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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물길은 600리 이다.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 째로 긴 강이다. 참 먼데서부터 흘러와준 것이 장하다! 조그마한 옹달샘, 전북 진안의 데미샘에 모인 물방울들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 되어 작은 도랑, 하천을 이루며 주변과 함께 어우러진다. 메마른 논밭에, 강가 언덕의 억새를 적셔주고 밭 메는 어머니의 갈증을 달래준다. 날 저물어 집에 돌아가는 아버지의 삽을 씻어주고 흘러간다. 높은 곳에 고여 있지 않고 필요한 곳을 찾아 아래로, 이 땅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간다. 또 다른 지천들과 함께 더 많은 곳을 더트면서 땅을 적시고 강을 이룬다. 그렇게 목마른 곳을 적시며 협곡이나 들녘을 돌아 돌아 서두르지 않고 이르른 곳 여기, 광양 무동산 아래에서 폭넓은 강을 만든다. 섬진(蟾津)이란 이름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회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왜구가 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광양 땅 섬거에 살던 수십만 마리 두꺼비가 떼 지어 몰려와 울부짖자 왜구들이 피해갔다는 전설에 따라 불리어졌다는 고마운 두꺼비의 공덕을 광양군 다압면에 섬진강유래비는 전한다. 이렇듯 이 물길은 평온할 수만은 없었다. 선비들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도포 깃을 휘날리고, 민중들이 시퍼런 죽창을 치켜세웠음에도 섬진강은 끊임없이 왜구들의 침탈로가 되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과 관군의 치열한 싸움이었던 방아치전투(1894) 이후에도 동족상잔으로 강물을 물들게 했던 아픔을 안고 흐른다. 여인들이 잡은 재첩을 실어 나르는 동력선이 물길을 가르며 분주하게 다닌다. 저 앞에 지리산 능선의 부드러운 선율과 그 틈새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숨어있는 강변마을이 주는 아련함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여기 강가의 사람들이 흘린 서러움과 눈물, 절망까지 모두 받아 안고 바다가 보이는 광양만으로 간다. 이제 600리 섬진강은 버려라. 그리고 바다의 시원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자기를 버린 물방울은 강이 되어 바다의 시원으로 거듭나 강들의 유토피아, 대동세상일 바다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릴 것이다. 경전선인 섬진철교에 화물열차가 지나갔다. 대 여섯 량을 단 여객열차도 평온하게 지나간다. 섬진교 위로 하동과 광양을 오가는 버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달린다. 두 다리를 품어주는 섬진강도 하나의 물줄기로 흘러간다. 목포에서 탔다는 아주머니가 집에서 삶아 온 달걀이라고, 경상도 아지매는 목을 축이라며 두유팩이 서로 오간다. 사람만이 나뉘어 가고 있다. 마음에 평화를 가져본다. <끝>
새벽 서너 시 쯤 스케치하러 나선다. 그래야 해 뜨기 전에 정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동산(275m)은 높지 않지만 마치 삼각뿔 모양새로서 약간 가파른 산길을 따라 20~30분 소요된다.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조그만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여러 번 지나쳤던 요사(寮舍)에 인연이 되어 며칠 동안 머문 적이 있다. 창문을 열면 저 멀리 강물에 담긴 지리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새벽녘 낮고 장엄하게 들려오는 종소리가 계곡마다 전하는 여음이 진하게 파고 든다. 쌍계사인 듯하다. 이 곳 무등암에도 어느 중생을 위한 염불인지 목탁소리와 함께 낙낙한 주지승의 음성이 되돌아온다. 계단을 덮은 대숲을 조용히 지나자 새벽바람에 댓잎 스치는 소리가 스산함을 더하고 어둠이 적막함으로 다가온다. 강 건너 어스름한 하동 읍내의 아련한 불빛은 하나, 둘 꺼져가고 지리산과 백운산을 끼고 내려오는 강줄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간에 나는 새벽공기를 마시며 강변을 서성였나보다. 영감이 가장 몰입되는 순간이고 오롯이 혼자로써 사유하며 주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산 정상 바위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 있으니 발아래 강물에서부터 맞은편 저 너머 어슴푸레하게 능선을 드러내는 지리산까지를 모두 섭렵하는 듯하다. 강가의 아침이란 어느 강이든 그러하지만 특히 산을 휘감고 흐르는 섬진강은 잔뜩 설레이며 기대하게 한다. 시간과 기후에 따라 변화무쌍함을 연출하기에 기대치를 한껏 높이고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 드디어 여명이 떠오르면 이 산, 저 산 골짜기, 강줄기마다 환희의 운해가 펼쳐진다. 주위는 순식간에 강한 입체감을 주며 집체무용이라도 연상케 하는 대단한 파노라마를 만들어 낸다. 어느새 남해 금산에서 힘찬 해가 솟아오르면 운해는 슬그머니 어디론가 퇴장하고 새 세상이 펼쳐진다. 무동산, 낮고 작은 산이지만 가장 가까이에서도 넓고 긴 섬진강을 보여주는 옹골찬 곳이다. 하류에 자리하고 있어 넓어진 강폭의 규모가 남해바다를 향해서 구불거리며 흐르는 곡선의 끝에는 광양제철의 굴뚝이 우뚝 서있다. 괜한 망상을 떠올릴 때가 있다. 기상변화로 인해 사계절이 없어진다면?
한 두 그루정도는 가까이에 두고서 보고 싶은 소나무가 하동에서는 다른 목적으로 숲을 이루어 왔다. 조선 영조 21년(1745년) 당시 도호부사였던 <전천상>이 강바람과 모래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모래언덕 위에 심어서 만들어진 소나무 숲이다. 바다에 닿아 있는 하동지역에 해양과 육지의 비열 차이로, 낮에 해양에서 육지로 불어오는 바람이 섬진강변에 드넓게 펼쳐진 모래밭을 지나면서 하동읍내가 온통 모래바람으로 뒤덮이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심었던 약 900여 그루가 <하동송림(河東松林)>이 되었고 천연기념물 제445호로 보호받고 있다. 솔숲 속에서 누워 낙랑장송의 잎 사이로 비추는 맑고 찬란한 해살을 온몸으로 안아본다. 군데군데 음향시설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솔바람소리, 가만히 흐르는 강물소리와 백사장에 스치는 파도소리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상의 하모니이다. 백사청송(白沙靑松)의 고장이라 불릴만하다. 솔향 그윽히 느끼며 걷는 이들의 발자국이 길이 되어있다. 그 길을 몇 바퀴 걸으며 소나무의 품격을 가슴에 담아보는 것도 힐링이 아니겠는가! 산고송하립(山高松下立)이라 했다. 제아무리 산이 높아도 그 위에 자라는 소나무가 있다라고, 항상 잘난 척 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며 소나무는 푸르고 꿋꿋한 의지로 일침을 가한다. 하동읍을 뒤로하고 넓은 강변에 잘 갖춰진 근린시설이 있고 광양으로, 남해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 후련하게 펼쳐져 있다. 내가 서있는 발아래는 하동포구로서 배가 다니던 섬진강 물길이다. 화개로부터 악양, 하동, 하저구, 갈사를 거쳐 남해바다에 이르는 하동포구 80리 뱃길이다. 섬진강 하류에 바닷물이 흘러들어와 조개잡이가 예전 같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여인들의 몸짓이 분주하게 보인다. 채취에서 밥상에 오르기까지 그 손들이 고맙다. 하동에서의 아침은 시원한 맛의 재첩국이다. 작업실로 돌아와 솔방울과 솔잎으로 불쏘시개 삼아 불을 지피고 장작을 아궁이 깊숙이 밀어 넣는다. 벌겋게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 여러 상념에 잠긴다. 한 시간 가량 불을 때고 나서 방에 들어와 구들장에 등을 지지면 겨우살이 이 정도면 만족하지 않나 싶다. 나에게 세한삼우(歲寒三友)는 장작과 따끈한 차(茶), 눈 속을 걸어야 할 장화이다.
소나무! 늘 우리 곁에 다양한 느낌으로 함께하는 소중한 나무이다. 소나무는 높은 기개와 풍치를 지니고 있고, 늘 변치 않는 푸르름을 간직하면서 군자의 덕과,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장수를 상징하는 나무로 비유되어왔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태산에 올랐다가 소나기를 피해 급히 한 노송 밑에서 쉬었다 하여 그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의 배경으로 수목(樹木)의 군자가 되어 오청(五淸;죽(竹)매(梅)국(菊)송(松)석(石)으로 또 세한삼우(歲寒三友;송 죽 매)로 사우(四友;매 송 국 죽) 등의 하나로 꼽히면서 문인과 화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는 소나무의 고결한 절개를 선비에 비유한다.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가는 나무다. 그 앞에서 오늘의 선비정신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잠시 눈을 감아본다. 소나무에 소담하게 하얀 눈이 쌓이면 더욱 묵직하고 강인함을 드러내며 붉은 줄기에 하얀색의 배색은 완벽한 조형으로 나타난다. 눈덮힌 송림과 강가의 백사장, 검푸르게 더욱 깊어진 강물을 담은 구도를 떠올리면서 하동송림에 간다. 하동지역은 눈을 맞이하기가 쉽지 않다. 한번 가보려고 마음먹으면 안절부절이다. 일기예보를 보고 지인에게 전화로 확인하고 나선다. 어느 겨울엔 며칠 동안 아예 이곳에 머물며 기다리다가 눈을 만나 그 풍광에 젖어 추위도 잊고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하기도 했다.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구비구비에 훌륭한 상징성을 지니며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나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또한 소나무는 우리 삶에 아주 다양한 쓰임새로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다. 봄이면 송홧가루를 모아 다식(茶食)을 만들어 먹었고 추석이 되면 송편을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또 햇순으로는 송순주(松荀酒), 잎으로는 송엽주(松葉酒), 솔방울로 송실주(松實酒), 솔뿌리로 송하주(松下酒)를 빚어 마셨다. 지금은 흔하지 않은 자랑스러운 우리 먹거리들이다. 깊어가는 가을밤의 강변길, 잘 다듬어진 길을 얼마동안이나 걸었는지. 둑에 걸터앉는다. 솔숲에 가렸던 달이 어느새 강물에 빠져 내 눈에까지 들어온다. 술에 취하지 않았으나 달을 잡으러 강물에 들어가기라도 할 듯한 충동감이, 조용히 흐르는 물결에 어른거리는 달과 함께 사유할 수 있는 고요한 이 시간, 참 귀하고 소중한 순간이다.
작가 박경리는 악양 평사리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데도 이곳을 소설 토지의 배경으로 삼은 곳이다. 지리산에 닿아있는 너른 들판을 감싸고 흐르는 섬진강과 평사리 사람들의 삶 이 당시 한민족이 겪고 있는 마을공동체를 형상화하기에 적절한 곳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소설사에서 최장편인 토지는 1969년에 연재소설로 시작하여 여기저기 지면을 옮겨가면서 1994년까지 26년에 걸쳐 집필을 마치고 탈고하여 총 5부 21권으로 완간 되었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격정의 근현대사를 최 참판 댁을 중심으로 삶의 인연을 이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지금,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진정성 있는 삶의 현장에서 실용적인 아름다움과 건강한 생명력을 구현해내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이 곳 지리산 끝자락, 섬진강 하류에 그러한 예술인들과 농사를 짓거나 내공을 지닌 많은 이들이 진정한 문화예술의 마당을 일구고 있다. 중앙의 문화권력과 천박한 자본주의에서 상품화 된 문화예술에서 자아를 지켜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섬진강에 젖어 살아가는 평사리의 들녘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자동차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데를 찾아갔다. 채 녹지 않은 눈길을 따라 1,115미터의 고지까지 올라 형제봉 활공장의 널따란 평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낌도 괜찮다. 마주보고 있는 구제봉 활공장에도 올라가 지리산 자락이 둘러싼 평사리 무딤이 들판과, 왕시루봉과 백운산 사이로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물들이는 노을을 보는 것도 좋다. 좀 더 천천히 눈길을 줄 수 있는 곳으로 새벽, 아니 어둠의 산을 오른다. 하동 평사리 뒷산이자 지리산 남부능선이 섬진강으로 뻗어있고 그 중에 형제봉이 있다. 형제(兄弟)의 사투리인 성제봉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정상 표지석에는 어질고 덕이 뛰어난 임금을 뜻하는 성제봉(聖帝峯)으로 표기되어 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을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디며 내려가고 있다. 한적하고 높은 산등성이의 철쭉꽃은 나를 위해 피어있기라도 하듯 군락을 이루며 숨가쁜 나의 호흡을 조절해준다. 깊숙한 협곡 건너편 바위에 길게 늘어진 철 계단이 정면으로 보인다. 뒤에서 발목이라도 잡아당기는 듯한 두려움으로 올라서니 이제는 구름다리가 기다리고 있다. 물론 예전에 이 보다 더 높고 긴 코스를 지나간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홀로 새벽에 건너기엔 등골이 오싹하기도 하다. 어쨌든 재미있다! 신선대, 통천문 등이 주는 이름과 그야말로 몽환적인 주변의 색감과 공기가 새로운 세계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내려갈수록 어둠은 걷히고 고소성(姑蘇城)에 이르렀다. 험한 산줄기를 등지고 서남쪽으로는 섬진강과 동정호를 눈 아래 둔 천연의 요충지로, 해발 300미터 정도의 능선을 따라 신라 때 돌로 쌓은 산복식(山腹式) 산성이다. 주차장에서는 900미터 지점에 20분가량 형제봉 방향으로 오른다. 자주 들르는 곳으로 성벽 위의 낙락장송 아래에 앉아있기만 해도 평안함을 안아가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섬진강과 평사리가 한층 친근하게 가까이 다가와 보이고 넓고 기다란 곡선의 물줄기를 볼 수 있다.
19번 국도를 따라 가보면 구례에서 섬진강을 다시 만난다. 강폭은 더욱 넓어져 강으로서 격조를 갖추고 흐른다. 벚나무 가로수는 강물을 젖줄삼아 봄이면 그야말로 흐드러진 벚꽃터널을 만든다. 벚꽃 길은 하동까지 이어져 찾는 이들의 호감을 받기에 충분하다. 화개에서부터 펼쳐지는 넓은 백사장은 강변의 여유와 평온함을 더해 준다. 나는 가끔은 광양 다암면 부근을 지날 때 백사장을 거닐어보고 강물에 손발을 담가보곤 한다. 4대강 사업으로 폐허가 된 다른 강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의 정서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화개장에 들러본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강마을이다. 화개장은 구례와 하동사람들이 강줄기를 굽이 돌아 모이고, 남원이나 함양사람들이 지리산을 넘어 모였으니 도계를 넘나드는 곳이다. 화개장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중 하나일정도로 규모 있는 장이었다. 산과 강, 남해안과 내륙의 온갖 물류들이 모여드니 활기 넘치는 장터이었음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러한 장터가 지금은 붙박이로 박제화 된 관광지로 변해버렸으니 전국팔도를 자유롭게 오가는 이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하류로 가는 길, 손이 닿을 듯 가까워 보이는 넓은 강물을 따라 갑자기 속도를 늦추는 차들을 흔히 보게 된다. 그래서 이 국도에서는 자동차 속도 측정 카메라를 자주 만나게 된다. 흐르는 강물과 같이 느리게 바라보며 달리니 강과 더 가까워진 듯하다. 축복 같은 자연을 진하게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길가에 악양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하동군 악양면의 악양이라는 이름은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백제를 치기 위해 온 소정방이 이곳을 보고 중국의 호남성에 있는 고성(古城) 악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정표를 따라 접어들면 넓은 평사리 들녘이 펼쳐진다. 산기슭에 이런 들이 있다니? 하며 농로로 한참 걸으면 들판 한 가운데에 소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서있다. 부부송이라 하는데 서희와 길상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사방으로 지리산 형제봉칠성봉구제봉, 백운산이 높은 객석을 이루고 널따란 그라운드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듯하다. 중국 샤오샹팔경의 하나인 평사낙안(平沙落雁)에 비유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지리산은 아픈 역사만큼이나 식물들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조선시대 유산기(遊山記)에서 나무들이 하늘을 덮었고, 밑에는 세죽이 빽빽하게 밀집하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땅히 수십 그루를 찍어 넘겨야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격랑의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방화와 남벌, 화전 등으로 수없이 쓰러져 갔으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진정의 기미를 보였다. 그렇게 모진 수난에서도 꾸역꾸역 이 땅을 지켜내고 있는 들꽃들이 눈에 띈다. 지난한 역사, 어찌 잊으랴마는 신숙주의 노래처럼 원추리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잊었으니 시름이 없다하니 하늘이 내려 보내기라도 했나? 군락지에 훤하게 피어있는 원추리 앞에서 어떻게 근심을 갖으랴! 노고단에서 만났던 이질풀이 이곳에도 있구나. 이름과는 전혀 다른 자태를 뽐내는 작은 꽃, 한방에서는 노관초(老官草)라고 부르며 지사제로 유익함까지도 주니 더욱 예쁘다. 바위에 걸터앉아 쉴 참이면 발아래 밝은 미소로 힘겨움을 덜어주는 노~랑제비꽃, 뭐니 뭐니 해도 지리산의 절경이라 할 수 있는 헬기장 주변에 보드랍고 유연하게 흔들거리는 억새사이로 들어오는 섬진강에 포근한 구름이 내려앉고 있다. 예부터 사람들은 산과 더불어 보금자리를 만들고, 기슭에서 의식주를 해결해나가며 삶을 꾸려왔다. 한편 지리산은 산자락을 그림자로 드리운 채 남해로 흐르는 섬진강의 맑은 물이 백사장과 함께 지리산의 비경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섬진청류(蟾津淸流)라 하며 지리산 10경으로 인정하고 있다. 섬진강은 지명유래에서 보더라도 왜구의 침탈로 몸살을 앓았던 곳이다. 이 때 섬진강, 지리산 자락의 선비들은 조국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자기 정체성이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대표적인 선비들로는 피아골 입구에서 구례 방향으로 3킬로미터 지점의 섬진강가, 왕시루봉 능선이 마지막 자락을 흘러내린 곳에 의병들의 무덤이 말해준다. 이 곳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싸우다 순절한 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과 구례 현감 이원춘의 위폐를 모신 칠의단이 있다. 17번 국도로 섬진강을 따라 간다. 우측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몰입하다 좌로 고개를 돌리면 석주관이 있다. 오늘의 선비정신은 무엇일까? 왕시루봉은 섬진강을 젖줄삼아 말없이 자양분을 나르고 있다. 백두대간을 적시며 더 높은 곳의 영산 백두산으로 향하리라.
섬진강은 혼자가 아니다. 높고 낮은 산들과 더불어 흐르고 있다. 그 중 지리산이 품고 있는 남원, 구례, 하동을 싸안고 흐른다. 고준광대(高峻廣大)하면서 중후인자(重厚仁慈)하여 아버지 같기도 하고 어머니 같기도 한 웅대함을 지닌 영산(靈山), 지리산! 그런 만큼 1967년 국립공원 제 1호로 지정되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45킬로미터가 넘는 주능선에 반야봉, 토끼봉 등 고산 준봉이 20여개가 있으며 85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산속의 산을 안고 있고 15개의 지능선과 계곡들이 있는 그야말로 산괴(山塊)이다. 어느 산악인의 고백처럼 지리산은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노고단에서 구례군 토지면을 향하여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왕시루봉이 있다. 정상부분이 펑퍼짐하고 두루뭉술하고 커다란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 하여 왕시루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과의 인연은 토지면 파도리부터 이다. 1990년대 초, 왕시루봉 별장의 산사람 함태식 선생을 찾아서 문학인들과 함께한 산행이 시작이다. 그날 낯선 경험을 했다. 화장실에서 용변 후에 재를 뿌린다. 그러면 냄새가 제거된다고 하던데 그런가보다. 습기 찬 여름인데도 개운하다. 선생은 주변 환경으로 안내 한다. 그 이후 나는 밤낮 구분 없이 몇 번을 오르내렸던가! 두 세 시경 구례구역에 도착하는 열차를 탄다. 택시로 갈아타고 토지면 왕시루봉 입구까지 간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 쏟아지는 별빛과 헤드랜턴에 의존하고 더듬거리며 산길을 오른다. 이곳에는 반달곰, 멧돼지가 서식하기 때문에 주의를 해야 한다. 서로 피해의식이 있다. 배낭에 놋쇠로 만든 종을 매달아 소리를 내고 가끔 헛기침으로 경계하면서 오른다. 섬진강을 가장 높은 위치에서 멀고 길게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여러 번 찾은 곳이다. 어둠이 걷히면서 청아한 새벽 공기에 은빛의 물길이 그려진다. 지리산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깊숙함 속에 환희가 있다. 겹겹이 쌓여진 산과 하나 되어 유유자적한 강물까지도 의연함을 자아내는 신새벽을 맞이한다.
섬진강의 맑은 품성과 지리산의 강직한 성정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나라에 대한 주인의식, 주체의식을 바탕에 두고 살았다. 이 아름답고 너른 들판엔 서럽고 아픈 역사들이 우리들의 발길을 잡는다. 천은사 못 미쳐 광의면의 매천사당(梅泉祠堂)이 그 중 하나이다. 난리 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몇 번이고 죽으려 했지만 그 뜻을 못 이뤘도다 오늘도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물거리는 촛불만이 창천을 비추는 도다. 구례땅 월곡리에 은거하던 선비 매천 황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목숨을 끊지 못하고 구차하게 살아옴을 서러워하다 1910년에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통곡을 하며 4수(首)의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살아남은 선비들은 그의 시를 베껴 외우며 욕된 삶을 달랬다 한다. 그는 조선말 위정자의 비리, 비행, 일본의 침략과정과 일제의 만행과 의병의 저항을 자신의 관점과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해 놓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다. 또 한 곳은 열아홉살 백순례의 삶이 산동애가로 남아있는 산동면 상관마을이다. 1948년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만여 명이나 학살된 여순사건의 주력부대가 지리산으로 퇴각해 빨치산이 되었다. 이들을 토벌을 하면서 구례에서도 양민들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비극을 낳았다. 그 때의 상황이 노래가 되어 소녀의 넋을 기린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을 병든 다리 절어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이 후 산동 처녀들이 산수유 열매를 딸 때 부르며 전해 내려왔으나 지금은 그러한 처녀들이 없어서인지 불리어지지 않는다. 또 발길을 돌려야 하는 곳은 하류인 화개 방향으로 토지면에 지리산과 섬진강을 배산임수하고 있는 금환낙지(金環落地)의 운조루라는 독특한 옛집이다. 토지면(土旨面)의 지명도 본래에는 금가락지를 토해냈다는 토지면(吐旨面)으로 풍수형국에서 비롯된 마을이다. 운조루는 명당자리답게 건축양식과 규모도 범상치 않다. 구조는 크게 안채, 사랑채, 행랑채, 제실로 나뉘고 지금은 73칸이 남아 있다. 대문 밖에는 말을 묶어 두는 하마석이 있고 지리산 문수골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이용하여 만든 200평가량의 연못 터가 있다. 또한 운조루가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의 양도 방대하며 사료적 가치도 대단하다. 나는 무엇보다도 운조루의 정신에 가치를 두고 싶다. 200여년 된 원통형 뒤주 아래 부분의 마개에는 누구나 쌀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인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혀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수많은 환란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집 주인이 지닌 인품과 주변에 쌓았던 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섬진강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따라 가다보면 습지를 만난다. 남원 대강면과 구례 간전면으로 흐르는 곳인데 수달, 황어, 새들이 물버들과 풀섶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자연스럽고 소소해서 편안하다.
구례 오산(530미터)에 있는 사성암 가는 길이 이제는 아스팔트 포장된 길로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편하고 빠르게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등산로는 가팔라서 지그재그로 2킬로미터 남짓 되니 한 시간 가량 숨차게 올라야 한다. 왜 산에 오르는가에 따라 선택의 길은 다를 것이다. 사성암은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에 세운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고찰이다. 원효, 의상, 도선, 진각국사, 이렇게 4명의 고승이 수도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길게 흐르는 강줄기와 넓은 들녘을 담아내려고 산을 오르곤 한다. 새처럼 날아올라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리는 부감법을 구사하려는 마음이다. 바위에 딱 붙어 지어진 절집과 계단을 오르다보면 거무스름하며 무게감 있는 귀목나무를 만날 수 있다. 80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잎이 한꺼번에 나오지 않는 해는 풍년이 든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망하기 좋은 곳을 찾아 바위를 따라 돌다보면 위험하니 올라가지 마시오. 주지 백 이란 글씨가 써진 기왓장을 만난다. 하지마라면 더하고 싶어지는 법, 절벽에 올라선 바위라 오르는 것은 정말 위험해 보인다. 그래도 죄송하지만 올라보니 좋다. 이 일대 오산에 12비경의 전설이 전해온다는 것이 그럴 만 해 보인다. 진각국사가 참선했다는 좌선대와 우선대, 석양과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를 뒤돌아보았다는 낙조대 등 지리산과 섬진강을 두루두루 조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곳이다. 이곳을 여러 해 동안 오르내렸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의 어느 가을에 다시 찾았을 때, 또 다른 기왓장엔 제발 말 좀 들으시오라고 씌어 있다. 나를 질책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오를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스스로 조심할 텐데 왜 위험하다고 이렇게 간곡하게 표현해 놓았을까? 이곳에 올라 서보면 안다. 바위 끝 바로 발아래에 하얀 목화솜덩어리가 포근하게 깔려 있는 듯 보인다. 조심히 바위 안쪽에 앉아서 구름의 변화무쌍함에 젖어있다 보면 구름이 옅어지며 마침내 코앞에 섬진강물과 구례 읍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11시 방향 곡성에서 내려오는 강물은 구례구역 앞을 지나 구례읍을 휘돌아 피아골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맞이하러 간다. 1시 방향으로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강을 품고 있다. 몸이 썬득해지며 시장기가 돋는다. 빤히 내려 보이는 읍내 동아식당에서 돼지족탕 국물에 끓인 따끈한 라면을 먹으려고 일어선다.
어느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새벽강을 담아내기에 21m 화폭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구미 작업실에 머무는 동안은 눈뜨자마자 이 길로 오곤 했다. 넓게 펼쳐진 강에 한가득 바위들이 널려있는 장구목이다. 상류의 댐이 물을 가두자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오래도록 물속에 잠겨 있던 바위들이 드러나게 된 곳이다. 절차탁마(切磋琢磨)! 보석을 세공하듯 수 만년동안 갈고 닦아 부드럽게 주름지고 둥글둥글 파인 모습들의 바위는 변화무쌍한 물살의 흐름을 가늠케 한다. 지형으로 좁혀진 물살은 급하게 여울을 이루면서 흐르고, 바위에 돌들의 침식작용은 움푹움푹 패인 신기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중 요강바위는 깊이 2미터가 넘는 포트홀로 유명하다. 아들 낳기를 원하는 여인이 이 바위 위에 걸터앉으면 영험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은 초여름 용골산에 허옇게 핀 밤꽃의 징한 냄새와 함께 묘한 상상력을 자아낸다. 요강바위 옆에 널찍한 너럭바위 위로 물결이 스쳐 지난다. 벗이 있어 좋으니 동이 술통 옆에 두고 달이 중천에 오르도록 즐거움을 나눈다. 발을 뻗으면 물살이 발등위로 애무하며 흐르는 느낌도 좋을시구~! 달은 지고 해 뜰 무렵 용골산에 내려앉는 구름이 물위로 오락가락하며 취기를 돋운다. 달이 사라졌으니 물속에 들어 갈리는 없을 터이고.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 줄어드는데 만 점의 꽃바람에 날리니 참으로 시름겹구나 이 경치를 다 보려하니 꽃은 잠깐뿐이니 몸 상한다고 어찌 술을 마시지 않으리 강 가 작은 정자엔 비취 새 깃들고 부용원 뜰 가 고관의 무덤 기린 석상도 뒹구네 세상 이치 따져보니 모름지기 즐거움을 따를지니 어찌 헛된 영화에 이 한 몸 얽매이리. 곡강(曲江)을 이렇게 노래한 시성 두보(杜甫)는 이곳은 어떻게 표현할까? 용골산 중턱에 한 동안 엔진의 굉음을 내며 인위적 기교로 깎아내려 거목들이 쓰러지고, 뒤로는 현수교라는 철근을 세워 강줄기의 흐름을 끊어낸다. 대자연의 참된 자유를 지켜내며 자연의 모습에 맡겨야. 사물은 자연 그대로 있을 때, 올바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가. 만물제동(萬物齊東)의 원리, 자연의 조화를 생각해본다.
섬진강은 좌우로 산을 품고 흐른다. 그래서 큰 도시를 거느리지 않고 주로 비탈진 곳에 마을이 만들어졌다. 여기 작업실이 있는 구미마을도 그렇다. 강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순창 무량산 자락에 고려 말부터 남원 양씨들이 터를 닦고 마을을 이루어 살아왔다 한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대숲으로 병풍 쳐있는 종가집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2002년에 우연한 인연으로 그 집 바로 옆에 둥지를 마련하게 됐다. 주인장이 널찍한 대갓집을 선뜻 내주었다. 강과 가까이 할 수 있어 작품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위치이다. 처음엔 도시에서 살아온 습성에 더해 낯가림이 심한 편이라 돌담길 사이를 오가는 동네사람들과 눈 마주칠까 두려워 대청마루 끝에 발을 쳐놓고 지냈다. 앞집 할머니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앞집 할머니다. 어둠이 가시기도 전에 우물가에서 하루가 시작되나 보다. 나도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강가로 나선다. 빠른 걸음으로 강물이 보이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순간 바람이 가만히 이마를 건드린다.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바람의 감미로움은 가히 매혹적이다. 두루미도 미리 와 기다리고 있다. 집채 만 한 바위들 틈새로 흐르는 물소리가 봄을 독촉하는 역동적 메시지로 들린다. 바위 주변을 싸안고 있는 억새와 물버들에서도 새 생명들의 색조가 어른거린다. 강 건너 억새밭에서도 풋풋한 생명들이 기지개를 펴면서 술렁인다. 느슨함과 움츠림을 떨구게 한다. 어느 계절인들 눈에 벗어 날 리가 없지만 봄의 에너지만큼은 대단한 설렘이다. 이 강변길에 머무는 시간들이 무척 좋다. 흐르는 강과 함께하는 것들과 이야기하며 4km 남짓 상류로 걷다보면 바위들이 빼곡이 드러선 곳이 나타난다.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 설치한 작품들이다. 안개가 더해진 강가는 오롯이 고요함과 여유, 피안으로 이끈다. 오른쪽으로 무량산(590m)과 용골산(630m), 왼쪽으로 벌통산(440m)을 품고 있는 이 강변길과 20여년 함께 지내고 있다.
자주 왕래하기에는 불편하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갈 수 있다. 강진면에서 덜덜대는 비포장도로를 다니는 군내버스가 하루 서 너 번이나 다니는지, 천담에서 내려 3km를 더 걸어 가야한다. 그래도 갈 곳이 있으니 망설임 없이 화구며 간식거리를 잡다하게 챙겨간다. 정읍댁이 있어서다. 주변의 친구가 소개해 준 집이다. 널찍한 안방을 내어주면서 작업실로 쓰라고 권했다. 무슨 인연인지 그의 이름이 내 아내와 같다. 양금이! 밖에라도 나가있을 때 끼니가 다가오면 부른다. 화가 양반~ 따끈한 밥상에 반주도 빼놓지 않으니 넉넉하지 않은가. 그 손맛 중에는 특히 다슬기 요리다. 작은 소쿠리 옆에 끼고 강에 내려가 순식간에 잡아온다. 확독에 닥닥 갈아서 껍질을 골라내고 애호박에 부추 잘게 썰어 넣고 끓인 찐하고 푸른 국물은 그야말로 별미다. 그 맛은 다슬기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근처 강물에서 건져 올린 둥글하고 노란색을 띤 모양으로 작지만 쫄깃하게 씹히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마을 앞 끝자락에 당산마루가 있다. 마을에 사람들이 북적대고 지낼 때는 마을공동체적 의례인 당산굿을 지냈었다고 한다. 내가 이곳에 처음 오던 해 정월 보름날 달빛아래 노부부 둘이서 당산나무에 금줄을 매놓고 정성을 들이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 때쯤이면 마을 주변의 닥나무를 베어 나르느라 분주하다. 강가에 돌을 쌓아 만든 대형 솥에서 며칠인가를 찌고 강물에 다시 며칠을 담가 놓는다. 불어난 닥은 아낙들의 손으로 껍질은 벗겨지고 한지의 재료로서 공장으로 간다. 고요한 시간이 되면 주변에 아름드리 느티나무로 둘러싸여 원형을 이룬 마당에 멍석이라도 깔아 눕고 싶다. 하기야 가을이면 낙엽으로 포근한 멍석이 되어 버리는 당산! 자연이 인간에게 안겨주는 축복이다. 사방 어느 곳을 바라 봐도 그냥 흘려보낼 곳 없어 어딘가에 담아둬야 할 것 같은 천혜의 창조물이다. 발아래 저쪽 9시 방향에서 다가오는 강물은 너럭바위에 쉬고 있던 재두루미의 목을 적셔주고 늪에 어우러지다 앞산을 휘돌아 장구목 쪽으로 흘러간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곡선의 물줄기는 느리고 자유롭게 흐르고 있다. 두루두루 주변을 챙긴다. 그래서 섬진강이고 또한 그것들은 내 그림의 밑천이 되어 왔다. 아침 산책을 나설 때면 설렘과 망설임이 다가온다. 가야할 곳이 여러 갈레이니 그러기도 하다. 우측에 비탈진 밭고랑을 지나면 계단식 논들이 설치 되어있다. 이른 봄 시린 손을 불어가며 걷다보면 논두렁 사이로 가녀리게 조용히 아주 맑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산 능선에 쌓였던 눈과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이다. 갓 돌 지난 사내아이의 오줌 눕는 소리 같다. 새 생명, 희망의 소리다. 영화인들도 놓치지 않았다. 1998년 이 곳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시절의 영화촬영 표지석이 강을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에 세워져 있다. 아프고 쓰린,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영화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으로 달래게 한다.
임실지역을 스미는 섬진강 중에서 가장 하류지역에 있는 마을이다. 산 중턱 비탈진 곳에 오목하게 올려놓았다. 그다지 넓지 않은 터를 깎고 다듬어서 집들을 세워 마을 자체가 경사졌다. 저 아래 강변에 이르기까지 정갈하게 축대를 쌓아 이룬 다랑이 논과 밭들을 보면 이 마을 사람들 삶의 의지를 짐작케 한다. 한참을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너가면 순창인데 11시 방향으로 하얀 바위를 내밀며 기세당당하게 우뚝 솟은 산이 버티고 있다. 이름으로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용골산이다. 그 산자락 싸리재에 대 여섯 집이 강물을 바라보며 모여 있다. 구담(九潭)이란 마을의 본래 이름은 안담울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이가 있다. 앞강에 자라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구담(龜潭)이라하기도 했고, 또한 강줄기에 아홉 개의 소(沼)가 있다고 해서 구담(九潭)이라고 불렀다한다. 1680년경 숙종 때 해주 오씨(吳氏)가 정착하여 마을을 가꾸어 왔다고 한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때가 1992년으로 기억된다. 정월 보름 다음날이다. 어수선한 심경으로 무작정 섬진강변 길에 발을 내디뎠다. 아침 일찍부터 강물에 눈을 맞추며 얼마를 걸었는지 구담마을에 이르니 점심때가 지났다. 산과 산 사이 강변길에 불어 닥치는 칼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드는 듯하고 시장하기 조차하니 더욱 오들오들 거린다. 어느 집인가 불쑥 들어갔다. 낯가림이 있는 나로서는 의외의 행동이다. 그 집 사람들은 이미 끼니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노부부는 장작불을 지펴 데워진 구들장 아랫목에 앉기를 권하며 귀한 손님인 양 극진히 대하였다. 그리고 따끈하게 데운 술을 몇 순배 나누면서 주인장은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동네 소개를 자상하게 해 주었다. 더 좀 머물고 싶은 정겹고 훈훈한 자리였다. 그 날, 강물이 검어 질 때까지 걸었다. 구담에 다시 갔을 때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수남이네 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 이름이다. 섬진강을 가슴에 적시고 얼굴을 비추며 붓을 담그게 한 마을이다. 그러니까 나의 발길을 붙잡고 시선을 잡아준 그 곳은 구담이다.
글쎄, 듣고 보니 금붕어 모양새다. 꼬리를 살짝 틀어 재치고 힘 있게 돌진하는 기세가 있어 보인다. 이 붕어섬이 있는 본래의 지명은 외앗날이다. 그런데 유유히 흐르던 섬진강이 아픈 시련을 맞게 되었다. 1928년, 이 강이 갖고 있는 수자원을 유용하겠다는 것이다. 그 해 호남지역에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와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를 마주하는 협곡에 높이 40m의 댐을 만들었다. 남류하던 섬진강물중 일부는 땅속에 파이프라인을 뚫어 숭어가 노는 서해안으로 흐른다. 그 물은 동진강을 따라 가보면 광활한 호남평야, 개화도의 메마른 논바닥을 적셔줄 농업용수로 사용되었다. 이후 수력발전 등 다목적댐으로 만들어졌다. 거기, 댐 아래로 처음 낙하하는 곳에 정읍 칠보 수력발전소가 있다. 그러면서 삶의 근거지인 논과 밭, 다니던 길과 집들이 고스란히 물에 잠기고 이곳은 졸지에 섬이 되어버렸다. 산 바깥 능선의 날등이란 뜻으로 외앗날이라 부르는데 오가는 이들이 금붕어를 닮았다하여 붕어섬으로 불리어져 함께 쓰인다. 댐으로 만들어진 이 저수지 이름을 지을 때 이 지역에서는 구름과 바위의 전설을 많이 지니고 있는 곳이니 운암호라 불리워지기를 원했으나 중앙정부에서 옥정호로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 근처에 옥정리(玉井里)라는 마을은, 조선 중기에 이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이곳은 머지않아 맑은 호수, 즉 옥정(玉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마을이름을 옥정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옥정호 때문에 임실군 운암, 강진, 신평, 신덕면과 정읍시 산내면 등 2군 5개면이 물에 잠겼고 2만 명 가량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중에 상당수는 부안군 계화도 간척지 등 낯선 땅으로 옮겨졌다.
붕어섬은 아리고 아린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실향민들의 양보와 배려의 결실물이다. 그러나 자연은 붕어섬을 외로이 물에 가둬 놓지만은 않았다. 관심 있는 수많은 이들의 끊임없는 발길이 함께한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도로를 즐기며 드라이브하기 좋은 곳, 옥정호이다. 또한 옥정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갈 수 있도록 13km 이르는 물안개길이 있다. 옥정호가 손에 닿을 듯 말 듯, 호수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 만들어 낸 트래킹 코스다. 화려하거나 웅장하게 꾸며지지 않아서 그야말로 마음 편안히 맡길 수 있는 쉴만한 공간이다. 옥정호는 뒤편으로 오봉산이 병풍처럼 싸안고 있어서 더욱 포근함을 안겨준다. 그 산에 15분가량 올라가면 국사봉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호수 가운데 붕어섬이다. 그곳에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함께 지내던 이웃들은 떠났을지언정 이른 봄이면 새 희망의 기운이 솟는다. 갈아엎어 붉은 색조를 띠는 밭두렁에서는 뭔가를 이뤄낼 듯이, 새 생명을 암시하듯이 아침 햇살에 따뜻한 훈김을 뭉실뭉실 피어 올린다. 작은 섬이지만 시간의 변화를 읽게 해주는 공간이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함을 만들어내는 설치작품 같은 곳이다. 여명이 동터오를 새벽녘에는 그야말로 승경이다. 가을 날 기온차가 생길 때면 전망대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사방에 둘러싸인 산과 그 안에 안겨있는 호수가 어우러져 펼쳐지는 혼미한 기상 쇼를 보기 위해서이다. 동녘의 햇살은 섬진강 발원지인 저 멀리 진안 마이산의 두 귀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호수에 비춰온다. 지자체에서 관광개발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외앗날에, 붕어섬의 지느러미 하나도 소실되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 장자(莊子)의 조탁복박(彫琢復朴)이란 말이 호수위에 어른거리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꾸미거나 수식(修飾)하지 말고 본래의 내 모습을 소중히 여기며 참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던가.
봄 여름 가을 겨울, 25년 섬진강 사계절이 그의 화폭에서 피고 졌다. 담담하게 흐르는 섬진강 물길을 품은 그의 붓을 따라, 어느 날은 눈꽃을 피웠을 테고 또 어느 날은 꽃비를 내렸으리라. 전북일보가 8년만에 반가운 손님을 맞는다. 섬진강 화가 송만규 화백. 송 화백은 지난 2010년 전북일보 지면을 통해 섬진강 들꽃이야기를 연재, 독자들의 감성을 넉넉하게 감싸 안았다. 지난 연재가 섬진강 들꽃을 주제로 자연에 깃든 깨달음의 세계를 풀어냈다면, 올가을에는 섬진팔경을 소개한다. 가을을 지나 겨울로 향하는 열여섯 번의 금요일 아침, 전북일보를 펼쳐 섬진팔경을 만날 수 있다. 연재를 시작하며 송 화백에게 들었다. - 왜 섬진강인가요. 사람을 중심에 두고 활동을 했었습니다만 또한 아픔도 얻어야만 했지요. 그때 예전의 기억 속에 잠재하고 있는 섬진강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마냥 미친 듯이 강변길을 헤매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영혼이 강물에 담겨버렸다고 할까요. 섬진강에는 여러 수식어가 붙어 다니지요. 물론 좋은 단어들인데 동감합니다. 그중에 저는 두 가지만. 작은 것들에 대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재인식했다는 것. 또 하나는 고요함 속에서의 사유할 수 있는 여유. 이런 거죠. - 1993년께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해체 결의 후 섬진강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민족민중미술운동을 하며 수배도 되셨었는데요. 요즘 남북문화교류 추진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더만요. 진즉 그랬어야죠.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제가 의장직을 맡고 있던 민미련(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자주적 남북문화사업으로 평양에 민족해방운동사라는 걸개그림 슬라이드를 보냈지요. 통일의 물꼬는 가능한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야죠. 77m 길이로 전국 지역별로 현대사를 나누어 그린 겁니다. 그 이유로 조직 간부들이 대거 구속됐고 저는 수배생활하면서 조직을 운영하다가 정보처에 연행됐었죠. - 처음 섬진강을 만났을 때와 25년이 흐른 지금, 변화한 것이 있다면. 강은 변치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사람의 욕심이 물길을 돌리려 하고 있는 거죠. 곡선의 여유와 아름다움을 지워버리는 행위이죠. 강을 버티게 하는 주변 환경도 너무 함부로 일그러뜨리는 개발 정책이 안타깝습니다. - 지난 3월 섬진팔경전시회를 열면서 물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물은 유토피아로 가는 디딤돌이라고 할까요. 한 방울의 물방울이 어우러지면 도랑을 이루죠. 그 게 다시 계곡을 이루면서 강기슭에 다다르죠. 그렇게 함께했던 작은 물방울들이 커다란 강이라는 존재감을 가지고 유유히. 목마른 나에게, 메마른 두렁에, 들꽃과 앞집에 소여물 끓이는 물이라던가 등등, 나누며 베풀면서 흐르다가 이윽고 남해에서 가슴을 펼치지요. 그리고 물방울이 최대한 누릴 수 있는 오대양에서 대동세상을 펼치겠지요. - 섬진팔경은 어떻게 찾아내셨나요. 25년간 발품의 결과물이라고 할까요? 작은 공간에서의 절경도 얼마든 있긴 합니다만, 물을 싸안고 있는 주변사이에서 물길이 보여주는 선을 주요하게 봤어요. 그래서 높은 곳에서 비스듬히 아래를 내려보는 부감법으로 구도를 잡아낸거죠. 그랬을 때 멀고 긴 강줄기의 선이 보이니까요. (그렇게 찾은 곳이) 임실의 붕어섬과 구담마을이구요. 순창의 장구목, 구례오산의 사성암과 지리산의 왕시루봉, 그리고 하동의 평사리, 송림공원을 선정했고 광양에 무동산에서까지 입니다. 이곳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계절별로 나눠 그렸습니다. - 섬진팔경 중 아끼는 작품을 꼽으신다면. 아무래도 어렵고 고생하면서 만들어낸 작품이 아닐까요. 폭설이 내린 날 강변길을 걸으며 스케치했던 24m 길이의 장구목 겨울의 언강인 것 같네요. - 한국묵자연구회 회장을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묵자의 사상을 그림 그리는 일과 어떻게 연결하시는지요. 앞서 언급했던 물의 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요.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복잡한 생각보다는 앞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더는 헛되고 나쁜 일을 안 하는 길이 무엇인지? 이러한 물음을 던지면서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매주 모여서 책을 펼치지요. 소위 인간적인 삶의 자세에 따라서 자연이나 강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묵자는 간단히 말해서 B.C 5세기, 그러니까 춘추전국시대 목수 출신으로서 철학자이며 과학자이고, 반전평화주의자이죠. 진보적인 학자로서 이 시대상황에도 메시지를 들려주는 분이죠. 여담으로 공부마치고 뒤풀이에 건배사가 묵자~ 노자~입니다. - 뜬금없는 질문인데요. 즐기는 음악장르는. 만약 내가 미술을 하지 않았다면, 음악을 선택했을 겁니다. 젊어서는 풍물을 즐겼고 요즘은 대금, 첼로, 바순소리를 좋아합니다. 수묵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더욱 그러지 않나 싶습니다. 지금 할 수 있다면 거문고. 괜한 욕심이겠죠? - 앞으로 작품활동 방향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요즘 다른 강에 가서 좀 놀다 왔습니다. 그 강도 섬진강도 모두 소중하고 아름답죠. 글쎄요, 모두 다 그리면 좋으련만. 다만 창작은 일상으로 즐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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