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기술복원 프로젝트' 나선 옹기장이 이현배 씨 "옛 사람들 '자작자족' 지혜, 우리 일상으로 들여놓고 파"
옹기를 만들기 시작한지 10년. 30대였던 그는 전통의 관점으로 현대를 해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일상에 옹기를 들여놓는 일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던 그는 옹기의 쓰임새를 확장한 다양한 식기를 만들어내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으며 그 덕분에 한식 상차림의 반상기 세트와 온갖 아름다운 식기, 일상 소품들이 옹기로 태어났다. 서울의 이름난 호텔 양식부에 들어가 일주일동안 실습하면서 양식과정과 그릇의 품새를 익히고 난 뒤 옹기 양식세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작업은 고단해보였으나 에너지가 넘쳐나는 그의 일상을 만나는 일은 특별했었다.옹기장이 이현배씨(52,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솥내마을)의 10여 년 전 삶의 풍경이 그랬다. 그가 4-5년 전부터 나주 문화재연구소와 별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대기술복원프로젝트.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의 상징인 옹관 제작 기술을 재현하는 작업이었다. 1995년 그의 첫 전시회 팸플릿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옹기는 세상에 태어날 때 태항아리, 밥을 담는 오모가리, 똥을 담는 합수독아지, 죽어서는 옹관까지 한반도 사람들의 나고 죽는, 그야말로 처음과 마지막을 담는 모든 것이다.그렇고 보니 옹기의 질서(?)를 철저하게 재현해내는 그의 작업이 어디까지 왔을지 궁금했다.사실 그가 만든 손내옹기는 전통옹기 대중화의 상징적 브랜드가 된지 오래다. 인사동 쌈지길의 전문 옹기가게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조형이 아니고도 모던한 조형미에 현대적 쓰임새를 결합시킨 옹기로 특별한 소비자층을 매료시킨 덕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몸을 낮추어 옛 것으로부터 배우는 지혜와 깨달음을 옹기 만드는 일로 풀어 나간다.옛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의 가치가 열망이 되어버린 시대. 옹기장이로 살아가며 전통의 미덕을 현재에 되살리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삼은 그를 만났다. 짧지 않은 세월, 적지 않은 고난과 맞닥뜨려야했지만 그의 의지는 더 단단해지고 결연해진 듯 보였다. 새로운 과제를 설정해놓은 덕분이었다.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손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일상에 자작자족(自作自足)의 가치를 복원해내는 일이예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는 소비를 통해 마치 자아완성이 될 것처럼 세팅되어 있잖아요. 이 질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작자족은 삶의 질을 높이는 통로가 될 수 있어요. 필요하다면 문화운동으로라도 확산해가고 싶습니다.그가 제안한 일은 낯설지만 새로운 일은 아니다. 되돌아보면 자작자족은 옛 사람들의 가치 있는 일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크고 작은 항아리며 새로운 조형의 옹기도 그렇지만, 옹관이 흥미롭습니다. 크기만으로도 만만치 않은데 제작 과정에 어려움은 없습니까.규모화의 특성이 있긴 하지만, 제작의 속성을 알면 만드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완성된 것을 옮길 때 복잡한 문제가 생기죠. 박물관 식구들이 와서 작업을 의뢰했을 때도 제작은 걱정 없다고 말했었어요. 실제로 무난히 만들었고요.-옹관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2008년에 국립 나주문화재연구소 의뢰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5년 동안 진행하는 작업이었는데 근간은 고대기술복원이었죠. 그러니까 옹관 제작 기술 복원인데, 재작년 1차 프로젝트를 끝내고 작년에 2차로 다시 5년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1차에서 얻은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군요.고대기술 복원인데, 실험고고학의 측면에서 진행하는 것이니 제작 과정의 다양한 실험에 의미가 있습니다.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의 상징인 옹관의 재현을 통해 역사성과 가치를 실험고고학 측면에서 시행하는 작업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고고학자들의 요구에 맞게 작업하는 것이죠. 흙이나 형태, 색깔까지 주어진 과제대로 맞추어 만들고 불을 땝니다. 그래서 결과물을 얻습니다.-옹관 가마가 따로 있던데 여기서 제작을 하나요.프로젝트 작업은 나주에 가서 진행합니다. 제 가마터에 있는 옹관 가마는 옹기장이로서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해보려고 만들었어요. 일을 하다 보니 고고학자가 궁금해 하는 과제와 제가 개인적으로 실험하고 싶은 내용이 달랐거든요. 가령 불을 땔 때의 효율성도 그렇고, 서로 파악하고자 하는 속성도 다르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실험을 다시 해보는 것이죠. 옹기의 조상이랄 수 있는 옹관은 모든 토기의 완성형이거든요.-옹관과 옹기 만드는 일은 별개의 작업 아닌가요.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축적과 생성이라는 말을 쓰는데 옹기를 보면 그 형식이 그대로 적용되죠. 옹관도 똑같습니다. 생성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요소를 찾아 적용시키면 되거든요.-근원을 따진다면 옹기보다 옹관이 먼저겠군요.그렇죠. 사실 옹기는 사회적으로 개념 규정이 명확치 않습니다. 안타깝지요. 도자사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고 실생활에서도 너무도 당연한 것 익숙한 것으로 놓여 있다가 생활환경과 형태가 변하면서 소멸된 그런 존재죠.-환경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식생활의 기반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너무 빠르게 일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 같습니다. 주류가 아닌 서민들의 일상에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꼭 그렇진 않습니다. 궁중에서도 옹기는 중요한 그릇이었죠. 옹기가 아니면 장류라든지 중요한 먹거리를 어디 담아두었겠습니까. 생활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옹기는 너무 흔하고 익숙한 생활용품이었죠. 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생활에서 당연하고 너무 익숙한 것이다 보니 소중한 줄 몰랐던 것이죠. 옹기는 우리 먹거리 문화에 있어서는 생존요소였습니다.-어쨌든 생활의 틀이 바뀌면서 옹기는 빠른 시간에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다가 단절된 시간이 길어지니 아무리 현대 생활에 맞게 개발을 한다 해도 일상의 복귀가 어려운 것 아닌가 싶습니다.옹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현대적 품새로 자격이 있습니다. 조형의 아름다움으로도 그렇고요. 요즘 말하는 경제적 가치로 이야기하더라도 부가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죠.-다양한 쓰임새와 조형을 개발해내는데 그 바탕의 비중은 어디에 놓습니까.제가 하는 일은 옹기에 없던 것을 새롭게 부여하는 일이 아닙니다. 일을 시작했던 초기에 지인이 옹기를 예술로 풀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생활용품으로서 쓰이는 옹기만 만들어서는 생활하기에도 빠듯하다는 것을 잘알았지만 그렇다고 예술로 옹기를 풀어내는 것은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의 본질이 아니었어요. 옹기가 지닌 아주 부분적인 특성을 적용해내는 작업에 마음을 주면 나중에는 얕잡힐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생존하기 위한 길이 아니다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더디더라도 본질을 찾아 가겠다고 마음먹었죠.-옹기의 본질과 가치를 담아낸 작업을 바탕에 두면서도 현대적 그릇을 고민해오셨는데 그 노력만큼 현대생활에 옹기의 쓰임이 가닿지 않는 아쉬움은 없습니까.옹기는 일제시대를 거쳐 오면서 잘못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옹기의 가치가 폄훼된 것도 그렇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자기란 말도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것이거든요. 우리는 도기 자기를 따로 썼죠. 도기는 옹기, 자기는 사기였는데, 도기보다는 사기라는 말을 더 많이 썼잖아요. 일본은 도자산업으로 문명을 일으켰으니 도자사를 강조하지만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열등감이 있었지 않습니까. 게다가 옹기는 그들로서는 용도가 없는 그릇이니 자연히 도태시켰고, 미술사적으로도 도자기와 옹기를 별개로 삼았죠. 더구나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옹기는 양은그릇이나 플라스틱과 경쟁해야 했어요. 살아남으려니 천박해질 수밖에 없었죠. 값으로도 그렇고.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플라스틱 초기 형태를 보면 모두 옹기 조형입니다. 옹기가 축적해낸 크기와 조형을 그대로 카피 했죠.-그렇게 소멸되었던 옹기의 가치가 요즈음 새롭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역시 한민족의 전통적인 먹거리 근원인 발효의 가치와 맞물려서겠지요.그렇죠. 옹기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발효와의 조합입니다. 우리 먹거리의 힘은 발효에 있고요. 그러니 옹기는 한민족의 일상에서 꼭 복원되어야하는 물건이예요.-외국에서 전시 의뢰를 받지만 대부분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고 옹기는 본질적 가치와 그 쓰임새로 더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외국의 나라들은 대부분 우리의 발효문화와는 거리가 멀잖아요. 그러니 그 본질이 아니라 옹기가 도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손내옹기가 유네스코 우수 수공예품으로도 인증 받았죠.달항아리와 전골 솥이 인증을 받았어요. 전골솥은 제가 조형을 만들어낸 것인데 나중에 한창기선생님 박물관 전시회 때보니 골동품 초기 토기에 조형이 똑같은 것이 있더라고요. 전율을 느낄 정도로 놀랐습니다. 제 몸속에 그런 유전자가 있었나봐요.(웃음)-근래 들어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옹기의 일상화는 어떻습니까.큰 변화는 아직 없지만 서서히 달라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털어놓자면 옹기를 사용해보신 분들의 주문이 이어지지만 제작시간의 한계로 항상 일이 밀려있습니다. 전통 옹기의 한계이기도 하죠.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제가 파는 일에 아쉬워 조급해했다면 전통방식의 미덕을 지켜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소비자가 아쉬워해주었으니 그래도 이만큼 지켜올 수 있었을 거예요.-손내옹기는 우수성을 인정받지만 가격 면에서는 경쟁력이 없죠. 그 원인이 전통가마 방식의 한계에 있겠지만 다른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가격이 낮게 나오는 옹기들은 최신식 터널 가마로 대량 생산하는 물건들입니다. 흙으로 빚어 굽고 완성품을 얻는데 3일이면 나오죠.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대로 구워내려면 순환구조상 두 달이 걸립니다. 가마에 불을 때려면 그 안의 공간을 구성할 요소들이 잘 채워져야 해요. 그래야 구조력을 가질 수 있거든요. 저도 내열 옹기는 현대식 가마를 씁니다. 내열용은 장작 가마로 해결되지 않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옹기를 불에 직접 닿게 할 때 진흙을 붙여서 사용했어요. 현대생활에서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니 아예 직화할 수 있는 내열성을 갖추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대식 가마를 사용하는 겁니다.-디자이너와의 협업은 어떻습니까.이전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2009년부터 문화재단 예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현대적 식기를 개발하는 일입니다. 그동안에도 시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식 양식 겸용 식기를 만들어냈어요. 옹기는 흙에 철분이 많아 쇳소리가 납니다. 결도 나이프를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도기와 자기가 나뉘는 시점의 초기 청자를 콘셉트로 제작했는데 반응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요즈음은 주거문화가 아파트 위주로 변해서 큰 항아리 종류는 쓰임이 적어졌겠죠.한동안 아예 쓰임이 없었는데 식생활에 대한 변화가 시작되면서 큰 독도 적지 않게 찾습니다. 사실 장독은 옹기의 기본이에요. 옛날 옹기장이들은 장독을 만들지 않으면 아예 옹기장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옹기장이의 중심일은 장독이거든요. 가마나 기법이 모두 그 중심이고 나머지는 다 파생된 물건이죠.-옹기의 좋은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일상에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특히 편리함이 우선인 현대인들에게는 옹기는 여전히 낯선 영역인데요.그래도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편리함과 속도가 우선인 시대지만 그래서 잃었던 삶의 가치들이 다시 부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옹기는 그 가치를 제대로 담고 있는 물건입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우리 몸의 근원을 다시 찾게 해주거든요.-옹기 일을 10년만 하시겠다는 계획이 20년이 되고 다시 10년을 향하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인가요.(웃음)개인적으로 꼭 이루어가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자작자족. 자기가 만들어서 자기가 쓰는 일을 확산시키자는 것인데요. 다시 말하자면 수공예의 대중화입니다. 저는 인생의 스승을 잘 만나 문화의식과 철학을 먼저 배우고 기능을 나중에 갖추었어요. 좀 더디게 일을 배우고 깨우쳤지만 오히려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소비사회를 살고 있지만 소비가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주진 않거든요. 옛 사람들의 자작자족 지혜를 우리 일상에 들여놓으면 제대로 된 삶의 질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공예적 가치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삶의 의미나 가치가 달라지거든요.그의 이야기는 때로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때로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래서 남감할 때가 적지 않은데, 이상한 것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가 가진 이상과 현실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작자족도 그 중의 하나인데, 그는 창조성 창의성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서야말로 생각하는 손을 갖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공예의 가치를 일상에 되돌려 놓는 일은 더디지만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의 새로운 목표가 주목되는 이유다.● 이현배씨는 농촌 삶 관심호텔조리사 접고 '옹기장이' 변신이현배씨는 장수군 장계가 고향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어린 시절은 생각 없이 보냈고, 고등학교 때부터야 생각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깊었던지 늘 가슴이 답답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싫어 분노와 화로 많은 날들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출해 서울로 갔다. 우연히 인문학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발행인 한창기 선생의 칼럼을 읽고 모순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집으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대학 입시에 낙방해 다시 서울로 가 재수를 했지만 계획대로 삶이 풀어지진 않았다. 농촌의 삶에 관심이 많아 농대에 관심을 가졌지만 먹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공부했다. 대학 1학년 때 휴학하고 고물상으로 1년을 살았다. 그때 다시 뿌리 깊은 나무와 브리태니커에서 나온 한국의 발견을 만나 문화에 눈을 떴다. 제주도로 가고 싶었으나 대학은 졸업해야 한다는 큰누나의 강권에 복학했다. 힐튼호텔 실습 시절, 예술적으로 음식을 만들 줄 아는 그의 감각을 눈여겨본 상사의 추천으로 큰 힘들이지 않고 힐튼에 취업했다. 그즈음 한국화를 전공한 아내를 만났다. 호텔에서 6년 근무하면서 신뢰를 쌓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고민과 갈등이 깊어져 떠난 여행길, 전남 벌교에서 징광옹기를 만났다. 그곳에서 인생의 멘토인 한창기 한상훈 선생과 옹기스승인 박나섭 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옹기일은 징광에서 3년, 문경에서 반년 배웠다. 징광에 터를 잡으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물에 의미를 두고 살아온 그는 물이 있는 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진안 백운면 솥내옹기터에 자리 잡은 것도 섬진강 발원지가 가깝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포가마가 그대로 남아 있던 옹기가마터의 불구멍을 틔운 젊은 옹기장이는 20여 년 동안 이곳을 지켜왔다.쉽게 가는 길보다 더디지만 옹기의 본질을 찾는 길을 지켜온 덕분에 손내옹기는 전통 방식과 현대적 조형, 본질적 쓰임새를 갖춘 물건으로 이름을 알렸다. 옹기 일을 하면서 마을이 해체된 현실에 마음을 두기 시작, 마을문화 복원과 지역 활성화를 고민했다. 백운면의 공공미술과 문화를 매개로 지역 활성화를 이어내는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옹기를 제대로 하려면 마을을 제대로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는 마을을 재구성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14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주목받는 기획전에 초대되었고, 전통공예기술 보존및 개발을 위한 전통문화(옹기) 전문인력양성 영산강유역 대형전용옹관 고대기술복원 숭례문복구용 기와가마 자문및 조성 옹기식기개발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쓴 책으로는 흙으로 빚는 자유가 있다. 농사꾼이 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면서 농촌과 농업이 지닌 숨은 가치를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