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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발자국

일본 에모토 마사로 교수가 쓴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봅시다. 이 분은 한평생 온 세계, 각 지방 물만 연구한 사람입니다. 특별한 것은 물의 입자를 사진으로 찍고 현미경으로 확대했는데 근본입자가 에머랄드색의 꽃처름 아름답고 화려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앞에 놓고 ‘사랑한다 감사하다 고맙다’ 등 애정표현을 하면 파동이 전달되면서 물색이 예뻐지고 여기에 원망, 불평, 욕 등 화내고 미워하면 색깔이 당장 빨강색으로 깨지며 물이 사람 마음의 파동을 읽고 자체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내용입니다. 이 책에 보면 어느 도시 안에 있는 호수가 잘못 관리돼 물이 썩어 물고기가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호숫가 옆 큰 야외 음악당에서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감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행사가 있은 뒤 그 호수의 물이 살아나고 물고기가 살 수 있었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매체에서는 정수기 광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을 대할 때 어떤 마음을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물의 정수는 필터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됩니다. 물질적 가치보다 영적 가치가 더욱 귀한 것을 깨닫고 이기주의적인 삶에서 이타주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소중하고 육신적 가치보다 영적인 가치가 본질적으로 추구할 가치입니다. 이는 바로 내적인 자기 변화 없이는 외적 변화를 기대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종교인의 생활이 여기에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변하고, 소극적인 사고가 적극적인 사고로 변하며, 불평불만의 언어가 감사와 기쁨의 언어로 변하고 혐오감이 있는 행동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행동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내부의 정화작용입니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뀝니다.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와 같은 행동이 반복되면 그 행동에 따른 습관이 생깁니다. 한번 습관이 생기면 그 습관은 그 사람의 성격과 생활을 지배합니다. 적극적인 생각을 하면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면 끊임없이 비판적인 행동으로 살아가고 감사의 생각을 가지면 항상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불평불만의 생각을 가지고 보면 항상 불평불만할 것만 보이고 일생을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일본의 미우라 이야꼬 소설 <빙점>의 마지막 대목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어느날 우연히 자기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급기야 자신의 출생을 비관하며 삶의 의욕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추운 어느 겨울날 눈 덮인 언덕길을 오릅니다. 높은 언덕에 오른 주인공은 하얀 눈길 위에 남겨진 자신이 걸어온 지상에서의 마지막 발자국을 바라봅니다. 순간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분명히 자신은 똑바로 앞만 보고 걸어왔는데 눈길위에 남겨진 발자국은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며 찍혀 있었습니다. 자신의 모습과 상반되게 남겨진 발자국을 본 주인공은 그동안 어머니를 용서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며 걸어온 날을 돌아보면 비뚤어진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의롭다고 생각했던 날은 오히려 불의한 날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까지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아쉬움과 뉘우침이 앞섭니다. 교만과 시기와 질투와 게으름과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비뚤어지고 흐트러진 발자국을 남기면서도 마냥 자신이 걷는 길이 바르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전반기 6개월을 살아온 이즈음에 다시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며 새로운 다짐을 해봅시다. 더 사랑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삶의 발자국을 찍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남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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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22 23:02

나무의 지혜

근대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수도자였던 샤를 드 푸코는 1858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기에 그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면서 그는 신앙의 길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 장교가 되는데 상관의 명령에 따라 반란군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면서 그는 인생에 대해 큰 회의를 느낍니다.그는 학자로서 모로코를 탐험하던 중, 그곳의 이슬람교도들의 깊은 신앙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다시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리고 신앙을 다지게 됩니다.당시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아스로 들어가 1916년 12월 토착민이 쏜 총에 맞아 숨질 때까지 15년 동안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어느 날 푸코는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안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이었습니다.그는 신앙인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 또는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절대자를 믿으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쉽게 절대자를 믿는다고 말할지, 정말로 믿음이 있는지 돌아보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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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15 23:02

관행 속에 숨어 있는 거짓

한국 사회의 공직자가 갖춰야할 정직성이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종을 잡을 수 없는 요즘이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총리 후보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30여명의 후보군을 만들어 후보 검증 질의서 등을 바탕으로 검증작업에 들어갔으나, 검증 과정에서 자의나 타의로 후보군에서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걸 두고, 박대통령은 시대 요구에 부응하는 후보자를 찾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고 했다.공직자 청문회가 열릴 때면 논문 표절, 위장 전입, 세금 탈루, 등이 어김없이 단골 메뉴로 오르내린다. 김명수 교육부 장관 후보자도 오는 9일 청문회를 앞두고 있는데, 논문 표절, 논문 가로채기, 연구비 부당 수령 등의 정도가 상식 선을 넘었다며 강한 반대 여론에 부딪히고 있다. 그것도 국가의 교육 정책을 총괄해야하는 부처의 장관 후보자가 그렇다니 그걸 바라보는 뒷맛이 참으로 씁쓸하다.김명수 장관 후보자는 20년 이상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의 논문 표절과 가로채기에 피해를 입었다는 한 제자는 뒤늦게나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대학원 수업에서 학생들이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을 제3자가 자신의 논문 논지를 전개해 가는데 활용하고자 할 때에도 해당 학생에게 동의를 얻어내는 진지한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한 나로서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는 부적절한 논문쓰기가 관행적으로 만연하고 있었던가 보다.그 제자의 말대로, 논문 표절은 잘못이지만 계속해서 행해져온 것이어서 잘못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고치려고 나서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회악이다. 대중이 원하면 소를 잡아먹어도 된다가 아니라, 대중들의 암묵적 동의 속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져온 관행이 사회악을 만들어내고 만 것이다. 사설 학원의 강사라면 지식을 적당히 가공하고 전달하는 기능이 특화된 사람들이니 그들의 글쓰기와 강의가 대학의 교수와 같을 수 없다. 대학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집단을 형성해 새로운 이론과 개념, 논리를 찾아가는 곳이지 않은가. 그곳에서 일하는 교수는 창의성을 생명으로 삼는 논문쓰기 작업에다 연구와 교육이라는 숭고한 학문적 목표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자들이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겉으로는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은밀하게는 관행이라는 병풍 뒤에 숨어서 많은 학문적 비리와 비윤리적 행위를 버젓이 자행해왔다는 것이다.2006년 겨울, 한국 사회는 황우석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의 논문 조작으로 큰 홍역을 치뤘다. 모든 언론이 황 교수의 논문 조작을 앞 다투어 보도하는 바람에 그 뉴스에 노출된 국민들은 마냥 허탈해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많은 공직자들의 논문 조작, 표절 등의 의혹이 잊혀질 만하면 한 번씩 간간히 터져 나왔고, 여러 공직 후보자가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물러나거나, 직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낙마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과거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도 논문조작, 표절이 공직자 청문회의 단골 손님으로 여전히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석가모니 부처님이 왕사성 영취산을 떠나 쿠시나가라로 힘든 열반의 여정을 걷고 있을 때, 마을 주민이 부처님을 찾아와 왜 계를 지켜야하는가에 대해 물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스스로 비굴해지지 않고 떳떳해지기 위해서 계를 지켜야한다고 했다. 사람이 윤리적이고 대중적인 약속을 지키는 이유도 우선적으로 스스로 떳떳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논문 표절과 가로채기를 했다는 김장관 후보자는 그 동안 비굴함과 떳떳함 사이에서 어떤 갈등이 있었을까.9일로 예정된 김장관 후보자의 청문회를 앞두고 후보자 스스로 사퇴하라거나, 후보 추천을 철회하라거나, 청문회에 올려 새워 일벌백계의 정신으로 낱낱이 밝혀야한다는 목소리가 무성하다. 자진사퇴하고 나면 한국인의 조기 망각증에 편승해 또 다른 김 장관 후보자가 등장할 것 같아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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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08 23:02

고민은 인간답게 하는 것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인생을 종종 올림픽경기에 비유하고 했습니다. 경기장에 나가보면 거기에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는 것을 볼 것 입니다. 어쩌면 200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경기장은 똑같습니다. 그가 말한 네 가지 유형은 이렇습니다.첫째, 많은 날 동안 훈련을 쌓고 절제하고 수고하고 노력을 해서 경기장에 나와 최선을 다해 뛰고 면류관을 받는 사람입니다. 둘째, 오로지 관중을 상대로 물건을 팔러 다니는 장사하는 사람. 누가 경기를 하는지, 이기는지, 지는지 관심 밖입니다. 그저 관중을 상대로 물건을 팝니다. 이렇게 물건 파는 데에만 마음을 파는 장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선수들에게 갈채를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편이 이기면 정신없이 미친 듯이 갈채를 보내고 또 옆에 사람들 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긴 사람과 자기의 감정을 동일시하여 기뻐 날뜁니다. 넷째, 그냥 구경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이기든 누가 지든, 잘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그냥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생각 없는 동물보다 생각 있는 인간이 아름답습니다. 때로는 동물의 세계가 평화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생각이 없습니다. 고민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인간은 고민함으로 인간입니다. 내 영혼이 왜 이렇게 어둡지? 내 생각이 왜 이렇게 잘못 가고 있지? 내 영혼이 왜 이 모양이 되어 갈까? 내 영혼을 생각하며 고민하는 그런 실존적인 고민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아름다운 선물’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선교적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명을 지니고 산다는 것입니다. 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둘째, 명상가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명상은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과 정열을 쏟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습니다. 이게 명상입니다. 셋째, 보편적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의인이면서도 죄인 속에 살고, 선하면서도 악한 사람들 속에 보편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보편성, 여기에는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부자인지 가난한지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순성을 말합니다. 현대의학에서도 병은 복잡성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은 엄청난 병에 대한 저항력을 가집니다. 그런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분산되기 시작하면 힘이 약해집니다. 그러니 병마를 이기지 못합니다. 단순성, 사랑에 대하여 단순하고 믿음에 대하여 단순하고 생의 목적에 대해서 단순하고 사명감에 대해 철저하게, 집중적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주님께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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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24 23:02

사랑하는 아들

프랑스의 한 백만장자가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외아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행복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수많은 돈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그 백만장자도 시름시름 앓더니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갑작스러운 죽음이라 백만장자는 유언 한 마디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법에 의해 유언 없이 죽게 되면 모든 재산은 국고에 들어가게 돼 있었습니다. 열 살도 채 안 된 아들은 순식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언이 하나도 없었기에 경찰에서는 그의 재산을 모조리 공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싸고 좋은 것들이 빠른 시간에 팔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부동산은 아직 팔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안 팔리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어린 아들이 갓난 아이 때 찍은 초라한 사진 액자였습니다.드디어 그 사진 액자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그 집에서 일하던 하인 ‘브라운’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를 데려다가 기를 생각을 하고 아이에게 기념이 될 만한 사진을 구입한 것입니다.액자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유리를 닦으려고 사진을 꺼내는 순간 하인의 눈은 휘둥그레졌습니다. 사진 액자 속에는 백만장자가 남긴 유서가 들어 있었습니다.“이 사진은 내 사랑하는 아들의 것이니 이 사진을 사가는 사람에게 나의 전 재산을 상속하겠다.”백만장자는 유서에다 아들의 사진을 사가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사랑하는 아들을 훌륭하게 길러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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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17 23:02

어떤 환경에도

인생에는 때로는 순경도 있고, 또 때로는 역경도 있습니다. 마치 바다를 항해할 때때로는 순풍이 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역풍이 부는 것과 같습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바라고 뜻하는 대로 일이 순적하게 풀려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바라는 것 이상으로 일이 너무 잘 풀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바라고 뜻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심할 경우 예상치 못한 커다란 시련이 닥쳐서 인생 자체를 지탱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역경을 만났을 때 보이는 태도가 저마다 다릅니다. 폴 스톨츠(Paul Stoltz)라는 분이 ‘역경지수, 장애물을 기회로 전환시키라’는 책을 썼습니다. 등산할 때 보이는 태도를 비유로 해서 세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첫째가 퀴터(Quitter)형입니다. 퀴터란 포기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등산하다가 정복하기 힘든 산이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경을 만나면 그만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둘째가 캠퍼(Camper)형입니다. 캠퍼란 캠프치고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등산하다 힘든 코스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 자리 펴고 고기나 구워먹고 놀고 쉬고 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경을 만나면 극복할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안주해 버리고 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셋째가 클라이머(Climber)형입니다. 클라이머란 산을 정복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등산하다가 아무리 힘겨운 산이 나타나더라도 결국 정복하고 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역경을 만나면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서 결국은 극복해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에 5만에서 6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생각을 하는데 그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관리하지 않고 그냥 놓아두면, 누구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므로 마음에 좋은 생각을 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의 씨앗을 심을 때 우리 삶은 행복하고 복된 현실로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것입니다.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 흑인 해방 운동가이자 비폭력 인권운동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흑인 침례교 목사로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인권운동을 이끌어 1963년 워싱턴에서 대규모 평화행진을 통해 비폭력적인 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이제 절망의 계곡에서 뒹굴지 맙시다. 고난과 좌절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삼고 살아가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 있습니다”고 외쳤습니다. 미래를 현재 마음에 심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외친지 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현재 미국의 대통령은 흑인인 버락 오바마인 것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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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10 23:02

호국보훈과 추원보본

6월이 시작되었다. 오월이 가정의 달이라면 유월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며 감사하는 추모의 달이다. 예로부터 24절기 중 망종(芒種) 무렵 보리가 익고 벼를 심는 즈음에 조상에 감사의 제사를 올린 것에 유래하여 6·25사변 이후인 1956년부터 현충일(顯忠日)을 제정하였다 한다.5000년 역사에서 한반도는 수많은 외침을 받았고 삼국시대 이후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왜란, 호란이라 칭하는 해양과 대륙의 외침을 이겨냈다. 침략군에 맞서는 정규군인 관군도 있었지만 민군(民軍)의 활약도 대단했다. 백성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고 외적을 물리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어났던 의병(義兵)과 전통적으로 부처님은 불살생을 가르치지만 한국의 불교는 호국불교로 임진왜란시 휴정 유정 등 많은 승병(僧兵)의 활약이 있었다.근세와 현대를 가름하는 중요한 사건을 들자면 동학농민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반침략의 기치 하에 조선 봉건 사회 해체기의 문제를 변혁하려 했던 농민의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강제합방, 1차세계대전, 볼세비키혁명, 2차세계대전, 일본패망, 광복절, 6·25, 남북분단으로 현대사가 이어졌다. 신분제 차별이 실존했던 조선왕조 500년을 해체하는 일대 사건이었던 갑오년 동학혁명이후 120년이 지난 시간 속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생명이 있었다. 정부에서는 일제강점기 이후 국가의 독립과 자유민주적 질서유지에 헌신한 사람을 국가유공자로 하여 보훈의 도를 다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행복과 번영은 수많은 선열이 목숨을 바쳐 이룩한 결실이다. 원불교 2대 종법사를 역임한 정산 송규(宋圭) 종사는 6·25 전쟁을 “과거 반상(班常, 양반과 상놈)시대에 맺혔던 원진이 터진 것”으로 보았다. 그는 남북의 분단과 통일을 깨달음의 통찰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업연(業緣)으로 막힌 것이니, (통일은) 그 업이 다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미운사람이 없어져야 될 것이며 마음에 척(隻)이 쌓여서는 안된다.“6월1일은 원불교를 만든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 대종사가 열반한 날이다. 원불교에서는 이날 익산 중앙총부와 전국 500여개 교당·기관에서 대종사를 비롯한 불교 유교 기독교, 선교 등 인류 선성(先聖)들과 원불교 역대 지도자, 선조들의 영령 그리고 국가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 등 일체생령을 추모하는 육일대재 향례(香禮)를 올린다. 대재(大齋)의 의미는 선조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보이지 않는 허공법계의 기운을 정화하는 것이다. 과거시대 이루어진 반상, 적서(嫡庶), 노소(老少), 남녀(男女), 종족(種族)의 차별로 인해 침해당한 인권을 해원(解寃)시켜 주고 동학농민의 넋과 좌우 이념대립으로 무너진 생명들, 남북전쟁 중 스러진 민초의 한(恨)을 어루만져 위로함이다.호국보훈(護國報勳)과 추원보본(追遠報本)의 6월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위훈을 기리고 이 땅에서 이슬처럼 사라져간 수많은 목숨을 추모하는 육일대재를 통해 모든 사람이 남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며, 척지지 않고 은혜를 베풀면서 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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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03 23:02

가장 중요한 복

90세가 넘은 할머니가 전화를 거는 건지, 수화기를 들고 쪽지에 적힌 번호를 수시로 봐가며 버튼을 하나하나 누르셨습니다. 그런데 버튼을 너무 늦게 눌렀는지 전화기에선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다이얼이 늦었으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주십시오.” 그러자 연세 많은 할머니가 애처롭게 말했습니다. “에고, 그러지 말고 좀 연결해 주구려. 늙은이가 빨리 못 눌러서 그래. 좀 연결해 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기독교에는 두 개의 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성의 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비의 선입니다. 이 말은 기독교는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를 수 없는 신비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독교는 한 손에는 성경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잡는다고 말합니다. 성경만 잡는다고 올바른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신문을 쥘 때에 바른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기독교는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성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또 기독교는 신비적이어야 합니다. 이 신비가 없으면 기독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비에 치우쳐서도 안 됩니다. 무게 중심이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서는 안 되고 균형을 잘 잡아 나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이성에 치우치게 되면 신앙이 없는 합리론자가 되고 맙니다. 신앙인이 아닌 것입니다. 또 신비에 치우치면 겉으로는 대단한 신앙인 같지만 이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신비주의자일 뿐입니다. 바른 기독교는 신비를 놓쳐서도 안 되고 이성을 놓쳐서도 안 됩니다.1600년대에 화가 카라즈호바가 그린 ‘성 마태를 부르심’이라는 제목의 성화(聖畵)가 있습니다. 마태는 본래 세리였습니다. 유대 세관에 세리들이 주욱 앉아 있는데, 예수님이 가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 곁에는 베드로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카라즈호바가 그린 베드로의 몰골이 아주 형편없습니다. 베드로의 옷매무새를 보면 그 가난한 달동네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 수 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고 몰골도 초라한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너라’하시는데, 그 세관에 앉아 있는 여러 사람들 중 누구도 예수님을 거들떠도 안 봅니다. 자기 일만 합니다. 그런데 마태만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오는 그림입니다. 그 그림은 하나님께서 마태 한 사람만 찾아가서 귓속말로 ‘너 따라올래?’하신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선포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라가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듣는다고 해서 다 따라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창세기 12장 4절 말씀에서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간 것이 아니라 삼촌을 좇아갔습니다.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복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는데 귀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이 말씀은 신체의 일부인 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를 입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 한 개인만 불러 놓고 ‘내가 너를 복의 근원 시켜 줄 테니 따라와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도 분명히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만이 그 말씀을 듣는 복된 귀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복은 ‘귀로만’듣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인생은 바뀌고, 우리로 인해서 세상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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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27 23:02

가끔 후회와 아주 가끔 만족

독일에서 문화심리학을 전공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잘놀아야 성공한다’는 지론을 펼치는 김정운 교수의 도발적인 책제목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이다. 제목만을 보면 남편으로서 무척 이기적인 것 같지만 원래의 제목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가끔) 후회한다’이다. 결혼한 50대 이상 한국 남성으로서 아내 없이 가정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다. 아내가 없으면 남편들은 육아와 가사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지 않은 원죄로 아이들과 소통이 되지 않고 밥하고 세탁기 돌리는 것 등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압축경제성장을 만들고 권위와 독재에서의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과정에서 386세대는 오로지 직장과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해야 했다. 야근과 주말근무를 불사하며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다.반면 아내는 생활전선에도 뛰어들어 직장도 다녀야 하고 육아와 집안 살림도 담당해야 한다. 따라서 안팎으로 단련이 되어져 경제력과 살림살이 모두에 능한 커리어우먼(career woman)으로 키워진다. 이렇게 가사와 경제력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게된 아내들은 남편과의 결혼을 만족한단다. 아주 가끔만. 아내들은 이제 남편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남편이 가끔씩 늦게 들어오고 출장을 가면 밥 챙겨주고 옷 챙겨주는 수고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느낀다고 한다. 바퀴벌레 한 마리도 어떻게 하지 못하던 여자에서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무서운 것이 없어진다. IMF 금융위기때도 아줌마들이 금 모으기를 해서 환란을 극복했고 어려운 살림에도 좀도리 쌀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도운게 이땅의 선배 아내들이다. 돌아오는 5월21일은 부부의 날이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어 건전한 가족문화의 정착과 가족해체 예방을 위한 여성가족부 주관 정부 기념일인 것이다. 부부란 말 그대로 부(婦)와 부(夫)가 동등하게 만나고 동등한 의무와 동등한 책임을 이행하는 공동체이다. 부부는 무촌이다. 촌수가 없다. 가깝다면 아주 가깝고 멀어지면 아주 남이 된다. 자녀와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자녀는 천륜이라면 부부는 천생연분이다. 자녀는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고 부부는 일천번의 많은 생(生)을 통해서 이어진 만남이 이번 생에 배필로 결정지어진 것이다. 50대 이전의 세대에서는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당연한 전통이었지만 정작 당신들은 자녀들과 함께 사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고 한다. 자녀들과 함께 사는 것보다 부부만 독립적으로 살길 원하는 것이다. 자녀들도 부모를 부양하는 책임을 떠맡으려 하지 않는 풍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함께 사는 부부중심생활로 정리가 된다. 따라서 부부관계가 좋으면 행복할 것이고 서로의 관계가 소원하면 힘들게 된다. 평균 수명을 80으로 보았을 때 앞으로 30년은 부부끼리 알콩달콩 살아야 한다. 원불교 3대 종법사를 역임한 대산종사는 부부(夫婦)의 도(道)를 강조한다. 첫째는 “서로 오래 갈수록 공경심을 놓지 말 것이요”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간에 인격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라는 당부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가까우니까 함부로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말고 손님 대하듯 조심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둘째는 “서로 가까운 두 사이부터 신용을 잃지 말 것이요”다. 신용은 신뢰이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삶의 방향을 놓치게 된다. 믿음은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으로 부부로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배가 행복의 목적지로 항해하는 데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한다. 셋째는 “서로 근검하여 자력을 세울것이요” 다. 여기서의 자력은 정신의 자주력, 육신의 자활력, 경제의 자립력을 말한다. 정신과 육신과 경제의 자력을 세우면 부부끼리 100세 상수할 수 있다. 가끔 ‘후회’와 아주 가끔 ‘만족’의 차이를 줄이고 ‘부부금슬’을 높이는 뜻깊은 부부의 날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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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20 23:02

"두 손이 있음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중반에 있었던 일화입니다. 월남에서 부상을 당해 미국으로 돌아온 상이용사들을 위해서 미국은 대대적인 위문공연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프로그램의 총감독은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보브 호프(Bob Hope)를 이 공연에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바쁜 데다 선약이 있어서 도저히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보브 호프가 없는 위문 공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감독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중요한 자리에 당신이 꼭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며 여러 번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감독의 끈질긴 부탁에 보브 호프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5분 정도만 얼굴을 보이고 내려와도 괜찮겠습니까? 감독은 그렇게만 해줘도 고맙겠습니다라고 말해 보브 호프는 그 위문 공연에 출연하기로 약속했습니다.드디어 공연 당일, 5분을 약속하고 무대에 올라간 보브 호프가 말을 끄집어내자마자 사람들은 웃기 시작했습니다. 금방 5분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록 뜨거운 열기 속에서 계속 공연을 했습니다. 보브 호프는 무려 40분 동안이나 공연을 하고 내려왔는데 그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감독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5분만 공연하기로 해놓고 40분 동안이나 무대 위에 있었습니까? 그리고 눈물을 흘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보브 호프는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앞줄에 앉아 있는 두 친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나가보니까 앞줄 휠체어에 앉아 있는 상이군인 두 사람이 열심히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오른팔을 잃었고, 또 한 사람은 왼팔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른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왼팔로, 왼팔을 잃어버린 사람은 오른팔로 상대방의 손바닥을 치며 박수를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보브 호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두 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이 이야기는 슬픔 많고 고통 많은 세상에서 서로의 불행을 이해하고 돕는 모습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고달파도 그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할 때 사람은 능력을 발휘하고 그 속에서 특별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 귀한 은총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유는 있습니다. 내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세상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변명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짧은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충북 음성의 꽃동네에 가면 육신의 장애를 입은 자들과 연약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가면 조금만 움직일 수 있어도 자신보다 더 중한 환자들을 돌보며 그들의 고통을 나눕니다. 괴로움도 나누고, 눈물도 나눕니다. 모든 슬픔을 나누어 가집니다. 그래서 꽃동네에는 질병이 있고 뒤틀림은 있지만 탄식이 없습니다.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아픔을 이해하고 서로 돕는 자리가 곧 작은 천국입니다. 어디에서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순간 그곳은 천국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두 손이 있습니다. 이 손은 서로를 감싸주고, 도와주고, 쓰다듬는 손입니다. 결코 싸우고, 빼앗으라고 있는 손이 아닙니다.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상처를 어루만지고, 사랑하라는 손입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두 손이 있음은 사랑할 기회라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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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5.13 23:02

사랑으로 짓는 행복의 집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한 번은 남편이 옷가게에 가서 모처럼 좋은 바지를 사왔습니다. 그런데 바지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아내에게 부탁을 했습니다.“여보, 수고스럽겠지만 바지 길이를 이만큼만 줄여 주시오.”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바지를 줄이려고 하는데 자꾸 졸음이 왔습니다. 집안 살림을 하느라고 너무 피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지를 펼쳐놓은 채 드러누워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이때 시어머니가 들어와서 그 모습을 보고 애처롭게 여기며 바지를 살짝 줄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시누이가 그 모습을 보고서 똑같은 마음으로 바지의 길이를 줄여 놓았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난 이 아내는 아무 것도 모르고 또 바지를 줄여버렸습니다. 결국 그 남편의 새 바지는 반바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우습고 재미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가정을 불행하다고 말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멀쩡한 바지가 반바지로 변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나된 가정은 절대 불행이 없는 법입니다. 실수는 있고, 실패는 있을지라도 불행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집안에 쌀은 떨어져도 사랑하는 마음이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돈이 바닥나고, 물질이 없어져도 맨 마지막까지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오직 사랑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자동차의 황제’ 헨리 포드는 무척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동차 산업으로 거부가 된 뒤에 고향 땅에 작은 주택 한 채를 지었습니다. 이 때 친구가 방문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만장자의 집치고는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이 말에 헨리 포드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건물이 문제가 아닐세. 그 속에 사랑이 있으면 위대한 가정이고, 만약 사랑이 없다면 석조로 지은 대저택도 금방 무너질 것일세.”그렇습니다. 행복의 집은 눈에 보이는 외형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집을 지을 때 사랑을 재료로 사용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초라해도 그 집이 사랑으로 지어졌다면 그 사는 곳이 곧 작은 천국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호화롭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 해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거기에는 집만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돈을 모으고, 새 집을 마련합니다. 보다 좋은 차, 좋은 환경, 좋은 음식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집은 이런 것으로 짓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짓지 못하고, 권세로 짓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의 집은 천 년, 만 년의 세월이 지나도 오직 사랑으로만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다 한길로 치달으며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고 노래한다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들은 이에 미혹 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허상이요, 속임수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집이 있고 그 안에 침대가 있다고 가정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방안에 웃음이 있고, 식구의 얼굴에 평화가 있어야 가정입니다. 밥 먹고 잠자는 장소가 모두 가정은 아닙니다. 아플 때 싸매 주고, 슬플 때 그 슬픔을 나누어 가지는 곳이 가정입니다. 정다운 대화가 있고 노래가 있으며 따스한 마음이 있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곳, 그곳이 가정입니다. 행복의 집을 완성하기 위해서 날마다 사랑을 나누고 여러분의 집 대문에 ‘행복의 집’이란 문패를 달아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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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9 23:02

부활, 깨달음, 탄생 그리고 제의의 봄

오는 4월 28일은 원불교 교조인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날이면서 원불교 생일이다. 원불교의 4가지 축제와 2번의 재사인 사축이재(四祝二齋) 중 가장 큰 경절이 바로 대각개교절이다. 소태산은 26세 젊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고 홀로 기쁘고 자신감이 충만해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인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다고 선언했다. 소태산은 자신의 대각(大覺)과 기존 성현의 깨달음을 대조해 보려고 각 종교의 대표 경전인 유교 사서, 불교 금강경, 선교 음부경, 동학 동경대전, 기독교 구약 신약 등을 열람한 뒤 새로운 가르침을 펼 때에 불법을 주체로 기존의 모든 교법도 통합 활용하여 원만한 종교를 만들고자 하였다. 부활절은 예수님의 다시 나심을 기념하는 날이다. 서양에서 온 종교이기에 양력을 많이 쓰지만 부활절은 음력을 기조로 해마다 날짜가 바뀐다. 올해 부활절은 춘분 뒤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인 지난 20일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매우 컸다. 교육, 의료, 복지 등 국가가 힘이 약해 채우지 못한 빈자리를 훌륭하게 개척하고 열어주었다. 그 이면에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의미를 반추하며 빛과 소금으로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잃지 않았기에 오늘날 가장 권위있고 큰 교회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음력 4월8일은 부처님 오신날이다. 불기 2558년 부처님 오신날은 양력으로 5월6일이다. 금강경에 보면 석가모니가 전생에 수 천억 명의 모든 부처님을 다 받들어 섬겨서 한 분도 빼놓은 일이 없었다는 법문이 있다. 평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부처님은 뻥도 세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받들었을까하는 의아심을 내었다. 그러나 실제 부처님 오신날이 되면 신실(信實)한 불자를 비롯해 불심이 없는 사람도 1년에 한 번 사찰에 와서 연등을 켠다. 불교에 의지해서 생업을 유지하는 사람도, 불교에 근원한 원불교 교도뿐아니라 이웃 종교인도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하는 것을 보면 전생에 부처님에게 떡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말이다.5월11일은 춘기 석전대제(釋奠大祭)날이다. 석전대제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큰 제사를 가리키며, 예법과 음악이 존중되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85호 의례이다. 순창향교에서는 봄과 가을에 두 번 대제를 모신다. 이땅의 유림은 이 의식을 통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마음과 어려운 이웃을 돕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 미풍양속을 권장해 왔다. 현대에 와서 삶의 형태는 달라졌어도 인륜을 중시하고 윗어른을 공경하는 유가의 가르침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묘제례인 석존대제는 생활전통문화유산으로 길이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의 큰 경절과 기념일이 45월에 집중돼 있다. 부활절, 대각개교절, 부처님오신날, 석전대제를 통해 이 땅의 성현이 다시 살아나고 깨달음을 얻고 탄생하고 끼친 뜻을 받들어 드리고 있다. 순창지역 종교인들의 모임인 순창종교인협의회에서는 각 종교의 경절인 부활절, 대각개교절 부처님오신날, 석존대제를 축하하는 현수막을 걸고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있다. 내 종교의 경절도 축하해야 하지만 이웃 종교의 경절을 챙겨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대종사님이 우리 모두의 스승님이고 인류가 받들어야할 소중한 정신적 자산으로 영원히 자리매김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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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2 23:02

내가 약할때에

동화작가 정채봉 씨의 글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라는 글이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젊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날기 시험에서 낙방한 독수리, 벗으로부터 따돌림 받은 독수리, 위 독수리로부터 할큄 당한 독수리.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는 없을 것이라고들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는데 금방 의견이 일치했습니다.이 때, 망루에서 파수를 보고 있던 독수리 중의 영웅이 쏜살같이 내려와서 이들 앞에 섰습니다. ‘왜 자살하고자 하느냐?’ 물었습니다. ‘괴로워서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요.’ 이들이 답합니다.영웅 독수리가 말합니다. ‘나는 어떤가? 상처 하나 없을 것 같아? 이 몸을 봐라!’ 영웅 독수리가 날개를 펴자 여기저기 빗금진 상흔이 나타났습니다. ‘이건 날기 시험 때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위 독수리가 할퀸 자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빗금 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다.’ 영웅 독수리가 또 말했습니다.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보통 독수리와 영웅 독수리의 차이는 상처를 보는 눈의 차이였습니다. 영웅 독수리는 상처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상처 속에 감춰진 축복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많은 상처 덕분에 하늘을 높이 나는 영웅 독수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사람들은 아름답게 화장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었지만, 그 아래 감춰진 상처는 영웅 독수리의 날개 아래 감춰진 상흔과 같습니다. 거기에다가 드러나지 않은 마음의 상처야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아픔일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많이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오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상흔을 더욱 많이 남긴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한 인간의 위대함은 상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큰 상처를 견디어 내었느냐로 평가됩니다. 역경 중에도 포기하지 않은 집념으로 측정됩니다. 시련을 기회로 삼고 상처를 진주로 만든 삶의 지혜 속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상처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상처를 치유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는 몇 가지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합니다.첫째, 낙심하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나약함을 보임이니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쉽게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때 베드로는 흥분해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리고 말았는데 이 때 주님은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성령께서 반드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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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15 23:02

고슴도치의 사랑

고슴도치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슴도치들은 사랑하는 짝을 발견하기까지 별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런 갈등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짝을 만나서 가까이 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짝에게 접근할수록 가시에 찔리는 아픔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전혀 문제가 없는데 가까이 가니까 아픔이 생기는 것입니다. 부부의 갈등도 이와 똑같습니다. 각자 홀로 살아갈 때에는 부부로서 겪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되고, 사랑하기 때문에 가까이 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갈등이 생깁니다. 부부가 진정한 의미의 연합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갈등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갈등이야말로 부부가 연합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며 참 행복으로 안내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갈등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하나 되는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갈등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 갈등을 직시하고 싸워야 합니다. 단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생산적이며 건전하게 싸우는 지혜를 동원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항상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온유한 마음과 유순한 대답입니다. 분노를 다스릴 능력과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삶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신앙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건설적인 싸움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에 부부 싸움을 건전하게 하는 방법이 있어 소개해 봅니다.1. 그 날의 문제와 하나의 주제만을 가지고 싸운다.2. 싸움을 하되 장외 경기는 금한다.3. 인격을 모독하는 무차별 공격을 하지 않는다.4. 싸운 뒤에 분방하거나 침묵 작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5. 고함을 지르거나 욕설을 하지 않는다.6. 다른 사람을 개입시키지 않는다.7. 절대로 폭력을 쓰지 않는다.8. 자녀들 앞에서 싸우지 않고, 싸울 때도 적절한 장소를 택한다.9. 승부에 관계없이 속전속결로 끝낸다.10.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기꺼이 용서한다. 이렇게만 싸운다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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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8 23:02

믿음의 본질

금이 간 항아리라는 우화를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물지게에 각각 항아리 하나씩을 매달고 물을 날랐습니다. 오른쪽 항아리는 온전했지만, 왼쪽 항아리는 금이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물을 받아서 집으로 오면 오른쪽 항아리에 물이 차 있었으나, 왼쪽 항아리에는 물이 반 정도 비어 있었습니다. 금이 간 왼쪽 항아리는 주인님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주인님에게 일을 두 번 시키는 것처럼 보여 너무 미안한 나머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주인님 제가 도저히 송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금이 간 항아리입니다. 저를 버리시고 좋은 항아리, 금이 안 간 깨끗한 항아리를 새로 사서 사용하세요.그러자 주인이 금이 간 항아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도 네가 금이 간 거 알고 있어. 그러나 나는 항아리를 바꿀 마음이 전혀 없단다. 우리가 물을 나르기 위해 지나온 길을 한 번 보렴. 금이 가지 않은 항아리가 있는 오른쪽은 아무런 생물도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가 됐구나. 하지만 네가 지나왔던 왼쪽을 한 번 봐라. 네가 반쯤 금이 가서 물을 흘린 자리 위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있지 않니? 금이 간 네 모습 때문에 많은 생명이 풍성하고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지 않니? 그러니 너를 어떻게 버릴 수 있겠니?우리 인생이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한 사람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조금 금이 간 자, 부족한 자를 통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금이 가지 않으니까 생명이 없었습니다. 금이 가서 좀 새는 모습이 있어야 생명이 자라게 됩니다.깨끗하고 금이 안 간 항아리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명문대 나오고 금이 간 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 완벽했습니다. 그러자 자식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2등을 했는데도 그것도 성적이냐라고 하면서 욕을 합니다. 1등을 해도 욕을 합니다. 전교 1등을 해야지, 반에서 1등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가 바싹바싹 마릅니다. 자신의 완전함을 주장하면서 남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삶이 아니라 금이 간 항아리의 심정으로 겸손하게 삶을 살아야 합니다.기독교 신앙은 의지와의 싸움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우리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우리 가운데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무줄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무줄은 잡아당기고 있는 동안에는 늘어나지만 손을 놓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은 외부적인 압력과 강요를 당하고 있는 동안에는 잠시 달라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외부적인 간섭이 떠나가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다가가서 너희도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 부탁을 했는데, 3번 다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이 그만 쉬고 자라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졌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너희가 깨어서 기도하라는 잔소리로 제자들이 깨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셨습니다. 욕망의 부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은 부정적으로 안 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으로 무엇을 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억지가 아닌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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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1 23:02

동행자

이전에 비해 요즘은 비행기를 많이 탑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몇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먼저 탑승 예약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약속한 날짜에 공항에 나가서 탑승절차를 밟은 후 출구로 나갑니다. 시간에 맞추어 비행기에 탑승합니다. 비행기에 탑승하면 곧바로 자신의 지정된 좌석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작은 가방을 선반 위에 넣고 좌석에 앉습니다. 그 때 자연스럽게 동행자가 정해집니다. 옆에는 뚱뚱한 남자가 앉을 수도 있고, 날씬한 미인이 앉을 수도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동행자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 자리가 정해지면 동행자가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목적지까지 내내 같이 가야 합니다.저는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우리에게 삶의 자리를 정해주십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 옆에 동행자들을 붙여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내 곁에 배우자가 있고, 자식이 있습니다. 친구가 있고,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이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붙여주신 동행자들입니다. 인생의 여행길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우리와 동행하도록 짝지어주신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들처럼 고마운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들이 있기에 나그네 인생이 외롭지 않고, 이들이 있기에 고달픈 인생이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인생의 풍파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동행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 곁에 있는 동행자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모릅니다.그러나 나의 곁에는 항상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생을 살다보면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데 이 동행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외로울 때 위로해 주고, 우울할 때 기쁨을 줄 수 있는 동행자가 좋은 것이지, 철저하게 악역을 맡고 사는 사람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때때로 나의 교만과 모난 성질을 고치기 위해서 그들을 붙여주십니다. 못된 남편, 못된 아내, 못된 시어머니, 못된 며느리를 만나게 하십니다. 가까운 사람 중에 늘 고통을 주는 동행자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없이 눈물을 흘리며 살아왔습니다. 아직도 그 아픔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고, 그로 인해 다듬어진 내가 있다면 이것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미련함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미련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항상 앞서 보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내 곁에 있는 동행자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동행자의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아주고, 격려하십시오. 위로해주고, 용기를 주십시오. 후회 없는 사랑을 하십시오. 잠시 후면 당신이나 동행자나 짧은 나그네 인생길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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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5 23:02

최후 순간에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작가인 볼테르(1694~1778)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글을 많이 썼고 “100년만 지나면 하나님을 믿는 따위의 미신은 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100년 안에 성경도 사라진다.” 연설을 했습니다. 불신앙에 빠진 프랑스 시민들은 신론 연설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렇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나를 이 자리에서 쓰러뜨려 보십시오!” 그렇지만 그도 나이의 벽을 뚫지 못했습니다. 점점 노인이 되어 갔고 결국 병들어 죽음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사에게 간절히 부탁하기를 “선생님, 만약 내 생명을 6개월만 연장시켜 주신다면 전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그 때 의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볼테르 선생님, 선생님의 생명은 6개월은 고사하고 이제 6시간도 연장 시킬 수 없습니다.” 원기 왕성할 때 확신에 찼던 무신론은 의사의 선고에 의해 흔들려 “아! 나는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구나.”하고 죽었습니다.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복’이라는 양들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풀을 뜯어 먹으면서 평화롭게 행렬을 이루지만 앞쪽에 양들이 풀을 뜯어 먹어버리면 뒤따르는 양들이 풀을 차지하기 위하여 앞 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양들의 대열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뒤쪽의 양들이 속력을 내어 앞으로 달려오므로 앞쪽은 선두를 지키기 위해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모든 양떼가 전속력으로 앞으로 달리다가 달려가는 힘에 의해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린답니다.스프링복이라는 양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대하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에 잠겨 봅니다. 나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삶이 아니었던가. 모두가 과속으로 달려만 가고 있습니다. 사고의 위험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음미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이 있습니다. 양보가 없습니다. 서로를 바라다 볼 시간이 없습니다. 생수를 옆에다 놓고도 모두가 목말라 죽을 것 같다고 아우성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아귀다툼으로 달려가지만 결국은 모두가 낭떠러지로 굴러야하는 인생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봅니다. 그런데 더더욱 신기한 것은 그런 모습이 내 자신이 아닐까요? 오늘은 전 속력을 다해 달리던 시간 잠깐 멈춤으로 내 열손가락으로 움켜잡았던 것 잠시나마 내려놓고 펼쳐진 열손가락으로 이웃을 돌아보면 어떨까요?신앙이란 인색함을 깨는 작업입니다. 재물은 쌓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드리고 나누고 베풀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나누는 것이 모으는 것이고, 그렇게 나눈 재물만이 천국과 영원까지 메아리칩니다. 이제 움켜쥔 손을 펴십시오. 그러면 신기한 일이 생깁니다. 움켜쥔 손을 펼 때, 마음도 펴지고, 가슴도 펴지고, 얼굴도 펴진다는 것입니다.계산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계산은 행복을 뺏습니다. 더 나아가 계산은 결정적인 때에 너무 무력합니다. 큰 병에 걸리면 그 때 계산적인 삶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습니다. 삶에서 유형적인 것보다 무형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유형적인 것은 덤입니다. 덤은 없어져도 좋지만 믿음은 끝까지 남아야 합니다. 최후의 순간에 남는 것도 믿음밖에 없습니다. 죽어서 천국까지 유효한 것도 믿음으로 심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과 거룩한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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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8 23:02

"사랑이 없으면"

진공청소기를 판매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일주일간 판매원 훈련을 받은 이 남편이 자기가 훈련받은 것을 먼저 부인에게 실습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부인을 앉혀 놓고 청소기의 좋은 점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하고 물었습니다. 살 마음이 생깁니까?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네. 사고 싶군요. 이 때 남편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떤 이유로 내가 선전한 기계를 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러자 부인이 얼른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데 이 정도 기계 하나 못 사 주겠소? 대화의 핵심을 비껴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랑 가득한 부인의 말에 입이 벌어지지 않을 남편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된 행위는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어디에서나 작은 천국을 이루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어떠한 행위도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눈에 보이는 외양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봉사를 많이 하고, 구제하는 일에 힘씁니다. 잘 다듬어진 기도로 감동을 주려 합니다. 그것이 훌륭한 교인을 만드는 것으로 단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말과 행동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처음부터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남자를 지으시고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를 취해서 만드셨습니다. 여기에는 서로 사랑하되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깊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 여인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구나! 얼마나 사랑스러우면 이토록 눈물겨운(?) 사랑의 고백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미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삶은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부부 생활이 그렇고, 교회 생활도 그러하며, 사회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을 기초로 해야 하며, 그 사랑 위에 행복을 창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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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1 23:02

태도는 사실보다 중요하다

19세기는 자유를 위해 온 세계가 투쟁하던 시기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미국 노예 해방, 아프리카 자유해방 등 해방의 사건들이 19세기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20세기는 자유를 찾고 나니 한 걸음 더 나가서 평등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양반과 상놈의 계급이 사라졌습니다. 양성평등을 가장 많이 부르짖은 시기입니다.21세기는 행복의 시기입니다. 온 세계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쓰여 지고 있습니다. 지난 20년간 가장 많이 발달한 학문이 ‘행복학’입니다. 행복학자 데이비드 마이어 박사는 “행복은 주관적인 자기 만족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많이 가지고, 높이 올라갔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은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영국 행복 연구소에서 세계 150국가 국민들의 행복도를 조사하였더니 온 세계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는 나라가 방글라데시였습니다. 가장 어려운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그런데도 세계에서 가장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34위였습니다. 태평양을 끼고 사는 나라 18국가 가운데 가장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행복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적 만족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불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게 가지고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가고 불행한 사람이 있고, 낮게 살면서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영국의 유명한 성경 주석가요, 설교자였던 매튜 헨리(Matthew Henry) 목사가 있습니다. 하루는 이분이 지방으로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다가 강도를 만나 물건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고, 옷이 찢긴 채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치료를 받고 강당에 선 매튜 헨리 목사는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는 이곳으로 집회를 인도하러 오던 중 강도를 만나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첫째,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고 이제야 이런 일이 생긴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둘째, 돈과 물건만 빼앗기고 생명은 빼앗기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셋째, 많은 것을 잃었으나 모든 것을 잃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넷째, 내가 강도가 아니고, 강도 당한 자임에 감사드립니다.”말씀을 전하러 가다가 강도를 만난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지만 매튜 헨리 목사는 항상 감사를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인생을 사느냐입니다. 같은 문제라도 어떤 시각을 가지고 삶을 보느냐입니다. ‘태도는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보다는 그 사실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어떤 고난이냐는 사실보다는 그 고난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이 없기를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고난을 바르게 대할 수 있는 태도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를 없애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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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04 23:02

공수래 공수거 인생

여우 한 마리가 길을 가다가 포도원을 발견했습니다. 포도원 울타리 사이로 포도 열매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데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 침을 꿀꺽 꿀꺽 삼키며 포도원 안으로 들어갈 방도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울타리를 빙 돌아보아도 조그마한 구멍밖에 찾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구멍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살찐 몸통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영리한 여우가 기발한 생각을 했습니다. “옳지, 금식을 하면 되겠구나.” 여우는 그 자리에서 3일을 쫄딱 굶었습니다. 그리고서 머리를 쑥 밀어 넣으니까 날씬해진 몸이 쏙 들어갔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배고픈 김에 3일 밤낮을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그 후 통통해진 배를 두드리며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 하는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울타리의 작은 구멍에 머리를 밀어 넣어보니까 이번에도 몸통이 걸려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떡합니까? 여우는 억울하지만 또 다시 3일을 굶어야 했습니다. 그 후 홀쭉해진 몸으로 겨우 포도원을 빠져 나온 여우가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아이고,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배고프기는 마찬가지구나!”우리의 인생살이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가는’ 인생들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그 무엇인가를 움켜쥐어 보겠다고 주먹을 꽉 쥐고 나오지만, 떠날 때는 모두 돌려주고서 두 손 펴고 돌아갑니다. 이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만 잠깐 빌려쓰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의 삶을 다하고 돌아갈 때에는 남김없이 돌려주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은 뒤에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 두 손 펴고 돌아가는 것입니다.알렉산더 대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세계를 제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 있을 때 그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죽거든 나의 시신이 들어갈 관 양쪽에다가 구멍을 뚫어라. 그리고 나의 손을 그 구멍에 내어놓고 장례식을 치러라.” 천하를 호령하던 그도 인생이 ‘공수래 공수거’임을 잘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왕으로 살든, 평민으로 살든 그 소유는 하나님께서 잠깐 빌려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도 그 소유를 영원히 누릴 수 없습니다. 잠시 전세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이제 돌려다오” 하면 즉시 돌려주고 빈 손으로 떠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진 것이 좀 있다고 큰 소리 칠 것도 없고, 가진 것이 적다고 기죽어 살 일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잠시 빌려주신 생명, 시간, 재능, 물질을 어떻게 선용하고 돌아갈 것이냐 하는 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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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2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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