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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생각의 씨앗을

인생에는 때로는 순경도 있고, 또 때로는 역경도 있습니다. 마치 바다를 항해할 때 때로는 순풍이 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역풍이 부는 것과 같습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바라고 뜻하는 대로 일이 순적하게 풀려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바라는 것 이상으로 일이 너무 잘 풀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바라고 뜻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심할 경우 예상치 못한 커다란 시련이 닥쳐서 인생 자체를 지탱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역경을 만났을 때 보이는 태도가 저마다 다릅니다.폴 스톨츠(Paul Stoltz)라는 분이 ‘역경지수, 장애물을 기회로 전환시키라’는 책을 썼습니다. 등산할 때 보이는 태도를 비유로 해서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첫째가 퀴터(Quitter)형입니다. 퀴터란 포기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등산하다가 정복하기 힘든 산이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경을 만나면 그만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둘째가 캠퍼(Camper)형입니다. 캠퍼란 캠프치고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등산하다 힘든 코스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 자리 펴고 고기나 구워먹고 놀고 쉬고 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경을 만나면 극복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안주해 버리고 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셋째가 클라이머(Climber)형입니다. 클라이머란 산을 정복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등산하다가 아무리 힘겨운 산이 나타나더라도 결국 정복하고 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경을 만나면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서 결국은 극복해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에 5만에서 6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생각을 하는데 그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관리하지 않고 그냥 놓아두면, 누구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므로 마음에 좋은 생각을 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의 씨앗을 심을 때 우리 삶은 행복하고 복된 현실로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입니다.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 흑인 해방 운동가이자 비폭력 인권운동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흑인 침례교 목사로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인권운동을 이끌어 1963년 워싱턴에서 대규모 평화행진을 통해 비폭력적인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이제 절망의 계곡에서 뒹굴지 맙시다. 고난과 좌절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삼고 살아가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 있습니다.”고 외쳤습니다. 미래를 현재 마음에 심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외친지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흑인인 버락 오바마인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떠한 환경에도 희망을 가질 수가 있고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즐거움을 가질 수 있고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것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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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8 23:02

"고민하지 맙시다"

한 노인이 허리까지 닿는 긴 수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손자가 이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어떻게 하고 주무세요? 이불 속에 넣으시나요, 아니면 이불 밖에 내놓으시나요?” 뜻밖의 질문을 받은 할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자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잘 생각이 안 나는데 내가 오늘밤에 잠을 자보고 나서 대답해 주마.” 그날 밤에 할아버지가 잠자리에 누워서 먼저 수염을 이불 속에 넣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영 어색하고 답답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동안 수염을 이불 바깥에 내놓고 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불 밖으로 수염을 내놓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영 불편하고 어색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그 동안 수염을 이불 속에 넣은 것 같기도 하고, 내놓은 것 같기도 해서 도무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수염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밤새도록 한 잠도 못 잤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밤마다 수염 때문에 잠을 못 잤다고 합니다.누구든 아무런 의식 없이 살 때는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의식하면서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죄가 무엇이고, 의로운 것이 무엇이며, 사랑이 무엇이고, 미움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다음부터 고민이 생기는 것입니다.어떤 남자 집사님의 푸념이 있습니다. “목사님, 요즘 예수 믿는 것이 정말 힘든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신앙생활을 하기 전에는 술 먹고 못된 짓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별로 못 느꼈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영 고민이 많습니다. 어쩌다 술을 한 번 마셔도 마음이 걸리고, 화투 한 번 쳐도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도 이제는 그렇지 못하니 완전히 스타일 구겨버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두 세계 사이의 고민입니다. 하늘의 세계를 몰랐더라면 결코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 하늘의 세계를 알면서부터 고민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나 고민은 언제든지 망설일 때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확실하게 선택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서 있을 때 고민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고민하지 않고 사는 비결은 어느 하나를 분명하게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 앞에도 두 개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세상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애굽의 압제 속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그분의 음성을 들었고, 숱한 이적을 행했습니다. 지팡이로 반석을 칠 때 생수가 터져 나왔고, 홍해를 내리칠 때는 바다가 갈라졌습니다. 분명하게 하나님을 선택한 모세는 일생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펼쳐냈던 것입니다.고민은 두 세계 사이에 끼어있을 때 생깁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선택을 한 후에는 고민이 사라집니다. 세상과 하나님, 둘 중의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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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1 23:02

사랑의 말 한마디

어느 날 ‘간디’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길에 엎드려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간디’는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손이 모자라는군요.” ‘간디’의 이 ‘사랑의 말 한 마디’가 그 할머니뿐만 아니라 전 인도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고, 영국의 총칼에 눌려 실의에 빠진 인도인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습니다. 모든 인도인들이 일어나 독립을 외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말을 많이 해야 위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한 마디의 말이라도 그 속에 진실한 사랑이 담겨있으면 두고 두고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혀가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해 버렸습니다. 얼마나 큰 낭패입니까?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새벽 바닷가에서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참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고, 베드로의 아픈 상처를 깨끗이 치유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책망부터 하실 수 있었습니다. “너,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지.” 하며 통쾌하게 한 방 날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애정이 넘치는 말로 격려하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순교의 제물이 되기까지 충성했던 것입니다.부정적인 말, 저주의 말은 ‘독약’이 되지만, 사랑의 말, 격려의 말은 ‘명약’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독이 든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사랑의 말을 하고, 격려의 말을 합니다. 그것이 거두는 열매를 알기 때문입니다.소련의 장수학자 ‘구리아닌’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단명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대화를 석권하거나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자들이 일찍 죽는다.” 그렇습니다. 사랑과 위로의 말은 희망과 용기를 낳지만, 부정적이고 악한 말은 불화와 파멸을 생산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 슬픔과 시련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로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용기를 주시고, 말씀으로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분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들에게 사랑을 노래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사랑의 말, 격려의 말로 서로를 세워주고, 절망의 세계를 소망의 세계로 만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의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의 말 한 마디’가 수많은 영혼들을 넉넉히 위로하고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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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04 23:02

꿈꾸는 사람들

여의도 63빌딩 아이맥스관에서 날개라고 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 온갖 노력을 다하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는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하늘에는 새들이 날고 그것을 바라보며 날아가기를 염원하는 인간의 모습이 보입니다. 곧바로 한 사람이 양쪽 팔에 날개를 달고 높은 성곽에서 뛰어내리지만 남의 집 지붕으로 곤두박질치며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도전하고 또 도전합니다. 부상을 당하고 죽어갈지라도 또 다른 사람이 그 뒤를 이어갑니다.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꿈을 끝내 접지 않습니다. 수도 없이 실패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합니다. 그러다가 하늘을 날기 시작하고, 차츰 비행 시간이 길어집니다. 결국 꿈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은빛 비행기는 만들어지고, 나중에 그 비행기는 새들과 함께 하늘을 날아갑니다. 그 때의 장면이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지금까지 눈에 선합니다.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에 비행기는 만들어졌고, 그로 인해 인간의 역사도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먼 나라도 24시간 안에 날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꿈꾸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풍요롭게 만들고 놀라운 역사를 이룬 사람들은 한결같이 꿈꾸는 자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것에 급급할 때 그들은 눈을 들어 높은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무엇인가 아름다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꿈꾸는 자들의 후예가 있습니다. 골방에서, 산 속에서, 연구실에서, 시장에서,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이 땅에 한줄기 빛을 비추고 공헌하기를 소원하는 저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인도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의 어머니가 되어 한 생을 불태우고 성녀로 추앙받았던 테레사 수녀에게 한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엄청난 고생을 하십니까? 이때 테레사 수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한 마디로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 무엇인가 아름다운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녀에게는 소박하지만 위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꿈이 인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한 것입니다.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꿈꾸는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에스더, 마리아, 바울에 이르기까지 저들은 모두 꿈꾸는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지식이나 지혜가 뛰어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아름다운 꿈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에게는 무슨 꿈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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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8 23:02

욕심

빈대 네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몸집이 너무 작은 게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 빈대들에게 새해 소원을 각각 물어보았습니다. 먼저 첫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네, 저는 몸집이 너무 작아 힘이 약합니다. 그래서 힘이 센 소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소가 되어라. 그러자 빈대는 소원대로 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네, 저는 하늘을 나는 새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너는 새가 되렴. 두 번째 빈대도 소원대로 새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네, 저는 배고픈 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굶지 않고 매일 음식을 뒤져 먹을 수 있는 쥐가 되게 해주세요. 그래? 그럼 너는 쥐가 되거라. 세 번째 빈대 역시 소원대로 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이 때 네 번째 빈대가 슬그머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어차피 원하는 대로 다 받는다면 실컷 구해보자.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소처럼 힘도 세고요, 새처럼 하늘도 날고요, 쥐처럼 굶지도 않는 그런 것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네 소원대로 소새쥐가 되어라. 그런데 이 세상에는 소새쥐라는 동물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 그 이름과 가장 비슷한 소시지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빈대도 낯짝이 있지!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 빈대는 너무 뻔뻔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고 말았습니다. 무엇이든 과욕을 부리면 그 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만 해도 그렇습니다. 음식은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음식이 아무리 좋고 필요하다 해도 적당히 먹어야 유익합니다. 욕심을 부려서 자꾸 과식하면 위장에 부담을 주고 결국에는 탈이 나게 마련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땅의 동물 중에서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동물은 사람뿐이라고 합니다. 개나 돼지가 위장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식탐을 하고 그 결과 위장병을 얻습니다. 이는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양식을 얻고, 돈이 있어야 편안하게 살고, 돈이 있어야 온갖 혜택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면 좋습니다. 많이 저축해 놓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위력이 있고 좋다 해도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문제가 됩니다. 돈에 대한 탐욕은 돈을 우상으로 만들고, 범죄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서 인간미를 빼앗아가고, 삶의 목적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그러므로 돈이 좋을지라도 지나친 욕심은 금물입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2장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밭에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되었는데 그것이 고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다다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은 다음에 내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자. 그리고서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날 밤에 이 사람의 영혼을 도로 가져가셨습니다. 결국 그가 애써 모아놓은 재물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고, 그는 헛수고의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 되었습니다.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의 종착점은 비극이요, 실패입니다.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승리를 가져다 준 적이 없습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에릭 프롬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가졌느냐?가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오늘의 시대 속에서 우리 스스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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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1 23:02

믿음으로 사는 삶

히브리 사고방식과 헬라 사고방식의 차이는 히브리 사람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법과 이방사람의 대표자로 헬라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은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같은 한 가지 물건을 보면서도 사고방식에 따라 전혀 각도가 달라집니다.히브리 사람들은 항상 “왜”라고 묻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거나 보거나 항상 “왜”라는 말로 묻고, 헬라 사람들은 항상 “어떻게”라는 말로 묻습니다. 그러면 “왜”와 “어떻게”가 무엇이 다릅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왜 먹어야 되고, 왜 살아야 되고, 왜 내가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왜 장가를 가야 되느냐 하는 그 “왜”라는 것을 묻습니다. 그래서 “왜”라고 하는 것은 목적을 뜻하고 있습니다.또 거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까닭과 목적을 묻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일을 해야 되느냐 하는 까닭과 목적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목적으로 일하고 먹어야 된다는 것이 그들의 해답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왜”라고 할 때 그 원인이나 목적은 하나님입니다.그런데 헬라 사람들은 항상 “어떻게”라고 묻습니다. 그 사람들의 “어떻게”라는 말은 방법을 말합니다. 일을 할 이유와 목적은 그 다음이고 ‘일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방법을 항상 연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적인 면이나 과학적인 면에서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철학이나 과학은 어떤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발전을 했고, 헬라 사람들에게는 철학과 과학이 발전을 합니다. 천국의 일꾼은 우리가 왜 천국의 일꾼이며, 왜 천국을 위해서 일해야 되느냐 하는 목적과 까닭을 묻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비발디가 고금의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하는 그 날 저녁, 콘서트홀은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하면 세상에서 최고의 바이올린으로 알려진 악기였습니다. 이윽고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청중들은 넋을 잃고 그 아름다운 선율에 도취되었습니다.“역시 악기가 좋으니까 저런 소리가 나는 거야.” 청중들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주가 그쳤습니다. 잠에서 깨듯 청중들이 무대 위를 바라보는 순간 비발디는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힘껏 내리쳤습니다. 바이올린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놀란 청중들은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일어났습니다.세계적인 명기를 저렇게 깨어버리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또 하나의 바이올린을 들고 등장한 사회자가 놀란 청중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저것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닙니다. 아무데서나 구할 수 있는 싸구려 바이올린입니다.” 비발디 선생은 여러분에게 참된 음악은 악기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평범한 악기라도 유능한 연주자의 손에 들려지면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내가 누구의 손에 사로잡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믿음이란 나보다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나를 대신하여 채워주시기를 바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넘치는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 힘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내 힘으로 움켜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움켜잡은 것 같지만 늘 부족합니다. 내 힘으로 수고하여 뭔가 이룬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에 뒤돌아보면 언제나 모자라는 삶을 살게 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맡겨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집어 주시기 때문에 그 인생은 모자라거나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싸워주시기에 언제나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우선적으로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따라서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은 반드시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했습니다. 이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는 “먼저”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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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4 23:02

'374만 1953번째의 눈송이'

코리스타의 우화가 있습니다. 총각 비둘기 한 마리가 실연을 당해서 우울하게 앉아있을 때 참새 한 마리가 찾아와 질문했습니다. “얘, 눈송이 한 개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 비둘기는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쨌든 별거 아닐 거야.” 그러나 참새는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했습니다. “너는 눈송이 한 개의 무게가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데 내 이야기를 들어봐. 내가 어느 날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눈이 오기 시작했어. 꿈나라에서나 보듯이 아주 조용히 내려와 작은 가지 끝에까지 사뿐사뿐 내려앉는데 너무나 신기해서 세어보기 시작했지. 정확하게 374만 1952송이가 내려앉을 때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어. 그런데 그 다음 눈 한 송이가 내려앉는 순간 가지가 부러지고 말았어.” 이 말을 들은 총각 비둘기는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노아의 대홍수 때, 우리 조상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사귀 한 개를 물어다 주었더니 노아가 큰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군. 무(無)에 가까운 눈송이 한 개의 무게! 지극히 보잘것없는 감람나무 잎 하나의 가치! 그렇지, 나도 한 번 더 해보자!” 그래서 11번이나 딱지를 맞았던 이 총각 비둘기가 처녀 비둘기에게 가서 12번째 청혼을 하였더니 그녀가 뜻밖에 수락을 했다는 것입니다.이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는 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74만 1952번째까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을지라도 374만 1953번째에 반응이 있었고, 11번째까지 청혼을 거절하다가 12번째에 청혼을 수락하듯이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삶의 자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주저앉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오는데도 잠깐을 기다리지 못해서 실패합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가 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마지막 한 시간을 참지 못하고 제사장이 해야 할 제단의 일을 자신이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그로 인해 사울 왕은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리는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99%를 인내하고서도 마지막 1%에서 실패한 경우입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지 않는다. 기다리지 말라.”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전문적인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확신하며 인내하는 자에게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승리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야 합니다. 향기로운 포도주는 캄캄한 창고 속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14).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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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7 23:02

하나님의 편

어느 날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교회 지도자들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대통령의 도움을 청하는 모임입니다. 사회자는 문제에 대해 설명 후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하나님의 우리의 편이므로 대통령께서도 우리 편에 서실 것을 믿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문제에 대해서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것의 옳고 그름을 더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제 소신을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내 편에 서 계시다’는 생각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제가 날마다 드리는 기도의 내용입니다.”사람들 사이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한 말의 뜻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대통령께 청탁하려던 생각을 접고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우리도 때로는 하나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내 편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강제적으로 자기편에 세우려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저마다 자기주장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의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놓고,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하는 모습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진정으로 서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자녀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려는 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실 것을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편 105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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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31 23:02

희망의 빨간 코

성탄절에 즐겨 부르는 노래 루돌프 사슴이 있습니다. 이 노랫말은 로버트 메이(Robert May)라는 사람이 쓴 동화를 요약한 것인데, 로버트 메이는 젊어서 무척 괴로운 세월을 보냈습니다. 동화작가가 되려고 오랜 노력을 했지만 삼류 잡지에서만 겨우 원고를 받아줄 뿐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5년 동안이나 앓아 누워있던 아내는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38년에는 경제공황까지 겹쳐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으며 어린 딸까지 돌보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해 성탄을 앞두고 쓴 동화 루돌프 사슴이 처음으로 일류 잡지 워드(Montgomery Ward)의 인정을 받았습니다.그는 이 이야기를 잡지사에 제출하기 전에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에게 읽어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썼군요. 하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동화가 활자화되기 전에 아내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루돌프라는 이름의 사슴은 다른 사슴에 비해서 못 생기고 코까지 빨갛게 부풀어올라 늘 친구들의 조롱을 받는 외톨이였습니다. 루돌프는 날마다 괴로움 속에서 살았고 못난 자기를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산타클로스가 사슴 마을에 찾아왔습니다. 썰매를 끌 사슴을 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산타클로스가 많은 사슴 중에서 뜻밖에도 루돌프를 뽑았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사슴의 강한 다리나 잘 생긴 얼굴보다 콧잔등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슴을 구하러 다녔기 때문입니다. 결국 빨간 코의 루돌프가 선발되어 그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루돌프의 빛나는 코는 희망을 뜻하고 있습니다. 삶의 자리가 아무리 괴롭고 불행할지라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만큼 인간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희망은 인간에게 용기를 주고, 그 용기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통에 빠졌는데 한 마리는 포기해서 죽고, 다른 개구리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다리를 저어 우유가 버터로 굳어지는 바람에 살아 나왔다는 우화에서 나온 속담입니다. 희망은 가능성을 믿습니다. 인생의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돌파구를 찾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고, 괴로움을 노래로 바꿉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고후4:8-9). 바울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 한 결코 쓰러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자리에서도 낙심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루돌프 사슴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어서 올해도 모든 추위와 절망을 떨쳐버리고 범사에 승리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만일 네가 봤다면 불붙는다 했겠지. 다른 모든 사슴들 놀려대며 웃었네. 가엾은 저 루돌프 외톨이가 되었네. 안개 낀 성탄절 날 산타 말하길 루돌프 코가 밝으니 썰매를 끌어주렴. 그 후론 사슴들이 그를 매우 사랑했네. 루돌프 사슴 코는 길이길이 기억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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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4 23:02

소망과 절망의 차이

2차 대전 때 유럽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군의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병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시철망 병’입니다. 이 병은 극도로 우울해지고 먹어도 살이 찌지 않으며 전신이 쇠약해져서 누워만 있으려는 증세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병은 원인도 모르고 치료의 방법도 없었습니다. 다만 철망 속에 갇혀 사는 상황에서 온 병이라고 하여 가시철망 병이라고 불렀습니다.그런데 이 환자들의 행동에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거의 하루 종일 투덜대고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시철망이 희망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해서 계속 불평만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수용소에 살면서도 끝까지 견디어내고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철망을 넘어서서 푸른 하늘을 보고, 철망 밑에 핀 작은 들국화를 보며, 고향도 그려보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일을 꿈꾸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가시철망 병’이 없었고 마침내 살아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가장 치명적인 병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꺾습니다. 기력을 잃게 만듭니다. 주위 사람까지 쓰러지게 만드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의 마지막은 죽음이요, 패배입니다.그러나 내일에 대한 소망은 오늘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가진 능력을 한없이 증가시킵니다. 모든 일에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예수님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셨고, 그 소망으로 고난을 이기셨던 것입니다.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절망 대신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소망이 있는 한 실패는 없기 때문입니다. 단 환난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온 낙심거리를 세상의 소망으로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직 주님 주시는 지혜와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71:14).소망은 단순히 지혜로운 생각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과 소망은 하나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기독교인 환자를 치료하고 있던 어떤 의사가 그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러한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때 환자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상태를 당신의 손에 맡겼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통해서 오늘도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소망의 삶을 통해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삼중고에 시달렸던 불구자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망은 성공에 이르는 신앙이다.” 한 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슴 깊이 새겨놓아야 할 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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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7 23:02

배넘실 마을의 꿈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셨던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찼지만, 악한 세대를 본받지 아니한 노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배를 만들게 하셨다. 심판을 면한 노아의 후손 중에 일부는 진안군 상전면 금지 배넘실 마을에 정착하였다고 믿는다. 진안문화원은 홍수로 물이 넘실거릴 때 마을진산으로 배가 넘어 다녔기에 배넘실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앞산에 무지개가 걸려 있는 날들이 많다. 또한 이 지역은 용담댐이 생길 때에 많은 마을들이 수몰되었지만 금지 배넘실마을은 물에 잠기지 않아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배넘실은 전국에서 하나 밖에 없는 고유명사이다. 배넘실교회가 있는 진안 배넘실마을은 홍수설화에서 유래되었다. 배넘실은 노아가 홍수를 극복하고 구원받은 것처럼 어떤 고난과 풍파도 이겨내고 사랑과 자유와 평화가 넘치고자 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배넘실은 마을주민총회의 결의에 따라 금지마을의 예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했던 이사야는 해함도 상함도 없는 천지만물이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의 땅이 도래할 것이라 말했다. 이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배넘실마을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 배넘실마을은 황토방과 황돗배가 있고 당나귀마차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산들엄니밥상이 있는 곳이다. 볼거리, 체험거리, 먹거리 그리고 숙박이 준비된 곳이 배넘실마을이다. 2012년 농림수산식품부는 배넘실마을을 가고 싶은 농어촌 100대 마을로 선정하였고 전라북도는 최우수 향토산업마을로 선정하였다. 2013년 농민신문사와 농협은 전국19개 향토음식 중에 하나로 배넘실마을을 선정했다. 그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주민 대다수가 마을수입을 가지고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2007년에 일본여행을 하였고, 2013년에는 중국여행을 갈 수 있었다. 비록 몇 분은 고령으로 여행 도중에 쓰러지기도 하고, 인천공항에 휠체어로 입국한 최고령자도 있었지만, 평생토록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농촌과 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주민들이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가슴 벅찬 기쁨이었다. 이러한 축복을 누리도록 배넘실마을을 도와주신 분들은 하늘에 별 만큼이나 많았다. 아무 조건 없이 도와주신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배넘실마을의 꿈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날마다 천사 같은 그 분들에게 감사하며 그 분들의 평안과 축복을 빌고 있다. 천지만물이 더불어 살아가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곳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창조주 하나님이 도우시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배넘실마을의 꿈이 이루어져 주님께 영광이요 우리에게 평강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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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0 23:02

겸손의 중요성

겸손이란 남을 대할 때 거만하지 않고 공손한 태도로 제 몸을 낮추는 것이며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겸손은 자기보다 남을 존중히 여기며,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의 의견을 폄하하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은 섬김 받기보다 섬기는 것이며, 이해 받기보다 먼저 이해하는 성품입니다. 또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고 배우려고 내려앉아 조용히 청취하는 자세입니다. 겸손은 높임 받기보다 낮은 자리에서 겸허하게 섬기는 것이며,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 종의 자세를 가지는 것으로서 우선순위에서 자신을 맨 나중에 두는 마음 자세입니다. 겸손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여 관용적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노래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같이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높임 받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더 자신을 살펴보면서 자신을 비우는 자세입니다. 또한 높아지는 것은 내러가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겸손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는 마음이며 참음으로 이겨내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그 어떤 영광스러움도 자신만을 위하여 누리기보다, 모두 함께 누리고자 하는 마음 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이성의 이해력과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생각하는 지혜로운 성품입니다. 겸손은 가장 소중한 성품입니다. 논어에 보면 지혜로운 생각이 투철하더라도 어리석은 듯 함으로 지켜나가고, 공덕이 천하를 덮을지라도 사양함으로 지켜나가고, 용기와 힘이 세상에 떨칠지라도 겁내는 듯 지켜나가고, 부가 온 누리에 가득차 있을지라도 겸손함으로 지켜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가는 우리사회의 이상적인 삶의 성품은 겸손함입니다.사람밖에 사람있고, 하늘위에 하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자기만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기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겸손히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자한 말을 가지고 겸손히 섬기며 형제와 이웃을 감화시킬 때 진정한 삶의 기쁨과 보람, 참 평강과 승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겸손히 섬길 때 힘든 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손한 태도로 섬기며 형제와 이웃을 친절히 대할 때 장래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겸손이 앞장서야 합니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겸손으로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이며 교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현재의 삶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우리의 기억속에 살고 있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의 상상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알지만 교만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모르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힘들지만 멀리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가장 멀리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빨리 집에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교만은 미래의 희망을 보지 못하지만 겸손은 희망을 봅니다.겸손은 치료입니다.부족한 상태에서 넉넉한 상태로, 문제의 상황에서 해결의 상황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의 상황으로, 막힌 상황에서 열린 상황으로, 부서진 상황에서 고쳐진 상황으로 치료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면 현실성 없는 요구와 자기주장만 고집함으로 합리적인 타협과 해결책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우리사회의 원만한 인간관계의 답은 겸손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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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03 23:02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필자가 목회 26년 중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가정이 있다. 김○○집사 가정인데 농촌지역임에도 작은 농기계에서부터 자가용까지 남부럽지 않게 살던 김 집사네는 딸도 넷 있었다. 문제없는 집이 없겠지만 김 집사에겐 외아들로 자라난 성인아이적인 외골수만 없었다면 지금도 행복한 가정이었을 것이다. 문제의 시작은 술과 도박 그리고 외박. 그땐 서울로 학교를 다니는 기간이어서 금요일 집에 도착과 동시에 심방을 통한 부인 김 집사를 위로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이었다. 그것도 잠시 끝내 부부는 이혼과 동시에 나는 그 교회를 사임하고 임지를 옮기게 되었다.목회 초년 때라 더 많은 격려와 위로, 그리고 목회적 돌봄이 있었다면 하는 회한이 창세기 제2장을 읽는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아마 찬 바람이 간밤에 많이 불어서일 게다.성경은 원색적으로 이혼을 금한다. 왜냐하면 남편에겐 부인이 바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 한 발 더 나아가 에베소에 보낸 편지를 통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 것을 설교하고 있다. 왜 사랑인가. 사랑 많이 부부관계의 해답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랑의 방식에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펴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하더라도 반드시 부부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현 시대적 흐름에 우리는 응답해야 한다. 사랑으로…남자는 머리라면 여자는 목이다. 목 없는 머리는 앙꼬 없는 찐빵이다. 더 나아가 머리는 목이 가는 방향으로 가야만 한다. 그래서 여성 상위시대가 정답이다. 사실 여자는 남자보다 재료도 월등히 좋고 강한 존재들이다. 박인비선수를 보라! 인비마마께서(?)는 올해의 선수를 LPGA에서 당당히 수상하였다. 보편적으로도 그렇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도 남편 밥이며 아이들 학교에 보내는 시중을 다 하곤 한다. 창조 재질을 보더라도 남자는 흙, 여자는 뼈로 만드셨다. 둘이 붙으면 흙은 잘게 부서지지만 뼈는 오히려 반질반질 윤기가 더 흐른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혼한 부부 들 중 여자쪽이 훨씬 돌싱녀를 자처하면서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더 좋다며 유유자적하곤 한다. 그렇다고 이혼을 조장하거나 방임하는 목사는 아니다. 부부 중 부인의 신앙 중요성을 말하기위해 에둘러 여기까지 말한 것이다. 여자 신앙의 중요성은 4대를 결정한다. 남편, 자녀 손자, 부모까지 4대들의 가정의 행복과 불행, 천국과 지옥을 한 손에 움켜지고 있는 분들이 바로 부인들이시다.내가 좋아하는 목사님들 중에 장경동목사님께서 모 프로그램에서 남자는 ○○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 나도 그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동감을 표했다. 남자는 무엇일까요? 남자는 늑대다. 남자는 도둑이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 남자는 돼지다. 이것이 정답이다. 돼지는 밀어서는 넘어지지 않는다. 돼지들인 남자들을 한 방에 KO시키려다가 오히려 카운터펀치를 얻어맞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남자가 돼지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기꺼이 손을 내밀어 등을 긁어 주고 턱밑을 섬섬옥수로 쓰다듬어줘 봐라. 그 돼지는 힘을 다 빼버리고 털썩 누워 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기술이다. 콧소리를 내는 것도 큰 방법이다. 약간 코맹맹이 소리로 맞장구를 쳐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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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26 23:02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가변적(changeable)입니다. 먼저 자연 세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변합니다. 우리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자연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시간마다 변하고 매일 변화가 일어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태산도 변하고, 거대한 강줄기도 결국은 변합니다. 태어난 날이 있음으로 마지막이 반드시 찾아오는 것입니다.둘째, 인류 역사에서 왕국들과 나라들이 변합니다. 한 때 전 세계를 호령하며 수천 년을 이어갈 것 같았던 왕국들이 어디로 갔습니까? 부유하며 능력이 많으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문명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헬라제국이나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를 생각해 보십시오. 해가지지 않는다던 나라 대영제국의 위상도 100년을 넘기지 못했고, 전 세계를 양분하여 호령하던 소련도 불과 70년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만드는 것은 가변적인 것일 뿐입니다.셋째, 사람도 변합니다. 그 모습이나 성품이나 결심들이 얼마나 쉽게 바뀌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 믿을 게 못됩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믿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사랑한다던 가슴 뛰는 맹세가 하루아침에 휴지조각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국에 얼마 전에 왔던 닉 부이치치라는 아주 유명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났을 때 해표지증이라고해서 아기를 낳고 보니까 양 팔과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발바닥만 있고 처음에는 발가락도 없었는데 의사가 수술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는 발가락으로 다 합니다. 연주도 하고, 컴퓨터도 잘치고 음악도 하고 그는 발가락으로 다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닉 부이치치입니다. 어머니가 간호사인데 닉 부이치치를 낳고 나서 너무 당황해서 4개월 동안 아이를 보려고 안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아이가 우리 집에 태어났는지 유전적인가? 아닙니다. 닉 부이치치의 동생 둘이 태어났는데 딱 보니까 닉 부이치치만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장하면서 아버지가 목사님인데 "부이치치야, 너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 너를 특별히 사용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닉 부이치치는 8살부터 세 번이나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며 일어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전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 극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가 고등학생 때 전교회장에 당선된 후였습니다. 한번은 자기 학교에 호주 출신의 강사가 왔습니다. 14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비좁은 강당에 모였습니다. 막 웅성웅성대고 분위기는 산만했습니다. 그런데 이 강사가 강단에 서자마자 첫 마디를 하는데 "여러분 저의 어머니는 몸을 파는 매춘부였습니다." 아이들이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10대 시절에 길거리에서 저를 낳았습니다. 저를 기를 수가 없어서 우리 어머니를 아끼고 사랑하는 한 아주머니가 저를 입양해서 저를 자기 집에서 키웠습니다. 그 집도 6명이 되는 식구가 있지만 저를 사랑해주고 아껴주셨습니다. 저는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이렇게 좋은 강사가 되도록 성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어떻게 부모, 성장 환경을 바꿀 수 있습니까? 못 바꿉니다. 그러나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난 자기 운명이지만 자기는 미래를 개척할 때 어머니께 감사하고 전 세계를 다니는 강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닉 부이치치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임에 가서 간증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증을 듣고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청년들이 닉 부이치치의 간증을 듣고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났습니다. 마약을 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얼굴을 못 생겼다고 저주하며 열등감에 살아갔던 아이들이 닉 부이치치의 강연을 듣고 나서 행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팔도 없고 다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믿음 안에서 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음 좋은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서, 아들을 낳아 정상적인 아이로 잘 키웁니다.여러분 우리 인생은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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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9 23:02

다문화 다종교 '아시아 화합 기폭제'

올해 초 순창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으로 부임했다. 전 부임지 남원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다문화업무를 봐 왔던 터에 법인의 인사방침에 의해 순창군으로 옮겨온 것이다. 순창군센터는 개신교 법인에서 3년간을 운영해 오다가 작년에 원불교 산하 법인으로 운영주체가 옮겨졌다. 덕분에 직원들의 종교성향이 다양하다.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 원불교를 신앙하는 직원들이 함께 다문화라는 공동 목적지를 향해 올곧게 노력하는 것이다. 사실 다문화와 다종교는 한 의미이다. 인류역사에서 종교를 배제하고 다양한 문화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일례로 한국의 문화를 보면 불교와 유교, 그리고 근현대사 문화재로 등록되는 천주교와 개신교 건축물이 상당수에 이른다. 유교의 합리주의에 바탕한 불교, 천주교, 개신교가 한집안에서 사이좋게 공존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외국에서는 사례를 찾을 수 없어 미국 국무성이 다종교 화합국 연구로 한국을 주목할 정도란다. 필자가 근무하는 순창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센터장실에는 일원상과 십자가가 함께 모셔져 있다. 처음에는 일원상만 걸었었는데 직원들이 어려워하는 것 같아 베트남에 갔을 때 어렵게 구해온 나무십자가를 함께 걸었다. 일원상을 위로 하고 그 밑에 십자가를 모셨는데 교회에 다니는 직원이 눈치를 주어서 십자가를 위로 하고 일원상을 밑으로 하니 이번에는 원불교 직원이 센터장님 정체성이 의심된다고 되레 눈치를 주어 할 수 없이 수평으로 하여 모셔놓았다. 그 밑에는 역시 중국, 베트남과 일본, 캄보디아에서 모셔온 성모마리아, 부처님 등 종교의 상징물들을 안치하고 인류 성현들의 뜻을 받드는 기도를 올리고 있다. 원불교에서는 1년에 재사를 두 번 올린다. 육일대재와 명절대재가 그것이다. 육일대재는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기일을 맞아 합동으로 모든 선진열위전에 공동으로 향례를 올리고 명절대재는 한 해 동안 조상님들의 은덕으로 오곡백과를 풍성하게 거두고 건강하게 잘 살게 되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추수감사절의 성격이다. 그런데 두 번의 재사에서 이 세상의 정신사를 열어주었던 모든 종교 스승님들(선성각위 - 先聖各位)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린다. 불교와 유교,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증산교 등 자비와 인의, 사랑, 박애, 은혜를 전해준 모든 성자들의 뜻을 받들고 정신을 이어받아 이 땅에 낙원세상을 건설하자는 것이 원불교 문을 열게 된 동기이다.원불교의 2대 종법사를 역임했던 정산 송규(1900~1962)는 삼동윤리(三同倫理)라는 게송을 남겼다. 한울안 한이치에 한집안 한권속이 한일터 한일꾼으로 일원세계를 건설하자는 내용이다. 삼동윤리에 바탕한 원불교의 복지사업은 지구촌의 무지와 질병과 빈곤을 물리치는 일을 벌이고 있다. 다문화가족지원사업도 예외가 아니어서 아시아 각국의 이주여성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적응교육을 받고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이주여성들이 한국의 문화를 배우는 피동적인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자신들의 나라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적극적인 관계설정을 하고 있다. 참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 다문화 다종교가 21세기 대한민국을 정신사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리고 아시아가 함께 대동화합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문화센터를 운영하는 관계로 아시아권 외국에 곧잘 나간다.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들은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열악하다. 하지만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6·25 전쟁을 겪는 아픔 속에 유엔에서 원조를 얻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첫 번째 나라이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부지런하고 머리 좋고 열정적이다. 다문화 다종교를 좌우 날개로 삼아 한국을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으로 자리매김 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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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2 23:02

목사님은 행복하세요?

재수해서 대학입학을 하게 된 친지의 딸이 엄마 왜 이렇게 인생이 힘들어하더란다. 원하는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서울에 가서 1년 동안 학원에서 공부하고 고시원에서 지냈으니 어련할까?부모 품에서 공부만 하다가 낯설고 물선 곳에서 밥해 먹으며 공부하랴, 빨래하랴 힘도 들었으리라. 더구나 원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아서 차선에 만족해야 했으니 어찌 힘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이라면 몰라도 그래도 공부가 가장 쉬운 일이거늘, 어찌 보면 더 힘든 일들을 이겨내도록 입시전쟁을 통해서 우리 자녀들을 연단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도 그때는 그것이 가장 힘든 일이리라.언젠가 헬스장 샤워실에서 한 수험생을 만났던 기억이 있다.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학생이 내게 "목사님은 행복하세요?" 라고 물었다. 나는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그 의도를 파악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다시 물었다. "왜 행복하지 않니? "나의 질문에 "아니, 그런 것은 아닌데요…." 라고 대답을 시작한 아이는 "목사님을 뵈면 늘 행복하고 여유가 있게 보여서요"라고 대답했다. 곧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입시문제로 지금 마음이 편치 못하구나, 그래서 목사인 나에게 행복하냐는 물음으로 마음 한 자락을 보여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대답했다.그럼 믿음으로 사니까 늘 행복하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우리의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다 맡기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혹 세상에서 힘들고 고달프고 실패했다 해도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리라 믿기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 그러니 입시나 다른 세상사가 네 뜻대로 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살면 행복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힘내라 화이팅!그 아이가 나간 후 나는 새삼스럽게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과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믿음이 무엇이길래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고, 생명과 사망으로 갈라놓기도 하는 것일까? 한 사람의 인생을 여유롭게 만들기도 하고 쫓기게 살게도 하는 것일까?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단순하게 정의한다. 쉬운 성경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 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입니다 라고 해석한다.비록 눈에는 안 보이시지만 좋으신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거늘 어찌 행복하지 않으리?어찌 여유롭게 살 수 없을까?좋으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근심을 혼자 지고 끙끙대는 것은 불신이리라.오늘 지면을 통해 부족하나마 나의 종교 칼럼을 본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지금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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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5 23:02

WCC는 세계 교회의 신앙축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WCC)는 성경에 따라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구주로 고백하며, 성부,성자,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공동의 소명을 함께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 그러므로 WCC는 세계교회협의회에 영어 이니셜이다.세계교회협의회(WCC)는 세계의 흩어진 모든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표적인 기구이다. 에큐메니칼은(Ecumenical)은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시작됐으며 뜻은 "하나님의 집에 살고 있는 모든 식구들" 즉 하나님의 권속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태초에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풍성한 생명을 주시고 번성하며 살라고 하셨다. 창조후 하나님은 보기에 좋다고 하셨고, 사람을 지으시고 매우 좋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 이름을 기쁨이란 뜻인 에덴으로 지으셨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조화로운 세계가 깨어졌는데 이 깨어진 하나님의 한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 곧 에큐메니칼 운동이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개념이다. 교회의 일치와 연합, 이를 통한 선교의 의미를 담고 있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구체적으로 진행된 것은 바로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통해서이다. 지금의 WCC는 1910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태동되었고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전세계 150여개 교단들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교회협의회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전세계 140개국의 349개 회원교회 약 5억8000만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기독교 협의회로서 세계에서 가장 폭넓고 포괄적인 에큐메니칼 기구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과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 성공회가 회원 교회로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특히 WCC가 말하는 일치란 거대한 하나의 교회를 만드는 구조적인 일치가 아니라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일치는 기본적으로 교회가 온전한 교회가 되는것(being the Church) 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모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게 하는 일이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게 하는 일치이다. 이를 통해 교리와 질서, 그리고 삶에서 나타나는 차이점과 반대되는 견해들을 상대화 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강화시킴으로써 차이점과 반대 견해들을 줄여 나가는 것이 일치의 중심인 것이다. 이처럼 소중한 세계교회협의회(WCC)제10차 총회가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린다. WCC 총회는 7년 혹은 8년마다 한번씩 열리며 세계의 다양한 전통의 교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이 시대의 공동의 선교적 사명을 분별하고, 공동의 증언과 공동의 봉사의 과제를 설정하는 전세계 교회들의 신앙 축제이다. WCC제10차 부산 총회는 1961년 인도 뉴델리 총회 이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개최되는 총회다. 313년 로마에서 시작된 서구 중심의 기독교가 2013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개최됨으로 복음이 동아시아 중심인 우리나라에서 21세기 새역사를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한국교회의 위상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해방이후 세계에서 경이적인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꽃피운 나라 선교를 받은 나라에서 세계 제2의 선교대국으로 발전하여 세계에서 선교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발전하였다. 이번 WCC제10차 총회는 한국교회의 영성, 선교의 열정, 새벽기도회, 금요철야기도회, 섬김과 나눔의 경험을 세계 교회와 나눌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평화와 통일이 남한과 북한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세계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 공동의 신앙과 제임을 확인하는 장이 되기도 할것이다.WCC총회가 전세계 기독교인들의 축제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국격을 높일 수 있고 국제신인도를 향상시킬수 있는 국제적 행사이기도 하다. WCC제10차총회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며 축복이다. 이를 위하여 한국 교회는 일치와 화합, 섬김과 봉사의 마음으로 성공적인 총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협력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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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29 23:02

생수의 강

어느 병원 응급실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새벽에 환자가 급히 실려 왔습니다. 당직 의사가 살펴보았는데, 심장마비로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신을 수습하려고하는데 좀 이상하였습니다. 오른 손은 펴고 있는데, 왼손은 꽉 쥐고 있었습니다. 대개 죽으면 손을 펴잖아요. 그래서 왼손을 펴주는데, 손 안에서 뭔가 툭 떨어집니다. 의사가 자기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어! 삼팔 광땡이네! 사연인즉슨 이랬습니다.밤새 화투를 치는데 계속 잃었습니다.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그런데 밤을 새고 끝 무렵에 판돈이 수북하게 쌓였는데 화투를 받고 펴 보니까 삼팔 광 땡인 겁니다. 너무 마음이 벅차올라 그만 심장 마비를 일으킨 겁니다.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삼팔광땡 잡아보려고 기를 씁니다. 못 잡으면 못 잡는 대로 속상해 하고, 잡으면 잡는 대로 허무하게 떠나는 게 세상의 모습 아닌가요?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나 심령에 흐르는 생수의 강으로 인생의 참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토니 에반스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하루는 침실 벽에 균열이 생긴 것을 발견 했습니다. 그는 기술자를 불러 고치게 했습니다. 시멘트 몰타르 바르고 그 위에 다시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 보니까 다시 갈라졌습니다. 다시 기술자를 불러 고치게 했습니다. 시멘트 몰타르 갈라진 틈을 메우고 그 위에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완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며칠 뒤에 보니 다시 균열이 갔습니다. 그때 기술자가 하는 말이 "주인님, 이것은 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집의 기초가 문제가 있습니다. 기초가 문제가 있어 벽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집을 헐고 다시 짓기 전에는 이 벽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선하게 보이려고 애를 써도 우리 인간은 기초가 되는 본선에는 죄의 품성을 갖고 있어서 선함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구조 속에 이미 죄가 창궐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이기 때문에 사탄이 유혹하고 침투시키는 죄를 막을 길이 없어 스스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의해서만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노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한 용서를 받아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영화 「벤허」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벤허는 류 월리스의 소설인데 영화화 된 겁니다. 월리스는 본래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 출신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던 무신론자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공박하려고 성경을 연구하다 뒤집어졌습니다. 무릎 끓고 예수님을 향해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그 후 이 소설을 쓴 겁니다. 그래서 부제가 아예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벤허는 유대인 귀족이었는데, 애매하게 노예로 끌려가고 인생이 꼬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도 감옥에 갇혔다가 나병에 걸렸죠. 그런데 마지막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집니다. 그 비를 맞으며 어머니와 누이가 나병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벤허는 쌓이고 쌓였던 원한이 사라짐을 경험합니다. 그 비가 흐르고 흘러 시내가 되고 큰 강을 이룹니다. 이게 바로 생수의 강입니다. 이 생수의 강이 내 심령에서부터 가정으로 직장으로 사회로 나라로 세계로 흘러넘치게 해야합니다. 이게 먼저 경험한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사막화된 세상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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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22 23:02

욕심

빈대 네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몸집이 너무 작은 게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 빈대들에게 새해 소원을 각각 물어보았습니다. 먼저 첫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네, 저는 몸집이 너무 작아 힘이 약합니다. 그래서 힘이 센 소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소가 되어라." 그러자 빈대는 소원대로 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네, 저는 하늘을 나는 새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너는 새가 되렴." 두 번째 빈대도 소원대로 새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네, 저는 배고픈 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굶지 않고 매일 음식을 뒤져 먹을 수 있는 쥐가 되게 해주세요." "그래? 그럼 너는 쥐가 되거라." 세 번째 빈대 역시 소원대로 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이 되고 싶으냐?" 이 때 네 번째 빈대가 슬그머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어차피 원하는 대로 다 받는다면 실컷 구해보자.'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소처럼 힘도 세고요, 새처럼 하늘도 날고요, 쥐처럼 굶지도 않는 그런 것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네 소원대로 '소새쥐'가 되어라." 그런데 이 세상에는 '소새쥐'라는 동물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 그 이름과 가장 비슷한 소시지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빈대도 낯짝이 있지!"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 빈대는 너무 뻔뻔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고 말았습니다. 무엇이든 과욕을 부리면 그 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만 해도 그렇습니다. 음식은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음식이 아무리 좋고 필요하다 해도 적당히 먹어야 유익합니다. 욕심을 부려서 자꾸 과식하면 위장에 부담을 주고 결국에는 탈이 나게 마련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땅의 동물 중에서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동물은 사람뿐이라고 합니다. 개나 돼지가 위장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식탐을 하고 그 결과 위장병을 얻습니다. 이는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합니다. 돈이 있어야 양식을 얻고, 돈이 있어야 편안하게 살고, 돈이 있어야 온갖 혜택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면 좋습니다. 많이 저축해 놓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위력이 있고 좋다 해도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문제가 됩니다. 돈에 대한 탐욕은 돈을 우상으로 만들고, 범죄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서 인간미를 빼앗아가고, 삶의 목적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인간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그러므로 돈이 좋을지라도 지나친 욕심은 금물입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2장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밭에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되었는데 그것이 고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다다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은 다음에 내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자." 그리고서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날 밤에 이 사람의 영혼을 도로 가져가셨습니다. 결국 그가 애써 모아놓은 재물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고, 그는 헛수고의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 되었습니다.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심의 종착점은 비극이요, 실패입니다.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승리를 가져다 준 적이 없습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소유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에릭 프롬'은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가졌느냐?'가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오늘의 시대 속에서 우리 스스로 던져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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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5 23:02

공감을 얻으려면

성경 잠언에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다"고 했다. 지혜로운자는 신중하게 말하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함으로 공감을 얻지만 신주하지 못하면 공감을 얻을 수 없다. 똑똑한 바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때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사자가 늙고 병들어 배고픔에 허덕인 체 새끼양을 뒤쫓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추격했지만 새끼양은 사자를 비웃듯이 자유자재로 도망쳤다. 굶주린 사자는 먹이를 구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자기가 갇혀서 죽게 되었으니 동물들이 방문해 주었으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을 퍼뜨렸다. 그러나 찾아오는 동물들이 없었다. 그런데 여우 한 마리가 찾아왔다. 나무 틈사이로 천천히 엿보고 있는데 사자가 그 모습을 보고 "어서 내게로 가까이 오게, 이리와서 나를 위로해 주게나" 그때 여우가 "사자님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평소에 저희들에게 신뢰를 주지 않았고 신중하지 못함을 알고 있으니까요" 사자는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공감을 얻지 못한 말은 군중을 움직일 수 없다. 자신의 잘못된 가치관과 부정적 시각의 말은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기존의 질서와 규범, 전통과 양식, 방법과 생활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비판적인 말은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주장과 생각, 의견과 논설에 대한 공감을 얻기를 바란다. 공감을 얻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희망이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항상 있어야 할 공감은 사람됨의 소중한 윤리이며, 가치이며, 힘인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공감은 자신의 신뢰를 돈돈히 하는데서 나오며 존경과 사랑을 실현하는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타인을 보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을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생각하는 태도가 진정성을 가질 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자신의 의견과 뜻을 공감시키려면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삶의 방식과 의견과 감정과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하며 존중해야 한다. 공감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안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공감의 인격을 향상 시키는 노력을 기울려야 하고 지속적인 수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공감을 얻으려면 다른 사람의 곤경과 실패, 아픔과 역경, 갈등과 반목에 대한 이해와 사랑, 관심과 위로, 희망과 용기의 말로 북돋아 줄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공감을 얻으려면 배타적이 아니라 보완적이여야 하고, 이기적인 아니라 이타적이여야 하며, 소유적이 아니라 공유적이여야 하고,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비난이 아니라 존중함으로 나아가야 하며, 비협력적이 아니라 협력적이여야 하고, 관망이 아니라 참여적이여야 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 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이 좀 더 희생적일 때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을 얻으려면 내가 남에게 기대한 만큼 남도 나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깨닫고 희생과 헌신의 마음으로 존중히 여기고 배려할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공감을 얻어야 질서가 확립되고 협력적 미래 비젼도 실현할 수 있다. 신앙 공동체에서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는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공감은 신앙 공동체를 구성하는 교우들에게 우리의식을 증진하고 상생하는 조정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갖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공감은 매우 소중한 가치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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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0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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