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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삼국시대 고분·산성 유적 - 곳곳에 야철지…철기문화 꽃 피운 보물창고

백제 멸망 이전까지 운봉고원을 비롯한 지리산 지역은 삼국시대의 역동적인 변화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남부 지방 중앙부에 위치해 영호남을 잇는 교통의 심장부이자 전략상 요충지였다. 또 백제와 대가야, 가야계 소국들이 서로 교류하는 데 있어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곳이다. 지리산 권역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특히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철기 문화를 꽃피웠던 운봉고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백제와 신라가 이곳의 패권을 두고 20년 넘게 혈투를 벌였을 정도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남도의 관방은 운봉이 으뜸이고, 추풍령이 다음이다. 운봉을 잃으면 적이 호남을 차지할 것이고, 추풍령을 잃으면 적이 호서를 차지할 것"이라며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했을 만큼 운봉고원은 천혜의 자연요새였다.

 

△운봉고원 고분군, 철기문화 비밀 담은 블랙박스

 

지난 2010년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의 이목이 운봉고원에 집중됐다. 남원 월산리에 있는 가야계 고총 M5호분에서 중국제 청자인 '계수호(鷄首壺)'가 발굴됐기 때문이다. 계수호는 백제왕의 주요 하사품으로 알려진 최상급 위세품(威勢品)의 하나로 익산 입점리, 공주 수촌리, 천안 용정리 등 백제 영역에서만 출토됐었다.

 

이와 함께 신라의 천마총·황남대총 출토품과 흡사한 '철제초두(鐵製 斗)'를 비롯해 금제 귀걸이, 갑옷과 투구, 기꽂이 등 가야계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야계 고총에서 계수호와 철제초두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고령 지산동과 합천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제외한 모든 가야계 위세품이 M5호분에서 나왔다.

 

M5호분 외에도 남원 유곡리·두락리 등 운봉고원의 가야계 중대형 고총·고분은 80여기에 달한다. 30m 이상 되는 초대형급을 포함해 대부분 봉토의 직경이 20m에 달하는 이들 고분군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 서쪽에서 최대 규모다. '고분의 입지와 외형은 내부구조 및 부장유물과 함께 고대사회의 총체적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당시 '운봉가야'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운봉가야 철기문화의 비밀을 간직한 고분들 상당수가 아직 발굴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 고대사회의 문화권과 정치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운봉고원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달궁계곡·바래봉 등 야철지 산재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M5호분에서 발견된 철제초두, 기꽂이 등 지리산에 철기 유물이 많은 것은 곳곳에 풍부한 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운봉고원 일대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철광석은 니켈이 함유된 최상급으로 평가받는다.

 

마한 왕의 달궁터를 중심으로 남쪽 하점골과 남서쪽 봉산골 등 달궁계곡 인근에서는 많은 야철지가 발견됐다. 당시에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제련로가 있었던 곳에는 5㎝ 내외의 크기로 잘게 부순 철광석이 봉분처럼 쌓여있다. 철광석의 채광부터 숯을 가지고 철광석을 환원시켜 철을 추출해 내는 제철공정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막 문을 연 철의 유적공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유적의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에 가깝다. 이는 지리산이 일찌감치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의 만복대에서 바래봉까지 이어진 산줄기 서쪽에도 3개소의 야철지가 있다. 운봉읍에서 지방도를 따라 정령치로 향하면 선유폭포에 도달하는데, 그 부근에 쇠똥(쇠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이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남원 고기리 야철지도 운봉고원에서 발견된 야철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세걸산 서쪽 금새암골에도 수철리 야철지가 있는데, 수철리라는 마을의 지명도 철 생산유적에서 유래됐다. 해마다 5월 철쭉제로 유명한 바래봉 서쪽 골짜기에도 철광석을 볼록하게 쌓아놓은 산덕리 야철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야철지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 운봉고원은 철의 생산부터 주조기술까지 응축된 당시 철의 테크노밸리였음을 웅변해주고 있다.

 

△백제·신라 운봉고원 패권 경쟁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의 최대 격전지가 아막성이다. 아막성은 남원 아영고원에 있는 돌로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 둘레가 633m에 이르고 동·서·북문 터가 남아있으며 치성·토루·우물·적대·수구 등이 확인됐다. 운봉가야가 처음 터를 닦고 백제·신라에 의해 개축됐고, 현재의 성벽은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의 최대 격전지였던 아막성 서쪽 성벽.

백제는 신라의 아막성을 차지하기 위해 20년 넘게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백제 무왕은 즉위 3년 만에 4만의 군대를 동원해 아막성을 공격했지만 대패했고, 616년에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624년 백두대간을 넘어 운봉고원을 다시 백제에 예속시켰고, 이를 발판으로 경남 함양까지도 백제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백두대간에서 20년 넘게 계속된 아막성 전투는 철산지인 운봉고원을 차지하기 위한 철의 전쟁이다. 백제 무왕의 중흥프로젝트를 위해 철산지인 운봉고원의 장악이 절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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