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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소설가, ㅇㅇㅇ '지역의 사생활 99: 전주'

내게 고향은 통념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는 단어다. 어린 시절의 풋풋하고 아련한 추억이 있는지 잘 모르겠고, 아름다운 동네의 풍경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이 떠나는 구도심에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해가 지면 눈에 띄게 조용하고 어딘가 으스스한 기억이 조금 더 많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곧장 전주로 왔다. 19년쯤 산 익산에는 그렇다 할 애정이 없었고, 더 큰 도시인 전주에서 새롭고 다양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학 때, 때아닌 괴롭힘을 당한 탓에 졸업을 목전에 두고 도망치듯 전주를 떠났다. 그러면서 되도록 전주에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돌아온다 해도 대학 졸업을 하기 위해 다녀갈 뿐이라고. 고향 같은 건 없어도 괜찮고, 어딘가에 새로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럭저럭 서울에서 산 지 4년쯤 되었을 때, 다시 익산으로 돌아갔다. 서울은 일상이 너무 바쁜 친구였고, 익산은 연락이 너무 없는 친구 같았다. 둘 다 마음 붙이기 어려운 친구들이었다. 결국 사람 때문에 질려서 도망친 전주에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전주를 조금 미워하는 채로. <지역의 사생활 99>는 전북 군산의 만화 전문 출판사에서 지역을 주제로 제작한 만화 시리즈다. 그중 소개할 책은 전주 편이다. 작가는 전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전주를 떠난 지는 10년이 넘었다. 가족들도 모두 전주를 떠났기 때문에 작가가 전주에 올 일은 관광뿐이라고 했다. 작가의 말이 서울에서 전주를 떠올리는 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은 위로가 됐다. “요즘은 전주를 떠올리면 ‘나는 이제 거기 갈 일이 없는데…’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아쉬움인지 후련함인지 나름의 애착인지 스스로도 참 헷갈립니다. (중략) 과거에는 몰랐어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저는 전주라는 지역은 참 좋아하는데, 그곳에 남아있는 제 그림자들이 싫었던 것 같거든요. 전주에서 지냈던 날들의 풍경을 떠올리면 참 평화롭고 좋은 곳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전에는 오해하고 미워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항상 잘 지내기를 바라는 친구 같아요. (<지역의 사생활 99: 전주> 중)”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큰소리로 여러 번 웃었다. 구석구석 전주에서 생활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작가가 던지는 농담들이 무척 즐거웠고 동시에 틈틈이 섞인 전주를 향한 애정이 느껴져 반가웠다. 무엇보다 전주를 떠났을 때, 돌아올 때의 마음들을 돌이켜보며 위로받는 경험이었다. 가을이면 잎이 노랗게 무성한 향교를 좋아했고, 여름이면 시원한 독립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을 좋아했다. 또 가고 싶은 식당이 있고, 기꺼이 안부를 묻는 이웃이 있다. 요즘에야 내게 고향이 생긴 기분이 든다. 덕분에 이 책을 더 기쁘게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전주의 장소와 얼굴을 떠올리면서.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3.08.16 18:47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기우 극작가, 김양오 '백 년 동안 핀 꽃'

춘향사당은 남원을 배경으로 한 고전소설 「춘향전」의 여성 인물인 성춘향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1931년 광한루원에 세운 영정각이다. 춘향사당은 이곳을 건립하고 오랫동안 제사 지내는 일에 앞장섰던 남원예기조합 최봉선(1900∼1974)의 꿋꿋한 삶과 의지가 스며 있어 더 의미가 깊다. 부산 출신인 최봉선이 남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24년 봄. 열녀 춘향에 대한 흠모의 정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던 그녀는 남원의 유지들과 사당을 짓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일제 관헌은 모든 협조를 거절했고, 몇몇 사람은 ‘천한 퇴기의 딸 춘향의 사당 건립은 점잖지 못한 일’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나 최봉선은 뜻을 굽히지 않고 기금 2백 원을 내놓았으며, 동료들과 모금 운동에 나서 건축비 1천 2백 원을 모았다. 초상화는 ‘진주의 화가 강(姜) 모 씨’에게 맡겼으며, 1929년 춘향의 생일로 여긴 음력 4월 8일에 준공식을 올렸다. 춘향사당 낙성식과 제전이 열린 1931년 6월 3일. ‘1931년 단옷날 새벽,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기생 100여 명이 사당 앞에 줄지어 섰다. 남원 권번 기생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인 기생들이었다. 남원 출신으로서 경성뿐 아니라 전국에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화중선, 이중선 자매도 와 있었다. 사당 안에는 사당 건립 기금을 가장 많이 낸 평양 권번, 진주 권번, 남원 권번 대표가 들어갔다. 춘향 영정이 사당 가운데 걸려 있고 그 앞에는 제사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본문 중에서) 최봉선은 오랜 세월 정월 보름과 추석, 동지 등 절기에 맞춰 호젓하게 춘향사당을 찾았으며, 사재를 털어 선양회의 전신인 봉향회에 제수답을 기부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춘향의 영정을 주천면으로 옮겨 전쟁의 화마에서 지켜냈다. 소설 속 인물인 춘향을 현실 세계로 불러오고, 이야기 속 춘향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 후손들의 본보기로 삼은 것은 춘향을 향한 열녀 최봉선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춘향사당과 춘향 영정은 춘향의 정절을 이은 최봉선과 같은 이들이 있어 존재만으로도 감동을 준다. 그래서 춘향 영정 앞에서 실소가 터지는 일은 애초부터 없었어야 했다. 올해 5월 새로 봉안된 영정을 보는 관광객들의 비난과 조롱이 워낙 거세니 하는 말이다. 춘향의 얼을 기리고 알리기 위해 1995년 빈 무덤의 춘향묘를 만들고, 매년 참배 행사를 여는 남원사람들의 애달픈 속내를 안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최봉선의 삶은 김양오의 동화 『백 년 동안 핀 꽃』(빈빈책방·2021)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초의 지역 축제 춘향제를 만든 최봉선’을 부제로 한 이 동화는 1931년 제1회부터 1967년 제37회까지 제주(祭主)를 맡아 춘향제향을 모셨던 최봉선의 결의에 주목한다. 그녀는 철저한 계급구조 사회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던 기생의 삶에도 자긍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그의 꾸준함은 배제된 존재들을 역사에 써넣을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조선의 도자 문화를 전파한 조선 도공들의 애처로운 이야기를 『도자기에 핀 눈물꽃』(빈빈책방·2020)에 풀어낸 작가 김양오의 시선은 조선 시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한 선비의 어진 마음과 일제강점기 민족의 한과 설움을 어루만진 소리꾼 이화중선으로 이어져 『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빈빈책방·2022)와 『아리 아리 아라리요』(빈빈책방·2023)로 확장된다. 매년 남원의 역사·문화 콘텐츠를 세상에 알리는 작가 김양오의 남원 사랑이 최봉선과 다르지 않다. 최기우 극작가는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상봉>,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은행나무꽃>, <달릉개>와 어린이희곡 <뽕뽕뽕 방귀쟁이 뽕함마니>,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쿵푸 아니고 똥푸>, 오디오북 <들꽃상여>, 인문서 <꽃심 전주>, <전주, 느리게 걷기>, <전북의 재발견> 등을 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관장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3.08.09 17:4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작가, 임재정 '아돌프, 내가 해롭습니까'

여기 노동 최전방에서 시인이 쓴 ‘노동의 유물론’이 있다. 시집을 열면 노동자로서의 고독과 비애는 물론 자본 이데올로기를 조롱(저항)하며 타자들의 소멸로 근근이 살아왔던 우리에게 타자와의 연대를 자극한다. 자본의 질서에 순치되어 시를 안 읽는 당신에게 시 읽기의 명분을 제공할지도 모르겠다. 겹침에서 오는 마블링처럼 자본시장의 압력과 관계망에서 규율되고 통제되는 노동자는 “노래와 비명 사이 풀을 뜯는 한낮의 양들”(「마블링」)이다. 늑대(자본주의)에 잡아먹힐 태생적 한계 상황에서 공포와 불안을 견디며 행복을 꿈꾼다. 그러나 착취와 불합리, 이익의 관점인 자본주의 허구성(기회비용)은 노동자에게 행복 포기를 합리화한다. “밤은 그러나 조금 달라야 했”지만 “깨어보면 장미 울타리를 지나온 생각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마블링」)을 뿐이다. 임재정 시인 또한 자본에 종속된 이 시대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음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좌절하지 않고 암유와 환유로 무장한 ‘시의 현장’에서 존재와 정립을 위한 분투,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에 투쟁한다. 자신 또한 늑대에 물려 피 흘리지만 ‘고통이 없는 것은 결코 윤리적일 수 없다’는 레비나스의 명제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타자와 더불어 ‘아프기’를 주저치 않는다. 그렇다고 노동의 유물론 『아돌프, 내가 해롭습니까』는 계몽주의의 교양이념도 노동 진보주의 담론서도 아니다. 노동시장에서 견인한 골조와 파편들로 지어진 ‘시의 집’이며 견고한 무기다. 이 시집이 근사한 이유는 비극적 허무주의에 빠져있지 않다는 점이다. “빗소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요 환호로 가득한 응원, 위로와 치유, 빗소리를 다져 넣은 요리 (중략) 지느러미 달린 생으로 환생하는 꿈을 꿉니다”(「빗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만난 적 없지만 단언컨대 시인은 이념과 형식에 있어 자유로운 노동자다. 노동자의 생래적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자본 독재에 맞서는 환상이나 꿈은 ‘도취’를 전제로 한다. “부어 곱은손을 뜨거운 물에 불려 깨우고 신기루와 오로라 사이 내일로 출근”(「나는 사막으로 갑니다」) 시인의 다소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방식, 노동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구절들 틈바구니를 헤매다 보면 그가 불합리와 구태에 어떻게 저항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주체의 정념이 인간주의적 관점으로의 확대를 모색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늙은 주인과 황구가 살았습니다 물어간 신발을 실랑이하며 (중략) 봄날 지나 깊은 밤 건너 바야흐로 아침이었는데요 시들한 몸에 아지랑이가 가장 군침 돌았습니다”(「클라이맥스라고는 없는,」) 고백건대 시의 표현양식 ‘낯설게 하기’는 필자에게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극사실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비현실‧비실재 시어들이 환기하는 이미지가 자본주의 이면, 노동의 본질과 다름아니기 때문이었다. 망치,포클레인,철근더미,전깃줄,스패너,용접아크,보일러연통,프레스,반죽기 등 노동 관련 이미지와 대비되는 풀 뜯는 양,장미울타리,비누방울,풍선,구름의 발자국,노을,나비와 같은 낭만적인 언어가 현실을 상쇄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결국 삭막한 현실로 치환된다는 점은 이 시집의 중핵에 해당된다. “감쪽같이 무지개가 스패너로 바뀌는 이야기 (중략) 스패너로는 죌 수 없는 너트로 꽉 찬 무지개 이야기 미안하다는 거짓말을 뭉뚱그리면 국경이 되고 빠삐용이 되고, 우린 나비라 부릅니다”(⸢비누⸥) 자본과 노동의 마블링처럼 겹침과 분리가 철저한 상황에서 ‘노동하지 않을 자유’가 없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노동하기’를 사랑한다. 노동 체험과 언어의 간극, 피안이 아닌 노동현장, 반문과 의문, 존재론적 실체를 표상하는 기호, 아이러니 문장들이 ‘노동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그만의 독특한 발상이다. 그리하여 탈출을 감행, ’양들이 풀밭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으며 행복했다...’는 궁극을 기록하고 싶은 자이다. 결국 노동은 삶이자 죽음을 향한다. “완성되는 세계란 없다 내게 등기된 창문 하나 없이 늙어가는 아이가 있을 뿐이다”(⸢액자들⸥) 임재정 시인은 시로써 무자비한 현실 속 노동의 세계를 드러내고 발언함으로써 죽음이 아닌 ‘영원함’을 도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세계 에 굴복하지 않되 재생을 바라는 그의 작업이 가능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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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2 17:1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 박도순 '거기 사람 있어요'

아흔다섯인 어머니는 보건진료소를 방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때가 많다. 간밤에 열이 올라서, 벌에 쏘여서, 들깨 모종을 한 후 몸살이 나서 등 여러 이유로 진료소를 이용한다. 다른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인구 절반가량이 만 65세 이상의 노인이라는 산골 동네에서 보건진료소는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곳이다. 얼마 전 그곳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책을 만났다. 무주 산골 보건진료소장으로 활동하는 박도순의 산문집 ⟦거기 사람 있어요⟧이다 박도순 소장은 산골 동네에서 간호 일을 하며 동네 분들의 삶을 깊이 있게 읽어내고 가려운 곳을 긁어 드릴 줄 아는 사람이다.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진리를 체득하고 삶을 반추하며 하루하루를 그들과 함께 꽃 피운다. 인생이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 “하고 싶은데 해서는 안 되는 그 일, 날마다 그것을 물리치는 일이 인생”이라면서 어제 물리친 그 일로 인하여 오늘 밥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어르신, 귀가 어두워 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딸이 설치해 준 ‘알 낳는 거시기’(복합기 팩스)로 소통하며 청각 상실의 불편을 해소하는 강 씨, 김장 증후군에 걸려 소화불량과 변비로 고생하시는 엄마들,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 않는 세상을 살면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도장을 찍고자신의 손으로 결정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여기시는 어르신들, “세상일이 어찌 좋을 수만 있고 나쁠 수만 있겄는가. 좋은 일이 생길 때는 무슨 안 좋은 일 주시려고 이러나, 또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는 무슨 좋은 일 주시려고 이러나 생각하라.”라고 조언해 주시는 어르신. 이들의 삶을 그녀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자세히, 그리고 오래 들여다본다. 순박한 우리네 이웃들이 짠하여 먹먹해지기도 하고, 유머 있고 낙천적인 삶을 만나면 감동이 되고, 지혜로운 우물에서 건져 올리는 그분들의 철학 앞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사람이란 좋은 기억을 간직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사랑으로, 그리움으로 살아간다”는 강 씨의 고백처럼 그녀는 아름다운 추억을 생산하려 노력한다. 형식적인 활동이 아니라 주민들과 시선을 맞추고 속내까지 들여다본다. 낮은 물론 늦은 밤이나 새벽에도 약을 처방해 주고 도움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때때로 방문 진료를 하면서 거동이 불편한 주민들의 발이 되어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해주기도 한다. ‘그들 한 생애가 책’ 임을 깨닫고 그들이 써낸 글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공감하고 융화한다. 주민들의 육체는 물론 정신적인 아픔과 외로움까지 간호하는 데 정성을 기울인다. 이 책은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고,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따라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삶의 가치를 선물할 것이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고교 국어교사로 201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또 그는 2010년부터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3.07.26 17:5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작가, 단비청소년 문학 '너의 여름이 되어 줄게'

길을 걷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교복을 입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주말이면 교복을 벗고 시내로 나가려고 잔뜩 멋을 부린 아이들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속내가 궁금해 관심 있게 지켜보곤 했었다. 전주에서 활동하는 다섯 명의 작가가 쓴 청소년 단편집 <너의 여름이 되어 줄게>를 통해 무표정과 환한 얼굴 속에 감춰진 아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만날 수 있었다. 작품 속의 아이들은 엄마 핸드폰으로 게임 무기를 산 뒤 그 돈을 갚기 위해 알바를 하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몰라 만날 지각하고 유학 간다는 거짓말을 꾸며댄다. 자신에게 모든 걸 건 엄마를 놓을 수 없어 다가오는 사랑을 외면하고, 자신도 따돌림당할까 봐 친구의 어려움을 애써 모른 척한다. 그리고 한 번의 시험 실패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퇴를 고민한다. 이런 것들은 지금 이 땅에 사는 청소년들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겪고 고민해온 문제겠지만 절대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기본적인 시급조차 지켜지지 않는 청소년 노동문제나, 불투명한 미래를 두고 꿈과 희망을 찾지 못해 쳇바퀴 돌 듯 시간을 죽이는 아이들이 있다.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랑이라는 감정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학교폭력으로 괴로워하고, 단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 입시제도에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을 고민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한 환경과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다행인 것은, 노트에 끝없이 찍혀있는 점만을 보고도 준서의 마음을 이해하고 손 내밀어주는 선우선생님 같은 어른이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 내게 어떤 꿈을 꾸는지, 내가 행복할 때는 언제인지 늘 물어야 해. 잘못된 길에 들어서면 나올 수 있게 나를 격려해 줘. 비뚤어진 자리에서 끌어내는 건 바로 나여야 해. 나를 지키는 건 나야.” 선생님 말에 준서는 두려웠지만 해내려는 의욕을 가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희망적인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순수, 열정, 사랑의 힘이다. 아이들은 실리나 이해를 따지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향해 직진하고 폭행과 협박을 당하는 친구를 위해 온몸을 던진다. 그런 생각과 행동을 통해 방법을 찾고 스스로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고 교문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을 길에서 만났다. 웃고 떠들고 재잘거리는 아이들 속에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걷는 아이에게 마음이 쓰인다. 어깨를 다독이며 “괜찮니?”라고 묻고 싶다. 그리고 슬쩍 가방 속에 이 책을 넣어주고 싶다. 아이들의 고민에 작은 힌트라도 되기를 바란다는 다섯 작가의 바람까지 얹어서.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통일 동화 공모전과 이다 생명문화 출판 콘텐츠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공동수상),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 등이 있으며 지난해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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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19 16:5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근혜 작가, 조미형'바다가 걱정돼 : 바다를 위협하는 7가지'

나의 외갓집은 여수시 소라면 사곡리다. 어릴 적, 주말과 방학이면 어김없이 외갓집으로 달려가 바다와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내게 놀이터요 휴식처였다. 외갓집 마을의 특산품은 꼬막이다. 골이 깊고 알이 굵은 참꼬막은 사곡면의 자랑이었다. 지금은 꼬막이 종적을 감췄다. 갯벌에서는 고약한 시궁창 냄새만 난다. 꼬막 밭은 왜 불모지가 되었을까? 생태 환경이 바뀌었다고 하기에는 갑작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바다가 병들었다는 걸. 무엇이든 내어 주던 바다가 속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음을 썩어가는 꼬막 밭은 말해준다. 또 하나의 비보가 가슴을 후려친다.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출한다는 소식이다. 130만 톤에 달하는 오염수를 바닷물에 흘려보낸다니. 그럼, 바다는? 바다 생물은? 인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에 생각나는 건 하나 뿐. 재앙! 바다가 걱정되는 날이 길어질수록 조미형 작가의 『바다가 걱정돼/바다를 위협하는 7가지』(특서주니어)가 더욱 생각났다. 『바다가 걱정돼』는 해양 문제를 어린이들 눈높이에 맞게 쓴 에듀테이먼트 논픽션 도서다. 조미형 작가는 국제신문 신춘문예 소설로 등단한 뒤 꾸준히 바다 관련 책을 출간한 저력 있는 부산 출신 작가다. 『바다가 걱정돼』 는 7가지 해양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름, 폐수, 쓰레기, 선크림, 낡은 어구, 해저 채굴, 바닷물 온도 상승이 주제다. 핵심 키워드를 제시한 뒤 문제점의 원인과 진행 과정 그리고 문제 해결책으로 구성됐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각각의 문제 상황을 어린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엮은 7편의 단편 동화다. 해수와 친구들은 서해안의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로 양식장을 비롯해 바다 전체가 기름으로 뒤덮이자 기름때를 제거한다. 바다 생물이 기름으로 죽어가는 걸 본 아이들은 바다를 꼭 원래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다짐한다. 산호가 하얗게 변해서 죽어가는 이유가 선크림에 들어간 화학성분 때문이라는 아빠의 말에 레아는 충격을 받는다. 레아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산호를 살리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려 한다. 이 외에도 바다 쓰레기로 인해 사고를 당하는 세오, 버려진 낡은 어구로 아찔한 일을 당할 뻔한 어진, 바다 콧물에 갇힌 샨, 해저 탐험을 하러 갔다가 사람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진 루미, 함덕 해수욕장에서 용오름으로 보고 환경을 중요성을 깨달은 동윤과 희강이 이야기가 정보의 이해를 높이고 책의 재미를 더한다. 살이 타지 않기 위해 바르는 선크림이 산호초를 죽인다는 걸 몇이나 알까? 수시로 바꾸는 전자기기 제품에 들어가는 원료를 바닷속 광물을 채굴해서 얻는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이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먹고 쓰는 것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어른들이 성공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실을 묵과하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에는 『바다가 걱정돼』를 옆구리에 끼고 가족과 함께 바다로 가는 건 어떨까. 그리고 바다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하자. 바다의 안전이 곧 우리의 안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 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근혜 작가는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선물>로 등단했다. 낸 책으로는 <제롬랜드의 비밀><나는 나야!><유령이 된 소년><봉주르요리교실 실종사건><다짜고짜 맹탐정><너의 여름이 되어 줄게>(공저)가 있다. 현재 최명희문학관 상주작가로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3.07.12 17:3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경옥 작가, 은경 '애니캔'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인구가 천만을 넘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물론 필자도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동물들이 인간의 생활 속으로 들어온 지는 오래되었으나 지금처럼 아파트라는 주택 공간에서 먹고 자는 걸 함께 한 지는 수십 년에 불과하다. 이러한 반려동물과 인간의 공생이 꼭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문제 제기한 동화가 선보였다. 신의 영역이라고 할 만한 생명 복제의 영역까지 넘나드는 상황에서 동물들의 성격과 품종, 성견이 되는 시간, 수명까지 인간이 원하는 대로 공장에서 생산한다는 설정이 이색적인 작품이다. 《애니캔》은 책 제목이면서 반려동물들을 생산하는 회사 이름이기도 하다. 모든 반려동물을 알루미늄 캔에 <인공동면> 시켜 소비자가 필요할 때 꺼내서 파는 곳이다. 회사에서 생산한 사료와 간식만을 먹여야 하며, 어기게 되면 반려동물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부작용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즉, 의도하지 않게 회사의 사료나 간식이 아닌 것을 먹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응급 상황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반려동물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반려동물의 수명도 소비자인 인간이 정할 수 있다. 키우다 싫증 내는 경우를 생각해서 1년이나 3년, 혹은 5년이라는 기대수명을 인간이 정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더구나 반려동물의 기대수명을 정하는 것에 사람들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즉, <애니캔> 회사는 오직 돈을 버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동물의 수명이나 응급 상황에 대한 도덕적 윤리 의식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동물의 생명도 자본의 원리를 적용시키는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우리 사회가 인간이 아닌 생명에 대해 무감각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따라서 책 속의 주인공 ‘새롬’이도 강아지 ‘별이’가 아프고 나서야 자신을 되돌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나한테 잘못이 있는 줄은 몰랐어. 그런데 별이가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캔 속에 들어가게 됐는지 하나도 궁금해하지 않았잖아. 그저 별이는 우리 집에 즐거움만 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거야. 내가 별이에게 어떻게 해 줘야 하고 어떤 가족이 되어 주어야 할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 -p112 위의 대사를 통해 인간이 동물을 키울 때 순수한 마음이었는지,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경제를 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까지도 자칫 효용성만을 앞세우는 건 아닌지, 성찰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생명에 대한 경시 현상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사람조차 알루미늄 캔에서 생산한다는 설정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생명에 대한 경외감 대신 어떤 것도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을 게 없다는 만능의 시대에 살아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으면 결국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위태로운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나마 위안으로 다가온 건 작가가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많은 선택에는 책임감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아저씨는 비열해요. 동물들을 이용만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아닌 척하고, 그런 아저씨에게 별이를 맡길 수는 없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정한 기간만큼만 사는 게 동물들은 행복할 거라고요?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동물들에게 물어봤어요? 아저씨는 누가 아저씨 수명을 딱 정해 주면 행복하겠어요?” -p154~155 주인공 새롬이는 <애니캔> 대표를 찾아가 절규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고. 인간이 다른 생명의 모든 걸 관장할 수는 없는 거라고. 더 늦기 전에 생태계의 고리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리라는 걸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이경옥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두 번째 짝>으로 등단했다. 또 그는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사업과 2023년 한국예술위원회 문학나눔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저서로는 <달려라, 달구!>, <집고양이 꼭지의 우연한 외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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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7.05 18:0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헌수 작가, 안도현 '뭉클했던 날들의 기록. 사랑하고 싶은 순간들'

“병란아! 병란아! 아이고 우리 병란이 어쩌냐, 우리 병란이 불쌍해서 어쩌냐.”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두 팔 벌리고 달려드는 언니 품에 깜짝 놀란 기색으로 엄마는 안겼다. 아! 엄마는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꽉 막힌 울음이 한 번 터지더니 서너 시간을, 마치 엄마 손 놓친 길가의 아이처럼 꺽꺽 울었다. 그 울음으로 더는 만날 수 없는 이들이 울었고, 그 울음 곁에 늘어선 이들도 따라 울었다. 빈소는 엄마의 울음으로 가득했고 나의 뜻 모를 근심도 비로소 놓아졌다. (닭 모가지 비틀어 아홉 남매 키운 이모 중에서) 아들의 장례를 치르며 담담했던 엄마가 언니를 보면서 울음을 터뜨린 장면이다. “언니는 내 맘을 아니까...... 언니는, 울 언니는 내 맘을, 다 아니까.” 이 대목을 읽다가 눈물이 쏟아졌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품에 기대어 꺽꺽 울 수 있다는 것, 언니는 내 맘을 알잖아 라는 한마디가 깊게 내 마음을 흔들었다. [뭉클했던 날들의 기록]과 [사랑하고 싶은 순간들]. 이 두 권의 책은 신산한 삶을 살아 온 이야기와 저마다 다른 빛깔의 경험과 그리운 마음을 담고 있다. 집을 나간 아빠와 함께 사는 여자가 하늘로 떠나기 전에 당부할 게 있어서 찾아온 이야기, 콜 센터에서 정한 할당량의 전화를 받아주며 알게 되는 친절의 힘, 선물처럼 찾아온 작은 생명, 병동주방을 윤기 나게 치운 보호자에게 잡채를 선물하는 뜨끈한 정, 운동장의 잡초를 다 솎아낼 정도로 학교 일에 열성이었던 주사님, 최명희 작가에게 도근점과 지혜의 돌기둥을 선물로 받은 이야기, 정서장애가 있는 영철이와 교장선생님, 지난한 삶을 함께 했던 다양한 인간관계가 들어있다. “어떤 이야기는 함부로 꺼낼 수 없어서 벚나무 껍질 속에 묻어둔다. 혼자 울기 좋은 날, 잠깐 꺼내보고는 다시 벚나무 진액으로 밀봉해버린다.”(두 신부님 중에서) 90명 필자들의 이야기를 꺼내 읽는 시간은 차분하고 담담했다. 진솔하고 소박한 이야기가 양념을 치지 않은 담백함으로 다가왔다. 슬픔을 나누며 마음을 건네고 기뻐하는 모습이 가감 없이 그려졌다. 감정에 잠재적으로 깃들어 있는 운율을 따라서 희망을 꽃피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 시절의 각박하고 힘든 삶을 충분히 아파하며 오늘을 사는 힘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에는 고통이 수반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때 만났던 인연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꺼내어 본다.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지금은 곁에 없는 누군가를 호명하며 그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모두의 수고와 희생으로 삶은 터덕거리면서 굴러가는 거라고, 팍팍한 삶 앞에서 주저앉고 싶을 때, 살아가는 동력이 되어줌을 말하고 있다. 강퍅해져가는 세상에서 물기어린 따뜻함을 만날 수 있는 두 권의 책, 90명 필자의 삶이 커다란 위로로 다가왔다. 김헌수 작가는 20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삼례터미널'로 등단했다. 또 그는 '작가의 눈' 작품상을 받은 이력이 있다. 그의 시집으로는 <다른 빛깔로 말하지 않을게>,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고, 시화집으로는 <오래 만난 사람처럼>, <마음의 서랍>이 있다. 오디오북으로는 <저녁 바다에서 우리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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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28 17:4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영주 작가, 김헌수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

김헌수 시의 서평을 쓰겠다고 호언장담하고, 후회막급이었다. ‘대체 어디서, 대체 어쩌자고 그런 망발을 했을까!’ 하지만 쓰고 싶었다. 느끼는 감정은 내 것이니 누군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거니까. 시인의 관찰력, 감성, 시어들을 나는 좋아한다. 이번 기회에 정독하고 싶었다. ‘흉터가 많은 삶의 흔적과 부딪히며 넓어지는 내 안의 지평/ 다음 문장을 기다리는 당신과/ 잔향 殘香이 오래도록 맴도는 빗소리를 듣고 있다.’ 시인의 말, 짧은 문구에는 모든 게 다 담겨 있다.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 안에는 흉터가 오랜 삶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시인은 지난 흉터를 보며 자신의 안이 넓어진다고 한다. 시인의 시어는 참 다양하다. 평상시에도 맛깔스럽게 말하고, 주체할 수 없는 재능이 넘친다. 사계의 철학관 봄‧여름‧가을‧겨울을 거듭나면서 변하는 우리 삶, 시인은 예견한 시간보다 비껴간 시간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시다. 그리고 앞으로 반복될 사계가 궁금하다. 시집은 특히 시인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가족과 함께했던 추억이 많이 담겨 있다. ‘금상동 하늘 자리’, ‘봉투’, ‘초포다리’, ‘동백’, ‘그녀 이정이’, ‘후정리’, ‘금덕여인숙에서는’ 등의 작품이 있다. 나이를 먹는 걸까? 그리움이 덤덤하다. 하지만 여운은 짙다. ‘천정이 넘실거리고 벽은 내 곁으로 따라오고/ 바람이 헤집어 놓은 평행의 회귀선은 버뮤다 삼각지대를 돈다/ 사라지는 별을 본 내 걸음은/ 구름을 깨트리며 질퍽하게 첨벙인다‘ ‘이석증’ 시의 일부다. 시인은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했을 터이다. 오죽하면 ‘마의 바다’ 버뮤다 삼각지대를 비유했을까! 통증이 전이되는 것 같다. 언젠가 이 시를 읽으며 시인에게 감탄했다. 연금술사처럼 빛나는 시어로 문장으로 만든다. ‘조금씩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은 함초밭, 비자나무, 벚나무, 앵무조개, 도라지꽃, 조팝나무, 모과나무, 찔레 덤불 연마다 당신을 추억한다. 마지막 연에서는 죽은 제라늄에 물을 준다. 당신과의 기억이 각기 다른 색으로 조금씩 수줍게 다가가다 서로 익숙해지는 당신과 나. 결국 이별의 아픔은 빈 의자와 아픈 당신, 손도 못 대고 식어가는 녹두전을 앞에 두고 상실을 짙게 느끼게 한다. 다시 살아나지 않을 줄 알면서 죽은 제라늄에 물을 주는 나, 후회일까! 절망일까! 당신을 생각하는 시간의 색이 궁금해진다. ‘실리카겔’은 이쪽에서 저쪽까지 밀봉하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있는 그대로다. 지문이 닳아 밀쳐 낸 몸에 애달픈 기억을 압축해 놓는 일, 테두리가 있는 흔적을 염탐하는 일이란 말에서 기억이 새지 않도록, 배어 나올까 지켜보고 있다. 섬세함과 누적된 기억과 경험을 바지런하게 사유하는 김헌수 시인. 김 시인만의 묘한 매력의 시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길 기원한다. 김헌수 시인과 양념장을 서로 얹어주며 국수 한 그릇 먹고 싶다. 김영주 작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돼 2018년 동양일보 동화부문 신인문학상 수상했다. 그는 2020년 장편동화 『레오와 레오 신부』 출간했고, 2021년 청소년 소설 『가족이 되다』, 2023년 수필 오디오북 『구멍 난 영주 씨의 알바 보고서』 , 『너의 여름이 되어줄게』5人앤솔러지 청소년소설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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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21 17:54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오은숙 소설가, 손홍규 '귀신의 시대'

화자는 ‘무턱대고 아무 버스에나 몸을 싣고 서울 떠’(6쪽.랜덤하우스)나 고향 마을 저수지에 도착한다.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동안 낫을 든 사내와 체육복을 입은 남자, 그리고 열댓 살의 소년을 만난다. 소년이 화자에게 들려주는 따식이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내가 읽는 소설의 정체를 가늠하려 <귀신의 시대>라는 표제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은유일까, 직유일까. 제목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사건의 추이를 짐작하던 나는 어느 시점이 되자 읽기를 중단했다. 눈을 감고 문장과 행간 사이에서 풍기는 정조를 느꼈다. 정조를 드러낸 정서가 좋아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말아야 한다고 기대하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의식적인 강박을 내려놓았다. 때를 같이하여, ‘예전에 아무도 몰래 고향을 찾아왔을 때 누워 있던 그 자리에 종구 형이 있었다’(67쪽)는 문장이 눈에 들어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소년이 낚시터를 찾은 화자의 괄호( )였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 없이 괄호 안을 밝혔다가 영화로 말하면 스포일러가 되겠구나 싶어 지웠지만 눈썰미 있는 독자는 더 빨리 알아차려 오히려 뒤늦은 파악이 멋쩍을지 모를 일이다. 노령산맥의 그늘을 보고 자란 소년은 머슴의 후손이었다. 머슴이든 아니든 ‘삶이 끝나버린 순간 삶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귀신이었’(113쪽)고 시대를 거쳐 간 국민학교, 변소, 당골네, 전화 교환원, 평화의 댐 같은 단어들은 머슴 ‘귀신’에 올라탄 망령이었다. 그것들은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노령산맥 그늘에서 묵직한 소리로 울었다. 아궁이 앞에 앉은 소년의 누나가 ‘삶’이라 끄적이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선택을 할 때 소년은 이미 귀신들을 만났고 여러 차례 혁명을 꿈꿨다. 일없이 전화 교환원에게 전화를 걸어 욕을 하고, 마을 확성기를 이용해 딸에게서 전화가 왔으니 어서 오라고 거짓 방송을 해서 댓골댁을 허탕치게 만든 소년은 남의 집에서 손톱을 깎거나 빨간 글씨로 이름을 쓰는 등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것들을 했다. 그렇게 소년은 금기라고 생각되는 것들과 싸웠으나 그것이 소년의 투쟁이란 걸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유를 간직한 <귀신의 시대>는 죽은 자를 구분 짓고 멀리하는 우리의 관습, 그 이상의 것을 숨기고 있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비합리적이어서 거부하거나 시각의 차이라고 하기에는 폭력적이어서 투쟁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하여. 소년의 저항은 큰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은밀하고 신중하며 사사롭다. 어느 때는 유머를 간직한 채 말이다. 오은숙 소설가는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공저로 <1집 스마트소설>, <지금 가장 소중한 것은>, <2021 신예작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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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14 18:0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창영 작가-알도 레오폴드 '모래 군의 열두 달'

새벽 4시는 눈보다 귀가 먼저 열리는 시간이다. 사방이 어둠에 둘러싸여 있을 때 귀는 가장 먼저 세상이 열리는 소리를 듣는다. 밤새 울던 새가 사라지자 그 침묵을 깨고 아침의 문을 여는 새들이 온다. 때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자 때로 구애를 하고자 새들은 아침 고요의 침묵을 연다. 사방은 새 울음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마 어둠이었더라면 귀가 더 먼저 더 빨리 반응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새들이 나는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새들의 울음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가만 눈을 감아 본다. 왼쪽, 오른쪽, 아니 앞뒤에서 새들이 울어댄다. 듣고 있으니 정신이 혼미할 정도이다. 어디선가 들리는 새소리, 분명히 귀에 익은 소리다. 하지만 분간할 재간이 없다. 어젯밤에 들으면서 마음에 새겨두었지만 각오는 어디로 갔는지 아침에도 구분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새소리를 따라간다. 멀리서 소쩍새가 울고 검은등뻐꾸기, 그리고 호반새도 울었다. 비가 온 후 습도가 높을 시간대에는 새들이 우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린다. 오늘처럼 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이면 새소리는 더 높고 멀리까지 전달된다.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소리다. 새소리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난 후, 새소리가 더 잘 들리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건 나만은 아니다. 여전히 구분은 쉽지 않지만 조금은 새와 더 친해진 느낌이다. 가만가만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따라가 본다. 잘 듣다 보면 어디 하나쯤 내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래 저기 어디쯤에는 되지빠귀, 꾀꼬리, 그리고 검은등뻐꾸기 소리도 들린다. 아, 딱새와 박새가 내는 소리가 저런 거였던가. 잠깐 새소리를 듣는 사이에 온갖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다. 어제 사람들 반응이 뜨거웠던 호반새 소리를 들으며 더듬더듬 새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나비를 공부할 때도 그랬지만 새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어디 새만 그러랴. 식물도 그렇고 곤충도 제대로 아는 게 없다. 속도에 취해 주변을 관찰하는 힘을 잃어버린 때문이다. 눈앞에 현란한 모습에 취해 눈 감고 새 울음소리를 들어보는 일을 잊은 때문이다. 알도 레오폴드가 지은 『모래 군의 열두 달』은 자연에 대한 나의 무지를 일깨우기에 충분한 책이다. 처음부터 이 책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고흐가 당대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했던 것처럼 이 책 역시 초창기의 반응은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하지만 입소문을 거듭하여 출판한 지 25년 동안 100만 권 넘게 팔리면서 오늘날 『침묵의 봄』과 더불어 환경생태학을 이야기하는데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히고 있다. 자연에 눈을 뜬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어제까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냈던 나무 이름이 궁금하고, 지금 울고 있는 새 이름이 무엇일까 알고 싶어진다. 내 눈앞에서 스쳐 지나간 나비 이름이 이름을 더듬거리며 상상도 해보는 것이다. 이 책은 한 편의 감성소설을 읽는 느낌을 준다. 자신의 주변을 소소하게 더듬어가는 몇몇 섬세하고 유려한 표현은 우리를 위스콘신의 숲속으로 이끈다. 어둠에서 우리가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청각뿐이다. 그리고 그 소리를 길라잡이 삼아 우리는 나무로, 숲으로 온 신경을 쏟는다. 어둠이 빛으로 변할 때 우리들은 귀로 세상을 읽는 데서 벗어나 눈으로 마주하게 된다. 어제까지 안 보이던 벌레가 갉아 먹은 잎이 보이고 하늘을 나는 새 이름이 궁금해지면 이제 당신도 자연으로 발을 옮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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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6.07 17:4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황지호 소설가, 모악작은도서관 ‘까치밥 시동인 회보 130호’

‘시(詩)가 뭐냐’는 질문에 김종삼 시인은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라는 시에서 ‘엄청난 고생 되어도/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이 세상에서 알파이고/고귀한 인류이고/영원한 광명이고/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답한 바가 있습니다. ‘시’의 본질을 묻는 ‘우문’에 삶의 근본을 밝힌 ‘현답’으로 응수한 시인의 혜안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습니다만, 정작 ‘알파’의 삶에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활자와 문장의 바다, 추상과 관념의 미로, 이익과 손해의 구렁만 헤맬 뿐 행간의 길을 걷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순하고 명랑하며 귀하고 슬기로운 사람들께서 다달이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었음에도 10년을 허송세월했습니다. 10여 년 전, 모악산 주변에 사는 주부들께서 동인을 결성하고 글 강의를 청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시(詩)라는 글자를 파자 하면 절(寺)에서 스님네들이 하는 말(言)로서 그 뜻은 세상살이의 부질없음과 형언할 수 없는 깨달음을 전하며, 그 소리는 불경 소리의 율격을 닮아 멀리 저승까지 퍼진다.’ 라는 그럴듯한 말에 속아 한 계절 허언을 경청하셨었지요. 매시간 책상 위에 따뜻한 차 한 잔을 준비해 주셨고, ‘작가님’이라 공손히 불러 주셔서 어깨가 천장까지 닿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의 인연을 잊지 않고 삭망에 맞춰 회보를 보내주셨습니다. 130호째 입니다. 답을 한 적도 없고, 좋다 나쁘다 뜻을 전한 적도 없는데, ‘우공이산’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 우직함이나 무던함보다 더 위대한 것은 내내 시를 쓰셨다는 것입니다. 시를 쓰기 위해 마음을 들여다보고 삶을 반추했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숲에서 단어의 나무를 흔들어 치마폭에 문장을 담아왔다는 것입니다. 정작 20년 전 시 쓰기를 포기한 저에게, 허황한 말을 난발하는 저에게, 인연을 그리 소중히 여기지 않는, 부족한 저에게 죽비 소리를 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무연히 앉아 그 가르침을 들여다봅니다. 회보도 책이라면 책인데 면지나 헛장도 없이 표지 뒷면이 바로 본문입니다. B4 크기 종이 양 면에 네 페이지를 인쇄하여 반절로 자른 뒤 스템플러를 박아 만든 회보는 총 10장, 20 페이지입니다. 연하늘색 색지를 붙여 스템플러 박은 자리를 가리고 ‘책등’을 만들었습니다. 스템플러를 박은 마음은 단정하고 색지를 붙인 손길은 고와 수수하고 정갈한 옷감 같습니다. 회보가 곧, 시를 품고 있는 누대의 배냇저고리 같습니다. ‘바람결에 날개를 달고’라는 제호 아래에 씨앗이 흩날리는 민들레 한 포기를 그리셨습니다. 씨앗이 어지럽게 날리니 바람은 분명 왜바람. 그 바람 타고 표지 밖으로 날아가는 민들레 씨가 이소영, 김숙미, 김설강, 유선희, 백경남, 김미현, 권명화 시인께서 지금까지 보내주신 소식 같습니다. 내려앉은 곳을 본 적이 없으므로 지금도 멀리 퍼지고 있을, 꽃을 피운 적이 없으므로 세상 모든 꽃을 품고 있을 시(詩)의 씨앗, 당신들의 마음 같습니다. 이제 일곱 분만 남은 동인은 여섯이 되고 다섯이 되었다가 언젠가는 사라지겠지요. 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라진다고 사라지는 것이겠으며 보이지 않는다고 안 보이는 것이겠습니까. 바람 따라 사라졌던 꽃씨가 봄날 온 들판을 수놓는 것처럼 선생님들의 노래도 여기 그리고 그곳, 지금 그리고 그때, 당신 그리고 내 안에서 피고 지지 않겠습니까. 황지호 소설가는 202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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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24 17:39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 세라 망구소 '망각 일기'

1월 2일부터 수영장에 등록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새벽 다섯 시 반이면 수영장으로 간다. 난생처음 수영장이라는 곳에 발을 디딘 날부터 수영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름을 붙여놓으니 뭔가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내가 얼마나 겁먹었고, 물은 또 얼마나 많이 먹었으며, 모든 게 구제할 길 없이 엉망진창이었는지를 고백한 다음 무턱대고 지난날을 참회하는 기록일 뿐이다. 5개월 차에 접어들자 그마저도 듬성듬성 이 빠진 데가 늘고 있다. 그래서 얼마 전 연달아 읽은 일기에 관한 책들이 떠올랐다. 문보영 시인의 『일기시대』와 세라 망구소의 『망각 일기』 두 책 모두 일독을 권하고 싶었지만, 그중에도 『망각 일기』를 요 며칠 책상에 올려두었다. 최근에서야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세라 망구소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회고록 작가이다. 줌파 라히리는 그를 “오늘날 영미 문단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작가”라고 상찬하기도 했다. 다양한 글쓰기를 하는 세라 망구소는 오랫동안 일기를 썼다. 이 책의 첫 문장도 “나는 25년 전부터 일기를 썼다”이다. 기억과 순간을 붙들기 위해서 “단어로 따지면 8만여 개에 달하는 분량”의 일기를 써왔다는 것이다. 어쩐지 처절하고 사무치는 결기 같은 것이 문장과 문장에서 묻어난다. 『망각 일기』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열린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가진 가장 큰 문제였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지 않고 하루를 마감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 『망각 일기』, 7쪽 작가는 강박적이고, 집요하게 기록하는 삶, 쓰는 자의 삶을 산다. 기록하지 않으면 망각에 이르고, 종국에 그 삶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에게 “일기 쓰기는 무엇을 생략할지, 무엇을 잊을지를 솎아내는 선택의 연속”이었으며, 25년간 일기 쓰기는 “하루 치의 청결을 책임지는 필수 일과”가 되었고, “일기 쓰기를 그만두느니 차라리 씻지 않는 편을 택”할 정도다. 눈치챘겠지만 이 책에는 세라 망구소가 그간 쓴 방대한 분량의 일기가 단 한 줄도 인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기에 관한 글이다. 시간과 그 시간 속 존재들을 기록함으로써 사라지지 않도록 박제해두려했던 마음의 무늬들. 마치 주문과도 같은, 기도와도 닮은 간절함. 그 근원적인 불안과 강박으로부터 어떻게 놓여나고 필멸을 받아들이게 되었는가에 관한 성찰의 흔적이다. 옛 문고판이 떠오를 만큼 책의 판형도 작고 페이지마다 여백이 많은 책이지만, 쉽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글은 아니다. 군더더기 없이 예리하게 벼려진 문장들은 그 앞에 한참을 머무르게 한다. 나의 옛일을 불러들이고, 잊고자 한 일과 기억하고자 했던 순간들을 펼쳐 보인다. 기억하기 위해, 망각하기 위해 사람들이 하는 일을 생각했다. 재밌는 건 일기 쓰기를 통해 생의 단 한순간도 빈틈없이 붙잡고 싶어했던 그의 고군분투를 완전히 전복한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인데, 바로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로 이어지는 경험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며 작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은 잃어버리고, 반대로 생애 초기의 기억은 생생하게 떠올리기도 했다. 그가 구축해온 세계가 뒤죽박죽됐어도 작가는 여전히 일기를 쓴다. “미래는 계속 생겨나”고 우리가 사랑해마지않는 필멸의 존재들이 안간힘을 다해 빛나는 이 세계를 조금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 나는 그 꽃을 미스터리로 남겨둬도 괜찮았다. 아니, 미스터리로 남겨두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래서 다른 아이가 관목의 빈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 『망각 일기』 39쪽 김정경 시인은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시 「검은 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시집 『골목의 날씨』가 있다. 자칭 ‘산책중독자’. 오래된 골목을 유람하며 채집한 이야기로 시도 쓰고, 산문도 쓰며 살고 있다. 현재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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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7 17:05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최아현 소설가 –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했냐'

언젠가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말을 들었다. 일하는 사람이 집에 돌아와 다시 직장에 나가기 전에 힘을 다시 비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말한다. 조금 더 익숙한 표현은 아무래도 돌봄, 가사 노동 같은 이름일 테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퇴근 후 집에 들어섰을 때, 늘 쉰다고 느끼기 어려웠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또 다시 집에서 해야 할 일거리가 쌓여있었다. 배를 채우기 위해 식사를 준비해야 했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깔끔하게 정돈된 옷가지를 준비해야 했다. 깨끗한 집에서 잠들고 싶어 쓸고 닦는 일까지 하면 쓰러지듯 잠들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집에 돌아와도 쉬지 못했다. 오히려 하루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혼자서 그 모든 몫을 해내기에는 시간도 체력도 부족했다. 그동안 집 안 누군가의 암묵적인 몫으로 순순히 덕을 보고 살아오다 별안간 예고도 없이 혼자 그 몫을 다 하게 되었을 때야 무언가 이상했다고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여성들은 명함이 없다고 했다. 일을 쉰 적은 없다. 그들의 노동을 사회에서 ‘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했냐』, 中)” 이 책은 명함 없이 일한 여성들의 인터뷰와 명함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인물이 가사 노동을 기본으로 해 온 터라 모두가 노동력 재생산 전문가다. 그렇다고 가사노동만 해 온 것도 아니다. “누구도 춘자씨의 노동에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여성 농민이자, 가사노동자, 그리고 아픈 남편까지 돌본 요양보호사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했냐』, 中)”현재는 국숫집을 운영하고 있지만, 양잠업 노동자, 한식당 요리사 겸 경영자, 여성복 디자이너를 모두 거치며 돌봄과 가사노동까지 쉰 적이 없는 손정애 씨, 85년부터 탄광에서 일하며 가사와 육아를 병행한 문계화 씨까지. 명함만 없었을 뿐, 아주 많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쉬어 본 적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살림’, ‘집안일’ 같은 단어는 참 두루뭉술한 말이다. 집을 돌보는 일은 단순히 공간을 닦고 정돈하는 일이 아니다. 각 공간을 유지보수하고, 기능을 원활하게 하고, 소모품을 채워 넣는 일, 그밖에 생활에 필요한 여타의 것을 생산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성과가 눈에 띄기 어렵고, 포상도 없고, 끝이 없으며, 급여도 없고, 일정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그 모든 일의 범위는 아주 넓고 다양하고 매끄러운 일의 수행을 위해서는 배경지식과 숙련도가 꼭 필요하다. 그동안 유독 여성들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자리에서 묵묵하게 이름 없이 자리를 지켜왔다. 그래서 더욱 직함을 만들어 붙이고 명함을 상상하는 일이 필요하다. 오랜 노고를 위로하고 포상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최아현 소설가는 2018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아침대화>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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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10 18:12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정숙인 작가-전성태 '늑대'

코로나19 이전의 주요 관광지가 몽골이라고 해도 “그랬을 거야.”라고 할만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코로나19가 지나고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가끔은 몇 년 전 다녀왔던 몽골의 평원이 그려지기도 한다. “나는 늑대 앞에 숙명적인 라이벌처럼 마주서기를 원합니다.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니 죄의식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들이 없는 절대공간에 독대하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사냥하듯이 이루어졌으면 싶습니다. 어쩌면 나는 가장 사냥다운 사냥을 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계 넘기, 경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전성태의 『늑대』에는 전체 10편 중 6편(「목란식당」, 「늑대」, 「남방식물」, 「코리언 쏠저」, 「두 번째 왈츠」, 「중국산 폭죽」)의 공간적 배경이 몽골이다. 한국인을 이주민으로, 서사 공간을 경계 너머로 확장함으로써 다문화사회에 대한 고찰이 가능하도록 설정했다. 사회적 지평과 개인적 지평의 조화로운 만남을 꿈꾸며 현지인과 이주민의 변화된 양상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새로운 ‘다문화담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남방식물」, 「코리언 쏠저」에서는 한국인과 이주민의 상황을 전환시켜 다문화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이주민의 삶을. 「늑대」에서 다중시점을 고수하며 타자에 대한 서로 간의 몰이해와 이로 인한 파국을 그려, 타자는 내가 알 수 없는 나름의 원칙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받아야 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들임을 말한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우리 사회의 탈북자를 향한 편견과 배제를 「목란식당」에서 이야기하고. 「두 번째 왈츠」는 몽골 여인 냐마를 통해 공동체에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이미테이션」은 외모라는 기준이 충족되지 못하면 비록 한국인이라 할지라도 투명 인간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게리’를 등장시킴으로써 왜곡된 인종주의를 풍자했다. 전성태 소설 『늑대』는 인간과 세계,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편협한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포기할 수 없는 삶,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치닫는다. 시대와 역사적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개인의 문제를 묻는 것이다. 우리가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이상적인 다문화사회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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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5.03 19:18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영종 시인- 배귀선 '그리움 쪽에서 겨울이 오면'

보고 싶은 마음이 아지랑이처럼 타오르는 날이 있습니다. 배귀선의 <그리움 쪽에서 겨울이 오면>을 읽기 좋은 날입니다. 어느 집 문을 열면 먼저 반기는 것이 냄새지요. 치매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문을 열면서 그는 깨닫습니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게 있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데, 나는 아버지와 사는 동안 얻은 게 많은 사람이다. 잃어버린 십 년이 아니라 나를 찾는 시간이었지 싶다.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각할 수 있었고, 생각할 수 있어 존재의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움에는 냄새가 있다’ 중). 그리움 쪽에서 오는 경청과 공감은 위로 너머로 나를 데려갑니다. 그는 눈물 한 방울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다정다감한 사람입니다. “파릇파릇한 햇살이 닭의 부리에 쪼이는 소리와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사이에 박힌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압니다. “으레 장사꾼 차가 오면 좌판을 벌이는 곳은 이발소 앞 공터다. 벌써 이발사 영감을 비롯해 외로운 삶들이 두런두런 모여 있다. 물건을 사려는 마음보다는 방 안의 적막을 떨치고 나온 사람들이다.” 이런 소리들이 있어 “외로움이 계화도 육젓같이 곰삭는 곳, 비어 있어 채울 수 있는 공터에 봄이 물드는 것이지요” (‘공터’ 중). 그는 지구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있는 민들레를 떠올려줍니다. 상대가 말을 하고 있으면, 다음 할 말을 출발선에 데려다 놓는 나는 닿을 수 없는 존재죠. 우리 눈은 다른 동물에 비해 흰자위가 넓다고 해요. 그래서 눈동자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쉽고, 거짓 웃음과 진짜 웃음도 쉽게 구별한다고 하네요. 눈이 말하는 감정을 잘 알아들을수록 공감 능력이 좋다고 해요. 우리는 상대의 눈과 어떤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을까요. 그는 말합니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하면, 살아가면서 표정 관리만 하다 생의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 없도록 가슴을 잘 들여다보며 살아야 할 일이다. 얼굴이란 그 사람의 얼이 배어 있기 때문에 얼굴이다. 얼굴이 곧 마음이고 얼굴은 마음에 따라 표정을 만들어 낸다.” (‘표정 나누기’ 중). 가슴에서 우러나는 표정과 말을 보고 싶어요. 나도 가슴에서 그렇게 우려낸 것들을 당신에게 한잔 건네고 싶어지네요. 눈 펑펑 내리고 바람이 붑니다. 팔뚝보다 굵은 물메기 한 마리를 만 원에 사요. 생것전 초입에 자리한 ‘장안식당’ 미닫이문을 밀치고 들어서세요. 거기서 곰치국, 물곰국, 물잠뱅이탕, 미거지국이라고도 불리는 물메기탕의 연두부 같은 고소함을 맛보세요. 싱싱한 물베기 껍질을 무심코 목구멍에 넘기며 놓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상황에 젖어보아요. 그런 다음 차디찬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켜세요. 수필집 제목이 된 에세이 ‘그리움 쪽에서 겨울이 오면’이 그려낸 풍경이 함박 함박 내립니다. 이런 자리에 당신을 부르고 싶네요. 말이 없어도 좋고, 말이 많아도 좋은 곳. 서로의 아픔과 기쁨이 연결되는 곳. 엄마가 울고 있으면 위로해 주는 두 살 먹은 아기가 되는 곳. 그런 자리에 부르면 두말없이 달려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그리움 쪽에서 찾아온 또 한 번의 겨울이 깊어지도록” 우리 문을 두드리는 눈짓을 들어보게요. 이영종 시인은 2012년에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어 2023년에 첫 시집 <오늘의 눈사람이 반짝였다>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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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6 17:40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형미 시인-하기정 ‘고양이와 걷자’

인간은 마땅히 자기와의 대화에 능통하여야 한다. 자기 자신과 문답할 줄 모르면, 자기에게 적합한 영양소를 고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의 말을 들을 줄도 모르며, 나의 행동을 볼 줄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하기정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고양이와 걷자>(2023, 걷는사람)는 자기 자신과 충분히, 그리고 실컷 대화를 하면서 써 내려간 작품집이라고 단언한다. 첫 번째 시집 <밤의 귀 낮의 입술>(2017, 모악)을 낸 이후, 시인은 꼬박 다섯 해 동안 ‘슬픔의 한가운데에 서 보려고 했던, 균형과 평형을 이루려고 흔들렸던’ 인고(忍苦)를 짊어졌다. 그 인고는 ‘점과 점을 이으면 그어지는 선처럼’ 반대쪽에 서 있는 내가 마주보고 있는 당신을 쓰기 시작하면서 더욱 깊어갔을까. 물론 그때부터 왼쪽과 오른쪽은 어떻게 생겨났는지, 동쪽과 서쪽은, 뜨는 일과 지는 일은 무엇인지 무수한 ⸢질문들⸥을 가지게도 되었을 것이다. 미래를 뒤돌아보았을 때 과오가 되지 않기 위해, 과오가 되지 않는 뒤를 살아낸 안간힘도 엿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에게 ‘벽이 없는데 문을 내는 일’과 같이, ‘일식을 맨눈으로 보려 하는 것’과 같이 버겁고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만큼 그녀의 시는 어둠이 내린 밤 숲처럼 울울해져서는, 치명적인 매력을 선사한다. 그녀만의 독특하고 섬세한 감각을 지닌 언어들로 농익은 그녀의 세계가 가만, 만져지는 느낌이랄까. 사실 오래전 나는 그녀의 첫 번째 시집에 대해 “귀와 입이 사방에 떨어져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다소 그로테스크한 말투로 줄곧 혼잣말을 하고 있다”고, “그 혼잣말이 백야처럼 아름답기도 하여 실제가 아닌 것 같다”고 발제한 적이 있다. 거울에 비친 빛이 쨍하고 튕겨져 나갈 때처럼, 그 혼잣말들이 내게로 튀어 쓰리고 아프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 시편들과는 분명히 다르게,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어서 상처가 되지 않’는 얘기들이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는 너끈히 살아내고 있던 것이다. 내게 없지만 네게는 있는, 서로 다른 것을 사랑할 줄도 아는 드넓어진 마음으로,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자기 변화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열쇠를 얻는 데 보란 듯이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안태윤 시인은 추천사에서 그녀의 시를 읽으면, “생기와 신비가 감돌게” 된다고 밝혔다. 김지윤 문학평론가는 “어디로든 가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 “사라진 자리에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잔여를 남긴” 시라고 칭송했다. 폐 일언 하고, 한마디로 그녀의 시는 참 좋다. 활자를 보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기껏해야 활자를 책의 장식품으로 욱여넣고, 활자를 책의 장식품으로 욱여넣은 책은 또 카페나 거실 한 켠을 꾸미는 디피용이 되고, 혹은 사람들이 더는 시집을 읽지 않는 그런 시대에, 언어에 대한 참 그리움을 불러내는 시를 만났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김형미 시인은 2010년 영남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로 등단한 이후 5.18문학상, 불꽃문학상, 작가의눈 작품상, 시인뉴스 포엠 시인상 등을 수상한 이력을 지닌 하기정 시인. 어디로든 가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시를 데리고 더욱 견고하고 단단하게 살아내길, 바라는 마음이 막 빠져나온 봄의 문턱처럼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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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9 17:2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기명숙 시인-김유섭‘한국 현대시 해석’

문학작품을 감상하는데 작품 내적인 논리로 접근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재현된 세계에 초점을 둔 모방론이나 작가의 사상‧감정에 작용하는 상상력의 산물로 정의하는 표현론적 관점이 작품 분석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경험적 자아와 시적 자아를 일치시키는 표현론적 관점은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개념으로 시를 ‘의도’의 산물로 본다. 김유섭 시인은 자신의 비평집 『한국 현대시 해석』에서 ‘시인의 시대 인식과 세계관의 흐름’이라는 부제를 통해 모방론과 표현론을 비평 근거로 삼았다. 물론 “현대시 100년의 오독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작품의 복잡성과 구체성, 심미적 측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선생은 용감하고 단단하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백석에서부터 김소월‧한용운‧이상‧김수영에 대한 위험한(새로운) 시각이 저항에 부딪힐 게 뻔한데도 강력한 논조로 물러서지 않는다. 필자 또한 시에 ‘논리적 분석을 가하는 것’과 ‘이데올로기적 의식표방’에 대해 부정적이다. 거꾸로 미학적으로 잘 구조화된 시, 서정성과 조화를 이룬 작품에서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각고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최근 3‧1절 기념사나 ‘일본 강제 동원 배상안’에서 극우 인사들의 망언이 잇따르고 일본 정부에 굴종‧굴신으로 치욕스러운 작금 김유섭의 시각은 문학 범위를 넘어 귀하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친일파를 조롱 경고하는 시며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임은 고종이며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일본 식민지배를 한탄, 민족애를 나타내는 시며 이상의 「오감도」는 항일 1인 전쟁의 시로서 저항과 투쟁의 세계관이라고 본다. 또 김수영의 「풀」에서 ‘바람’은 3선 개헌이고 ‘풀’은 민주주의다. 지면상 낱낱의 논거를 인용할 수 없지만 이들 공통점은 비판적 태도의 맥락에서 당대 정치 현실에 대한 투쟁정신의 의지표명인 것이다. 시의 존재 양식은 자의식의 결정체다. 주체 중심의 상징체계는 ‘외부’와 만나는 욕망을 발하는 순간 전복되고 재창조된다. 즉 예민한 자의식에서 출발, 시대 의식과 상황맥락 앞에서 문학의 복수성複數性을 실현하는 것이다. 김유섭 시인은 작품 속에서 불길한 이미지와 좌표를 잃은 식민지 징후들을 선지자처럼 읽어낸다. 텍스트에 대한 ‘내면화’ ‘개인화’가 기존 해석이었다면 선생의 백석에 대한 해석은 일제 폭압에 굴복하지 않고 패배한 자의 소극적 저항인 ‘도피’를 선택했다고 본다. 또 김소월 최고의 ‘이별미학’으로 평가받은 <진달래꽃>은 “간다는 대상을 호명조차 하지 않”고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드러내는 명확한 진술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남녀이별의 정한’이라는 기존 인식을 부인한다. “유교적 국가관의 강렬하고도 애끓는 민족애로 현실을 거부하”려는 해석이다. 즉 인식론적 사회사적 의미망 구축 과정을 섬세하게 밝히고 있다. 인유引喩 없이 오롯이 자신만의 연구로 이루어낸 쾌거가 경이로운 한편 필자는 의구심을 품기도 한다. 이들의 시적 출발이 포괄적이고 심미적인 가치를 등한시하진 않았을 터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감동의 떨림을 추구하는 수용자 입장에서는 김유섭 시인의 주장 또한 한정적이라 평가할 수도 있겠다. 다른 측면에서 이 비평집은 김유섭 시인의 ‘역사를 직시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가혹한 현실에 대한 투쟁의식, 남북분단 기형, 서구열강 침입과 일제에 의한 경제‧문화적 식민지화, 한국 정통성 상실과 같은 역사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역사적 특수성을 지우고 세워진 시의 집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유섭 시인은 일갈한다. “이 상이나 김수영의 작품이 ‘난해시’가 아니라 해석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성찰하는 것이 한국 현대시가 미래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문학의 이념성을 거부하는 순수시 측면에서 김유섭 시인의 새로운 해석은 차별과 대립이 아닌 새롭고 풍요로운 텍스트라고 봐야 할 것이다. 상황적 현실에 따른 개인의 고통을 보편정서로 확대, 현실극복 의지로 통합하려는 저자의 노고에 대해 지금은 치하할 때다. 기명숙 시인은 전남 목포 출신이며, 200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몸 밖의 안부를 묻다>가 있다. 현재 강의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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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12 17:43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이진숙 수필가-오복이'꽃들의 흉터'

자고 일어나면 뒤숭숭한 뉴스로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계모가 의붓아들을 굶기고 폭행하여 죽인 사건,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가장이 일가족을 살해한 후 자살을 한 사건, 의붓아버지에게 수십 년간 성폭력을 당한 사건 등. 너무 비참한 뉴스여서 차라리 채널을 돌리고 외면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외면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라고 말하는 책이 있다. 그들을, 그 사건을, 더 깊이, 더 가까이하려는 눈과 귀와 마음이 필요하다고 조용하게 부르짖는 책이 나왔다. 오복이 작가의 청소년 논픽션, '꽃들의 흉터(청동거울)'이다. 오복이 작가는 청소년 쉼터에서 상담사, 케이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부터 청소년 쉼터에서 만난 아픈 꽃들,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하며 그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작가는 상처투성이인 그들의 아픔을 대면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막막한 그들의 내일을 바꾸고 싶어서, 깊은 상처가 아물고 꽃자리가 되어 튼실한 열매가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아픈 오늘을 기록으로 남겼다. 쉼터를 이용하는 청소년들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폭력과 사기, 착취와 질병, 임신으로까지 삶이 얼룩졌다. 불신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들은 케이의 염려와 관심을 위선과 간섭으로 받아들일 때도 있다. 케이는 권면이 통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올바른 관계 맺기와 인생 덕목을 가르쳐 주지 못한 어른들의 무책임에 대하여 부끄러워한다. 이 부끄러움은 케이만의 몫이 아니라 이 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모든 어른들의 몫이 아닐까. 앞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닌 이웃들, 특히 소외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관심을 갖고 선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 관계란 단지 생리적 욕구 충족만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전해져야 할 따뜻함과 든든함, 위로와 지지를 전해 주는 통로여야 할 것이다. 쉼터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으나 경제적으로 홀로 설 수 없는 청소년들이 많다. 자립을 위해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면서 밤에만 검정고시 준비를 할 수 있는 이들은 "이렇게 돈만 벌다가 죽을 것 같아요"라며 절망한다. 케이는 그들이 살아갈 방향을 모색하면서 독자에게 묻는다. "수많은 아이가 죽음을 생각할 때 당신은 무엇을 하시나요?" (본문 중) 이 책은 열세 명의 기록이지만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 2021년 전체 가정 밖 청소년은 약 12만 명으로 추정되고 쉼터 이용자는 27%로 추산된다"(서문 중)고 한다.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갈 많은 청소년들이 홀로 아픈 꽃이 되어 시들어 가고 있다. 가난과 폭력과 무시와 조롱 앞에서 통곡조차 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사각지대에 무방비로 놓여 있다. 피폐한 그들이 쾌활한 자가 되도록,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제도와 시설에도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작은 관심으로 인하여 어둡고 캄캄한 동굴에 갇힌 청소년들이 고난을 이겨내게 된다면 그들의 어려움은 행복의 씨앗이 될 것이다. "심부재언心不在焉 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이불문聽而不聞 (대학)",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했다. 오늘도 시린 눈물을 닦고 삶을 헤쳐 나가는 소년소녀들에게 따스한 마음 한편 내어주는 이웃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진숙 수필가는 전직 국어교사로 201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당선됐다. 또 2010년부터 최명희문학관에서 “혼불” 완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23.03.29 18:01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장은영 동화작가 - 이상권 작가 '호랑이의 끝없는 이야기'

어렸을 때 나는 방학을 손꼽아 기다렸다. 방학이 되면 외갓집에 갈 수 있어서였다. 외갓집에서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신나게 노는 것도 좋았지만, 가장 기다렸던 시간은 할머니한테 옛날이야기를 듣는 순간이었다. 밤에 소죽 끓이던 방으로 가서 이불 속에 누우면 할머니는 이야기보따리를 꺼냈다. 나는 귀신 이야기에 덜덜 떨다가, 욕심쟁이가 골탕먹는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 웃다가, 저승으로 길 떠나는 아이 이야기에는 주르르 눈물 흘리곤 했다. 할머니가 어서 자라며 억지로 불을 껐지만, 방금 들었던 이야기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옛이야기와 멀어졌고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작가가 되고 나서야 어렸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옛이야기와 다시 만났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는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내 마음속에 살고 있었고, 힘들고 외로울 때,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동화를 쓰는 바탕에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씨앗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경험을 발판 삼아 요즘 아이들도 옛이야기를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하지만 옛이야기를 새롭게 고치고 창작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그동안 자연에 깃들어 사는 생명에 관한 동화를 써왔던 이상권 작가가 옛이야기에 바탕을 둔 <호랑이의 끝없는 이야기>(특서주니어)라는 멋진 작품을 펴냈다. 미래의 산신령님으로 촉망받는 아기호랑이 백호는 경쟁자인 검은 늑대 때문에 어미를 잃는다. 농부 허절구 집에서 누렁이 의붓어미의 젖을 먹고 살다가 역병 귀신을 물리쳐 마을 사람들을 구해 내고, 황천돌을 부사가 되게 하고, 수성 대사를 왕이 되게 한다. 백호가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든 비법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당신 마음이 가는 대로 하세요”라고 진심을 담아 답을 해주는 것이다.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백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마음이 후련하고, 엄청난 위로를 받은 느낌이 들고, 이 세상이 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다른 동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해 주던 백호는 결국 세상 모든 신들에 의해 산신령으로 추대된다. 하지만 백호는 산신령 대신 봉래산으로 들어가 한 마리 호랑이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저는 제 마음속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제가 행복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꿈꾸지만 수만 가지 이유로 불행하다. 우리의 시선은 타인을 향해있고 그래서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호랑이의 끝없는 이야기』는 불안하고 외로운 우리에게 거울을 닦듯 내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말하고 있다. 장은영 동화작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통일 동화 공모전에서 상을 받고, 전북아동문학상과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책 깎는 소년>, <으랏차차 조선 실록 수호대>, <열 살 사기열전을 만나다> 등이 있다.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을 받았다.

  • 문학·출판
  • 김영호
  • 2023.03.22 17:37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