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용의 기행에세이] ⑤진메마을~장구목
▲ 물길을 따라 걷는다는 것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일이 '인간의 이전'에 존재했을 시원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라면, 물길 따라 걷는 것은 인간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틀림없이 지구의 '큰 호흡'이 먼저 있었고, 그렇게 맺힌 숨결에 의해 물길이 먼저 열렸을 것이다. 그리고. 물길에 의해 나뉘어진 산(난 때때로 이걸 '섬'이라 우기고 싶다. '초록별' 지구를 형성하는 것은 모두 물에서 왔다. 육대주라는 것이 모두 큰 섬의 형상 아닌가, 또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 중 '수생' 아닌 것이 또 어디 있는가. 소설가 박상륭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모두 들끓는 '물주머니'들이다.)에는 저절로 산길이, 물속에 진화를 거듭한 미생물들이 기어올라 초목이 된 뒤에는 숲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들짐승과 인간들에 의해 원시적인 들길이 발생하고, 이 들길은 마침내 마을의 골목길로 이어지지만 신작로나 고속도로, 철도 등에 의해 깔아 뭉개지거나 대체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미샘에서 내려와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은 '길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길이기도 하다.물길→산길(숲길)→들길→마을길…물길이 지구 탄생의 비밀을 안고 흐른다면, 산(숲)길에는 지구 성장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고, 들길과 마을길에는 인간들의 역사가 배어 있다. 그 길을 따라, 드문드문 꽃 핀 자리, 도란도란 사람의 마을이 들어선다. 거기서 사람들이 또 피고 진다.▲ 섬진강이 가는 길데미샘에서 발원(發源)한 섬진강은 진안 성수 쪽을 거쳐, 옥정호에서 한숨 쉬다가 갈담으로 휘어들어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선생이 사는 진메마을에서 순창 장구목으로 흐르고 압록부터 도도해져, 구례에서 하동~광양으로 기운차게 흘러간다. 섬진강의 물길을 인간들이 획정한 경계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섬진강엔 오직 물길과 물길 따라 흘러가는 초목과 인간의 물그림자가 엄연할 따름이다.이와 같이 강이 흘러 만나는 자리를 우리는 유역(流域)이라고 부른다. 물길 닿는 그 모든 언저리… 유역.집합적이고 중층적인 이 단어가 가 닿는 끝자리에는 물길과 함께 흐른 산하, 세월, 사람살이가 모두 모여 몸을 적시고 있다. 흔히, 우리가 인류 4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이 물길 따라 일어섰다. 섬진강도 그러하리라, 한강도 금강도 낙동강도… 제 눈물로 제 상처를 닦고, 제 젖줄로 제 생명을 기르며, 손길이 미치는 모든 것들을 생명의 힘, 순환과 자정의 놀라운 힘으로 어루만졌다. 같은 맥락에서, 난 물길만 보면 '사해동포(四海同胞)'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에 새삼 공명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물, 같은 배에서 나와 한 포도송이에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알 같은 존재들이라니… 얼마나 흔감한가.▲ 진메마을, 시인 김용택의 풍경사물은 각각 제 자신의 영혼을 갖고 있고, 사람은 그 영혼에 감응하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단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주로 걸을 때 그렇다. 내 발바닥을 받쳐주는 흙과 돌멩이들 그리고 내가 눈을 뜨면 함께 눈 뜨고 내 눈을 응시해주는 세상의 풍경들… 갈담을 지난 후로부터 '옥정호'의 병목을 통과한 섬진강은 제 유속과 유량을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한다. 섬진강이 간신히 제 본연의 물빛깔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지점이 진메마을부터 귀미리 구간이다, 한 나절, 걸어서 통과하기 적당한 15킬로미터 남짓… 요즘 유행한다는 도보여행 구간으로 생각해봐도 좋을 곳이다.섬진강은 구간마다 요천이나 적성강, 압록강, 보성강 등, 그 지역의 인문지리가 배양한 또다른 이름을 갖게 되는데, 이 구간만큼은 다른 이름을 상상할 수 없다. 김용택 시인 때문이다. 물론, '섬진강'이란 고유 명칭을 한 시인이 독식(?)할 수는 없다. 섬진강은 우리들의 앞 대에서도 흘렀고 후대로도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아니,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이 강은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학창 시절의 기억을 들어 이야기한다면, 섬진강은 이제 '국토지리'에 속한 강이라기보다 '인문지리'에서 논급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사랑은 사랑을 부른다. 유난히 김용택 시인을 사랑한 섬진강은 김용택 시인으로 하여금 강가의 돌멩이 하나 허투루 보아 넘기지 않게 만들었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시인의 맑은 눈에 의해 섬진강은 더 깊고 맑아졌다, 온전해진 것이다. 인간의 시간이 열린 이후, 세상의 모든 풍광은 인간의 눈을 통과해 인식되게 되었다. 섬진강이 여울지는 소리에서 역사의 목소리를 듣고, 물결에 흘러가는 나무 그림자에서 그리움을 읽고, 바위와 물이 함께 한 자리에서 사랑을 흔적을 찾는 시인을 만나 섬진강은 훨씬 더 풍요로운 텍스트가 되었다.진메마을 지나, 김용택 시인이 한동안 근무했던 옛 천담분교 자리에 들어선 섬진강수련원 건너, '아름다운 시절'이란 영화가 촬영되었다는 표지판을 휘돌아 접어드는 길… 물길은 여전하나,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은 강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닿을 듯 말 듯한 안타까움이 가벼운 조바심을 부른다. 빨리 만나고 싶은 것, 멀어지면 못 견디는 것, 어쩌겠는가, 아무리 무더워도 이런 때는 뛰는 거다, 뛰어드는 거다!▲ 장구목에서 귀미리로장구목 구간 섬진강은 바위와 물이 만나 빚은 절경들이 곳곳에서 제 아름다움을 뽐내는 곳이다. 물놀이 장소로 찾는 사람도 꽤 많다. 햇빛과 물결과 바위와 사람… 우주와 지구와 사람이 만나 빚는 풍경은 언제 어떻게 보아도 아름답다.난 사진을 찍을 때 어지간하면 사람을 넣지 않는다, 하여, 도대체 사진에 힘이나 스토리가 없고 밋밋하다는 평을 듣곤 한다. 귀가 얇은 편이라, 그때마다 다음에는 꼭 사람을 넣어야지, 하는데도 돌아와 현상해보면 그림자조차 빗감하지 않는다. 난 그 이유에 대해 내 카메라 속에 어떤 사람의 생애가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탓이라고 변명해본 적이 있다. 사람의 생애는 늘 변화하고 소멸한다. 그걸 내가 잡을 수 있는지, 아니 그럴 엄두를 내도 되는 것인지 생각하면 두려운 소이… 이청준의 소설 <시간의 문>은 이러한 사진가의 고뇌를 담은 작품이었다… 이제, 그 선생도 '시간의 문'을 넘어 먼 우주 스러지는 한 점 빛이 되어 쓸려갔다고 생각하니, 쓸쓸하다.장구목에서 남원 양씨 세거지로 알려진 귀미리까지의 구간은 강물에 씻긴 너덜바위들이 특히 장관이다. 다녀 본 분들은 알겠지만, 순창은 키 낮은 산들도 그 산세가 모두 준열한 편이다. 하니, 같은 뼈에서 나온 바위들도 마찬가지, 단단한 기상이 예사롭지 않다.저 바위들 중에는 지구 탄생의 그 순간부터 저 자리에 있었던 것도 있고, 그 뒤 어느 시기 어떤 외력(外力)에 의해 물에 잠긴 것도 있을 것이다. 누가 저 바위를 저기 있게 하였는가, 물살 속에서도 의연한 저 바위들의 길고 긴 생애를 생각하면 문득 숙연해진다.이럴 때면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도 생각난다. 개구리의 생애도 가슴 저리지만, 무심코 손을 대 그 운명이 바뀐 돌멩이를 생각하면,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다. 애니미즘이나 개유불성(皆有佛性)까지는 아니어도 우리에게 저 바위나 자갈들의 생애를 바꿔놓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언제부턴가 난 물수제비조차 뜨지 않는다.아이들과 함께 여기 와 강가에 널린 잔돌들과 더 큰 바위들의 생애를 하나 하나 더듬어 추리해보라. 언제 어디서 태어나 여기 와 이렇게 뒹굴게 되었는지… 나는 또 왜 여기 와 그 돌등에 손을 얹는 것인지… 찌릿! 손이 저린 순간이 올 것이다, 나와 우주가 방금 교신한 것이다. /김병용(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