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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마을 전주 완산동] 사람 냄새 물씬…역사·문화가 숨쉰다

골목마다 느림의 미학 간직…한옥마을에 가려져 무관심 / 417년된 경로당·백운정·청학루 등 이야기 가치 살려야

   
▲ 전주 완산동의 전경.
 

전주한옥마을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면서 최근 한옥마을의 방문객수가 연간 50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역경제의 활성화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먹거리 위주로 상업화되고 외부인의 점입 수가 증가하면서 브랜드로서의 ‘한옥마을’일뿐 서민의 삶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마을’의 정체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최근 마을사업이 지역발전의 기반이 아닌 관광사업으로 전락하고 시각적인 문화자원에만 집중해 감동과 여운없이 그저 보고, 먹는 오감으로 만족하는 건 아닌지 우려가 앞선다. 구도심의 가치를 보존하는 대안 없이 신도심이 개발되고 공동화가 진행되면서 마을의 가치가 점점 소멸되고 있다.

 

마을이라면 삶이란 일상이 순환돼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생산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을의 정의성이 부여될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전주에서 번화한 중앙동과 한옥마을 주변에 위치해 있지만 그 그늘에 가려 슬럼화되고 있는 완산동. 여행칼럼니스트 최갑수 씨는 이곳을 ‘골목의 백화점’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골목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형태를 담고 있다. 골목골목으로 연결돼 지루함을 잊게 했던 느림의 미학을 간직한 완산동이 지닌 문화적 정취와 예술적 풍광을 따라가 봤다.

 

△417년된 경로당, 기령당

   
▲ 417년된 경로당 기령당.

활자로 표현되지 않았던 완산동의 비화 아닌 비화를 듣기 위해 지난 토요일 오후 마을 어르신을 많이 볼 수 있는 경로당인 기령당을 찾았다. 마을 입구의 평상에 있던 할머니들은 기령당을 두고 ‘좋은 한옥’이라며 ‘할아버지 기령당’이라 불렀다.

 

“거기는 멋쟁이 할아버지들만 다녀. 동네사람 말고 전주에서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오는 곳이여.”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멋진 한옥 한 채가 마을과 어울리지 않게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령당(耆寧堂)이란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어르신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 경로당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름 한 번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둘러본 이곳은 마당의 큰 노송이 그늘을 만들었고 점잖게 손님을 맞이하는 한옥의 무게감이 있었다. 실내에서 계단 서너칸만 내려오면 고슬고슬하고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는 것도 기령당의 미덕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로당 안에 들어갔더니 할머니들의 말처럼 할아버지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풍류의 완산동

 

마을 가운데는 1920년 초에 지은 백운정, 청학루라는 누각과 정자가 있었다. 당시 전주 부호 박기순이 사재로 건축한 것을 1931년 시민의 유희장으로 사용하도록 전주읍사무소에 기부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가 있다. 이후 예식장, 국악원 분원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그 자리에 태화아파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백운정과 청학루가 본디 자리에 없는 것보다 더욱 아쉬운 점은 그 터에 대한 어떠한 설명하나 기록 하나 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주민은 여전히 이곳을 백운정길, 청학루길이라고 불렀다. 근방의 지명 역할을 할 정도로 당시에는 마을 내 중심 건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완산동에는 백운정, 청학루가 있었는데 전주의 유지와 일본 사람들이 모여 파티를 벌였지. 당연히 기생들도 드나들었고. 인근에 사는 이들은 기생 옷을 빨고 돈벌이를 하기도 했었지. 옷이 어찌나 이쁘던지 빨아서 한 번 슬쩍슬쩍 입어보는 이들도 있었지.”

 

완산동은 일제강점기 마을과 해방이후 새로 형성된 산동네, 본래의 청학루·백운정·기령당 등의 상류문화, 1970~80년대 부촌의 양옥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다.

 

“완산동은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잘 안 살았던 곳이야. 처음에는 일본인 몇몇이 있었는데 계속 아프고 죽어나가는 거여. 왜 그랬는가 몰라. 아마도 완산칠봉의 정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어.”

 

1980년대 이후 도시 개발에 따라 신도시화가 진행된 반면 완산동은 상대적인 낙후 공간이 됐다. 하지만 완산동 사람들에게 개발은 그리 큰 관심도 요구도 아니었다. 도리어 마을 곳곳에 소방도로가 들어서면서 이웃이 동네를 떠나게 된 것이 가장 속상하다고 했다.

 

△운동화가 어울리는 골목

   
▲ 완산동 골목 계단. 이름 모를 화분들이 놓여있다.

유기전길, 백운정길, 청학루길, 완산길을 지나 골목 10여개를 뒤로 하고 보니 어느새 매화골길(맷길)에 있는 완산시립도서관이 코 앞이다. 울퉁불퉁 곳곳이 패인 길,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수 십차례, 완산동은 구두가 불편한 동네가 아니라 운동화가 어울리는 곳이었다.

   
▲ 임진아 전북아르테 팀장

동네를 걷는 한 시간 남짓. 낮잠 자는 고양이도 보고 오래된 간판들도 감상했다.

 

또 집집마다 대문옆에 내다 놓은 이름모르는 화분들도 구경했다. 미술관의 여느 작품보다, 식물원에서 곱게 자란 식물보다 멋진 것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고 그곳을 지켜온 땅의 냄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흔적이 남아 있고 현재도 서민의 일상적인 삶과 희로애락이 부대끼는 마을. 주민간 연대감으로 과거에 대한 공감대가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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