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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민중 정서 담아낸 각종 설화 - 시간이 멈춘듯 수천년간 녹아든 옛 이야기들

지역민 삶과 문화 반영 / 불교 적 특징 두드러져 / 무속 관련 내용도 많아

▲ 지리산 성삼재에서 바라본 운봉읍 전경. 성삼재 좌측이 정령치이고 우측이 황령재다. 사진 제공=남원문화원

설화는 특정지역이나 문화권에서 구전돼 오는 이야기의 총칭이다. 설화는 자연발생적이고 집단적임과 동시에 평민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특정 지역 주민들의 생활, 감정, 풍습, 신념 등을 반영한다. 따라서 한 개인의 창작이기보다는 특정 집단이나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했으며 그 당시 민중들의 생활과 정서를 담고 있다. 또 설화는 신화와는 달리 구체적인 지역성과 역사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신화가 까마득한 태초 역사시대 이전의 이야기라면 설화는 멀지 않은 시대에 특정지역에서 발생한 이야기다.

 

지리산권에서 탄생한 설화도 이런 일반적인 특징들을 가지면서도 종교·역사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특히 불교설화가 풍부하고 무속과 관련된 설화는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게 특징이다.

▲ 전남 구례군 화엄사에 있는 각황전.

△화엄사 각황전 중수기

 

전남 구례군 화엄사 경내에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각황전이 있다. 이 건물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으로 조선 중기 1699년 공사를 시작해 4년 만에 완공, 당시 임금인 숙종이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장육전 건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벽암스님의 제자였던 계파스님은 스승의 위임을 받아 장육전 중창불사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건축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계파스님은 밤새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기도했는데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는 걱정 말고 내일 아침 길을 떠나라. 그리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하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계파스님은 간혹 절에 와서 밥을 얻어먹곤 하던 노인를 보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시주를 청했다. 스님의 간청이 이어지자 가진 재산이 없었던 노인은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하리니 부디 문수대성은 큰 가피(加被·부처나 보살이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것)를 내리소서"라고 말한 뒤 길 옆 늪에 몸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계파스님은 멀리 도망쳤고 몇 년간 걸식하며 돌아다니다 서울에 이르렀다. 이때 궁궐 밖에서 유모와 함께 나들이하던 어린 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손이 꼭 쥐어 진 채 펴지지 않았는데 계파스님이 손을 만지자 신기하게도 펴졌다. 그리고 손 안에는 '장육전'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계파스님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감격해 장육전을 지었다고 한다.

▲ 경남 하동군 칠불사에 있는 칠불상.

△칠불사 일곱왕자와 허황후

 

지리산 반야봉 동남쪽 해발 800m 고지에 자리 잡은 칠불사. 삼국시대 초기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던 가락국(駕洛國)의 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이곳에 와서 수도를 한 뒤 모두 성불했다고 해서 칠불사라 불린다.

 

수로왕은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 있었던 아유다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았다. 두 사람은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왕위를 계승했고, 차남 삼남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명의 왕자들은 출가해 아유다국에서 함께 건너온 허황옥의 오빠 장유보옥 선사를 따라 서기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불교에 정진해 수로왕 103년 모두 성불했다.

 

칠불사에는 이들이 수행했던 운상원터와 수로왕과 허황옥이 간접적으로나마 물에 비친 아들들의 모습을 봤던 연못이 남아있다.

 

△달궁계곡 정장군 황장군

 

지리산에는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수많은 주검들이 묻혀 있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전쟁이 벌어진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슬픈 역사이야기는 멀리 삼한시대까지 올라간다. 마한·진한·변한은 부족 간에 큰 전쟁이 일어났다. 진한군에 쫓기던 마한의 왕이 전쟁을 피해 문무백관과 궁녀들을 이끌고 지금의 달궁 계곡으로 들어왔다가 최후를 맞는다. 당시의 상황들은 지리산 곳곳에 남아 있는 지명에 그대로 담겼다.

 

달궁에 은거지를 마련한 마한 왕조는 사방의 험준한 산세를 지키기 위해 수비군을 배치했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했는데 인근의 재 이름은 '팔랑재'다. 서쪽에는 정장군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령치'이며, 동쪽은 황장군이 주둔했다 해서 '황령재'다. 남쪽은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해 지키게 했기 때문에 '성삼(姓三)재'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때 쌓은 성의 흔적들 또한 고리봉에서 정령치,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아직도 남아 그 옛날의 이야기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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