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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비평이란 무엇인가1

비평이란 사물의 선악, 시비, 미추, 가치 등을 평가하여 논하는 일종의 바판적 의사 전달, 또는 비판적 사고를 통하여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각종의 미적 가치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심화시켜 나가는 일이다. 비평의 어원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비批는 손으로 친다(手擊)거나 일반적으로 친다(擊也)는 의미이고 평은 평론하다(品論)거나 헤아린다(量也), 또는 고친다(訂)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바평한다는 의미는 칠만큼 비난할 만한 대상에 대한 공격적 의미와 함께 결점을 시정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고친다는 선도적인 의미도 있다. 또한 영어의 criticism이라는 용어에도 5가지 의미가 있다. 1. 전통적인 의미로 비평가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으로 결점만 찾고 책망만 일삼는 존재이다. 2. 호의적인 기능으로 별로 비난하지 않으며 창찬한다. 3. 무엇인가에 대해서 판단을 내린다. 4. 비교한다. 5. 대상을 보는 그대로 감상한다. 이를 종합하여 다시 말하자면 결점은 책망한다는 공격적 의미와 장점을 발견하고 이를 격려한다는 선도적 의미가 같이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정의 아래 비평이라는 학문이 계속 연구되면서 학자들 간에 다른 의견 또한 분분하다.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는 미적 표현을 직관으로 직관을 다시 감정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예술을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느끼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인간 개체를 하나의 고립된 완성품으로 보는 견해로써 미의 본질도 개별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콜링우드(Robin George Collingwood 1889~1943) 역시 미적 표현을 개개인의 순간적인 고유한 정서로 보고 좀더 개별화된 작업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서 독창성 또는 개성을 존중하는 미학이 성립되었고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는 것도 타당성이 있으나 고립된 개인으로서는 인간의 본질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이에 대하여 미적 표현이란 개인의 기분을 표출하는데 있지 않고 사회적 질서를 발견하는데 있다고 역설하는 사람들도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7.26 16:36

혼불기념사업회 방화선 선자장 인문학특강 성료

부챗살 바르는 소리가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 같았습니다. 그 소리에 매료돼 자연스럽게 부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50여 년간 부채 만드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국내 유일 여성 선자장인 방화선 명장이 23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방화선부채연구소에서 열린 전북문화바로알기에서 올곧은 삶과 장인정신을 강의했다. 방 명장은 방춘군 선자장의 장녀로 어린시절부터 단선을 만들며 아버지의 대를 잇고 있다. 방 명장은 이날 삶의 내력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물을 디자인해서 만든 부채들을 소개했다. 바람구멍이 있는 여유선과 덕진연못을 거닐다 떠올린 연화선을 비롯해 연잎선, 무궁화꽃선, 하늬선, 봉황선, 매화선, 모시선, 비녀선, 새우선, 멸치선 등이다. 특강 사회는 부채문화관 이향미 장관이 맡았다. 강의에는 도내 작가들과 대학생 20여 명이 참가했다. 김근혜 동화작가는 유관순의 독립정신을 떠올리며 만들었다는 태극선 이야기를, 전은희 동화작가는 활을 휘어서 만든 곡두선의 아름다움을 새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진숙 수필가는 살을 놓는 소리가 빗소리로 들린다는 방 선자장의 말에 줄곧 빗소리를 상상하게 됐다고 밝혔다. 매년 우리가 꼭 소문내야 하는 전라북도 이야기를 주제로 전북의 역사문화 콘텐츠를 알려온 이 강좌는 혼불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최명희문학관전주 부채문화관이 주관했다. 오는 30일은 박계호 선자장의 특강이 열릴 예정이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7.25 18:40

“전주시 전주시의회 ‘비사벌 초사’를 보존하고 ‘신석정문학관’건립하라”

속보 =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전주시 노송동 주민들이 비사벌 초사 보존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내놨다.(관련기사 5월 27일 면, 6월 1일 면) 신석정 시인 이들 주민은 25일 전주시와 전주시의회는 신석정 시인의 고택 비사벌 초사를 보존하고 전주 신석정문학관을 건립하라며문화도시로서 자긍심을 지켜야 할 전주시가 개발 논리에 밀려 역사 문화적 가치를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석성 시인은 역사의 현장에서 올곧은 선비 정신과 역사의식을 보여준 시인이라며 일제강점기 때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단 한 편의 친일시도 남기지 않은 지조 높은 시인이라고 말했다. 특히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았다며1961년 조국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시를 발표했다가 남산 대공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나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시인은 이 곳에 사시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를 많이 발표하셨다고 부연했다. 이들은 전북대학교, 영생대학에서 시론 등을 강의하기도 했고, 1963년 전주상업고등학교(현 전주제일고등학교)에서 정년 퇴임하셨다며이후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비사벌초사에서 거처하셨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인의 삶의 자취를 살펴보면 시인의 삶은 전주, 특히 이곳 노송동 일원을 떼어놓고서는 기술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신석정 시인이 보여준 올곧은 선비정신과 민족정기 배우기 위한 장소인 비사벌 초사를 문화유적으로 온전히 보존하고, 근처에 전주 신석정문학관을 건립할 것을 전주시와 전주시의회에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비사벌 초사는 신석정 시인(1907~1974)이 시작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던 자택이다. 앞서 전주시는 지난 2018년 이 자택이 시인의 문학세계를 보여주는 가치가 있다고 판단, 오래도록 지켜야 할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노송동에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주민들 사이에 자택 보존여부를 두고 의견이 나눠지고 있는 상황이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7.25 16:47

[서유진 기자의 예술 관람기]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Picasso, Into the Myth’

나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피카소가 되었다. 역사 이래로 피카소만큼 생전에 수많은 관객을 가진 화가는 없다. 여기서 관객이란 피카소에 대해 듣고 그의 작품과 복제품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수천만, 수억 명에 이른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 회고전 Picasso, Into the Myth(신화 속으로) 전이 8월 29일까지 열리고 있다. 파리 국립 피카소미술관 소장 회화, 조각과 도자기, 판화 등 110점으로 구성된 피카소 탄생 140주년 기념 특별전이다. 스페인 출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작품은 전시 제목처럼 신화적 남성다움에서 유래한다. 그는 캔버스와 종이 위에 창조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의 전설적 괴물 인신우두(人身牛頭) 미노타우로스였다. 그는 사진, 영화, TV 등 미디어를 통해 주목을 받았고, 끊임없이 작품의 스타일을 바꾸고 겉포장을 변화시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등 화제를 모았으며 문화의 대량생산적 위력이 각국어를 통해 힘을 발휘하리라는 것도 예견했다. 피카소가 9세에 투우와 여섯 마리 비둘기, 15세에 그린 과학과 자비는 그의 천부적 재능을 잘 보여준다. 그런 천재적 재능을 바탕으로 그는 선과 색채가 만드는 형태와 그들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독특한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다. 실체란 형상도 공허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들과의 관계이며 상호유기적인 사건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무대라는 것을 아인슈타인과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처럼 피카소는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피카소의 인생과 예술에서 여성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피카소는 성적인 소유와 공포의 환상을 여성의 신체를 통해 재구성하거나 기괴하게 변형시켜 표현하곤 했다. 그는 여류예술가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고 여성에 대해 여신 아니면 신발깔개로 극단적 표현, 페미니스트의 혐오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력에 사로잡힌 여성들은 그의 그런 면을 잘 알고서도 오히려 간절히 그 두 가지 역할을 자청했다. 이번 전시에서 많은 작품 중 28살 연하 네 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의 초상이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에게 평화와 자유의 여신인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1932년 걸작 꿈을 그렸다. 고개는 옆으로 젖히고서 꿈과 사랑에 취한 듯 눈을 감은 연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5년 후 꿈과는 뉘앙스가 다르게 입체적으로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서정미가 뛰어나게 초상화로 남겼다.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70여 년간 쉬지 않고 자신의 감각과 욕망을 조형적인 美로 다양한 장르에서 천재적 재능을 펼친 피카소가 남긴 말이다.

  • 문화일반
  • 서유진
  • 2021.07.23 10:31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참교육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교육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교육자는 언제나 신중해야 하며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성공을 가르치되 실패를 인정하는 법도 함께 깨닫게 해주어야 하며 월등함을 교육하되 평범이란 소중함도 각인시켜야 한다.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있으나 최고의 성취를 위해 노력이라는 원동력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도 꼭 느끼게 해주자. 더불어 노력의 결과와 신의 축복이 함께 있음을 소중히 알려주고 그러한 결과로 나타난 모든 성취 기쁨과 실패의 아픔에 감사함을 알려주자. 자신과 함께하는 모든 이. 즉 공동체라는 테두리의 모든 구성원에게 사랑과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고 그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함께 소통하며 서로의 화제를 이끌어 보자. 누구나 배울 수 있으나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고 상대를 경쟁자이기보다는 더불어 행복하기 위한 동반자라 알리며 서로의 손을 내밀자. 자만심과 이기심에 빠져 타인의 이로움을 질투하고 투정과 시기의 못난 시간을 보내는 이에게는 냉정한 충고와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그 충고와 가르침에도 수긍치 못하고 자신만의 관념에 빠져 독단적인 행동과 말을 전하면 용납지 말고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자. 백만 마디의 충고보다 진심 어린 벌 한번은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그들에게 이유를 찾고 주변을 돌아보게 하며 자아를 찾는 계기로 만들 것이다. 잘못을 알고 잘못을 저지르는 이는 많지 않다. 세상 모든 이는 자기 행동과 언행에 이유 있다고 생각하며 그에 상응하는 원칙도 만든다. 혹자는 잘못된 언행이나 관습을 합리적이란 판단으로 포장하고 억지 논리로 만들어 주장하며 그러한 주장은 권리로, 권리는 그 누구도 허물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로 자리 잡는다. 그러한 행동과 언행은 정당한 사유 없이 규칙과 규범이 되어 버리고 자가당착을 만들어 혼돈을 키우기도 한다. 공동체. 즉 우리 사회는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 모두의 공통된 동질성과 공익을 위한 사회이며 만약 사익을 위한 구성원이 만연한다면 그 공동체의 존재가치는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본적인 준칙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구성원에게 훈육은 꼭 필요하며 그에 따른 관리도 병행되어야 한다. 자신만의 사익을 쫓다 보면 개인의 감정과 주장만 난무하며 덕목을 잃어버리고 음해, 시기, 질투, 무시 등 치졸한 권리로 둔갑하여 그들만의 당위성으로 포장된다. 그러한 허위의 당위성을 공동체밖에 알려 합리화를 항상 만들고자 하지만 우둔한 그러한 모습은 이미 세상 모든 이들의 조롱거리가 될 뿐 가치를 잃어버린 목적이 된다. 교육이란 삶에 있어 옳고 그름을 알게 하고 바르게 판단하는 자아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교육을 중요시하며 먹고 사는 기본적인 생활 다음으로 제일로 여겼으며 현시대에도 같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남을 위한 배려가 없어지는 사회에서 다시금 바라보게 되는 단어 바로 참교육. 과거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의 바르고 평등한 삶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교두보로 우리 교육자의 사명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고 중한 역할임이 틀림없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7.22 17:01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0)풍자와 해학, 후덕한 인품으로 세상의 빛이 된 작가 라대곤

라대곤 작가 라대곤 작가는 1940년 군산시 신영동 구시장 입구의 팔진당이라는 과자 공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일곱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업을 접고, 김제의 신곡리로 이사하는 바람에 김제에서 초중고를 졸업하였다. 그는 농사꾼으로 시작해서 노숙자, 악극단 단원, 연탄공장 인부, 약장사 행상, 예비 소설가, 그룹과외 강사, 회사원 등을 거치면서 숱한 고생을 하였다. 그의 자전적 수필에는 어린 시절의 곤궁했던 삶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방 한 칸에서 8남매가 잘 때, 방 가운데의 까만 솜이불 속에서는 형제들의 발이 수시로 엉키기도 하였다. 특히, 맏형의 요절은 작가의 삶을 온전히 바꿔놓았다. 하루아침에 장남이 되어 가족들에게 매이게 되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입대하였다. 전방 근무 중 선임하사가 사준 술을 자주 마셨는데, 그 술값이 보급품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 이 사건은 훗날 그에게 공무원 시험도 볼 수 없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1965년 월간잡지 기자로 잠깐 근무하다가 술 공장을 운영했지만 실패하여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달아나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소달구지에 살림을 싣고 수도 없이 이사하는 바람에 장독대에는 성한 단지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폐기물 처리사업을 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었다. 작품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수필 문학』에 「고향집 감나무」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듬해 『문예사조』에 「두창이와 연주의 합창」이라는 소설로 데뷔하였는데, 이때 작가의 나이 54세였다. 출발은 늦었지만, 작품을 왕성하게 써서 악연의 세월』(1995)을 비롯하여 다섯 권의 소설집, 『망둥이』(2005)를 비롯한 세 권의 장편소설, 『한번만이라도』(1995) 등 네 권의 수필집을 썼고, 말년에는 암 투병 중에도 동화집 『깜비는 내 친구』를 3부까지 연달아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탐미문학상(1998)을 비롯하여 전북문학상(1999), 표현문학상(2000), 채만식문학상(2006) 등을 수상하였다. 2011년에는 군산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라대곤 작가가 문단에 끼친 영향은 세 가지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영면(永眠)에 이를 때까지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고발하는 등 치열한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수필과 비평』의 발행과 신곡문학상제정 등으로 문단을 풍성하게 가꾼 점이다. 특히 『수필과 비평』의 발행인으로서 훌륭한 작가들을 발굴하여 배출하였으며 문인들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문단 환경을 크게 바꾼 점이다. 셋째는 고매한 인품으로 후학들에게 큰 모범을 보이신 점이다. 어려운 문인들을 보면 돈 때문에 신경 쓰이면 좋은 글 쓸 수가 없어!라면서 아낌없이 도와주셨고, 후배들의 출판기념회나 시상식 등 행사 끝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 일일이 응원엽서를 보내주신 문단의 자상한 어른이었다는 점이다. 작가의 서거 3주기를 맞이하여 나온 신곡 라대곤 추모문집 『어서 오소서』에는 작가와 후배 문인들이 나누었던 꿈과 사랑이 가득 이어졌다. 평론가 오양호는 작가는 군산의 백릉 채만식과 겨룰 만큼 훌륭한 역량을 갖췄다고 칭찬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창작이 뒷전으로 밀려서 그렇지 작가의 타고난 문학적 역량은 대단하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정종명은 작가는 화려하거나 섬세한 문체를 구사하지 않으면서도 힘 있는 글로 막힘 없이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력을 지녔다고 하였다. 호병탁은 작가는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특유의 풍자적 문체로 통렬하게 쏟아냈다고 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소설 『망둥어』에는 자신의 결함을 토로하는 동시에 비틀린 세상을 향한 분노가 잘 표출되었다고 했다. 특히 망둥이는 욕심이 많아서 제 살을 찢어 미끼로 써도 사정없이 물고 늘어져 자살하듯 버둥거리는 모습을 통해서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을 질타하였다고 했다. 작가는 『취해서 오십 년』이라는 수필집에서 보듯 술을 즐겨 마셨던 것 같다. 작가가 술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셨던 이유는 따뜻해지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살기 위해서 였던 것 아니었을까. 정휘립은 <라대곤 다시 읽기>라는 글에서 그의 작품들은 서민들이 겪는 소박한 애환의 일상사를 제재로 하여 생에 지치고 마음 한쪽이 헛헛한 외로운 존재들의 행렬을 그린 풍속화집 같다고 하였다. 작가는 나이 일흔에 췌장암, 담도암 수술을 연거푸 받았고, 체중이 20kg이나 빠지는 상황에서도 한순간도 붓을 놓지 않았다. 매우 쇠약해진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손자 경아와 민재에게 들려주는 『깜비는 내 친구』라는 동화집을 6부작으로 구상하였지만, 아쉽게도 3부까지만 썼다. 이 동화집에는 호수 위로 아름다운 무지개가 뜨는 평화로운 동산의 이야기를 그의 손자와 손녀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작가의 소망이 담겨 있다. 김영(전북문인협회 회장) 시인은 작가를 권위적이지 않고 높임받기를 좋아하지 않으신 지구에 온 어린 왕자라고 회고한 바 있다. 후덕한 인품을 지닌 작가로서 후배들과 나눈 그의 꿈은 오래오래 우리 문단에 아름다운 전설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서거 3년이 되던 해인 2016년 7월 9일 김제시 청하면 청운사에 라대곤 문학비가 세워졌는데, 그 뒷면에는 작가에 대한 문단의 안타까움과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하는 김남곤 시인의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 오늘도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산 하나가 장중하게 허물어지던 그해 봄날, 우리들은 그대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라며 애도했노라. *참고 : 신곡 라대곤 추모문집 『어서 오소서』(2016), 안도(전 전북문인협회 회장) 『라대곤 소설가 자료』

  • 문화일반
  • 이강모
  • 2021.07.20 18:08

전주문화재단 운영성과…문화예술후원회 ‘이팝프렌즈’

백옥선 대표 재단법인 전주문화재단(이하 문화재단)이 1년 간 운영성과와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백옥선 대표이사는 19일 팔복예술공장에서 1주년 기자간담회를 연 뒤 지역 예술계를 위해 추진했던 역점사업을 발표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맞아 개발한 프로그램을 강조했다. 백 대표이사와 문화재단이 제시한 성과에 따르면, 재단은 △온라인 도슨트(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 도입 △비대면 문화콘텐츠 제작을 지원한미디어북 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탄소섬유를 예술 창작과 연결한 탄소예술프로젝트△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과 구축한 온라인 갤러리△문화예술 후원회 이팝프렌즈 발족 △팔복예술공장 기능 확장 등이다. 이들 가운데 이팝프렌즈는 지역의 예술문화 후원의 분위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다. 실제 발족 한 달여 만에 기업 후원과 한국메세나협회 매칭펀드를 통해 4400만원을 모금했고, 120여 명의 CMS를 통한 개인 후원 등을 이끌어냈다. 특히 전주문화재단 노동조합과 전주시청 문화정책과 직원들, 전주농협직원 등은 자발적으로 후원에 동참하고 있다. 백 대표이사는 다각적인 재정확보 노력을 통해 예술가와 시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정책사업을 추진하겠다며 속도보단 안정적 추진과 사업의 지향성과 가치에 주목해 선택과 집중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팝프렌즈 후원 운동을 열정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며 지난 1년간 쉼 없이 열심히 뛰어준 전 직원들에게 깊은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고 강조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7.19 16:58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최고의 스승으로 남아있는 고 이남규 선생님의 말씀이었던 것 같다. 정식 강의 시간이었는지 밤에 이루어지는 특강이었는지도 기억에 없다. 어느 일본인 철학자의 이아기다. 오래 된데다 메모를 해놓지 않아서 기억에만 의존할 때 가장 답답하다. 아무튼 그철학자의 과제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 그래서 객관적 비교 연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다. 우선 직업별로 분류를 해나가는데 그 당시에 2만개의 직업을 분류했었다니 치밀한 연구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물론 정치가, 군인 순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야 예술가들을,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음악가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내심 혐오 집단인 화가까지 연구하다가 무릎을 치며 희열에 몸을 떨었다.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뭔가를 창조하는 작은 신(small god)들 이었다. 이제는 화가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 당시에 피카소는 거의 신격화 되어 있었다. 입체파 운동의 발명자였는데, 당시의 거의 모든 화가들에게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고 그리게 했던 사람, 친구인 모딜리아니에게 마저도 모든 사물을 입체적으로 봐야한단 말이지? 라며 인정하게 했던 피카소, 생애에 일곱 번의 결혼을 해낸 사내, 그림이 일곱 번이나 변하는 것이 가능했던 종합 예술가 피카소를 제치고 동시대에 입체파 그림을 그렸던 조르쥬 브락크를 선정했다. 드디어 16년만에 이루어지는 연구의 완성을 위하여 프랑스로 건너 가 브락크를 만나야 했다. 그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그의 부인이 나왔고 찾아 온 이유를 말하자 부인은 브락크에게 전달했으며 그에게서 30분을 약속받아 왔다. 조금 있다가 조그만 노인이 수건에 손을 닦으며 나와선 일본에는 선禪이라는 것이 있다죠? 그럼 괜히 오셨네요 라면서 단 몇 초 만에 다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브라크는 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길에 관한 두 사람의 어록을 살펴보자. 먼저 피카소는 나는 길을 가되 있는 길을 다 가보고 싶다 이었고, 브락크는 나는 길을 가되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 봐야겠다 이었으니 어떤 길을 갈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7.19 16:33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높을 고, 고창의 저력

전라북도 고창의 하늘은 높고, 푸른 대지는 영롱하다. 전통문화와 예술이 언제나 삶에 녹아있는 곳. 바로 이곳은 전라북도 고창이다. 전라북도 고창에는 모양성이라 불리는 천고의 고창읍성이 있고, 세계 최대 규모로 밀집되어 있는 고인돌 유적지가 있으며, 천하일색 선운산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또한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과 희귀종이 거주하는 국가생태관광지인 운곡습지도 있다. 그뿐이랴, 온천과 서해안 천의 얼굴을 가진 보물창고 고창갯벌도 있으니 천혜 자원과 아름다운 삶이 있는 곳. 바로 전라북도 고창이다. 전라북도 고창은 한국의 세익스피어라 불리는 신재효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는 구전되어 온 판소리를 글로 기록하고 다듬었으며 또한 정리하고 문서로 남긴 분으로 저술가이자, 학자, 행정가, 교육가 그리고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고창에는 이러한 신재효 선생의 생가와 판소리박물관을 잘 정비하여 한국 전통예술인 판소리의 본가를 만들었다. 서민들의 마음속 희로애락을 말하며 울고 웃게 하던 우리의 판소리. 고창의 매력은 바로 판소리에서 더욱 빛난다. 판소리박물관에 들어가면 구수하고 정감어린 소리 한 자락이 항상 흘러나오며 명창의 애정이 어린 유품을 관람할 수 있다. 당대의 여류 명창이자 고창이 고향인 김소희 선생의 유물과 자료 또한 잘 보관되어 있다. 그 옛날 이곳의 남녀노소가 판소리를 좋아하고 지역의 명창도 많이 나왔으니 높을 고. 고창은 전통 예술혼이 깊은 역사적 고장이다. 고창의 예술혼은 영국의 자존심처럼 강하다.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셰익스피어처럼 신재효 선생의 업적은 소중히 보존되고 있으며 한국 판소리 맥을 지키고 있다. 가람 이병기 학자는 신재효가 이룩한 업적을 국문학 사상 기적인 사업으로 칭하며 민족의 큰 은인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듯 신재효 선생의 업적과 혼은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에서 소중히 보존되고 있다. 고창에는 판소리와 함께 멋진 농악이 있다. 전라북도에는 지역마다 마을 지명을 따 전통 농악이 전승되고 있는데 고창 역시 고창농악이란 명칭으로 영무장 농악의 계보를 잇고 있다. 영무장 농악은 호남우도농악 중 영광, 무장(고창), 장성, 함평에서 발달한 농악으로 그 연희 한판은 단연 한국 최고이다. 고창농악 중 멋 하나를 말하자면 단연 고깔소고춤을 추천한다. 장단에 맞춰 꾸리북(소고를 빨리 감아치는 것) 동작을 멋지게 구사하는 것이 특징인데, 가슴 벅찬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화려한 설장구, 열두잡색의 놀이도 발달하여 다른 지역의 농악과 차별됨을 알 수 있다. 전통예술의 성지 전라북도 고창. 오늘은 고창에서 생산된 높은 품질의 농특산품 높을고창을 사서 맛난 저녁을 해 먹어야겠다. 우리의 전라북도 고창 출신 명인. 명창들은 그렇게 고향에서 태어나 삶의 터전에서 배우고, 지역의 기운을 받아 자신의 꿈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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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5 17:45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전북지역의 마한 소국 1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는 마한과 관련하여 54개 소국의 국명과 아울러 대국은 만여가, 소국은 수천가로서 총 십여만호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마한의 공간적 범위가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마한의 소국들도 이 지역 내에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에는 마한 성립과 관련되는 조기단계의 토광묘에서부터 마한의 발전기에 확산되는 분구묘계통의 분묘들이 광범위하게 연속적으로 축조되어 왔다. 또한 마한의 정치문화 중심지였던 지역의 경우에는 백제에 편입된 이후에도 마한 분구묘의 전통이 기층문화로서 지속적으로 축조되어 왔다. 그러나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마한 소국이 실제로 어느 지역에 위치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각각의 견해가 매우 달라 소국의 구체적인 실상에 대한 접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마한의 소국에 대한 위치는 주로 지명의 음운학적인 유사성에 따라 비정되었거나, 역사서에 기록된 국명들이 북에서 남으로 위치한 순서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추정되어 왔다. 이에 따르면 전라북도에는 20여개의 마한 소국이 위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명을 음운학적인 방법만으로는 위치를 확증하기 어렵고, 견해 차이도 심해 마한 소국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된 전라북도의 마한 소국을 보면, 고창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을 비롯해서 익산 함열의 감해국(感奚國)과 김제의 벽비리국(闢卑離國)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다수의 의견이 일치하는 곳은 부안의 지반국(支半國)과 정읍 고부의 구소국(狗素國)을 들 수 있다. 이외에 군산 회미의 만로국(萬盧國)과 익산의 건마국(乾馬國), 그리고 정읍의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과 전주의 불사분사국(不斯?邪國) 등도 2명 정도의 일치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나머지 11곳의 마한 소국위치 비정은 학자들 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어 문헌자료 분석의 한계를 실감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고학적인 자료인 분묘와 생활유적을 활용하여 밀집도에 따라 소국의 위치를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각 군집된 유적군 가운데 마한관련 유적이 백제 영영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축조되고 있는 곳이 확인되는데, 그만큼 마한문화의 전통이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는 백제 영역화 이전부터 강력한 세력을 가진 마한의 정치 사회적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삼국지』에 보이는 만여가(萬餘家)인 대국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대국은 주변 천여가(千餘家)로 구성된 소국 연맹체의 수장국으로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마한유적의 분포 밀집도를 바탕으로 분류해보면, 지도에서 보듯이 3개의 군집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Ⅰ군은 금강과 만경강유역을 중심으로 6개의 작은 군집들이 분포하고 있고, Ⅱ군은 동진강과 고창 흥덕을 경계로 하는 공간적 범위에 3개의 소군이 해당하며, Ⅲ군은 고창지역에 3개의 소군집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각각의 Ⅰ.Ⅱ. Ⅲ군은 마한의 성립이나 성장과정과 백제와 상호관계 설정에 따라서 그 특징을 달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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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3 16:46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좋은 그림, 잘 그린 그림 2

아이린이 그림을 보는데 본인 스스로 인기가 높다고 생각하는 S 씨의 고풍스러운 옛 도자기와 가구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을 눈길 한번 안 주고 그냥 통과해 버렸다. 그런데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역임한바 있는 고 고화흠 선생의 그림 <백안(白岸)> 앞에서는 그림을 다 외울 정도로 보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고 고화흠 선생을 소개하자면, 전주사범학교 2학년 때 동기인 고 유경채 선생(당시 예술원 회장, 서울대학교 교수)과 함께 선전에 입선 경력을 가진 분으로 수채화유화인물화정물화풍경화 등을 자유자재로 대상도 모델도 없이 그렸고 특히 서예에 능하여 그림보다 병풍이 많은 사람에게 소장되어 있다고 본인께서 말씀하셨다. 선생의 유일한 추상 시리즈가 바로 백안이라는 제목으로 그려졌었다. 그리고 가히 주선(酒仙)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이린에게 물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잘 그렸다고 하는 저 그림은 무심히 지나치면서 왜 이렇게 이 그림은 열심히 보느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그렇다. 그의 그림은 잘 그렸다는 한 가지 뜻밖에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뜻이 있기에 오래 보게 된다.라고 했다. 그때 S 씨가 자랑스레 귀띔해준 덕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던 재벌의 회장이 다른 작가의 그림은 흘겨보지도 않은 채 그의 그림 앞에 곧장 다가가 서 있었다. 그 의미는 그 그림의 매매가 이미 성립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고 고화흠 선생의 작품은 매매되지 않았다. 나는 이 글에서 절대로 화력이나 경력 따위를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화력이 아무리 좋아도 옛날식의 사고와 표현은 거절한다. 오히려 그런 것을 권위랍시고 내세우는 사람들을 저주한다. 다만 그런 것들이 삭혀져 그 바탕에 새로움을 받아드리는 겸허함을 말하려는 것이다. 자 이제 여러분이 판단해야 한다. 어떻게 그릴 것인지 무엇을 그릴 것인지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어떻게 무엇을 그릴 것인지를 누가 강요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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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21.07.12 16:54

‘바다의 서정’…신석정 시 선양 낭송대회

신석정 시인의 문학을 널리 알리기 위한 제7회 석정 선양 시낭송대회가 지난 9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날 대회에서는 약속바다의 서정그 정상에서피가 도는 돌이 되어등 신석정 시인의 알려지지 않는 시를 들려줬다. 특히날개가 돋쳤다면은 영시로 번역한 뒤 낭송했다. 대상은 김영희김수정조영희황주현 시낭송가가 결성한 서울팀이 받았다. 금상은 조춘식 시낭송가, 은상은 이종숙조학열 시낭송가, 동상은 심정숙장정옥윤영미윤혜정황송해 시낭송가가 차지했다. 심사위원으로는 소재호 시인(전북예총회장), 정군수 시인(석정문학회 회장). 김금남(아동문학가)김윤아 시낭송가(한국 신석정 시낭송협회 회장)최근익 시낭송가(한국 신석정 시낭송협회 부회장)가 참여했다. 심사위원장 김윤아 시낭송가는 전국에서 대상을 수상하신 회원들이 출전해 탁월한 기량을 보여줬다며 이번 기회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석정의 새로운 시가 꽃 피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회 수상자 영상은 문화 유튜브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사)석정기념사업회(이사장 윤석정)이 주최하고 한국 신석정 시낭송협회(회장 김윤아)가 주관하는 석정 선양 시낭송대회는 지난 2014년부터 시인을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했다. 매년 석정이 태어난 날(7월 7일) 즈음 열리며, 서울경기, 영호남, 충청, 강원지역의 유수한 낭송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7.11 17:38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그대는 어떤가요?

손무 십여 년 전 손자병법을 흠모해 여러 번 정독한 적이 있다. 천재적인 병술의 전략가인 손무는 소스라치는 전법을 펼치며 예측할 수 없는 판을 주도했다. 그러한 병서는 과거에 이어 오늘을 살아가는 현시대의 처세술로도 주목받았는데 세계적인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도 오늘날 자신을 만든 건 손자병법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손자병법에는 많은 전술이 논의되어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장수에게 알리는 내용으로 전쟁에서 주의해야 할 5가지의 위험 요소라는 글이다. 각각의 요인을 설명하고 각인시켜 다시금 약점이 되지 않게 교훈을 주는 문장으로 되어 있다. 그 원문과 필자의 견해를 써보면 첫째. 필사 가살야(必死 可殺也), 죽자고 덤비면 죽이면 그만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러나 반대로 살고자하는 적에게는 생명길을 터주자는 묘책이기도 하다. 참으로 단순한 논리지만 과거든 현시대든 그러한 전법의 길은 험하고도 어렵다. 둘째. 필생 가로야(必生 可虜也), 사는 데 연연하면 사로잡힌다. 전쟁에서 살려고만 하면 결국 포로가 될 뿐이다. 포로는 숨을 쉬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목숨이다. 조직에서 구성원이 사리사욕을 채우며 자신만을 아낀다면 이미 그 조직은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홀로 살고자 함은 패배이니 함께 살길을 찾아야 한다. 셋째. 분속 가모야(忿速 可侮也), 성질이 급하면 함정에 빠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며 판단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급하게 화를 내어 자못 경솔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무릇 관망이라는 조심스러운 전술도 요긴하게 쓸 기회가 있다. 네째. 염결 가욕야(廉潔 可辱也), 깨끗한 척하면 더럽히면 된다. 모든 이들은 명예를 중요하고 귀하게 여겨 항상 고결하게 생각한다. 싸움에서의 장수는 더욱더 그렇다. 깨끗한 척하는 장수에게는 깨끗하지 못하다는 말로 치욕을 주어 오명을 남기면 된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일하지 않고 핑계를 대는 이에겐 핑계의 오점을 찾아 각인시키면 된다. 다섯째. 애민 가번야(愛民 可煩也), 백성을 사랑한다면 번거롭게 하라. 전쟁터에서 백성을 가까이하면 장수는 싸움할 수 없다. 이 말은 군사와 백성이 함께 있으면 병법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말이다. 즉 전장에 나가려면 사랑하는 이들을 멀리하고 번거로운 생각을 주어 전쟁의 아픔을 잊게 해야 한다. 만약 경영자인 당신이 맡은 조직을 사랑한다면 조직원들에게 일을 주어 보람을 찾게 하고 거리를 두고 전략과 지략을 구상하여 그들에게 꿈을 펼치게 하라. 만약 구성원의 몇몇을 가까이하여 지근거리에 두고 애정을 표하면 그 조직은 이미 와해된 것과 다름없다. 손자병법이란 전략서가 나온 지도 무려 250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이러한 병법의 고전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진술서이기도 했지만 삶을 살아가는 지침서이기도 했다. 현대 삶의 장수인 리더들은 오늘날 어떠한 모습으로 어떤 경우의 수를 익히며 싸움에 임하고 있을까?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모든 구성원 즉 현대의 생업 전사들은 어떻게 시대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대는 삶을 어떻게 이끌고 있는가요?

  • 문화일반
  • 기고
  • 2021.07.08 17:03

[신간] 수용자의 고충과 애환 담아낸 교도관의 편지

전직 교도관이 33년 간 교정시설에서 근무하며 겪은 에피소드와 느낀 점을 담은 에세이로 펴냈다. 지난 2020년 12월 대전지방교정청을 끝으로 공직을 떠난 김천수 씨가 <담장안의 풍경>(바른북스)을 출간했다. 이번에 그가 펴낸 책은 서울 구치소 등 몇몇 기관에서 기관장을 하면서 소통의 방편으로 소속 구성원에게 보낸 이메일 일부를 엮은 것이다. 대부분 글은 교정 현장에서 저자가 직접 겪고 느꼈던 교도관의 삶과 교정 현장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교정 관련 사안들에 대한 생각과 감회도 밝혔다. 특히 수용자 가족, 그 중에서도 미성년 자녀에 대한 지원의 의미를 주제로 편 글은 눈길을 끈다. 저자는 이 글에서 조선 전기 문신인 박팽년 집안이 연좌제로 처벌받은 사례와 노무현 전 대통령 장인의 좌익활동 경력이 정치하는 내내 문제가 됐던 점을 들어, 수용자 가족에게 연좌제적 시선을 투영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해자 가족, 그 중에서도 미성년 자녀는 가해자가 아닙니다. 이들은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비난과 질시, 냉대 속에서 고립되고 위축됩니다. 미성년임에도 제대로 보호받고 양육되지 못하며 사회 저편으로 잊혀져 갑니다. 이유만 다를 뿐 피해자 자녀와 다를 바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이들이 잊혀진 피해자로 불리는 까닭입니다(수용자 가족, 그 중에서도 미성년 자녀에 대한 지원의 의미 일부) 저자는 교도관이 수용자 가족을 향해 가져야 하는 태도도 제시한다. 일반 시민들보다 수용자의 가족, 그 중에서도 자녀들을 같은 부류로 바라보는 연좌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수용자 가족을 지원하는 사람들의 연대나 활동에 적극 동참하진 못할지라도 공감의 마음만은 키웠으면 좋겠다며 그게 바로 밉건 곱건 수용자와 함께 가야 하는 교도관의 숙명이라고 썼다. 익산출신인 김천수 씨는 전북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교도관으로 임용된 뒤, 서울구치소장을 비롯해 대구, 대전, 광주교도소장 등을 염여김했다. 근무 기간 대부분을 현장에서 보내며 직원 및 수용자와 소통에 힘써오다 지난 2020년 12월 대전지방교정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났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7.0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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