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진궁이 보낸 남용이 다시 칠봉성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진시(8시) 무렵이다. 남용은 밤을 새워 달려온 것이다. 백제령에 들어온 후에는 성(城)에서 말을 빌려 탈 수가 있다. 이번에는 성의 청으로 들어온 남용이 계백에게 말했다.
“나솔,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땀과 먼지로 얼룩진 얼굴을 들고 남용이 말을 이었다.
“서문(西門) 수문장 여진이 성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대아찬이 서둘라고 합니다.”
청 안에는 화청과 해준 등 결사대 무장들만 모여 있었는데 계백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틀만 이곳에서 기다려라. 내가 방령께 허락을 받고 바로 날짜를 잡을 테니까.”
“그러지요.”
“내가 지금 방성(方城)으로 가겠다.”
자리를 차고 일어선 계백이 무장들을 둘러보았다.
“출전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도록.”
청 안의 분위기에 활기가 일어났다. 마치 야수가 피냄새를 맡은 것 같은 분위기다. 그날 저녁 술시(8시) 무렵, 칠봉성에서 방성인 고산성까지 2백여리 길을 달려온 계백이 윤충과 마주앉아 있다. 청 안에는 무장(武將) 대여섯명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모두 이번 전쟁에 출전할 무장들이다. 계백의 말을 들은 윤충이 어깨를 펴면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때가 되었구나. 나솔, 준비는 다 되었겠지?”
“예, 신라군 군복과 장비도 다 준비되었습니다. 신라 땅으로 들어서면 갈아입을 것입니다.”
“나는 대군(大軍)을 이끌고 가는 터라 변복할 수가 없어. 그대 뒤를 선봉군 3천이 따라가겠지만 아무리 빨라도 하루는 걸릴 거야.”
“알고 있습니다.”
“대야성 서문을 하루 동안 지켜야 되네.”
“지키지요.”
“대왕께도 전령을 보내겠네.”
이제는 길게 숨을 뱉은 윤충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나솔, 살아있어야 하네.”
청을 나온 계백이 매어놓은 말고삐를 풀 때 방좌 연신이 서둘러 다가왔다. 연신은 이번 전쟁에 출전하지 않는다. 방령 윤충을 대신하여 남방을 관리하는 것이다.
“이보게 나솔, 진궁의 딸을 집에 두었나?”
다가선 연신이 낮게 묻자 계백이 목소리를 낮췄다.
“왜 그러시오?”
“진궁이 그대에게 딸을 맡겼다니 나솔의 부인으로 대우해야 되겠는가?”
연신의 시선을 받은 계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내 부인으로 대우해 주시지요.”
“알겠네.”
머리를 끄덕인 연신이 말을 이었다.
“진궁한테 내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전해주게.”
“고맙습니다.”
연신이 말에 오른 계백을 올려다 보면서 웃었다.
“살아 돌아와서 혼인을 하도록 하게.”
말고삐를 챈 계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신은 만약 계백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경우에 대비해서 고화의 처분을 상의한 것이다. 이제 계백의 말을 들었으니 고화는 계백의 부인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었다. 계백은 호위장 무독 곽성과 둘이서 칠봉성과 고산성을 오갔다. 그날 밤 다시 말을 달려 2개의 성에서 말을 바꿔타고 칠봉성에 닿았을 때는 오전 사시(10시) 무렵이다. 길가에서 잠깐 말을 세워놓고 눈을 붙인 강행군이다. 하루 반나절만에 2백여리 길을 왕복한 셈이었다.
잠깐 쉬려고 사택으로 돌아온 계백이 덕조에게 말했다.
“오시(12시)에 날 깨워라. 아씨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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