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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죽음 그 이후 1

아름다운 인생이었거나, 아쉬웠던 인생이었거나, 또는 원망의 세월이었거나 간에 누구에게나 죽음은 기어이 한번은 찾아오고야 만다. 시인 김지하가 젊은 날 한 때 어름사니(남사당 패거리의 줄 광대)라는 시에서 죽음은 좋은 것, 어차피 한번뿐일 테니까라고 호기를 부렸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의 죽음이라도 그 지역 문화에 따라 처리될 뿐이다. 볼케나우가 밝힌 내세관에 의하면 첫째 이집트 사람들처럼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육체인 세트(Set)도. 영혼들 바(Ba)와 카(Ka)도 영원히 살아있다는 사상, 그래서 미이라를 만들고 뇌와 내장은 적출하여 카노보스라는 병에 밀봉하여 보관하는데도 심장만은 적출하지 않고 주술이 깃든 부적으로 덮어 소다와 향료를 넣은 수지로 만든 마포를 여러번 감아 미이라로 보관했을 것이다. 그리스의 사학자 헤로도투스의 증언이다. 물론 살았을 때의 신분에 따라 다르다. 어떤 자는 넓은 피라밋이나 마스터파에 들어가고 천한 사람들은 그냥 들판에 던져진다. 두 번째는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다. 죽으면 끝이다. 그래서 실존주의가 발달된 그리스 지역이다. 그들은 24시간 이내에 장례를 치러도 안 되고 48시간을 넘겨도 안 되는 관례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는 기독교 문명권의 죽음이다. 그들은 죽음을 인정하지만 그 죽음을 어떤 형태로든지 초월하려 한다. 넷째가 우리나라를 비롯 동양문화권에 있는 나라들의 죽음과의 연결 사상이다. 육체는 소멸되지만 영혼만은 불멸하여 윤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의 방법이나 법도가 더 복잡해진 측면도 있다. 우선 장레를 치루는 일수도 신분이나 재산에 따라 3일장, 5일장, 심지어는 광개토대왕처럼 3년장으로 치러지는 경우도 있다. 육체에 다시 영혼이 깃들기를 기다리는, 즉 예수님도 아닌데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무덤의 내용도 허총(虛塚)을 비롯 혈총(血塚), 발총(髮塚), 치총(齒塚) 등이 있으며 때로는 신주(神主)만 묻기도 했다. 전쟁에 나가는 남편이나 아들에게 문신을 해 주고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전장을 돌아다니며 문신을 보고 아들을 찾거나 그도 못 찾으면 문신을 할 때 피를 닦았던 손수건의 피를 묻으며 혈총을 만들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21 16:40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역병을 이겨내라

세종대왕 조선왕조 중 세종대왕은 많은 공적을 남긴 성군이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글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었고, 정음청을 중심으로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시켜 그 뜻을 백성과 함께 하고자 했다. 또한 조선 실정에 맞는 농법서인 농사직설(農事直設)을 만들어 농업의 발전을 끌어내고자 했으며, 민족의 음악을 더불어 아끼시고 귀히 여겨 박연으로 하여금 궁중음악인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했다. 이러한 성군의 시절에도 전염병은 있었으니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전염병의 350회 전체 원문 중 10회의 기록이 전해져 오고 있다. 그 기록은 세종 2년, 6년, 12년~16년, 18년~19년, 25년~26년의 해로 참으로 적지 않은 환난을 겪은 성왕이었다. 세종 2년, 첫 전염병이 돌자 세종은 서울과 지방에 전염병이 성하게 유행한다 하니 소재지 관리로 하여금 성의를 다하여 치료하여 죽은 자가 나지 않도록 하라 하였고, 세종 14년에는 각 도의 감사에게 민간에 전염병이 발생하면 구제하여 치료해주라는 법의 조항을 상고하여 구료(求療)해 살리도록 마음을 쓰라 전지(傳旨)했다. 세종은 즉위 후 전염병이 돌자 온 힘을 기울여 사망자가 나오지 않게 지시했으며 더불어 법을 만들어 치료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절실히 표명했다. 또한 세종 16년에는 외방(外邦)의 유행. 전염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방문(方文)으로 써서 주지시키도록 하라 명을 내렸는데 이는 각 고을의 관직을 맡은 이들에게 현장에 직접 가서 치료법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백성들에게 향하는 긍휼(矜恤)이 닿는 성군의 마음이었고 당시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성왕의 방법이었다. 세종 18년에는 예조가 간청하기를 전염병으로 죽은 자의 가족을 살피게 쌀과 면포를 주게 하소서 상소하자 이에 그대로 세종은 명을 내려 실행하도록 했으며, 세종 19년에는 황해도에 여러 병이 전염됨을 염려하여 유명한 의원을 보내어 도내 의학생에게 교류하고 구료하는 방법을 견습(見習)시키라 하교하여 성왕의 의지를 전했다. 이처럼 세종은 치료에 국한하지 않았으며 예방을 위한 계획도 만들고 실천했던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 잊고 싶은 과거의 전염병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금 나타났지만, 우리는 필사(必死)를 다 하여 이겨낼 것이다. 600여 년 전 세종대왕과 선조들처럼 꿋꿋하고 의연하게 말이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우리 민족은 항상 서로를 아끼고 위로하며 승리했다. 세종실록 56권 세종14년 4월 23일 非獨疾疫者, 流離絶糧之人, 悉訪以啓 <전염병에 걸린 사람뿐 아니라, 유리(流離)하여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도 죄다 찾아서 아뢰라>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17 16:44

빌리 브란트의 ‘작은 걸음’

삽화 = 정윤성 기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는 유대인 위령탑이 있다. 1943년 바르샤바의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에서 나치에 맞서 무장투쟁에 나섰다가 희생당한 수만 명 유대인들을 기리는 탑이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함께 이 위령탑을 세상에 더 널리 알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서독 총리를 지낸 빌리 브란트(1913~1992)가 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사진이다. 당시 서독에서는 브란트의 행위에 공감하는 사람들보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세계의 언론들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며 브란트를 격찬했다. 후에 브란트는 헌화를 하는 순간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며 인간의 말이 소용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이 흑백 사진 한 장이 가져온 결과는 놀라웠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은 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동안 쌓여온 문제들이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독일 통일의 기반을 닦은 정책, 평화의 현실적 가능성을 넓힌 20세기 평화정치가 빌리 브란트를 우뚝 서게 한 동방정책의 상징적 출발점이기도 했다. 동구 공산권 국가들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외교를 적극 추진하면서 동서 화해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동방정책은 결국 1990년 10월 서독과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탄생시키는 동력이 됐다. 동서독 평화공존으로 통일을 이끌어내고 독일형 복지국가를 건설해낸 동방정책을 성공시킨 브란트는 거창한 정책보다는 당장 해결 가능한 문제들에 집중하면서 더 많은 대화와 협상을 신뢰와 변화의 통로로 삼았다. 작은 걸음과 접근을 통한 변화의 가치를 추구했던 그는 사민당을 이끌면서도 합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세웠다. 덕분에 결단력과 추진력 부족이라는 비난을 불러들이기 일쑤였지만 끝까지 의견을 듣고 조정하며 통합해 당의 결속력을 강화했다. 1970년대, 브란트가 이끌었던 사민당은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청년당원이 급격히 늘어났다. 위압적 권위보다는 소통과 조정, 통합의 리더십으로 새로운 정치 발전을 원했던 이들에게 브란트는 상징적 리더이자 희망이었다. 한국 정치에 변화의 바람이 몰려왔다.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청년정치의 부상이 그 증거다. 30대 야당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내년 대선과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한편에서는 거창한 구호들이 먼저 나부댄다. 신중함과 진정성이 더 절실해진 시절, 브란트가 지켰던 작은 걸음의 가치가 새삼스러워진다. /김은정 선임기자

  • 문화일반
  • 김은정
  • 2021.06.17 16:19

10년 동안 동요 향유하고 즐기는 60·80대 모임‘소리샘’

10년의 세월 동안 매월 한 번씩 동요나 민요를 부르면서 향유하고 즐기는 모임이 있다. 소리샘이란 노래모임이다. 동심으로 돌아가 맑은 소리를 내고 싶다는 의지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소리가 우러나오는 샘이란 의미도 담고 있다. 이름에 걸맞게 모임에서는 주로 클레멘타인, 로렐라이 언덕 등 동심을 느끼게끔 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명화 부회장(63)은 동요를 비롯해 회원들이 요청한 곡을 부르기도 한다며 노사연의 만남과 같은 대중가요도 이따금씩 부른다고 말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하나 더 있다. 전북에 거주하는 60대~80대가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출신은 예술가, 수필가, 사진가, 언론인 등 다양하다. 김명곤 회장(83)은 일반적인 직장을 다녔던 분들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며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찾아와서 노년을 즐기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첫 시작은 지난 2011년 김 회장이 지인들과 만나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동요를 하는 동아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부터였다. 그러면서 서로 인연이 닿아있던 사람들이 모였고, 어느 덧 회원수가 20명이 됐다. 반주자와 지휘자도 섭외했다. 이 부회장은 반주는 회장님 지인분이 해주셨고, 지휘자는 정읍의 한 성당에서 성가대를 지휘하셨던 분이 맡아주셨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휘자는 우리가 음을 잘못 낼 경우 일일이 수정해줬다고 부연했다. 노래를 부르는 장소는 폐교가 된 정읍시 옹동면 산성초등학교를 활용했다. 모임에서 직접 폐교를 인수했고,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김 회장은 초등학교에서 동요를 부를 때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아 참 행복했다며 연령과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지난 2017년 매도했고, 이후 전주에 있는 오페라단 사무실을 밀려 매월 마지막 주 주말에 한 번씩 연습을 하고 있다. 지휘자도 다시 섭외했다. 김 회장은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며동요에 대한 느낌을 살릴수 있는 공간을 다시 확보하고 싶다고 밝혔다. 앞으로 중창단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회원수가 30명~40명 정도 늘어나, 소트라노 알토, 테너 등 파트를 나눠 전문적으로 노래를 불러보고 싶다는 바람이다. 김 회장은 회원수가 늘어나고 어느 정도 전문성이 갖춰진다면, 각종 요양시설을 찾아가 공연을 하며 노래봉사를 할 계획을 갖고 있다며 동요를 통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파란마음으로 물들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모임에 참여하길 희망하는 사람은 김명곤 회장과 이명화 부회장에게 문의하면 된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5 18:2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마한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

한반도 서해안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 주구묘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백제문화와 뚜렷이 구분되는 마한문화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고고학적인 자료이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처음 주구묘가 발견되었을 당시 그 연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주구 내에서 출토되었던 유물 가운데에서 토기 제작할 때 단단하게 하기위해 두드린 무늬가 찍힌 타날문토기에 대한 연대를 기원후 3세기로 설정하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 견해였기 때문에 주구묘의 연대 역시 3세기를 상한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령 관창리유적의 보고서에서는 주구 내에서 출토되는 토기를 분석한 결과, 청동기시대 중기의 송국리문화와 후기에 해당하는 점토대토기문화 집단과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 주구묘의 축조연대를 기원전 3~2세기로 설정했지만, 학계 다수의 연대관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일본 야요이 시대의 보편적 묘제인 주구묘는 축조수법이나 그 형태에 있어서 한국에서 발견된 주구묘와 유사한데, 그 출현연대를 야요이 전기 곧 기원전 3세기에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주구묘의 기원은 북부 구주에서 벼농사의 기원과 같은 것으로 긴끼(近畿)지역에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농경에서 논의 구획에서 비롯된 묘제로서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한편 진시황의 지시로 불노초를 구하러 바다를 건너온 서복(徐福) 전설과 관련지어 중국 진(秦)묘제인 위구묘(圍溝墓)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한국 주구묘의 상한연대를 기원후 3세기로 설정하게 되면 일본 야요이시대의 주구묘와 연대차는 물론, 그 원류에 대한 논쟁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보령 관창리유적 발견이후 익산 영등동, 서천 당정리 등 서해안 일대에서 급증하는 주구묘 자료는 일본의 주구묘 원류에 대해 재고해야 된다는 의견이 먼저 일본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관창리 주구묘의 연대를 한국 청동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며, 특히 긴끼지방의 효고현 히가시무코(兵庫縣 東武庫)에서 출토된 송국리형 토기가 일본 주구묘 기원의 한반도설의 적극적인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한반도에서 긴끼지방으로 이주해온 도래인에 의해 직접 전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 주구묘의 연대를 청동기시대 중기까지 소급할 수 자료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일본 고고학자들의 주구묘에 대한 연구는 매우 각별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을 상징하는 고유의 고대묘제인 전방후원분의 원조가 바로 이 주구묘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일본 학계의 정설이다. 곧 일본 고대사회의 변화추이에 따라 주구묘는 분구묘로 발전되고, 분구묘는 다시 전방후원분으로 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며,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긍지 또한 매우 강했음도 알 수 있다. 보령 관창리 유적을 직접 발굴 조사한 고려대학교 이홍종 교수의 전언에 의하면 이 유적 조사이후 일본 방형주구묘의 저명한 연구자 한명이 주구묘에 관한 연구에서 절필을 선언할 정도로 마한 주구묘의 발견은 일본 학계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5 18:22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미켈란젤로의 아름다운 죽음2

자코피노 델 콘테가 그린 미켈란젤로 초상화 사람들은 나의 뛰어난 솜씨에 놀란다. 하지만 이런 솜씨를 익히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알게 된다면 더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던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1475-1569, 이탈리아)와 레오날도 다빈치 그리고 라파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연의 힘으로는 다시 만들 수 없다는 천재로 이 세상에서 67년을 살다 간 다빈치는 평소 보람찬 하루 끝에 행복한 잠이 오듯 보람있게 쓰는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라는 말과는 달리 유언은 나는 단 한 가지도 이룬 것이 없다.이었다. 이미 모든 학문의 천재이며 화가를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훌륭한 인문주의자로 위치를 증명해 보인 다빈치의 유언치고는 너무 아쉬움이 남는다. 짐작건대 그 당시에는 황당하기까지 했었을 그의 천재성을 몰라주는 사람들이 못내 원망스러웠을 것이며 그래서 그의 유언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그 시기의 세 천재는 다빈치가 미켈란젤로보다 23살이 많았고 라파엘은 미켈란젤로보다 7살이 적었다. 그리고 라파엘이 37세로 요절하였으니, 이 지구상에서 그들이 같은 공기를 마셨던 기간은 36년쯤 된다.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네 몸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페인트가 흐를 뿐이다.라거나, 내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교황 따위는 되지 않으리라. 반드시 너와 같은 화가가 되어 신을 가깝게 보리라.라는 말을 하게 만든 미켈란젤로는 4년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 자기가 가장 존경했던 아버지께 보낸 편지에 지난 6개월 동안 교황청에서는 단 한 푼의 돈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오늘도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나의 아름다운 죽음을 위하여라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 교황은 거듭되는 전쟁의 군비로 돈을 모두 지불해야 했기에 자신의 묘지도 못 만들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89년의 생애를 마감하면서는 나의 영혼은 신에게. 나의 육체는 땅에, 나의 재산은 친척에게이었다. 지극히 냉정하고 정리된 죽음이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14 16:29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인물과 전투 등 전북 왜란사 연구 집중 필요

전북 지역 역사학자들은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 조명받지 못했던 전북 인물들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과 수군, 의병중심의 연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그 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다양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학술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란극복은 특정인물과 집단의 활약뿐만 아니라 각계 각층의 보이지 않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유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전북의 활약상과 비중을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에 있는 국외사료의 수집과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료를 통해 한산도행주진주대첩, 명량해전, 영남권 중심의 연구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서다. 한문종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한문종 교수는 임진왜란정유재란 관련기록이 있는 일본중국의 고문서, 사서를 수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국외 자료를 수집한 뒤, 국내 자료와 비교 분석해야 한다며 전북 임진왜란사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토대라고 했다. 각 국가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의 성격도 설명했다. 한 교수는 당시 일본은 제후가 각 번(藩)을 다스리는 지방분권 사회였기 때문에 자료가 한 곳에만 집중돼 있지 않다며 자치단체별로 찾아가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왜란 당시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던 중국 역시 상당한 자료가 남아있다며 연구자들이 최근 중국에 남아있는 자료를 많이 활용한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한중일 사료를 비판검증하면서 연구하면 잘못된 사실이 바로 잡힐 수 있다며 국내 사료의 경우 개별 인물을 문중에서 선양하려는 목적에서 쓰거나 후대에 작성된 사례가 많아 성과가 부풀려졌거나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전북 임진왜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전문가 양성, 웅치이치 전투의 재조명, 다른 지역에서 활약했던 전북 출신 의병들의 활동 정리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한 교수는 이런 과제들이 수행되면 영남 중심의 임진왜란사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현재 대부분 교과서가 영남을 중심으로 서술돼 있는 데 실제로 그렇진 않다고 주장했다.하태규 교수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관군의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태규 전북대 사학과 교수 하 교수는 그 동안 임진왜란사를 의병과 수군, 이순신 중심으로 제한된 인식을 갖고 조명했다며 당시 관군의 역할과 당시 행정 체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뒤, 역사적으로 걸맞은 평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호남 의병과 관군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며 왜란시기 호남 관군은 근왕병이 무너진 후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호남 의병은 처음부터 수령과 장수의 협력과 지원을 받으면서 결성됐고, 전투할 때도 서로 협력하며 적을 공격했다며 관군의 장수와 의병장 사이에 전공을 다투거나 시기했던 사례도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진주성 전투에서 전북 의병의 역할 등 개별 연구과제도 제시했다. 하 교수는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했던 전북 출신 관군과 의병을 조명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그 지역출신 의병이라 할 수 있는 지역사족과의 결합양태도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특정집단만의 활약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며 훌륭한 무장과 관군, 의병, 말없이 희생했던 백성들의 보이지 않은 역할을 조명하는 것도 대단이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동희 예원예술대 교양학부 교수 이동희 교수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개별 인물들을 조명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치웅치 전투, 호벌치 전투, 운암전투, 남원성 전투에 참여했던 개별 의병의 역할과 활동을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특히 충남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의 인물들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 선생과 승장 영규 대사가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이 금산(조선시대 당시 전라도) 연곤평에서 1만 5000여 명의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유해와 넋을 함께 모셔놓은 곳이다. 이 교수는 단체로 유해를 모셔놓은 의병들의 경우 개별 의병보다 상대적으로 관심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이들을 정려하던가. 문화재로 지정해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술적인 부분에서는 전국적인 차원의 접근을 주장했다. 이 교수는 웅치이치 등 대표적인 전투를 놓고 지역 학자들을 중심으로 의미를 짚고 조명한 사례는 있다며 이제는 전국 학자들이 모여 임진왜란사에서 전북 출신 관군과 의병이 했던 역할을 논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나종우 전북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 나종우 회장도 인물사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 회장은 전북출신 인물들은 단편적인 사실만 조명되고 있다며 연구가 부족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들의 행적을 비롯해 정신사까지 조명할 수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며 유공자나 후손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고 엄밀하게 연구검증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진왜란사의 거시적인 의미도출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 회장은 국가 전체적인 관점으로 국난극복을 한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며 당시에 신분계층을 막론하고 지도부, 의병, 백성들이 하나가 돼서 전란을 극복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며 이순신, 권율 등 지금까지 부각된 특정 인물의 업적도 중요하지만 국난 극복은 개별 인물의 힘만으로 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만 당시 지도부나 정치인들의 실정은 염두에 두고 접근해야 하다고 부연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시기, 왜군은 도고으 화가, 서예가, 공예가 등 세공품을 만들 수 있는 장인들을 끌고 갔다. 그 중 우리나라 기록에도 없는 인물이 있다. 소위 조선국녀라 불리는 베짜는 직공이다. 이 직공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가 끝난 뒤 강제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초 일본 문화연간(文化年間)에 출간된 <토좌향토지료(土佐鄕土志料)>에 따르면, 고치현 구로시오초 토호인 오다니 요쥬로(小谷與十郞)가 임란시기 이 지역 영주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휘하 군인으로 조선으로 출병했으며, 귀국 때 조선 여인 한 명을 데리고 왔다. 베를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여인은 자신의 기술을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전수한 기술로 짠 베는 매우 세련됐으며, 혼겐(本絹)의 츠무기오리(織)라 불렸다고 한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애를 마감했으며, 가미가와구치 마을 계장사에 있는 오다니 가문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를 세운 것은 요쥬로의 4대손인 오다니 야스지(小谷安次)다. 이후 마을로 이장했다. 묘비는 높이가 50cm정도 되며, 앞면에는 조선국녀(朝鮮國女)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우측면에는 천정연간(天正年間: 1573-1583)에 이곳에 왔다는 의미인 천정연중래(天正年中來), 좌측면에는 사망한 해를 모른다는 의미인 졸년부지(卒年不知)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국 출신의 여인으로서 천정연간에 이곳으로 와서 살다가 언제 사망하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현재 이 소녀의 이야기는 남원문화원에서 지난해 제작한 다큐멘터리와 그림책 정유재란 때 끌려간 한 소녀이야기 조선국女에서 자세히 나와 있다. 여기에는 소녀의 고향으로 추정하는 사매면 수동마을을 배경으로 정유재란의 발발, 일본으로 끌려가는 과정, 일본 벽촌에서의 생활, 베 짜는 기술의 전수 등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가 고향을 그리워하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잠든 소녀의 애달픈 심정도 담겨 있다. 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국장은 일본 고치신문에 조용하게 잠든 조선의 직녀라는 제목으로 집중 조명했고, 일본 작가 우에노마사에가 지난 1998년 <무궁화소녀>라는 제목으로 그림책을 펴냈다며 고치현에 조선국녀의 묘를 지키는 회도 있을 정도로 주목도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임진왜란정유재란사에서도 이 소녀를 비롯해 주목받지 못한 인물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13 17:06

전북 후백제사 비롯한 인문학 콘텐츠 강의

전북 후백제사를 비롯한 다양한 인문학 콘텐츠 강의가 온라인으로 선보여진다. 전북연구원(원장 권혁남) 전북학연구센터는2021년도 전북학 도민강좌 <전북학당>을 제작한 뒤, 온라인 플랫폼에서 공개한다. 강의주제는 전북의 역사문화재음식산업이며 총 10강으로 구성됐다. 한 강좌 당 10분 분량으로 제작됐다. 이달 공개되는 12강 주제는 후백제로, 견훤의 업적과 후백제 유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1강은 전북과 견훤의 정치학 : 후백제 왕, 전주에서 삼국의 패권을 노리다라는 제목으로 건국 과정과 통치, 외교, 공산 전투 승리 후 야망 등을 소개한다. 2강은 전북과 후백제의 유산 : 천백 년 전 역사를 길어올리다라는 제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던 전주 동고산성, 중요 사찰인 봉림사지, 유물과 관련된 강의를 진행한다. 7월에 공개하는 34강은 문화재를 주제로 전북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8월에 선보이는 56강은 전북 고대사 마한을, 9월 공개하는 78강은 전북 관광상품인 음식을 주제로 전개한다. 10월에 공개하는 910강은 전북 산업을 주제로 강의한다. 관련영상은 유튜브 채널 전북학연구센터와 전북학연구센터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김동영 전북학연구센터장은 전북학연구센터는 코로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영상 콘텐츠 2021년도 전북학 도민강좌 <전북학당>을 제작,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며 도내외 남녀노소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강좌로 우리 지역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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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21.06.13 17:00

김형중 교수 2021한국문학신문 문학상 수상

김형중 군산대학교 산학협력단 자문 교수 김형중 시조시인이 2021한국문학신문 문학상을 받는다. 한국문학신문사는 올해 시조부문 최우수상 수상자로 김형중 시인을 선정했다고 10일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12일 서울시 중앙보훈병원 뒤 일자상 생태공원에서 열린다. 심사위원들은 김형중 시인의 고속도로는 묘사와 진술로 이뤄진 작품이라며 첫수에서 시원스럽게 뻗은 고속도로의 모습과 자신의 감회를 나타냈고, 둘째 수에서는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작품으로 시조의 미학을 높였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강조했다. 김형중 시인은 중등학교 교단을 거쳐 원광보건대학에서 정년 퇴직한 문학박사이다. 지난 2016년 월간 국보문학을 통해 시조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수년 간 전북일보 칼럼리스트로 활동해왔다. 전북문협과 전북시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회 등의 문학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지난 1월에는 제32회 전북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군산대학교 산학협렵단 자문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작품집으로는 시집 <어머니의 지게> 외 3권, <당신도 하고 싶은 이야기>등 칼럼집과 수필집 등 3권이 있다. 지난 1월에는 전공서적 <漢詩이야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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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21.06.10 19:39

한국관광공사 선정 ‘여름 비대면 안심관광지 25선’ 에 전북 3곳 선정

고창 운곡람사르습지와 진안 주천 운일암반일암 숲길, 무주구천동 어사길이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여름 비대면 안심관광지 25선에 선정됐다. 한국관광공사는 무더운 여름을 안전하고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여름 비대면 안심관광지로 도내 3곳을 포함, 전국 25곳을 선정했다고 8일 밝혔다. 고창 운곡람사르습지는 동산지형 저층습지로 그 생태적 가치가 높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모두 864종의 동식물 생물다양성이 높고,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과 희귀종의 생태적 서식지로서도 보전가치가 높다. 특히 습지 데크길은 동물들의 이동 통로를 방해하지 않고, 자연 훼손을 막기 위해서 최소한의 규모로 높게 세워져 있다. 데크 아래 있는 식물도 빛을 받을 수 있게 데크 디딤판 나무의 간격을 일정하게 띄워놓았다. 진안 운일암반일암 숲길은 주천면 삼거리에서 주천면행정복지센터에 이르는 8.6km의 평탄한 구간으로 지친 심신을 가다듬으면서 걷기에 안성맞춤인 사색길이다. 진안고원 9구간으로 전북천리길에 든다. 관광명소인 운일암반일암 안에 자리한 이 숲길에서는 차가운 시냇물에서 나오는 시원한 기운과 산기운 가득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심신을 씻을 수 있다. 무지개다리에서 용틀임하고 내려가는 주자천과 곳곳에 널려있는 기암괴석을 바라보면 누구든 감탄사를 절로 발산한다. 특히 2021년 반려견과 함께하는 우선 안심 걷기 길로 선정돼 반려동물 애호가들의 방문이 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주 구천동 어사길은 초입부터 인월담, 사자담, 신양담, 구천폭포, 백련사까지 5km의 이어지는 여정으로 숲과 계곡이 주는 정취와 그 안에서 얻는 만족감이 최고로 꼽힌다. 또 인월담 일원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이용했던 길로 오솔길과 돌계단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길 곳곳 옛사람들이 살던 흔적과 1960년대 최고의 명성을 떨쳤던 한성여관 터도 만날 수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웃들에게 횡포를 부리던 자들을 벌하고 사람의 도리를 바로 세웠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김성규국승호김효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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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1.06.08 19:28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하)익산 황등제

황등제에 대한 문헌기록을 보면 상시연(上矢淵), 황등제(黃登堤), 료곶제(蓼串堤)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먼저 1454년에 편찬된『조선왕조실록』과 1530년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등 조선전기에 편찬된 사서에는 황등제가 상시연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1670년에 완성된『반계수록』과 1760년에 편찬된 『성호사설』 및 『성호선생전집』 그리고 1770년에 편찬된 『문헌비고』와 『증보문헌비고』에 모두 황등제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798년 복태진의 상소가 기록된『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권 50 정조22년 11월 30일의 기록에도 유형원의 말을 인용하면서 황등제로 기록하고 있어 조선후기 어느 시기에 황등제로 명칭이 변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1756년에 편찬된『여지도서』에는 료곶제로 기록되어 있는데 같은 1756년에 편찬된 『금마지』 山川조에는 상시연으로 기록되었고, 제언조에는 료곶제로 기록하고 있다. 1861-1866년에 편찬된『대동지지』에도 상시연으로 기록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09년 임익수리조합을 설립, 증축하여 요교호로 불렸으며, 1935년 완주 경천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저수지의 기능을 상실하고 농경지로 변화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기저부는 흑회색의 점토(뻘)층이다. 제방의 축조는 뻘층 위에 니질점토와 회백색점토인 불투성 점토를 이용하여 교차쌓기를 하였고 토괴형태로 성토(Ⅰ층) 하였다. Ⅰ층은 조사과정에서 부엽층이 확인되었으며, 부엽이 확인되는 곳에서는 지반에 타격을 주어 다진 흔적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 제방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3차에 걸친 공정으로 축조되었으며, 이는 동일한 축조기법과 동일한 재료 등으로 보아 동시기에 제방의 안정된 축조를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제방의 하단부 약 3m 깊이에서는 지름 10cm 내외의 긴 목재가 제방과 직교하고 약 3~4m 간격을 두고 확인되고 있어 제방축조과정에 방향과 작업구간 확인을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부엽층과 목재, 제방 하단부 토양은 샘플링하여 연대측정 자료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시굴조사와 발굴조사 과정에 샘플링한 자료에 대해서는 절대연대 확인을 위해 3개소의 기관에 AMS 분석(C14탄소연대측정)을 의뢰하였다. 그 결과 3개 기관 모두 목재와 부엽층의 경우 BC 5세기 ~ 3세기의 결과가 나왔으며, 대부분 BC 4세기경으로 추정하였다. 기저부 아래 기반층으로 추정되는 토양에 대한 분석결과는 BC 40세기~11세기로 확인되었다. 황등제의 축조될 당시에 중국은 전국시대에서 진한시대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며, 한국에서는 익산지역을 중심으로 마한이 성립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익산을 중심으로 진한대의 화폐나 청동거울 등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두 지역 간의 교류를 살필 수 있다. 또한 당시 1.3km에 달하는 제방을 축조하기위해서는 최첨단의 토목기술이 필수적으로 수반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마한이 성립될 당시의 수준 높은 기술력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을 높여 마한 성립의 경제적 기반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08 18:34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미켈란젤로의 아름다운 죽음

미켈란젤로 태어나는 것도 심상치 않은 일이겠으나 죽는다는 문제도 범상치 않다. 유언은 삶과 죽음의 마지막 갈림길에서 내뱉는 말이기에 더욱 그 사람의 일생을 돌아보게도 할 것이다. 화가 페루지노는 목사의 마지막 기도를 거부하면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저세상에서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고 싶소., 시인 하이네는 하나님은 나를 용서할 것이요. 그것은 그의 직업이니까., 오 헨리는 불을 밝혀라. 어둠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긴 싫다.라고 하였지만, 루스벨트는 불을 꺼.였다. 러시아 혁명가 미카엘 베스트채프의 유언은 올가미 줄이 중도에 끊어지자 나에게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군. 이것조차 뜻대로 안 돼.,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교수대에 올라가면서 실례합니다., 토머스 모어는 턱수염을 한쪽으로 제치면서 이것이 왕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으니 이것까지 자를 필요는 없소., 헤겔은 나를 이해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지. 그런데 그 사람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했어,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나 이유도 모른 채 살다가 왜 이렇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다., 피에르 가상디는 아들에게 나를 좀 일으켜다오. 지는 해를 보고 싶구나., 원망으로 죽음을 맞이한 카이사르는 블루투스 너마저.,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아쉬움을 남긴 로트레크는 바보 같은 늙은이., 아쉬움만을 남긴 당신을 사랑해. 사라 당신을 사랑해.만 반복한 미국 대통령 제임스 포크, 프랑스 육군 사령관, 조세핀을 되뇌다 죽은 나폴레옹 등의 유언이 있다. 신문 발행인 베른은 오늘 뉴스는 뭐지?, 문법 학자 도미니크 부르는 나는 막 죽어간다. 또는 죽을 것이다. 이 두 가지 표현이 모두 가능하다., 의사였던 조제프 헨리 그린은 스스로 자기 맥박을 집으며 멈췄군, 역시 의사였던 조지 쿰은 지금 내 느낌으로 봐선 나는 분명히 죽고 있소. 차라리 잘 되었소.,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작가로 유명한 염상섭은 소주 한 잔만이 마지막 유언이었다 한다. 예에서 보듯 자기 삶에 따라 유언이 나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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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7 16:41

[임진왜란·정유재란 속의 전북] 전북이 기억해야 할 사람

임진왜란정유재란사를 극복한 주요 동력으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의 활동을 꼽는다. 그러나 이순신 휘하에서 공을 세운 전북 인물들도 많았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무명 용사도 존재한다. 호남 방어전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부임해 왜군을 방어하다가 전사한 장수도 있다. 정유재란 당시 침략한 왜군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가 지금까지 예술혼을 꽃피운 주인공도 있다. 이들 가운데 3명을 선별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최근 이순신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인물을 조명하는 작업에서 부각된 인물이 있다. 김제시와 전북역사문화학회가 지난해 12월 연구용역을 통해 분석한 안위이다. 순흥 안씨 13세손 안위는 1563년(명종 18) 김제군 백산면 생건리에서 출생했다. 1589년(선조22), 정여립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평안도에 유배됐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났다. 같은 해 무과에 급제하고 찰방이 됐다. 이듬해에는 일찍부터 인연이 있었던 이항복의 천거로 거제현령이 됐다. 안위의 두 왜란 시기 활약상은 이순신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관련자료 역시 이순신과 무관치 않다. 안위는 <이충무공 전서>, <난중일기>, <호남삼강록>과 관찬사서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나와 있다. 이들 사료에 따르면 안위는 1594년 제2차 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 휘하 전부장으로 참여해 왜군 중선 1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웠다. 해전에 앞서 왜군 동향파악 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당시 이순신과 많은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할 때 안위는 서신을 주고받고, 해전 이후 서로 밤새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정유재란 시기(1597~1598)에도 안위는 활약했다. 당시 안위는 이순신의 지휘 하에 벽파정 앞 바다에서 왜선 20여 척을 격파해 선조에게 무경칠서를 상으로 받았다. 특히 명랑해전에서 활약은 돋보였다. 이순신의 기함이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구하러 가고, 적선 수십 여척을 침몰시켰다. 이 때 공로로 통정대부(정3품)로 승진한 후, 전라좌수사로 부임했다. 1603년 공신도감에서 선무공신을 뽑을 때 22번째로 들었다. 당대 인물들은 안위를 높게 평가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안위를 적개심이 투철하고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은 장수로 썼다. 이항복 역시 안위의 공이 으뜸이라며 적들이 전라우도에서 곧장 충청도로 진격하기 못한 이유는 안위의 힘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정조 때 편찬된 <호남절의록>에는 다른 지역에서 활약하다가 순절한 전북 인물들이 많다. 이들 가운데 동래부성 전투에서 전사한 정읍 출신 송상현이 대표적이다. 송상현은 1570년(선조3) 진사에, 1576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 4월에는 파직된 고경명(전라도 의병장) 후임으로 동래부사가 됐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를 두고 실상은 배척당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송상현은 왜군과 맞닥뜨린다. <실록>에는 당시 활약상과 평가가 자세히 기록돼있다. 송상현은 성이 포위당한 이후에도 남문에 올라가 끝까지 전투를 독려했다. 왜군이 남문 밖에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달라 하자 그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결사 항전의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성은 반나절 만에 함락됐다. 당시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에 입던 예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일찍이 동래에 드나들며 송상현에게 후대를 받았던 일본군 부장 평성관(平成寬)은 그를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송상현은 그의 피신 권유를 거부하고 순절했다. 죽은 뒤, 앞서 조선통신사로 왔던 평조신(平調信)이 탄식하며,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을 세워줬다. 1741년(영조17)에는 좌찬성에 추증됐다. 현재 그의 묘사는 청주에 있다. 1610년(광해군2) 동래에 있던 묘소를 이장한 후,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지역에 사당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의해 끌려간 많은 조선인들 가운데 도자기 제작 기술을 가진 도공도 포함됐다. 일본에서 15대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심수관가가 대표적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끌려갔는지는 정확치 않다. 1598년 심수관의 선조인 심당길이 남원성을 지키다 왜장의 포로가 됐다는 설만 전해진다. 나종우 전라북도문화원연합회장(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은 남원성에서 끌려갔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며 몇 해 전 일본에서 심수관을 만났을 때 고향을 남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심당길은 일본의 남국 사쓰마반도 한 모퉁이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도자기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 <공작도진가편집소(公爵島津家編輯所)> 에 따르면, 3대 심도길이 지역 번주(藩主)에게 기술지도를 할 만큼 뛰어난 기술을 선보인 뒤 제작을 주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4대와 5대는 주춤하였으나 6대 당관이 다시 주재(主宰)를 명받아, 향역조두(鄕役組頭)를 겸했다. 7대 당수는 주재와 향역횡목(鄕役?目)을 겸했고, 8대 당원은 다시 도공에서 주재로 승진했으며 9대 당영은 주재와 향역을 겸했다고 전해진다. 자세한 작품과 기록은 12대(1835~1906)부터 남아있다.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1m55cm의 대화병을 출품했는데,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어 1902년 하노이 동양제국박람회에서 최고상, 1903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2등상을 연달아 수여해, 전 세계에 사쓰마 도자기와 심수관 이름을 널리 알렸다. 대화병은 훗날 일본 국보로 지정됐다. 13대 심수관(1889~1964)은 대학 졸업 후 고시에 합격했지만 공무원이 되지 않고 가업을 이어갔다. 한일합방과 제2차 세계대전이 겹치는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국내외 전람회에서 최고위상, 정부로부터 높은 계위상을 받았다. 숨을 거두기 전 선조가 피랍된 지 400주년이 되는 해에 한일 양국에서 기념제를 치르거라. 그 행사의 일환으로 피랍 도공 후예들의 작품 전시회를 하라는 유언은 널리 알려졌다. 14대 심수관(1926~2019)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모국 속으로 들어왔다. 특히 그는 전북에 각별한 정을 나타냈다. 1989년 전북도와 자신이 살고 있는 가고시마현간 우호협력이 체결되는 자리에 참석했던 그는 선대로부터 4백년 동안 품어왔던 꿈이 실현된 것 같다는 감회를 밝혔다. 남원도자기 일본 전래 400주년을 맞은 1998년 남원에서 불씨를 가져갔으며, 그 불씨로 구운 첫 도자기를 남원시에 기탁했다. 15대 심수관(1959~)은 2011년 남원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으며, 심수관 도예전시관을 만들었다. 이곳에선 매년 국제도예캠프를 열고 있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고향 남원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부르며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는오나리노래탑이 만인의총에 세워지기도 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06 18:28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 전통문화바라보기] 제주도 칠머리당 영등굿과 흑돼지

여행은 왠지 설레는 마음을 갖게 한다. 특히 제주도라는 명사를 떠올릴 때면 더욱 그렇다. 제주도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화산섬이다. 제주도의 해안가를 걷다 보면 탁 트인 바다와 정겨운 가옥 그리고 바람을 맞는다. 마치 만화에 나오는 정경처럼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제주도 전통 가옥에는 드나드는 대문이 없다. 대신 출입구 양쪽에 구멍이 3개 뚫린 돌기둥에 통나무 3개를 끼워 넣어 두는데 통나무가 1개 있으면 가까운 곳에 외출했음이란 뜻이고 2개가 있으면 먼 곳에 외출했음, 3개는 하루 종일 집에 없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도시에서 결코 볼 수 없는 제주도만의 정겨움과 배려가 넘쳐난다. 그래서 도시인들은 제주도에 희망과 꿈을 안고 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제주도에서는 바람이 많이 부는 음력 2월에 영등 할망(할머니의 제주방언)이 제주에 온다 하여 영등달이라 부른다. 여기에서 영등이란 가정과 마을에 모시는 바람신(風神)으로 지역에 따라 영동, 바람제석, 이월손님 등으로 불리며 마을의 수호와 번영을 돕는 신(神)을 말한다. 특히 이곳 영등은 해녀들의 채취물인 소라, 전복, 미역 등을 증식시키며 풍어와 안전을 지켜주는 내방신(來訪神)으로서 그 의미가 특별하고 신비롭다. 이처럼 바람이 많이 불고 물길이 센 음력 2월에는 영등 할망이 머물고 있는 달이라 하여 매년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영등굿이란 제의로 그 액을 풀고 복을 기원했다. 제주도에서 영등굿이란 참으로 중요한 민속 신앙이자 소중한 우리의 의식이다. 특히 제주도의 칠머리당 영등굿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로 영등굿 가운데에서도 제주 칠머리당에서 열리는 굿으로 유명하다. 또한 2009년 9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우리나라 무속과 연관된 전통예술의 존재와 희귀성을 세계에 알렸다. 이러한 특별한 제주도에 유명한 향토 음식이 있는데 그것은 굿 차례상 중심이 되는 돼지다. 더불어 제주엔 흑돼지. 흑돼지는 지난 시절 똥돼지란 명칭도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엔 인분을 먹이로 키웠다 해서 똥돼지라 불렀다. 현재 제주에서 도새기, 돗, 도야지 등으로 통용되는 흑돼지는 보통의 돼지고기와 달리 육질이 쫄깃하고 고소, 담백한 식감으로 가격이 여느 돼지보다 비싸지만, 인기가 대단하고 찾는 이들도 많다. 하물며 영등굿의 한 거리에도 돼지고기와 술을 먹으며 액을 풀고 재수굿과 놀이를 했으니 참으로 신통방통한 향토 음식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돼지는 아주 오래전(약 2000년 전)부터 돼지를 사육했다고 전해진다. 만주에서 유래된 털이 까맣고 체구가 작은 돼지가 유입되어 우리나라의 풍토에 적응하면서 흑돼지가 되었다고 한다. 제주의 흑돼지는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혹시 앗, 흑돼지는 못 먹는 거였나하는 필자의 노심초사 중 반가운 기사를 찾아 읽고, 순수 토종 제주 흑돼지를 반긴다. <제주축산진흥원이 제주 전역과 부속 섬을 샅샅이 뒤진 끝에 1986년 우도에서 순수 토종 흑돼지 수컷 1마리와 암컷 4마리를 찾아냈다. 수컷엔 김문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줬다. 김문의 자손은 지금 260여 마리로 늘었고, 지난 17일 천연기념물 제550호로 지정되는 가문의 영광까지 누리게 됐다. - 국민일보 / 2015. 3. 20> 천혜의 땅, 제주도에서 나온 흑돼지를 오늘 한번 먹어보자. 행복하고 영험(靈驗)하게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03 18:20

반복되는 전북문화관광재단 심사 잡음, 해법 없나

최근 전북지역 문학계와 연극계 일각에서 전북문화관광재단 지원사업 심사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수십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재단 지원사업과 관련한 잡음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는데, 이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재단의 심사 체계와 방법 등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일 전북문화관광재단 등에 따르면 올해 재단의 지역문화예술 육성지원사업은 △문화예술창작(육성심화창작집 발간문예지 발간) △문화예술기반구축 △청년 예술창작 3개 분야로 나눠 지원한다. 문학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은 창작집 발간이다. 현재 창작집 발간의 경우 작가들이 기발표 작품으로 신청해도 심사를 통과하면 지원이 가능하다. 한 문학계 인사는 기존 작가들이 오래전에 발표한 작품을 내서 지원받는 경우가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창작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라며 적어도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은 작품을 대상으로 창작집 발간 심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은 미발표 작품만을 대상으로 1차 심사를 하고, 미발표기발표 작품과 지원신청서를 토대로 2차 심사를 한다. 서울문화재단 역시 예술창작활동지원(문학 부문)에 있어 창작집 발간은 미발간 원고로 구성된 개인 창작집만을 인정한다. 연극계에서는 재단의 무대공연작품 제작지원사업에 대한 개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심사위원들을 견제, 보완할 제도적인 장치가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는 심사 결과가 전적으로 심사위원의 판단에 달려있다. 도내 한 연극단체 대표는 연극계에선 단체 대표자 회의를 만들어 전북문화관광재단 심사제도 개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일종의 심사 표준을 만들어 제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 일례로 아르코가 공모사업 최초로 도입한 동료그룹 심의제도를 들었다. 아르코가 다원예술 활동지원사업에 도입한 동료그룹 심의제도는 신청자 전원이 1차 예비심사에 참여한다. 신청자가 심사위원이 돼 동료그룹을 평가하는 것이다. 특히 1차 예비심사는 프로젝트의 기획 의도와 활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신청자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경력, 인적사항 등)를 제외한 블라인드 심의제도로 진행한다. 이후 전문가들이 2차 본심사를 한다. 도내 문화예술계 관계자는 재단 지원금과 관련한 심사 불공정성 논란은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라며 지원금 심사의 특성상 모두를 만족시키는 해법을 찾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부족한 점을 메우려는 시도는 계속 진행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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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민주
  • 2021.06.03 18:19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상) 익산 황등제, 벽골제보다 600~700년 앞서 축조

물은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고대 농경사회에서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생산 활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이다. 자연계에서 인간에게 주는 물은 때로는 넘쳐나 커다란 수해를 입히기도 하지만, 이를 잘 이용하면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중국 전설시대 왕조의 군왕들은 물 관리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선사시대 이래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농경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물 관리가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인데, 청동기시대의 원시 수리시설에서 역사시대의 발달된 관계수리시설들이 여러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전라북도는 지형상으로 평야지대가 발달되어 있고, 강수량도 풍수하여 농경생활을 영위하기에 매우 적절한 지역이다. 따라서 타 지역에 비해 농경을 위한 수리시설유적들이 많은 편이며, 대표적으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제언(堤堰)편에 보면 호남지역 3대 제언이라 함은 익산 황등제, 김제 벽골제, 고부 눌제를 일컫고, 이들 3대 제언을 호남과 호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황등제의 제방은 익산시 신용동 도치산에서 황등면의 황등산과 연결되며, 그 길이는 1.3km에 달한다. 현재는 23번 국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도로개량 이전의 원래의 도로구간이 일부분 남아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는 옛 도로 부지에 남아 있던 추정 황등제 제방 부지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를 중심으로 한 397㎡의 면적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제방의 하단 기저부의 폭은 약 22m이며, 잔존높이는 4.9m로 확인되었다. 제방은 물이 침투하기 어려운 점토인 흙덩이를 교차 쌓기 하였다. 그리고 흙덩이 사이사이에 풀과 나뭇잎을 깔았는데 이러한 축조공법은 김제 벽골제 제방에서도 확인된다. 황등제의 초축 시기는 문헌상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전기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된 목재와 풀 등 자연유물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대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4~3세기경으로 측정되었다. 지금까지 서기 330년에 초축으로 알려진 김제 벽골제가 한반도 최고의 수리 제방으로 알려져 왔었는데, 익산 황등제의 제방이 벽골제의 제방보다 무려 600~700여년이나 더 오래전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연대측정결과에 대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국내외의 전문적인 기관 3곳에 의뢰한 결과, 위와 같은 동일한 연대가 추출되어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로서 익산 황등제를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6.01 18:42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명창부 장원에 양혜인 씨

제47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장원에 양혜인 씨(33, 여, 전남 구례)가 뽑혔다. 양 씨는 지난달 31일 국립무형유산원에서 열린 전국대회 본선무대(판소리 명창부)에서 춘향가 가운데 이별 후 임 그리는 대목을 열창해 심사위원과 청중평가단으로부터 97.7점을 받았다. 그는 대통령상과 상금 6000만원을 획득했다. 양 씨는 스승이신 이난초 선생님께 너무 감사드린다며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부모님과 오빠, 하나밖에 없는 삼촌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특히 삼촌은 제가 소리를 할 수 있게 묵묵히 뒷바라지해주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양 씨는 앞으로 올곧은 소리꾼의 길을 남고 싶고 양혜인 하면 소리를 정말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며 첫 상을 받은 뒤 다시 성장하는 시간이고 첫 걸음이기 때문이라고 남겼다. 이날 본선에서는 각 부문별 장원도 배출됐다. 가야금 병창은 지현아(35, 여), 기악 송누리영(25), 민요 이덕용(34, 여), 농악 세한대학교 전통연희학과(고은빛 외 51명), 무용 명인 부문 김호은(47, 여), 시조부 김화자(70, 여), 판소리 일반부 전민권(20), 무용일반부는 이우영(25) 등이 이름을 올렸다. 앞서 올해 치러진 예선에서는 판소리 명창부 16명, 농악부 3팀 136명, 무용 일반부 20명, 무용 명인부 19명, 민요 일반부 14명, 가야금병창 일반부 10명, 판소리 일반부 10명, 판소리 신인부 23명, 기악부 46명, 시조 일반부 32명, 고법 신인부 15명, 무용 신인부 13명, 민요 신인부 20명 등 모두 241팀 374명이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송재영 조직위원장은 코로나 정국에서 비대면, 무관중으로 치르다보니 어려움이 많았다면서도 출전자들에게 희망과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출전자 모두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실력이 출중했다며주변에 심사하시는 분들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사습놀이 전국대회는 전주시와 (사)전주대사습놀이 보존회가 주최하고, 전주대사습놀이 조직위원회, (주)문화방송 전주 MBC가 주관한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6.01 10:03

전주시, 동학농민혁명 기념 다채로운 행사 마련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총본부인 대도소가 설치됐던 전라감영 등에서 동학농민군의 전주입성(5월 31일)과 전주화약(6월 11일)을 기념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전주시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민)는 지난 31일부터 오는 11일까지를 2021 동학농민혁명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지난 31일 전라감영 선화당에서 동학농민군 전주입성 127주년 기념식과 문화공연을 개최했다. 이날 열린 기념식과 문화공연에서는 진창윤이기홍 화가의 동학 초상화 퍼포먼스와 폐정개혁안 낭독, 선반사물놀이, 노래(곡 강, 영웅) 등으로 진행됐으며,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됐다. 기념주간 행사로는 △동학농민혁명 전주지역 유적지 탐방 △동학농민혁명 127주년 기념 전시회 △동학농민혁명 시민체험전 등이 마련됐다. 전주지역 유적지 탐방의 경우 오는 5일 오전 11시 유튜브를 통해 20분 분량의 영상으로 공개된다. 2명의 작가들은 들꽃의 향기 따라, 역사의 숨결 따라를 주제로 완산칠봉 전주입성기념비에서 출발해 전주동학농민혁명 녹두관과 초록바위, 전라감영, 풍남문, 경기전 등의 코스를 탐방하며 전주지역 농민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된다. 또한 오는 5일부터 11일까지 전주한옥마을 내 동학혁명기념관에서는 동학농민혁명 127주년 기념 전시회와 시민체험전이 운영된다. 기념관 마당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의를 담은 다양한 자료들과 사진, 학생들의 회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기념관 내부에서는 5일과 6일 이틀간 동학농민혁명 판화체험전이 진행되며, 추모행사 관련 영상물도 상영된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동학농민혁명은 프랑스, 독일, 남미, 러시아에 뒤지지 않는 세계사적인 혁명이고 동아시아 근대민주주의를 일으킨 위대한 혁명이었다면서 전주가 동학을 세계화하고 예술로 승화해 그 정신과 가치를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문화일반
  • 강정원
  • 2021.05.31 19:10

상상은 현실이 된다…전북일보가 그린 ‘전북의 미래’

이정문 화백의 만화 서기 2000년대 생활의 이모저모를 기억하시나요? 이 화백이 1965년에 35년 후 미래를 상상하며 그린 만화에는 태양열을 이용한 주택, 전기로 달리는 자동차, 영상통화 기능이 있는 휴대전화, 인간 대신 청소하는 로봇, 집에서 치료받고 공부하는 원격 진료학습 등 지금은 대부분 현실이 된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이 그림은 황당무계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상은 현실이 됐습니다. 상상에 불과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끊임없는 도전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창간 71주년을 맞은 전북일보가 전북의 미래 모습이 담긴 그림을 싣습니다. 정윤성 화백이 만화로 표현한 전북의 미래 모습입니다. 만화 속 기회의 땅 새만금에는 국내외 기업들의 투자가 봇물 터지고, 젊은 세대는 보육교육 걱정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노년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대형 사회간접자본(SOC)의 부재와 전국 최저치인 각종 경제 지표, 젊은 세대의 지역 이탈.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낙후와 소외만을 이야기해왔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 모두에겐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신문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시대를 이끄는 길잡이입니다. 이제는 그림 속 상상이 현실이 되도록 전북일보가 앞장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겠습니다.

  • 문화일반
  • 문민주
  • 2021.05.3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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