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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중앙로 문화예술거리]미용실·슈퍼 옆 공방·갤러리 '일상 속 예술'

미용실 옆에는 공방이 있고, 공방 옆에는 슈퍼마켓과 갤러리가 스스럼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상점 곳곳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며 오고가는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는 익산 중앙로 문화예술의 거리. 일상과 예술을 버무린 오묘한 조화가 있는 곳.문화예술의 거리에 새로운 터전을 잡은 젊은 예술가들이 있다. 수 십년을 이웃사촌으로 살아온 터줏대감인 주민에게 손주뻘 되는 젊은 예술가들의 방문은 낯설기만 했다. 임대 지원을 통해 문화예술의 거리의 새로운 주인이 되고 싶은 이방인들. 구도심의 영광을 되살리고, 문화예술의 거리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이 거리에 있다. 낯선 도시에 순수한 꿈을 가지고 제 발로 찾아온 이들.현재 익산문화예술의 거리에는 11곳의 문화예술업종이 임대 지원을 받고 있다.거리의 맏형 조각가 전종규 씨(59)의 음악이 흐르는 미술관. 이름에서 풍기듯이 이 곳은 음악이 흐르는 미술관으로 쉬어갈 수 있는 휴게실처럼 꾸며 놓았다. 수 백점의 조각품이 화실 곳곳에 배치돼 찬찬히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따뜻한 감성의 한순애 화실의 대표 한순애 작가(51). 이곳은 한 작가 개인의 작업공간이자 갤러리다. 주민이 그림 수강을 하며 교습소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수강생 대부분 기존에 있던 학생들과 중앙로 주민이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화실을 가득 채운 것은 수강생들의 작품들이다.공연창작공간 S&A music space(에스 앤드 에이 뮤직 스페이스)는 무대 연출가 임재청 씨(41)가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무대 공연 예술인들의 창작 공간과 공연 제작 홍보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아마추어부터 전문인까지 예술인들의 자유로운 교류와 창작 공간. 임 씨는 현재 팝페라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이며 오페라와 공연 연출을 하고 있는 재능 있는 연출가다.그림손은 김연우 화가(43)가 운영하는 화실. 순수미술 인물화 작업과 작품 연구 공간으로 그림에 관심이 있고 그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림을 지도하고 미술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인물화를 주로 그리는 김 작가는 지역 주민의 세월이 묻어나는 인물화를 그려 전시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커피 문화공방 보이드 팩토리 전창열 대표(33). 카페라고 하기보다는 예술가들의 소통 공간이자 커피의 매력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문화공방이다. 전대표는 신동 대학로에서 카페 프리를 운영하고 중앙로에서는 커피 창업컨설팅 교육을 하고 있는 커피 애호가이자 전문가다. 일반 카페의 스터디 공간과는 약간 다른 개념으로 일종의 숍앤숍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드 팩토리를 찾는 시민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는 예술가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입주자에 불과했던 전 대표는 주민협의회의 막내로서 예술의 거리 활성화 사업에 누구보다 열심이다.문화거리의 마스코트 젊은 피 그그날(그림 그리는 날) 은 조아름 대표(25)와 참여작가 조아라, 이내경, 조은정, 강혜인, 김형성 등 6명으로 구성된 화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곳을 젊은이들이 찾아오는 청춘의 거리로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20대의 젊은 패기를 내세워 화실 꾸미기부터 페인트 칠하기, 간판 달기 등 모든 궂은 일을 6명의 젊은 작가가 직접 해낸다. 그그날은 지역민의 삶을 이야기하는 문화예술 소통공간으로 전시, 교육, 체험활동, 노년층을 위한 문화 소양교육과 미술심리상담 등을 하고 있다. 익산을 알릴 수 있는 지역예술상품을 개발해 제작판매한다. 또 어르신이 들려주는 지역이야기 전시회를 열고, 미술 놀이 공간으로 개방하며 문화예술의 거리의 사랑방으로 지역민과 함께 하고자 한다.플레이 우드는 젊은 목수 박성원(30), 김승권(31) 두 사람이 운영하는 목공예 공방이다. 두 젊은 목공예 작가들의 손을 거쳐 멋진 가구들이 탄생하는 곳이다. 특히 건전한 여가 문화로 DIY가 자리를 잡으면서 요즘 이 곳을 찾는 고객들이 부쩍 늘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곳이다.현재 익산문화예술의 거리 임대지원 사업에 지원을 받고 있는 곳은 11곳으로, 오는 17일까지 추가 모집을 하고 있다. 익산역 앞 중앙로 총 310km 구간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해 소규모 공연장, 아트카페, 전통찻집, 화실, 공방, 갤러리 등 예술인들의 공간을 지원하고 있다. 기존의 주민과 새로운 임대사업 지원자들이 한데 어울리며 익산 중앙로는 아트로드로 변신하고 있다.낯선 이방인으로 찾아왔지만 이제는 당당히 거리의 주인공이 된 젊은 예술가들. 이들로 인해 익산문화예술의 거리의 품격을 찾기를 바라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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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05 23:02

정읍 '샘소리터' 대표 김문선 교장 "정읍 향제줄풍류 함께 즐겨요"

생이불유(生而不有). 만들었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주인이 없지만 모두가 주인이다. 멋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환영하다는 샘소리터를 소개하는 말이다.정읍 나들목에서 나와 내장산 방향으로 8㎞ 정도 가다보면, 저수지 근방 월영마을에 그리 크지 않지만 소나무향이 은은한 집 한 채가 있다. 그 곳의 주인장이자 터지기인 김문선 씨(59)를 만났다. 그는 정읍 월영(현 쌍암) 출신으로 현재는 호남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20여년 전 본인이 나고 자란 터에 주거 공간을 지었다. 10여년 전에는 남은 터에 풍류객을 맞이하는 샘소리터를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찾아오는 손님에게 싫은 내색 없이 차와 음식을 대접하는 안주인의 인심이 더해졌다. 매주 토요일 샘기픈소리 줄풍류 모임이,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는 차 모임을 겸한 만남의 잔치가 열린다. 이 곳의 가장 큰 잔치인 어울마당 모임은 오월과 시월에 있다.△고향의 소리, 풍물유려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멋드러진 집을 짓고, 고등학교 교장에 풍류를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이지만 김문선 씨가 겪은 삶의 여정은 화려하다 못해 어지럽기까지 하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하며 공부할 수 있는 방송통신고교로 진학 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한 그는 신문 배달부터 목공소, 생산공장까지 섭렵하지 못한 장르의 업종이 없을 정도다. 어렵게 졸업을 하고 일과 대학 생활을 병행할 때 우리 음악과의 조우가 지금의 샘소리터를 만드는 바탕이 됐다.교정을 거닐다 북장구소리가 들렸어요. 고향의 정취를 느꼈다고나 할까. 어렸을 적에는 동네에서 좋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모두 모여 풍물을 쳤고, 그렇게 익히게 된 가락들은 몸에 남았죠.그가 소리에 이끌려 간 곳은 봉산탈춤과 송파산대놀이 동아리방이었다. 당시 동아리에 타령 장단을 제대로 짚는 사람이 없어 그가 어렸을 적 풍월로 타령 반주 장단을 펼쳐 보이자 바로 입단이 됐다. 나중에는 동아리 회장까지 지내며 탈춤에 빠졌다.△정읍줄풍류 명맥 이어김 교장은 대학 졸업 뒤 고부여중에서 국어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고향에 내려왔다. 탈춤은 없고 무엇을 하면 좋을까 찾던 차에 정읍 줄풍류의 명인 송파 김환철 씨를 만났다. 김 교장은 지난 1984년 전북 무형문화제 제7호 대금정악 보유자로 지정된 김 명인이 타계할 때까지 향제줄풍류의 대금을 배웠다. 이를 기반으로 김문선 교장이 이끄는 샘기픈소리는 지난 1988년부터 정읍풍류를 알리는 활동을 해 오다 1991년 정식 결성해 샘소리터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줄풍류는 현악기 가운데 거문고가 중심이 된 풍류(風流)다. 줄풀류는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전승하는 경제(京制)줄풍류와 각 지역의 것을 향제줄풍류 또는 민간줄풍류로 구분지어 부른다. 민간풍류 중 구례줄풍류와 이리줄풍류는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정읍줄풍류는 김환철 명인 개인이 무형문화재로 인정이 됐지만 아직 단체는 지정받지 못한 상태다.김문선 교장은 민간줄풍류는 정읍줄풍류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며 전계문, 전용선, 김용근, 김윤덕, 신달룡, 김환철, 이기열 등의 풍류 대가와 이들을 후원했던 김기남 선생의 아양정, 나용주 선생의 이심정 등의 풍류방이 있었고, 정읍국악원(정읍정악회) 등 풍류방의 본래의 기능이 잘 살려진 곳도 운영됐다고 설명했다.그는 이어 현재도 정부의 지원이 아닌 동호인의 모임으로 정읍줄풍류가 유지되고, 풍류방인 샘소리터가 명맥을 잇고 있다며 1954년 조직됐다 1969년 해산된 초산율계에서 1971년에 가객들이 조직한 정읍정악회, 1978년에 율객들이 만든 초산음률회가 오늘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고 덧붙이며 향제줄풍류의 본원지가 정읍임을 강조했다.△인생의 일부인 풍류김 교장은 한 줄의 악보를 고증하고 정비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명인과 교수를 찾아다니며 생을 보냈다. 교직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일과 함께 풍류를 익히고, 연주하고, 악보화했던 일이야 말로 그가 살고 싶었던 인생이었다. 어렸을 적 정취를 느껴 우리 음악을 시작했고, 거기에 파묻혀 보낸 시간만큼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됐다. 스승의 뒤를 이어 문화재 보유자가 되기 보다는 그저 줄풍류를 아는 사람들과 함께 즐 싶다는 소망이다.그는 정읍 향제줄풍류의 악보를 제대로 정비해 완성하고, 이를 알리며 장르를 초월해 진정 멋을 아는 풍류객에게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그의 엷은 미소 속 그동안 천착했던 작업의 수고와 풍류에 대한 애정이 짙게 배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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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9 23:02

[설장구 명인 배난경씨] 국악 외길 서러움 이기며 우리가락 전수 혼신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버스를 타고 전주에서 정읍으로 건너와 전수생을 지도하는 국악인이 있다. 배난경(본명 윤정숙, 65)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어느덧 국악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도 근 반세기가 넘었다는 그를 지난 19일 정읍에서 만나 배 명인 특유의 넋두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를 만나 조용히 옛 이야기를 듣고자 하면 늘 차는 곧 술로 이어지기가 십상이고, 종내에는 북 또는 장구통을 앞에 놓고 흥타령을 쏟아내기가 일쑤다.그도 그럴 것이 장구통을 짊어지고 50년 이상을 국내와 국외 무대를 종횡무진 쏘다녔던 그녀에게 남은 것은 켜켜이 쌓인 설움과 한 뿐이었으리라. 이날도 배 명인은 커피나 녹차 대신 선뜻 술 한 잔 나눠야 이야기가 된다며 술자리를 권했다.그의 이야기는 꿈 많았던 12살의 어린 소녀의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됐다.아마 나는 어려서도 끼가 많았었나 봅니다. 어머니의 그 등살에도 공부보다 장구 가락이 좋았으니까,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늘 권번에서 흘러나오는 따당땅 두들기는 장구 소리에 흥얼흥얼 어깨춤을 추곤 했으니 말이어.그러던 어느 날 출타했다가 당시 교동 권번으로 귀가하던 당대의 명고 명창 고(故) 김동준 선생이 어깨춤을 추는 윤정숙을 발견했고, 12살 어린 소녀는 김동준 선생의 손에 이끌려 처음 권번 구경을 할 수 있었다.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12세 소녀는 전주권번에서 김동준 선생에게 어설프게나마 북장단과 단가를 따라 부르게 되었다. 소녀의 북장단을 우연히 지켜보았던 당대 최고의 설장고 명인 고(故) 이정범 선생이 북장단 보다 설장구 장단을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즉적 제안을 했다.이정범 명인은 어린나이에도 배 명인의 소리와 북 장단이 두드러지자 시험 삼아 몇 가락의 장구 장단을 가르치고는 따라 치게 했고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가락과 몸짓을 모두 따라하는 배 명인을 이정범 명인은 자신의 제자로 입문시켰다.이때부터 배 명인은 김동준 선생이 아닌 이정범 선생을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했고 스승이 하사한 배난경 이라는 예명으로 소녀 국악인으로 거듭났다.당시 이정범 선생이 배난경 명인에게 전했던 설장구 가락은 정읍굿 설장구 가락의 시조로는 불리던 김홍집의 가락이 안봉구, 이봉문, 이정범 등으로 이어지던 가락이었다. 이후 이정범의 설장구 가락은 정읍의 신기성과 전주의 배난경 등에게 전승되는 계보가 됐다.그렇게 지난 1964년 처음 이정범 선생을 만났던 배 명인은 이 해 가을부터 1974년까지 10년간 집중적인 강습을 받았다. 하지만 배 명인의 본격적인 활동은 14세가 되던 1966년부터 전주 여성농악단의 최연소 장구 치배로 선발되며 시작됐다.이때부터는 배 명인은 이정범 명인이 펼치던 서울과 부산, 정읍, 전주 등지의 공연에 함께 참여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장구치배로, 때로는 스승을 대신해 설장구 공연자로 나서며 여성 설장구의 섬세한 가락을 선보이기 시작했다.설장구 가락은 판 굿의 개인놀이에서 출발했던 장르였다. 일반적인 개인놀이가 다른 악기의 반주 속에서 진행되는 것에 반해 설장구는 다른 악기의 도움이 없이도 연주자의 기량을 마음껏 나타낼 수 있는 악기였다.배 명인인 이런 설장구의 특성과 특유의 재능, 노력으로 20살이 되던 1972년부터는 장구치배보다는 뛰어난 설장구 예능인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배난경류 설장구라는 독특한 몸짓과 연주 가락을 선보였다.배 명인은 33세가 되던 1985년 이정범 선생으로부터 설장구 부분 기능보유자 인정서를 제수받았다. 이후 스승과 함께 한국문화재단, 경희대, 국립국악원, 서울예술전문대학, 리틀예인절스 예술단 지도자로 활동했다. 지난 1985년 전국대회가 없던 시절 경주 신라문화재 전국국악경연대회에 독자적으로 설장구로 부문에 배난경류 설장구로 출전해 최우수상을 수상했다.그는 우리가락을 선보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장단과 몸짓을 선보여 왔다. 하지만 그 과정이 때로는 서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외길 국악인이 지니는 한(恨)은 뒤틀리며 완성되는 예술의 마디를 채워주는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현재 배 명인은 전국 각 지역 예술단의 설장구 지도자로 초청받아 활동하고 있다. 차세대 국악인을 키우기 위해 자신을 찾는 전수생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는, 아직은 젊은 국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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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4 23:02

'길청소년' 이광현 소장·'온새미로' 강미 센터장 부부 "문화로 건강한 청소년 키워요"

질풍노도, 사춘기, 중2병. 청소년 시기를 표현하는 단어는 달라도 성인이 되기 전 혼란한 그들만의 문화를 어른의 시선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는 힘들다. 꿈은 크지만 그만큼 힘들고 외로운 십대. 그들과 함께 꿈을 키우는 부부가 있다. 20대를 청소년과 보냈고, 40대가 된 지금은 그들의 지도자가 돼 청소년과 함께 꿈을 만들어 가는 길청소년활동연구소 이광현 소장(43), 온새미로 창의체험지원센터 강미 센터장(40). 이 부부의 청소년 문화 활동을 엿본다.이광현 소장과 강미 센터장은 청소년 활동이 무엇인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대학시절 익산의 한 기관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인연으로 열정 가득한 20대 청년이 뭉쳐 청소년프로그램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1997년 만나 모임의 1호 커플로 결혼에 골인하고, 20대부터 40대가 된 지금까지 정신없이 청소년 활동의 마술에 걸려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하는 부부다. 부부는 청소년활동지원네트워크 아래 온새미로창의체험지원센터(이하 온새미로)와 길청소년활동연구소(이하 길청소년)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아내 강미 센터장이 꾸리는 온새미로는 다양한 문화체험을 통해 청소년의 타고난 재능을 발굴하고 이를 취미나 특기로 연계해 스스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런 과정에서 삼삼오오 공통적 관심사를 지닌 청소년이 함께 할 수 있는 동아리 활동을 유도하고 있다. 온새미로의 역점 사업은 청소년이 주인으로 참여해 창의적인 청소년 문화활동의 터전을 마을마다 특색에 맞게 구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활동이다.특히 우리동네탐사단, 청소년 문화네비게이션, 옹달샘 프로젝트 등은 청소년이 사회에 참여하며 사회의 다양한 상황을 개선하는 활동이다. 우리동네탐사단은 창의적인 세상보기 청소년 역량 강화 활동으로 동네 개선을 위한 자치단체에 제안 및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청소년 문화 내비게이션은 청소년 문화 공간 모니터와 청소년활동 터전 발굴 및 청소년 문화 만들기를, 청소년 문화탐사 활동은 재미있는 체험활동을 통해 시대와 지역에 따른 역사와 문화 알기를 진행하고 있다.길청소년활동연구소 이광현 소장은 천년 별밤캠프프로그램이 문화재청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지역의 역사 문화를 바로 알고,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새벽형 인간인 이 소장은 주간에는 학교수업이나 강의를 나가고, 청소년활동의 동반자인 지도자를 양성한다. 주말에는 청소년과 당일 또는 1박2일, 2박3일 일정으로 문화체험활동을 진행하고 있다.청소년과 함께 하는 이 부부에게도 30대 중반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포기하고 싶었을 때 사랑스러운 아들과 딸이 엄마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해 온 가족이 펑펑 울음바다를 연출하기도 했다.부부는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고 집에서도 소장님, 센터장님이라고 부른다.이 부부에게 청소년 문화 사역에 인생을 거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남편 이소장은 청소년? 그들은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존재다. 무엇이든 흡수하는 스펀지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에게 비춰진 세상이 어떠하냐에 따라 파랑색, 초록색, 흙탕물도 흡수하게 된다며 그들에게 맑고 밝은 주변 환경과 자신을 지키는 힘이 주어진다면, 청소년이 겪어야 하는 진통을 보다 건강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답했다.부창부수인 아내 강 센터장은 청소년 시기에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하다며 문화 교육을 제대로 받은 청소년은 평생 문화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설계하는 만큼 우리 일에 대한 사명이 더욱 크다고 보탰다.이 부부를 감동케 하는 것은 이들과 문화활동을 경험했던 청소년이 어른으로 자라 같은 길을 걷겠다고 찾아오는 오는 일이다.청소년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고, 고되지만 그보다 수 십배의 설렘이 있기에 아직 그리고 앞으로 이 길을 계속 가겠다는 이광현 소장과 강미 센터장. 이들과 풍성한 문화활동을 경험한 청소년의 미래를 생각하면 밝은 미소가 번진다. 문화로 건강한 청소년들을 키우고 있는 이광현, 강미 부부의 활동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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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01 23:02

['페이스북'서 전북 알리는 사람들] 지역소식·사람 냄새나는 소통 공간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사라진 요즘, 예전의 로그아웃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해졌다. 모두가 스마트폰으로 24시간 연결돼 있고 친구와의 대화 또한 더욱 간편해졌다. 그렇지만 같은 지역에 사는, 아니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과의 소통이 나아졌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아마 SNS채널 활용 방법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스마트한 세상을 넘나들면서도 우리가 사는 지역에 대한 관심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 페이스북에서 이웃만나기 전북 페이스북 그룹 3곳을 소개한다.△외국인을 위한 정보 나눔 그룹 (전주 날리지)Jeonju knowloge= 외딴 나라에서 건너와 전주라는 낯선 도시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생활에 대한 정보 얻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유용한 그룹인 Jeonju knowloge(https://www.facebook.com/groups/109931579092860/) 거주지 관련 정보는 물론 구인구직 정보, 게다가 미니 벼룩시장까지 이 그룹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그룹에서는 이미 3000여명의 외국인과 그 친구들이 참여하여 매시간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외국인의 입맛에 딱 맞는 맛집부터, 전주를 떠나는 이들의 이사물품을 정리하는 파격 할인, 새로운 직장을 찾는 이들을 위한 구인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생활정보지의 영문판이 SNS로 들어온 듯하다. 이들은 다른 그룹보다 좋아요나 댓글, 공유 활동이 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타지 생활을 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작은 위안이 되고 있다.△이웃과 책으로 소통하고 싶다면, 책벌레 전주전북= 책을 좋아하는 도민이 모여 소통할 수 있는 그룹도 있다. 바로 책벌레 전주전북 그룹(https://www.facebook.com/groups/bookworm.jb/). 전북뿐만 아니라 각 지역별로 모두 그룹이 형성돼 정기적인 오프라인 모임도 진행되고 있다. 오프라인 모임에서는 한 권의 도서를 정해 해당 도서를 읽은 뒤 모여 토론을 하는 독서회로 운영된다. 개인의 발전을 넘어 도내 청년의 단단한 내공을 쌓는데 시너지를 내고 있다. 현재 책벌레 그룹에 가입한 사람은 100여명. 아직 오프라인 모임의 참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모임에서 진행되는 토론은 누군가의 의견을 뭉개뜨리거나 비방하려는 목적이 아닌 만큼 부담이 아닌 용기로 적극적으로 참여해 내공을 쌓길 바란다.△지역에 관한 것이면 OK= 전주의 주요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하고 싶다면 전주의 모든 것(All about Jeonju Korea)( https://www. facebook.com/groups/jeonjueverything/). 그룹의 이름처럼 전주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전주의 모든 것 그룹의 소개는 이렇다. 전주의 모든 것을 상상하고, 실천하고, 공유하는, 지속가능한 소통의 광장. 이곳에서는 전주에 거주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물론 지역에 관련된 어떤 이야기든 환영받는다. 9000여명의 다양한 그룹가입자로부터 행사 홍보, 공연 정보는 물론 주요 현안에 대한 토론과 아이디어 제시, 캠페인 기획 등 다양한 글이 올라온다. 주요 도로 교통 상황, 지역 날씨까지 재미있고 유용한 정보가 지금 이순간에도 올라와 많은 이웃들이 정보를 나누고 있다.△SNS로 지역의 관심과 사랑 키우기= 이 외에도 페이스북 그룹 검색에 전북 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다양한 그룹이 나온다. 맛집탐험대부터 지역 대학 커뮤니티까지. 기존 포털 사이트의 카페, 클럽이 대신하던 온라인 정보 제공 및 소통 채널을 페이스북이 대신하고 있다. 별다른 로그인이나 어려운 가입 절차 없이 그룹가입 하나로 유용한 정보를 나눌 수 있다는 점. 또한 번거로운 접속 방법 대신 핸드폰 페이스북 앱이나 컴퓨터 화면에서 페이스북에 접속하면 친구들 소식을 보는 뉴스피드에서 자연스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지금처럼 소통의 창구가 다양하고 넓은 시대는 없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모바일 기기 SNS 등을 활용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이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었다. 일상 생활속에 녹아든 스마트한 생활 속에서도 꾸준하게 우리 지역에 대한 소식을 접하며, 지역 뉴스에 참여하고 지역인과 더욱 쉽게 소통한다면 관심은 물론 사랑 역시 절로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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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24 23:02

[전주 구도심 36년된 카페 '빈센트 반 고흐'] 커피향 흐르는 문화감성 공간

도시가 발전하고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다보면 새로운 기능을 가진 공간이 형성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구도심을 형성한다. 전주시 중앙동은 1990년대까지 도시의 심장부로 상업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 심장이 도청 인근 서부신시가지로 이전되면서 유동인구가 줄고 한 달이 멀다하고 업종이 바뀌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30여년 한 자리를 진득하게 지키는 공간이 있어 그곳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카페 빈센트 반 고흐. 다방문화가 주류였던 1990년대, 다방과는 차별된 음악카페로 다양한 연령층의 마니아가 있던 곳. 연인을 위한 카페라기보다 혼자 사색하고 음악듣고 책보는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한 사람의 발걸음이 잦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입구에는 빈센트 반 고흐(1979.3.30.~)이라고 씌여있다. 벌써 36년이다.△제제와 뽀르뚜까의 이야기30년 넘게 운영돼 눅눅하고 습해서 쾌쾌묵은 냄새가 나진 않을지 걱정한 것과는 다르게 말끔하고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카운터, 소파, 책장 등 내부도 눈에 띄게 달라진 건 딱히 없었다. 최신 기계인 제습기가 몇 대 놓여있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20대 봤던 예전 그 사장님이 아닌 30대 청년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는 것 외에는 말이다.현재 이 곳을 운영하는 서보성 대표(35)는 이 카페보다 한 살 이나 어리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이곳을 알았고 그때 20여년간 운영하고 계셨던 사장님을 뵙게 됐죠. 20대였던 저에게 사장님은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주인공 제제를 이해하고 사랑했던 뽀르뚜까아저씨같은 분이셨어요. 힘들 때 얘기하고 우울할 때 찾아가 위로와 도움을 받았죠.대형 프렌차이즈 카페가 들어오면서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영세 카페들이 폐업을 하고 상권이 신시가지로 이동하면서 빈센트 반 고흐 카페도 문을 닫아야 되는 위기를 몇 차례 겪었다. 첫 번째 운영자 이후 단골을 중심으로 가업을 이어가듯 몇 번 대표가 바뀌었고 서 대표가 서른되던 해 이 곳을 인수받아 6번째 주인으로 올해 6년째 운영하고 있다. 6년 전 운영이 너무 힘들어 문닫기 직전에 들어왔죠. 30년 넘게 힘든 시기를 겪으며 유지한 카페만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어요. 여러 사람들, 심지어 뽀르뚜까 사장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운영을 자처했죠.△세대마다 같은 취향은 존재한다빈센트 반 고흐를 즐겨찾는 주류는 20대 추억을 간직한 40~50대가 아니라 의외로 20~30대다.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인 것 같아요. 15년 전 사색과 힐링의 목적으로 조용하고 음악이 잔잔히 흘렀던 이 곳을 찾았던 것처럼 세월이 흘러도 나이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같은 취향은 존재하죠.의도적으로 연출하지 않아도 세월에서 묻어나는 빈티지가 36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멋스럽고 점잖게 드러나고 있었다. 수익이 하루 2만 원일 때도 있었고 지금도 썩 잘되진 않아요. 하지만 20대 제제가 뽀르뚜까 아저씨를 만나 위로받고 성장한 것처럼 지금 20대에게 좋은 인연과 만남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앞으로 20년간 카페가 유지되는 것이 제 목표예요. △문화공간으로 성장을 꿈꾸다향후 20년 뒤까지 생존을 위한 해답은 운영에서만 찾을 수 없었다. 음악카페를 문화카페로 성장시키기 위한 서 대표의 노력은 지난 2010년부터 시작됐다. 현재 解(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방에, 영화제 등의 이름으로 강연, 공연, 영화행사를 청년들과 기획주최하고 있다. 서 대표는 행사라고 하기에는 조촐하다고 머쓱해하지만 20~50명이 참여한다. 어쿠스틱 음악을 주로 하는 인디밴드 공연을 비롯해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는 빈센트 영화제를 독립적으로 진행하면서 대형 영화관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성영화를 상영한다. 내부 공간이 작아 행사를 할 때마다 소파를 이리 저리 옮기고 때로는 바깥으로 다 꺼내 작은 원형의자를 빌려놓기도 한다. 아직은 그럴싸한 문화행사를 하기에는 열정만 있지 시스템을 갖추지 않아 스크린 대신 천으로 가림막을 하고 빔프로젝트를 빌리느라 동분서주한다. 매번 찾아주시는 손님들 덕분에 힘이 나죠. 이제는 참여자, 주최자 구분없이 같이 준비하고 진행하고 홍보해요.특히 지난해 시작한 강연 解바라기는 인기가 가장 많다. 지난 5월 공정여행가 한영준 씨를 시작으로 안도현 시인, 북아티스트 김진섭 씨,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이사, 르포작가 박영희 씨, 연기자 조달환 씨 등이 찾았다. 지난 8월에는 TV프로그램 무한도전으로 유명세를 탄 디렉터 이신혁 씨의 일상에 양념치기 강의가 성황을 이뤘다.걸죽한 이력의 강사를 어떻게 섭외하고 비용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안도현 시인은 카페와의 인연으로 모셨고 제가 아는 분, 아니면 20대 청춘이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섭외하기도 해요.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고 사연을 말씀드리면 또 흔쾌히 와주셔서 그게 감사할 뿐이죠.△문화, 사람, 나눔인터뷰를 마치며 단어 몇 가지가 떠오른다. 문화, 사람, 나눔. 이 순환이 지속되는 한 카페 빈센트 반 고흐는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카페로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앞으로 한 15년 남았네요. 제가 카페지기를 처음 시작할 때 20년간 유지됐으면 했거든요. 잘 만들어 놓은 다음에는 또 다른 세대의 카페지기에게 물려줘야죠.서 대표는 그간 쏟았던 5년여의 시간은 그동안 잠잠했던 카페의 먼지를 떨고 존재감을 알리는 시기였다면 앞으로의 10여년은 자기 색깔로 이 공간을 꾸려 보려 한다는 소박한 계획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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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17 23:02

[군산예술의전당 갈 길] "시민·지역 예술인 문화공간으로"

군산시민의 문화 향유를 위해 지난 2009년 착공해 지난해 5월 백토로에 있는 새들공원에 자리를 잡은 군산예술의전당. 이곳은 3만9048㎡의 터에 연면적 2만450㎡으로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지어졌다. 1200석의 대공연장과 450석의 소공연장, 3개소의 전시실 등을 두루 갖춘 복합적인 문화 공연과 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대공연장의 경우 좌우 이동무대 및 회전무대, 승강무대와 최첨단 조명음향시설 등 최첨단 시설을 자랑한다. 건물의 외형도 만경강과 금강이 서해에서 만나 항구의 깃발을 펄럭이는 열린도시 군산을 상징하고 있다. 이런 하드웨어에도 불구하고 개관 전 제기됐던 운영 과제는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수백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세워진 군산시의 문화기관 및 시설들이 당시 슬로건대로 삶의 질을 높이는 문화예술의 향유 기반을 위한 지역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향후 운영 계획에 대한 더욱 심도 있는 고민이 요구되고 있다.△예산 먹는 애물단지 우려군산예술의전당은 개관 뒤 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6월 개최된 제32회 전국연극제를 포함해 각종 공연과 전시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관람객은 모두 24만여명으로 집계됐다. 시민뿐 아니라 시립합창단과 시립교향악단,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무용.국악) 등 문화예술 단체에는 든든한 둥지가 되었다. 반면 공연 소음 문제와 함께 1억4700여만 원의 청소용역비 예산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관 수입으로 적자를 면치 못하며 애초의 계획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예술의전당은 애초 지난 1986년에 건립된 군산시민문화회관을 뒤로하고 810억 원의 예산을 들여 군산의 문화예술 부흥이라는 이름 아래 마련됐다. 2013년 2월 완공을 앞두고 마감 공사비 부족과 함께 전문 인력을 확보하지 못해 삐걱거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지 앞 백토고개 지하차도 공사로 인한 교통체증으로 시민이 불만을 호소하곤 했다.군산시는 예술의전당 준공에 앞서 2012년에 시민문화회관을 123억 원에 매각해 군산예술의전당 예산으로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매년 그 계획은 무산됐다. 결국 시민문화회관은 지난해 10월부터 보수공사를 실시하며, 재운영 준비에 힘쓰고 있으나 시설 노후화로 보수 공사 예산이 증가하고 있는 상태다.△지역 문화예술과 소통장기적 기획력 필요이같은 양상이 지속되자 올해 예술의전당을 비롯해 근대역사문화벨트지역, 개복동 예술의거리, 청소년수련원 등 군산지역에서 실시하고 있는 다양한 지역문화예술사업에 대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군산시가 무분별하게 문화시설을 확충하는데만 혈안이라는 지적과 함께 각 사업들에 대한 책임감 있는 운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뿐만아니라 진부한 콘텐츠와 마케팅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지속적으로 공연전시를 유치하고 있지만 가시적으로 비춰지는 대규모 공연을 유지하기에는 관련 예산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시민 A씨(군산시 지곡동)는 대공연장의 공연이 없는 날에는 주변이 썰렁하고, 공연이 있는 당일에만 사람이 몰린다면서 관람객 수에 비해 적은 승강기와 높은 계단으로 인해 노약자, 임산부, 장애인, 아동과 함께 공연을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부족한 편의시설 상태를 꼬집으며 빠른 개선을 촉구했다.군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가 김모 씨는 군산예술의전당이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은 큰 공연과 전시들을 콘텐츠로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지역에 터를 두고 창작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소통에 큰 괴리감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 김 씨는 이어 계속해서 기획되는 메이저 공연에 비해 실질적으로 지역 작가들이 나서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이뤄지지 않고, 오히려 외면당하고 있는 상태다며 이들을 위한 장기적인 지원과 기획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군산예술의전당 관계자는 시민을 위해 만들어진 곳인 만큼 대관 수입보다는 양질의 공연과 전시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편의시설 또한 이용자를 위해 나아지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한편 군산시는 내년 예술의전당 주변 새들공원에 총 사업비 120억 원을 투자해 연면적 6553㎡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배드민턴장을 신축해 내년부터 본격적인 운영에 돌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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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03 23:02

광대에서 목수가 된 김석균씨 "가락 대신 치수 세고, 열채 대신 줄자 잡죠"

전주에는 유독 굿쟁이들이 많다. 종교를 떠나 전문예술가는 아니지만 신명과 멋을 논하는 일반 예술인 또는 애호가로 흔히 좀 놀 줄 아는 쟁이가 많은 곳이다. 이 중 김석균 씨(51)는 흙집을 짓는 생태건축가로 알려져 있지만 노는 판에서는 자타칭 광대(굿쟁이)였다. 화류계 광대 김석균을 기억하는 일부 팬에게 그는 옛날에는 궁채와 열채를 들고 꽹과리, 장구를 쳤지만 지금은 망치와 줄자로 굿을 치고 있다고 답한다. 그는 집도 신명이 있어야 제대로 짓는다며 굿도 집도 사람과의 관계로 빚어지는 것은 같다며 가락 대신 치수를 세고, 열채 대신 줄자를 잡는다고 들려주었다. 임실과 순창이 접한 순창군 인계면 초입에 창고를 고쳐 지은 작업장이자 주거지인 흙집에서 그를 만났다. △신명은 관계 맺음김석균 씨는 필봉 농악 상쇠였던 고(故) 양순용 선생에게 풍물을 배웠다. 스승이 스무 살을 갓 넘긴 제자에게 툭툭 던진 말은 큰 화두였다.장구채는 어떻게 만들어야 좋아요?/솔가지 대충 끊어서 쓰면 되지!열채는요?/낫으로 쑥쑥 갈아서 써!동작은요?/니가 신명 나는데로 니몸뚱아리 놀리는거지!김 씨는 풍물은 크게 원을 따라 걷지만 그 안의 개개인은 자유롭게 논다며 그냥 흘러가고 있지만 약속 안에서 움직이는 그 자체가 인생이다고 말했다.이어 그는 가락도 마찬가지다며 느린 가락에서 빠른 가락으로, 다시 느린 가락으로 갔다가 몰아가며 작은 신명을 쌓다가 절정으로 달려가는 구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이 없어지고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움직이는 삶이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철학도, 풍물에 미치다김석균 씨는 정읍 산외에서 태어났지만 초교 2년 때 자식 교육에 열성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주로 오면서부터 제대로 놀았다고 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리랑과 같이 옛 것을 접하면 맥없이 좋았다. 그는 재수생 시절 길을 가다 소극장(극단)에 무작정 들어가 단원으로 받아달라고 떼를 써 입단했다. 극단이 자금 마련을 위해 겨울에 걸립(乞粒)을 시작하면서 풍물을 접했다. 징으로 시작해 북으로 승급할 정도로 풍물판에서 놀 수 있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그전에 인간의 학문인 철학을 먼저 알고자 전북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입학 뒤에는 불교나 민족종교, 노장사상에 푹 빠졌다. 그는 재수시절 확인인정받았던 끼와 신명을 무기로 동아리 등에서 공력을 쌓았다. 그러던 중 대사습놀이에 출전한 할배들의 필봉굿 가락을 듣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어르신들의 관광버스에 무작정 올라 어디 가냐고 묻고 동행했습니다. 중간에 짬을 내서 전주로 와 휴학과 함께 집에 출가를 알리고, 양순용 선생님의 집에 들어가 쇠죽 끓이던 방을 치우고 1년간 기숙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웠습니다. 그는 1년간 배운 걸로 평생을 풀어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그는 나름 의기양양하게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오며 풍물을 했다. 어느날 어르신들의 권유로 즉석에서 실력을 뽐냈더니 칭찬을 하시면서도 원박만 좀 잡으면 되것네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가락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할아버지들의 말처럼 꾸밈없이 투박한 홑가락에 비해 꾸밈음처럼 겹가락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를 느꼈습니다.그는 홑가락만 1년을 치니 소리가 풍성해졌고 대박이 정확히 잡혀 빈 공간이 흔들리지 않아 아무리 빨라져도 여유가 있었다고 회상했다.△채 대신 흙을 잡다한창 놀 때 굿은 그에게 신앙이며, 삶의 가치관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으로 먹거리를 잡으면 흐려질 것 같다는 판단으로 프로같은 아마추어로 살겠다는 결심을 했다. 특히 스승인 양순용 명인이 타계한 뒤에는 공식적으로 채를 잡지 않았다. 그는 육군본부 군악대(국악대)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의 병원에서 근무하다 아버지의 암 판정으로 귀향했다. 아버지를 따라 10여년간 중장비 기사를 하면서 시간 날 때에는 천연염색도 했다. 녹차가 좋아 몇 년간 차도 재배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잡은 일이 흙집이다. 한옥을 뜯을 일을 계기로 관심이 깊어졌는데 왜 아무도 흙집은 만들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 이 길로 왔습니다.그는 풍물을 배웠던 막무가내 정신으로 흙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국립목포대 건축학과에서 다시 공부를 했고 현재 (주)흙건축연구소 살림 대표, 전환기술 사회적 협동조합 이사, (사)10년후 순창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사람과 농민에게 자기주도적인 집짓기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낮일이 끝나고 사람들이 모여 즐거움에 취한 어느 술판에서는 아직도 능글능글한 웃음을 짓고 있는 굿쟁이 목수를 볼 수 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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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27 23:02

[마을의 중심이었던 우물] "마을 역사·문화 깃든 우물·샘 관리해야"

매년 칠월칠석 전날이 되면 정읍지역의 여성들은 직녀를 향해 바느질과 길쌈을 잘 하도록 재주를 빌었고, 동네 남정네들은 영험한 효과가 있다는 새 물을 받기 위해 마을의 공동 우물을 청소하고 시암제를 지냈다.깨끗하게 퍼내고 청소된 공동 우물에 새 물이 조금씩 차오르는 새벽이 되면 그 앞에 큰 상이 차려졌다. 처음 떠올린 물을 정안수로 올리고 온갖 음식이 진설되면 주민은 늦은 밤까지 마을의 안녕과 건강을 염원했다. 정읍의 각 마을마다 칠월칠석을 맞아 성대하게 치러지던 시암제는 지난 1908년 9월 상수도가 보급된 뒤 점차 자취를 감춘다. 상수도 시설이 확대되는 것에 발맞춰 공동 우물에는 덮개가 씌워지기나 쓰레기가 채워지며 매립됐다. 오랫동안 영험한 효과를 자랑하던 산골의 샘터도 버려지거나 메워지기 시작했다. 시암제도 여러 음식 대신 새 물을 담은 정안수와 쌀에 초를 꽂아 불을 밝히는 것으로 간소화됐다. 현재는 그 마저도 양수기로 물을 퍼내는 것으로 시암제를 대체하고 있다. 상수도의 보급과 함께 소중했던 우물과 샘과 관련된 문화가 사라지고 있다. 예로부터 마을형성에 필요한 필수 요건이자 생명의 젖줄 역할을 하며, 이를 매개로 사람들이 만나고 이어지던 정보와 사연들도 사라졌다. 더욱이 이런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물은 환경을 해치는 지하수의 오염원으로 지목됐다.하지만 최근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동안 방치되던 마을 단위의 샘과 우물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마을 단위의 공동우물과 샘에 대한 대대적인 환경 개선을 통해 다시금 자원으로의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문화원연합회 전북도지회가 올해 문화 조사사업으로 과거 생명수로 각광받던 도내의 샘과 우물을 표본 조사했다. 8월 현재 80%까지 조사가 이뤄진 결과에 따르면 도내 생명수는 일부 산간 지역에 남아 있는 음용수를 모두 합해도 60개소에 머물렀다. 지역별로는 무주 산악지역 7개소, 군산 섬지역 6개소, 부안 사찰 및 산간지역 10개소 순창 산간지역 4개소, 고창 산간지역 8개소, 임실 산간지역 10개소, 장수 산간지역 5개소, 김제 6개소, 정읍 4개소 등이었다.현재 우리의 관심에서조차 멀어져 버린 우물과 샘들은 지역에 따라 여전히 생명수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하면 관리가 되지 않고 방치된 우물에는 온갖 오염물질이 모여져 지하수 오염의 근원지가 되어 가고 있는 상태다.이런 현실을 고려하듯 최근 환경부와 한국수자원공사, 국토교통부는 지하수의 오염과 오남용을 막기 위해 지하수법을 제정하고 지난 2005년 12월부터 △지하수의 무분별한 개발과 이용억제 및 오염방지 △지하수이용부담금 부과징수제도 도입 △불법 지하수개발이용 시공업자 처벌 △지하수 공내 청소 등 사후관리제도의 도입 △지하수관련업체 종사자 교육의무화 등 개정안을 시행하고 있지만 개선은 요원한 상태다. 마을의 공동 우물과 샘에 대한 관리는 현행 지하수법상 어느 지역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의 책임과 지휘를 받도록 명기되어 있다. 모터가 설치되어 있는 마을의 공동 우물의 경우 그나마도 우물 소유자의 관리와 행정의 관리를 받고 있다.하지만 소규모의 마을에 산재한 작은 샘과 공동 우물은 모터가 설치되지 않아 해당 관청의 지휘를 받을 수 없어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런 우물은 관리 주체가 없이 방치돼 있거나 마을의 흉물로 전락하면서 지하수 오염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소규모 우물도 관리를 통해 오염원으로서의 위험을 차단하고 마을공동체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자원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지적이다.곽형주 정읍시 영원면 슬로공동체 추진위원장은 과거의 마을의 샘과 우물들은 사람들이 정보와 삶의 애환을 나누던 공간이었다면서 광역상수도가 보급돼 편해지기는 했지만 우리가 마시는 물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어 정수기를 사용하는 형편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마을에 곳곳에 남아있는 소규모 수자원에 대한 고민은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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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20 23:02

[남원 권번 최후의 예인 조갑녀 명인] 90 넘은 나이에도 민살풀이 대중화 혼신

지난 1931년 제1회 춘향제 당시 9세의 예기(藝妓)가 광한루원 앞에서 공연한 화무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1941년 제11회 춘향제까지 이 예기는 매년 화무, 승무, 민살풀이를 추며 춘향제의 명물로 떠올랐다. 그 손짓과 몸짓을본 사람들은 춤은 조갑녀라는 말을 남겼다. 남원 권번 최후의 예인 조갑녀 명인(91)은 그렇게 춤의 전설이 됐다. 그는 맨손으로만 추는 민살풀이의 대가다. 모든 움직임을 몸에 의지하는 춤은 정중하고 법도가 분명하고 무거우면서도 격조가 있다는 평이다. 정작 조 명인은 춤을 출 때 아무 생각이 없어서 좋다고 전했다. 그는 제자인 딸들에게 우리 춤은 반드시 무거워야 가치가 있다며 그 무거움 속에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으니 아무리 좋은 가락도 무겁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우리 춤은 속 멋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어렵고 어지간히 해서 잘 춘다는 말을 듣기 힘들다며 춤은 곧 마음이다. 몸으로 배워 마음으로 춰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조 명인은 1923년 남원 권번의 악기 선생이었던 부친 조기환 씨의 다섯 딸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고모인 조기화 씨도 남원 권번의 제일가는 예기였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7살부터 예기가 됐다. 나라가 망하자 고향인 곡성 옥과로 내려온 이장선 명인(1866~1939)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스승은 임금 앞에서 춤을 췄던 명인으로 어느 날 남원 권번에 왔다 춤 솜씨를 흉내 내던 어린 조 명인의 인상과 자태를 보고 제자로 거뒀다.조 명인은 일제강점기 독립 투사에게 후원금을 내면서 일본 헌병대의 부름에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식민지 통치 하에서 우리 춤과 판소리, 시서화, 사서삼경을 공부하며 전통을 익혔다. 하지만 예인으로서 조 명인의 삶은 결혼과 함께 단절된다. 1941년 부친이 작고하고 이듬해 당시 전라도의 세 번째 부자로 꼽히던 (주)한성물산의 며느리가 된다. 그는 12남매의 어머니로 30년간 춤을 떠난다. 행여 자식들에게 자신이 춤꾼이었다는 사실이 노출될 경우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해서다. 명인은 그렇게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 그러던 가운데 지난 1971년 남원 광한루원에 수중누각인 완월정의 낙성식에서 민살풀이를 다시 무대에 올려야 한다는 주위의 부탁에 예술혼을 일깨웠다. 이어 1976년 춘향제 무대에도 다시 올랐다.그의 딸들도 어머니 모르게 춤을 시작했고 지금은 서울에서 전통무용 아카데미와 민살풀이춤 전수관, 무용단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1997년부터 그는 여섯째인 정명희 씨와 막내 정경희 씨에게 춤을 전수하고 있다. 두 자매는 어머니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춤이다고 말했다. 조 명인은 지난 2004년께 남원에서 새벽 운동길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 임종까지 준비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빠졌었다. 당시 그는 예기 인생의 복원을 위한 삶이 한 번 더 주어졌다고 여기고 민살풀이의 전승을 본격적으로 결심했다고 한다.이후 그는 교육용 민살풀이 한춤 비디오를 제작하고 2007년 한국 예술의 전당 어머니 춤 공연과 2008년 하이서울페스티벌 초청 창덕궁에서 열린 천년만세에 한 번 더 출연했다. 이듬해에는 남원에서 민살풀이를 선보이고 서울 국립국악원에서 노름마치뎐-춤!조갑녀로 다시금 관객을 사로잡았다. 조 명인은 제대로 알고 하면 두려울 게 없다는 평소 지론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정명희경희 씨는 어머니는 지난해와 올해 다시 병원을 오고 가면서 마지막 소명을 다하고 있다며 전수자들이 전통춤을 즉흥으로 추게 하고 그때그때 자리에 맞게 춤을 보기 좋게 만들어 내도록 안무를 꼼꼼히 지도하고 있다고 들려주었다. 두 자매는 이어 본인이 스승의 춤을 배운 뒤 자신만의 춤을 만드는 예술세계를 구축해서인지 어머니는 수업시간에 전수자들이 스스로 터득하도록 시선을 떼지 않고 무섭게 지켜보고 있다고 덧붙였다.이제 조 명인은 자신의 일생을 관조하면서 다시금 사라져간 조선민중의 한이 담긴 민살풀이를 대중화하기 위해 여생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에는 국립국악원이 그의 권번 예기 인생사를 구술로 채록했다. 그의 예기 인생과 연결된 남원 권번의 족적을 찾는 서적 출간도 오는 연말을 목표로 준비되고 있다. 오는 10월2일에는 전주에서 정경희 씨의 민살풀이춤 공연이 예정돼 명인의 맥이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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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13 23:02

익산 문화공간지기 신귀백·이동순 부부 "젊은 예술인과 영화 이야기하며 소통"

59년생 동갑내기 부부는 학교 선생님이었다. 어느 날 남편은 공부를 하고 싶고, 글도 쓰고 싶다며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고향으로 가자고 말한다. 30년만의 귀향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고향에서 문화를 사랑하는 젊은 후배들을 위한 공간을 벌였다.영화평론가 신귀백 씨(56)와 부인 이동순 씨(56)의 컴백 홈. 다시 온 고향에서 뿌리내리며 문화로 이웃과 소통하고 있는 부부를 만났다.늦은 저녁 카페 키노를 찾았다. 아직도 얼굴에는 개구쟁이 호기심이 가득한 남편 신귀백 씨. 온아하고 우아한 자태를 간직한 아내 이동순 씨. 정읍과 전주에서 활동하던 이들 부부를 익산에서 만나기가 조금은 낯설었다.신 씨는 도내에서 영화평론가로 꽤나 유명하다. 그는 영화 〈미안해 전해줘〉의 감독으로 현재 경상대, 우석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전북비평포럼회장, 전북독립영화제 조직위원, 무주산골영화제 심사위원 등을 지냈고, 저서로는 〈영화사용법〉이 있다. 이 씨는 정읍 배영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었다.지난해 부부는 은퇴 후 익산에 터를 잡았다. 익산시 모현동, 새 주소로는 고현로. 이곳은 남편이 어린 시절 어머니, 형제들과 생활했던 고향집이다. 리모델링을 계획하고 집을 손봤지만 거의 리빌딩(재건축) 수준이었다. 330㎡가 넘는 공간에 아담하고 예쁜 집과 문화 공간 카페를 지었다. 앞마당과 뒷마당에 한 그루씩 잘생긴 백일홍을 심어 지나가는 이웃에게 눈인사도 건넸다. 처음에 은퇴하고 집을 짓고 카페를 짓는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다들 부러워했어요. 그러나 하루에 2시간씩 풀을 뽑고 정리해줘야 아름다움이 유지되죠. 만만하게 덤빌 일이 아니고 정말 중노동이에요.이 부부의 기본 터전은 카페 키노(KINO:유럽의 영화관. 독일어로는 영화관을 das kino라고 함)다. 영화를 사랑하는 부부의 소망처럼 익산지역의 자유로운 문화공간이자 쉼터로 떠오르고 있다. 키노는 여느 카페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내부 곳곳은 카메라, 영화 포스터, 책이 놓여 있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공간이 아닌 소통할 수 있는 곳으로 꾸미고 싶은 부부의 바람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남편의 소망은 익산지역의 영화 만들기, 익산 출신 영화인과 익산에서 찍었던 영화의 자료 구축이다. 아내의 바람은 동화책 함께 읽기, 대학생에게 자기 소개서 쓰는 법 전수, 아이들 글쓰기 지도 등이다. 30여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부부는 바쁘다. 새로운 인연 만들기와 영화와 인문학 나누기에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다. 신 씨는 현재 익산영화인문모임의 회장을 맡아 정기 모임을 이끌고 있다. 영화 토론이 주를 이루는 모임은 지금까지 여섯 번 이뤄졌다. 많이 모이는 날은 25여명, 적게 모이는 날은 10여명이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동안 같은 취미와 공감대를 나눌 공간과 사람들에 목말랐던 지역의 인재들이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교사, 작가, 교수, 주부, 학원 강사 등 다양한 회원들로 모임이 구성됐다. 영화에서 이제는 인문학, 철학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 모임에서 진행한 행사로는 지난 5월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전찬일 영화평론가가 진행한 독일 영화 강의, 지난 6월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 출신인 김정식 씨를 초청해 작은 콘서트를 진행했다. 특히 김정식 콘서트에는 주최 측 추산 200여명, 경찰 추산 70여명의 관객이 카페를 가득 메웠다고 주인장은 은근히 자랑한다. 이번 달에는 안도현 시인과 함께 하는 북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이들은 익산이라는 지역적 열세를 벗고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모임을 지향한다. 지역의 문화 예술인이 전국의 유명 감독, 배우와 밤새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 나누고, 철학자와 논쟁을 벌이는 그런 날을 꿈꾸며 한발 한발 준비한다는 포부다. 신 씨의 카페와 집은 그의 염원대로 젊은 후배 예술인에게 좋은 놀이터가 되고 있다. 오전 2~3시까지 예술인들이 모여서 떠들고, 자고, 놀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익산은 예술인들의 쉼터가 적어요. 특히 젊은 예술인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죠. 제 표현대로 찌대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이것이 저희가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죠.이 부부는 후배들이 열정과 끼를 맘껏 발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그리고 만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소명으로 여기고 있다. 지역의 자유로운 문화공간지기를 자청하고 나선 이 부부의 인생 2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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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06 23:02

[전주 영화의 거리 '이름없는 학교'] 재능기부로 꿈 있는 아이에 '날개'

모든 학교에는 이름이 있다. 학교의 이름은 학교의 위치한 곳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이름으로 교훈이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때론 그 학교 이름이 누군가에게는 명함이 되기도 하고 자랑이 되기도 한다.하지만 모든 학교에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전주 영화의 거리 한 복판에 개교한 한 학교, 그 학교의 이름은 없다. 통칭 이름 없는 학교. 이 학교에 이름이 없는 이유는 이렇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나 배울 수 있고, 누구나 사랑을 전할 수 있지만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누구의 명예도 아니며, 오직 아이들에게 모든 걸 전해주는 학교. 그렇기에 거창하게도 이름 없는 학교라 지었다고 한다.△여럿이 한 명의 꿈 이뤄 3년 전부터 혼자 이름 없는 학교를 준비해온 송재한(34) 씨. 그가 바로 이 학교를 만든 주인공이다. 그는 홀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만나며 사비로 도움을 주며 이 학교를 시작했다. 꿋꿋하게 때로는 외롭게 이어오던 이 학교가 이제는 제법 교실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과 선생님도 여럿이 생겼다.이름 없는 학교는 국가에서 인증 받은 정규 교육기관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 인증 사립 교육시설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더더욱 멀다. 조금은 더 특별한 학생을 위한 학교이자, 놀이터이자, 카페이자, 집이다.장애가 있어서 꿈을 포기하는 아이, 경제적 사정으로 꿈을 포기하는 아이, 흔들리는 가정환경으로 꿈을 포기하는 아이, 이들을 위해 현실적인 기회를 주고 교육에서 취업까지 꿈을 이루게 해주는 곳입니다. 말이 학교지 제가 운영하는 스튜디오 한 켠이 공간의 전부죠. 이 학교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꿈과 원하는 직업을 포기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고 나아가 실질적으로는 원하는 곳에 취업하도록 도와준다. 이 곳에서 활동하는 선생님들은 모두가 교직이수를 받은 정식 교사는 아니지만 자신이 지닌 재능을 기부하며 커피, 미술, 사진, 그리고 소통까지 아이들이 꿈에 더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 모든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액 무료로 이뤄진다. 순도 100% 열정과 꾸밈없는 봉사로 만들어진 학교다. 송 씨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누군가에게 인생의 선물을 준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 아닌 수만 명의 가치를 빛내는 길이라는 신조가 개교의 동기였다.고등학교 교실 안에 앉아있는 40여명의 학생들 마음 속에는 누구나 작던 크던 각자의 꿈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꿈과 인생을 빛나게 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빠르고 명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명의 아이에게 1번의 기회라도 줄 수 있다면, 또 나눌 수 있다면요. 이 학교의 졸업생 조가람 군은 포스터 및 판촉물 디자이너가 꿈인 친구였다. 2D 디자인에서 수준급 실력을 갖췄지만 사회에서는 그의 실력만을 보는 게 아니었다. 그의 아픈 몸 때문에 몇 번의 취업과 퇴사가 반복됐다.송 씨와 이름 없는 학교 선생님들은 가람 군과 수다를 닮은 수업을 진행하며 회사생활에서 디자이너로서 광고주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도록 비법을 전수했다. 일반 디자이너와의 차별성을 위해 사진을 직접 찍어 디자인 소스를 만드는 법도 가르쳤다. 현재 그는 전주에 위치한 광고회사에 취업했고 위기 사항이나 실수에는 이름 없는 학교를 지키는 선생님들이 번갈아 출동해 문제 해결과 무마를 돕고 있다. △나눔 약속 위해 길 위에 서다송 씨가 하는 일은 이름 없는 학교뿐만 아니다. 그는 한옥마을과 대학교 일대를 돌아다니며 기념 사진을 찍고 현장 인화도 무료로 해준다. 그리고 그가 받는 대가는 작은 약속 하나.점점 잊히는 세월호를 가슴 속에 담겠다고 약속해주세요.싸우고 틀어진 친구나 애인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하겠다는 약속해주세요.나에게 조금 손해가 되더라도 옳은 일을 하겠다고 약속해주세요.바쁘지만 나눔의 손길이 필요하면 언제든 달려가겠다고 약속해주세요.엄마아빠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까지도 나누며 살자고 다짐하며 손가락을 거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유니세프에 기부 중인 연인은 더 많이 찾아다니며 기부하겠다 약속해 주셨고, 경기도에서 친구들과 놀러온 여성분들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 말하겠다 약속 해주셨어요. 전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나눔의 약속에 뭉클했습니다. 그는 이름 없는 학교와 나눔 약속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게 꿈이다. 100번의 약속이 무한번의 나눔과 사랑으로 실천되도록 말이다.저의 이야기를 보신 모든 분들이, 어디든 좋으니 나눔을 실천하셨으면 좋겠어요. 바로 옆 사람을 돕고, 이웃을 도왔으면 해요. 혼자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따뜻함으로 대해줄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인 일. 나눔은 어렵지만 쉽고, 복잡하지만 간단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필자도 그와 나눔약속을 하였다. 그가 필자와 나누고 싶어 하는 약속은 이랬다. 저와 같이 나눔을 하는 친구들이 전라북도에 많습니다. 제게 힘이 되고 함께 있을 때 시너지를 내는 친구들이죠. 그 친구들을 더 많이 찾아나서 주세요. 그래서 꼭 아직은 세상이 따뜻하다는 걸 보여 주세요. 우리 모두 스스로 나눔 약속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오늘 하루 주변 이웃을 위해 내가 나눌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생각하고 실천하기까지는 분명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바쁜 일상에서 따뜻한 나눔을 지니고 살아가면 그처럼 마음에 넉넉한 여유 한 폭 정도는 남겨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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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30 23:02

[이야기가 있는 마을 전주 완산동] 사람 냄새 물씬…역사·문화가 숨쉰다

전주한옥마을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하면서 최근 한옥마을의 방문객수가 연간 50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역경제의 활성화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먹거리 위주로 상업화되고 외부인의 점입 수가 증가하면서 브랜드로서의 한옥마을일뿐 서민의 삶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마을의 정체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최근 마을사업이 지역발전의 기반이 아닌 관광사업으로 전락하고 시각적인 문화자원에만 집중해 감동과 여운없이 그저 보고, 먹는 오감으로 만족하는 건 아닌지 우려가 앞선다. 구도심의 가치를 보존하는 대안 없이 신도심이 개발되고 공동화가 진행되면서 마을의 가치가 점점 소멸되고 있다. 마을이라면 삶이란 일상이 순환돼야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생산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을의 정의성이 부여될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전주에서 번화한 중앙동과 한옥마을 주변에 위치해 있지만 그 그늘에 가려 슬럼화되고 있는 완산동. 여행칼럼니스트 최갑수 씨는 이곳을 골목의 백화점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골목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 형태를 담고 있다. 골목골목으로 연결돼 지루함을 잊게 했던 느림의 미학을 간직한 완산동이 지닌 문화적 정취와 예술적 풍광을 따라가 봤다. △417년된 경로당, 기령당활자로 표현되지 않았던 완산동의 비화 아닌 비화를 듣기 위해 지난 토요일 오후 마을 어르신을 많이 볼 수 있는 경로당인 기령당을 찾았다. 마을 입구의 평상에 있던 할머니들은 기령당을 두고 좋은 한옥이라며 할아버지 기령당이라 불렀다. 거기는 멋쟁이 할아버지들만 다녀. 동네사람 말고 전주에서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오는 곳이여.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멋진 한옥 한 채가 마을과 어울리지 않게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령당(耆寧堂)이란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어르신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 경로당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름 한 번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둘러본 이곳은 마당의 큰 노송이 그늘을 만들었고 점잖게 손님을 맞이하는 한옥의 무게감이 있었다. 실내에서 계단 서너칸만 내려오면 고슬고슬하고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는 것도 기령당의 미덕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로당 안에 들어갔더니 할머니들의 말처럼 할아버지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풍류의 완산동마을 가운데는 1920년 초에 지은 백운정, 청학루라는 누각과 정자가 있었다. 당시 전주 부호 박기순이 사재로 건축한 것을 1931년 시민의 유희장으로 사용하도록 전주읍사무소에 기부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가 있다. 이후 예식장, 국악원 분원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그 자리에 태화아파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백운정과 청학루가 본디 자리에 없는 것보다 더욱 아쉬운 점은 그 터에 대한 어떠한 설명하나 기록 하나 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주민은 여전히 이곳을 백운정길, 청학루길이라고 불렀다. 근방의 지명 역할을 할 정도로 당시에는 마을 내 중심 건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완산동에는 백운정, 청학루가 있었는데 전주의 유지와 일본 사람들이 모여 파티를 벌였지. 당연히 기생들도 드나들었고. 인근에 사는 이들은 기생 옷을 빨고 돈벌이를 하기도 했었지. 옷이 어찌나 이쁘던지 빨아서 한 번 슬쩍슬쩍 입어보는 이들도 있었지.완산동은 일제강점기 마을과 해방이후 새로 형성된 산동네, 본래의 청학루백운정기령당 등의 상류문화, 1970~80년대 부촌의 양옥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다. 완산동은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잘 안 살았던 곳이야. 처음에는 일본인 몇몇이 있었는데 계속 아프고 죽어나가는 거여. 왜 그랬는가 몰라. 아마도 완산칠봉의 정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어.1980년대 이후 도시 개발에 따라 신도시화가 진행된 반면 완산동은 상대적인 낙후 공간이 됐다. 하지만 완산동 사람들에게 개발은 그리 큰 관심도 요구도 아니었다. 도리어 마을 곳곳에 소방도로가 들어서면서 이웃이 동네를 떠나게 된 것이 가장 속상하다고 했다. △운동화가 어울리는 골목유기전길, 백운정길, 청학루길, 완산길을 지나 골목 10여개를 뒤로 하고 보니 어느새 매화골길(맷길)에 있는 완산시립도서관이 코 앞이다. 울퉁불퉁 곳곳이 패인 길,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수 십차례, 완산동은 구두가 불편한 동네가 아니라 운동화가 어울리는 곳이었다.동네를 걷는 한 시간 남짓. 낮잠 자는 고양이도 보고 오래된 간판들도 감상했다. 또 집집마다 대문옆에 내다 놓은 이름모르는 화분들도 구경했다. 미술관의 여느 작품보다, 식물원에서 곱게 자란 식물보다 멋진 것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고 그곳을 지켜온 땅의 냄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흔적이 남아 있고 현재도 서민의 일상적인 삶과 희로애락이 부대끼는 마을. 주민간 연대감으로 과거에 대한 공감대가 마을을 아름답게 가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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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23 23:02

[군산의 젊은 예술가들 '개복인'] 스산했던 동네에 예술 꽃 활짝

최근 근대역사의 관광지로 다시 한 번 각광을 받고 있는 군산시 개복동에서 젊은 예술가 단체 개복인의 움직임이 뜨겁다.개복동은 1990년대에 큰 극장과 여러 맛집이 즐비했다. 하지만 성매매업소의 화재 사건 이후로 밤에는 가로등 불빛마저 기분 나쁘게 느껴진다며 가까이 사는 주민도 그 근처를 지나가기 꺼려한다는 무성한 소문만이 가득했다. 막상 둘러보니 개복동은 상상했던 곳과는 사뭇 달랐다. 동네 한 쪽 구석에는 젊은 감각의 벽화가 자리를 매우고 있었다. 다른 한 쪽에는 자신의 것으로 보이는 사진과 그림이 걸려있는, 33㎡도 안돼 보이는 작은 갤러리와 가게가 골목의 양쪽 끝을 나란히 하고 있었다. 지난 2008년부터 군산시가 추진하고 있는 개복동 문화예술의거리 사업이 본격화하기 전에 평소 소외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각 분야의 젊은 예술가가 원도심인 이곳에 하나 둘씩 자리를 잡았다. 신예욕탕, 째보선창 등 여러 차례의 레지던스 프로그램(Residence Program, 거주 창작 프로그램)이 실시됐고, 지난 6월에는 가수 강아솔과 기타리스트 박주원의 공연, 골방 영화제 등 그간 문화예술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지켜보던 이들이 어느새 그들을 개복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개복동에서 가장 활발한 소통공간인 카페 나는 섬의 사장이자, 자생적인 예술가 커뮤니티 개복인으로 5년째 활동 중인 미디어아티스트 조권능 씨는 개복동은開(열 개), 福(복 복)자를 써서 복이 들어온다는 뜻이고, 한 때 일번지라 불리던 동네라고 말문을 열었다. 처음에 입주했을 때만해도 쉽지 않았어요. 예술의거리 조성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모인 다양한 주체들의 견해 차이를 좁히기 힘들었죠. 그래서 원래 개인 작업실이었던 공간을나는 섬이라는 이름을 붙여 카페로 만들게 되었고 군산에는 없던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젊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이게 되었죠.인구가 26만 명밖에 되지 않는 소도시 군산에서의 일반적인 삶이란 중고등학교를 마치면 대학과 취직을 이유로 보다 큰 도시로 떠나고 남은 이들은 직업전선에 뛰어든다. 이러한 과정을 무시하고 작가로서 지금의 그들을 있게 만든 집창촌, 윤락가, 예인촌의 과정을 거친 개복동의 매력은 무엇일까. 실제로 개복동에는 군산 최초의 노래방 자리였지만 지금은 음악가들의 스튜디오인 피사의사탑과 도자기 공방 도자기야, 군산대를 졸업한 친구들끼리 만든 공간남쪽의 힘 있는 얼굴들등 많은 이름의 옛 모습을 갖춘 예술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거리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가의 수와 비례하지는 않지만 지역 상인의 다양한 음식점도 개복동 한 켠에서 그들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물론 상황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니다. 마음 놓고 공연을 할 수 있는 사설 공연장의 수는 자생적으로 활동하는 그들에게 턱없이 부족하고 작은 지원조차 흔하지 않다. 서울에 있는 대규모의 미술관이나, 큰 회사를 끼고 활동해야만 알아주는 사람들의 편견도 그들의 발목을 잡는데 한 몫을 한다. 이러한 좋지 않은 조건에서도 꾸준함이 자리해서 일까. 요즘에는 서울, 전주, 광주, 부산, 제주까지 개복동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러 오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에 대해 조권능 씨는 처음에는 친분이 있는 예술가들로 시작해 지금은 많은 분들이 여행을 오면 꼭 개복동에 들른다면서도 이곳 주민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아직까지도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너무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다가가려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한다고 개복인을 대표해 자신들의 문제점도 들려주었다.이들은 개복동을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며, 혹은 꼭 예술을 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강조했다. 분야도 다르며 각자 이루고 싶은 뜻도 다르지만 그저 스산한 동네였던 개복동에서 개복인들은 젊은층을 불러 모으는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더욱이 올해 초부터 카페 나는 섬이 인디(indie) 음악가들의 공연장으로 활용되면서 개복인들의 보다 활발한 활동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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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16 23:02

춤 인생 40여년…이 시대 춤꾼 계현순 "자연스러운 몸짓이 최고의 춤, 관객에게 희로애락 전해줘야"

남원시내에서 장수 방향으로 19번 국도를 따라 15분 가량을 가다보면 식련리라는 곳이 나온다. 마을 어귀로 접어들면 보이는 아름드리 큰 나무를 지나치자마자 새로 다듬어진 길가에 그리 크지도 심하게 아름답지도 않은 집, 무무헌(無舞軒)이 있다. 백구 한 마리가 반기는 이곳은 무용가 계현순 씨(58)의 연습실이자 보금자리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성장생활한 그가 남원에 터를 잡은 이유는 자연이 주는 여유 때문이다. 그는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느긋하고 넉넉해진 모습이었다.무무헌은 한명희 전 국립국악원 원장에게서 얻은 이름이다. 그곳에는 그가 진정 원하는 춤을 이 공간에서 이루고 싶은 욕망이 배어 있다. 그는 서울에서는 36시간을 살아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18시간만 살아도 매우 느긋하다며 어디에서도 이만한 공간을 못 구한다고 무무헌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남원과의 인연은 지난 1998년 국립민속국악원에 안무자로 발령받으면서 시작했다. 서울시립무용단에서 이력을 쌓고, 국립국악원 무용단을 거쳐 온 곳이었다. 2009년에 서울 국립국악원 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올라갔다가 2011년에 임기를 마치면서 다시 남원으로 내려왔다.날씨에 따라 상추, 고추, 꽃이 흙에서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스스로 그러하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무엇일까? 모든 것이 다 갖춰진 무대에서 대접 받으면서 움직이는 춤이 아닌 정말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춤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어느 날 촌부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그는 지게를 진 할아버지의 아침 인사가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춤사위로 다가오는 감동을 받아 김소희 명창의 8시간 완창을 편집해서 사랑의 메아리 라는 무용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고 했다. 할머니 역할을 하다 농부가에 맞춰 그 때 봤던 할아버지의 몸짓을 표현했던 작품이 가장 아름다운 몸짓이었다고 들려주었다.평소 단원들에게 짓밟는 게 아닌 자기 발전을 위한 경쟁을 해라, 물도 채워서 넘쳐 봐야지 비우는 것도 안다라고 하던 그가 현재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후회하는 점은 여유롭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다.그는 단체에 있을 때 왜 사람들을 그렇게 다그쳤을까, 좀 더 느긋하게 할 것이라며 회상했다. 춤이 종교였고 남편이었다는 그의 춤꾼 인생은 중학교 때부터였다. 유독 춤을 싫어해 반대하시던 아버지 몰래 시작했다. 대입 때까지 어머니만 아는 비밀로 무용을 했다. 이후 그는 서울예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시립무용단에 입단했다. 무용단 입단으로 좋은 운은 이미 썼으니 현실적으로 큰 단점인, 남보다 덜한 체격 조건과 떨어지는 외모를 보완해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연습이었다며 조용한 무무헌을 웃음소리로 가득 채웠다.아무리 열심히 해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하는 꼴을 보면 환장할 일이었지만 그 끝에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연습뿐이었다고 덧붙였다.이렇다보니 그에게 연습은 곧 생활이었다. 제자들에게 항상 시집살이도, 부부싸움도, 애 키우는 것도, 먹고 자고 싸는 것, 즉 모든 것이 춤이다고 할 만큼 그의 전부였다.퇴직 뒤에도 마음 속에서 계속 춤을 추고 있다는 그의 마지막 소원은 소리와 함께 하는 무용이다. 자신이 음치, 박치라고 밝히면서도 다듬어 지지 않은 소리가 모여 객석과 함께 하는 소리로 나만의 무대를 이어가고 싶다며 머리를 빡빡 밀고 승무도 하고 싶다고 했다.그는 춤을 통해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숙원 사업이다.춤이란 이런 거 같은데 여러분 생각은 어떤지요라고 객석에 질문을 던집니다. 누구든지 단 한 사람에게라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춤을 추면서 살았던 인생의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무대에 올라 살풀이를 추면서 떨어진 수건을 줍기 위해 엎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최후의 순간을 맞는 꿈을 꾼다는 말에서 춤꾼으로서 그의 열정이 얼마나 큰 지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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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09 23:02

['정읍학'서 정읍문화 길을 찾다] '지역학 열풍' 불어라

지난달 초 〈정읍학〉 창간호가 나왔다. 정읍의 향토사 연구모임이었던 정읍학 연구회의 연구 성과를 모은 결과물이었다. 지방자체제도가 시작된 이후 지역민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던 지역 자긍심의 회복을 위해 민간에서 지역사 연구모임을 만들고 지역학 총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정읍시는 지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본래의 태인 현과 작은 고을 정읍, 그리고 전체의 몸통과 손발을 현재의 부안과 고창으로 다 떼어준, 머리만 남은 고부 지역이 병합됐다. 이 때문인지 어느 지역보다 보수와 진보, 기득특권층과 서민의 갈등으로 빚어지는 배타적 성향들이 두드러졌다. 때문에 민선시대의 개막과 함께 지역 간의 화합과 상생을 위한, 보다 큰 틀에서의 행정적 노력이 요구됐다.하지만 그동안 민선 시정에서는 당면한 생계형 지원에만 행정력이 집중됐다. 농업 인구가 전체 인구의 60%이상을 차지하는 정읍에서 민선 단체장의 주요 캐치프레이즈는 민선1~2기 정읍이 살 수 있는 길은 매실이다, 민선 3기는 정읍이 살 길은 녹차다, 민선 4기 정읍이 살길은 생활체육이다등으로 바뀌어 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20여년 동안 지역민을 위한 삶의 질 향상에 대한 연구나 행정적 지원은 늘 일부 특권층 사이에서 이어져 왔다. 일부는 큰 틀에서의 화합과 상생을 위해 꾸며지는 지역학 연구회의 추진에도 제동을 걸며 건방진 도전이라거나 지역학에 대한 폄훼도 이뤄졌다.민선시대 지역학에 대한 연구는 각 연구자 사이에서도 의견들이 엇갈려 하나의 주제로 어우러지거나 특별한 성과나 사료적 총서가 만들어 지지 못한 채 분열되는 형태로 흘러왔다. 얼 학회, 동학역사문화연구소, 정읍민족문제연구소, (사)둘레 연구소 등이 있었지만 정작 지역의 미래인 청소년에게 향토사를 기반으로 한 강좌보다 입시위주의 한국사 강좌가 이뤄지며 지역학에 대한 접근이 한계에 다다랐다. 교과서에 수록된 한국사와는 달리 지역학에 대한 연구는 특별한 관심과 계기가 없고서는 일반인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민선 3기 당시 유성엽 시장의 주도로 외부에서 바라보는 정읍의 시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설문을 진행했다. 정읍으로 진입하는 나들목 입구의 설문 결과 정읍은 교회가 큰 곳, 특색 없는 곳, 정읍역 인근에서는 택시 기사들의 행포가 매우 심한 곳, 특색 없는 곳이 각각 1~2위를 차지했다.이런 시각을 반영하듯 지난 2011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정읍문화원의 청소년향토사연구동아리의 사전 조사의 결과도 정읍은 특색 없는 곳,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할 곳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하지만 향토사연구동아리를 통해 월~금요일의 인문학 강좌와 토요일 현장 답사를 경험한 청소년들은 생각 없이 천대했던 내 고향이 이렇게 자랑스러운 곳인지 몰랐다며 친구들에게 배운 향토사를 전하겠다고 말했다.현재 정읍지역 내 8개 고교에는 정읍문화원이 연례행사로 추진하는 이 동아리의 연구과정을 경험한 학생 200여명이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를 또래의 청소년들에게 전하는 향토사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다행스러운 일은 지난 민선 5기 정읍시정에서는 기존 사업에 대한 실태 점검 등을 거쳐 부서별 사업 13개 분야, 40개 사업 약 160억 원에 대한 타당성 분석을 거쳐 경제와 정신사적 측면들이 함께 충족될 수 있는 인문도시로의 출발에 나섰다는 점이다.주목할 만한 내용은 각각의 사업을 해당 부서에서 방만하게 지속 추진할 경우 성공적인 사업으로의 발전이나 성과가 나타날 수 없다고 판단해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고 지역공동체지원관으로 기구를 확대했다. 이를 통해 기존 민선시대 사업의 지속적인 추진과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다양한 지역학의 연구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행정적 지원을 약속했다.지방자치시대 민관의 협력으로 지역민이 지역학을 통해 지역발전이라는 대의 앞에 뜻을 모은 것이다. 지역학이 세계화 시대의 출발점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점은 고무적인 변화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먼저 알아야 이를 국가, 세계로 확장할 수 있다는 인식의 결과가 정읍의 자긍심을 얼마나 키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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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02 23:02

남원 문화예술 명소로 거듭나는 '예가람길' "지속적 발전 위해 시민 참여 유도해야"

전통이 살아 숨쉬는 남원의 중심부에 문화예술의 거리가 조성되고 있다. 이른바 예술이 강물처럼 넘친다는 염원을 담아 거리 이름도 전국 공모를 통해 예가람길로 지었다. 이 사업은 지난 2012년 지역문화와 예술자원을 활용해 과거 남원의 본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하고 구도심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시작했다. 이 사업은 지난해부터 오는 2016년까지 원도심 문화예술상가 집적화를 목표로 한다. 문화적 다양성과 함께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민문화예술을 구현하기 위해서다.예가람길을 조성하기 위해 그동안 남원시는 전북도의 예산지원과 맞물려 지난해부터 남원예가람길 운영위원회를 구성했다. 다양한 그룹의 문화예술인이 참여해 민간예술인과 지역의 문화기획자들이 사무국도 설치했다. 남원생활문화예술동호회와 함께 거리조성에 대한 기획과 사업에 대한 집중검토를 마쳤다.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예가람미술관 조성, 방문자센터와 시민카페테리아 조성, 예술간판 지원, 주말거리축제 운영 및 미술조형물 설치, 시민문화예술대학 시행, 예술인 점포 입점시 점포 리모델링비 지원 사업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더불어 남원예가람길 상인협의회도 구성됐다. 문화예술상인 프로젝트를 통해 아트비즈니스모델을 확산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기대도 내비치고 있다. 예가람길은 지난 1980~1990년대 중소형 규모의 의류 점포와 공방, 식당 등이 밀접했던 곳이다. 즐길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했던 옛 남원군청 사거리다. 지금의 남원시의회가 있는 동서길 400m와 과거 남원 본전통으로 남원성 남문 앞 남북길 500m 구간에 도시재생형 T자형구역을 설정하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본격적인 거리 바닥공사와 먹거리를 통한 골목투어가 연계되도록 기초 정비작업이 진행 중이다.예가람길 운영위원장인 윤영근 남원예총회장은 남원은 천년고도의 문화예술이 넘쳐나는 고장으로 과거 사통팔달의 접근성과 집중도 높은 지역문화가 있었다며 호남의 대표적인 문화예술도시답게 전국적인 문화예술교류도 많았고 수준 높은 문화예술인들의 쉼터, 삶터, 일터로서 매력있는 고장이었다고 과거의 영광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현재 퇴색한 예향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비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윤 회장은 지금은 전국적으로 손꼽을 만큼 많이 도심이 낙후돼 도시문화예술을 재생하고 문화예술인이 활동할 기반이 요구되는 실정이다면서 다행히 지금이라도 예가람길이 만들어진 만큼 앞으로도 지속적인 프로젝트 사업으로 행정의 지원과 시민사회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남원 문화예술의 거리를 만들면서 발생하는 문제점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문화예술인 점포가 늘어남에 따라 여러 지원사업의 한계도 나타나고 있다. 전북도의 지원이 계속 사업으로 이어질지도 지역사회의 관심사항이다. 게다가 문화예술의 거리를 활용한 관광자원화에 대한 소프트웨어도 관건이다. 테마여행 프로그램이 미비해 거리가 활력을 찾기에는 역동성과 시공간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함께 받고 있다. 여기에 시민사회를 향한 홍보와 관심 역시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일이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남원 문화예술의 거리 활성화를 위해서는 시민문화예술대학을 활용해 거리상인과 예가람길 운영위원, 남원시가 머리를 맞대는 민관협력모델을 창출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특히 예가람길 서포터즈 개발과 전국적인 문화예술인 교류사업, 상설적인 거리축제를 여는 한편 주말을 이용한 아트마켓 개발, 문화예술박람회 홍보 등이 제시되고 있다. 다양한 문화예술의 사업모델이 발굴돼 남원 문화예술의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는 바람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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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25 23:02

연극인 이도현·이병옥 부부 "인생은 연극, 그리고 가족…무대에 오래오래 설 겁니다"

전북일보가 다시 문화전문시민기자단을 꾸려 전북문화예술의 가려운 곳을 긁어드립니다. 문화예술 기획자방송작가문화예술 현장 활동가들로 구성된 문화시민기자단은 도내 시군 곳곳에 문화예술의 숨은 보배를 찾아 지역문화의 희망을 틔우는 작업으로 진행됩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어려운 여건에서도 지역문화를 살찌우는 사람과 단체, 공간들의 이야기로 독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유쾌한 부부의 연극 이야기연극은 우리 인생의 작은 축소판이라 했던가! 배우는 노래하며 춤추고 조명은 배우의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무대에는 웃음이 퍼지고, 눈물이 흐르고, 사랑을 나눈다. 10대 때 무대를 동경했던 그 시절의 울렁임이 잠시 추억에 잠기게 한다.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했던 전라북도 연극. 전국 연극제에서 대통령상을 5번씩 수상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전성기를 누렸던 그 시절은 이제는 빛바랜 옛 영광이 되어 버렸다. 지역에서 예술은 늘 배고프고 힘들다. 연극은 더 춥고 배고프다. 그러나 이런 고난의 길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연극인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전라북도 연극의 미래를 연극인 부부에게서 발견한다. 연극 배우 이도현(47), 이병옥(41) 부부. 연극계 선후배로 만나 결혼하고 아이 낳고 연극으로 밥 먹고 사는 이들 부부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연극 가족으로 만나 진짜 가족이 되다어느 나른한 오후. 숏 커트 머리에 시원한 웃음소리, 화장기 없는 모습. 털털하고 건강한 미소년을 연상케 하는 씩씩한 아내 이도현씨(47)를 만났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차 한잔을 나눌 무렵, 아이를 안은 남편이 등장. 9개월된 아들 오승이를 가슴에 안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등장한 남편 이병옥씨(41).군복 스타일 바지에 티셔츠. 너무나 편해 보이는 스타일에서 그의 성격을 엿본다. 자리에 앉아 인터뷰를 하면서도 아들의 간식을 챙기고 안고, 달래고, 육아를 책임지는 남편의 자연스런 모습에 살짝 감동을 느끼며, 연극 무대에서 만나 결혼까지 골인한 두 사람의 달달한 러브 스토리.연극계 선배인 아내 도현씨는 1987년 연극을 시작했다. 극단 토지에서 활동을 하며, 그간길 위에 서다 눈 먼 아버지에게 길을 묻다 경로당 폰팅 사건 등의 작품 활동을 해 왔고, 소극장 아르케 대표이자, 극단 작은 소리와 동작의 대표이다. 남편 이병옥씨는 현재 전주시립극단의 단원으로 2003년부터 연극을 했다. 창작극회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참여했다가 전주시립극단 시험을 한 번에 합격한 실력파 배우다. 남자 충동 하얀 앵두 햄릿 등의 대표작이 있다.두 사람은 2006년 연극 가족에 어머니와 아들로 출연하며 처음 만났다. 그리고 만나지 6개월만에 결혼에 골인하는 초스피드 연애를 한다. 어찌된 일인지 두 사람은 첫인상을 그리 좋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무서운 선배, 버릇없는 후배. 공연 후 쫑파티에서 지금의 아내의 모습에서 후광이 비쳐 반했다는 남편의 고백. 물고기 한 마리 키워 보실래요? 남편은 물고기자리, 아내는 물병자리. 프러포즈 또한 배우답게 이색적으로 전주시립극단의 공연 무대에서 생중계로 진행돼 배우와 관객들 앞에서 펼쳐졌다고 한다. 결혼 7년차 부부. 남편은 살림꾼. 아내는 자유로운 영혼.결혼 전에 모악산에 갔는데, 발 마시지를 해 주더라구요. 자상한 남자에요. 결혼 후에도 달라진 게 없어요. 살림도 육아도 남편이 다 알아서 하는 자상한 남편이에요. 저는 결혼 전과 후가 달라진 게 없어요. 여전히 나는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요. 결혼 후에 저는 주부 우울증, 주부 습진에 시달리고 있어요. 적금 들어야지, 살림해야지, 애 키워야지. 흰머리가 늘었다고 주변에서 얘기해요. 아내는 저랑 결혼 잘 한 거지요.그래도 우리 행복하죠 오승이 아빠?그럼요 선배님 행복하지요. 살림에 취미 있고 잘하는 제가 당연히 해야죠. 제가 외조를 잘 하니까, 아내가 밖에서 기죽지 않고 일을 하죠. 그래서 우리 가족은 모두 만족해요.우리 남편 최고.함박 웃음이 떠나지 않는 부부. 이들 부부에게 결혼 6년만에 새 가족이 생겼다. 작년 가을 아들 오승이를 낳고 가족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고, 무엇보다 4대 독자인 남편이기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었다는 아내. △가난한 연극인으로 살아가는 법 두 사람은 욕심이 없다. 적게 먹고 적게 쓰자가 이들 부부의 생활 철학. 연극을 하면서 저절로 얻은 경제 관념. 연극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삶을 꾸려가야 하지만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립극단에서 고정 월급을 받는 남편의 수입으로 살림을 꾸려 갈 수 있다. 적지만 남편은 아버님 칠순 적금, 아이 돌 잔치 적금, 여름 휴가 적금 등 꽤 규모 있게 살림을 잘 한다. 그래도 우리는 상황이 나은 편이에요. 지역에 젊은 배우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데, 재능 있는 배우들은 다 서울로 가고 고향을 지키는 배우들은 힘이 드는 이유. 다 먹고 살기 힘들어 지기 때문이겠죠. 그러면서 예술인들에 대한 복지 정책을 언급한다. 연극인들이 공연 수입만으로 생계를 꾸려간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연극을 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부업을 해야 하는 투잡을 뛰는 분들이 많습니다. 연극뿐만 아니라 예술인들에 대한 복지 정책에 기대를 걸어보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지는 않네요. 적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있다면 연극인들이 무대를 떠나지 않고 버틸 수도 있을 텐데요. 현재 전북에는 19개의 극단이 있다. 전국 연극제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대통령상을 받았던 전북 연극. 전성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답답하기만 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역 극단들이 창작극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지만, 완성도를 높인 화제작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역적으로 전주 위주로 편중되어 있는 것도 문제에요. 군산, 익산, 남원 등 지역에 배우들이 고루 활동을 해야 연극이 발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자체의 지원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특히 지역민들이 연극을 사랑하고 봐주셔야 하는데, 지역 연극을 외면하는 게 무엇보다 슬프죠.특히 지역에 작가 구하기가 힘듭니다. 창작물은 검증이 쉽지 않고, 검증된 작품은 사와야 하는데 비싸고, 초연 작품이 지속적으로 나와 줘야 전북 연극이 발전한다고 생각해요. 지역 작가들이 없습니다. 지역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키워주고 밀어줘야 지역색을 가진 지역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는 거 아니겠어요?△한 곳을 바라보는 부부연극 무대가 인생의 전부인 두 사람이 만나서, 연극 같은 결혼을 하고, 연극처럼 자유롭게 살고 있다. 남편 이병옥씨의 꿈은 소박하다. 연극 무대에서 은퇴한 후에는 시골에 가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주민들에게 풍물, 염색, 연극을 가르치며, 아들 오승이와 살고 있으면 바쁜 아내가 가끔씩 들러 주는 거란다.남편의 말처럼 아내는 바쁘다.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아내는 50살에 연극학교를 세우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30세 이전에 극단을 창단하고 40대에 소극장을 마련한 아내이니, 연극학교도 분명히 세울 거라는 남편의 믿음이 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열심히 외조하고 싶다. 이도현, 이병옥 부부. 이들 부부는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 서는 꿈을 꾼다. 그래서 오늘도 달팽이처럼 한걸음 한걸음 인생을 더디게 둘러보고 사뿐 사뿐 걸음을 내디디며 연극 무대에서 광대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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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1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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