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연관된 기억은 / 시공간 뛰어넘는 교훈 / 선조들 지키려한 이유 / / 지나온 역사 복기하며 / 유산으로 남겨내는 것 / 과거 잘 이어나갈 사명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오웰의 작품 <1984>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다. 과거의 기록은 힘 있는 자들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만, 가장 힘이 있던 왕을 중심으로 한 기록은 당대 역사의 사실을 헤아려보고 지금까지 이어오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선조는 예로부터 왕을 중심으로 한 일들을 기억하고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오며 상세히 기록하였다. 대부분 전대의 왕이 죽고 난 후 다음 왕이 즉위된 초창기에 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이를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안전하게 보관해 왔다. 그렇게 특별한 관리를 받은 사고들도 재난과 외세의 침입에 훼손되었고, 그 와중에 기록한 사람들 못지않게 역사의 저장고인 사고를 지켜낸 사람들이 있어 지금도 우리는 과거 역사를 디딤돌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왕의 곁에서 기록되는 실록은 춘추관 내 임시로 둔 실록청에 재상을 중심으로 문필이 뛰어난 대제학을 비롯한 사관(史官) 등으로 조직되어 편찬되었다. 사관은 두 명이 조를 이루어 왕이 잠이 들기 전까지 역할을 나누어 왕의 행동을 기록하고 왕의 말을 기록하는 등 모든 언행을 기록하였다. 사관이 기록한 공식적인 사초는 관장사초(館臧史草)라 하여 춘추관에 보관하였고, 미처 기록하지 못한 사항을 집에 돌아와 기억을 되살려 기록한 것을 가장사초(家臧史草)라 하였다. 가장사초도 왕이 죽고 나면 실록편찬을 위해 제출해야 했지만, 미처 제출하지 못한 가장사초는 사관이 죽으면 함께 묻었던지라 종종 가장사초가 사관의 무덤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국보 제151호인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조선왕조 472년의 역사의 실록이 지정되었는데, 1935년에 편찬되었으나 국보에 못 들어간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있다. 그러한 연유는 이전 왕들의 실록이 4부에서 5부만 보관돼 있는 데 반해 일제 치하에서 200부나 발간되어 역사적 가치도 떨어진 데다가, 총편집인을 일본인이 맡은 까닭에 외면을 받고 세계기록유산 등재에서도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제외되었다.
집필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의 파기와 보관도 철저하게 다루었던 실록청은 편찬이 끝난 실록의 보관에 힘을 다했다. 사고에 보관된 실록은 종이로 제작되었기에 습기와 벌레의 피해를 막기 위해 3년에 1번가량 햇볕에 말리거나 바람을 쐬게 하는 포쇄 과정을 거쳤다. 또한, 국가의 제례나 행사에 과거의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 사관이 살펴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열람을 금지하며 엄정하게 관리했다. 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사고는 곧 당대의 중요한 기억을 보존하는 장소였기에, 안전한 위치에 짓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복사본을 만들어 여러 곳에 나누어 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궁궐 안에 내사고(內史庫)를 두고, 외사고(外史庫)를 지방에 두는 이원체제로 관리했다. 그중 고려시대의 내사고는 개성 수창궁(壽昌宮)에 있었고 외사고는 충주에 충주사고로 두었다. 이후 내사고는 수창궁의 화재, 한양으로의 천도 등에 따라 궁궐 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조선시대 1440년(세종 22년) 경복궁 안에 세운 춘추관에 정착하였다. 외사고는 1439년(세종 21년)에 충주에 이어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새로운 사고가 설치되어, 도서관 역할을 한 내사고인 춘추관사고, 보존을 목적으로 둔 외사고인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의 4대 사고 체제가 완성되어 임진왜란 이전까지 운영되었다.
춘추관(春秋館)에서 아뢰기를,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 6권, 《태종실록(太宗實錄)》 36권을 이제 이미 각각 네 본(本)씩을 썼사오니, 한 본(本)은 본관(本館)의 실록각(實錄閣)에 간직하여 두고, 세 본(本)은 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간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10권, 세종 27년 11월 19일
특히, 외사고가 전주에 자리 잡게 된 까닭은 전주가 조선 왕실의 본관이자, 태조의 어진이 경기전에 봉안된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실록을 차례로 옮겨가며 경기전 내부에 실록각을 설치하여 보관하였다. 초기 3곳 외사고 중 하나였던 전주사고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불에 탄 후, 유일하게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게 되면서 역사적인 의의를 갖게 되었다. 대부분 평지에 있던 사고들은 외부의 침략 등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곳의 사고와 달리 전주사고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주 지역 선비였던 손흥록, 안의, 승려 등이 실록을 안전한 곳에 옮겨 지켜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중 사고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지역민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왜군이 전주 인근에 진입해왔을 때, 당시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태조의 어진과 사고의 실록들을 안전하게 옮겨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록 총 805권 614책 및 기타 전적 등을 옮기기 위해서는 말 20여 필과 많은 인부가 필요했다. 이를 고민하던 중 지역의 명망 있는 선비 손홍록을 찾아가 의논하였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보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혼자 하기엔 역부족이오니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고 하자 손흥록은 흔쾌히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뜻을 함께한 안의와 조카 손숭경, 하인 30여 명과 함께 태조의 어진과 실록을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으로 옮겼다가 하루 뒤 산중 더 깊숙이 들어가 용굴암으로 피난시켰다. 그 후 태조의 어진을 따로 비례암으로 옮겨 안전하게 보관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전주사고의 실록은 남았지만 이후 나머지 소실된 실록의 복구와 안전한 보존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에 전주사고본을 모본으로하여 2년 9개월 만에 4부의 실록을 다시 완성하였고 이를 더욱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로 깊은 산속 험한 장소들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강화도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이 채택되었고, 이에 따라 전주사고의 실록은 마니산으로 옮겨졌다가 인근의 정족산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묘향산사고는 한반도의 북방에 위치한 탓에 중국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관리 소홀이 지적되어 논의되다 묘향산사고의 실록이 1633년(인조11년) 무주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4대 사고에서 춘추관,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의 5대 사고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적상산사고의 실록들은 1911년 일제 강점기 창덕궁 내 장서각으로 옮겨졌다가, 6.25 전쟁 때에 북한으로 옮겨졌고, 다른 사고의 실록들도 조선총독부로 옮겨지고 일본으로 반출되는 등 나라의 운명과 같은 풍파를 겪게 되었다. 북한으로 넘어간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1980년도에 번역되었고, 강화도로 건너간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적상산사고는 1992년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적상산 위쪽으로 옮겨졌다. 현재, 4대 사고와 5대 사고 중 전라북도에 있는 전주사고와 적상산사고만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당시 사고의 역사성을 전해주고 있다.
역사는 기억의 투쟁이다. 한쪽에서는 기념해야 할 것들을 간직하여 소중한 미래의 발판으로 삼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피눈물을 삼키며 지난 과거를 곱씹는다. 민족이나 공동체와 연관된 기억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교훈을 전달한다. 우리 선조들이 사고를 여러 곳에 나누어 두면서까지 역사를 지키려 했던 까닭이다. 그 애쓴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의 면면도 다시 살려 돌이켜 보아야 한다.
역사 안에서 잊히고 지워야 할 기억은 없다. 당대 왕의 기록물인 실록을 두려워하고 귀히 여기며 봉안에 힘썼던 선조들의 지혜를 다시 보게 된다. 디지털 세상이 도래하면서 역사의 기록과 저장의 수단이 달라져 보관에 대한 개념의 차이가 있지만, 오히려 또 다른 오류와 변종의 폐단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지나온 역사를 복기하며 지난 시간과 작금의 기억들을 유산으로 잘 남겨내는 것 또한 과거를 잘 이어갈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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