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조는 모나리자에게 반할만 한 인물도 못되었다. 다만 그는 희대의 사기꾼인 에드와르도의 ‘머리카락 한 올의 오차도 없는 계획’의 가련한 희생물이었을 따름이다.
루브르박물관의 내부를 너무 잘 알고 있던 그는 란제로티 가의 형제인 또 하나의 빈센조와 미케레 등과 함께 자신들이 ‘시뇨레’라 부르는 에드와르도에게 약간의 착수금을 받고 토요일 오후 박물관 관람객으로 들어갔다.
빈센조와 일행은 일요일에는 관람객이 너무 많아 화가들의 작업이 허용되지 않고 월요일에는 모든 보수 작업이나 청소를 위한 정기 휴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 점을 이용해 화가들이 화구를 맡겨두는 창고에 잠입했다. 결국 이들은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청소부로 가장하여 마침내 모나리자를 빼내는 데 성공한다. 이를 소재로 우리나라에서는 ‘백만 불의 사랑’이라 번역된 오드리 헵번, 피터 오를 주연의 영화도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연락한다던 ‘시뇨레’ 에드와르도가 빈센조 자신에게는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그림을 가지고 이탈리아에 가면 나는 영웅이 될 것이다’ ‘나폴레옹이 약탈품의 일부를 조국에 다시 반환하면 나는 기필코 명사가 되리라’
끝없이 환상에 빠지면서 이탈리아에 잠입, 화랑에 접근하여 50만 리라까지 흥정을 하였으나 체포되고 끝내 영웅이 되기 위해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철저한 희생양 빈센조 페루치아는 결국 무라테 감옥으로 가고, 모나리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양국 간의 ‘영원한 우호와 단결의 징표’로서 1913년 12월 31일 본래의 소장국인 프랑스로 돌아가 이듬해 1월 4일 감격어린 의식 속에서 다시 루브르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지금의 모나리자는 특별히 설계된 살롱 대제타의 오래 된 벽에 습도 조절장치를 설치한 두꺼운 유리에 의해 보호되고 있다.
한편 에드와르도는 빈센조가 온갖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미 6점의 모사품 모나리자를 현재(2010년) 시세로 1,600만~1,800만 달러로 추정되는 거금을 챙겨 북 아프리카와 중동을 돌며 호사스런 생활을 하다가 1931년 사망했다. 빈센조가 계속 단독 범행임을 주장하니 추적을 당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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