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백제] (79) 4장 풍운의 3국(三國) 17
그날 저녁, 황야에 수십개의 진막이 세워졌고 그 중앙에 위치한 대형 진막 안에서 10여명이 둘러앉아 저녘을 먹는다. 오늘 낮에 사냥한 노루와 멧돼지, 꿩과 토끼가 놓여졌고 그것을 안주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좌우에는 세 아들이 앉았는데 남생(南生), 남건(南建), 남산(南産)이다. 그 옆에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앉았고 심복 축조 셋에다 손님으로 계백과 화청, 유만이다. 술잔을 든 연개소문이 세 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힘을 합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면 대륙의 패자(覇者)가 되겠지만 갈라지면 망한다. 알겠느냐?”
“예, 아버님.”
세 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남생(南生)이 장남이며 남건이 둘째, 남산이 셋째다. 세명 모두 체격이 큰 20대이며 모두 용맹한 무장(武將)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당은 신라를 부추켜 백제와 고구려의 대륙 진출을 방해해왔지만 이제야말로 기회가 왔다. 백제가 대야주를 공취함으로써 신라가 뒤를 칠 염려가 없을 때 우리는 대륙을 정벌한다.”
진막 안이 숙연해졌다. 광개토대왕, 장수왕에 이어서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집권 하에 기회를 잡은 것이다. 백제 또한 동성왕 시대에 대륙에 기반을 닦은 이후로 다시 기회를 맞게 되었다. 술좌석이 끝났을 때는 자시(12시) 무렵이다.
“계백, 그대는 잠깐 남으라.”
모두 일어나 인사를 하고 진막을 나갈적에 연개소문이 계백에게 말했다. 잠시후에 진막 안에는 연개소문과 계백 둘이 남았다. 진막 기둥에 걸어놓은 기름등이 흔들리면서 연개소문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때 연개소문이 입을 열었다.
“영웅 항우도 적토마와 함께 죽었고 한고조 유방 또한 죽어서 이미 흙이 되었네.”
숨을 들이켠 계백을 향해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황제도 언젠가는 말씻는 종과 똑같이 죽는다는 말이네.”
계백은 시선만 주었고 연개소문의 말이 이어졌다.
“인간 수명처럼 권력도 끝이 있어, 무슨 말인지 아는가?”
“알겠습니다, 전하.”
“끝없는 욕심이 제 명을 재촉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법이지.”
“....”
“내가 건무를 죽여서 토막을 낸 것은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욕심이었어.”
어깨를 부풀린 연개소문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그러나 내 한계는 알아. 무리한 욕심은 부리지 않겠다는 말이네.”
연개소문이 눈동자의 초점을 잡고 계백을 보았다.
“내 아들 셋을 보았지?”
“예, 전하.”
“남생이 그대보다 세살 아래인 스물셋이고 남건이 스물하나, 남산이 스물이야.”
눈을 가늘게 뜬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세놈 다 용장(勇將)이지. 허나 멧돼지처럼 저돌적이고 욕심만 충천한 놈들이야. 일국(一國)을 다스리기는 커녕 1천명 군사나 지휘할 수 있는 놈들이지. 내가 그놈들 그릇을 알아.”
“....”
“내가 죽으면 세놈이 서로 싸울 거네, 나라가 어떻게 되건 권력을 가지려고 서로 죽이겠지.”
“....”
“측근, 또는 참모의 말 따위는 듣지도 않는 놈들이야. 내가 잘못 가르쳤어.”
“....”
“내가 죽기 전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시키고 싶다고 대왕께 전하게.”
계백이 숨만 들이켰을 때 연개소문의 말이 이어졌다.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백제를 세웠다가 다시 아버지의 나라 고구려를 품에 안게 되는 것 아닌가? 난 내 아들놈들한테 고구려를, 이 대망(大望)을 맡기고 싶지가 않네.”
이것이 연개소문의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