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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임지휘자 부재, 지역인재 조례 유명무실…전주시향 운영 총체적 난국

상임지휘자가 부재하고 지역인재 채용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등 전주시립교향악단(이하 교향악단) 운영이 총체적 난국에 처해있다. 운영주체인 전주시 예술단운영사업소가 하루빨리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주시 예술단운영사업소는 올 3월 김경희 상임지휘자와 계약이 만료된 뒤, 최근까지 두 차례에 걸쳐 예술감독 겸 지휘자를 뽑았으나 합격자 없음으로 결론 내렸다. 적격자가 없다는 이유다. 이로 인해 교향악단은 4개월가량 객원지휘자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매달 지휘자가 바뀌는 식이다. 올해 말까지 이런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교향악단 내외부에서 여러 불만이 제기된다. 도내 예술계 관계자 A씨는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연주하는 연주자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며 고정으로 두지 않고 자주 바뀌면 힘들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어 지휘자마다 버릇과 루틴이 있기 때문이라며 연주자가 지휘자에게 적응하는 데도 2~3개월 정도 소요되고, 그 동안 좋은 연주를 선보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공모할 때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전주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지휘자 채용 재공고(5월)에 따르면, 제출 서류에 겸직허가서(해당자에 한함)가 포함된다. 예컨대, 대학교수의 경우 미리부터 합격을 전제하고 총장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 식이다. 도내 예술계 관계자 B씨는 합격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휘자교수직 겸직을 허가받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며 특히 저명한 지휘자(교수)는 불합격하면 데미지를 크게 입기 때문에 지원을 꺼린다고 말했다. 이어 배정 예산도 적은 상황에서 저명한 지휘자를 모시기 위해선 자격 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1년 이상의 국공립단체 지휘(연출) 경력이 있는 사람, 대학교기관단체에서 지휘(연출) 경력이 3년 이상인 사람 가운데 한 가지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공모자격이 주어지는 요건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도내 예술계 관계자 C씨는 이 정도는 부지휘자급 요건에 해당된다며 요건을 좀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크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향악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젊고 유능한 지휘자들이 있다고 부연했다. 조례로 제정한 지역인재 우선 채용도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았다는 문제도 거론된다. 관련 내용을 담은 조례인 전주시 시립예술단 설치 및 운영조례는 올 6월 9일 발효됐는데, 채용절차는 6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 진행됐기 때문이다. 결국 시점상의 불일치로 지역 음악대학의 폐과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지역인재 채용은 올해 유명무실화 됐다. 도내 예술계 관계자 D씨는 전주시 예술단운영사업소에서 조례안이 의회에 상전된 사실을 미리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그런데 채용을 강행해서 지역 음악인들이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전주시 예술단운영사업소 관계자는 지휘자 선발의 경우 단원평가, 전문가 평가, 일반평가 등 절차를 거쳐서 진행했지만 적격자가 없어서 선발할 수 없었다며시향 지휘자를 아무나 뽑을 순 없다고 밝혔다. 지역인재전형과 관련해서는 올초부터 계속 퇴임하시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선발시점과 절차를 두고 계속 고민해왔다며 그 과정에서 조례 제정시점과 타이밍이 잘 맞질 않았다고 말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7.06 18:08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 목지국은 삼한의 맹주국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 한전에는 마한 54개국 각각의 국명을 기록하고 있고, 큰 나라는 만여가, 작은 나라는 수천가로서 총 10만여호로 구성되어 있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마한 사회를 국(國)연맹체 사회로 파악하여 그 맹주국으로서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건마국과, 그 이후의 목지국에 이어서 서울과 한강하류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백제국 중심의 마한연맹체로 설명하기도 한다. 특히 마한의 중심세력으로서 삼한 소국들을 정치적으로 이끌어 왔던 목지국에 대한 연맹체 맹주국 관련 내용은 「삼국지」 한전에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은 목지국과 같음)을 다스린다라 쓰여 있다. 그리고 변진(弁辰)전에는 24개국 명칭을 소개하고 그 중에서 12국은 진왕에 신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왕을 삼아 대대로 세습했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 못하였다라 되어 있다. 한편 「후한서」 한전에서는 삼한은 모두 옛날에는 진국이었다 그리고 마한이 가장 강대하며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모든 국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 사람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 사서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진왕은 마한 54개국과 변진 12개국을 통치하는 총왕(總王) 성격의 왕이었으며, 도읍은 목지국으로 정리될 수 있다. 목지국의 구체적 실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진왕의 실체에 대한 접근 못지않게 주요한 관심은 목지국의 위치 비정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우선 준왕의 남천지를 마한과 한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목지국의 위치를 일치해서 보는 견해가 많다. 또는 준왕의 남천지와 마한의 중심세력의 위치를 달리 보거나 시대에 따른 중심권 이동을 고려해서 목지국의 위치를 비정하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고고학적인 자료를 참고해서 목지국 위치로 지목되는 지역은 한강 중류지역의 서남쪽 철기문화 관련 분포지역, 중서부 이남의 직산이 포함되는 아산만 일대, 익산을 포함하는 금강유역, 영산강유역의 나주지역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들 지역들은 문헌사학계에서도 세부적으로 차이는 나지만 포괄적으로 위의 세 지역을 마한의 중심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준왕의 후손은 멸망하였으나 지금도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라거나, 준왕 절멸이후 마한 사람들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는 기사가 주목된다. 두 사서의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준왕 이후의 마한은 이전과의 연속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인 자료로 보면 마한의 준왕계 절멸이후 새롭게 등장하는 마한의 왕은 마한 성립기의 토광묘 집단과는 계승적 관계가 없는 아산만 일대의 보령 관창리와 같은 주구묘 축조집단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한 전역에서 주구묘계통의 분묘가 확산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아산만 일대를 목지국으로 비정할 수 있으며, 마한의 중심세력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배경에는 충청, 전라지역 토착민들이 가졌던 강력한 한(韓)의 문화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완규(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

  • 문화일반
  • 기고
  • 2021.07.06 17:02

의자 제작하며 공동체 익힌다

완주문화재단 복합문화지구 누에(이하 누에)와 화산중학교가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인 지금, 여기 2~3차 워크숍이 지난 5일과 6일 양일간 화산중학교에서 진행됐다. 이 프로그램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기초단위 문화예술교육 거점구축 지원사업 공모 사업으로, 복합문화지구 누에는 지난해 12월 화산중학교 학생들과 직접 소통하는 문화예술교육 집담회 너의 생각이 궁금해를 시작으로 사업을 본격 진행하고 있다. 문화예술교육 교사연대, 화산중 1학년 학생 등 10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번에 진행된 여기, 지금 프로그램에서는 의자를 직접 제작했다. 누에 관계자는 누군가를 위한 의자를 통해 나와 너, 이웃, 그리고 공동체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이라며 이 프로젝트는 하반기까지 이어지며, 2학기에는 학생들이 직접 만든 의자를 화산면 마을 곳곳에 전시하게 된다고 했다. 이 프로그램은 누에가 2년 연속(2020~2021) 진행하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기초단위 문화예술교육 거점구축 지원사업 공모사업이다. 현재 정책 거점인 누에를 중심으로 고산, 삼례, 이서, 화산 4개의 마을 거점들이 활동하고 있다. 화산중학교와는 2020년 11월 기초거점 사업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 문화일반
  • 김재호
  • 2021.07.06 16:39

16년만에 부활한 전북청년미술상…이주리 작가

전주출신 이주리 작가(49)가 16년 만에 부활한 전북청년미술상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전북청년미술상은 예술계 원로인 유휴열 작가가 1990년 젊은 작가들을 격려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당해부터 2005년까지 총 13명의 수상자를 배출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도중에 중단됐다가 올해 다시 부활했다. 사단법인 모악재(이사장 최명순)는 이주리 작가를 제13회 전북청년미술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5일 밝혔다. 모악재에 따르면, 올해 전북청년미술상은 21명 작가가 후보에 올랐고 이를 두고 역대 수상작가가 투표를 한 결과 세 명이 선별됐다. 이 가운데 이주리 작가가 지역 미술활성화와 창작의지 고취, 미술상의 제정 취지와 부합해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설명이다. 이 작가는 인체를 향한 집요한 연구와 분석을 통해 21세기 세계관과 인간관을 축적해왔다고 평가받는다. 그가 자신의 작품 살다에 표현한 인물은 정면을 응시하지도 않으며 자아를 표현하지 않는다. 뒤섞여 뒹굴고 있는 인체군상들이 나타나거나 뒷모습을 노출하는 단독상만이 존재한다. 자아(self)라는 신화의 허구를 부인하고 타자(the other)에 대한 사유와 배려가 절실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의도다. 강용면 조각가, 김윤진 건양대 교수, 이진명 미술평론가로 이뤄진 심사위원들은 우리는 지금 나라는 만들어진 신화에서 관계라는 소박한 진실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며 이 작가는 21세기에 처한 우리의 과제를 상징적으로 웅변해주는 회화적 역량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 작가는 어떤 지원도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서 외로이 분투해왔다며 이번 수상이 젊은 작가들을 위로하고, 많은 사회 조직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덧붙였다. 전북청년미술상을 받은 이 작가에게는 청년지원금 500만원과 개인전을 지원한다. 개인전은 올해 12월 1일부터 내년 1월 30일까지 유휴열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주리 작가 이 작가는 원광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개인전은 esquisse자유롭자던..을 비롯해 모두 22회 열었으며, 단체전은 상해 청년아트페어 등 국내외 전시에 다수 참여했다. 수상경력은 광주시립미술관 주최 하정웅 청년작가상, 전북도립미술관 전북청년2015 선정작가 등이 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7.05 17:59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좋은 그림, 잘 그린 그림1

그렇지 않아도 관심도 없는데 재미도 없는 미술을 어렵게까지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물론 화가는 잘 그려야 되는 의무가 있다. 그러나 잘 그린 그림이 곧 좋은 그림은 아니다. 잘 그린 그림이 대학 입시의 평가에 필요하다면 좋은 그림이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날 나의 후원자를 자처하는 사업하는 후배가 100여 평이 넘는 큰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다. 그 대가로 인도네시아 대사 방문에 맞춰 한나절 전시회도 치러보고, 대만의 무역 왕이라는 사람을 만나 전시회도 기획하는 좋은 일과, 필요하면 그림을 가져가는 나쁜 일도 있는 일종의 계약을 맺은 셈이다. 어느 날 그 후배가 미국에서 소더비의 큐레이터 아이린 에스콰이어가 작업실에 온다는 것이어서 적잖이 놀랐다. 말로만 듣던 소더비의 큐레이터가 내 작업실을? 꿈인가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더비에 한국관을 만들고 싶어 골동품을 둘러보러 왔는데 개인적인 친분으로 그곳에 불러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름에 에스콰이어가 들어가 있어서 이상했다. 그때까지 나는 구두 이름으로만 알았던 것이 사람 이름에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나중에 영문학 교수에게 물어보니 영국의 나이트처럼 미국의 귀족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란다. 시차도 못 느끼는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연꽃과 연이파리 밑에 원앙 비슷한 것들을 반구상으로 표현한 80호 크기의 내 그림 하나를 보며 저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고 싶단다. 나는 거의 실감이 나지 않아 반신반의 상태로 마지못해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도 그런데 비행기에 어떻게 싣고 가냐?고 했더니, 문제없다고 씨익 웃으며 일어나더니 능숙한 솜씨로 틀에서 캔버스 천만 뜯어내 둘둘 말았다. 그날은 늦은 밤 헤어지고 이튿날 작업장에 가보니 내가 도착하자마자 다른 사람들은 후배와 함께 급하게 어디로 가버리고 단둘이서만 아이린의 원래 목적대로 인사동으로 가야 하는데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니 손짓발짓 영어가 시작되었다. 인사동에서 아이린의 일을 마치고 우리는 당시 서울신문사의 프레스센터에 갔다. 그곳 1층에선 그룹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고 고화흠 선생을 포함하여 열댓 명 남짓이 출품했었다.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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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5 17:39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여민락의 호흡으로

전라북도에 살면서 모악산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지인과 필자도 모악산에 올랐다. 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고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라 산을 좋아하지 않는 필자도 용기를 얻어 발길을 옮겼다. 모악산은 구전에 의하면 산꼭대기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은 큰 바위가 있어 그런 의미에서 모악(母岳)이라 불린다고 한다. 산 입구에는 코로나19를 무색하게 능소화의 밝은 모습이 있었다. 때아닌 역병이 사람들의 발걸음은 떼어 놓았지만 그래도 산을 사랑하는 이들은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쓴 채 어머니의 품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산을 오르기 얼마 안 되어 대원사라는 사찰에 도착했을 때 한 전통음악의 선율이 어디선가 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여민락이었다. 이런 산 중에 궁중음악이 나온 것에 놀랍기도 했고 더욱더 놀라웠던 것은 흘러나온 선율에 등산객들이 산을 오르며 생긴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있던 것이다. 그래, 이거였구나! 필자는 마음속 쾌재를 부르며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여민락은 조선 세종대왕이 만든 전통음악으로 백성과 더불어 즐기자라는 뜻이며 본래 용비어천가를 노래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모두 7장으로 되어 있는데 매우 느리게 시작해서 조금 빠른 연주의 속도로 마치는 웅장하고 포근하며 아정한 궁중음악이다. 전곡을 연주하려면 무려 1시간하고도 30분이나 걸린다. 자, 그럼 필자가 느꼈던 전율을 함께 나누며 여민락에 잠겨보자. 그리하면 쉽고 재미있게 모악산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모악산의 입구에서 대원사를 향해 가는 길은 마치 여민락 초장의 호흡처럼 가볍고 포근하며 아기의 숨처럼 따듯하다. 대원사를 지나 수왕사에 오르기 위한 험준한 여정은 마치 여민락 2장에서 3장의 긴 호흡처럼 깊다. 시간이 갈수록 산의 경사는 높아지고 호흡은 거칠어진다. 마치 여민락 3장까지 이어온 전통악기 피리의 거세고 모진 숨결처럼 모악산의 기세는 그렇게 이어진다. 여민락 초장에서 3장까지의 곡은 20박이 한 장단이다. 하나, 둘, 셋의 수를 천천히 말한 속도가 한 박이니 그 한 박을 스무 번 부르는 것이 한 장단인 것이다. 참으로 깊고도 아정한 박자의 연주다. 수왕사에 오르는 걸음은 여민락 20박 한 장단의 호흡과 이어지면 금상첨화의 합이 된다. 느린 전통 선율에 얹은 발걸음은 구름을 걷듯 그렇게 여민락의 호흡과 운율을 만든다. 수왕사에 도착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여민락 4장부터 연주를 듣자. 4장부터 마지막 7장까지의 박자는 10박을 합한 한 장단이 기본 박으로 조금 빠르게 하나, 둘, 셋 수를 말하기 시작해서 열까지 세면 그것이 한 장단이 된다. 수왕사에서 포기하지 말고 걸음을 재촉하면 완급의 계단이 나오니 힘을 내어 여민락 5장을 듣자. 그리하면 6장을 지나 7장의 초 앞 연주가 끝날 때쯤 정상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정상에서 마지막 7장의 여음을 크게 들으며 숨을 깊게 쉬어 보자. 모악산 전설의 바위 어머니가 우리를 안을 수 있도록 가슴도 활짝 펴 보자. 그리하면 모악산과 과거 세종이 간직했던 사랑과 기세를 함께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7.01 16:52

전북출신 떠오르는 재즈 피아니스트 용리 데뷔앨범 <Touch> 발표

뉴욕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해온 피아니스트 용리(본명 이용현)(33)의 데뷔앨범 가 지난 29일 발표됐다. 앨범은 각 음원사이트를 통해 들을 수 있으며, 음반은 7월 12일 발매될 예정이다. 용리는 뉴욕에서 재즈 연주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최근 귀국해 피아노를 통한 자신만의 독보적이고 멜로디를 앨범에 담았다. 앨범에는 그 어느 때보다 격변하는 시대에 사는 한 젊은 예술가의 자화상을 주제로 나를 통해 바라본 세상, 그리고 세상을 통해 바라본 나 자신의 흔적들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자신이 직접 작곡, 편곡한 9곡이 담긴 첫 앨범이지만, 재즈계에선 누구나 다 아는 세계적인 색소폰 연주자 월터스미스 3세(Walter Smith III), 가장 권위 있는 재즈 경연대회인 몽크 컴페티션에서 2등을 차지한 맥스 라이트(Max Light) 등이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다. 이 밖에도 정상급 뮤지션들과 함께 연주하고 투어를 함께하는 등 뉴욕에서 떠오르는 신예 뮤지션들인 제이콥 슐만(Jacob Shulman, 테너 색소폰), 태미 셰퍼(Tammy Scheffer, 보컬), 시몬 윌슨(Simon Willson, 베이스), 케이번 고든(Kayvon Gordon, 드럼)이 함께해 연주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앨범 사진 타이틀곡 은 세련된 멜로디와 드라마틱한 전개가 돋보이는 곡으로, 태미 셰퍼(Tammy Scheffer)의 몽환적인 목소리와 용리의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 그리고 월터 스미스 3세(Walter Smith III)의 정제된 연주가 어우러져 감성적인 현대 재즈 음악의 정수를 담아냈다는 평이다. 용리 피아니스트는 재즈를 넘어 클래식오케스트라 곡을 작곡하는 등 실험적인 연구음악을 했던 재즈 스탠다드의 대명사 키스 재럿(Keith Jarrett)같은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전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록 음악을 즐겨 듣던 그는 드럼연주 키보드 연주에 매료됐고, 이후 여러 동료 뮤지션들을 거쳐 아티스트만의 자유로운 표현의 정점을 보여주는 재즈의 음악세계에 빠져들었다. 2009년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오른 그는 재즈 교육의 명문인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 최초의 음악교육 기관이자 최초로 재즈 학과를 설립한 뉴잉글랜드 음악원(New England Conservatory)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석사과정 중에는 국내 CJ문화재단 장학생으로 선정돼 음악 공부에 매진했다. 전 세계 뮤지션들이 모여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뉴욕으로 건너가 한국인이 많지 않은 척박한 환경 속 수많은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들을 발굴했고 재즈의 미래를 배양하는 곳이라 평을 받는 재즈 갤러리(Jazz Gallery), 그리고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 등도 연주했었던 코넬리아 스트릿 카페(Cornelia Street Cafe) 등의 무대에 서며 재즈 피아니스트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귀국한 후에는 전주세계소리축제 등의 무대에 섰고, 여러 재즈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디. 서울문화재단으로부터 높은 경쟁률을 뚫고 그의 예술성을 인정받아 예술지원대상으로 선정되어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다.

  • 문화일반
  • 백세종
  • 2021.07.01 16:52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죽음 그 이후 2

죽은 자의 치아를 묻는 것이 치총이다. 이때 어디서 비명횡사하여 시신을 못 찾을 때 집에 보관된 이를 묻으면 쉽겠으나 없는 경우가 많다. 배비장전에 나오듯이 당시에는 정분을 약속하는 의미로 이를 빼주는 풍습이 있어서 집을 나간 양반의 시신을 못 찾을 때는 평소 정분을 나누던 기생에게 찾아가 치아를 사서 묻었던 것이 치총이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유행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에 의하면 이 하나에 쌀 두 섬까지도 받았다 한다. 그 당시에는 임플란트도 없었을 텐데 당시의 바람꾼들은 이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실소가 나온다. 발총은 고인의 머리카락 같은 것을 묻는 것이다. 지금도 군부대에서는 신체의 일부인 손톱이나 발톱을 깎아 놓고 나가는 훈련도 있다. 훈련 시 혹시 시신을 못 찾는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서 이다. 여인의 경우에는 육신이 없을 때 집에 남아있던 치마를 매장한 치마무덤의 기록도 있다. 묘제에는 일반적인 것으로 땅에 묻는 토장, 물속에 넣어버리는 수장, 지상에 시신을 노출시켜 썩게 하거나 짐승의 먹이로 주는 풍장, 요즘 대세인 불에 태우는 화장이 있으나 화장과 매장을 다 이용하는 방식도 있다. 역사적으로 세계에 단 하나뿐인 해중릉도 있다. 이 해중릉은 신라 문무대왕이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뜻으로 묻힌 무덤( 사적 제158호)이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바다에 있다. 아프리카의 어느 바닷가 부족은 남아 있는 자손들이 풍요로운 먹이를 취하게 하기 위하여 바다에 시신을 버린다. 토장이나 매장은 인류 사회에서만 있는 것으로 결국 시신의 연부는 썩히고 뼈는 보존한다는 것이 기본이다. 분묘에는 피라미드와 마스터파, 그리고 왕릉으로 대변되는 무덤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영혼은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사람이 죽었을 때 돌아간다는 말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왕릉이 축조된 위치는 대개 산을 등지고 냇물이 흐르는 넓은 들을 끼고 있어 당시의 생업이 농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덤은 그 크기의 차이에 따른 권력의 상징이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28 17:36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경기도 도당굿과 이동갈비

경기도 도당굿은 한국전쟁과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한동안 단절되었다가 199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된 전통문화이다. 보통 굿이라 하면 여자 무당의 사제가 전체적인 굿의 연행을 이끌어 가지만, 경기도 도당굿은 남자 무당인 화랭이들의 역할이 주종을 이루며 소리와 재담, 재주놀이 등을 통해 강신여무(降神女巫)인 미지와 함께 굿을 이끌고 나아간다. 이러한 화랭이는 남자 세습무(世襲巫)로서 신라의 화랑(花郞)에서 어원이 유래되었다. 경기도에서는 당제 즉 도당굿과 함께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제사로 산신제를 지내기도 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의 산신제는 음력 3월과 9월에 큰 소를 잡아 제의에 쓰고 연행이 끝나면 마을 집마다 소고기를 돌려 함께 음복하였다. 때론 돼지를 제물로 잡아 쓸 때도 삶아 음복을 하고 남은 고기를 마을로 가지고 내려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1970년대 말 이후 제수를 마련하고 산제를 지내는 비용이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비용 부담을 꺼리면서 도당굿과 달리 지역의 산신제는 안타깝게 점점 사라져 갔다. 이렇듯 제의에 십시일반으로 비용을 함께 모아 육류를 올렸던 정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남달랐으며 특히 소의 가치는 특별했다. 도당굿과 더불어 과거의 산신제에서는 이러한 소고기를 최고의 제수 음식으로 올리고 음복했던 것이다. 하물며 개인적으로 소고기를 사 먹으려면 쉽지 않은 것을 마을 단위에 큰 소를 잡아 치성을 드리고 음복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소고기가 귀한 정성의 음식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경기도 양주에서 가까운 포천군 이동면에는 소고기 중 갈비로 유명한 이동갈비가 있다. 이동갈비는 1980년대 초반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 조그만 식육 식당을 하던 네 곳(이동갈비, 백운갈비, 장암갈비, 느티나무갈비)이 맛의 유명세를 타면서 포천군 일동면과 이동면에 250여 군데의 갈빗집을 생성하고 집성촌으로 만든 유명한 먹을거리다. 이동갈비에는 생갈비와 양념갈비 두 종류의 소갈비가 있다. 각각 그 맛과 정성은 남다르다. 생갈비는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소갈비를 참나무 숯으로 구워 손님상에 놓는다. 그 감칠맛이란 왕후장상의 불로초보다 진하다. 양념갈비는 특유의 양념 비법으로 달콤함과 단백함을 합(合)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가격이었다. 갈비 10대(1인분)의 가격이 그 당시 서울 음식점 삼겹살의 가격과 별 차이가 없었으니 그렇게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왕래했던 손님들의 마음을 필자는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 당시 포천군 일동면과 이동면 지역에는 군부대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군 장병과 면회하러 온 식구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주말이면 한 점의 소갈비를 어머니가 이등병 아들에게 먹여 주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경기도 포천 이동의 갈비 맛은 여느 지역의 갈비 맛과 다르고 더욱 특별하다. 이러한 마을의 치성이 담긴 경기도 도당굿과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이동갈비는 지금도 대한민국의 소중한 전통문화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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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4 16:26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문화, 일본 고대국가 성립의 기초가 되다

일본의 방형주구묘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효고현 히가시무코(兵庫縣 東武庫) 2호분의 주구 내에서 한국 청동기시대 중기의 송국리형 토기가 출토되었고, 목관의 나이테 연대측정에 의하면 기원전 445년임이 밝혀졌다. 이 유적은 한반도 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점토대토기와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에 의한 마한의 성립과 관련된 새로운 정치변혁과정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전래된 주구묘는 야요이 후기에 들어서면 지역적인 특징을 가지고 발전되어 가는데, 일본 고대문화의 중심지역인 긴끼(近畿)지방에서는 마한 주구묘의 변화와 동일한 패턴으로 축조된 분구묘가 출현한다. 분구묘라는 용어는 원래 일본 고고학에서 흙을 쌓아 분구를 갖춘 야요이 분구묘와 고분시대의 전방후원분을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된 명칭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분구묘라는 용어를 그대로 수용해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먼저 분구를 조성한 후 분구를 되파서 매장부를 지상에 두는 축조방법의 묘제라는 것에 대한 인식은 같이하고 있다. 마한 주구묘는 정치와 사회발전에 따라서 점차 그 규모가 대형화되면서 영암 만수리나 함평 예덕리 만가촌 분구묘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분구묘로 변화된다. 그리고 점차 대형화가 이루어진 하나의 분구 내에 다장(多葬)이 이루어지는데, 이는 농경위주의 생업경제에서 비롯된 혈연중심의 사회현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에도 긴끼지방의 오사카 우류도오(大阪 瓜生堂)유적과 카미(加美)유적에서는 장방형 분구에 다장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마한 분구묘와 속성을 같이하고 있다. 오사카 瓜生堂 분구묘 마한 지역과 일본 긴끼지방의 주구묘는 4세기 전반까지 유사한 형태의 분구묘로 변화 발전한 형태로 축조된다. 백제가 마한지역을 영역화하는 영향 속에서도 마한 분구묘는 백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영산강유역이나 마한 전통이 강한 지역에서는 6세기 전반까지도 지속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한편 일본 긴끼(近畿)지역에서는 4세기 전반기에 들어서 다장 형태의 야요이 분구묘는 1인장인 전방후원분으로 변화되는데, 이는 권력자의 등장을 의미하며 긴끼 중심의 정치세력이 야마토(大和)정권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한문화는 한반도 서해안 일대의 기층문화로서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지역적 전통에 따라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고, 일본은 마한문화에 뿌리를 둔 전방후원분체제에 들어서면서 일본 전형의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는데 이를 계기로 마한 분구묘와는 차별화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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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2 16:58

“서예 본질 구현” 제13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한달간 열린다

1997년 첫 행사 이후 열세 번째를 맞는 2021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11월 6일부터 12월 5일까지 한 달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을 중심으로 전북지역 14개 시군에서 열린다.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조직위원회(위원장 이선홍)는 자연을 품다(회귀자연, 回歸自然)를 주제로 도내 31곳에서 전시와 학술, 부대행사 등 6개 부문 37개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비엔날레를 대표하는 전시 서예의 역사를 말하다에서는 20개국의 작가 110명이 모여 고대, 근대, 현대 서체별 변화 등 서예의 흐름을 조망한다. 나랏말싸미에서는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글서예의 역사를 살핀다. 일반 관람객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 전시도 있다. 대중에게 친숙한 노랫말을 붓글씨로 표현한 선율&음율전, 서예 문자 디자인의 실용적 가치를 재해석한 디자인 글꼴전, 서화작품을 소품으로 제작한 작은 대작전 등은 일반 관람객도 부담 없이 감상하고 즐기는 전시가 될 전망이다. 특히 올해는 전북 서예가 초청 규모를 확대하고, 14개 시군으로 전시 공간을 확장해 전북서예의 상생 방안을 찾을 계획이다. 14개 시군 작가들의 퍼레이드 전시 서예, 전북의 산하를 말하다를 비롯해 어디엔들 서예가 없으랴, 미술관, 서예 이야기 등을 통해 지역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하려고 했다. 이밖에 방촌의 미학으로 불리는 전각 역사를 되돌아보는 철필전각전, 전각가 1000명이 천자문을 한 글자씩 새겨 실인과 함께 전시하는 천인천각전, 서예와 그림도자기문인화가 함께하는 서중화화중서전 융합서예전 시서화전 등도 마련했다. 윤점용 집행위원장은 서예의 본질과 변화의 길을 추구하며 대중적인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영상 전시 등을 도입해 시대 변화에 대응하고자 한다며 서예의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성을 더해 시공을 넘나드는 공감과 공명이 있는 행사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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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21.06.22 16:53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죽음 그 이후 1

아름다운 인생이었거나, 아쉬웠던 인생이었거나, 또는 원망의 세월이었거나 간에 누구에게나 죽음은 기어이 한번은 찾아오고야 만다. 시인 김지하가 젊은 날 한 때 어름사니(남사당 패거리의 줄 광대)라는 시에서 죽음은 좋은 것, 어차피 한번뿐일 테니까라고 호기를 부렸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의 죽음이라도 그 지역 문화에 따라 처리될 뿐이다. 볼케나우가 밝힌 내세관에 의하면 첫째 이집트 사람들처럼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육체인 세트(Set)도. 영혼들 바(Ba)와 카(Ka)도 영원히 살아있다는 사상, 그래서 미이라를 만들고 뇌와 내장은 적출하여 카노보스라는 병에 밀봉하여 보관하는데도 심장만은 적출하지 않고 주술이 깃든 부적으로 덮어 소다와 향료를 넣은 수지로 만든 마포를 여러번 감아 미이라로 보관했을 것이다. 그리스의 사학자 헤로도투스의 증언이다. 물론 살았을 때의 신분에 따라 다르다. 어떤 자는 넓은 피라밋이나 마스터파에 들어가고 천한 사람들은 그냥 들판에 던져진다. 두 번째는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다. 죽으면 끝이다. 그래서 실존주의가 발달된 그리스 지역이다. 그들은 24시간 이내에 장례를 치러도 안 되고 48시간을 넘겨도 안 되는 관례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는 기독교 문명권의 죽음이다. 그들은 죽음을 인정하지만 그 죽음을 어떤 형태로든지 초월하려 한다. 넷째가 우리나라를 비롯 동양문화권에 있는 나라들의 죽음과의 연결 사상이다. 육체는 소멸되지만 영혼만은 불멸하여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의 방법이나 법도가 더 복잡해진 측면도 있다. 우선 장레를 치루는 일수도 신분이나 재산에 따라 3일장, 5일장, 심지어는 광개토대왕처럼 3년장으로 치러지는 경우도 있다. 육체에 다시 영혼이 깃들기를 기다리는, 즉 예수님도 아닌데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무덤의 내용도 허총(虛塚)을 비롯 혈총(血塚), 발총(髮塚), 치총(齒塚) 등이 있으며 때로는 신주(神主)만 묻기도 했다. 전쟁에 나가는 남편이나 아들에게 문신을 해 주고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전장을 돌아다니며 문신을 보고 아들을 찾거나 그도 못 찾으면 문신을 할 때 피를 닦았던 손수건의 피를 묻으며 혈총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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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1 16:40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역병을 이겨내라

세종대왕 조선왕조 중 세종대왕은 많은 공적을 남긴 성군이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글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었고, 정음청을 중심으로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시켜 그 뜻을 백성과 함께 하고자 했다. 또한 조선 실정에 맞는 농법서인 농사직설(農事直設)을 만들어 농업의 발전을 끌어내고자 했으며, 민족의 음악을 더불어 아끼시고 귀히 여겨 박연으로 하여금 궁중음악인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했다. 이러한 성군의 시절에도 전염병은 있었으니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전염병의 350회 전체 원문 중 10회의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기록은 세종 2년, 6년, 12년~16년, 18년~19년, 25년~26년의 해로 참으로 적지 않은 환난을 겪은 성왕이었다. 세종 2년, 첫 전염병이 돌자 세종은 서울과 지방에 전염병이 성하게 유행한다 하니 소재지 관리로 하여금 성의를 다하여 치료하여 죽은 자가 나지 않도록 하라 하였고, 세종 14년에는 각 도의 감사에게 민간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구제하여 치료해주라는 법의 조항을 상고하여 구료(求療)해 살리도록 마음을 쓰라 전지(傳旨)했다. 세종은 즉위 후 전염병이 돌자 온 힘을 기울여 사망자가 나오지 않게 지시했으며 더불어 법을 만들어 치료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절실히 표명했다. 또한 세종 16년에는 외방(外邦)의 유행. 전염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방문(方文)으로 써서 주지시키도록 하라 명을 내렸는데 이는 각 고을의 관직을 맡은 이들에게 현장에 직접 가서 치료법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백성들에게 향하는 긍휼(矜恤)이 닿는 성군의 마음이었고 당시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성왕의 방법이었다. 세종 18년에는 예조가 간청하기를 전염병으로 죽은 자의 가족을 살피게 쌀과 면포를 주게 하소서 상소하자 이에 그대로 세종은 명을 내려 실행하도록 했으며, 세종 19년에는 황해도에 여러 병이 전염됨을 염려하여 유명한 의원을 보내어 도내 의학생에게 교류하고 구료하는 방법을 견습(見習)시키라 하교하여 성왕의 의지를 전했다. 이처럼 세종은 치료에 국한하지 않았으며 예방을 위한 계획도 만들고 실천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 잊고 싶은 과거의 전염병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금 나타났지만, 우리는 필사(必死)를 다 하여 이겨낼 것이다. 600여 년 전 세종대왕과 선조들처럼 꿋꿋하고 의연하게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우리 민족은 항상 서로를 아끼고 위로하며 승리했다. 세종실록 56권 세종14년 4월 23일 非獨疾疫者, 流離絶糧之人, 悉訪以啓 <전염병에 걸린 사람뿐 아니라, 유리(流離)하여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도 죄다 찾아서 아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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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7 16:44

빌리 브란트의 ‘작은 걸음’

삽화 = 정윤성 기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는 유대인 위령탑이 있다. 1943년 바르샤바의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에서 나치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섰다가 희생당한 수만 명 유대인들을 기리는 탑이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함께 이 위령탑을 세상에 더 널리 알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서독 총리를 지낸 빌리 브란트(1913~1992)가 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사진이다. 당시 서독에서는 브란트의 행위에 공감하는 사람들보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세계의 언론들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며 브란트를 격찬했다. 후에 브란트는 헌화를 하는 순간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며 인간의 말이 소용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이 흑백 사진 한 장이 가져온 결과는 놀라웠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은 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동안 쌓여온 문제들이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은 정책, 평화의 현실적 가능성을 넓힌 20세기 평화정치가 빌리 브란트를 우뚝 서게 한 동방정책의 상징적 출발점이기도 했다. 동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외교를 적극 추진하면서 동서 화해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동방정책은 결국 1990년 10월 서독과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탄생시키는 동력이 됐다. 동서독 평화공존으로 통일을 이끌어내고 독일형 복지국가를 건설해낸 동방정책을 성공시킨 브란트는 거창한 정책보다는 당장 해결 가능한 문제들에 집중하면서 더 많은 대화와 협상을 신뢰와 변화의 통로로 삼았다. 작은 걸음과 접근을 통한 변화의 가치를 추구했던 그는 사민당을 이끌면서도 합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세웠다. 덕분에 결단력과 추진력 부족이라는 비난을 불러들이기 일쑤였지만 끝까지 의견을 듣고 조정하며 통합해 당의 결속력을 강화했다. 1970년대, 브란트가 이끌었던 사민당은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청년당원이 급격히 늘어났다. 위압적 권위보다는 소통과 조정, 통합의 리더십으로 새로운 정치 발전을 원했던 이들에게 브란트는 상징적 리더이자 희망이었다. 한국 정치에 변화의 바람이 몰려왔다.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청년정치의 부상이 그 증거다. 30대 야당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한편에서는 거창한 구호들이 먼저 나부댄다. 신중함과 진정성이 더 절실해진 시절, 브란트가 지켰던 작은 걸음의 가치가 새삼스러워진다. /김은정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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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정
  • 2021.06.17 16:19

10년 동안 동요 향유하고 즐기는 60·80대 모임‘소리샘’

10년의 세월 동안 매월 한 번씩 동요나 민요를 부르면서 향유하고 즐기는 모임이 있다. 소리샘이란 노래모임이다. 동심으로 돌아가 맑은 소리를 내고 싶다는 의지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소리가 우러나오는 샘이란 의미도 담고 있다. 이름에 걸맞게 모임에서는 주로 클레멘타인, 로렐라이 언덕 등 동심을 느끼게끔 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명화 부회장(63)은 동요를 비롯해 회원들이 요청한 곡을 부르기도 한다며 노사연의 만남과 같은 대중가요도 이따금씩 부른다고 말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하나 더 있다. 전북에 거주하는 60대~80대가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출신은 예술가, 수필가, 사진가, 언론인 등 다양하다. 김명곤 회장(83)은 일반적인 직장을 다녔던 분들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며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찾아와서 노년을 즐기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첫 시작은 지난 2011년 김 회장이 지인들과 만나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동요를 하는 동아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부터였다. 그러면서 서로 인연이 닿아있던 사람들이 모였고, 어느 덧 회원수가 20명이 됐다. 반주자와 지휘자도 섭외했다. 이 부회장은 반주는 회장님 지인분이 해주셨고, 지휘자는 정읍의 한 성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셨던 분이 맡아주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휘자는 우리가 음을 잘못 낼 경우 일일이 수정해줬다고 부연했다. 노래를 부르는 장소는 폐교가 된 정읍시 옹동면 산성초등학교를 활용했다. 모임에서 직접 폐교를 인수했고,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김 회장은 초등학교에서 동요를 부를 때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아 참 행복했다며 연령과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지난 2017년 매도했고, 이후 전주에 있는 오페라단 사무실을 밀려 매월 마지막 주 주말에 한 번씩 연습을 하고 있다. 지휘자도 다시 섭외했다. 김 회장은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며동요에 대한 느낌을 살릴수 있는 공간을 다시 확보하고 싶다고 밝혔다. 앞으로 중창단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회원수가 30명~40명 정도 늘어나, 소트라노 알토, 테너 등 파트를 나눠 전문적으로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는 바람이다. 김 회장은 회원수가 늘어나고 어느 정도 전문성이 갖춰진다면, 각종 요양시설을 찾아가 공연을 하며 노래봉사를 할 계획을 갖고 있다며 동요를 통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파란마음으로 물들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모임에 참여하길 희망하는 사람은 김명곤 회장과 이명화 부회장에게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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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21.06.15 18:2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마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

한반도 서해안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 주구묘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백제문화와 뚜렷이 구분되는 마한문화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고학적인 자료이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처음 주구묘가 발견되었을 당시 그 연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주구 내에서 출토되었던 유물 가운데에서 토기 제작할 때 단단하게 하기위해 두드린 무늬가 찍힌 타날문토기에 대한 연대를 기원후 3세기로 설정하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 견해였기 때문에 주구묘의 연대 역시 3세기를 상한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령 관창리유적의 보고서에서는 주구 내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분석한 결과, 청동기시대 중기의 송국리문화와 후기에 해당하는 점토대토기문화 집단과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 주구묘의 축조연대를 기원전 3~2세기로 설정했지만, 학계 다수의 연대관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일본 야요이 시대의 보편적 묘제인 주구묘는 축조수법이나 그 형태에 있어서 한국에서 발견된 주구묘와 유사한데, 그 출현연대를 야요이 전기 곧 기원전 3세기에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주구묘의 기원은 북부 구주에서 벼농사의 기원과 같은 것으로 긴끼(近畿)지역에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농경에서 논의 구획에서 비롯된 묘제로서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편 진시황의 지시로 불노초를 구하러 바다를 건너온 서복(徐福) 전설과 관련지어 중국 진(秦)묘제인 위구묘(圍溝墓)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한국 주구묘의 상한연대를 기원후 3세기로 설정하게 되면 일본 야요이시대의 주구묘와 연대차는 물론, 그 원류에 대한 논쟁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보령 관창리유적 발견이후 익산 영등동, 서천 당정리 등 서해안 일대에서 급증하는 주구묘 자료는 일본의 주구묘 원류에 대해 재고해야 된다는 의견이 먼저 일본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관창리 주구묘의 연대를 한국 청동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며, 특히 긴끼지방의 효고현 히가시무코(兵庫縣 東武庫)에서 출토된 송국리형 토기가 일본 주구묘 기원의 한반도설의 적극적인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에서 긴끼지방으로 이주해온 도래인에 의해 직접 전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 주구묘의 연대를 청동기시대 중기까지 소급할 수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일본 고고학자들의 주구묘에 대한 연구는 매우 각별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을 상징하는 고유의 고대묘제인 전방후원분의 원조가 바로 이 주구묘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곧 일본 고대사회의 변화추이에 따라 주구묘는 분구묘로 발전되고, 분구묘는 다시 전방후원분으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며,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긍지 또한 매우 강했음도 알 수 있다. 보령 관창리 유적을 직접 발굴 조사한 고려대학교 이홍종 교수의 전언에 의하면 이 유적 조사이후 일본 방형주구묘의 저명한 연구자 한명이 주구묘에 관한 연구에서 절필을 선언할 정도로 마한 주구묘의 발견은 일본 학계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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