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전주가 세 왕조를 탄생시킨 곳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솔깃했으나 곧 잊어 버렸다. 그러다 최근 몇 년간 역사에 관심을 갖고 답사를 다니다보니 잊어버린 기억이 되살아났다. 전주와 전북이 역사에 있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세 왕조는 견훤왕이 세운 후백제(당시 국호는 백제)와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을 일컫는다. 현재 진행형인 북한을 언급하는 것은 조심스럽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성공과 실패의 리더십을 배울 수 있다. 또 풍성한 역사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도 있다.
먼저 견훤왕부터 보자. 경북 문경출신인 견훤왕은 900년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했다. 전주는 936년까지 37년간 왕도(王都)였다. 견훤왕은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 승탑(국보)에서 보여주듯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당시 통일신라는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농민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이들 민초들과 더불어 나라를 바르게 열기 위해 둔전(屯田)과 관개시설 확충, 승려선발 과거제에 해당하는 선불장(選佛場)을 실시하는 등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또 오월, 후당, 거란, 왜 등과 다변화된 외교를 펼쳤다.
다음으로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해 500년을 잇도록 했다. 알다시피 전주는 그의 6대조 이전까지 대대로 살던 곳이다. 조선왕조의 탯자리인 셈이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유물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전주에는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을 비롯해 조경묘, 조경단, 오목대, 이목대 등이 몰려 있다. 또 왜구를 물리쳐 조선 건국의 발판이 되었던 남원 황산대첩, 새 왕조 개창의 천명을 받은 임실 성수산 상이암, 금척을 받은 진안 마이산, 고추장 설화가 어린 순창 만일사 등도 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북한 김일성은 1945년 해방이후 80년 가까이 3대째 북한을 지배하고 있다. 민주공화국의 시각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전주 모악산에는 그의 시조인 김태서 묘가 자리한다. 김태서는 고려 때인 1254년 경주 일대가 왜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자 일족을 이끌고 전주군에 정착해 전주김씨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 김일성은 그의 32대 후손이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를 어찌 볼지 모르겠으나 남북국시대로 부를 수도 있다.
어쨌든 한 지역이 왕도이고 왕조의 뿌리인 곳은 전주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후백제의 경우 그동안 철저히 외면하던 광주시가 자난 1일 ‘후백제 왕도 재조명’ 학술대회를 가졌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광주가 후백제의 첫수도(始都)라고 주장한 점이다. 고무적인 일이다. 광주뿐 아니라 견훤왕의 초기 활동지인 여수 순천 광양 나주 등도 함께 조명했으면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37년간 왕도였던 전주시는 이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어 답답하다.
또 지난 7일에는 ‘태조 이성계, 전북역사문화자산 어떻게 꽃피울 것인가’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전북에 널려있는 이성계 관련 유산을 활용하자는 취지이다. 진작 나섰어야 할 일이다. 여기서 유념할 게 있다. 조선왕조의 중심은 서울이라는 점이다. 비록 이성계의 관향(貫鄕)이 전주지만 거의 대부분의 유물유적이 서울에 집중돼 있다. 흔히 왕조의 성립을 애기할 때 왕도와 왕릉을 본다. 고대국가에선 왕찰까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후백제에 대한 관심을 한번 더 상기하고자 한다. 전북이 비록 산업발전에는 뒤졌으나 뛰어난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하면 수천억 원짜리 기업 유치보다 낫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