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사 100인 열전] 세종의 장인 심온 사건으로 희생된 박습
박습(朴習, 1367~1418)은 태종 15년(1415) 3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그 해 11월경 이임하였다. 그는 전라감사 재임시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였으며, 세종이 즉위하던 해에 형조판서에 올라 세종의 국구 심온 사건에 연루되어 상왕 태종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박습은 태종과 같은 해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던 동방급제자요 태종대 원종공신이었다. 박습은 함양 박씨로 아버지는 이부 상서 박덕상(朴德祥)이고, 할아버지는 호부 상서 박원렴이며, 증조부는 병부 상서 박인계이다. 박습의 아들 박의손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아버지 박습이 처형된 후 죽임을 당했다. 박의손의 4대손 박대립(朴大立)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좌찬성을 지냈다.
박습은 1383년(고려 우왕 9) 과거시험에 동진사(同進士) 19위로 급제하였다. 이때 그와 같이 합격한 동방급제자들이 태종 이방원,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 세자 방석의 장인 심효생 등이다. 김한로가 을과 1등 장원, 심효생이 을과 2등 방안(榜眼, 차석), 이방원은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다. 당시에는 갑과가 없어서 을과 1등이 장원이다. 동진사는 갑과, 을과, 병과로 나누면 병과에 해당한다.
동방급제한 이들의 운명은 새왕조 개창후 정치적 혼돈기에 기구하게 얽혔다. 심효생은 전주출신으로 개국공신이 되어 세자 방석의 장인이 되었는데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이방원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양녕대군은 태종에 의해 세자에서 폐위되고, 그 장인 김한로는 나주로 유배되었다. 박습은 태종이 양위후 세종의 장인 심온을 제거하면서 희생되었다. 박습은 태종과 나이도 같았고, 태종을 왕위에 올린 원종공신이었다. 박습은 좌간의ㆍ우산기 등 대간직을 지내고 국왕의 비서인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후 태종 11년에 강원감사로 나갔다. 태종 12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전라감사에 임용된 것은 태종 15년 2월 19일이며, 전라도 임지에 부임한 것은 3월이다. 이후 8개월정도 전라감사로 재임하다가 그해 11월경에 이임하였다.
전라감사로서 그의 가장 큰 치적은 김제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한 일이다. 『태종실록』, 15년 8월 1일, 전라감사 박습은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는 일과 왜구에 대비해 연해 3읍의 성을 수축할 것을 아뢰었으며, 태종은 벽골제를 우선 수축하라고 명하였다.
박습이 올린 소에, 벽골제 뚝을 쌓은 곳이 길이가 7천 1백 96척이고 넓이가 50척이며, 수문이 네 군데인데, 가운데 세 곳은 모두 돌기둥을 세웠고 뚝 위의 저수한 곳이 거의 일식(一息)이나 되고, 뚝 아래의 묵은 땅이 광활하기가 제(堤)의 3배나 됩니다.라고 하였다.
박습은 행정구역도 개편하여, 능성현 임내(任內)인 철야현을 남평현에 병합하고, 태인현의 치소(治所)를 거산역에 옮겼으며, 장사현의 치소를 무송현으로 옮겼다. 그는 또 전라감사 재임 중에 제주도의 말을 잘 키웠다고 하여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박습은 태종 16년에는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이듬해 경상감사를 지내고 대사헌에 임용되었다. 양녕대군을 폐위하기 직전 태종 18년 5월에 형조판서에 임용되었고, 이해 8월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직후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 병판 임용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태종은 공신과 외척을 제거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새왕조 정치체제의 기틀을 정립하였다. 태종의 외척제거는 그의 재위 4년에 이르러, 이전에 사병혁파에 따르지 않았던 왕실의 겹사돈 이거이ㆍ이저 부자를 제거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거이의 아들은 태조의 큰딸 경신공주와 혼인하였고, 다른 아들 이백강은 태종의 큰 딸 정순공주와 혼인하였다.
태종은 민씨 처남 넷을 또 모두 처단하였다. 태종 6년, 태종이 양위파동을 일으켰을 때 이를 적극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여 민무구ㆍ민무질이 유배되었다가 태종 10년에 자진의 명을 받고 죽었으며, 민무휼ㆍ민무회는 불충한 말을 했다고 하여 태종 15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자진의 명을 받고 죽었다. 태종비 원경왕후 여흥민씨 민제의 딸이고, 민제는 태종과 하륜을 연결시킨 인물이다. 태종 8년 민제가 죽은 후 그 아들들도 운명을 달리했다.
태종의 외척제거는 민씨처남들을 죽이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태종 18년 세자를 충녕으로 바꾸고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으로서 세종의 장인 심온을 처단하였다. 당시 심온은 왕의 국구에다가 벼슬이 영의정이었다. 그가 중국 사신으로 떠날 때 그를 마중하느라 한양이 텅텅 비었다고 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병조참판 강상인에게서 시작되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하였지만 군사권은 내주지 않았다. 태종은 군사권을 가지고 22살의 세종에게 정치적 경험을 쌓게 하였다. 왕은 세종이지만 군사는 태종에게 보고해야 했는데, 강상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이 군사권이 없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체제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태종은 결국 이를 문제삼아 병조참판 강상인만이 아니라 병조판서 박습을 처형하였다.
강상인과 박습은 태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태종이 강상인에게, 너는 나를 30년이나 따라 다녔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태종은 외척 제거를 위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이들은 죽어야 할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강상인은 거열형으로 처형되면서,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죽이냐고 울부짖었다.
태종은 강상인과 박습을 죽이고 중국 사신으로 갔다 오는 심온을 이 사건과 연루시켜 바로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강상인은 이미 죽어 대질할 수도 없었고, 심온은 이를 부인하였다. 유정현이 공의 지위와 권세로 보아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냐고 했고 이에 심온은 승복하였다.
태종으로서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심온을 제거해야 했고, 그 발판으로 강상인과 박습을 먼저 희생시켰다. 태종은 냉혈적이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도 있다. 박습의 자손들은 세조 때에 벼슬에 나오는 것이 허용되었다. 심온의 아들 심회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