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옛사람들의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한 흔적들이 합쳐지면 그 진정성을 인정받으며 역사적 사실이 된다. 하지만 고대 역사는 대부분 문헌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다양한 추측이 난무한다.
장수가야는 이러한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장수가야라는 명칭은 장수지역에도 가야가 분명 존재했고 이를 후대에 알리기 위해 임시로 정한 명칭인데 이 명칭은 역사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사용하면 안 된다는 부정적 의견이 높다.
이러한 논란은 학술적 연구 성과를 통해 장수가야의 옛 이름을 찾으면 해결될 것으로 본다.
그동안 장수군은 1995년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에서 가야의 존재를 확인한 후 활발한 학술연구를 통해 여러 가지 가야문화유산을 확인하고 학계 등에 보고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0월 1일 장수군 최초 국가사적 제552호로 ‘동촌리 고분군’이 지정되는 쾌거를 거뒀다. 앞으로도 백화산고분군, 침령산성 등 다양한 유적지들이 국가사적 지정을 위해 준비 중에 있다.
장수군민 모두의 25년 간의 노력으로 학술적 성과가 나타나 국가사적 지정이라는 큰 열매를 맺고 있는 이 시점에 장수가야의 옛 이름을 찾아보고자 한다.
‘일본서기’는 일본에서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7~8세기에 편찬되었다. 이 역사서는 역사왜곡 논란이 많지만 가야 소국 중 하나인 반파국을 소개해 놓았다. 반파국은 봉수를 운영하며 신라에 대비하였고, 백제와 기문을 두고 3년 간 전쟁을 하였다는 기록이다.
또한 ‘양직공도’는 6세기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사절의 사신도로, 백제의 주변국 중 첫 번째로 ‘반파’를 열거하고 있다.
그동안 가야의 연맹국 중 ‘반파’로 추정되는 곳은 경북 고령의 대가야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이유는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를 비추어 볼 때 위에서 언급된 당당함을 가진 국가는 대가야뿐일 것이라는 추측 때문이다.
하지만 문헌에 명시된 ‘반파국’의 성립요건은 ‘봉수’의 운영이다. 그렇지만 후기 가야의 맹주 대가야(지금의 고령) 주변 지역에서 봉수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장수군 일원에는 110개소 이상의 봉수유적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 집결지가 장수군이다. 현재 이들 봉수유적의 발굴조사에서 가야와의 연관성이 높은 가야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진실된 역사로 인식되는 등식인 문헌과 고고학적 발굴조사 성과가 일치하는 대목이다. 고대사회 한 축을 써 내려간 반파국은 장수가야의 옛 이름이라 할 수 있다.
330개소가 넘는 화려한 문화유산을 남기고 특히 당시 최고의 고부가가치산업인 철 생산유적을 70여개소나 남기고 백제와 신라에 맞서며 당당함을 내세웠던 반파국이 지금의 장수군이란 사실에 감회가 벅차오른다.
전주로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백제라 칭한 견훤도 장수군에 국력을 쏟았다. 철 생산유적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산성,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절 등 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장수군의 역사성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증명한다.
옛 이름 찾기에 있어 학술적으로 증명할 일들이 더 남았지만 그동안 전문가들이 흘린 땀방울과 노고에 비춰보면 머지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 결과가 ‘반파국’이란 사실은 당연할 것으로 의심치 않으므로 장수군수로서 군민을 대표해 지금부터 장수가야를 ‘반파국’이라 선포한다.
/장영수 장수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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