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④동아시아 해양국가 백제의 터전 전북 - '나루터 국가'백제, 바다 통해 중국-일본 잇는 허브였다
△해양국가 백제
백제(百濟)의 나라이름은 한자로 일백 백(百)에 건널 제(濟)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지’와 ‘삼국사기’등 사서에서는 백제의 나라이름이 정해지는 과정이 3단계의 변화를 보이며 나타나고 있다. 먼저 중국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맏형 백(伯)자를 쓰는 백제(伯濟)가 마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시조인 온조가 처음에 한강 남쪽에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나라를 세웠다(十臣補翼) 하여 이름을 십제(十濟)로 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미추홀로 갔던 형 비류가 죽자 그를 따랐던 세력이 동생 온조와 합쳐지면서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하여(백성락종百姓樂從) 백제(百濟)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이들 사료를 정리해 보면 백제라는 나라이름이 만들어지기 까지 백제(伯濟)-십제(十濟)-백제(百濟)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 명칭들의 변화를 보면 이름의 앞 글자만 으뜸 백(伯)- 열십(十)-일백 백(百)으로 바뀌고 뒷부분의 제(濟) 글자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변하지 않은 글자, 즉, 제(濟)는 건너다라는 동사적 의미와 함께 명사로 ‘나루터’ , ‘포구’라는 의미가 있다. 결국 백제라는 나라이름은 으뜸나루터 국가-열 개 나루터 국가-백 개 나루터 국가로 발전한 것이다. 백제가 한강, 예성강, 임진강 및 경기, 충청, 전라지역 서해안 포구세력들을 중심으로 성장해 동아시아 해양 중심국가로 성장한 사실이 국호에 표현된 것이다. 이 같이 백제라는 이름에 담긴 뜻은 현재의 한국-중국-일본 등의 지역을 바다를 통해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양 국가임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한성시기 해양국가 백제의 바다제사유적 죽막동유적 한성백제이래 해양국가 백제의 모습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현존 유일의 백제시대 바다제사 유적인 전라북도 부안 죽막동 유적이 1992년 수성당(水聖堂) 주변 해안초소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면서 극명하게 확인되었다. 즉,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은 서해안에 돌출된 해안절벽에 형성된 해식동굴 옆에 만들어진 유적으로 백제시대 이후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까지 바다 제사가 이어진 유적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이곳이 백제시대 이래로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이 확인되었다. 죽막동 제사유적은 수성당을 포함한 공간인데 수성당은 바다여신 개양할미를 모신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개양할미는 키가 매우 커서 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걸어 다니면서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어부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바로 이 여신의 원형이 백제이래 바다항해 수호신으로 모셔졌던 것이다. 즉, 백제이래 바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한 우리민족의 해양제사유적의 원형모습을 보여준 곳이다.
제사유적에서는 3세기 후반부터 마한, 백제, 가야, 왜 토기 및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특히, 신에게 바쳐진 후 인간이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입구 부분을 깨트린 백제의 토기와 무기 등 금속제 유물들이 시대변화에 따라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가야토기 및 왜에서 만든 석제모조 무기와 중국제 초기 청자 등이 나타나 이른 시기부터 백제가 중국 및 가야, 왜 등과 바다를 통해 교역을 진행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병이나 그릇, 고려청자 및 조선 백자 등 바다 신에게 바친 유물들이 나타나 백제 이래 바다 신에 대한 제사전통이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죽막동 유적은 선사시대 이래로 중국이나 북방의 문화가 한반도 남부로 전파되던 해로상의 중요지점이며 특히, 백제시대에는 가야와 왜에 선진 문물을 전해주던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즉, 항해술이 아직 발달되지 못했을 때 연안을 따라 섬이나 육지의 주요지점을 표시 삼으면서 항해시 서해안으로 돌출된 이곳을 항해상의 중요한 지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해식동굴에 파도가 쳐서 나는 소리는 바다신의 노여움을 상징하는 ‘바다 울음소리’로서 인간의 경외감을 일으켰다. 이곳은 백제이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던 바다신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해양국가 백제를 지켜준 곳이다.
△웅진시기 백제의 바다출구, 익산 입점리유적 한편, 1986년 봄에 한 학생이 토끼를 잡다 발견한 익산 입점리 고분유적은 백제가 웅진(공주)와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 이후 가장 중요한 대외 창구인 금강하구에 위치해 해양국가 백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유적은 금강하구 포구인 웅포(곰개나루) 배후의 함라산 자락에 위치해 백제의 해양진출 관문을 통치한 인물의 무덤으로 파악된다.
이 고분군 가운데 제1호분은 봉토 밑지름이 약 15m의 규모로 출토된 유물로서는 금동제장신구류·금동제신발·말재갈·철제발걸이·토기·중국산 청자항아리·화살통장식·금귀걸이·유리구슬 등이 있다.
특히 금동제 관모의 모양과 제작수법은 마한세력의 무덤으로 파악되는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이나 일본의 규슈지역의 구마모토현〔熊本縣〕 후나야마고분〔船山古墳〕출토품과 유사하다. 특히, 일본 후나야마고분 출토품이 좀 더 후대의 양식으로 보인다. 또 금동제 신발의 경우 입점리 1호분과 나주 신촌리 9호분,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모두 1점씩 출토되었다. 입점리에서 출토된 신발이 일본 후나야마 출토품보다 신촌리 9호분 출토품에 더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어 백제에서 하사한 유물임을 보여준다. 이같이 입점리고분에서 출토된 관모는 당시 백제와 마한세력 및 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이곳에 분포되어 있는 무덤들은 5세기경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백제에서는 판석으로 만든 돌널〔石棺〕이 6세기 이후에야 유행했는데 입점리고분보다 후대인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그러한 돌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6세기경의 관모와 입점리고분의 것을 비교해 볼 때 입점리고분의 관모는 4세기 이후∼6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이같이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의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후 금강을 새로운 해양진출 통로로 활용하면서 금강하구의 중요 포구지역인 현재의 웅포지역이 부각되었다. 백제는 이곳에 백제의 지배층을 파견하였고 그 지배층이 죽자 백제의 새로운 무덤양식인 돌방무덤을 만들고 백제 왕실의 하사품인 금동모자와 금동신발 및 마구 그리고, 중국과의 교역품인 청자 등을 함께 부장해 백제의 위용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관련 유물이 마한의 잔존세력 공간인 나주와 백제의 일본 진출 거점인 규슈지역에까지 확산된 모습에서 입점리유적은 백제가 금강을 통해 동아시아 세력과 교류한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파악된다. 이같이 전라북도의 부안 죽막동유적과 익산 입점리 유적은 백제가 바다를 통해 동아시아를 연결해 해양국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특히, 현재 전라북도가 새만금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환황해권 중심지역으로 발전하려는 미래전략의 역사적 근거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현재 부안의 경우 죽막동 유적의 중요성에 부응하는 전시관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고 관련 유적에 대한 안내도 전무한 상황이다. 향후 죽막동유적과 입점리유적 등 두 유적을 연결한 해양백제의 역사를 알리는 체계적인 학술, 교육, 홍보 공간의 마련과 프로그램 마련이 시급히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