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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판사 3만개 돌파..'91% 책 못 내'

국내 출판사 수가 처음으로 3만개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중 지난해 책을 1종이라도 출간한 곳은 8.7%에 그쳤다. 1일 대한출판문화협회(회장 백석기)가 발간한 '2009 한국출판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의 출판사는 3만1천739개로, 2007년 2만9천977개보다 5.9% 늘어났다. 그러나 지난해 1종 이상 책을 내놓은 출판사는 2천777개(8.7%)였으며, 무실적 출판사는 2만8천962개(91.3%)에 달했다. 1종이라도 책을 낸 출판사의 비율은 1999년 13.1%, 2000년 10.7%였으나 2002년 이후에는 10%대를 넘지 못해 왔다. 지난해 발행된 신간 종수는 4만3천99종으로 2007년보다 4.9%(2005종) 늘어났지만, 발행된 부수는 1억651만5천675부로 1년 사이에 19.6%(2천598만7천444부)나 감소했다. 신간 1종당 평균 정가는 1만2천116원으로, 1만1천872원이었던 2007년보다 2% 높아졌다. 전체 도서 시장에서 인터넷 서점이 차지하는 비중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도서 시장 2조5천804억원 중 인터넷 서점 시장은 8천225억원(31.9%)을 차지했다. 2007년의 29.2%보다 2.7%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그만큼 중소 서점의 어려움은 커져 전국의 서점 수는 2003년 2천247곳, 2004년 2천205곳, 2005년 2천103곳, 2006년 2천65곳에 이어 2007년에는 2천42곳으로 해마다 줄었다. 특히, 10평 미만의 작은 서점은 2003년 914곳에서 2004년 302곳, 2005년 316곳, 2006년 192곳, 2007년 138곳으로 급감했다. 한편, 전자책과 전자사전, 모바일북, 오디오북 등 전자출판 시장은 서서히 몸집을 불리고 있다. 지난해 시장 규모는 5천551억원으로, 2007년(3천393억원)보다 63.6%나 늘었다.

  • 문화일반
  • 연합
  • 2009.11.02 23:02

"한글문화관 인기 후보지 광화문 주변"

정부가 2012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 중인 한글문화관의 주요 후보지 중 가장 인기가 높은 곳은 경복궁(광화문) 일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1일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연구용역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최근 전국 540명을 상대로 벌인 '국민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38.8%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할 수 있는 위치로 경복궁 일대를 꼽았다. 이어 세종대왕기념관(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35.6%,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가족공원 일원) 15.8%, 경기 여주 세종대왕릉 일대 8.2%, 기타 1.6% 등 순이었다. '한글의 위상을 가장 높일 수 있는 위치' 또한 경복궁 일대라는 응답자가 41.9%로 가장 많았으며, 그 뒤를 세종대왕기념관(34.4%), 국립중앙박물관 일대(13.5%), 여주 세종대왕릉일대(9.0%), 기타(1.2%) 순으로 이었다. 이 설문 조사는 문화부의 '한글문화관 구상안' 연구용역의 일환이며, 현재 각 지방자치단체의 제안까지 포함한 12개 후보지 중 광화문 열린마당, 용산가족공원, 세종대왕기념관, 여주 세종대왕릉 주변 등 4곳을 주요 후보지로 놓고 장단점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중 국민 설문 조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얻은 광화문 열린마당은 상징성, 접근성, 다른 시설과의 연계성 등이 모두 뛰어나지만, 서울시 소유 용지여서 별도의 협의 과정이 필요하다. 한글문화관은 문화부가 한글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해 건립을 추진 중인 복합 문화시설로, 세계문자관ㆍ미래한글관ㆍ한글문화예술관ㆍ연수시설 등을 갖출 예정이다. 이런 내용은 한글문화관의 건립 추진 과정에서 여론 수렴 및 자문 등 역할을 맡은 한글문화관건립추진위원회 주최로 2일 오후 2시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열리는 '한글문화관 어디에 건립하는 게 좋은가' 발표회에서 공개된다. 이 행사에는 이원복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 고정균 서울시의원, 여주군 공무원 등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들도 참여해 용산공원, 광화문 열린마당, 여주 세종대왕릉 주변 등지의 입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한다. 한편, 문화부 관계자는 "부지는 미래의 연계 개발 가능성까지 따져 올해말까지 결정할 계획"이라며 "여러 후보지 중 최종적으로 어느 부지를 선택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 문화일반
  • 연합
  • 2009.11.02 23:02

전북독립영화제 세미나 '대한민국 독립영화, 밤새 안녕하십니까' 열려

'워낭소리'나 '똥파리'의 성공과는 달리 여전히 제작비와 스텝 구하기가 어려운 독립영화 현실에서 공적 지원의 중요성이 대두댔다. 독립영화 내부에서 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독립영화 노사정 협의와 스텝에게 수익을 돌려주는 지분 계약, 독립영화 기금 확보 등이 제시됐다.지난 31일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열린 '2009 전북독립영화제' 세미나 '대한민국 독립영화, 밤새 안녕하십니까?'에 참석한 독립영화인들은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현 상황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냈다.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는 "많은 독립영화인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스텝들이 남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상업영화가 '한국영화산업노조'를 결성, 노사협상을 이뤄내고 최저임금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등 많은 개선을 이뤄낸 것처럼 독립영화도 노사정 협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스텝들이 노,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사, 영화진흥위원회가 정이 되는 형식의 노사정 협의를 제안했다. 김조 대표는 "수익이 생길 경우 스텝들과 나누는 지분 계약을 하고, 영화발전기금에서 독립영화 발전기금 항목을 만들고 독립영화인들이 수익의 일정 비율을 적립해 기금화하자"고 주장했다.이송희일 독립영화 감독 역시 '문화의 공공성' 개념을 적용, 독립영화의 공공적 가치를 인정해 공적 지원을 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송 감독은 "독립영화는 공동의 삶의 질을 높이는 하나의 문화적 전략이라는 보다 큰 그림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며 "상업적 논리 안에서 이윤을 창출하지는 못했더라도 그 노동에 대해 사회 구성원들이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최저생계비를 보장해 주는 유럽의 사례를 눈여겨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독립영화에 대한 현 정부 정책에 반발, 내적 반성도 이어졌다. 이송 감독은 "현 정부의 움직임은 독립영화가 보유하고 있는 공공성을 시장에 던져놓으려는 일련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이라며 "독립영화 관객과 지지자들과의 접촉면을 더욱 능동적으로 해 자체 생존율을 높이는 방식의 자생력 확보에 우선 가치를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정권교체와 더불어 일고 있는 영화계 좌파논쟁이 이데올로기 논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자리다툼에 가까운 것 같다"고 진단한 김이석 부산독립영화협회 대표는 "날로 기술은 좋아지지만, 거칠지만 날이 서 있는 독립영화는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며 "독립영화가 이제껏 지켜온 독자적인 영토를 잃어버리고 주류영화의 일부로 편입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김일권 독립영화 프로듀서는 "그동안 독립영화계가 부피를 늘리고 시스템 갖추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영화·연극
  • 도휘정
  • 2009.11.02 23:02

판소리 독립 열사가 40년대 필사본 발견

월북한 판소리 명창 고(故) 박동실(1897~1968)은 일제 강점기에 안중근,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다룬 창작 판소리 '열사가(烈士歌)'를 만들었다.익산 출신 중앙대 창작음악학과 노동은 교수는 박동실이 만든 안중근ㆍ유관순ㆍ윤봉길ㆍ이준 등 4명의 '열사가' 판소리 필사본을 1일 공개했다.이 필사본은 소리꾼인 고(故) 서동순(1910-1982)이 광복 무렵에 박동실로부터 '열사가'를 배우면서 노트에 직접 가사를 적은 것으로 '박동실 작곡, 서동순 씀'이라고 적혀 있다. 군데군데 가사를 일부 고친 흔적도 남아 있다. 필사본은 A4용지 절반 크기의 노트에 잉크로 적었으며 모두 40쪽 분량이다.이 가운데 '안중근 열사가'는 의거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안 의사가 순국하기 전 감옥에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나는 모습을 비통하게 그려냈다.'뜻밖에 어떤 사람이 권총을 손에 들고 번개같이 달려들어, 기세는 추상같고 심산맹호 성낸 듯 이등 앞으로 우루루루. 이등을 겨눠 쾅, 쾅, 또다시 쾅, 쾅. (중략) 감추었던 태극기를 번듯 내여 휘두르며 '나는 원수를 갚었다. 이천만 동포들 쇠사슬에 얼궈놓은 우리 원수 이등박문, 내 손으로 죽였오. 대한독립 만세' 우렁찬 소리로 외치니 할빈역이 진동'노 교수는 "민족주의자였던 박동실은 1930년대말 고향인 전남 담양에 초당을 짓고 박석기라는 거문고 명인과 함께 김소희, 박규희, 한승호 등 제자들을 가르쳤다"며 "이때 판소리 다섯 마당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민족영웅을 소재로 한 판소리를 만들어 비밀리에 전수했다"고 말했다.당시는 판소리 공연도 일본어로 해야 했던 상황이라 '안중근 열사가' 등은 실제로 공연되지는 않고 전승만 됐을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광복을 맞았지만 박동실이 한국전쟁 때 월북했기 때문에 '열사가'는 널리 퍼질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이후 월북 예술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자 1990년대에 음반이 녹음되기도 했지만, 일반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노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음악인들이 애국지사들을 그려 민족정기를 확립하려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면서도 "박동실 선생이 월북하고 나서 '열사가'가 묻혀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노래들이 조명받지 못한 것이 많은데 이런 노래가 많이 알려져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 전시·공연
  • 연합
  • 2009.11.02 23:02

[전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 오방색으로 빚었죠"

최근에 보여지는 서양화가 이창규씨(원광대 교수)의 화두는 '전통성 회복'이다.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쫓되 형식이나 수법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롭게 재해석된 그만의 방식은 추상화된 문양과 오방색(五方色)의 접목.5일까지 전북예술회관에서 열고 있는 이창규 개인전은 정년 퇴임을 앞둔 그의 화단 40여년을 정리하는 자리다.줄곧 그림이 좋아서 내달려온 시간.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아우러진 작품 5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70년대는 묘사 중심이었어요. 자연이건 사물이건 무조건 열심히, 닮게 그리는데 충실했죠. 80년대엔 색채나 형태의 재현에서 저만의 개성이 드러난 것 같습니다. 파란색 계열이 쓰여지기 시작했구요."재수를 거듭해 우여곡절 끝에 원광대 미술교육과에 진학하면서 1막을 열었다.2막의 시작은 1980년. 강의를 해오면서, 이론과 실기의 균형을 위한 고집이 작업에도 반영됐다. 미술해부학 강의로 누드 습작을 했고, 서해안 바다 풍광을 주제로 한 논문을 쓰면서 바다도 실컷 그렸다."(저는) 사진 놓고는 안 그립니다. 기계가 고정시켜 놓은 이미지를 보고 무슨 감동이 올 수 있겠어요. 1년간 서해안 일대를 훑고 다녔습니다. 참 행복했죠."'생로병사'(1990)엔 백마를 타고 날고픈 청운(靑雲)의 꿈을 지닌 청년기, 모래시계를 통해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듯한 중·장년기 불안한 영혼의 그가 담겼다. 하지만 이 작품은 미완성. 시기를 놓쳐 방치됐던 것을 제자들의 부추김으로 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90년 반추상 작업과 함께 3막을 맞이했다. 1990년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면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이 비로소 생겼다고 했다. 불교미술을 이해할 때에만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겨 2년간 화엄불교대학에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궁과 사찰의 기둥머리 장식을 추상화한 문양이 한국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을 드러내는 '무엇'이라고 여기고 있다.1996년 그는 구이면 백여리에 절간 같은 작업실을 마련했다. '텅빈 충만'(1997), '나는 누구인가'(2001),'깨달음'(2005) 등 일련의 작품은 끝모를 구도자의 길을 걷는 또다른 그가 반영됐다.학교를 떠나게 될 무렵 그는 또 한차례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다. 비워내고 비워낼수록 더 가득해지는 '텅빈 충만'에 다름 아니다.

  • 전시·공연
  • 이화정
  • 2009.11.02 23:02

[문학] 깊어가는 가을서정 '잔잔한 詩의 울림'

"'한 생애에 갈 수 있는 거리에 그대가 서 있다면'. 이 구절이 뇌리에 스쳐 몸부림 치다가 쓴 시가 '사랑에게'입니다. 욕심같이 되지 않아 평범한 시가 돼버렸지만요."30일 오후 3시 스타상호저축은행 부설 고하문예관에서 열렸던 '제17회 시와 소리의 만남'에 초대된 국효문 시인은 자작시 '모닥불', '영산강'을 낭송하면서 자신의 시세계를 풀어놓았다.시'모닥불'은 그가 서울 광릉의 이광수 문학비가 있는 봉선사에 갔다가 모닥불을 보고, 마음이 울렁울렁해져서 쓴 시. 국 시인은 "시'영산강'은 문인들과 1년간 광주의 젖줄인 영산강 발원지 용소부터 목포까지 답사하면서 몸으로 부대껴 쓰게 됐다"며 "광주의 맺힌 한을 시원하게 풀지 못해 아쉬운 감이 많다"고 덧붙였다.그간 바깥 출입을 자제해왔던 안도현 시인도 이날 초대됐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씨가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착안한 시 '국화꽃 그늘과 쥐수염붓'과 함께 시에서는 드물게 하오체를 시도한 '직소폭포'를 소개했다.안 시인은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물줄기엔 강한 기운이 서린다"며 "하오체를 통해 푸른 비명을 내지르는 직소폭포의 남성적 이미지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특히 좀처럼 듣기 힘든 공후소리도 함께 했다. 공후는 중국의 '쟁'과 우리나라 전통 악기인 '양금'의 현을 합쳐 만든 23줄의 현악기. 조보연 전북도립국악관현악단 단원이 '작은 꽃의 노래','나비가 되어'를 공후로 연주, 깊어가는 가을서정을 더했다.

  • 문화일반
  • 이화정
  • 2009.11.02 23:02

[최동현의 명창이야기] ⑧인물이 잘났던 장재백

판소리 소리꾼 중에는 인물이 잘난 사람이 많았다. 지난 주에 소개했던 김세종도 인물이 잘났다고 했고,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이동백도 인물이 잘나서 창원부사의 애첩이었던 기생이 야반도주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사진을 보면 소리꾼들은 인물이 거의 다 좋다. 요새도 가수들의 인물이 다 잘난 것을 보면, 인물 잘난 사람들이 노래를 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장재백은 김세종의 제자로 전북 순창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름도 '장재백'이 아니라 '장자백'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남원시 월락동에서 '장재백'이 나오는 호적이 발견되었다. 이름도 '장자백'이 아니라 '장재백'으로 되어 있었다. 지난 주에 소개한 <연수전중용하기>에도 '장재백'으로 나온다. 따라서 '장자백'은 '장재백'으로 수정되어야 한다.장재백의 부인도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장재백의 소리 솜씨가 좋지 않은 것을 못마땅해 하다가 대성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옥구의 어떤 사람의 첩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장재백은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친신만고 끝에 마침내 명창이 되었다고 한다. 장재백이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자 여기저기 다니면서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하루는 옥구의 잔치집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다. 장재백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전처는 몰래 잔치에 참여하여 장재백의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인물 좋은 장재백이 소리마저 잘하게 되자 다시 솟아나는 연모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소리를 끝내고 돌아가는 장재백의 소매를 붙잡고 다시 인연을 맺자고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장재백은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장재백은 남원 판소리의 역사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남원의 판소리는 가왕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동생 송광록이 구례로 이사함으로써 남원의 판소리는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때 남원의 판소리를 이은 사람이 바로 장재백과 그의 가문이다. 장재백의 누이 장주이는 유성준의 처이다. 유성준은 송만갑의 아버지 송우룡의 제자로 <수궁가>와 <적벽가>를 잘 불러서 후대에 전한 사람이다. 유성준의 제자로는 임방울 김연수 정광수 박동진 등이 있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유성준의 소리가 현대 판소리에 끼친 공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유성준의 동생 유준은 김정문의 어머니이며, 김정문의 처 장봉선은 장재백의 막내 동생인 장봉순의 손녀이다. 김정문은 송만갑의 제자로 남원 판소리를 대표하던 사람이다. 강도근 박록주 박초월이 그의 제자이다. 장봉선의 언니 장봉임은 전라북도 문화재였던 성운선의 어머니이며, 장재백의 동생의 아들(조카)인 장득진은 이화중선의 남편으로, 이화중선을 가르친 사람이다.김정문 이후 남원 판소리를 대표하던 명창 김영운은 김정문의 조카이며, 강도근의 매형이기도 하다. 강도근의 집안에서는 또 여러 명의 명인 명창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보면 장재백의 가계가 남원과 순창 일원의 판소리 명창들과 혈연으로 이어지면서, 이 지역 판소리를 면면히 이어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기록에 의하면 장재백은 남원군 주생면 내동리에서 살다가 1907년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으며, 현재 그 묘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장재백의 부친을 비롯한 가문의 여러 사람들이 순창에서 살았고 묘지도 순창군 인계면에 있는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장재백 또한 순창 사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출생지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장재백의 후손 중에서 1970년대까지 전주에서 활동하면서, 전주를 대표하던 소리꾼 중의 한 명이었던 장녹운이 그의 증손녀이다. 장녹운은 명무에 명창이었는데 소리를 그만두고 어렵게 살다가 별세하였다. 말년의 장녹운은 상청이 잘 나지 않았지만, 공력만은 대단했다. <춘향가> 중에서 어사와 장모 상봉하는 하는 데를 기막히게 잘하였다. 춤도 잘 추어 국립극장 명무전에 초대되기도 했었다.장재백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하여 교지를 받았다. 이 교지는 소리꾼이 받은 교지로는 아마 전라북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교지일 것이다. 이 교지에는 장재백의 이름이 '장기성'으로 되어 있는데, 이 이름은 족보에 나오는 이름이다.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전시·공연
  • 전북일보
  • 2009.11.02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