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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역사관광지 될 '무장현 관아·읍성'

조선 태종 17년에 축조 / 일제가 성벽·건물 파괴 / 복원 사업 마무리 단계 / 지역 경제에 도움 기대

▲ 박우정 고창군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여주인공 스칼렛이 저무는 노을을 보면서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여기서 내일(하제)의 해는 오늘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변화의 해요, 희망의 해이며, 기대의 해이다.

 

수많은 하제에 대한 변화와 희망과 기대는 작게는 한 사람의 인생이 되고 사회의 변혁이 되며 이윽고는 역사의 크고 도도한 흐름으로 남게 된다.

 

1894년 갑오년 음력 3월 20일 구수내 장터에 떠오른 해는 전날과 비슷하지만 결코 같지는 않은 해였다.

 

그 날의 해는 보국안민을 기치로 척양척왜를 외치던 대동세상의 해였으며, 봉건적 지배세력에 의한 수탈과 억압을 이겨 내고자 했던 자주의 선봉이 되어 제국주의적 외세 침략에 맞선 국권 수호운동이었고, 갑오개혁을 이끌어 낸 도화선이 됐다.

 

바로 그 중심에서 역사의 현장을 굽어보며 최초의 농민 봉기 창의문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던 무장읍성(2007년 문화재보호법 제10조에 의거 ‘무장현 관아와 읍성’으로 명칭 변경됨)에 대한 2001년부터 추진한 복원사업이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그 주변에 새로운 관광거점 조성사업이 추진된다.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 당시 병마사였던 김저래의 주도하에 주민 2만여명을 동원해 축조됐다고 전해진다.

 

인근의 대표적인 무역항이었던 법성포구가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가 많아 서해안 연변의 어획보호와 왜구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축조했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무송현과 장사현 주민들이 서로 자기 고을이 통합되기를 원해 그 중간지점에 터를 잡아 성을 쌓고 두 현의 앞머리 글자를 따서 무장현으로 개청했다는 축성기가 전해지는 국내 몇 안되는 분지형 석성 중 하나다.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주민 화합을 위한 성이었고, 갑오 선조들의 피와 땀, 정성이 어린 역사의 성이자, 자주의 성이었다.

 

임진난과 동학농민혁명을 거치면서도 훼손 없이 견고하게 유지되던 성벽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내부 건물의 철거와 함께 민족 정기를 말살시키는 아픔을 겪게 되고 말았으나, 다행스럽게도 지난 1991년 2월 26일 무장현 관아와 읍성 전 지역이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고 복원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다.

 

복원사업과 함께 추진될 관광거점 조성사업은 주변 지역을 연계한 근현대 역사체험을 가능하게 하고 읍성관광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여 6차 관광산업으로 발전시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고창군은 행정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청정지역으로 환경과 자연생태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천혜의 고장이다.

 

이렇듯 복 받은 고장에서 서해안 시대를 주도하는 국토 신성장축의 한 축의 기능을 담당하게 될 이번 사업이 지역 정체성 확립은 물론 역사·문화·체험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명품 성읍 역사문화 관광지로 거듭 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2주갑 전 갑오 선조들이 외쳤던 피울림이 커다란 변화의 물꼬를 튼 것처럼, 이제 무장현 관아와 읍성 관광거점 조성사업이 미래 지역사회 발전과 성장이라는 하제의 커다란 해를 끌고 크나 큰 흐름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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