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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아우타르케이아 길 - 박월선

그림=신보름
그림=신보름

모악산 기슭, 텃밭 길을 걷는다. 숲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시원하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도시가 보이는 산 아래로 간다.

텃밭 가는 길목에 아기 흑염소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아저씨가 아직 퇴원을 안 하신 모양이다. 퇴직을 하고 흑염소 농장을 시작했다는 아저씨가 보이지 않아 얼마 전 물어본 적이 있었다.

“흑염소 아저씨가 안 보이시네요?”

“글쎄 암에 걸렸대. 지금 병원에서 수술하고 치료 중이라네. 아들이 가끔 와서 흑염소 사료 주고 가.”

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는 아저씨. 어서 빨리 회복하시길 바라며 길을 걷는다.

흑염소 농장 너머로 걷다 보면 다랑이 논이 보인다. 다랑이 논은 모두 4층으로 되었다. 그중 3층, 4층 다랑이 논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이 논은 농사를 안 짓는대요?”

“작년에 가뭄이 들어서 아래 논 주인과 칼부림을 했어.”

“왜요?”

“아래 논 주인이 저 위 계곡에서 먼저 물을 호스로 끌어서 아래 논에 물을 대니, 위 논 주인이 물이 부족했던 거지.”

“아, 가뭄.”

올봄 너무 가물어서 우리도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열 받은 이 씨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잔뜩 마시고 물을 끌어오는 호스를 낫으로 잘라버렸어. 그러니 아래 논 주인과 싸움이 난 거지.”

“다친 사람은 없나요?”

“낫 들고 덤벼드니 경찰서에 신고하고 경찰이 출동하고 살인 미수죄라고 난리가 났지. 그래도 사람은 안 다쳐서 조용히 끝났어.”

“다행이네요.”

“도시에서 직장 다니던 자식들이 허겁지겁 와서는 아부지, 농사지어서 얼마나 남는다고 그라요, 이제는 농사짓지 마시오, 그 논 팝시다, 그랬다지. 과수원 길에 소문이 파다해.”

빈 논에는 소문만큼 풀들이 무성하다.

과수원을 지나 기슭 아래 이르면 텃밭이 있다. 텃밭으로 지나는 길에는 작은 보랏빛 자운영 꽃이 피고 잡풀 속에서 피어난 참나리 꽃도 화사하다. 그동안 몰랐던 더덕 꽃도 길을 걷다 발견한 것이다. 계절을 모르는 듯 피어난 코스모스도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질경이가 가득 찬 길을 밟고 가기 미안해 사뿐히 지르밟고 지나는 텃밭 길이다. 밭고랑과 고랑 사이를 밟고 흙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계절별로 다른 햇볕의 강약도 즐긴다.

도시의 경쟁 속에서 살다가,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악산 기슭이 나를 안아서 위로해 준다.

“힘들었지? 수고했어.”

풀과 꽃들이 나무가 바람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누군가와 경쟁하기보다 연약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영원의 소유자인 나 자신을 위로하며 살기로 마음먹는다.

“그래, 너는 최선을 다한 거야. 오늘 하루는 모악산에게 위로받고 들꽃들에게 사랑도 받을 자격이 있어.”

자연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땅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면 햇볕과 바람이 들어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최근 깨달은 게 있다. 비닐하우스 안에 레몬밤 허브 한 줌을 심었더니 아주 잘 자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잘라 말려서 아들 방에, 남편 자동차 안에, 그리고 텃밭을 찾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향기를 만끽했다. 그런데 휴가철에 2주 정도 그곳을 찾지 못하고 3주째 갔더니 그 옆에 심어 놓은 참외 덩굴이 허브 줄기를 감아 허브를 전멸시키고 있었다. 작은 땅에 욕심껏, 너무 많은 것들을 심어 놓았으니 뻗을 자리가 부족했던 것을!

텃밭으로 가는 길 아래 엉성하게 만든 평상에 누워 책 한 권을 꺼낸다. '행복의 경제학'. 쓰지 신이치 글은 내 마음을 위로해준다.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가 풍요라는 보물을 찾기 위해 너무나도 서둘러 왔기 때문에 행복이 우리를 따라잡지 못하고 뒤처져버렸다.”

작가는 말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과 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사이의 균형 감각이며, 자신과 세상과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

나는 늘 많이 가질수록 행복해진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더 많이 갖기 위해 땀 흘리는 개미처럼 살아왔다. 그 시간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유는 내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 것 같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가슴을 쓸고 가는 휑한 찬바람 소리가 자주 들린다. 그런데 이 길은 내게 가르친다. 만족하고 순응하며 소통하라고.

나는 텃밭까지 오르는 길을 ‘아우타르케이아 길’이라고 명명한다. 아우타르케이아(‘자기만족’이라는 그리스어) 길은 헛되고 무익한 것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정도껏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 길에서 위로받고 자연이 선물해준 채소들을 가득 안고 다시 도시의 집으로 걷는다. 바람 한 줌도 가슴에 품고서.

*박월선: 2007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 동화 '딸꾹질 멈추게 해줘', '닥나무 숲의 비밀', '내 멋대로 부대찌개'(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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