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1-28 18:55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청춘예찬

타인의 눈

이주경 전북문화재단 창작기획팀원 코로나로 인해 영화관을 마음 놓고 찾지 못했던 최근, 그만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미루고 미루다 보게 되었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8)는 평범한 14살 소녀 은희(박지후扮)가 그 나이 즈음에 경험하게 될 풀리지 않는 주변 상황(가부장적인 가정, 남자친구와의 이별, 적당한 비행 같은) 속에서 아픔을 겪고 또 조금씩 성장해 가는 이야기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한 은희는 새로 온 한문 학원 선생님 영지(김새벽扮)에게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고 항상 자신을 다그치기만 하는 어른들과 달리 자신에게 훈계가 아닌 공감을 해주는 영지에게 의지하게 된다. 비록 안타깝게 그들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지만 영지가 은희에게 써준 마지막 편지는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남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그렇게 닮고 싶은 사람의 시선을 자기 안에 담으면서 은희는 성장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그것이 나에게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개인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변화의 구조와도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접하면서 예술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간접 경험하게 된다. 아름답고 섬세하게 묘사된 풍경화의 한 장면을 보면서 예술가가 삶속에서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기억들을 느끼고 우리 개개인의 삶에서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상기할 수도 있으며 쉽게 지나쳤던 일상을 포착한 작업을 감상하며 삶을 바라보는 좁은 시야를 자각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짧은 예시에 불과하지만 위와 같이 관람자의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성향의 작품이 있는 반면에 상대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도 존재한다. 사회화의 과정에서 밖으로 꺼내지 않음을 미덕으로 배웠던 터부시 되는 소재들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또한 동시대 예술의 매체적인 실험들은 우리가 집단 안에서 습득하여 고착화된 인식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그 과정 속에서 쉽게 피로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심리적 방어체계를 내려놓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힌트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심리적인 경계를 넘어 들어온다고 해서 회피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은 어떨까? 실제로 예술의 역할이 종교적, 정치적인 선전의 도구를 지나 개인적인 영역으로 전환되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사회 안에서 개인의 소외 그리고 당연히 마주하게 되는 부조리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들 중에서 마음속에 미약하지만 계속 남아있는 작품 또한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약한 연결고리가 자신의 삶에 겹쳐졌을 때 선뜻 공감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예술가의 언어는 진실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영화 속의 소녀가 자신이 동일시했던 대상의 생각을 쫒아 가며 성장 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술가의 시선을 감상하면서 자신이 잊고 있었던 가치를 찾고 또한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삶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마련했으면 한다. /이주경 전북문화재단 창작기획팀원

  • 오피니언
  • 기고
  • 2021.03.14 16:48

예술인 일자리와 일거리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예술인과 일자리. 틀린 말은 아니다. 옳은 말도 아닌 것 같다. 국어사전에서 예술인은 예술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직업과 일자리는 같은 것일까? 필자는 극을 만드는 작가지만, 작가라는 직업이 일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자리의 기준은 무엇일까? 일자리는 출근과 퇴근 시간이 있다. 작가라는 직업은 마감은 있어도 출퇴근은 없다. 예술인의 시간은 자유롭다. 다만 자유로운 시간에 대한 책임은 있다. 마감까지는 출퇴근 시간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가는 시간만이 있다. 정부는 매년 예산을 투입해 예술인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한다. 하지만 일자리가 생겼다고 말하는 예술인은 주변에 없다. 다만, 이제 예술을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겠다고 말하는 예술인은 있다. 예술인과 일자리,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명쾌한 답을 준 사업이 있다. 코로나19 전주시 청년 긴급 일거리 지원사업. 2020년에 전주시 사회혁신센터가 추진한 사업이다. 코로나19 시기에 청년에게 지원금을 주겠으니, 무엇이든 해보라는 사업이다. 정산도 필요 없다. 일자리가 아닌 일거리를 주겠다니. 일거리라는 단어를 곱씹어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해졌다. 일자리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직업이다. 일거리는 일을 하여 돈을 벌 거리를 뜻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부는 예술인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 9시 출근 6시 퇴근을 보장하는 예술인 일자리가 생긴다면 예술이 성장할까? 자유로운 시간을 책임 있게 쓰는 일거리가 예술인에게 필요하다. 코로나19와 같은 어려운 시기에 일거리가 더욱 중요하다. 한 명의 월급으로, 여섯 명의 일거리가 생긴다. 예술인과 일자리는 성립하지 않는가. 맞는 말은 아니다. 예술기관 단원과 예술 강사는 예술인 일자리라 부르는 게 마땅하다. 국가가 집중해야 할 일자리는 문화예술 기획자다. 기획자에게는 일자리를 줘야 한다. 월급을 받는 기획자들끼리 모여 예술인에게 어떠한 일거리를 줘야 할지 과감하게 맡겨보는 것은 어떨지. 얼마 전 전주시 문화예술인 복지정책 토론회에 참석했다. 필자는 토론자로 초청받아 예술인 일자리와 일거리를 이야기했다. 필자는 제안했다. 아이디어 수집에만 그치는 공모전이 있다면, 올해는 과감하게 없애보자고. 그 재원으로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에 예술인에게 일거리를 줘보자고 말이다. 정책사업은 솔직하고, 단호하고, 명쾌해야 한다. 불편한 과정을 없애고, 필요한 결과에 집중해야 한다. 예술인에게 일거리를 줘서 스스로 극복할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연구했지만, 일자리를 만들기는 어렵다. 일자리를 만드는 주체는 기업이다. 정부가 할 일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경쟁을 만드는 것이다. 정부가 투명한 일터를 만들면, 일자리가 생긴다. 무대는 사라졌지만, 새로운 무대가 있다. 전주시 모든 곳이 무대다. 전주라는 무대에서 예술 실험을 할 수 있는 일거리가 필요하다. 전주형 일거리 사업의 핵심은 예술 실험이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예술을 실험하고, 자신의 예술로 타인에게 감동을 주며, 전혀 다른 장르와의 예측하지 못한 결합이 필요하다. 3개월 일자리가 생겼다는 말보다, 올해 10개의 예술 실험이 예정되었다고, 많은 일거리에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계기가 될 거라는 말이 예술인에게 더 어울리는 표현이 아닐까.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1.03.07 16:56

'학폭투 논란'과 검찰·사법개혁

박지원 변호사 미투(Me, too)에 이어 학폭투(학교폭력, too)의 시대가 오는가 싶다. 트롯 경연대회 출연자가 학폭 가해자로 밝혀져 방송에서 하차하더니, 쌍둥이 스타 배구선수들은 무기한 출전정지로도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아 영구퇴출을 요구하는 국민청원까지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최근 한 달 사이 폭력 관련 이슈가 많았다. 당 대표가 같은 당 국회의원을 추행하여 제명되기도 했고, 법무부장관 청문회에서는 후보자의 학창시절 패싸움이 도마 위에 올랐다. 볼썽사나운 사건들이지만 일련의 사태에서 분명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바로 우리 사회에서 사적 폭력에 대한 관용도가 점점 낮아진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것이라는 여론이 우세했다면 방송 하차라는 단호한 결정이 내려질 이유가 없다. 30여 년 전 쌍둥이 배구선수의 모친이 속했던 배구팀 선수들은 피멍든 허벅지가 신문에 실렸지만, 경위서 제출과 감독 교체로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과거 민주화운동권 내부 성폭력은 대의와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은폐되기 일쑤였다. 정치인이 자서전을 내면서 어린 시절 패싸움을 기록했다면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비행청소년의 아름다운 인간승리라거나 인간적인 면모 등 긍정적인 모습으로 독자에게 인식되기를 기대했으리라. 단기간에 이처럼 사적 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관용도가 낮아진 까닭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서 우리 사회가 점차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법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싶다. 그리고 이는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지는 현상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이므로 최근의 검찰사법개혁 요구와도 맞닿아있다. 폭력성은 인간에 내재되어 있다. 다만 문명사회는 필요에 따라 권력을 통해 폭력의 발현을 억압하기도 하고, 또는 이를 정당화시켜 권력과 결합하거나 조직화한다. 가령 군사독재 정권은 안보 위협을 이유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했고, 마찬가지로 민주화운동은 독재 타도를 외쳤기에 화염병을 던져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정당한 폭력도 실제로 행사되면 구성원의 폭력 민감도를 낮추고 관용도를 높인다. 쉽게 말해 폭력은 전염된다. 가령 안보 위협을 이유로 군대 규율을 강화하면 가혹행위 등 부조리한 군기문화가 생기고, 공산국가에 맞서 스포츠로 국위 선양의 성과를 내려면 체육인은 맞으면서 운동을 하게 된다. 이처럼 실제 행사되는 폭력 앞에 가해자와 피해자, 목격자와 방관자 모두 폭력에 둔감해지며, 이는 다시 각자의 일상 속에서 주취폭력, 가정폭력이나 체벌처럼, 또는 이를 경험한 자녀의 학교폭력처럼 세대를 따라 전이되어 내려가면서 폭력에 관대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폭력을 수단으로 저항할 대상이 줄어 더 이상 폭력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 정당한 공적 권위가 사적 폭력을 제어하여 현실에서 폭력이 발현되지 않는 사회는 곧 법치주의가 뿌리내려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는 사회다. 이 때 구성원들은 더 이상 사적 폭력을 관용할 필요 없이 이를 제어하는 공적 권력의 정당성만 신경 쓰면 족하다. 이번 학폭투 사태를 보면서 검찰과 법원에 대한 개혁 요구가 함께 떠오르는 이유다. 사적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람을 강제로 조사하고 잡아 가두는 공적 폭력을 행사하는 기관의 공정성이 한층 강하게 요구됨이 당연하다. 폭력이 만연하던 시절에는 법원, 검찰이 인권의 보루였을지 모르나, 이제는 그 폭력성에 시민들이 위협을 느낄 만큼 우리 사회가 진보한 것이다. /박지원 변호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1.02.21 17:29

공간과 사람

정은실 사회활동가 건축학과 5학년, 한 학기를 남겨 두고 학교를 떠나 청년 교육 및 공연 기획 활동을 시작하며 서울로 올라가 7년을 살았다. 학교를 떠날 당시 지속 가능한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친환경 건축, 재생, 회귀 등이 건축공모전의 단골 주제였다. 그때, 반복적으로 들던 의문이 있었다. 새로 짓기 위해 기존 환경을 계속 파괴하면서 친환경을 말할 수 있는 건가?, 아파트 단지, 공원의 조경과 동선계획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 싶은 길로 가는데 어떤 제안이 필요할까?, 일괄 반복적으로 지어지는 아파트의 공간 구획을 사람들은 잘 따르지 않는데,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해결되지 않은 의문과 고민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적절한 답을 찾지 못했고, 졸업과 취업이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건축은 점점 멀어져갔다. 자연스레 건축에 대한 열망도 약해지고, 그 약해진 틈으로 청년의 희망과 공감이라는 변화의 물결이 스며들어와 결국 청춘콘서트를 진행하며 전국을 순회하고 서울에 올라가 활동을 이어갔다. 그 물결 속에서 헤엄치길 7년. 문득문득 미처 마치지 못한 한 학기의 아쉬움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오래 해오던 일을 멈추고 학교로 돌아가 남은 학기를 마치고 늦은 나이에 건축설계사무소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주민자치센터, 유치원, 생태관광센터, 변전소, 의학복학관 등 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어느새 마음의 붙임이 생겼다. 이 건물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언제 듣는 걸까? 어떤 것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과정이 왜 없는 걸까?. 물론 누가 봐도 아름답고 편리한 공간을 계획해 모두가 만족하는 공간을 뚝딱 만들어내면 좋겠지만 그런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용자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공건축물의 대부분의 건축 과정은 그렇지 못했다. 필요한 건물의 성격과 규모만을 가지고 현상설계라는 시스템을 통해 사용자는 배제된 채 예산과 스페이스프로그램을 두고 점, 선, 면이 요동치며 수없이 바뀌고 나를 괴롭히다가 마감을 위한 마감을 하기 일쑤였다. 결국,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으로부터 퇴사를 결정하게 됐다. 우리는 공간이 주는 영향력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변화를 원할 때, 오랜만에 집 청소를 하고 가구 위치를 바꾼다. 집이 답답하면 카페에 앉아 공부나 일을 하며 이마저도 충족하지 않을 때, 기분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간다. 공간은 발견의 영역이다. 우리는 집을 청소하고 구조를 바꾸기 전에 어떤 곳에서 내가 편안하다고 느끼는지 어떤 곳에서 집중이 잘 되는지를 천천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바꿀까? 이전에 내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각자의 하루를 돌아보며 무엇을 했는지 떠올릴 때 필연적으로 공간이 배경으로 자리한다. 집에서, 학교에서, 공원에서, 직장에서, 때로는 우주에서?. 공간은 모든 것에 가장 기초하는 것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사람은 늘 공간 안에서 생활하고, 공간의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공간을 구성하고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만든 공간이 어떤 제약과 틀로 우리의 삶의 관계와 질서를 바꿔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공간의 주체인 사용자를 가장 중심에 둬야 한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1.02.14 16:47

아카이브: 좌초되거나 유영하거나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아카이브의 출발점은 각각 다른 시간의 결속에서 이곳저곳 흩어진 자료들을 한데 모으는 것으로 시작된다. 셀 수없이 많은 내용들이 다양한 매체와 방법으로 다루어지는데, 자료의 물결 속에 때론, 어떤 것들은 좌초되어 주최자(아카이브)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고 가라앉기도 한다. 한편, 아카이브 작업은 다양한 방식을 취하게 되는데, 공적인 자료도 있지만, 사적영역의 자료들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오는 방법에 있어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생기고 여러 과정을 거치며 중첩되어 흐려지거나 모호해 지기도 한다. 아카이브(Archive) 의 어원은 라틴어 아르키붐(archivum) 인데, 아르키붐은 시작, 원천, 기원을 뜻하는 아르케(arche-)로부터 유래된 용어이다. 아카이브라는 용어는 약 17세기에 형성되었고, 현재는 기록의 개념과 자료의 보관소라는 장소의 개념도 함께 가지고 있다. 요즘은 아카이브라는 용어는 상당히 역할에 한정짓지 않고 여러분야에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인물 아카이브에 한정해 이야기해 본다면, 한 사람의 일생 도처에 산재해 있는 이미지, 텍스트, 기념물, 채록자료 등을 시대와 연결 지어 주제의 층위별로 정리하여 보관하는 작업을 우리는 흔히 아카이브라고 한다. 인물 아카이브는 주로 예술계에서 원로작고 예술인을 대상으로 많이 진행된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문화예술아카이브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이 대두되며, 시각, 공연, 문학 분야에서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 아카이브 사업이 진행되었다. 기초재단의 다양한 아카이브 사업부터 국립예술자료원, 국립극장 공연예술아카이브, 국립현대미술관 시각예술 분야 아카이브 구축 등 국립기관도 나서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나는 올해 지역의 원로?작고 예술인들의 예술활동을 연구하고 기록하여 현시대의 언어와 공유 콘텐츠로 개발해 재조명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 사업은 백인의 자화상이라는 사업으로 2012년부터 시작해 올해 10주년을 맞이하는 사업이다. 전주 지역의 문화예술 지형도를 그리고 전주예술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그만큼 공공성과 책임감의 측면에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예술인 아카이브의 어떤 부분들이 유영해야할지 많은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예술아카이브에서는 기본적으로 분야의 특성에 따라 주요 주제 선정이나 하나의 새로운 콘텐츠로 변환되는 방법론이 다른데, 모든 기록 자료가 아카이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2020년 국내 아카이브 연구에서 김연희 연구자는 할 포스터의 아카이브 충동(An Archive Impulse)을 분석해 방대하게 나열된 자료 속에서 아카이브가 결코 총체성을 보여주거나 기억을 그대로 소환하는 작업은 아니란 것을 주장한다. 이제 우리는 예술아카이브에서 자료의 수집, 방법, 시스템,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창조적 자료의 변주로서 영민하게 구조화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자칫 수면위로 올라와야 하는 자료가 1차 자료 수집이라는 초기작업 안에 느슨해진 아카이브 경계의 선에서 좌초되어 본질이 흐려지거나 논점 자체가 없어짐을 조심해야한다. 올해는 백인의 자화상을 통해 그동안 조명된 전주의 예술인들을 돌아보며 10주년을 맞아 예술인 아카이브의 긍정적인 유영의 방법을 찾아보려 한다.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 오피니언
  • 기고
  • 2021.02.07 17:05

우리는 모르지만, 안다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코로나19로 우리의 일상이 바뀔 수 있음을. 마스크, 비대면, 거리두기는 배고프면 밥을 먹듯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코로나19 초기에는 금방 끝나겠지하는 희망으로 버텼다. 코로나가 시작된 지 한 해가 지났다. 코로나는 더 심해지고, 끝은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코로나19 이후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지만, 안다. 우리의 일상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코로나19가 끝나더라도 새로운 전염병이 위협할 것임을 우리는 안다. 바이러스와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서라도 인류는 변해야만 한다. 변하지 않으면 인류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제인 구달의 말이다. 그녀는 코로나19로부터 인간이 얻어야 할 가장 큰 교훈은 인간과 자연과 동물의 새로운 관계 맺음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연을 존경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 존중과 존경은 인간이 사는 도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코로나19로 도시에서의 이동과 접촉에 제한되면서, 도시의 변화와 방향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바이러스의 유행을 대비하기 위해 앞으로도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화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인간과 기업이 지구를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도시에서 만들어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제 도시의 철학이 바뀌고, 도시의 공간도 재편될 것이다. 자연과의 공존을 위한 인간의 새로운 도전으로 도시의 재발견과 재배치가 이루어진 도시. 자연과 더불어 살려는 도시만이 인간이 살고 싶고, 머물고 싶은 도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 위에 서 있고, 역사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 도시는 기억이 쌓인 공간이다. 추억과 역사는 그 도시의 특별한 힘이다. 특별한 힘은 도시의 미래를 결정한다. 오래된 미래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역설적인 제목이다. 스웨덴의 인류학자 노르베리 호지의 책이다. 역설적인 제목에는 작가가 말하려는 핵심이 담겨있다. 그녀는 과거에서 도시의 새로운 내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가 발달할수록,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과 다시 연결되기를 원한다. 삶의 속도를 늦추며, 인간적인 커뮤니티를 만들기를 선호한다. 잘 보존된 자연과 잘 지켜진 전통만이 도시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코로나19는 인간의 삶에도 질문을 던졌다. 눈 비비면 달라지는 세상. 작은 틈도 견디지 못해 스마트폰을 들여다봐야 하는 세상. 빨리빨리를 외치며 달음질치는 세상을 살던 인간은 코로나19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는지, 관계의 쉼표를 가지지 못했는지 아쉬움만 남는다. 더 많이, 더 빠르게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코로나19는 느리게, 조금 적게라는 선물을 주었다. 우리는 몰랐지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류 문명의 발달은 동물의 희생과 자연의 파괴를 수반했다. 자연은 원했다. 인간이 생산과 소비를 낮추고, 자연과 공존할 것을. 인간은 깨닫지 못했다. 결국, 코로나19는 깨닫지 못한 무지한 인간을 향한 자연의 경고였다. 자연의 주인이라 생각했던 인간은 코로나19로 지금, 처절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있다. 자연의 공격과 인간의 방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모르지만, 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패배할 것임을.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1.01.31 17:07

사면권의 지분

박지원 변호사 여당 대표가 전직 대통령 사면을 적절한 시기에 건의하겠다고 밝힌 뒤 한 차례 돌풍이 일었다. 배경에 대한 논란이 난무했지만, 아직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라는 대통령의 입장 표명에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깊은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처럼 사면은 분명 다시 점화될 의제다. 헌법 교과서에는 사면권의 한계가 적혀 있다. 권력분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국가이익과 국민화합 차원에서만 행사되어야 하며, 당리당략에 따라 정치적으로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기술되어있다. 헌법 교과서를 현실에 비추어 읽다보면 공허할 때가 많은데, 사면에 관해서는 교과서에조차 역대정권이 필요에 따라 무분별하게 시행해왔다고 적혀 있기에 공허함이 더했다. 아무래도 헌법학의 이론과 성과는 사면권에 지분이 없는 모양이다. 사면의 명분이 가진 논리적 타당성은 어떨까. 이번 사면 제안은 다음과 같은 3단 논리다. A) 코로나는 전쟁에 준하는 국난이다, B)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 통합이 필수적이다, C) 따라서 사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면 국민통합이 이루어지고, ㉯ 그리하면 코로나가 극복된다는 전제가 참이어야 한다. 여기서 코로나를 IMF 외환위기로 바꾸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의 명분과 같아진다. 과연 위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해서 국민통합이 되었는지, 덕분에 외환위기가 극복되었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저 정도 논리정합성을 수긍하는 포용력이라면 A) 올림픽위원인 이건희 회장을 사면하면 2018년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다, B) 그리하면 국가브랜드 및 국제외교 역량이 강화된다, C) 따라서 국익을 위해 이건희 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논리가 차라리 더 설득력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당 대표는 사면 제안이 당리당략이 아닌 소신이라 발언했지만, 반대 여론을 맞이한 당 최고위는 당사자의 반성과 국민적 공감대가 우선이라 했다. 법 이론과 명분이 사면에 갖는 지분이 미미하다면 개인의 소신, 당사자의 반성, 국민의 공감 여론의 비중은 어떨까. 1997년 대선을 앞두고도 여당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건의했다. 당시 반대 여론은 55~74%, 찬성 여론은 33~40% 정도로 현재에 비해 결코 반대가 적지 않았으나, 김영삼 정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회만 되면 임기 내에 사면을 단행할 태세였다. 당사자의 반성과 국민적 공감대는 없었지만,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는 모두 경쟁적으로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대중 후보는 화해는 사과해야 이뤄지는 것이지만 용서는 다르다. 반성하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는 소신을 내세워 동서화합의 이미지를 선점하였으며, 마음이 급해진 이회창, 이인제 후보도 곧바로 사면을 건의하고 긴급 기자회견을 하는 등 상대의 화합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했다. 우리 기억 속 사면은 늘 명목상 대주주인 주권자의 의지가 정치공학이라는 체에 걸러지고, 여론조사라는 반죽으로 짓이겨진 채 소신과 명분, 반성과 용서 등의 고명을 얹어 내어진 패스트푸드 같았다. 혹자는 추운 날씨에 촛불을 든 시민들이 만든 성과가 정치권에 의해 허물어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리라 전망하지만 더운 날씨에 최루탄과 맞선 시민들이 보는 앞에 3당 합당과 전, 노 사면이 이루어진 것 또한 우리 역사다. 언제고 다시 불거질 사면 논의를 통해 그 지분관계가 얼마나 변했는지 지켜볼 일이다. /박지원 변호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1.01.24 16:54

공간에 대하여

정은실 사회활동가 지역에서 공간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며 잠시 대학 시절을 돌아본다. 건축과에 다니기 전 공간이란 개념은 곧 건축이었다. 부모의 생업으로서 건축을 먼저 접했기에 공간이 무엇인지 보다는 집 짓는 일의 건축으로 공간을 이해했다. 그러나 대학교 2학년 때 주거를 주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공간감이라는 좀 더 구체적인 단어로 공간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주거 프로젝트는 내가 살 집을 계획하기 위해 집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이끌었다. 각자가 살고 있는 이미 존재하는 집을 살펴보기도 하고,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집을 떠올렸을 때, 자신에게는 분명하게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이미지나 느낌이라는 이름으로 공유하기도 했다. 이어 앞으로 내가 살 집은 어떨지에 대해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는 집과 친구가 생각하는 집은 다르다는 것, 친구 미주의 집에 대해 내가 갖는 이미지와 미주가 갖는 이미지도 다르다는 것, 미주의 방에 대해서도 미주 엄마와 미주 동생, 미주가 갖는 느낌은 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같은 공간이라도 누가 바라보냐에 따라 다른 공간이었다. 그 결과, 내가 살 집은 각각의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는 형태를 띠었다. 거실과 부모님 방, 내 방, 오빠 방, 작업공간 등이 다 독립된 실로 만들고 지붕 없는 계단과 다리, 복도 등으로만 연결했다. 내방에서 거실로 갈 때, 비나 눈이 오면 우산을 써야만 했다. 게다가 평면상으로 거실은 원형, 부모님 방은 정사각형, 내방은 원형, 오빠 방은 사다리꼴 모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담당 교수님께서 자신의 컨셉을 1차원적으로 풀어내는 학생의 어리석은 행태를 교수님이 그리는 완성체로 가기 위해 깎아내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더 의미를 두고 무엇이든 해보게끔 하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교수님의 교육방식이었겠지만, 사실은 나를 반쯤 포기했던 것인가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래도 덕분에 조금 특별한 시선으로 공간의 행간을 더듬어 보게 됐다. 공간은 사람에게 공간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그 의미라는 안경을 통해서 우리가 머무르는 모든 공간에는 색깔이 생긴다. 이 색깔은 인상, 이미지, 분위기, 톤, 공간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자, 눈을 감고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들을 가만히 떠올려보자. 집, 학교, 회사, 친구 집, 집 앞 슈퍼, 동네병원, 공원 등등. 각각의 공간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나 사건, 그 사건이 주는 느낌 등이 있다. 이 느낌은 같은 공간을 두고도 각각이 느끼는 바가 다르다. 병원에 대해 어떤 친구는 힘없는 회색빛 흰색이라고 표현하고, 어떤 친구는 붉은빛 검은색이라고 표현했다. 앞선 친구는 어릴 적 어머니 대신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1년 동안 병상에 누워 계셨던 영향으로 병원은 밝고 깨끗한 흰색이 아닌 회색이 도는 힘없는 흰색의 이미지가 남았다고 한다. 뒤의 친구는 대학병원 레지던트를 그만두는 시기에 환자들의 피와 버거웠던 수련의 생활들이 스치며 핏빛 같은 검붉은색의 영향으로 불그스름한 검은색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다. 이렇듯 똑같은 공간이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그들의 경험의 시간이 더해지면서 공간의 인상은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경험의 폭이 넓을수록 공간을 즐기고 영유할 수 있는 폭도 넓고 다양해지는 것이다. 공간 경험의 폭을 넓히기 위해 지역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정은실 사회활동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1.01.17 16:50

취향의 발견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요즘 나는 취향의 발견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연말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황금 같은 휴식에 마음을 편히 놓지 못한 건 지난 몇 년 간 이어오던 일상이 멈췄을 때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작년 한 해 우리는 겪어본 적 없는 공포를 마주해야 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고립된 일상으로 살아가기를 요구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나는 그저 혼란스러운 상황에 장기적인 계획 실천을 위한 걸음을 떼기보다 작금의 현상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이슈와 가치들을 재점검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사회현상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실천 가치보다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에게 주어진 고립된 쉼 앞에 나에게 집중해보고자 했다. 사실, 그것 말고는 이 시국에 딱히 여행을 간다거나 영화나 전시, 공연을 보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늦잠을 자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며칠이 흐르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새삼 무미건조한 나의 주변과 일과 관련된 물건들 말고는 재미를 느끼며 할 수 있는 것 즉, 취향이 반영된 것이 거의 없는 내 사적 공간구성에 적잖이 놀랐다.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었나 싶은 마음과 함께, 나에겐 조금은 당황스러운 이번 시간이 취향에 대하여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된 듯하다. 잠시 취향에 관한 연구에 대해 간략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을 언급해 볼까 한다. 사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복잡다단한 선택지 앞에 서게 되는데, 100% 그렇지는 않지만, 개인의 선택을 좌우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취향이다. 취향은 1970년대, 90년대 이후 그리고 현시대까지 각각 다른 시각과 의미로 규정되어 왔다. 시대별 대표적인 이론을 소개하자면,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다른 사회 계층끼리 차별화되는 문화 소비패턴에 의해 취향이 구별된다고 보고 이를 아비투스 개념을 이용해 취향의 동질성은 계층에 속한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90년대 이후 취향을 통해 계층 간 구별되는 지점을 중요한 포인트로 여기지 않으며, 소위 고급 취향과 저급 취향을 나누는 기준이 무의미함을 여러 연구자가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기존의 이론들의 주장하는 특정 계층만의 취향으로 여겨지는 콘텐츠들이 그들만의 전유물로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및 다양한 플랫폼의 확산으로 콘텐츠가 개인에게 공유되고 소비되는 방식은 이전 세대에 비해 확실히 접근성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이제 취향은 특정 집단을 규정짓는 패턴이 아닌, 개인의 성향에 대한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콘텐츠의 생산과 소비의 다양화 안에서 생각 볼 이슈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분량 관계상 이 내용을 자세히 다룰 순 없지만, 우리는 큐레이션이 지나치게 발달한 알고리즘 환경에서 가진 취향이 과연 온전히 그 개인의 기호에 의해 형성된 취향일지 아니면 어떤 선택하고 볼 수 있는 권한조차 단절되어 특정 취향을 강요받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한다. 좋은 취향을 가진다는 건 단순히 운 좋은 발견일 수도 부단한 노력일 수도 있다. 취향을 그저 받아지는 정보에 의해 수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에서 벗어나 온전히 진짜의 취향을 발견하는 노력을 해보는 건 어떨까. /이주경 (전주문화재단 문예진흥팀 주임) △이주경 주임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문화예술경영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1.10 16:54

아직도 안하세요?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작가 요즘 돈을 벌었으니, 밥을 사겠다며 친구가 카드를 내민다. 넌 아직도 안 하냐며 긁듯이 묻는다. 수다 떨 듯 가벼이 다가온 말은 묵직하게 가슴을 두드린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해봐야 한다는 조바심. 그것이 원인일까. 요즘 이거 안 하는 청년들은 없단다. 일 이야기를 하다 누군가에게 또 듣는다. 안 작가님, 아직도 주식 안 하세요? 2020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코로나19는 평범하고 당연했던 우리의 일상을 앗아갔다. 세계인구의 1% 이상이 코로나19에 감염됐고, 180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언택트로 송년을 보내고 신년을 맞이했다. 친구들과 다시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고 싶다는 아이와 다시 가게 문을 열고 싶다는 아버지의 2021년 새해 메시지는 음울하게 들려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고 싶던 채용 공고가 뜨지 않는다. 높고 좁아진 취업문은 바늘구멍이 아닌 나노구멍이라 부른다. 2021년 고용시장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뉴스에 청년들의 한숨만 깊어진다. 2020년, 20~30대 청년의 빚이 급하게 늘어났다.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높다. 청년들은 빚을 내어 불안한 미래를 주식으로 채운다. 주식설명회에 청년이 대거 몰리고, 주식 관련 유튜브로 하루를 시작하는 청년이 많아졌다. 일자리는 없지만, 시간과 스마트폰이 있기에 청년들 사이에 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한다. 취업한 청년들 사이에서도 주식은 뜨겁다. 월급은 티끌이고 주식은 대박이라는 말과 퇴사해서 큰돈을 만졌다는 말이 떠돈다. 빚투(대출을 통한 주식 투자)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로 한주라도 움켜쥐려 애쓴다. 필자는 학사는 국문학을, 석박사는 경제학을 전공했다. 전공이 바뀐 이유는 신문이었다. 경제면을 아무리 읽어봐도 자신이 한국인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경제학에 도전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기 전에는 주식 프로그램 진행자를 꿈꿨다. 서울에서 주식 프로그램 진행자를 만난 적이 있다. 강원도로 캠핑도 다니며, 전문투자자들과도 어울렸다. 대화의 주제는 주식이었다. 필자를 한동안 지켜보던 주식 진행자는 만약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주식이 아니라 기타를 치겠다고 말했다. 너는 아직 젊은 청년이니, 예술을 하라고 했다.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대학원 세부 전공으로 금융을 선택했다. 투자 관련 수식을 공부하고, 논문을 쓰며, 금융 관련 연구직을 희망하기도 했다. 경제학도 치고 주식 안 하는 사람 없다지만 필자는 한 번도 주식을 사 본 경험이 없다. 그렇게 박사를 수료하고, 극작가가 되었다. 현재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 평생을 살아보겠다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주식에 투자하지 않는가.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주가가 오르내리는 시장에서 소신을 잃지 않는 투자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같이 살면 투자요, 혼자만 잘살면 투기다. 주식시장에서 같이 잘 살자고 투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주식투자란 동업자를 선택하는 것이고, 평생 함께할 회사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투자자의 말을 이쯤에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20대에게 남은 유일한 사다리가 주식이라고 외치는 청년들에게, 그만두라고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식투자로 청년의 일상마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당연하고 평범했던 일상이 코로나19로 무너졌던 것처럼 말이다. 모두 입장했습니까? 아직도 들어가지 못한 1인이 남아있습니다. /안선우 문화예술공작소 대표 △안선우 대표는 판소리극 화용도와 창작음악극 여인, 1894, 꽃 찾으러 왔단다 등의 극본을 집필했다.

  • 오피니언
  • 기고
  • 2021.01.03 17:42

1주택을 법으로 강제한다는 오해

박지원 변호사 진성준 의원이 대표발의한 주거기본법 개정안에 대해 야당과 경제지에서 1가구 1주택법이라고 명명하며 연일 논란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공세 하에 인터넷 댓글도 법으로까지 1가구 1주택을 강제하느냐는 비난 일색이다. 쏟아지는 보도를 보며 먼저 든 생각은 정확한 법안명과 개정 조문을 온전히 전달하는 기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1가구 1주택을 법으로 강제한다는 논조만 가득할 뿐, 개정되는 법 이름이 주거기본법이고, 개정안은 1세대 1주택 보유를 국민을 대상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수립하는 정책의 원칙으로 천명할 뿐이라는 점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시민들에게 법이라는 단어는 특정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하면 처벌한다는 어감을 준다. 국민들이 스스로 법을 지켜야 하는 대상 즉, 수범자로 상정되는 것을 당연시하기 때문에, 법률에 1가구 1주택이 명문화된다고 하면 곧 이를 위반하는 국민들은 제제를 당하겠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법령은 행정기관을 규율하는 행정법이고, 특히 그 중에서도 기본법이라는 명칭이 붙은 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의 일반원칙과 국가의 책임을 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예 : 과학기술기본법, 교육기본법 등). 이번 주거기본법 개정안의 전체 내용은 국가가 국민의 주거권 보장을 위한 주거정책 수립에 있어 현행 기본원칙 9개에 더하여 1세대가 1주택을 보유, 거주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주택이 자산의 증식이나 투기를 목적으로 시장을 교란하게 하는 데 활용되지 않도록 하며, 주택을 소유하지 않거나 실제 거주하려는 자에게 우선 공급한다는 원칙을 추가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구의 범위를 벗어나 이루어지는 모든 공방은 각자의 진영논리에 따른 함의의 해석에 불과하다. 사실 현행법상 기본원칙 9가지에는 이미 국민의 주거비가 부담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되도록 할 것, 장애인, 고령자 등 주거약자가 안전하고 편리한 주거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정책방향도 담겨있다. 과연 반대 측에서 이 또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사회주의적 발상으로 보는지 되묻고 싶다. 요컨대 이번 개정안은 국가가 주거정책을 수립할 때 1세대가 1주택을 보유, 거주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내용인데, 반대 측은 이를 국민의 다주택 보유를 법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법으로 제재한다는 이미지로 각색하고 있다. 이는 집값 폭등에 따른 현 정권 지지율 하락에 더하여, 국민이 직접 법안의 구체적 내용까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과 수범자로서 법에 대해 갖는 인상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유효하다. 물론 진성준 의원이 TV 토론 뒤에 그래봤자 집값 안 떨어질 것이라고 말하여 논란이 되었던 당사자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터이다. 정치공세야 전술로 이해하더라도, 사건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는 아쉽기만 하다. 법안의 실체를 검증하여 전달하는 기능은 사라지고 자극적인 공방만 앵무새처럼 받아쓰며 여론 양극화를 증폭시키는 보도는 연예계 가십 기사를 방불케 한다. 본질이 아니라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그것이 악마인지 아닌지 싸우게 만드는 보도 행태의 지속 여부에 따라 언론이 진실 발견의 공기(公器)인지 아니면 특정 집단을 위한 여론선동의 주도자인지 독자들은 판가름할 것이다. /박지원 변호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0.12.27 18:04

문화예술계에서 왜 하필 성평등을 주장하느냐 묻는 동료들에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올해 초 오피니언 필진을 의뢰받고 문화예술계 내 다양한 이슈에 대해 또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에 대해, 예술인 당사자로써 느낀 어려움과 불편함에 대한 글을 주로 기고했다. 코로나19로 멈춰버린 문화예술계의 시간에 대하여, 비대면 공연이 주류가 되면서 관객을 만나지 못해 극심한 고민에 빠진 연극 연출자의 시선에 대하여, 지역 예술가를 대하는 우리사회의 선입견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보다 힘주어 이야기했던 소재는 바로 전라북도 문화예술계 내 안전한 창작환경 구축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칼럼 뿐 아니라 일상과 일터에서도 성평등의제를 주로 피력하는 나의 행보를 지켜본 예술인 동료는 이렇게 물었다. 안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 문화예술계에서 왜 하필 성평등이야? 이 질문이 함의한 바를 알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선뜻 그를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이 글을 읽는다면 성평등은 문화예술계 내 불평등한 구조와 불합리한 지원과정을 가시화한 예술인 복지의 첫 단추임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술작업이 여타의 노동과 다른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종사자의 생계를 위한 행위와 구별되는 분명한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예술인의 작업은 어떤 결과물이든 관객을 만나고, 독자를 만나고, 리스너를 만난다. 예술인이 창작해낸 모든 것을 대중은 향유하고 이 과정을 통해 대중과 예술인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관계임을 자각한다. 파급력, 영향력, 전파력과 같은 단어가 문화예술계의 수식어로 붙는 이유도 이와 같다. 이 지점에서 예술인의 젠더감수성과 안전한 창작과정은 문화예술계에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며 성평등한 창작물이 대중과 만났을 때 그 여파가 어떤식으로 맞닿게 되는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인의 먹고사니즘과 그 시급성을 주장하며 성평등을 번거로운 과제로 인식하는 동료들의 피곤함이 여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너무도 오랫동안 오로지 결과물로 평가받는 방식에 익숙해진 나머지 내부를 돌보지 못하는 공동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진 결과물만이 다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를 위해 소음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프로젝트라는 좋은 평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작품에 참여한 예술인 개개인의 다양한 맥락과 어려움, 고통은 생략된 채 결과물만 남기는 기이한 현상은 현실이 되고 수도 없는 착취와, 성폭력, 성차별은 만연하고 이것을 견뎌내는 것이 마치 예술의 미덕인양 포장되기 일쑤였다. 결국 가난한 예술인들은 결과물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인식하는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나는 문화예술계를 다시 쓰길 원한다. 작품을 수치화하는 방식의 선정 과정을 뒤집고 예술가를 양적척도로 평가하는 모든 기준이 바뀌길 원한다. 예술인은 창작물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니라 대중과 소통하며 세상을 바꿔가는 변화의 주체임을 인식하길 원한다. 예술인의 노동력은 가치 있으며, 이것을 외치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동료임을 발견하길 바란다. 대중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창작환경 속 예술인은 고통에 처해있다. 왜 성평등이 아니라 이제 겨우 성평등을 외칠 뿐이다. 성평등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등한시 했던 예술인 복지의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로 출발점에 서있는 것이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12.20 17:54

장애인 보조견은 입장이 안 됩니다

김주은 도르 대표 올해 4월 시각장애인 보조견 조이가 국회에 출입하는 것이 커다란 논란이 되었으며, 최근에는 한 대기업에서 안내견의 출입을 거부하여 이슈가 되었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 4조(차별행위)에 따르면 보조견의 정당한 사용을 방해하거나, 보조견 사용에 대하여 정당한 사유 없이 제한, 배제, 분리, 거부 등에 의하여 불리하게 대하는 경우는 명백한 차별이라 말하고 있다. 또 이 법에서 금지한 차별행위를 행하고 그 행위가 악의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법원은 차별을 한 자에 대하여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러한 법제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이, 그리고 장애인의 사회참여를 위한 과정이 차별받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올 한 해 동안 일련의 장애인 보조견 입장금지 사건들로 인하여 우리 사회는 드디어 장애인이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였고, 인정하였으며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매우 긍정적인 결과라 볼 수 있다. 장애인 보조견에 대한 법률은 언제부터 시행되었을까? 1999년 4월 22일 연합뉴스 국내 시각장애인 안내견 22마리뿐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지난 1931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안내견 훈련센터가 설립된 후 95년 기준으로 영국 4400마리, 일본 850마리, 뉴질랜드 220마리 등 외국에서는 안내견이 일반화됐는데도 국내에서는 안내견을 대동한 시각장애인들이 공공시설을 이용하거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출입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 2월 공포된 개정 장애인복지법이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된다. 기사 속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정당한 사유 없이 대중교통이나 공공장소 및 숙박시설, 식품접객업소 등에서 장애인 보조견을 거부할 수 없다는 법안은 2000년도부터 시행되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우리는 이 법안과, 장애인 차별 그리고 장애인 보조견 차별에 대하여 인지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차별을 20년 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올해 5월 차별은 무지에서 나온다라는 제목으로 청춘예찬 칼럼에서 말했던 바와 같다. 우리는 아직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양쪽 모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구성된 사회 속에서 개인의 특성에 맞는 환경과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없어 배척되게 된다. 또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만날 수 없기에 장애인이 어떠한 배려가 필요한지 인지할 수 없고, 결국 자신이 차별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체 차별을 하게 된다. 우리는 장애인 보조견 입장금지 사례를 시작으로, 이 외에도 사회가 장애인에게 얼마나 많은 차별을 알지도 못한 채로 자행하고 있는지 명확히 인지하고 더 알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여전히 차별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사회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먼저 차별이 없는 사회에 동참해야 하며, 그 시작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차별들을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이와 같은 장애인 차별과 인권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지금과 같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고, 명확히 인지하고, 인정하고, 개선하여 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김주은 도르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12.13 17:49

이상한 사람으로 살아갈 용기

정은실 사회활동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전주에 내려온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2020년을 돌아보며 방 안의 수없이 많은 메모지를 정리하다가 친구가 적어준 시를 다시 읽어본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구절에 마음이 훅 빨려 들어간다. 필름처럼 전주에서 보내온 시간이 스쳐 지나가다가 갑작스레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어 발버둥 쳤던 1년이었구나. 내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고 일 잘하는 사람이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한 해였구나. 애썼던 자신을 되새길수록 입이 마르고 쓴맛이 난다. 타자를 의미 있는 누군가로 이름 짓는 것은 내 미래를 불명확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몸짓에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내 삶에 구체성을 가지고 들어오며 그로 인해 나의 미래가 불명확해진다. 그랬다. 끊임없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의미 담은 이름을 붙여주고 마음이라는 땅에 잘 심어주었다. 잘 자라난 이름은 의미라는 잎이 되서 만족감이라는 열매를 주고 잘 자라지 않은 이름은 의미만 남아 땅의 양분을 빼앗아 갔다. 어느새 마음의 땅은 메말라 죽은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구체성을 가진 의미 있지만, 의미 없는 이름들이 늘어갈수록 내 미래는 더 불명확해져갔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붙여준 그 이름의 완성을 위해 그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 데에는 익숙하면서 이름이 자라는 땅에는 마음을 쏟지 못하고 얼마나 병들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결국, 잎은 자라지 않고 열매는 맺지 못하며 말라비틀어진 줄기들만 남아 있다. 갈라진 땅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양분을 갉아먹으며 다른 갈망이 자라났다. 내 말을 들어줘요. 나를 이해해 줘요. 나를 존중해 주세요. 이제 와 돌아보니 마르면 마를수록 이해받으려는 갈망은 커지고 애초에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은 메마른 땅을 뒤덮어 속이 말랐는지 어떤지 알아채지 못했다. 갑자기 멈춰보니 무엇을 위해 이렇게 일하고 있는지,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타인에게 무엇이 되기 위해 보여주려고 만든 틀 안에 오랫동안 갇혀서 사람들이 인식하는 내가 나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내가 나인지, 또 다른 내가 있는지 헷갈리며, 헤매는 어딘가쯤에 지금 서 있다. 산다는 것은 결국 끝없는 불안 속을 헤쳐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닌 타인에게 몰입하면 그의 판단과 시선에 갇히게 된다. 벗어나려 애쓸수록 더 강하게 인식된다. 타인의 판단과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내 인생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집중하기보다는 이곳을 걷고 있는 나의 존재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머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펴고 걸으며 나의 존재를 실감해야 한다. 인간의 삶이란 그저 먹고, 자고, 싸고,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특별한 것으로 채우고, 특별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에 휴식을 위해 친절을 내려놓고, 불안한 이 감정이 괜찮은 것임을 인정하고, 기꺼이 이상한 사람으로 살아갈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세상의 모든 이상한 사람을 예찬하며 이상한 글을 마친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0.12.06 17:50

공정경제 3법과 여말선초 토지개혁

박지원 변호사 여당 내에서 공정경제 3법 내지 5법으로 불리는 개혁입법안의 완화 및 처리시기에 관한 논의가 오가는 모양이다. 경제민주화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아 온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오히려 민주당을 향해 법안 통과에 소극적이라며 비판하는 재미있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과거 박근혜 정부가 발의하였다가 폐기된 법안보다도 개혁성 측면에서 후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수 의석을 점한 여당이 원안대로 신속히 처리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애당초 모두를 만족시키는 개혁이란 존재할 수 없는 이상 누군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며, 누군가는 시기가 좋지 않다며, 누군가는 오히려 개악이라며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법조문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찬반 양론을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려 조금이라도 더 나은 타협안을 도출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겠지만, 그런 골치 아픈 일은 남에게 맡겨두고 드러누워 TV나 보면서 혁명가의 백일몽으로 대리만족이나 하고 싶은 것이 나를 비롯한 필부들의 솔직한 심경일 것이다. 혁명가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중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2014년에 KBS에서 방영한 대하사극 정도전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시대적 격동기를 다룬 걸출한 사극들은 많지만, 군주의 영웅담이 아니라 일개 관리의 시각에서 혁명의 시도와 좌절을 그린 각본이라 유독 인상 깊었다. 드라마의 배경인 여말 선초는 구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한 시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적폐는 주군(州郡)과 산천(山川)을 경계로 삼아 경작량의 대부분을 앗아가던 권문세족으로의 부의 집중이었다.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 하나 갖지 못한 채 자영농에서 소작농으로, 소작농에서 노비로 몰락해갔고, 드라마에서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이러한 경제구조를 타파하는 토지 개혁을 필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정도전이 꿈꾸었던 이상은 백성의 수를 헤아려 땅을 나누어주자는 계민수전(計民收田)의 원리에 입각한 정전제(井田制)였으나, 이는 곧 생산수단을 무상몰수 무상분배하자는 급진적 사상이었기에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였다. 대신 조준의 과전법(科田法)으로 타협이 되었고, 개혁은 신속히 진행되어 1390년 고려의 토지대장을 모두 불태우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이처럼 통쾌한 토지개혁으로 백성들의 숨통이 트이는 모습만 보여줄 뿐, 이후 과전법이 망가지는 모습은 그리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는 권문세가와 겨뤄 혁명에 성공한 신진사대부들이 공신전(功臣田)이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받아 세습하며 수조권(收租權)을 갖게 된다. 조준, 정도전 등 공신에게 주어진 공신전이 태종 대에 벌써 경기도 토지의 20% 가량에 달했다고 하니, 개혁을 주창한 자들 스스로 개혁의 명분을 퇴색시켜버린 셈이다. 불타는 토지대장을 보며 환호하였던 백성들로서는 개혁세력이 또 다른 기득권이자 적폐로 변해가는 과정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금회기에 추진되는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안은 대주주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견제 장치를 강화하는 정도의 내용일 뿐, 누구의 것을 빼앗아 나누어주자는 식의 급진적인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타협과 협치를 이유로 어느 정도 물러설지 두고 보아야 할 것이나, 당초 취지를 무색케 할 정도로 원안에서 후퇴한다면 결국 또 개혁세력이 초심을 잃고 기득권에 포섭되어 버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박지원 변호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0.11.29 17:55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의 권력이 두렵지 않습니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2019년 9월, 여성신문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송원님,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공개기자회견을 통해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고발하고, 활동가의 삶을 병행한지 1년 만에 일이었다. 아무리 외쳐도 바뀌지 않는 폐쇄적인 분위기에 지쳐 자책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진 나에게 선물 같은 수상이었다. 지치지 말라고, 잘하고 있다고, 지금처럼 계속 외쳐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다시 달릴 힘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2018년 2월 26일. 전북지방경찰청에서 언론사를 통해 극단대표의 성폭력사실을 고발했다.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감정은 두려움과 외로움이었다. 피해자가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한 미투에 많은 언론사가 관심을 가졌고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자들과 카메라가 몰려들었다. 그에 비해 함께 손을 잡고 기자회견을 가줄 동료들은 손에 꼽았다. 난생 처음해보는 기자회견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어서 두려웠고, 함께 싸워줄 동료들이 없어서 외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라고. 잘못을 한 사람이 벌 받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이후 지역 여성단체로부터 집회가 열린다며 발언을 해주길 바란다는 연락을 받았다.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기자회견 이후 피해자답지 않다는 말에 잔뜩 주눅이든 상태였고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나간 그 곳에서 엄청난 광경을 목격 하게 되었다. 정말 많은 여성들이 손수 만든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함께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그녀들은 어떤 이유로 내 아픔을 나눠가져갔을까?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한 활동가 선생님이 내게 다가오셨다. 송원 씨의 삶에서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하면서 살아도 괜찮아요. 송원 씨의 남은 삶을 응원해요. 나의 위드유에요 나조차도 나를 끝없이 피해자의 위치에 놓고 검열했던 과거에서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질문을 할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권력형 성폭력의 공통적 특징을 공부하고 누가 가해자에게 권력을 쥐게 했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권력을 남용할 수 있게 했는가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연극정신이나 헝그리정신이 숨기려 했던 실체는 무엇이고, 예술계에 만연한 위계폭력, 노동착취, 불합리한 처우에 대한 접점에 성폭력이 어떻게 닿아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여성예술인을 그토록 오랜 시간 고통 속에 살게 했던 원인의 실체가 보였다. 문제를 인식조차 할 수 없도록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숨겨두었던 진실. 관행처럼 뿌리 깊게 퍼져있던 문화. 그것은 성차별이었다. 미투를 고민할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앞으로 다시는 연극계에서 활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연극을 하고 있고 지역을 넘어서 더 많은 여성예술인 동료를 만나 안전하게 작업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연극이지 어떤 세상에 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진짜 연극을 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걷히니 나아갈 길이 보였다. 이제 내 자리는 내가 만든다.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11.22 18:17

장애인 복지는 OK, 장애인 교육은 NO

김주은 도르 대표 교육이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수단이고, 복지란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을 높이고, 국민 전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어 노력하는 정책을 뜻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시사논술 개념사전) 교육과 복지의 정의를 통하여 확인해 봤을 때, 교육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며, 복지는 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다. 때문에 삶을 풍요롭게 사기 위한 요소로서 교육과 복지는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교육과 복지가 연결되어 있지만, 다소 다른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삶을 영위한다. 태어나서 밥을 먹는 것, 걷는 것, 옷을 입는 것과 같은 기초 생활부터, 더 나아가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기 위해 배우게 되는 모든 고등교육까지, 평생 동안 교육을 받으며 살아간다. 복지는 주권을 가진 모든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국가가 시행하는 정책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육과 복지는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교육이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이는 좋은 교육이 선행되지 않고는 좋은 복지가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이 없는 복지는 오히려 나태한 인간을 만드는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장애인 역시 국가의 주권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좋은 복지 이전에 좋은 교육이 선행되어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 교육도구를 제작하고 소개하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복지와 교육의 차이점을 모르고 있었다. 또는 장애인 복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이나 상대적으로 장애인 교육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 사례로 점자교육도구를 소개할 때 만났던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각장애인은 들으면 되지 굳이 점자를 배워야 하는가 물론 시각장애인의 나이와 장애 정도 ? 외부 환경에 따라 점자 학습 여부는 모두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점자를 배운 시각장애인이라면 교육 이후부터 장애인은 스스로 본인의 신체 일부를 사용하여 외부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 하지만 듣고 정보를 습득하는 것은 들을 수 있는 콘텐츠와 재생할 수 있는 이어폰이나, 스피커, 핸드폰 등 청력을 활용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외부 매개체가 시각장애인을 보조해 주어야만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듣는 것과 점자를 읽는 것은 장애인의 주체성을 결정하는데 커다란 차이를 가진다. 이 예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많은 비장애인들은 아직도 장애인을 누군가, 또는 무언가로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의존적인 존재로 여긴다는 것이다. 역설하자면 듣는다는 장애인을 도와주고 보조하여 주는 복지에는 적극적이나, 상대적으로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필수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정작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삶을 영위하는데 절대적인 요소이다. 더욱이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개인적 특성을 가진 장애인이 비장애인에게 맞추어진 현재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장애인 개인의 특성에 맞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 칼럼을 통해서 비장애인은 장애인에게 복지 이전에 교육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장애인을 의존적인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 바라봐 주길 바란다. 또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에게 맞추어진 생활환경에서 비장애인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려면, 단순히 복지정책의 발전을 요구하기 이전에 개인의 교육과 학습이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확인하길 바란다. /김주은 도르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11.15 19:20

교대역에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

정은실 사회활동가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가? 5년 전 초겨울, 서울에 살 때 있었던 일이다. 3호선 양재역에서 교대역으로 걸어가야 하는 상황에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전원이 꺼졌다. 양재역에서 교대역까지 지하철을 타면 한 정거장만 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일 수 있지만, 걸어가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걸어가기에 멀고 날씨도 쌀쌀해 평소 같으면 걷지 않았겠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찬 바람에 정신을 차릴 겸 걸어가기로 했다. 빠른 걸음이면 30분 정도에 갈 수 있으니 서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침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상황이라 방향치에 길치인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교대역으로 갈 수 있는지 몰랐다. 주변에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에게 물었다. 교대역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라고 물으니 직장인은 거기 멀어서 못 걸어가요. 지하철 타면 한 정거장이에요라고 답했다. 음?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냐고 물었는데 걸어가기 어렵다는 말이 돌아왔다. 제3자로 이 상황을 보니 질문에 적합한 대답이 아니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겠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채 이런 식의 대화를 자주 반복한다. 예를 들어 다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어?라는 질문에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라고 답하는 경우가 있다. 말하는 이가 묻는 말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말한다고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양재역에서 질문을 받은 직장인의 걸어가기에는 멀어요.라는 대답은 사실 나를 걱정해주는 말이었다. 가는 길이 멀다는 것을 알려주고 친절하게 지하철 타면 한 정거장이니 도보보다 가깝다는 것까지 알려준 것이다. 나를 걱정해주고 대안까지 마련해주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나의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멀지만 걸어가기로 했어요. 방향치라서 교대역으로 가는 방향을 모르겠어요.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요? 그제야 아, 저쪽으로 가면 돼요라고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분을 지나쳐 교대역으로 향했다. 양재역의 직장인이 내 질문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 생각을 우선시했다. 그렇다면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잘 듣고 싶다면 상대방이 말할 때 자기 생각에 빠지거나 대답할 말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우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와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위의 예시를 좀 더 들여다보자. A의 다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어?라는 질문에 B의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라는 대답은 A가 원한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A는 다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아니,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느냐고?라고 한다면 A도 B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다. B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니 재촉하는 느낌이 들어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A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구나. 재촉하는 건 아니고 전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봤어. 알 수 있을까?라고 다시 물어본다면 둘의 대화는 한결 편안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이가 한 말에 대한 반응이나 대답을 먼저 한 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반응이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 오피니언
  • 기고
  • 2020.11.08 19:41

미안해요, 리키들

박지원 변호사 작년 말 개봉한 켄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는 한 택배노동자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1936년생의 이 노장 감독은 꾸준히 사회적 사실주의 영화를 제작해왔는데,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복지제도의 허점을 짚었다면, 미안해요, 리키에서는 시대적 트렌드로 불리는 플랫폼 노동의 취약성을 파고 들었다. 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실업 후 일용직을 전전하던 리키는 새 삶에 대한 희망을 안고 개인사업자 신분을 갖는 택배기사 일자리를 구한다. 성실히 일하며 간병사로 돌봄노동을 하는 아내와, 말썽도 부리고 철 들기도 하는 사춘기 자녀 2명과의 단란한 가정을 지키려 애쓰지만, 장시간의 고된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에 몸과 마음은 망가져가고, 자영업자라는 이유로 회사의 어떠한 보호도 없이 모든 불운과 책임을 개인적으로 떠맡으며 화목했던 가족 관계마저 무너져 내린다. 픽션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데다가, 배우들이 외국인이라는 점을 빼면 상황 자체는 영국인지 한국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우리와 비슷하다는 점도 씁쓸함을 더한다. 우리나라에서 올해 사망한 택배노동자의 수는 이미 10명을 훌쩍 넘겼고, 대부분 과로사로 추정된다. 실태조사 결과 집계된 택배노동자의 주당 평균 근무시간은 70시간, 월간 평균 근무일수는 25일을 상회한다. 산업재해 사건에서 과로로 인한 업무상 재해가 가장 쉽게 인정되는 업무시간 기준이 주당 평균 64시간이니, 가히 극한 직업으로 부를 만하다. 하루에 여러 시간은 보수를 받지 못하는 소위 까대기(분류 작업)에 쓰고, 남은 시간에는 수백 건의 물량을 1분에 1개꼴로 배달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초인종을 누르고 재빨리 돌아오는 사투를 벌인다. 짐을 든 채로 수만 보를 걷고 100층 가까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과로가 되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하다. 다행히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구도가 점차 형성되고 있다. 택배노동자들이 입는 옷이나 받는 물건에도 새겨져 있고 작업지시에도 등장하지만, 대리점영업소와의 하도급관계나 위탁구조를 이유로 노조의 교섭에 응하지 않았던 원청회사는 작년 말 교섭에 응하도록 판결을 받았다. 택배기사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판결들도 올해 속속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자상거래의 성장세에 물동량이 꾸준히 증가해오던 택배회사들은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소비까지 급증하자 미증유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누리고 있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빌미로 무보수 분류노동을 택배기사에게 전가시키면서 비용은 부담하지 않으려 했던 사측 입장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공감받기 어려워진 것이다. 노동계 의견을 반영하여 택배기사에게 위탁계약갱신청구권을 6년간 보장하고, 운전종사자와 분류종사자를 구분하여 분류작업에 별도 비용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한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안은 지난 20대 국회에서 폐기되었지만, 현 21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되었고 여당 의석만으로도 단독 처리가 가능한 상황이다. 영화 원제인 Sorry We Missed You는 다의적 표현이다. 택배기사가 고객을 만나지 못한 채 물건만 두고 올 때 남기는 쪽지 문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과 사회가 (택배기사) 당신을 놓쳐서 미안하다, 당신을 잃어서 미안하다, 당신이 그리웠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 사회와 전국의 5만 택배노동자들이 서로에게 미안해하거나 서로를 그리워해야 하는 일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기 바란다. /박지원 변호사

  • 오피니언
  • 기고
  • 2020.11.01 18:36

‘연극정신’과 ‘헝그리정신’ 사이 어딘가에 예술이라는 보물섬이 있을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스물 한 살의 겨울, 오디션을 보고 극단에 들어갔다. 잘은 모르지만 나는 단원이 되었고 단원이 되면 공연을 할 수 있다고 했다. 6개월간 청소와 인사, 설거지를 배웠다. 먼저 극단에 있던 사람들을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배웠다. 언제 어디서도 본적은 없지만 서로 익숙한 듯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은 분명 나보다 먼저 시작한 사람들 일 것 이라는 눈치도 배웠다. 그들을 모두 선배님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그들은 나에게 몹시도 사적인 것을 자유롭게 물어보았고 언제나 반말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절대 사적인 것을 묻지 말아야 하며 의견이 달라도 토론하는 것은 몹시 버릇없는 행동 임을 배웠다. 성격이 좋거나, 성실하거나, 분위기를 띄우거나, 빠릿빠릿하거나 여하튼 어떤 이유로든 단원으로서 좋은 평판을 갖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배웠다. 연극을 하기 전 사람이 되어라 라는 문구를 그 예로 배웠다. 7개월 째 부터는 공연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경력도 없고 인맥도 없는 아주 어린 배우이기 때문에 어떤 급여나 페이는 받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다. 아! 오히려 아마추어인 나에게 수강료를 받지 않고 무대를 설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감사히 알라 배웠다. 그렇지만 연습에 방해되는 그 어떤 아르바이트도 하지 말라고 배웠다. 나의 정체성은 배우이기도, 아마추어이기도 했다. 몸매와 얼굴과 실력과 나의 모든 것은 언제나 평가의 대상이었지만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배웠다. 연극은 원래 배고픈 것이라는 통념과, 요즘 것들은 헝그리정신이 없다는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의 일침 속에서 나의 20대는 예술이라는 보이지 않는 보물섬을 찾아 표류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 곳에서 살아남고 싶었고 이 곳에서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아무것도 잘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스물다섯의 겨울, 극단대표의 성추행으로 인해 극단을 탈퇴하고 예술이라는 보물섬은 찾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전 극단에 있던 다른 또래 동료 네 명도 극단을 탈퇴했다며 우리끼리 공연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가슴이 뛰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30만원씩 돈을 모았다. 우리끼리 역할을 분담했다. 대본을 찾고 포스터를 만들고 무대를 구상하고, 소품을 만들며 안무를 짜기도 하고 밤새 연습을 했다. 준비 기간 내내 우리는 자주 다투고 많이 웃었다. 아무도 혼나지 않는 이곳에서는 다툼을 통해 성장했고 우리는 다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공연당일 엄청나게 많은 관객들이 몰렸지만 선배들은 우리 작품을 혹평했다. 우리 연극은 실패한 걸까? 그런데 우리 공연이 왜 성공해야하지? 공연을 마치고 내게는 그들에게 되물을 힘이 생겼다. 이 글은 2020 연극의해 전국청년연극인 공론장에서 눈물을 꾹 참으며 한자 한자 발표한 위계폭력 경험담 중 일부이다. 현재를 사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창작자로 존재해야 마땅한 것인가 묻고 싶었다. 또 사업수행과 더 나은 결과물제출이라는 기존의 예술지원방식이 무엇을 놓치는지 말하고 싶었다.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창작환경 속에서 더는 아픈 경험담이 연극정신이라고 일컬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미 너무도 불균형한 지역문화예술계의 권력관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어야 할까? /송원 배우다컴퍼니 대표

  • 오피니언
  • 기고
  • 2020.10.25 16:26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