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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갑오년(甲午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출가하여 교무가 된지 벌써 이십 몇 년이 지나갑니다. 항상 출가 발원문을 올리던 초심을 잃지 않고 살리라는 다짐도 현실에 부대끼며 살다 보면 때로는 수행 일과에 게으름을 내기도 하고, 청정한 한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세속 사람보다도 더 못한 속내를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습니다. 진정 나를 내려놓지 못하고 비워 내지 못한 공부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어 갈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을 보며 겸손함을 배우고,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을 바라보며 비워야 채워지는 이치가 있음을 배웁니다. 오늘 맹사성의 이야기는 저에게 경책의 말씀이 되어 가르침을 줍니다.충남 아산 사람으로 조선 초기 청백리(淸白吏)의 상징이었던 맹사성은 정사(政事)를 위해 궁궐에 드나들 때에도 말 대신 소를 타고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고 하지요. 그런데 과거에 급제한 초년의 그의 행적을 보면 그러지도 않았나 봅니다.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하여 스무 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되니 맹사성은 자만심도 있었겠지요? 파주 군수로 부임하여 어느 날 고을을 순방하던 중 존경받는 선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무명 선사를 찾아가 물었답니다. 선사께서 생각하시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내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그러자 무명 선사가 대답을 하기를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그런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먼 길을 온 내게 해 줄 말이 고작 그 것뿐입니까?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습니다. 그러자 무명 선사가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지요.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는데, 스님은 찻물이 넘치는데도 그의 찻잔에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십니다 맹사성이 소리를 쳤습니다.하지만 무명선사는 태연하게 계속 찻잔이 넘치도록 다관의 차를 따르더랍니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습니다.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무명선사의 이 한마디에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린 맹사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설주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그러자 무명선사가 맹사성의 뒤꼭지에 대고 일갈합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도망치듯 뛰쳐나온 맹사성의 심경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소태산(少太山) 여래께서는 진리의 당체를 일원상(一圓相)으로 표현해 주시고, 일체 중생의 본성(本性)이라고 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든 중생의 근본 자리가 곧 부처라는 말씀입니다.그런데 우리는 현실의 삶 속에서 욕심에 끌려 살기 때문에 부처로 살지 못하고 죄고에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항상 사람과 만나고 일과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본디 부처임을 믿고 늘 텅 빈 본래 마음에 대조하는 공부심을 놓지 않고, 현실의 삶에서는 시비이해(是非利害)라는 잣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是非)을 판단하고 다음에 이롭고 해로움(利害)를 가리면 됩니다. 그런데 자칫 이해시비(利害是非)의 잣대를 가지고 살려 한다면 전도(顚倒)된 가치가 되기 때문에 나와의 이해(利害)를 먼저 저울질 하게 되면 때로 양심을 속이게 되기도 하고 결국은 실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항상 내 자신을 속이지 않고 텅 빈 마음으로 나를 비우고, 자리가 높아 갈수록, 가진 게 많아질수록 겸양하며 고개를 숙이면 부딪힘 없어 재앙도 피해 가는 것입니다.대산종사께서는 나 없음에 큰 나 드러난다고 하셨지요! <끝>
저나 여러분이나 한 장 남은 달력 앞에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나 한 달이 되고, 한 달 한 달이 어느덧 한해를 마무리합니다.시작은 마무리가 전제되어 있고, 마무리 또한 새로운 시작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과 끝은 늘 같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이 없는 시작은 삶에 있어서 무의미한 마무리를 가져다줍니다. 밝아 오는 새해에는 더 좋은 삶을 위하여, 올해 실천이 부족한 점을 반성하고자 몇 자 적어 봅니다.첫째, 성인들의 말씀을 읽거나 듣고서 얼마나 사유와 실천을 해보았는지 반성하고, 더욱더 노력하는 새해가 되었으면 합니다.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금을 통하여 성인들의 말씀이 남아 있는 것은 그 말씀이 실천을 통하여 검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의 말씀을 깊이 사유하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입니다.둘째, 나만의 시각으로 남과 대상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만물은 자기 주관과 자기 방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앎은 앎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일을 사려 깊게 들여다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상대의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분들이 인정과 존경을 받았습니다.셋째, 그릇된 소문에 꺼둘려 몸(身), 입(口), 생각(意)의 삼업(三業)을 짓지 않았으면 합니다. 삼업은 몸과 입, 마음의 세 가지 욕심으로 인하여 저지르는 죄업을 뜻합니다.우리가 상대로부터 어떠한 소문을 듣다 보면 생각이 발동합니다. 그 생각에 의하여 신체적 행동과 거친 말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들어줄 줄 알아야 하지만 상대 또한 자신의 시각에 의한 의견일 수 있기 때문에 검증이 된 들음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성인들의 삶은 듣고 말하는 것을 책임지는 삶이었습니다.넷째, 게으름과 헛된 일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시간은 저축이 안 됩니다. 하지만 삶의 기억 속에 살아온 시간은 저장이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그래서 좋은 기억(추억)을 많이 간직한 분이 최고의 부자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의 가치를 ‘시간은 돈이다(Time is money)’ 또는 ‘시간은 금이다(Time is gold)’라고 하는데 저는 ‘시간은 생명이다(Time is life)’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시간의 낭비는 곧 생명의 낭비이기 때문입니다.마지막으로 모두 다 포용할 수 있는 자비심을 늘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은 분노를 일으키고 좋은 것은 탐욕을 일으킵니다.이러한 감정에 꺼둘리다 보면 꺼둘린 만큼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이러한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따라서 자비심은 남에게 도움이 되지만 자기에게도 더 큰 의미를 줍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요즈음 인문학이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TV에서도 강연 프로그램이 점점 늘어날 정도로 기술이라는 주제에서 배움이라는 주제로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배울 학(學)이란 한자 단어는 어린아이가 몸을 낮추고 양발을 벌려 새끼줄 꼬는 것을, 배우는 형상으로 문자화한 것입니다. 이렇듯 배움이라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삶에 필요한 방식을 배워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즘 인문학이 이렇게 대세가 됐을까요?인문학이란 사람이 쓴 글을 배우는 것입니다. 사서삼경이 될 수도 있고, 기타 여러 고전들을 통해 현실을 다시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가령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글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고, 그에 따른 인간의 규칙을 재정비하는 논의가 될 것입니다.어느 정도 한계에 이르는 물질적, 경제적 성장이 있었기에 현재는 그에 비해 더딘 성장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면 즉,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하지만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취업률은 여전히 울상입니다. 기업에서는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소양이 있는 기술인을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배움의 소양을 지닌,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경쟁력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배움에는 세 가지의 배움이 있습니다.하나는 자신이 알지 못 했던 학문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고, 둘은 원리를 알아 다른 분야에서의 원리도 깨우쳐 아는 것이고, 셋은 배웠던 것을 실행하는 것이 참다운 배움이 되는 것입니다.예를 들면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법규나 운전을 배우는 것은 첫 번째 배움이고, 운전을 배워 다른 차종도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배움이며, 운전을 하면서 법규를 준수하면서 배운 것과 같이 운전을 하는 것이 세 번째 배움이 되는 것입니다.요즘은 평생교육이라는 단어가 일상 단어처럼 우리 생활 속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평생교육이라는 단어는 어감이 참 좋고, 그 의미 또한 좋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초, 중, 고등학생들만의 단어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의 단어인 것입니다.그렇다면 내가 배워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바로 내가 해야 할 일에 있어 나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업의 사장님이더라도 부품 조립에 대해 알고 싶다면 부품 기술자에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장인데 기술자에게 뭣 하러 배워!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 기업은 성장하기 힘든 지도자를 가진 셈입니다.자신의 마음에 있어서도 내가 나이가 많은데 나이 어린 사람에게 뭣 하러 배워! 라든지 자존심이 있지 내가 어떻게 물어봐라는 마음이 있다면 내가 발전하거나 성장하기 힘든 마음을 가진 셈입니다.저는 오늘도 여러 번의 배움을 가졌습니다.말할 때 웃음을 잃지 않고 말하는 사람을 보고 여유롭게 웃어 편안하게 대하는 배움을, 물건을 사지 않고 둘러만 보는 나에게 웃으며 다음에 또 오세요라고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을 보며 기다림에 대한 배움을 배우게 됩니다.또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도 의연하게 그 자리에 있는 뜰 앞 소나무에도, 여름 내 환한 꽃을 피우며 내면의 힘을 담아 다음 봄을 기다리고 있는 앙상한 꽃나무도 모두 배움을 갖게 합니다.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지혜롭지 않은 사람은 누구일까요?바로, 매사에 배우는 사람과 매사에 배우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배움을 나누고 고르는데 있는 것이고, 개인적인 행복의 완성은 배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서예를 배울 때 습자지에 대서 글씨체를 따라 그 대로 한 획 한 획 써 가면서 글자체를 연습하게 되는데 이를 체 받는다고 합니다. 인문학에 나오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도 그 성공한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따라 실행하고 배우며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나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배움은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또 배우는 것이 곧 남을 가르치는 것이 될 것이며 우리 사회를 맑고 밝고 훈훈하게 만들어 가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잘 배우는 사람입니까?
지구상의 수많은 국가와 민족 중에서 칭찬과 존경을 받으면서 동시에 조롱과 비난을 받는 국가와 민족을 꼽으라면 이스라엘과 유대인일 것입니다. 70억 인구 가운데 2000만이 채 안 되는 민족이니 비율로 말하면 0.3%를 밑도는 수치입니다.그런데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는 매해 연말마다 각종 매스컴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언급되는 까닭은 노벨상 수상자의 비율이 20%를 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경제학 등 머리가 우수해야 받는 상으로 한정하면 25%에 달하기 때문입니다.그런 점에서 그들의 정신력이나 교육철학이 조명되고 존경을 받지만, 주변국에 대한 지나친 배타주의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잔인한 응징은 손가락질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 가 보면 800km에 이르는 분리 장벽은 성지에 대한 설렘을 넘어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들의 단결력과 정신력은 존경하지만 그들이 지구상에서 여전히 건재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숨 막힐 듯한 전쟁의 위협과 계속되는 자살 테러 등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얼마 전 1948년 독립국가 건국부터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국가이자 민주국가’라는 조항을 ‘이스라엘은 유대인 민족국가’로 개정하는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의회에 표결 처리를 요청했습니다. 여론 악화로 잠시 보류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불거질 것입니다. ‘민주국가’라는 정의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유대 민족 국가법’이 의회를 통과하면 20%를 차지하는 아랍계 팔레스타인 국민은 졸지에 2등 국민 내지는 이방 나그네로 전락하고, 민주주의 원칙은 훼손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주변 국가는 물론 서방 언론이나 심지어 미국에 사는 유대인에게조차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데 왜 그렇게 무리수를 두고 배타주의를 고집할까요?실제로 그들은 많은 민족 중에서 그들이 선민인 것만 내세웠지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혈통만 내세울 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축복하신 뜻을 오해하고 자기들만 축복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 민족주의로 전락하고 배타주의가 오히려 애국심으로 인정받는 망할 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것도 모자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도 그 죗값을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돌리라고 큰소리쳤으니 그 대가가 혹독했음을 유대인의 역사가 증명하고, 지금도 세계 최고의 위험 국가와 민족인 것은 축복을 축복으로 선용 못한 논리적 필연이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복의 근원이 되라 하셨거늘 그들은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는 것을 마다하고 자기들끼리만 복을 누리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선민, 성경을 알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선민의 비극은 마침내 예수님을 거절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 성탄절이 다가오는 계절에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각 분야의 지도자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오늘 나는 맛을 내며 살고 있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살맛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번 성탄절에는 서로에게 살맛을 나게 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해 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을 만나 살맛이 생겼다고, 당신을 만난 것이 내 인생의 긍정적인 터닝 포인트였다고 평가받는다면 당신의 수고는 하늘에서 해같이 빛날 것입니다.
저는 절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사회에서 혹은 가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금산사에 템플스테이를 오신 많은 분들이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스님께서는 절에 계시니 밖에서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만큼 걱정거리도 없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나 화나는 일이 없으실 것 같다고 말이죠. 저는 절에서 그런 걱정들 없이 살다 보니 때로는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이게 편한 생활인지도 잊고 삽니다. 젊은 학생부터 노인 분들까지 각 연령층의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 밖에 살지는 않지만 요즘 젊은이들과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저 또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저 또한 어렸을 때는 모든 일을 제 위주로 판단하고, 배려가 부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젊은 분들이 모두 배려가 적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겪어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지 고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땐 항상 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근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울면서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렇게 태어나 보고 듣고 말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만의 판단 기준을 성립하게 됩니다. 나와 다른 생각,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들과는 멀리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으면서 말입니다.저는 저희 절을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두 손을 모아서 하는 이유를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가 두 손을 모으는 이유는 두 손이 합쳐져 하나가 되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하나와 같기 때문에 서로 하나인 우리가 서로 평등하고 소중하며 서로 화합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나만의 생각과 시선들을 다른 사람의 생각과 시선으로 바라볼 때 서로 이해하게 되고 서로 감사하게 되고 화합할 수 있습니다. 이 화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참 중요합니다. 그냥 막연히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배려하고 감사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우리가 화합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대화입니다.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천 냥 빚을 말 한마디로 갚는다고 하니 우리가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화합할 수도 있고 갈등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감동시키고 좋은 인연을 심는 것입니다.불교에서는 인연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콩 심은 데는 콩이 나고, 팥 심은 데는 팥이 나듯이 모든 일에는 항상 그에 마땅한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갈등과 걱정의 원일을 찾아서 없앨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갈등도 없고 걱정도 없는 것입니다.사실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복을 많이 받는다. 나쁜 짓 많이 하면 벌을 받는다. 이렇게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냈으니까요. 하지만 조금씩 이런 생각을 뒤로 한 채 살게 되면서 걱정도 생 갈등도 생기는 것입니다.저는 금산사에 템플스테이 오시는 분들, 절에 다니시는 모든 분들, 제가 알고 있거나 알지 못하는 분들까지 모든 분들이 정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서로 배려하는 마음만 가지고 우리가 산다면 화합하고자 하는 의지만 가지고 산다면 우리가 갈등 없는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한 해가 다 지나가는 즈음에서 문득 한 해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혹 잘못한 것이 있다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를 바라고, 우리 모두가 내 자신과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갖으시기를 바라봅니다. 행복하세요.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몬타나주의 배노크에 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금광을 찾아 나섰습니다. 금을 캐서 부자가 되기 위한 길이었지만 그 길은 참으로 험난한 고행의 길이었습니다. 험한 산과 들을 지나는 힘든 여정 속에서 도중에 쓰러져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물건과 말들을 모두 빼앗, 그들로부터 자기들의 영토에 들어오지 말라는 협박도 받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발길을 고향 집으로 돌려야만 했습니다.그런데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행 중 한 사람이 이상한 돌을 발견하게 됩니다. 돌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속에 많은 금이 함유돼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과 기쁨이 솟았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엄청난 사금이 곳곳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며칠 동안 금을 채취했으나 음식이 떨어지고 장비가 없어 도저히 그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단 고향 집으로 돌아가 음식과 장비를 챙긴 뒤, 약속한 날에 다시 만나 함께 그곳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물론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약속하기를 금을 발견한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다짐 또 다짐을 받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며칠에 걸쳐서 다시 금을 캐러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이제 떠나는 날이 돼 약속된 장소에 모였는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그들 주변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누가 비밀을 누설했기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계획을 알고 따라나섰던 것일까요? 하지만 비밀을 누설한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솟아나는 기쁨과 생기, 희망의 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 때문에 그들의 비밀이 탄로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슴에 희망을 품고만 있어도 이렇게 얼굴에 빛이 나는 법입니다. 그러면 지금 당신이 가슴에 품고 있는 희망을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의 가슴과 얼굴에는 힘찬 환희가 있어야 합니다. 깰 수 없는 꿈과 희망의 물결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금빛보다 찬란한 빛이 있고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 테스트를 해보겠습니다. 각 문항 당 10점을 만점으로 해 ‘행복 점수’를 직접 매겨 보시기 바랍니다.1.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으며 신체적으로 큰 결함이 없습니까?2.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족이나 이웃이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아십니까?3. 당신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소중히 여, 이 시간을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습니까?4. 당신 앞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이를 자신의 성숙에 도움이 되는 고통이요 아픔으로 생각하십니까?5. 내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침에 건강하게 눈을 뜬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6. 당신이 이웃에게 무엇인가 희생하거나 주는 데에 기쁨을 느끼고, 이와 같이 희생할 수 있고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까?7. 아기들의 웃음이나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음악이나 미술, 문학 같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감사하고 있습니까?8. 당신과 당신의 가정만이 아니라 사회나 민족 더 나아가서는 인류를 위해 살고자 하는 헌신의 마음이 당신에게는 미약하나마 분명히 있습니까?9.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고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10.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이상의 질문을 계산해 60점이 넘으면 당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서 ‘행복’을 찾고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참 행복자의 조건은 환경과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생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안개와 같은 인생, 무엇 때문에 욕심에 매여, 아집에 매여, 교만에 매여, 값진 행복을 빼앗 있습니까?저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광활한 세계입니다. 가슴에 희망을 품은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11명이 하는 축구 경기에서 순간의 흥분을 참지 못하고 비매너 행동으로 1명의 선수가 퇴장 당하면 나머지 10명의 선수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작용해 결국 경기를 패배로 마무리하게 되는 상황을 종종 보게 됩니다. 누구나 자신의 맡은 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팀이 강팀이 됩니다. 비단 축구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저는 평소 ‘공동체’라는 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동포들의 은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여름철이 되면 항상 가졌던 생각 중 하나가 바로 ‘모기가 사라지면 안 될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 모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실 겁니다.그런데 모기는 새나 곤충들의 주 먹잇감입니다. 모기가 없으면 새와 곤충들이 사라지고, 그것을 잡아먹는 짐승들도 사라져 결국엔 가축들도 대부분 멸종하게 된다고 합니다. 가축이 멸종하게 되면 인간 역시 생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이처럼 모기 하나가 없어져도 살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데요. 더군다나 세상에서 같이 살아가고 있는 동포들이야말로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죠. 네가 없다면 나도 살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은혜 아닌가요.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숨 쉬며 살 수 있는 것도 바로 내 옆에 있는 동포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동포들의 은혜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고독합니다.고독은 외로울 고(孤), 홀로 독(獨)이라는 한자로 반대말도 없습니다. 고독은 다시 말하면 고통으로 들어가는 독약입니다.고독함의 반대는 감사함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감사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없어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것이 은혜를 아는 것이고, 은혜를 안다면 은혜를 갚는 것이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자리이타(自利利他)입니다.옛날 우리 선조들의 말 중에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 앞에 업경대라는 거울을 보면서 복은 얼마나 졌고 죄는 얼마나 지었는지에 따라서 극락과 화마 지옥에 가는지를 결정한다고 합니다.굳이 저승사자 앞에 가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 마음속에는 모두 블랙박스 하나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블랙박스에는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이 하나하나 다 저장되고 있습니다. 이 블랙박스가 바로 염라대왕의 장부책인 셈입니다. 이 장부책에 의해 극락과 지옥으로 나뉘는데 사실 극락과 지옥은 모두 먹을 것이 풍성하다고 합니다.그런데 두 곳 모두 팔에 묶여 있답니다. 극락은 서로 먹여 줘서 풍성하고 행복하고 웃으면서 넉넉하게 살아가지만, 지옥은 서로 자기 입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남에게 먹여 주지 않으니 비쩍 마르게 있다고 합니다.자리이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갖춰야 할 것이 바로 자신의 인격입니다. 자신의 힘이 갖춰지지 않으면 자리이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리이타를 한다고 말은 떠들면서도 결국에 가서는 타인의 해하고 자신의 이익만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또 하나 자리이타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인연을 잘 맺어야 합니다. 인(因)은 직접적인 결과를 말하고 연(緣)은 간접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콩을 기르는 사람이 콩을 심는 것을 인이라 하고, 물도 주고 잡초도 뽑고 하는 것을 연이라고 합니다.내가 복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배려하고 도와주고 살펴 주는 것이 바로 인이 되겠지요.그럼 연은 무엇이냐.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잘 되라고 마음으로 응원해 주고 배려해 주는 마음이 바로 연이 되는 것입니다.‘인연 작복(作福)을 잘 지어라’라고 하는데 인연을 잘 맺는 것이 바로 복을 만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요즈음 들어 신문에서 FTA 체결이라는 기사를 자주 보게 됩니다. FTA는 시대적 흐름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기쁨을, 한쪽에서는 슬픔을 갖게 되는 이 선택에 공동체가 함께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행복 공동체의 전북이 됐으면 합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라는 심리학자는 자아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하고 있습니다.첫 번째 자아는 물질적 자아라고 말합니다. 물질적 소유에 의해서 자기를 평가하면서 사는 존재를 말합니다. 내가 가진 것, 혹은 내 몸의 가치로 평가 받는 것을 물질적 자아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 자아입니다. 내가 누구의 친구냐, 누구의 자녀냐, 어느 회사의 사장이냐 그리고 어디 출신이냐, 어떠한 박사 학위를 가졌느냐 하는 사회적 관계와 그 역할에 따라 평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평가는 영적 자아입니다.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외모로 할 것도 아니고 소유로 평가할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도 영적으로 살지 못하고 철저하게 육신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신앙적인 모습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말이나 행동이나 그 생각 자체가 아예 신앙적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몇 년을 신앙생활 했느냐, 교회의 직분이 무엇이냐가 도무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잘못한 것이요, 인생을 잘못 살았습니다.A. W. 타겟(Target)이라는 사람이 쓴 〈창〉이라는 단편 소설 가운데의 내용입니다. 어느 작은 병실에 두 남자가 입원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또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였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자리에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병세로 보자면 폐암 말기 환자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왜 그런지 늘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 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도대체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 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연인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폐암 환자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이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어서 수시로 창밖을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의 생각에는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저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서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 받던 폐암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고 그는 옮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 밖에는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습니다. 그는 그제야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창조적인 상상으로 기쁨을 선택하며 마지막까지 기뻐할 수 있었던 그 사람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우리는 숱한 선택 속에서 살아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본능적인 것에서부터 ‘극장을 갈까? 연극을 볼까?’라는 문화적인 선택, ‘이 사람을 택할까? 저 사람과 결혼할까?’라는 인생의 중요한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선택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만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기쁨과 슬픔도 선택에서 온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누구나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이야말로 훨씬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무엇을 잣대로 결단하며 살아가는냐에 따라 신앙인의 모습을 볼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환경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기쁨.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창조적 영적인 기쁨을 선택하며 마지막까지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외출했던 청년이 집으로 돌아오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놀란 어머니가 가슴을 졸이며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청년은 이미 두 눈을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청년은 깊은 절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은 채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가슴은 타들어가는 듯 아팠습니다.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그에게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그 사실조차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아들아, 한쪽 눈이라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얼른 수술을 받자.”결국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아들은 한쪽 눈 이식 수술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그대로 눈을 가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아들은 자신을 간호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애꾸눈으로 살아가느냐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투정을 부리고 원망을 해도 묵묵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습니다.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아들이 붕대를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붕대를 모두 풀고 앞을 본 순간 아들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한 쪽 눈만 가진 어머니가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아들아, 실은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의 장님 몸뚱이가 너에게 짐이 될 것 같아 한쪽 눈만 내준거야. 미안하다.”“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19절.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마음의 온갖 허물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양약으로 알아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지난 주 내내 전주 한옥마을 한 켠에 자리를 펴고 한국불교의 문화적 전통이 지켜온 음식을 들고 나와 시민에게 자연음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캠페인을 했다. 나무를 깎아 옻칠을 입힌 목발우(승려들의 식기)를 준비하고, 정갈하게 달인 백련차를 마실 수 있는 다완도 준비했다. 그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불교적 전통이 지켜온 음식문화는 요즘 시속에서 유행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우선은 현대인들이 음식을 너무 캐주얼하게 대하는 것 같다. 식탁문화 속에는 인정과 소통, 감사와 배려가 기본적으로 살아있어야 하는데, 대화가 사라진 채로 과묵하게 음식 먹는 일에만 집중한다거나, 음식을 대놓고 감사한 마음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까탈을 부리기까지 한다. 음식 자리는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인간다움과 미적인 요소를 모두 동원해서 즐거워야 할 곳이다. 그래서 음식 자리에 행복의 미소가 살아있도록 애쓰자고 했다.음식을 대하는 자세는 절제가 기본이다. 마트에 가보면,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 먹거리가 풍부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식재료가 넘친다. 그런 만큼 요즘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탈도 많고, 병도 많고, 또 그 탈과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진한 노력을 쏟지 않으면 안된다. 먹을 걸 앞에 두고 절제한다는 게 쉽지 않지만, 자신을 걱정한다면 적게 먹을 수밖에 없다. 역설같이 들리겠지만, 음식을 절제하는 것에서 자신의 행복이 시작된다는 걸 자각해야 한다.내가 어릴 적에는 음식을 못 먹어서 배가 부어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이 문제다. 어디 그뿐인가. 음식을 즐기는 것도 자유겠지만, 자신의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열량 높은 음식에 알코올까지 곁들여 무절제하게 먹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동물성 식품이 인간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도 잘 안다. 그렇지만 열량 높은 육식을 무절제하게 섭취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제철 채소류를 최소한의 거친 요리로 섭취하는 식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권유했다.삶은 변화다. 원형을 유지하는 건 애초부터 의미없는 일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삶은 변화고, 변화는 원형의 소멸에서 온다. 이를 두고 부처님은 평생에 걸쳐 “모든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고 가르쳤다. 소멸은 변화의 다른 얼굴이므로 중간의 논리를 생략하면, 삶은 소멸의 연속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에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 음식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고, 그것이 모여 인생을 이룬다. 자신의 삶을 의미 있는 변화로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즐겁게 먹고, 적게 먹고, 육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채식을 할 일이다.
백인이 흑인을 법에 의해 노골적으로 차별했던 남아프리카연방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있던 ‘성 시온’이라는 흑인 교회에서 수난일에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담임 목사는 예배 때 특별한 행사를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어 주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예배에 백인 판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올리버 판사였으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올리버 판사는 본국으로부터 이비 대법원장으로 내정까지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교회에서 이뤄지는 세족예식의 광고를 듣고 그는 그 교회에 다니는 자기 집 흑인 여종인 마르타 포트윈의 발을 씻겠다고 신청했습니다. 그는 마르타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었을 뿐 아니라 그 검은 발에 입을 맞췄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배당 안은 숙연해졌습니다. 올리버 판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이 여인이 내 집의 종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내 아들과 딸을 정성껏 돌보았으며 아이들의 발을 씻어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 소식이 퍼지자 내정됐던 대법원장 자리가 취소된 것을 물론 판사직도 박탈됐습니다. 성 시온 교회에서 올리버 판사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직도, 사회 다른 직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저는 다만 무덤에 가기 전에 그 작은 먼지를 턴 것뿐입니다.”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성공을 바라보면서 기뻐합니다. 쥔 권력이 줄 기쁨을 바라보고 감격합니다. 쥐어진 물질이 줄 혜택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형성된 바라봄의 영성은 이 세상이 끝난 뒤 영원히 지속될 기쁨과 감격을 알고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바라봄의 영성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인생이란 큰 경기장에서 펼쳐지는 야구 경기와 같습니다. 아무도 마지막 회가 끝날 때까지 절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야구경기의 묘미는 마지막 순간까지 경기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신비로운 역전승을 종종 경험하기 때문입니다.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이 막막하더라도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역전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십시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을 변화 시키십시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홈런을 날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움켜쥐고 사는 것들 대부분 진정한 가치가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한 모든 가치를 한 손에 가졌던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홍콩 민주화 시위가 도심 점거 2주를 넘기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드는가 했더니, 다시 한치 앞을 전망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시위대와 정부간에 갖기로 했던 지난 10일의 대화가 ‘시위대가 도심 점거를 먼저 풀어야한다’는 정부 측의 주장으로 취소되어 버린 것이 도화선이었다. 점입가경으로 렁춘잉(梁振英) 홍콩 행정장관은 12일 “필요하다면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서 무력진압 가능성을 시사했고, 이에 대해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홍콩학생연대(HKFS)는 행정청 청사 주변을 다시 봉쇄할 수도 있다고 맞받아쳤다.중국 정부는 지난 1997년 여름 홍콩을 반환받으면서 중국과 홍콩간의 ‘일국양체제’를, 동시에 20년이 지난 2017년에는 홍콩인의 총투표로 행정장관을 선출하고 독립적인 사법제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난 8월 말, 중국 정부는 2017년의 총투표는 보장하지만, 행정장관의 후보자는 선출위원회(1200명)에서 반수 이상의 추천을 받은 인사로 제한할 것이며, 판사 등 사법관도 애국적 인사로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베니 타이(Benny Tai) 홍콩대 법대 교수는 지난해 1월 행정장관의 직접선거를 목표로 시민불복종을 가능케하는 법안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지난 6월20일부터 열흘 동안 비공식 총투표를 주도하였는데, 무려 80만 명의 홍콩인이 이 투표에 참여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콩 반환 17주년 기념일인 7월1일 대규모 평화시위를 벌이게 된 것이다. 이 시위에 등장한 슬로건이 홍콩 금융가의 중심지를 겨냥한 ‘Occupy Central(센트럴을 점거하라)’이었다.홍콩의 고등학생와 대학생은 지난달 22일부터 동맹 휴업을 결의하기 시작했고, 26일에는 수만 명에 달하는 시민과 학생이 센트럴과 행정청 광장에 모여들었다. 시위대에 참여한 한 고등학생은 “지금의 초등학생이 10년 후에 홍콩의 민주화시위를 걱정해야 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면서 시위대에 힘을 더했다. 뉴욕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한 여학생은 학업을 중단하고 일주일이 넘게 센트럴 시위에 참여하면서 ‘우산혁명’의 노래로 홍콩민주화를 위한 아침을 시작한다고 전해왔다.지금 홍콩에서는 민주화 세력과 정부 측이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힘겨운 대치국면을 이어가고 있다. 민주화 세력들은 완전한 직접선거와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있고 동시에 홍콩의 치솟는 물가상승과 주택가격, 흔들리는 금융허브의 역할, 중국 정부의 노골적인 정치 개입, 심각한 환경 문제 등 현안을 행정장관들이 잘 풀어내지 못했다고 분노한다. 홍콩의 4대 회계법인의 대표들은 민주화 시위로 금융허브의 지위가 위축될까 염려하여 대대적인 광고를 내놓았다. 그러자 회계법인의 직원들은 “여봐요, 사장님들, 당신들의 성명은 우리를 대표하지 않아요”라고 맞받았다.우리는 질기고 아픈 민주화 운동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 연유인지, 홍콩인들의 민주화 시위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번 홍콩의 민주화 시위가 1989년의 천안문 사태와 같은 불행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두 세력간의 만남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부처님도 열반하시기 얼마 전에 견해의 차이로 반목하고 있는 정치지도자들을 향해 “정기적으로 모이고, 자주 모이면, 번영할 것이고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절실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상황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고, 어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쉬 잊히지 못하고 오래 지속될 것 같은 불안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지속되든 잊혀지든 삶은 새로운 것과의 만남에 연속일 뿐이다.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를 안다.이를 두고 인도의 불교사상가 바수반두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 실재한다는 상상이 존재한다. 그 허망분별에는 ‘아’도 ‘법’도 없다”고 했다.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경험하는 것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영원할 것 같다는 오해를 만들어가는 일에 불과하다. 무상한 것들에서 영원을 찾으려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나의 예상을 빗나간 것들 뿐이다. 그리고 나의 예상과 현실 사이의 엇나감을 심각하지 않게 은연 중에 받아들이는 익숙함에 젖어있다.인생은 어느 면에서 ‘엇나감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빗나감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익숙해지지 못하고 망각하지 못하는 기억은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줄까. 그래서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그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아무리 많은 날이 지나도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당신을 지울 수 없습니다”고 절규했다. 얼마 전 맨하탄의 세계무역센터 테러를 추도하는 자리에서도 한 유가족은 자신의 아픈 기억을 회상하며, “그가 떠나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함께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그가 살아있습니다. 기억되는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그보다 떠나간 그를 사랑합니다”고 했다. 이런 아픈 기억을 잊거나 망각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새로운 것과 연속해서 만나야 하므로, 과거는 익숙해지고 망각돼야 한다. 이상적인 불교인의 삶은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승경전에서는 과거의 기억에 얽매임 없이 새로운 연기적 상황과 만나야 한다는 것을 두고, ‘목숨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과거가 실재하지 않는데, 기억과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 새로운 연기적 상황에 충실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려하는 말이다. 심지어 ‘나에 대한 예상과 기대도 갖지 않아야 하며, 삼보(불법승)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사성제(고집멸도)도 놓아야 한다’고까지 했다. 삶과 인생이 새로운 것과의 부단한 만남일 뿐, 과거의 기억에 매어 있어야 하는 희론이 아니기 때문이다.역으로, 희론을 구성하는 토대가 바로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한다고 상상하는 기억이다. 만남과 접촉은 느낌을 갖게 한다. 그 느낌은 알아차림과 다른 영역의 정신작용이다. 새로움은 느낌으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지만, 극히 일부만이 실제 알아차림의 영역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그 알아차림은 기억을 만들어내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주관이 형성된다. 따라서 사람의 ‘됨됨이’는 ‘새로움을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하는 방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삶은 다름 아닌 바로 그 ‘방식’으로 구성된다.사회적 조건이나 경제적 토대는 모두 다 다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개인의 대응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집착을 놓음’이 불교적 전통에서 오래 고민해온 가장 이상적인 대응방식이다. 주관이 집착인데, 그 집착이 ‘실제하지 않는 것이 실제한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두고 ‘불선법’이라고도 했다. 바로 ‘엇나감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빗나감을 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땅에서 가장 크고 힘이 센 동물은 코끼리입니다. 이 코끼리는 어릴 때 잡혀와 작은 말뚝에 묶였고 빠져나오려 애를 썼지만 힘이 부족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코끼리는 현재에 편안해졌습니다. 이제 작은 힘으로도 뽑을 수 있는 저 말뚝을, 어릴 때부터 가진 ‘뽑지 못 한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이처럼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경험으로 인해 실제로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러한 상황에서 자포자기하는 것을 학습된 무력감이라 합니다.무기력에서 일어나려면 작은 성공의 경험을 늘려가야 합니다.인기 작가 공지영 씨가 쓴 ‘수도원 기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유럽의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자기 신앙에 나타났던 상처와 흔적을 고백하며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부족했는지에 대해서 썼습니다. 신앙의 여정을 그려놓은 책의 내용 중에 미국의 골프 영웅이었던 ‘할 서튼’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할 서튼은 미국 PGA 골프 우승자였고 라이더스 컵 우승자였습니다. 그는 미국 남부 석유재벌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이 없었고, 25살에 전 미국 골프대회를 휩쓸었습니다. 그 후 10년 간 3번의 이혼경험을 했고 한 때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재기하면서 인터뷰를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인생에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35세를 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나는 빠른 차가 있으면 행복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쉐를 샀습니다. 그 다음엔 집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비행기가 한 대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한 대 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깨달을 것은 행복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용하면서 공지영 씨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고백합니다.처음에는 소설가만 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소설을 써서 유명해지기만 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고, 생활비를 다 쓰고서도 통장에 잔고가 100만 원 이상만 있으면 행복할거라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어, 자고나면 통장으로 수천만 원의 인세가 들어왔습니다. 또한 그렇게도 사람이 그리웠는데 자기와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때 그녀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소유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이런 쉬운 깨달음 하나 얻기 위해서 청춘과 상처를 지불해야 했습니다”고 고백합니다.우리는 고난이 닥쳐오면 자기 인생을 남의 탓, 환경 탓, 부모 탓으로 돌립니다. 분노하고 저주합니다. 이런 마음 속에는 ‘왜’라는 항변에 ‘만약에’라는 헛된 생각을 갖습니다. 만약에 내가 좋은 부모, 환경을 만났더라면….이제는 ‘어떻게’라는 생각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입니까? 위대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고난과 아픔과 실패 속에서도 ‘만약에’를 지우고 ‘어떻게’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지금의 ‘나’입니다.
어떤 거지가 어렵게 복권을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꿈에 부풀어 매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복권을 간수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집이 없으니 집에 둘 수도 없었습니다. 방도 없으니 방에 둘 수도 없었습니다. 주머니도 해어졌기 때문에 마음을 못 놓았습니다. 믿을만한 거지 친구도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밥 빌어먹는 깡통에 밥풀로 잘 붙였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복권 발표가 있었는데 1등에 당첨이 돼 억대의 부자가 되게 생겼습니다. 그 순간의 기쁨을 무엇에 비교하겠습니까. 한 순간의 기쁨 속에 그 동안의 고생, 설움, 가난, 눈물이 다 해결되고 씻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남과 같이 푸른 꿈과 넉넉하고 아름다운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깡통을 흔들면서 한 없이 뛰었습니다. 힘도 안 들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희망의 빛이었고, 다 내 것 같았습니다. 깡통을 바라보는 순간 과거가 생각났습니다. 이제는 깡통이 보기도 싫었습니다. 깡통 없이도 이제는 잘 살 수 있고, 빌어먹지 않아도 됐습니다. 흐르는 강에 깡통을 힘을 다해 던져 버리고 한 없이 뛰었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한참 뛰다 생각하니 복권이 깡통에 붙어 있었는데, 그만 깡통을 버림으로 다시 깡통을 차야 되는 거지 신세가 돼버렸습니다.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굶주리고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며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심리학자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속에 들어간 후에 자기가 손에 쥐고 있을 빵을 한 조각씩 나누어 줬습니다. 그것은 먹으려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 있도록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 평안히 잠들었던 것입니다.내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만 했던 이 아이들이 내일 염려를 해결 받았을 때 비로소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전쟁 고아들만의 심리 상태이겠습니까?많이 가진 사람 중에도 자식들 대에 먹을 것까지 염려하면서 평안히 자리에 눕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모세의 어머니로부터 배울 것이 있습니다. 사실 모세 부모의 최대의 기대는 ‘그저 갈대 상자 안에서 얼마간이라도 아들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대 상자를 강물에 띄웠을 때 아들은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애굽의 왕자로 당당하게 성장했습니다.이런 믿음의 자세로 지금 현재의 내 인생의 기본 설계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준비하십시오.
손현이라는 사람이 쓴 ‘어느 쥐의 유언’이라는 시입니다. “내 말 귀담아 듣거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은 저마다 다른 무서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무서움의 형식을 감추고 있는 무서움이 가장 무서운 무서움이다. 내 말 잘 알아듣거라. 고양이와 쥐덫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로 있고 쥐덫은 언제나 쥐덫으로 있으니 내 나이가 되면 고양이쯤이야 차라리 같이 늙어가는 이웃일 수 있고 쥐덫쯤이야 내 슬기의 시험대 정도로 그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고양이도 아니고 쥐덫도 아니고 무서움을 다채롭게 위장한 쥐약이다. 쥐약의 외혐은 탐욕의 혀끝과 코끝을 유혹하기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이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쥐약의 외형이 어떻게나 간에 쥐약은 쥐약이다. 이 바보들아!”신앙생활은 여론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보다는 성경 말씀이 무엇이라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지만 진리는 다수결의 원칙이 아닙니다. 다수의 여론에 의해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진리는 부활하셨습니다. 21세기의 주된 현상은 한마디로 가치관의 붕괴입니다. 그러다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신념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지니는 삶의 방식은 다릅니다. 먼저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환경에 지배되고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시선을 두고 살아갑니다. 신령한 것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보이는 세계에 너무 연연하지 않습니다. 물질보다 마음입니다. 돈보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집을 갈 때 패물을 안 해줬다고 이혼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탐욕보다는 당연히 건강입니다. 영적인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삶입니다.미래 지향적인 사고를 합니다. 현재보다 미래, 순간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고생도 미래가 보장된다면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종말이 천국행이라면, 오늘은 기쁨으로 생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내일을 바라보며 삽니다.자기보다 다른 사람 중심으로 봉사하는 삶입니다. 나 혼자 이로운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이로운 면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전체가 이롭다면 내가 손해 보는 사람입니다. 손해를 안 보겠다고 언제나 자기 실속만 챙기는 사람은 아직 멀었습니다. 신앙인이 믿음 안에서 변화하지 못하면 신앙이 항상 제자리 걸음을 걷습니다. 삶의 목적, 방법, 소원, 취미, 표정 등 모든 것이 달라야 합니다. 비움이 있기에 채움이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이와 같이 달라지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가꾸시기를 바랍니다.
중동에서 일어났던 공격과 파괴, 오만과 살육의 소식을 접하면서, 인간의 억지와 건방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가늠할 수 없다는 분노가 일어난다. 세상에 어떤 나라가 국제사회의 제제나 간섭 없이 한 달 만에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2000여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한 달 안에 고작 3명이 죽어나간 자국민의 보호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변명해도 괜찮은가.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이스라엘 판 나치 만행’이라고 했다.유태인들은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유럽을 떠돌다가 한 세기 전 독일 나치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당한 집단 기억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의 아픈 기억을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인 가자지구(Gaza Strip)에 그대로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유엔과 국제사법제판소를 비롯한 국제기구가 하나 같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내 정착촌 건설을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철수를 명령하였지만, 이스라엘인들은 오히려 가자지구 내에 자신들의 정착촌을 확장해왔다. 지구 내의 이스라엘 불법정착민 숫자도 무려 60만에 이른다. 게다가 식수의 절대 부족지역인 지구의 수자원 가운데 80% 이상을 이스라엘 군인들이 모두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보니, 가자지구 내에서 둘 간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이스라엘의 전쟁 결단력은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하다. 미사일이나 전쟁 장비 등은 하마스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우위에 있다. 근간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던 ‘백린탄’까지 사용했다고 전한다. 백린탄의 잔혹함은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몸과 접촉이 일어나면 몸이 다 탈 때까지 꺼지지 않는다고 하잖은가. 그래서 국제사회는 백린탄의 사용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던 것이다. 이번 사태의 사망자 수를 단순하게 비교해보면 이건 세력이 비슷한 두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닮은꼴의 이스라엘 판 팔레스타인 ‘인간 청소’임에 분명하다.가자지구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무기 등 군사 장비가 하마스에 전달될 수 있다는 이유로 동북쪽으로 향하는 지역에는 이스라엘에 의해 8m 높이의 장벽이 둘러쳐져 있고, 남쪽으로 향하는 지역에는 이집트에 의해 봉쇄되어있으며, 서쪽으로 향하는 지중해 연안 뱃길은 이스라엘 해군에 의해 차단되어있다. 사방이 막혀있으니, 가자지구 주민들은 이스라엘 공격을 받아도 자신들의 영토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가자지구 주민들은 외부와 접촉이 차단된 채 고립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언론과 국제 여론을 움직이는 다수가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만행은 늘 포장되어 전달되고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 극단 세력이 무고한 이스라엘인들을 공격하는 행위는 마땅히 멈춰져야하지만,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의 영토 강탈도 마땅히 바로잡아져야한다. 유엔이 인정한 합법적인 국가를 무단으로 점령하여 봉쇄하고, 폭격과 파괴를 일삼으며, 식료품과 물 등 생필품을 통제한다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얘긴가.지금의 불행은 50년 전의 이스라엘과 아랍 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라는 힘의 논리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공격과 파괴, 오만과 살육이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는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깨는 어떠한 행위도 인정되어서는 안된다는 게 인류가 공감하는 숭고한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가자지구 만은 예외라고 침묵으로 묵인해야 하는가.습관처럼 일상화되어버린 폭력을 종식시키고, 이스라엘의 안정과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비폭력’ 묘안은 없을까. 엄청난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오만의 살육을 자행하는 건방을 제지할 수 있는 방책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인터넷 기사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오만과 살육의 건방이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한 농부가 자신의 농장에 대나무를 심고 기다렸습니다. 첫 해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둘째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셋째, 넷째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섯째 해가 되었을 때 대나무의 싹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대나무는 순식간에 한 자가 넘게 자랐습니다. 불과 여섯 주 만에 대나무들은 15미터 이상 키가 자랐습니다. 농부가 심은 대나무는 중국 동부에 자라는 ‘모소’라는 품종입니다. ‘모소’의 뿌리는 싹을 내기 전에 사방 수십 미터까지 뻗어갑니다. 그래서 일단 싹을 틔우면 뿌리에서 보내 주는 거대한 양의 자양분 덕에 순식간에 키가 자라게 됩니다. 4년이라는 시간은 뿌리를 키우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나무는 위로 성장하기 전에 아래로 성장합니다. 뿌리를 깊이 내릴 줄 압니다. 4년 동안 자신을 감추되,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감추는 기간 동안 미래를 준비합니다. 뿌리를 튼튼히 하고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뿌리를 가꾸면서 때가 됐을 때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합니다.미국으로 이민 간 어떤 사람의 절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최고급 벤츠 승용차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롤렉스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입니다. 드디어 돈도 벌고 출세해서 벤츠 승용차를 타고 롤렉스 시계도 차게 됐습니다. 그래서 시계를 차고 차를 몰다가 그만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져 그 비싼 벤츠가 박살이 났습니다. 간신히 사고 차에서 기어 나온 사람이 울부짖기를 “내 벤츠, 내 벤츠…!”하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던 구조대원이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쏴 붙였습니다. “아니 당신은 지금 이 판국에 벤츠가 문제입니까? 당신 팔뚝이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쿠 내 아까운 롤렉스 시계! 그게 얼마짜린데!”하더랍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물질에, 권력에, 정욕에, 명예에, 인기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헛된 목마름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우리가 살아가며 흔하게 범하는 잘못 중의 하나는 줏대 없이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에 따라 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의 장단에 내 삶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자기 잣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잴 수 있는 엄격하고 분명한 자기 잣대가 필요한데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의 잣대로 자신의 삶을 재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내 삶을 맞추게 되고 그런 것이 쌓이다 보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내 고유한 삶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1만 미터 상공에서 비행기가 고장이 났습니다. 다급해진 승무원들은 방송을 통해 모든 승객에게 위급상황을 알리고 재빨리 구호장비를 착용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기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갑작스러운 위급 상황에 대부분의 승객은 몹시 당황했고, 극심한 공포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할머니만 아무런 요동 없이 눈만 지그시 감고 있더랍니다. 마치 할머니는 공포나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비행기는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오금을 저렸던 승객 하나가 이 할머니를 발견하고 냉큼 다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어쩜 그리도 차분하실 수 있나요?” 할머니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의미심장했습니다. “난 두 딸이 있어요. 큰 딸은 2년 전에 죽었고, 둘째 딸은 이곳 텍사스에 살고 있지요. 저는 지금 둘째 딸을 만나러 텍사스에 온 거랍니다. 비행기가 고장 났다는 방송을 듣고 저는 이렇게 생각했지요. 만약 안전하게 착륙한다면 예정대로 둘째 딸을 만나러 가는 거고, 만에 하나 큰 사고라도 나면 먼저 하늘나라에 간 큰 딸을 만나러 가는 거라고요. 어차피 어느 쪽이든 사랑하는 내 딸들을 만나게 되는 거니까요.”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 즉,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미국 뉴올리언스에 가면 ‘욕망의 거리’라는 전차노선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처를 타고 가다가 문득 ‘이게 인생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인생이란 저마다 욕망의 전차를 타고 달리는 것이다. 욕망을 싣고 달리는 인생 전차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브레이크 없는 욕망열차를 타고 질주하고 있는가? 결국 사람들은 욕망의 열차를 타고 가다가 죽음이라는 묘지선을 갈아타겠지. 그리곤 지옥, 아니면 천국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겠구나’하고 깨달은 사람이 바로 테네시 윌리엄스라는 사람입니다. 이후 윌리엄스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희곡을 썼고,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윌리엄스는 플리처 상을, 주인공 비비안리는 아카데미·베니스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게 됩니다. 인생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전차’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인생전차에 무엇인가를 싣고 달립니다.어떤 사람은 인생의 여러 문제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자나 깨나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걱정하며 염려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어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가질 것인가? 소유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의견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모에 이끌려 어떻게 꾸밀까? 또 성형수술을 하고 집안을 가꾸고 무슨 옷을 입을까? 여기에 온갖 관심을 가지고 생의 모든 자원을 여기에 투자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한 부자 여인이 있었습니다. 심장마비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수술도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 인생의 마지막입니까?’묻자 하나님이 ‘아니다 40~50년은 더 살 것이다’. 수술 후에 깨어나니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이왕 병원에 입원한 김에 고치자! 얼굴을 팽팽하게 고치고 배에 지방을 빼고 눈을 키우고 코를 세우고 금발 머리카락을 심어서 아주 멋진 여인이 되어서 기분 좋게 병원 문을 박차고 달려 나오다가 달려오는 앰블런스에 치어서 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40~50년은 더 산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하자 하나님은 ‘너무 많이 뜯어 고쳐서 내가 못 알아봤다’.혹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받은 상처를 싣고 상처에 이끌려 인생을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직업, 명예, 사회적 위치에 이끌려 인생을 살아갑니다.그러나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인생 전차는 ‘우리의 목적’을 싣고 달려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학자 더글라스 스티어는 신앙의 사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안전을 구하기보다는 진실을 구합니다. 환경이 달라지기를 구하지 않고 ‘어디서나 성실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를 합니다. 역경을 자신의 삶으로, 은사로 받아들입니다.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자기욕망, 자기교만, 게으름을 이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가장 큰 부자는 바로 자기 처지를 만족하게 여기는 사람,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 속마음은 가진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불만과 원망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만족과 감사에 부유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품는 부유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질서정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괴한 혼돈의 세계다.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어떤 것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보기에 세상은 혼돈의 세계일 뿐이다.뉴턴(Issac Newton, 1642-1727) 시대 이래로 과학자들은 우주를 기계장치의 일종으로 이해했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복잡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가 작동하는 법칙만 찾아낸다면, 미래는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밀하게 측정하기만 한다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란 없어보였다. 모든 미래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이러한 발상은 매우 위험했다. 예를 들어, 수학자가 자연계의 질서를 수리법칙으로 이해하고자 하나 사람의 죽음이나 정신, 생체, 지능 등 외부 자연현상과 내부 심리현상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수학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생물학자가 어떤 차별도 없는 단세포에서 온갖 차별을 가진 자연계의 다양한 것들로 변화한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먼지가 날아가는 속도와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나, 연기가 퍼져나가는 속도와 넓이 등을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부처님은 모든 것(諸法)이 스스로의 작용력에 의해 자율적으로 ‘형성(行)’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연기’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력이 발생하는 원인은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했다. 이것을 두고 현대 과학에서는 ‘자율형성’과 ‘혼돈(Chaos)’이라고 하는 것 같다. 혼돈은 단순히 ‘복잡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어떤 것이 외부의 개입 없이 예측불허의 상태로 변하는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Lorenz, 1917-2008)도 자연(우주)을 기계장치 또는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으로 보았다. 따라서 충분히 고려하기만 한다면 자연현상 쯤은 언제나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검토하고 내린 기상예측은 번번히 불확실한 것들 뿐이었다. 로렌츠는 이를 두고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고 했다. ‘브라질의 숲 속에 있는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그것이 텍사스의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예측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수 없이 많다. 끝없이 증가할 것만 같던 인구문제가 자율조절 작용으로 증감을 반복하고, 초원의 동물 개체수도 외부의 작동이나 개입 등 특별한 이유없이 증감을 반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계에는 증시의 요동이나 민심의 이동 등 ‘예측 불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이것 말고는 진실이라고 할 게 없어 보인다. 자연계의 자율형성 능력에 따라 그리고 나비효과의 혼돈적 결과로, 자연은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혼돈’ 작용은 자율형성력에 의한 생성·변화·소멸하는 것으로 인간의 인지 능력 범위를 벗어난 것들이다. 모든 것들은 간단한 수리방식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대신 많은 요인들이 동시에 관계를 맺으면서 ‘나비효과’가 되어 중복과 증폭의 과정을 거치면서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변하고 만다. 이를 두고 ‘질서’와 ‘무질서’가 동일한 수리등식에 공존한다고 한다.아무리 복잡한 시스템이라고 하더라고 예외 없이 단순한 규칙에 기반한다는 것은 만물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새떼가 날아가는 것도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그 가운데 복잡한 질서가 내재하고 있다. 그리고 새떼가 날아갈 때 그 방향이나 속도, 높이 등은 늘 우리의 예측을 벗어난 것들이다. 새떼가 날아가는 것은 동일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동일하게 반응하지 않으며, 완전하게 동일한 상황을 재연할 수도 없다. 꽃이 피는 것도, 사막의 모레 언덕이 형성되는 것도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불가능한 것들뿐이다.대안은 자율형성 뿐이다. 이를 두고 불교에서는 ‘의지(行)’라고 조망한다. 무의식적인 단순 규칙이 의식적 사고 없이 놀랍도록 복잡한 시스템을 창출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복잡함이나 마음의 섬세함 등 모든 것(諸法)은 자기형성 체계에 따라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연기(緣起)’, ‘혼돈(Chaos·카오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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