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아도 관심도 없는데 재미도 없는 미술을 어렵게까지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물론 화가는 잘 그려야 되는 의무가 있다. 그러나 잘 그린 그림이 곧 좋은 그림은 아니다. 잘 그린 그림이 대학 입시의 평가에 필요하다면 좋은 그림이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날 나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사업하는 후배가 100여 평이 넘는 큰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다. 그 대가로 인도네시아 대사 방문에 맞춰 한나절 전시회도 치러보고, 대만의 무역 왕이라는 사람을 만나 전시회도 기획하는 좋은 일과, 필요하면 그림을 가져가는 나쁜 일도 있는 일종의 계약을 맺은 셈이다. 어느 날 그 후배가 미국에서 소더비의 큐레이터 ‘아이린 에스콰이어’가 작업실에 온다는 것이어서 적잖이 놀랐다. 말로만 듣던 소더비의 큐레이터가 내 작업실을? 꿈인가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더비에 한국관을 만들고 싶어 골동품을 둘러보러 왔는데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곳에 불러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름에 ‘에스콰이어’가 들어가 있어서 이상했다. 그때까지 나는 구두 이름으로만 알았던 것이 사람 이름에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나중에 영문학 교수에게 물어보니 영국의 나이트처럼 미국의 귀족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란다. 시차도 못 느끼는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연꽃과 연이파리 밑에 원앙 비슷한 것들을 반구상으로 표현한 80호 크기의 내 그림 하나를 보며 저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고 싶단다. 나는 거의 실감이 나지 않아 반신반의 상태로 마지못해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도 “그런데 비행기에 어떻게 싣고 가냐?”고 했더니, 문제없다고 씨익 웃으며 일어나더니 능숙한 솜씨로 틀에서 캔버스 천만 뜯어내 둘둘 말았다. 그날은 늦은 밤 헤어지고 이튿날 작업장에 가보니 내가 도착하자마자 다른 사람들은 후배와 함께 급하게 어디로 가버리고 단둘이서만 아이린의 원래 목적대로 인사동으로 가야 하는데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니 손짓·발짓 영어가 시작되었다. 인사동에서 아이린의 일을 마치고 우리는 당시 서울신문사의 프레스센터에 갔다. 그곳 1층에선 그룹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고 고화흠 선생을 포함하여 열댓 명 남짓이 출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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