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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나는 인구 조사원이 아니올시다 1

렘브란트의 자화상 청년시절
렘브란트의 자화상 청년시절

이탈리아 남부에서 미켈란젤로(1475-1564)가 의미 있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42년 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남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레이던이라는 곳에선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가그 천재와 허망의 일생을 알리는 첫 고고지성을 울렸다. 그는 신의 창작품 중에서도 결코 평범하지 못했던 까닭에 슬픈 죽음의 대명사가 되었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와 마찬가지로 지난 날 맛보았던 최상의 영광은 이미 추억이 되었을 뿐, 감당하지 못할 현실의 체중에 눌려 질식하고 말았다. 모차르트가 스스로 신의 재능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의 보복을 받은 것이라면 렘브란트는 신의 절대성을 인간들 사회로 옮겨 온 것에 불과할 따름으로 사람답게만 살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13플로딘(한화 약 4,160원)짜리 빈민 묘지에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 버렸고, 그저 그림만 남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우리의 비어있는 가슴을 응시하고 있다. 코끼리만한 몸매에 빈대만도 못한 영혼을 소유하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에게조차 분노는 커녕 애정을 느꼈던 사람, 돈보다는 명예를, 명예보다는 자유를 원했던 그는 당시 우주의 중심이라 여겼던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회화의 모든 것을 그리고 있었다. 신의 영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거짓 영광에 따른 불완전함을 비추는 거울을 찾아내 살아있는 사람이 숨을 쉬듯 그냥 그렇게 아무런 꾸밈없이 비추어 냈다. 그는 방앗간 집의 여덟 번째 아들로 태어나 높고 작은 창문을 통하여, 돌아가는 풍차의 날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가는 빛, 마치 여명의 등대처럼 깜박이는 빛 속에서 그 빛과 어둠이 주는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조화를 바라보며 자랐다.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서도 큰 빛을 보는 눈이 생겼을 것이고 그 어둠은 자신을 응시하는 습관을 익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많은 자화상을 그릴 수 있는 터전이 생겼나 보다. 자화상은 자기 내면에 초점을 맞춘 자신 내면의 촬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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