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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③포크, 가마타고 삼남대로를 거쳐 전라도에 들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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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로 가는 첫 길 삼남대로와 영호남 도로의 분기점 ‘삼례’ 

포크의 조선 남부지역 조사는  <대동지지>에 나와 있는 8대로인 해남로(충남,전북,전남지역)를 통해 시작됐다. 그리고 통영로(경남)와 동래로(경남,경북,충북) 를 기본 여행길로 정했다.  해남로는 통칭 한양에서 삼남(三南;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지방으로 통하는 대로라는 의미에서 ‘삼남대로’라고 불리었다. 

포크는 1884년 11월 1일 자신의 숙소가 있는 ‘갓점골’ 즉, 현재 서울 청계천 3가 수표교와 을지로 인근의 입정동(笠井洞)에서 출발해 용산 삼각지 부근인 ‘밥전거리’를 지나 한강을 건너 동작진-과천으로 이어진 해남로길로 접어들었다. 이때 서울 근교의 뚝섬을 건널 때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의 화장실이 얼마나 깊던지, 용변을 본 후 이것들이 바닥까지 도달하려면 1년이 걸린다는 말을 들으며 조선인의 허풍과 유머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 길로 전주를 지나 나주까지 방문한 포크는 나주에서 방향을 틀어 자신이 조선에서 꼭 보고 싶어했던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통영의 ‘거북선’을 보기 위해 광주를 거쳐 담양-순창-남원으로 이동해 앞서 10대로중 유일하게 영남과 호남지역으로 길이 나뉘는 삼례에서 ‘해남로’와 갈라진 ‘통영별로’ 길을 이용해 해인사를 방문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길이 조선의 가장 중요한 관도로서 이미 춘향전 이도령 어사행차길이기도 했으며 1597년 이순신 장군이 경남 합천 초계에 주둔한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아 백의종군을 위해 갔던 길로 그 분기점은 삼례였다. 즉, 삼례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뉘는 분기점으로 조선시대까지는 현재의 영∙호남선이 갈리는 대전과 같은 역할을 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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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유리원판 사진기와 삼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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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의 기록에서 언급된 1880년대 측정기기들. 오페라 망원경, 미군용 망원경, 해군용 나침반, 아네로이드 기압계(온도계 결합식), 태엽식 회중시계,

△포크의 충성스러운 가마꾼 

조선시대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고 다니던 주요 이동 수단은 가마였다. 당시 지방여행을 위해 조선의 고관들은 4명이 교대로 드는 가마를 이용했는 데 포크도 이를 활용했다.

포크가 처음 가마를 탈때의 상황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사방이 막힌 모양의 아담하고 정갈한 가마를 탔다. 내 가마에는 챙이 넓은 펠트 모자를 쓰고 헐렁한 흰 옷을 입은 네 명의 가마꾼이 배정되었다.  신분이 높은 조선인이 여행하는 가장 과시적이고 사치스러운 방법이었다.”라고 했다.  

11월 9일 용안을 떠나 익산으로 가면서  “익산에 도착하기 전에 눈이 서너 번 무섭게 쏟아졌다... 길은 형편없어서 끔찍할 정도였다. 나는 가마꾼이 가여웠다. 그들은 진정 용감하고 주의 깊게 우리들을 운반했다. 그들의 일은 지독하게 힘들었다.”라고 기록했다. 

또 가마꾼은 보교(步轎; 포크는 “포케요pokeyo”라고 썼다)라 불렸는데 “이들은 길이 험하면 ‘제미(chemi)‘ 라는 욕설을 하거나 길을 막고 얼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욕을 퍼 붓는다. 그리고 고개를 오를 때 너무 힘들면 가마꾼들은 “아이고, 죽겠다(O-ui-i-go, chuketta!)라고 말했다.”라고 기록해 매우 구체적인 한국어 표현도 남겨 놓았다. 포크는 이들에 대해  “불평이 많지 않고 굳센 노새처럼 강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주인이 하루 이틀 숙박을 하거나 기다릴 때면 투전이나 막걸리와 소고기, 밥에 몰두한다.“ 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긴 여행동안 포크는 가마꾼들에게 꽤 호감을 느껴 두 명에게 '순둥이'와 '들창코'같은 별명을 붙였다. 이 같은 가마꾼들의 성격은 필자가 70년대 동네 택시회사 기사분들에게서 느꼈던 이미지와 묘하게 중첩되어 시대가 달라도 비슷한 업종의 특성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가마꾼들의 이동 속도는 10리(포크는 10리를 3.2마일=5.15km로 보았다.)를 1시간 내외로 진행했고 1일 최대 80-90리를 진행했다.  가마 1대의 운송방식은 4명이 2인 1조로 교대하며 담당했는데  가마를 직접 들지 않는 나머지 1조는 가마 옆에서 10분마다 휴식할 때 가마의 지지대를 들어 올려 동료들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어깨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는 1888년 명성황후의 시의로 내한했던 릴리어스 H. 언더우드(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부인)의 “가마꾼은 4명이 2명씩 쌍을 이뤄 가마를 드는 데 휴식을 취하는 가마꾼들은 매 10분마다 30초가량 잠시 가마를 들어주었고, 두 쌍은 매 3마일(4.8km)마다 교대를 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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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서 1903년까지 이탈리아 영사를 지낸 카를로 로제티의 가마탄 모습 (Corea e Coreani. 1904), 포크가 탔던 가마의 실제 모습과 가장 유사한 모습으로 추정된다.

 

△포크가 가마꾼에게 지불한 일당

포크의 여행 기록 가운데 흥미로운 내용은 엄청난 동전 궤짝을 말에 싣고 다닌 부분이다. 포크는 식사비와 기타 비용을 현장에서 지급했는데 특히, 보교 즉, 가마꾼에게 일정 기간마다 급료를 지급했다. 

포크가 가마꾼과 협상한 요금은 매 10리당 50푼이었다. 그리고 하루 90-80리를 가는 것을 약속하고 매일 진행 거리를 <대동여지도>를 통해 확인하고 일당을 지급했다. 이 같은 가마꾼 1명의 일당은, 당시 조랑말 타는 비용(10리 50푼)과 같아 결국 가마당 4인의 비용은 말타는 것보다 네 배 비용이 들었다. 포크가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최종적으로 이들에게 지급한 액수는 한 달 보름 동안 총 168,000푼이었다. 이는 대략 하루에 한 사람 당 320푼이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 ‘냥(兩)-전(錢)-푼(分)’의 화폐단위가 현재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느냐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쌀 1섬(20말) 공정가가 5냥이었던 점을 바탕으로 현재 가치(2011년 물가 기준)를 환산해 1냥=7만원, 1전=7000원, 1푼=700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가마꾼의 일당이 22만4000원으로 상당한 고액이 된다. 그런데 조선정부는 1883년 2월 주조이익을 높여 긴급한 재정난을 모면하기 위해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했었다. 따라서 당오전에 의해 최소 5배 정도의 초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 고려돼야 한다.

한편, 1894년 <교남수록>에 나타난 1끼 밥값 평균이 2전 8푼(28푼)으로 10년전인 1884년 포크가 지급한 25-30푼과 비슷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1894년 1끼 밥값 28푼을 실제 4,000원(2011년) 정도로 계산한 견해를 따르면 결국 가마꾼의 일당은 최소 4만5700원 정도가 된다.

그런데  또 포크가 방문한 전라도에서는 당오전 통용이 안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실제 일당은 평균 일당 수준 5만여원에서 최대 2배인 10여만원까지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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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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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전라도이야기 #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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