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백제 속의 마한(서산 부장리 분구묘)
고대사회에 있어서 동일한 정치체의 공간적 범위를 설정하는 데에 고고학적 자료 중 분묘와 생활 토기가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삼국시대의 예에서 보면, 고구려는 적석총, 백제는 횡혈식석실분, 신라에서는 적석목곽분이 각각의 정치적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축조되고 있어 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활 토기 역시 동일한 기종일지라도 삼국의 각 나라마다 형태나 문양에 있어서 그 속성을 달리하고 있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백제에 의한 마한의 복속 시기는 4세기 중엽 근초고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에서는 마한 분구묘 자료를 근거로 마한 정치세력은 문헌자료 기록보다 무려 2세기를 더 지나 6세기 초엽까지 존속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견해는 정치체의 공간적 범위와 분묘의 축조 범위가 일치한다는 전제에서 보면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주민 구성이나 공간적 범위에서 서로 겹치는 마한과 백제는 일시적인 정복을 통해 영역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점진적인 통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마한의 정치세력이 강했던 지역에서는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한 마한 분묘의 축조가 지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곧 마한과 백제의 관계에 있어서는 정치체와 문화유산 결정체의 존재가 꼭 일치되는 현상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는 충남 서산 부장리에서 발견된 마한 전통의 분구묘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4년에서 2005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진 부장리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더불어 백제시대의 주거지 43기, 수혈유구 15기, 분구묘 13기, 석곽묘 3기 등 모두 74기가 확인되었다. 백제시대 유적 구성에서 보면 백제인들의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이 머지않은 곳에 각각 배치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특히 마한 전통의 분구묘 13기 가운데 3기는 주구 일부가 중복되어 있지만, 대부분 각각의 독립된 묘역을 유지하며 축조되어 있다. 분구의 평면 형태는 방형으로 정형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는 20m~40m에 이른다. 매장시설은 모두 토광을 굴착하고 있는데, 하나의 분구 안에 적게는 1기부터 많게는 9기가 시설되고 있다. 부장리 분구 내의 부장유물 중 직구원저단경호, 광구원저호, 원저호 등 토기류들은 백제계 토기라는 점에서 호남지역의 분구묘 출토 토기와 차별성이 보인다. 이외에도 환두대도, 철제초두, 철부, 철겸, 철도자, 철모 등의 철기류와 금동관모, 금동식리, 금동이식, 곡옥 등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 가운데 8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식리를 비롯하여 5호분의 금동관모와 철제 초두는 부장리 분구묘에 묻힌 사람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곧 서산지방을 중심으로 자라잡고 있었던 마한계 세력집단으로 볼 수 있다.
충청남도 아산만 일대는 이른 단계의 분구묘인 보령 관창리와 뒤이어 축조된 서산 예천리, 그리고 백제 영역화 시점과 맞물려 축조된 서산 기지리와 그 이후 축조된 부장리 분구묘가 발견된 지역이다. 곧 강한 마한 문화의 전통이 지속되고 있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마한 분구묘가 축조되는 배경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창지역과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분구묘의 성격을 곧바로 마한 정치체와 연결시키기 보다는 백제 영역화 이후 지속된 마한문화와 구분해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