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링컨은 게티스버그의 남북전쟁 전사자 묘지 봉헌식에서 너무나 유명한 연설을 했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는 웅변이었다. 민주라는 말이 어디에서 유래하고 어떻게 행해져야 하고 그 누리는 자가 누구이어야 하는가를 명명백백하게 정의하고 규정하는 만고의 진리였다. 국민이 모든 민주 행위의 주체라는 점도 확연해진다. 미국 민주주의 확립의 기초가 되는 명연설이었다. 이는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서나 공용되는 교조적(敎條的) 규정이 되었다. 이는 조금도 변용될 수 없는 확고한 신앙 같은 것이었다. 이 시대 모든 위정자는 이 논법을 신념으로 삼지 않으면 스스로 도태되었다. 국민이 해야 하고, 국민을 위해야 하고, 모든 민주적인 행위는 국민의 것이어야 한다. 민주의 주체가 비록 중우(衆愚)라 할지라도 그들의 중의(衆意)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눈을 돌려 보자. 저 1800년대 링컨이 연설했던 근대를 한참이나 벗어난 21세기를 가는 즈음, 우리에 의한, 우리에 의한, 우리의 정책이 아닌 것들이 민주라는 허울을 쓰고 범람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예술과 예술인들에게 지원하고 후원하며 북돋우어야 할 임무를 띤 단체(기구)가 주체자들 의견은 아예 무시하고 주체자를 객체화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주인으로 섬김은 고사하고 임의 선택과 부림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어떤 재단의 경우 그들이 지원해야 할 대상을 자신들 편의에 따른 불공정한 셈법으로 재단하고 평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앞뒤 설명이 없다. 규정은 만들지도 않았고 대상을 친소에 따라 구분하고 선택했을 뿐이다. 대상들의 몰이해로 상식을 벗어나면 반복 노력하여 이해를 시켜야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조삼모사(朝三暮四)란 중국 고사성어가 있다. 어리석은 집단인 잔나비 떼에게, 주인이 말하기를 ‘아침에 도토리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마.’하니까 원성이 높아서,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마.’하니까 좋아했다는 이야기이다. 합한 숫자는 같이 일곱이지만 대상의 기분을 맞춰주었다는 슬기로운 술책인 셈이다. 이 재단은 그런 융통성도 없는가? 어미와 새끼에게 동일하게 분배해야 하는가? 일 많이 하는 자와 적게 하는 자도 구분하지 않는가? 개인과 집단 차이도 변별성이 없는가? 수은주 눈금 헤아리듯 자명하게 차별성을 수치화할 수도 있는 소위 적정한 로드맵은 왜 없는가? 심사위원 선정을 아무렇게나 해서 편애 편벽이 훤히 보이는 그런 우를 왜 해마다 범하는가? 설명회를 자주 개최하고 소통하며 민의를 따라 접근해 간다면 다 될 수 있는 문제를 왜 기피하는가? 직무 유기인가 아니면 스스로 무능인가? 포월(包越)이란 말이 있다. 포월 리더십이라 하여 감싸서 넘어가는 리더십을 말한다. 내 가족처럼 감싸고 함께 극복해야 할 당위적 자세가 심히 아쉽다. 도토리 ‘네 개와 세 개의 법칙’을 준용하시라.
예술과 예술인이 설 땅이 매우 좁아졌다. 사립 대학들은 예술 분야 학과는 통폐합하거나 아예 문을 닫고 동네 각종 예술 학원도 문을 닫아 걸었다. 예술인을 배출하는 교육이 폐쇄되고 있다. 예총은 능멸되고, 각론이 총론 위에서 위상을 드높인다. 도의 예술 문화 정책은 우선순위를 잘 못 매긴다. 예술회관은 없는데 작은 예속 분야 예술관을 맘모스 건물이다. 예술이 죽은 사회를 상상해 보시라. 어느 나라나 그들 문명의 지수는 문화 예술의 흔적으로 셈하는 법이다. 우리는 야만의 시대로 가고 있다. 지금껏 예술문화의 결과로 호강 부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면 안 된다.
굶어 죽을망정 곡식 씨앗을 보듬고 죽어야 하듯이, 어려운 시대라 할지라도 예술의 씨앗마저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재호 한국예총 전북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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