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白露)는 양력 9월 8일경으로 24절기 가운데 열다섯 번째 절기다. 처서와 추분 사이에 들어 있으며, 우주 태양의 황경(黃經)이 165°의 때이다.
이 시기에는 밤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대기 중의 수증기는 엉켜서 이슬이 된다. 흰 이슬이 내리며 가을 분위기가 완연해 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시기에 따르면 백로 입기일로부터 추분 절기까지 15일을 5일씩 3후(候)로 나누었다. 초 후에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중 후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 후에는 대부분 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했다.
백로에 즈음하여 장마도 걷히고 중 후와 말 후에는 쾌청한 날씨가 이어질 때가 많다. 그러나 간혹 남쪽에서 불어오는 태풍이 곡식을 넘어뜨리고 해일(海溢)의 피해를 보기도 한다. ‘백로 절기에 비가 오면 10리에 천석(千石)을 늘인다’고 했다. 그리고 비가 적당히 오는 것을 풍년의 징조로 여겼다. 또한 이 무렵이면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이므로 주부가 친정 어버이를 뵙는 근친(覲親)을 가기도 했다.
백로에 접어들면 맑은 날이 계속되고, 기온도 적당해서 온갖 곡식과 과실들이 토실토실 영글어 가는 때다. 그러나 초가을인 이 때에는 가끔 기온이 뚝 떨어지는 ‘조냉현상’이 일어나, 농작물이 영그는 것을 방해할 때도 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하는 해에는 결국, 수확량이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세시풍속에 따르면 이 때쯤이면 삼국시대부터 왕실에서 영성제(靈星祭) 행사를 치렀다. 농경사회에서 그해 농사의 시기를 예측하는 데는 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여 농사가 잘 되도록 곡식을 맡은 별, 농사를 맡은 별을 별신으로 받들어 천전성(天田星)에 제를 지냈다. 영성제는 영성단(서울시 용산구)을 쌓아 정성껏 제를 올렸다. 이것은 성신에 대한 기대와 감사 그리고 신앙을 보여주는 중요한 세시의례 중 하나다. 이 행사는 조선 중종 때 폐지됐고 정조가 <성단향의(星壇享儀)> 라는 책을 발간해 그 내용을 담았다. 성단향의(星壇享儀)>
그러나 지난달 19일 국립국악원은 정조가 출간한 책을 바탕으로 무용과 음악, 복식과 제례를 체계적으로 고증해 500여년 만에 무대에 올려 KBS-1TV에서 방영했다. 조선 시대의 관복을 입은 무용수들이 제례 음악에 맞춰 군무를 추며 차례로 천하태평(天下太平)을 만들어 냈다. 농사가 풍요롭게 되면 자연히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영성제의 기본을 담아 연주한 것이다.
백로즈음은 포도가 풍성한 절기다. 옛 어른들은 편지 첫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시고’라는 글귀를 잘 썼다. 백로에서 추석까지를 포도순절이라 했다. 처음 수확한 포도는 사당에 먼저 고한 다음, 그 집 맏며느리가 한 송이를 통째로 먹어야 하는 민속이 있었다. 포도알처럼 다산을 유감(類感)시키기 위한 기자주술(祈子呪術)인 듯하다. 참외는 중복, 수박은 말복, 처서는 복숭아, 백로는 포도라 했다. 철따라 과실의 시식(時食)이 정해져 있어 과실 맛으로도 절기를 느끼곤 했다.
백로 절기의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지만 산모퉁이에는 가을 하늘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견디는 늦더위는 풍성한 오곡백과를 만들기 위한 작은 도움임을 생각하고 눈부신 햇볕을 반겨야 하려니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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