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는 세계적으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는 뒤러(Albrechht Duerer1471-1528), 세잔(Paul Cezanne 1839-1906),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보다 더 많은 100여점의 자화상을 자신에게 아부하거나 학대하는 일 없이 깊은 자기 응시와 성찰 속에서만 그리고 또 그렸다.
자화상이 많다는 것은 화가 자신을 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자기를 신뢰하고 또 반성하며 자신의 예술에 절망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며 인간을 증오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 본래의 고독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자화상뿐만 아니라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정겨운 풍경도 그렸고 성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푸줏간의 고기 덩어리를 그리는가 하면 생명처럼 사랑했던 어머나 코르넬리아와 아네 시스키야, 아들 티투스를, 나중에 궁핍만을 나눠줘야 했던 하녀이자 두 번째 아내 핸드리케를, 심지어는 자기를 조롱했던 사람들까지도 똑같은 애정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당시 풍속 화가들이 많았던 암스테르담에서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물 화가, 초상화가로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아내 사스키아와는 2남2녀를 두었으나 세 자녀는 어릴 적에 죽고 2남 티투스만 병약하게 장성했는데, 그마저 아버지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다, 역시 허약했던 아네 사스키아도 결혼 8년만인 1642년에 죽는데, 공교롭게도 이 해는 렘브란트에게는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그 때가 렘브란트 미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야경夜景’이 그려진 해이기 때문이다.
17세기 네델란드에서 전개된 단체 초상화 분야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되는 이 ‘야경’이라는 그림은 렘렘브란트의 생활을 급변시키지는 않았으나, 이로 인해 세상이 그에게 주던 인기와 명성, 그리고 부에 대한 결별이 시작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수입이 줄어들면서 재정적으로 점차 곤란을 받게 되고 끝내는 파산신고서를 쓰고 유태인의 거리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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