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⑥후백제의 군사력과 고려와의 전쟁
△후백제 군대가 강성한 이유 진훤 왕은 지금의 순천만 일원에서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거병했다. 필자가 1998년에 출간한 <진훤이라 불러다오>에서 언급하였다. 그는 “장성하면서 체격과 용모가 뛰어나게 기이했고, 뜻과 기상이 빼어나서 평범하지 않았다”고 한 특출난 자질의 소유자였다. 진훤 왕은 “서남해로 부임하여 수자리를 지켰는데,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 용기가 항상 사졸의 으뜸이 되도록 일하였기에 비장이 되었다”고 했다. 비장은 조선 후기 희극소설 <배비장전>에 등장하는 아전 류와는 다르다. 진훤 왕은 북원경(강원도 원주)을 거점으로 예하에 국원경(충주)과 서원경(청주)까지 장악한 대호족 양길에게 비장 직을 수여했다. 비장은 고위직임을 알 수 있다. 거병 당시 진훤 왕은 해적 소탕을 통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규군을 거느렸다. 그는 한 달만에 5000에 달하는 병력을 결집시켰다. 이들이 후백제 군단의 주축이 되었다. 진훤 왕이 파죽지세로 서남부 지역을 장악한 데는 잘 훈련된 관군 장악과 무관하지 않았다. 게다가 인구와 물산이 풍부한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후백제 강성 요인이었다. △후백제와 고려의 격돌 조물성 전투 후백제와 고려는 918년~924년까지 전쟁이 없었다. 궁예를 축출하고 집권한 왕건은 시급한 내정 문제에 급급했다. 그렇기에 화호(和好)를 요청하며 궁예 때와는 달리 전쟁이 없는 시대를 열었다. 왕건은 웅진(공주)과 운주(홍성) 등 10여 주현(州縣)을 후백제에 넘겨 주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는 외적 상황이 안정되어야 했었다. 이후 양국은 격돌이 없었다. 대신 진훤 왕은 신라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924년 7월 진훤 왕은 왕자 수미강을 시켜 조물성(경북 의성 금성산성)을 공격하였다. 구원 요청을 받은 왕건은 장군 애선을 보냈지만 후백제군에 살해되었다. 이듬해 925년 10월 진훤 왕이 3천 기병으로 내려오자 왕건 역시 정예 병력을 이끌고 몸소 내려와서 대적했다. 국왕으로서 두 사람 간의 첫 대결이었다. 이때의 전황을 “그때 진훤의 군사가 매우 날래서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는 임시로 강화를 해 그 군사를 지치게 하려고 편지를 보내 강화를 빌었다(<삼국사기>진훤전)”고 했다. 이와는 달리 “유검필이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합치자 진훤이 겁을 먹고 강화를 빌었다(<고려사>태조 8년 10월)”고 하였다. 강화를 요청한 주체를 서로 다르게 기록했고, 인질을 교환하고 전쟁을 마무리했다. 이로 보면 무승부처럼 비치지만 실마리가 잡힌다.<고려사>박수경전에는 고려의 상군과 중군은 패했고, 하군만 승리했다고 한다. 왕건이 속한 중군을 포함해 고려군 3분의 2가 패하였다. 왕건은 이때 진훤 왕을 존칭인 상보(尙父)로 일컬었다. 열세인 왕건이 자신의 장기인 립서비스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다. 강화를 요청한 주체가 왕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건의 패배였고, 이후 양국은 격렬하게 격돌하였다. △공산 전투 927년 가을 진훤 왕은 신라 경애왕이 왕건과 내통해 사직을 넘기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경주를 급습했다. 진훤 왕이 왕건에게 보낸 격서(檄書)에서도 신라의 종묘사직이 고려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주에 왔음을 밝혔다. 경애왕의 비극을 듣고 왕건은 5천 기병을 이끌고 내려왔다. 그는 후백제군의 귀환로인 공산(대구 팔공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군은 오히려 후백제군에게 역포위되고 말았다.<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한결 같이 “심급(甚急)”이라고 했다. 왕건은 몹시 위급한 상황에 놓였고,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몸으로써 막다가 모두 전몰하였다. 공산 전투와 관련해 생겨난 지명인 ‘파군치(破軍峙)’는 동화사와 파계사(把溪寺)로 갈라지는 길목의 재 이름이다. 후백제군이 고려군을 격파한데서 연유했다. 그리고 양군이 격전을 치를 때 화살이 쌓여 강을 이루었다는 ‘살내[箭灘]’가 있다. 그리고 왕건이 밤에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때 한밤 중에 새벽달이 떠 있기에 ‘반야월(半夜月)’로 불렀다고 한다. 도망치던 왕건이 얼굴이 밝아졌다는 ‘해안’, 왕건이 도망치다가 안심했다고 하는 ‘안심’ 등의 지명이 보인다. 그 밖에 대구광역시 앞산 공원 일대 여러 사찰에는 왕건이 숨었거나 쉬어갔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이때의 전장은 대구 팔공산 뿐 아니라 영천 및 칠곡과 성주 일원까지 미쳤다. 공산 대첩 이후 진훤 왕의 정치적 위상은 한껏 고양되었다. 그가 왕건에게 보낸 격서에서 “··· 강하고 약함이 이와 같으니 승패는 알만함이니, 기약하는 바는 평양 문루에 활을 걸어두고 패강(대동강)에 말의 목을 축이는 데 있도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훤 왕의 위세는 “전주왕 진훤이 수십주(數十州)를 쳐서 병합하고 대왕을 칭했다”고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공산 대첩 이후 나주를 비롯한 숱한 세력들이 고려에서 이탈해 후백제에 붙었다. 공산 대첩은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았다는 진훤 왕의 넷째 아들 금강 왕자의 작품으로 보인다. △강주 점령 진훤 왕은 지금의 경남 진주에 치소를 둔 강주를 점령하려고 군사력을 쏟았다. 일진일퇴가 거듭되었다. 928년 1월 강주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고려군이 패하였다. 후백제군이 강주를 포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진훤 왕은 그해 5월 강주에서 지금의 경남 고성으로 양곡을 옮기려 떠난 틈을 타서 기습했다. 고려군은 급히 회군했지만 패했고, 강주장군 유문은 항복하였다. 이후 진훤 왕의 둘째 아들 양검 왕자가 강주도독이 되었다. 진주 촉석루 의암 부근에서 출토된 오월국 연호 ‘보정寶正’(926~931) 명문 기와는 후백제 통치의 산물이었다. △영남 북부 지역에서의 전투 928년 10월 진훤 왕은 부곡성(군위)을 함락했다. 그리고 진훤 왕은 11월 고려의 오어곡성(예천군 하리면)을 함락시켜 1천 명을 전사시키고 고려 장수 6명의 항복을 받았다. 이때 왕건은 전군을 집결시켜 6인의 처자를 군사들 앞에서 조리돌리고 기시(棄市)했을 정도로 격분했다. 이어 진훤 왕은 5천의 중무장한 정예 병력을 이끌고 의성부(경북 의성)를 공격해 성주 홍술을 전사시켰다. 비보를 접한 왕건은 “내가 양쪽 손을 잃었다”고 말하면서 통곡했다. 왕건의 충격이 컸음을 뜻한다. 진훤 왕은 여세를 몰아 안동과 예천의 중간에 소재한 순주(안동시 풍산면)를 공격하였다. 장군 원봉은 성을 버리고, 그것도 야반도주했다. 진훤 왕은 순주의 주민들을 붙잡아 전주로 이주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분노하여 후백제 영토가 된 순주의 이름을 하지현(下枝縣)으로 격하시켰다. 왕건의 심기가 무척 불편했음을 뜻한다. 929년 12월 진훤 왕은, 고창군(안동)에서 고려군 3천 명을 포위했다. 그러자 왕건이 직접 구하러 왔다.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8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섰다. 이후 안동과 청송을 비롯한 30여 군현과 동해변 110여 성이 고려에 항복했다. 신라 지역 호족들이 고려로 대거 넘어갔다. △새로 찾아낸 쾌거, 발성(勃城) 전투 932년 9월 후백제군 선단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접한 예성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후백제 수군은 3일간 예성강에 머물면서 염주(황해도 연안)와 배주(황해도 배천)·정주(개성 풍덕), 이 세 고을의 선박 100척을 불사르고 저산도(황해도 연안)의 목마 300필을 빼앗아 개선했다. 후백제군의 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10월 진훤 왕은 해군 장수 상애를 시켜 대우도(평북 용천)를 공격했다. 후백제 수군은 압록강 하구까지 강타하였다. 고려군은 패하여 쫒겨갔다. 후백제군은 왕건이 출동시킨 사촌 동생 만세의 군대마저 밀어냈다. 후백제군은 고려의 해군력을 궤멸시키다시피 했다. 근심했다고 할 정도로 왕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진훤 왕은 통쾌하게 보복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발성의 싸움에서 태조가 포위당하자, 박수경이 온힘을 다해 싸운 덕에 힘입어 (빠져) 나올 수 있었다(<고려사>박수경전)”는 전역(戰役)을 주시해 본다. 고려 왕궁을 이루는 성벽 발어참성의 '어참(禦塹)'은 '방어하기 위한 참호' 즉 해자가 있는 성을 뜻한다. 발어참성은 곧 '발성'을 가리킨다. 그러한 고려 수도에서는 한 시대를 진동시킨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932년 9월 예성강을 거슬러 온 후백제 선단이 개성에 상륙해 고려 왕궁을 덮쳤다. 왕건 생애에 다시금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는 부하 장수의 분전에 힘입어 겨우 탈출하였다. 그랬기에 귄위를 실추시킬 수 있는 발성 패전은 공식 편년 기록에서는 지웠다. 부하의 충성심 현양과 관련한 자료를 통해 우연히 드러난 것이다. 박수경의 딸이 왕건의 제28비(妃)가 되었다. 발성 위기에 대한 보은이었다. 후백제군은 고려 심장부를 강타해 왕건을 전율하게 했다. 이때의 전장은 개성 만월대 일원뿐 아니라 예성강유역 풍덕, 황해도 연안과 저산도 및 배천까지 포괄했다. △마지막까지 웅강한 국가 후백제 후백제는 933년 제2차 경주 진공 작전을 펼쳐 신라를 다시금 공포에 몰아넣었다. 934년 9월 진훤 왕은, 중무장한 병력 5천을 이끌고 운주(홍성)에서 왕건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여파로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후백제 성들이 고려에 항복했다. 후백제와 고려의 마지막 전투는 936년 9월 일리천(선산‧구미)에서였다. 이 전투에서 진훤 왕은 고려군 진영에 있었다. 그랬기에 대통합이 이루어졌다. 후삼국 역사의 시작과 끝은 진훤 왕이었다. 후백제 왕국은 시종 웅강함을 잃지 않았다. 진훤 왕의 사위 박영규 장군이 자신의 아내에게 “대왕께서 근로한 지 40여 년에 공업(功業)이 거의 이루어지려 했는데 하루 아침에 집안의 화(禍)로 나라를 잃고 고려에 가서 의탁하였소”라고 했다. 멸망 시점까지도 여전히 후백제는 강성했었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음을 뜻한다. 현전하는 후백제 관련 기록의 왜곡을 반증한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백제와 후백제 군사력의 바탕, 최강 국력 군사력은 자고로 인구와 경제력, 그리고 군사들의 사기와 숙련도로 판정난다. 이와 관련해 후백제는 사비성 도읍기 백제 영역이나 주민 상황과 겹친다. 동일한 시기 백제 인구는 고구려 말기 인구 69만 7천 호를 상회하는 76만 호였다. 게다가 경제력은 백제가 고구려를 훨씬 웃돌고 있었다. 조선시대인들의 백제 국력에 대한 평가와도 다르지 않았다. 예조참판에도 올랐던 이승소(李承召)는 1478년에 “옛적에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강한(强悍)하였고, 전투를 좋아했다(<三灘集>)”고 했다. ‘강한’은 용맹하고 사납다는 뜻이다. 1623년(인조 1) 인조는 정경세(鄭經世)와의 경연(經筵)에서 “삼한시절에 백제가 가장 강했다(<經筵日記>)”고 단언하였다. 저명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도 “삼한 가운데 백제가 가장 강하였다(<與猶堂全書>)”고 했다. 삼한 즉 삼국 가운데 고구려를 제끼고 백제가 ‘가장 강했다(最强)’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삼국 중에 가장 군사력이 강대한 나라가 백제였다. 백제의 유산을 물려받은 후백제 진훤 왕은 말년에 자신의 군사가 북군 곧 고려 군대보다 갑절이나 더 많았다고 회고했다. 이조참판을 역임한 유계(俞棨. 1607~1664)도 “삼한을 침탈하기 40여 년 동안, 그 재력의 부유함과 갑병(甲兵)의 막강함은 족히 신라와 고려보다 뛰어나서 먼저 드날렸다”고 평가했다. <오하기문>에서도 “호남 한 도(道)는 우리나라의 남쪽 울타리로 자연 경관도 빼어나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생산물 또한 풍부하다. 국가는 이용후생에 필요한 전체 재원의 절반을 호남에 의존하고 있다. 호남 지역에는 재주가 있고 민첩하며 여러 가지 일에 능숙한 인물이 많아 옛날부터 지략과 지모를 갖춘 걸출한 선비가 종종 배출되었다. 그래서 백제가 그들을 기용해 신라‧고구려와 병립하는 구도를 만들어냈고, 진훤도 그들을 발탁하여 왕건에게 지지 않고 맞설 수 있었다”고 설파했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