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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악화(惡貨)냐 양화(良貨)냐 - 이경재

이경재(전북일보 편집국장)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있다. 구축(驅逐)은 만들어 세운다는 뜻(構築)이 아니고, 쫓아 몰아낸다(drive out)는 의미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화폐는 동화 아니면 은화였다. 그런데 왕은 재정 궁핍을 덜기 위해 종종 화폐의 질을 떨어뜨리곤 했다. 가령 100원짜리 은화에는 100원어치의 은이 함유돼야 하는데, 은의 함량을 떨어뜨리고 명목만 100원이라고 하여 유통시켰다. 그 결과 사람들은 자연이 100원어치의 은이 함유된 은화, 즉 양화는 깊숙이 보관하게 되고 함량미달인 은화, 즉 악화를 주로 사용하게 되니 결국 양화는 자취를 감추고 악화만이 시중에 유통되더라는 것이다. 재정고문관인 영국의 금융가 토머스 그레샴이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재정상의 충고를 담은 서한을 바쳤는데, 그 첫머리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이 걸 따 그레샴의 법칙으로 불렀다.

 

이 법칙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적용된다. 조직이나 단체에서 쓴소리 잘하는 사람이 밀려나고 아부 잘 하는 사람이 득세하는 경우도 비슷한 예다. 정치판에서는 더욱 그렇다. 깨끗한 정치인으로 평가받는 어느 국회의원이 17대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하며 사표 냈을 때‘정작 떠나야 할 사람은 안 나가고 국회에 남아야 할 의원이 먼저 떠났다’는 반응도 그런 경우다.

 

5.31지방선거 후보등록이 시작됐다. 후보들이 넘쳐난다. 3대1이 넘을 전망이다. 모두 자신이 제일 똑똑하다고 자랑이다. 올해부터 유급제가 시행되는 지방의원의 경우 더 치열하다. 그런데 유권자들은 냉담하기 그지 없다. 선거날짜도 모르는 대학생이 절반을 넘고, 후보가 누군지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여론조사를 하면 무응답 비율이 절반에 이른다.

 

이런 분위기라면 마치 교통사고 현장에서 처럼 소리 크게 지르는 사람이 이길지도 모른다. 머릿속은 비어 있는데 외모만 준수한 사람이 당선될지도 모르고, 함량미달일 망정 당에 대한 충성 댓가로 공천받은 사람이 승리할 수도 있다. 도덕적 흠결이 많은데도 돈이 많아 의정단상에 설 수도 있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바람 덕에 당선될 수도 있다. 자신의 사업 확장을 위한 수단으로 출마한 사람이 운 좋게 어부지리할 수도 있다. 양화를 몰아내고 악화가 득실거리는 사회라면 끔찍하지 않은가.

 

선거판이 그래서는 안된다. 어차피 가짜가 판치는 세상,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흘려버릴 일이 아니다. 5.31지방선거는 지방의원 197명과 단체장 15명을 뽑는 중요한 행사다. 이들은 전북을 경영할 리더들이다. 특히 지방자치의 한 획을 긋고 새로 출범하게 될 민선 4기에서는 자치단체간 경쟁도 치열해질 전망이다. 전북은 지난 40여년간 변방의 마이너리티로서 서러움을 겪어온 지역 아니던가. 이젠 도약할 때이다. 시대정신과 전문성, 실천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건 유권자 몫이다. 후보를 대충대충 선택할 수 없는 이유다. 리더십이나 전문성을 따지는 건 너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나왔는가’ ‘무얼 하며 살아왔는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세가지 만은 꼭 살피자. 찬찬히 감별해 보는 재미도 있을 터. 더 이상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정치현실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리고 표 찍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이경재(전북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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