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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교·기독교 유적 - 천왕봉처럼 솟은 기상 실천한 '남명학파' 산실

남원 구례 함양 산청 하동에 향교·서원 63곳 / 산천재·덕천서원 남명 조식 선생 혼 깃들어

▲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리산 동쪽 자락에 건립한 덕천서원

지리산권에서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종교가 성행과 쇠퇴를 반복했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성행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가 성행했다. 조선 건국 직후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지리산권 곳곳에 지방관들에 의해 향교가 세워져 유교 경전을 비롯한 선현들의 글이 체계적으로 전수됐다. 그런가 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지리산에 휴양촌을 만들어 심신을 다졌다. 이처럼 지리산은 시대를 초월해 모든 종교를 포용해왔다.

 

특히 유교문화는 지리산권에서 불교문화 못지않게 크게 성행했다. 남원, 구례, 함양, 산청, 하동 등 5개 시·군에 향교와 서원 등의 유적이 무려 63개소에 달한다. 15세기 말 함양군수를 지낸 김종직, 16세기 중엽 남원의 안처순, 함양의 노진, 산청의 조식 등이 대표적 인물. 이중 남명 조식은 실천을 중시하는 '남명학파'를 만들어 지리산 일대와 경상우도 지역, 그리고 순천 남원까지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또 1920년대 남장로회를 중심으로 개신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휴양을 위해 세워진 휴양촌도 56동의 건물이 들어설 만큼 성행했다.

▲ 국내 유일 산속 개신교 유적인 왕시리봉 인근 휴양시설.

△남명 조식 혼 깃든 산천재·덕천서원

 

덕천강 너머로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천재(山天齋).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위치한 산천재는 남명 조식(1501~1572)이 61세 때 이주해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는 이곳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열 번이 넘게 지리산을 유람했고, 12번째 유람을 마친 뒤 '유두류록'을 지을 만큼 지리산 사랑은 남달랐다.

 

또 그는 '천왕봉이 하늘 가까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사랑해서라네(兄愛天王近帝居)'라는 시구를 통해서도 이곳에 정착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처럼 지리산은 남명에게 우뚝한 기상과 기절의 표상을 보여줬고 그는 이를 몸소 실천하며 '남명학파'의 사상을 다져갔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남명학파 학자들은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성향과 현실에 대한 관심과 비판 정신을 여느 학파보다 더 두드러지게 추구한 경향을 보였다. 이는 남명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거둔 것이 증명한다. 산, 사람, 사상이 유기적으로 연관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지리산과 남명 및 남명학파에서 전형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리산 동쪽 자락에 건립한 덕천서원은 지리산과 남명학파가 함께 이뤄낸 문화경관의 집결체다.

 

덕천서원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 지리산에 맺히고 다시 낙남정맥이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다. 하징의 문집인 '창주집(滄州集)'에는 '물이 감아 돌아나가는 것은 먼 듯, 가운 듯 그윽해 서원이 들어서기에 천혜의 조건을 이뤘고 무엇 하나 더할 필요가 없다'고 평할 정도로 명당 자리에 들어선 것.

 

남명을 추모하고 그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워진 덕천서원은 1575년 최영경 하응도 윤근수 등의 문인들이 결의해 창건됐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중건되었다가 1870년 서원 철령에 의해 다시 헐어졌고 다시 1926년 준공됐다.

 

덕천서원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상정에 향사를 올리고 8월 18일에는 남명제를 개최한다. 덕천서원의 향사는 지금도 전통적인 예식에 따라 거행되고 있으며 향사를 통해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외국 선교사에게도 매력적 휴양지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남장로회 소속 개신교 선교사들은 과로와 열악한 환경으로 죽거나 건강이 악화되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휴양시설을 건립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이들이 선택한 곳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지리산이었다.

 

1922년부터 노고단 일대에 일부 건물을 짓고 1923년에는 동경제국대학과 교섭해 본격적으로 건축에 나섰다. 1931년에는 건물 32동에 이용자 149명 규모의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춘 휴양촌으로 발전했고 왕시리봉 인근으로까지 발전해 그 규모는 건물 56동에 달했다.

 

이후 일제와 갈등을 빚은 선교사들이 1940년 한국을 떠난 뒤 휴양촌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노고단 인근의 유적은 대부분 소실됐지만 왕시리봉 인근에 있는 유적지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기독교 유적이 불교나 유교에 비해 숫자나 규모면에서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문화적 가치는 충분하다. 국내 유일의 산중 개신교 유적인 이곳은 단순한 휴양시설의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다. 성서의 한글번역 작업, 전쟁 등 개신교의 수난과 성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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