23:02

[금요칼럼] 인터넷 저작권과 어린 네티즌 - 한승헌

전남 담양의 한 야산에서 목을 매어 숨진 한 소년을 애도하면서 이 글을 쓴다.열여섯 살 난 그 학생의 죽음이 하필이면 저작권법 위반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는 뉴스는 저작권학도인 나를 매우 침통하게 만들었다. 마침 저작권문화학교 강의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어서 더욱 마음이 착잡했다. 그 고교생은 인터넷에서 한 편의 소설을 내려 받은 일이 있는데, 경찰에서 저작권법 위반으로 출석요구서가 날아오자 고민 끝에 자살이라는 극한수단을 택했다고 한다. 사실 지금 세상은 정보의 디지털화와 네트워크화로 엄청난 콘텐츠가 인터넷이라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 중에는 사진, 영상, 영화, 소설 등 저작물이 홍수를 이루어 파일 공유 사이트나 인터넷 카페 같은 데서 네티즌들이 얼마든지 퍼 올리거나 내려 받아 듣고 볼 수 있다. 클릭 몇 번으로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그 일을 무슨 준법의식으로 막기는 어렵다. 아무도 보지 않는 광장이나 행길에 책이나 디브이디를 쌓아놓고 손대면 안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범죄를 옹호하거나 고소인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인터넷범죄와 관련하여 몇 가지를 짚고 넘어갈 사정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저작권의식은 아직도 낮은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대학 교수들조차 대담하거나 지능적인 표절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드물지 않고, 더러는 그런 일을 약점 삼아 마땅치 않은 상대방을 쓰러트리기도 한다. 그 상대방이 손을 들면 그것으로 끝이다. 표절을 규명하겠다는 의지는 없고 그것을 요격미사일로 삼아 명중 격추를 최종 목표로 삼는다. 부도덕성에서는 피차일반이다.대학생들은 어떤가? 부산의 한 대학 교수가 학생들의 리포트 채점을 하려고 보니, 110명의 학생 중 39명의 리포트가 똑 같아서 표절로 처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대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이 공유파일에서 영화나 음악을 내려 받는 일은 다반사가 되어 있다.대학 교수와 대학생들의 저작권의식이 이러할진대, 10대의 어린 세대들에게 어른들도 외면하는 준법을 기대하기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우선 그들은 지능이나 지각 또는 판단력이 어른들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 어디서 교육을 받거나 계몽을 받은 적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소년에게 경찰에서 난데없는 소환장(출석요구서)이 날아왔으니, 그 두려움이 어떠했겠는가?서울의 어느 경찰서의 경우, 그런 종류의 저작권법 위반사건의 고소가 한 달에도 3백 건 내지 5백 건이나 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를 할 수 있는 그런 사건에서 누가 그 많은 이용자를 추적하여 범인(?)을 알아냈단 말인가?보도에 따르면, 모 법무법인에서 아르바이트생을 시켜서 그런 작업을 해가지고 무더기 고소를 해놓고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합의금을 받아내곤 한다고 한다. 그 어린 학생들에게 사전에 주의나 경고 한번 주지도 않고 그런 무자비한 짓을 하는 곳이 다름 아닌 법무법인이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린 학생들을 표적 삼아 무더기 고소를 해서 큰 이득을 챙기는 변호사라면, 그 과오가 어린 네티즌의 내려 받기에 비할 수 있을 것인가?다 큰 성인들에게는 몰라도 청소년들을 상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 무더기 고소, 그것은 법의 극은 무법의 극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저작권 침해의 예방에는 무엇보다 교육과 계몽이 중요하다. 저작권에 관한 인식을 높이고 침해행위를 하지 않도록 깨우쳐주는 교육이 교과서를 통해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에 앞서서, 또는 그와 아울러 교양교육이나 연수, 훈화, 세미나 등에서도 저작권 존중사상을 고취해야 한다. 대학에서는 전문분야를 불문하고 저작권법을 적어도 교양과목으로 채택하고, 표절을 비롯한 남의 저작물 무단이용에 대하여 엄격한 제재가 따라야 한다.저작권법 위반을 두둔하거나 눈감아주자는 것은 아니지만,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 위법행위 예방을 위한 교육과 계몽, 경고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사안(事案)의 경중과 정상을 고려한 형평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벌금을 바치면 될 일에서 목숨을 바칠 만큼의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변호사도 자책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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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30 23:02

[금요칼럼] 남북회담,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 이우영

2007년 정상회담의 약속대로 남북 총리회담이 2박3일에 걸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비록 임기 말이고 선거 국면이라 관심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8개도 49개항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행에 관한 제2차 남북총리회담 합의서?와 2개의 부속합의서를 채택할 정도로 성공적인 회담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합의서의 채택이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회담 분위기도 좋았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상회담의 합의사항들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도 앞으로의 전망을 밝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총리회담의 진행과정을 볼 때, 국방장관 회담을 포함하여 남북한간 다양한 회담은 순항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리고 이것은 곧 바로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한다. 또한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북한 핵문제 해결과 남북한 평화정착에도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남북한간의 대화가 활발해지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이 과정에서 우려가 되는 것은 현재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회담간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핵심이 되었던 장관급 회담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총리회담이 정례화되면서 기존 장관급회담은 소멸되는 것인지 아니면 총리회담과 별개로 지속되는지가 불투명하다. 만일 국방장관 회담도 순항하면서 정례화되고, 부총리급이 주도하는 경제관련 회담이 성사된다면, 그리고 남북한간에 이미 합의가 되어 있는 사회문화협력추진위원회가 가동되면 통일부 장관이 참여하였던 기존의 장관급 회담은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 이산가족 문제 등 남북관계 전반에 관련되어있으면서도 총리급 회담을 비롯한 전문분야 회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문제는 남아있을 수 있다. 2007년 정상회담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으면서도, 합의사항들이 지나치게 구체적이어서 회담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이 문제가 앞으로 진행될 각종 회담의 수준을 혼란스럽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실무회담, 장관급 회담 그리고 총리급 회담과 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각급 회담에 다루어야할 주제들의 차원과 격이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을 최고위급이 결정하여야 하는 북한의 딱한 사정을 고려할 때,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합의사항 도출이 불가피하였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남북한간 소통구조의 정비는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간 회담이라는 점에서 남북한간의 합의가 중요하겠지만, 먼저 남쪽 내에서 각급 회담의 위계관계 정립과 각급 회담 담당 부처 및 회담 간 대상 정리가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총리급 회담이 정점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각 회담을 관련 주제별로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회담간의 위계 문제 등은 단순히 회담의 정비를 넘어서서 정부내 대북문제 및 통일문제의 업무분장과도 연결된다는데 사안의 복잡성이 있다. 근본적으로 남북관계가 활성화되면서 통일부만이 남북관계 업무를 관장하는데 한계가 있다. 경제문제는 재경부, 문화교류는 문화부 그리고 인도적 지원문제는 복지부의 전문성이 절실해지면서 통일부의 능력은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회담의 정비는 곧 정부내 대북문제 및 통일문제의 업무분장의 재고가 필요하게 된다. 정권 교체기에 정부의 업무분장을 새롭게 하기는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남북관계의 활성화로 비롯된 각급 회담의 증가과정에서 미래지향적으로 회담간 관계를 정비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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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23 23:02

[금요칼럼] 정치, 그 따위 없는 곳에 살고 싶다 - 김열규

누군지가 '정(政)'이 뭐냐고 묻자, 공자가 답했다. '정(正), 곧 바른 것, 정당한 것을 취하는 것이니라.'政은 바를 正에 움켜잡을 복(?)이 달라붙어 있으니 공자의 해석은 일단은 전적으로 옳은 것 같아 보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공자 말대로라면 오죽 좋을라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그러면서 우리들은 다들 우리 현실이 전혀 그렇지 못함을 한탄하게 될 것 같다. 부정을 택하여서는 거기 악착같이 달라붙곤 하는 비중이 오늘날의 우리 정치 현실에서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데 공자의 해석은 지나치게 고지식하다. 政이란 글자의 겉모양만 보고 내린 해석이기 때문이다. 워낙 그 엄밀한 어원을 캐면 , 正과 征은 또 政, 이들 세 글자는 모두 꼴불견의 개망나니들이다. 발음이 모두 같은데다 뜻도 셋이 모두 그게 그것이다. 正을 '바를 정'이라고 미화한 것은 후대의 일이다. 그 으뜸의 의미는 남을 치고 부수고 뺏고 하는 폭력을 의미했었다. 그러기로는 정복의 征이 다를 것 없다. 그리고 정치의 政도 마찬가지다. 셋 다 다같이 깡패고 폭력이고 부당한 무력(武力)이다. 남의 고을이나 집단을 쳐서는 정복하고 굴복시키고 해서는 뜯어낼 것, 깡그리 뜯어내기로는 이들 셋이 한 패거리다. 하긴 그렇다. 인류 역사에서 상고대부터 중세기까지 한 집단 또는 한 국가의 정사(政事)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하였던 것이 침략이고 전쟁이고 했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政자 풀이가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 또는 일부 집단 전체의 규모에 걸친 정치로서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 현실에서 政은 공자의 말을 따르고 있을까? 아니면 征과 통하고 부당한 폭력이나 싸움질과 통하고 있을까? 궁금해질 것 같다.아니 판단을 망설이고 뭔가를 궁금해 하고 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이건 장담해도 좋다. 워낙 正은 치고받고 하기 그 자체 또는 그 수단이나 방편을 의미했다. 거기에 박살내고 휘갈기고 한다는 뜻의 복(?)이 야합해서는 政자는 생겨 난 것이다. 우리의 오늘날의 政은 이 본시 의미를 알뜰하게 살뜰하게 지켜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폴리티션'과 '스테이츠맨', 이 두 낱말을 구별한다. 어느 쪽이나 우리말로는 정치가라고 번역이 될 텐데도 저들은 그 둘을 다르게 쓴다. '스테이츠맨'은 공자의 말대로, 옳을 正을 지켜내려는 정치가들이다. 이에 비해서 폴리티션은 政의 흉측한 어원 풀이가 그대로 적용될 정치가를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의 이른바 '대선(大選)'은 거의 그 대부분이 서로 헐뜯기고 서로 피 보기다. 심지어 상대방 밑구멍을 훑어 내보이려고 덤비기도 하는데 그 때 본인의 밑구멍에서는 장미꽃 향기가 날 건지 어떤지 국민들은 궁금해지곤 한다. 그런가 하면 소위 통치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곤 하는, 전 국가 규모에 걸친 정치는 무지와 독선과 횡포로 넘쳐 있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크다. 그리고 그들끼리의 집단적 이기주의로 흉물스럽게 뭉치다 보니 부패와 부정으로 권력 상층이 부분적으로 문드러져 가고 있다. 어느 면으로 보든 간에 공자의 政자 풀이가 적용될 여지를 찾아내기는 쉬울 것 같지 않다.20세기의 중간쯤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산문 작가인 토마스 만은 그의 '비(非) 정치인의 성찰'이란 에세이집에서 말했다. '현대인에게 정치는 숙명이고 운명이다.'그는 현대인이 유감스럽게도 피치 못하게 '호모 폴리티쿠스', 곧 '정치인'이 아닐 수 없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더러운 운명, 흉측한 숙명을 타고 난 꼴이 된다. 적어도 우리 한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딘가 정치라는 그 흉물 없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 꿈을 이루고 싶다. 그 간절한 소망 이루고 살고 싶다. 한데도 그 망할 것 없는 세상은 없을 것이니, 이를 어찌한담? 소망의 간절함이 큰 만큼, 슬픔도 아픔도 크다./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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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16 23:02

[금요칼럼] 걷기의 즐거움 - 안도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리의 관절을 움직이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다리의 관절은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주기 위한 하나의 연결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발자국을 옮겨 걷겠다는 마음을 품으면 그때부터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걷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춘다. 누가 특별히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몸 전체가 걷는 일에 기꺼이 복무하고자 한다.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걷기 시작해 보라. 우리의 몸은 막 시동을 건 엔진처럼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팔은 발걸음에 맞춰 저절로 흔들릴 것이며, 눈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샅샅이 탐색하며 나아갈 곳을 살필 것이며, 귀는 무한히 열리게 되고, 코는 벌름거리게 될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혼자 앞으로 나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걷는 일이 유아독존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일이라면 의미가 없다. 우리가 발걸음을 떼는 순간, 이 세계는 우리의 걷기에 동참한다. 풍경은 우리가 떠나온 곳이 궁금해 천천히 뒤로 지나가고, 달빛과 별빛은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를 따라온다. 바람은 귀밑머리를 간질여 줄 것이며 땅은 발바닥을 떠받쳐 줄 것이다. 웅덩이는 웅덩이대로, 돌부리는 돌부리대로 유심히 우리의 걷기를 보살펴 줄 것이다. 승용차가 별로 없던 시절, 불과 한 이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참 많이 걸었다. 자동차는 걷기의 추억 따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자동차는 수수밭머리에 해 지는 풍경도, 마른 수숫대 위에서 뛰는 방아깨비도 보여주지 않으며, 수숫대가 서로 몸을 비비며 서걱대는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사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서 우리가 보았거나 들었거나 하는 풍경과 소리들은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차창 밖으로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일 뿐이다.자동차가 적으면 당연히 오래 걷기 마련이다. 북한을 방문하면 부지런히 길을 걸어가는 북쪽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 이불 보따리만한 짐을 등에 지고 걷는 할머니도 있고,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걷는 소녀도 있고, 앉은뱅이책상 같은 걸 어깨에 메고 걷는 소년도 있다. 이제 남쪽 사람들은 의식주를 위해 걷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걸을 필요도 없다. 어지간한 거리는 자동차의 바퀴가 걷는 다리의 수고를 덜어주니까 말이다. 남쪽 사람들이 걷는 이유는 딱 하나, 바로 건강을 위해서다. 비로소 도시의 강변이나 등산로는 아침저녁으로 걷는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걷는 것으로는 모자라 뜀박질이 대유행이라고 한다. 건강마라톤 대회는 참가자들이 매년 급증하고 있는 덕분에 주최 측이 밑질 일이 없다고 한다.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술자리를 나가봐도 걷기 예찬은 끊이지를 않는다.한쪽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걷고, 또 한쪽은 먹고사는 일에 배가 불러 살을 빼려고 걷는 현실이 나를 참 아득하게 만든다. 남과 북의 경제력의 차이일 뿐이라고, 콧방귀 한번 뀌고 지나갈 일이 아니다. 뱃살을 빼기 위해, 건강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는데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다만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걷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내 뱃살이 두꺼워질 때 누군가 꼬르륵거리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게 걷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자의 도리다.나는 혼자 어슬렁거리며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어슬렁거려야 미세한 데 눈길을 줄 수 있고, 세상이 요구하는 질서의 뒤편을 응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도 어슬렁거리며 걷는 일로 하루를 다 소비하는 자일 것이다.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되도록 많이 걸을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학교 앞 거리에 어느 날 이런 현수막이 나붙었다.이유 없이 배회하는 자를 신고합시다학교 부근 파출소에서 내걸은 이 현수막의 폭력성 앞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대한민국은 이유 없이 배회할 자유도 없는 나라라는 말인가?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라는 멋진 말도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고 싶다. 걷는다는 것은 나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세계와의 대화다/안도현(시인, 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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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09 23:02

[금요칼럼] DJ납치사건과 일본의 책임 - 한승헌

이 글을 써나가고 있는 중에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한국 정보기관원에 의한 납치사건의 피해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 방문 중 지난번 국정원 진실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불만을 표시함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처사에도 강력한 항의를 표시한 것이다. 또 하나는, 한국의 유명환 주일대사가 위 납치사건으로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데 대하여 일본 외무장관에게 유감을 표명한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를 사실상 사죄라고 했다. 마침 일본 현지에서 이런 보도를 접하게 된 나는 쓰던 글을 처음부터 다시 고쳐 쓸 수밖에 없게 됐다.국정원의 진실규명위원회가 지난 달 24일 공표한 김대중납치사건 조사결과는 지금까지 34년 동안이나 은폐되어 왔던 권력범죄를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그만큼이라도 밝혀냈다는 점에서 대견스러운 일이었다.그 조사보고는 의혹의 두 가지 핵심에 관해서 결론을 내려놓았다.첫째, 범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 둘째, 단순 납치가 아닌 살해 목적을 가진 범행이었다는 점 등이다. 문장 상으로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는 묵시적 승인 등 우회적인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사건 조사의 제약과 고충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이처럼 박 대통령의 지시 여부 및 살해 목적의 유무가 국내적 관심사인데 반해서 범죄 발생지인 일본의 입장에서는 영토주권의 침해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되어왔다. 이번 진실규명위원회의 발표가 나온 뒤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하여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는가 하면, 새삼스럽게 무슨 수사라도 할 듯 한 제스처까지 보였다.지난 34년 동안, 한일 두 나라의 시민단체와 언론 등 각계에서 사건의 진상 및 책임의 규명을 그처럼 줄기차게 요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이동풍 격으로 이를 묵살해온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의 진상조사 발표가 나오자 마치 모르고 있던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듯이 피해자 사정청취와 한국정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실인즉 일본 당국은 1973년 8월 이 건 범죄 발생 당시 피해자 신변의 위험을 사전에 간파하고도 응분의 안전보호조치를 하지 않았으며, 범죄 발생 후 육로와 해상의 경비 검문을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범인들의 도주 및 납치를 가능케 하였다. 당시 피해자는 일본에 적법하게 입국하여 체류 중이었다. 더구나 그는 한국의 최고 정치지도자로서 박정권의 탄압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일본정부는 그의 신변의 안전을 비롯한 기본인권을 지켜 줄 법적인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그에 대한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뿐인가, 일본 측은 범죄 발생지 관할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초동단계부터 적극적인 수사를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밝혀낸 사실마저 공개하지 않고 은폐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자국의 국내법상 이 사건 범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수사를 하려는 아무런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30여 년을 허송해왔다.19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건너가 타나카 수상과 일본 국민에게 진사하였으며, 그 후 또 한번의 정치결착을 함으로써 두 정부는 이 사건을 더 이상 거론치 않기로 합의하였다.(그때를 전후하여 타나카 수상에 대한 금전 제공설까지 나돌았다.)한국정부에 대한 사과 요구는 기본적으로 두 나라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다만 그 엄청난, 범죄를 방임했거나 자기 영토 내에서 검거하지 못하고, 박정희 정권과 검은 유착을 하여 성급하게 수사도 중단한 일본 당국이 그러한 자기 과오는 접어두고 한국정부에 대해서 떳떳하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설령 한국정부에 사과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미 사건 발생 후 한국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친서를 갖다 바치며 일본 수상에게 사과한 이상 일본정부가 또 다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우리 정부는 일본 측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글 첫머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일본정부의 여러 과오를 생각한다면 일본정부 또한 피해자와 한국 국민에게 사과하여야 마땅하다. 지난날 두 번에 걸친 한일 간의 소위 정치결착은 어디까지나 정부끼리만 서로 눈감아주기로 한 것이고, 피해자와 한국 국민에 대한 두 나라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정부의 사과의무는 엄연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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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02 23:02

[금요칼럼] 정상회담 이후의 평양 - 이우영

지난 18일부터 21일부터 평양을 다녀왔다. 대북지원 단체 남북어깨동무가 평양 영유아들을 위해 마련한 콩우유 공장 준공식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가 적지 않았다. 전세기를 타고 불과 1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의 평양 순안 공항의 외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베트남의 국가수반의 방문으로 베트남항공 비행기가 대기 중이었는데, 최신 기종의 베트남 비행기와 초라한 북한 고려 항공의 비행기들이 대비되어 속은 편하지 않았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은 전화에 시달리는 베트남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잘 살았는데, 지금의 처지는 비행기 차이만큼 역전되었기 때문이었다. 2년 만에 방문한 평양거리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반 자동차를 포함하여 전차,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의 왕래 빈도가 높아졌다는 점이 눈에 띠었다. 교통량의 증가는 시민의 유동성 증가를 의미한 것으로, 군밤과 군고구마를 파는 길거리 매대의 증가와 더불어 상업 활동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대동강 중간의 양각도의 호텔방에서는 강건너에 있는 시장이 보일정도로 컸었고, 기념품점은 가는 곳마다 있어 남쪽 손님의 지갑을 탐내고 있었다. 그리고 상점의 점원들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서 열심이었다. 밤거리는 이제 야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고, 새로운 건설 현장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외양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양시민들이 활기를 되찾았다는 점이다. 지난번 방북때 함께 갔던 남한의 어린이들이 소년궁전의 북쪽 어린이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뒤로 빠지거나 쭈삣거리던 아이들도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응답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부담스러웠을 남한 손님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과거와 달리 남북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부딪치고, 담소하는 것을 막지 않은 북한 당국의 결정도 의미 있었지만, 평양의 공공장소나 묘향산의 등산길에서 만난 북한사람들 대부분이 남한사람들을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맞아주었다. 평양의 외면적 변화나 사람들의 행동 변화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경제 사정이 호전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의 활성화와 유통되는 상품의 증대는 일반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동안 꾸준히 지속된 대북지원과 다양한 사회문화교류가 남한이 북한 사람들을 회유하여 체제붕괴를 유도할 것이라는 북한의 의구심을 약화시킨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동행하였던 남북어린이 어깨동무만 하더라도 근 10여년동안 평양에 어린이 병원을 지어주고, 춥고 굶주린 아이들을 꾸준히 보듬어 온 결과 상호이해가 돈독해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의 어깨동무 어린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북쪽의 아이들을 볼 때는 답답함과 안쓰러움 그리고 적지 않은 분노감에 휩싸였다. 조금 더 마음을 열고, 그 만큼 문을 연다면, 북의 어린이들의 고통은 크게 줄어 둘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양이외의 지역은 여전히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러한 느낌은 더욱 강해졌는데, 일차적으로 북한 당국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남한 당국이나 남한의 보통사람들은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콩우유 공장 기계를 소독하기 위한 솔조차 어렵게 구하는 북한, 어린이 병원의 기초적인 물품을 절실하게 부탁하는 북한의사들을 여전히 괴물과 같은 공포의 대상으로 각색하고 있는 남한의 어른들을 생각하니까 참담한 마음마저 금할 수 없었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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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26 23:02

[금요칼럼] 문학은 고통의 축제다 - 안도현

작가들의 글쓰기를 흔히 출산의 고통에 비유한다. 예술 작품의 탄생이 그만큼 엄혹한 진통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또한 작가들은 생의 환희나 행복보다는 고통과 결핍에 관심을 갖는다. 이 세상이 아무런 아픔 없는 태평성대라면 문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게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니까.이렇듯 문학작품과 작가는 고통이 낳은 자식들이다. 다음 달 8일부터 14일까지 전주에서 열리는 아시아 ?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AALF)에 참가하는 외국작가들의 면면을 들여다봤다. 이들의 생의 이력은 하나하나 기구하고, 아프고, 눈물겹다. 그야말로 고통의 축제를 보는 듯하다.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오는 루이스 응코시라는 소설가가 있다. 그는 인종차별정책이 극심하던 60년대에 흑인소년과 백인소녀 간의 성관계를 묘사한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의해 편도 기차표만 받고 강제추방을 당한다. 그렇게 고국을 떠난 후 30여년을 잠비아, 보츠와나, 말라위 등지의 인근 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미국과 유럽 등지로 유랑한 작가다. 그는 1994년 최초의 흑인 정권인 만델라 정권이 선 이후에야 조국을 찾을 수 있었다. 1994년 벌어진 르완다 학살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다. 3개월 간 거의 일백만 명의 목숨이 스러졌다.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작가 욜란드 무카가사나가 이번 행사에 참여한다. 그녀는 학살 당시 남편과 두 아이를 잃은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이다. 아프리카의 생소한 나라 기니 비사우에서 오는 작가 로우렐은 돌고 돌아 한국에 온다. 그는 자국 내에 국제공항이 없어 인접국인 세네갈까지 버스 편으로 이동을 하고 세네갈에서 다시 유럽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대장정에 돌입한다. 아시아 작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베트남의 여성 소설가 레 밍 쿠에는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유소년 자원군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이력이 있다. 그녀는 5년의 군 복무 기간을 마친 뒤 1969년에 하노이에 돌아왔지만, 전장과 떨어진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정글로 돌아가 종전될 때까지 정글에서 군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한 전사다. 소련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범하던 당시 유명 시인으로 알려져 있던 파타우 나데리는 감옥에서 시를 쓰던 시인이다. 그는 끊임없는 감시와 위협, 모욕 속에서도 담뱃갑 속에 끼워진 은박종이에 시를 썼고 자신을 보러 온 아내에게 그것을 은밀히 건네주었다. 우리의 김남주 시인이 저 8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그리고 이집트의 작가 소날라 이브러힘은 1959년 이집트 낫세르 대통령이 좌익분자 처벌 작전이라는 미명 아래 지식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투옥하던 시기에 7년형의 강제 노역을 언도받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작가 파미다 리아즈는 계엄 정권하에 잡지를 발간하다가 사형을 선고받은 이력의 소유자다. 지구촌의 마지막 하나 남은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 이러한 작가들이 일정한 시기에 한데 모인다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 45개국에서 80명에 가까운 작가들이 오는 것은 80여 개의 외국 언론이 한국에 오는 것과 같다. 80여 개의 찬란한 고통과 80여 개의 순결한 영혼이 한국으로 모여드는 것과 같다. 어쩌면 문학올림픽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여기에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 소설가, 그리고 문학평론가 200여 명이 한꺼번에 모여 독자들과 함께 축제의 장을 펼친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한국작가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눈부시기 그지없다. 고은, 신경림, 송기숙, 최일남, 김주영, 전상국, 황석영, 한승원, 현기영, 강은교, 박범신, 김훈, 김용택, 황지우, 도종환, 성석제, 은희경, 신경숙, 윤대녕, 김인숙, 문태준, 김선우.고통스러운 세상에 뿌리를 둔 문학을 읽고 즐기는 것은 고통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모처럼 마련되는 품격 있는 축제를 이제 마음껏 즐길 일이 남았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한국의 작가가 수상하지 못했다고 아쉬워 할 일은 아니다. 11월에 열리는 아시아 ?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은 우리 한국문학의 힘을 확인하는 축제가 될 것으로 본다./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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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19 23:02

[금요칼럼] 권력과 능력과 서비스 - 김열규

옛날이나 지금이나 적잖은 한국인들에게 권력은 매력 덩어리다. 그러기에 조선조 시대에 과거 시험 보러 가곤 하던, 그 소위 '선비'란 이들이 남긴 전통이나 내림은 지금도 퍼렇게 살아 있을 것 같다. 이건 정말이다. 온 세계의 동화에서 그 소년 주인공은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탐색의 길', 곧 '참음의 길'에 오르게 되어 있다. 멀리 있을 무엇인가 매우 귀하고 희귀한 것을 혼자서 찾아 나서게 된다. 한데 한국의 동화에서는 정해 놓다시피 '과거' 보러 나선다. 그 뻔한, 그 지천인 벼슬 찾아서, 권력 찾아서 나서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온 세계에서 가장 속된 동화가 이 땅의 동화라고 비아냥거리고 싶어진다. 그러지 말아야 할 테지만 그것만 생각하면 속이 절로 메스껍다. 그리고 세계의 동화 대하기가 부끄러워진다. 소년의 꿈이 권력과 벼슬에만 걸려 있다면 그건 결코 '청운의 꿈'이 될 수 없다. 그건 짙은 비구름의 '흑운의 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소위 국가 권력이나 정치권력의 세가 크면 클수록 또 그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한 나라는 후진성을 면하기 어렵고 못난 꼴 면하기 어려운 것을 생각할 때, 과거 보러가곤 하던, 그 전통, 그 내림은 차라리 저주스럽다. 그게 지금껏 남아 있는 게 안타깝다. 상당수의 한국인 가운데는 권력은 커녕 권(權) 자만 들어도 오금을 못 쓰는 사람, 아니면 어깨에 힘주는 사람 또는 군침 삼키는 사람 등등은 수두룩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인간들 앞에서 무턱대고 굽실거리고 따리 붙이고 하는 족속인들 적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건 저 못 된 권력이란 게 온 사회에 걸쳐서 흉을 떨칠 대로는 떨치고 나부댈 대로는 나부대고 설치고 하기 때문일 것 같다. 거의 만능의 힘, 마술의 힘 노릇을 하게 때문일 것이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의 고위 층 비서관들이 두 사람씩이나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꼴로, 우리 한국 사회가 '권력 만능 사회'란 것을 너무나 또렷하게 보여준 것은 그 증거 치고도 일급의 증거다. 그들은 각 종 기관을 제 욕심대로 떡 주무르듯 했다. 경제고 문화고 무엇이든 상관없이 안하무인으로 굴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권력은 '도깨비 방망이'나 다를 게 없었던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럴 경우, 방망이를 휘둘러대고 두들겨 댄 ,저 '사람 도깨비'들도 문제지만 그들 방망이질 따라서 춤춘 당사자들도 문제다. 우리의 권력은 이처럼 부리는 자에게서나 부림을 당하는 자에게서나 다같이 '요술 방망이'인 셈이다. 그런 게, 지금 우리나라의 소위, 권력이다. 그건 요컨대 괴물이고 요물이다. 운래 權은 나무 이름이다. 그러던 게 저울이 되고 무엇인가 방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우선 權은 속임수가 되었다. 다음으로 뭐든 헤아리고 측정하는 것도 權이 되었다. 이게 바로 權의 음지와 양지다. 사회의 독(毒)이 되고 악이 되는 한편으로 사회의 만사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권모술수(權謀術數)라든가 권사(權詐)라는 말은 權의 음지 중의 음지다. 권사는 사기 치기와 같은 말이다. 權은 그 꼴이다. 사기 치기인가 하면 준칙(準則)이고 기준이다. 그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 제 마음대로 재주넘는 게 權이다. 그러다 보니, 권세, 권도(權道) 등이 그렇듯이 권력도 그 양단 사이에서 버꾸를 넘게 되었다. 권력은 그걸 쥔 자의 개인적 욕망과 야합을 하고는 설쳐대게 되었다. 올바른 저울 노릇하면서 사회의 준칙이 되고 기준이 되어서 사회를 좌지우지해야 할 권력이 권모술수며 권사(權詐)에 기울어서는 사회를 제 마음 대로 움직여보려고 들게 되었다. 그게 일부 전직 청와대 비서관들의 권력이었다. 이제 참 다운 민주 사회답게 국가 권력이 변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이제 국가 권력도 사법 권력도 국가와 사회를 올바르게 저울질해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서비스고 봉사라야 한다. 다음으로는 나머지 사회의 온갖 힘들과 병존하고 공존해야 한다. 이제 국가의 힘은 경제다. 그건 정치권력 보다 윗자리에 앉으면 앉지 내리 앉을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며 글로벌리즘을 계기로 삼아서 문화의 힘도 마찬가지로 세가 매우 커져 가고 있다. 교육이 팔을 걷고 활개 치면서 그 힘을 과시해도 당연하다. 이렇듯이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국가-사회의 힘과 나란히, 나란히 자리 잡고 앉아야 한다.아니 스스로 그들 아래에서 굽실거리면서 서비스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통치란 말은 정치가 저 잘났다고 입에 올리면 안 된다. 이제 그런 묵은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는 것이 사회와 국가를 위한 권력이 될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국가 권력, 정치권력 그 자체를 위해서 경사스럽고 기꺼운 일이 될 것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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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12 23:02

[금요칼럼] 법대의 미래, 오해 바로잡기 - 한승헌

법학전문대학원법(로스쿨법)의 발효에 따라 로스쿨 인가경쟁은 한층 더 긴박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입학 총 정원의 책정에 이어 설립인가 심사가 시작되면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전국에서 47개나 되는 대학들이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나서는 과열현상은 보기에도 딱하다. 저러다가 인가에서 탈락되는 쪽에서 무슨 격한 반응이 나올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법학교육위원회 위원들에게 임명장과 아울러 방석모를 하나씩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정부 고위인사에게 농담을 건넨 일도 있다.로스쿨도 어디까지나 대학원의 일종이다. 그런데도 그처럼 전력투구를 하는 것은 단순한 경쟁심리라고 이해할 수만은 없다. 이 나라의 법조인 양성제도가 올바른 법치주의나 국민을 위한 법률 서비스 향상에 중요하다는 점을 투철하게 인식해서일까? 아니면 거기서 양성되는 판 검사, 변호사가 대단해서일까?어쨌든 로스쿨 인가를 못 받는 대학은 위상이 크게 추락하고 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야말로 올인을 하는 양상이다. 그러면서 일부에서는 기존의 법과대학(또는 법학과)은 이제 무슨 강등이라도 당하거나 효용이 떨어진 듯이 안중에 두지 않는 것 같다.로스쿨 인가를 받은 대학에는 법과대학 또는 법학과(이하 법대, 정확히는 법학에 관한 학사학위 과정)를 둘 수 없고, 로스쿨 없는 대학에만 법대가 남게 된다고 해서 그 위상이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의학전문대학원이 생겼다고 해서 의과대학(학부)의 존재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법대는 법대로서의 고유한 존재이유가 있고, 로스쿨의 선행 교육기관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과정이 법대이다. 물론 로스쿨법에 의하면, 그 입학자격은 다양한 전공자 흡수를 위해 비법학 전공자에게도 문호를 열어놓고 있다. 그리고 로스쿨 입시에서 법학(지식)시험을 치르지 않기 때문에 법대의 매력이 반감되는 이유로 보는지 모르겠다.그러나 이런 의견도 있다. 학부에서 법학 전공 4년에 로스쿨 3년, 도합 7년 동안 법학 공부를 한 사람과 로스쿨에서 3년만 법학 공부를 한 사람을 비교한다면, 그 중에 누가 변호사시험에 유리할까? 7 대 3으로 법대 졸업생이 우세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로스쿨법에 입학생의 3분의 1 이상을 비법학전공자로 해야 한다는 규정의 의미를 뒤집어 생각하면, 법학전공자가 사실상 입학에 유리하거나 로스쿨 쪽에서 환영을 받을 여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전공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법대 출신의 합격을 제한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법대의 우세 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본다.판 검사나 변호사의 배출이 법학교육의 유일한 목적일 수는 없다. 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법대의 일반 대학원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법조 실무교육에 치중하는 로스쿨보다는 법대와 그 대학원에 가야만 한다.뿐만이 아니다. 법학사의 학력(실력)을 필요로 하는 직역도 얼마든지 있다. 3부의 공무원을 비롯하여, 기업, 학교, 각계 민간단체, 그 밖의 여러 분야에 법대 출신들이 맡기에 알맞은 직종은 부지기수다.또한 로스쿨의 입시에는 대학 학부의 성적을 반영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학부의 성적이 좋아야 로스쿨 입학에 유리하기 때문에 로스쿨은 법대 교육의 정상화 및 면학분위기에도 일조를 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로스쿨의 도입은 결코 법대의 위상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어떤 이는 법대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 아니라 로스쿨이 없는 대학은 판검사, 변호사를 배출하는 대학 축에 못 끼어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법조인 배출에 있어서 로스쿨과 법대의 역할은 직접이냐 간접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직접 배출이 아니면 보람도 못 느끼고 권위도 서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은 참으로 비교육적이고 너무 공리적이다. 역전경주로 말하자면, 골인 지점에 들어오는 최종 주자만을 안중에 두고, 첫 번째나 중간구간을 역주한 선수의 공로는 폄하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로스쿨 대신 법대가 있는 대학을 마이너 리그 쯤으로 여기거나, 스스로 그렇게 자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한승헌 (변호사, 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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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0.05 23:02

[금요칼럼] 남북정상회담 논의 구조의 문제점 - 이우영

며칠 후면 2000년 정상회담 이후 7년만에 남북의 최고지도자들이 만난다. 두 번째 만남인 까닭에 처음 만남만큼의 설렘은 없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모두에 그리고 더 나아가 한반도의 안정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회담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213합의 이후 해결의 가닥을 잡고 있는 북한핵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로 얼룩지워진 지난 반세기의 분단구조가 종식되어 평화체제로의 전환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을 가장 반기고 지원해야 할 남한내 분위기는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는 듯하다. 심지어는 정상회담 개최를 반대하는 여론마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상회담 개최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 동안의 북한문제와 관련된 우리사회의 논의 구조의 비정상적인 경향이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흔히 남남갈등으로 표현되는 북한관련 논의 구조는 대북정책 자체의 문제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북한문제를 국내정치로 환원시키는 문제를 갖고 있다. 좀 쉽게 말하자면 김대중정부의 포용정책이나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의 문제는 정책자체에 있기 보다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즉, 노무현과 김대중에 대한 공격의 일환으로 대북정책을 이용하여왔다는 것이다. 사실 대한민국의 통일정책은 노태우정부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정립된 이래로 근본 철학이나 이념이 바뀐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골간은 전쟁이 아닌 화해와 협력을 통해서, 그리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213합의 이후 한나라당 일각에서 포용정책이 원류는 자신들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들이 만들었던 정책을 그 동안 스스로 비판하였다는 논리적 모순을 고백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한나라당의 새로운 대북정책이나, 이명박 후보의 대북정책이 그동안의 포용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남남갈등은 내적으로 정쟁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남남갈등이란 말 자체가 특정 언론사가 만든 조어로서 정부의 무능과 사회적 혼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담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왜곡된 논의 구조가 국가와 민족이 필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상회담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가하는 식의 건설적인 논의가 아니라, 회담 개최의 당위성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 회담의 정치적 효과에 대한 정쟁적인 논란들이 팽배하고 있다는 것이다.2차정상회담 발표때부터 논란이 중심이었던 대통령 선거와의 연관성도 과거의 경험을 생각한다면 설득력이 없는 문제이다. 이미 2000년 정상회담 발표에도 집권당 득표에 도움이 안되었던 경험이 있다. 오히려 KAL폭파 사건과 같은 남북관계에서 부정적인 사건들은 선거에 영향을 주지만, 대북지원이나 교류확대와 같은 긍정적 사안들은 선거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검증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회담과 같이 중요한 사안에 대한 논의구조가 문제가 있는 것은 일파적으로 보수기득권세력의 정치적이고 정쟁적인 목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만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차 정상회담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집권세력이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설득이나 배려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필요하고 정당한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다양한 의견의 수렴이 필요하다. 또한 자신의 정책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무시한다는 것이 교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추진하는 정책자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우영(북한대학원 대학교 교수) 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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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28 23:02

[금요칼럼] 지금도 사투리, 표준어 따지는가? - 김열규

서울을 떠나서 남행하는 열차 안에서 생긴 일이다.  막 서울역을 나서서 남행하기 시작한 열차의 어느 칸이 시끌벅적했다. 부산과 대구 등지의, 이른바, '남도 여성'들이 많이 탄,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 여성들이 귀를 틀어막고는 견디고 있는 사이에 기치는 마침내, 동대구역에 닿았다. 대구 여성, 한 무리가 내렸다. 기차가 종착역, 부산을 향해서 출발하자, 여자들은 이젠 살았다고 귀를 막은 손을 내렸다. 한데 웬걸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부산 지역 여성만 남았는데도 서울 여자들, 귀는 여전히 따가웠다.  견디다 못한 서울 여자 승객 한 사람이 친구들을 대표해서 부산 여자들이 모여서 앉은 쪽으로 갔다.  '그 좀 조용할 수 없을까요?' 부산 여성이 대뜸 받아서 소리쳤다. '그래, 이 칸이 말칸 니 칸이다 칸은 거가?' 서울 여자는 제 친구들에게로 돌아가서는 '저기 저 여자들 다 일본 사람이야?' 이렇게 투덜대고는 한숨을 토했다. 이건 남도 사람들이 들으면 여간 재마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 비해서 서울 사람들은 무순 이야기인지 전혀 못 알아듣고는 어리둥절할 게 뻔하다. 거기에는 영남말의 멋과 흥이 넘실대고 있지만 서울 사람 귀에는 외국말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울 여성 귀에 일본말로 들린 부산 여성의 발언을 서울 사람 알아듣기 쉽게 옮겨 보자. '그래, 이 (기차) 칸이 몽땅 네 칸이라고 말하는 건가?' 이쯤 될 테지만 그래 가지고는 흥겨운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은 눈곱만큼도 없을 것이다. 부산 여성의 발언은 짧은데도 '칸'이 자그마치 네 번이나 되풀이 되어있다. '칸, 칸, 칸, 칸'의 반복이 신난다. '프랜치 캉캉'의 춤사위 같다. 일행시(一行詩)가 아니면 , 무슨 경구나 속담처럼 재미있게 들린다.  하지만 그걸 서울말로 옮기고 보면, 영 맨송맨송 해서, 무슨 맹꽁이 울음 같다. 재미라곤 티끌만큼도 없다.  그런데도 참 딱한 말버릇이 지금도 버젓이 활개 치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니고 서울 시민가운데서도 중류의 말을 '표준어'라고 떠받들고, 서울 아닌 다른 고장의 말은 '사투리'라고 퉁을 주는 일이다.  '사투리/ 표준어'의 이분법은 지금도 서슬이 퍼렇게 살아 있다. 설쳐대고 있다. 아니, 망언을 떨고 망발을 해대고 있다. '사투리/ 표준어'로 온 나라 안의 말을 양단(兩斷)한 것은 일제 치하의 저 욕된 식민지 시대의 일이다. 한데 그 본보기가 된 게 뜻밖에도 일본이다. 그 당시 이미 저들은 그들의 말을 표준어와 방언(方言)으로 양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뜻으로 다분히 치욕스러운 한국어의 양분법이 거기 꿈틀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침은 없다. 한데 그게 언젠데, 그게 지금도 나부댄다면 그건 분명히 시대착오다. 이제 모든 면에서 지역차별은 없어져 마땅한 이른바, '지역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중앙집권적인 지역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어림짐작이긴 해도 '사투리'란 낱말은 '서툴다'와 사촌 간쯤 될 것 같다. 당치도 않게 각 고장의 고유한 말이 서투르고 시원찮다고 해서는 욕되게 부른 것이 다름 아닌 '사투리'란 그 고약한 낱말일 것 같다. 물론 '방언(方言)'이란 낱말도 쓰레기통에 내다 버려야 한다. 방언이란 낱말을 곧이곧대로 풀면 어떻게 될까?  그건 '중안 아닌, 변두리, 외딴 곳의 말'이란 뜻을 갖고 있다. '중앙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이, 그나마 중앙은 섬기고 떠받들고 지방은 깔아뭉개고 하던 아주 고약한 묵은 시대의 이분법이며 그 악습이 거기 엉겨 있다.  모르긴 해도 한 나라 안의 말을 표준어와 방언 또는 사투리와 표준어로 나누고 있는 국가는 흔할 것 같지 않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중국에서도 그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양분법이 통하고 있는 나라로 우리들이 알만한 나라는 아마도 일본뿐 일 것 같다.  '시엄씨 몰래 술 뚱쳐 먹고 이 방 저 방 다니다가 시엄씨 궁뎅이를 밟았네'  진도 며느리들의 아리랑 타령은 진도 말이라야 제대로 멋 부리고 익살을 떤다.  '날 좀 보소 ,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밀양 아리랑을 뜯어 고쳐서 '날 좀 보세요' 한다면 상대가 천하의 절색이라도 바라볼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제 '사투리와 표준어'의 이분법은 그만 두자. 호남 말, 강원 말, 충청 말 , 영남 말과 나란히 서울말이 있을 뿐이다. /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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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21 23:02

[금요칼럼] 엄살과 투정의 시대 - 안도현

며칠 전 출근길에 모처럼 연탄을 싣고 가는 트럭을 보았다. 반가웠다. 연탄 실은 트럭이 마치 흑백사진 같았다. '연탄' 하면 줄줄이 떠오르는 기억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까닭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슴이 찡했다. 아직도 연탄으로 차가운 계절을 나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직도 연탄으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물을 데우며 겨울을 나야 하는 가구가 20만이다. 북녘에서는 겨울나기 연료로 연탄마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라고 한다. 엄살이 아니다. 나는 '연탄 한 장'이란 시를 쓴 적이 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 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이 가을에 스스로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연탄 한 장인가?" 삼시 세 끼 배곯지 않고 먹고 살만 한 호시절이라는데, 한쪽에서는 영 글러먹은 세상이라고 삿대질로 세월을 다 보내고, 또 한쪽에서는 옛적보다 사는 게 수월찮다고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고 있다. 도처에 투정과 엄살이 넘쳐나고 있다. 경제를 탓하고 정권을 탓하지만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탓하지는 않는다. 이게 문제다. 귀성길에 고속도로가 막히면 길게 늘어선 다른 차들을 탓하지 자신의 차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의 하나라는 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파트 시세의 급상승을 어찌 정부의 정책 부재 탓으로만 돌리는가? 자신의 세속적 욕망이 분명히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입으로 밥 들어가는 일도 투정 아니면 엄살이다. 잘 생각해보자. 더 맛난 것을 혀끝으로 찾으려는 욕망과 더 몸에 좋은 것을 섭취하려는 욕망의 부추김에 길들여지면서 우리는 점점 속물이 되어온 건 아닌지? 먹는 일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도시에서 먹는 일에 한사코 목을 매달고 살지는 않았는지? 남보다 더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먹으려고 아등바등 살아온 것은 아닌지? 요즈음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특정한 정치세력이 권력을 거머쥐지 못한 데서 나온 말이다. 다가오는 대선에 이겨 그 한을 풀겠다는 뜻이다. 엄살의 극치다. 이건 선술집 같은 데서 울분을 참지 못해 술상을 내리치며 내뱉어야 할 소리다. 이런 신파조의 엄살로는 국민을 설득할 수가 없다. 그들은 10년 동안 권력을 잃었을지 몰라도 우리 국민들은 이 기간에 참으로 소중한 민주주의를 얻었다. 비로소 성취한 민주주의를 향후에 어떻게 잘 가꾸어 나갈 것인지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데서 길을 찾아야 한다. 타령은 안 된다. 다시는 '겨울공화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야 한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바로 따뜻함이다.참여정부의 실패와 무능에 대한 지적도 엄살과 투정으로는 곤란하다. 참여정부의 실패는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따뜻함에 대한 배려의 실패이다. 객관적인 논리와 투명한 일 처리의 배면에 따뜻함은 전무했다. 여당 대선 예비후보들이 이른바 경선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따뜻하지 않은데, 누가 그들에게 마음을 주겠는가?곧 추석이 다가온다. 고향은 따뜻한 밥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 누구도 고향에서는 투정과 엄살을 부리지 않았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음식을 나눠먹을 줄 알았고, 반찬을 서로 권할 줄 알았다.명절은 그렇게 더불어 밥 먹던 사람들이 다시 모이는 시간이다.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고향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고향에서는 성공했다고 떠벌이며 자랑할 일이 아니며, 실패했다고 기죽어 고개 숙일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난한 밥상 앞에서 함께 밥을 먹던 사람들이다. 올 가을엔 제발 따뜻한 일이 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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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14 23:02

[금요칼럼] 피랍자 생환이 최우선 아닌가 - 한승헌

아프간 피랍자들의 생환은 누가 뭐라던 정부 당국의 적절한 대응으로 이끌어낸 성과였다. 생존자 전원 석방 합의가 공식 발표되었을 때, 그동안의 피말리는 극한상황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 ― 하고 간절히 염원하던 모든 국민들은 감사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부 당국의 다각적인 노력을 평가했다. 그러나 거개의 언론들에서는 정부 측의 노력과 성과에 대한 언급은 별로 하지 않은 채, 이런저런 문제점만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외국인의 시각, 현실을 무시한 평가, 정부 폄하의 속셈까지도 드러나 있다.두 목숨의 희생은 참으로 가슴 아프지만, 나머지 피랍자를 45일 만에 무사히 생환시킨 마당에 그 과정상의 방법이나 조건을 가지고 이런저런 말로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불과 며칠 전 만하더라도 피랍 후의 상황은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적이었던가. 지난 7월 19일 아프간에서 한국인 23명이 반정부 무장단체 탈레반에 의해 납치당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절망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탈레반은 처음엔 한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한국정부가 연내 철군방침을 밝히자 이번에는 탈레반 죄수 23명과 인질의 맞교환을 석방조건으로 내세웠다. 몇 시간 또는 하루 이틀의 시한을 정해놓고 인질 살해의 협박을 되풀이했다. 탈레반 포로의 석방은 우리의 힘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고, 아프간 정부와 미국의 반응은 냉랭했다. 테러집단과의 협상은 없다는 그들의 원칙론 앞에 달리 돌파구가 없었다. 배형규 목사의 피살, 대통령 특사의 아프간 파견, 고도로 계산된 탈레반의 언론플레이와 심리전, 심성민씨 추가 살해, 한국정부와의 직접 협상을 요구하는 탈레반의 전략, 양측 대면협상의 개시, 여성 인질 두 사람의 석방, 대면협상의 재개, 전원석방 합의에 이르기까지.탈레반의 총부리 앞에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인질들의 절망적 표정을 동영상으로 접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 우리 국민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람만 무사히 돌아오게 할 수만 있다면.하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런 간절한 요망에 부응하고자 정부는 전력을 다했다. 밖으로 알려진 보도만으로도 제반 악조건 속에서 정부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전원 석방의 합의가 발표되고 나자 언론은 곧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입을 모아 탈레반과의 직접 협상을 문제 삼았다. 아프간이나 미국이 냉담했고 달리 사태를 풀어갈 방도가 없는 가운데,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며 인질을 두 사람이나 살해하는 마당에, 무장단체의 직접 협상 요구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우리 쪽에서 직접 대면을 요청하고 싶은 판국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자국민이 무장집단의 총구 앞에 떨고 있는 마당에 테러집단과의 협상금지원칙에 묶여있을 정부가 얼마나 있을까. 사태 해결 전후의 외국 언론의 비난에 대해서 우리 언론이 좀 더 분명히 반론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테러집단과의 협상 불가, 몸값 불가원칙만 준수하고 있다가 우리 형제가 몰살당했다면, 그때 언론은 무어라고 할 것인가. 분명코, 인명이 최우선인데 운운했을 것이다. 아니면 국제사회의 원칙을 지켰으니 잘했다고 할 것인가. 우리 정부의 선택은 트집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잘 한 일은 (누가 했던 간에) 잘했다고 인정하는 풍토가 아쉽다.연말 철군카드를 너무 일찍 꺼내서 협상에서의 이점을 놓쳤다고도 한다. 철군 시기는 어차피 계획되어 있던 것이어서 초동단계에서 인명의 안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발표였다. 만일 그와는 달리 탈레반과의 협상에서 한국군의 아프간 철수시기가 결정되었다고 생각해보라. 이야 말로 씻을 수 없는 굴욕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어떤 언론에서는 시종 탈레반에 끌려 다녔다고 비판했는데, 이번 같은 특수상황 하에서 무슨 수로 주도권을 잡을 수가 있는지 묻고 싶다. 국정원장의 과잉노출과 과잉홍보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전 게임 몰수를 하듯이 정부를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 흔히들 공과(功過)를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데, 공으로 과를 씻을 수 없듯이, 과를 이유로 공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다음 정권을 맡아보고 싶은 정당이나 지도자라면 지금의 국가공직이 바로 다음번의 내(우리) 자리라는 가정을 하고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옳다.우리는 이번 인질사태를 조성한 탈레반의 비인도적 만행에 대하여 분노한다. 동시에 우리 정부의 해외파병정책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한승헌(변호사법무법인 광장)이 칼럼은 전북일보를 비롯 한국지방신문협회 9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게재하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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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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