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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우리가 알아야 할 색채 ⑧

몇 주 동안 색채를 말했으나 색채학(學)이나 론(論)에 관해서는 이제 막 발을 들여 밀었을 뿐이라고 보면 적합할 것이다. 생활에 필요한 색채를 생각나는 대로 순서 없이 말했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 거의 다 보행보다는 자동차의 주행에 의존한다. 그야말로 마이 카 시대에 살고 있다. 겨울 얼음판을 걸을 때 힘을 주어 걷던 기억마저도 가물거린다. 지금은 차를 고를 때 대부분 자신의 취향이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색상을 선택할 것이다. 70년대에는 자가용은 거의 검은색이고 택시는 노랑이나 초록이 많아서 미국영화에 나오는 다양한 색상의 자동차를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2018년의 보고서를 살펴보니 전 세계 자동차 색상 선호도가 흰색 41%, 검정 16%, 회색 계열 13%, 실버 9% 등이 전체 차량의 80%로 나왔다. 나머지 20% 안에 빨강을 비롯한 다양한 색상이 있을 것이다. 미국은 무채색의 색상이 75%를 차지하는 반면 중국만은 의외로 빨강, 파랑, 노랑, 브라운, 골드의 순서로 발표되었다. 이는 국민성이나 개성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사례이다. 그러나 차량 색상의 안전도는 또 다르다. 자동차의 색상이 사고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파랑은 같은 거리에서도 7m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파란 차는 실제보다 더 멀리 있다고 인식하게끔 하는 착시 효과로 사고율이 제일 높지만, 노란 차는 빛의 굴절률로 더 가까이 있다는 인식이 되어 학교 버스나 어린이집, 학원 차량 등은 노란색으로 채택하는 것이 전 세계의 추세이다. 한편 붉은색 차량은 파랑과 반대의 효과로 낮에는 사고율이 적지만 밤에는 짙은 검정으로 착시 효과가 있어 야간 사고율은 더 높다. 차량의 온도는 실제 36℃의 상황에서 흰색 차의 표면 온도는 54.4℃, 파랑은 71℃, 빨강은 73.8℃, 어두운 초록색은 79.4℃, 검은색은 83.3℃의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니 더위에 약한 사람이나 장거리를 가야 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잘 관리한다는 조건으로 흰색 차량도 추천할 만하다. 흰색은 시인성은 높지만 그만큼 먼지가 앉았을 때 이마저도 눈에 너무 잘 보이기 때문이다. (두 달을 색채 타령이다. 색채는 좀 쉬어야겠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3.22 18:08

민관 위탁, 민간 공연기관 여전히 코로나 19로 신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국내 접종이 지난달부터 시작됐지만 지역 공연기관에는 여전히 찬바람이 불고 있다. 연일 코로나 19 신규 확진자수가 400명대를 유지하면서 민간 예술단체나 개별 예술인들이 공연을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연장 대관료가 주 수입원인 기관들은 예산 문제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소리문화전당)은 올 상반기 공연기획사업을 사실상 접은 상황이다. 자체수익 30~40%로 사업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 구조라서 지출을 줄이고 있다는 게 소리문화전당의 설명이다. 이는 대관수입이 운영 예산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상황에 기인한다. 여기에 민간 예술단체, 개별 예술인들도 대관을 주저하고 있다. 소리문화전당 관계자는 코로나 19 확진 상황도 언제 나아질지 모르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관객 수도 제한되다 보니 자체적으로 취소하는 경우가 많다며 백신 접종이 확산돼도 확진자수가 줄어들 것 같지 않아 고민이 많다고 토로했다. 다만 운영은 민간에 위탁해서 하지만, 전북도 산하기관이다보니 보조금은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소리문화전당 관계자는 다른 기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행스럽긴 하다며 자치단체 보조금마저 없으면 운영상의 어려움이 더 커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진문화공간은 코로나 19 확산 이전과 이후를 비교했을 때, 기획대관 공연수가 4~5배 가량 줄었다. 우진문화공간에 따르면 지난 2019년 1분기(1월~3월) 공연 횟수는 50회였다. 그러나 2020년과 2021년에는 각 11회, 15회에 그쳤다. 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 박영준 제작감독은 2020년 1분기 같은 경우 코로나 19 확진자가 늘어남에 따라 대관 예약이 대거 취소됐다며 코로나 19확산 이후 공연 횟수가 크게 줄다보니 운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경영난이 회복이 안되고 있다고 부연했다. 다만 전주시로부터 보조금은 받고 있는 상황이다. 박 감독은 전주시의 민간 보조금 지원사업인 우리소리 우리가락 사업을 하고 있어 보조금을 조금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는 민간공연관들은 막막함을 호소하고 있다. 전북대학교 삼성문화회관의 경우 대관료와 임대료 수입으로만 운영하고 있다. 삼성문화회관 관계자는 보조금 없이 자체예산만 가지고 운영하다보니 어려움이 크다며 시설보수 등도 필요한 상황이지만 코로나 19이후 대관이 줄어들다보니 원활하게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문화체육관광부나 전주시에서 현황 파악을 하기 위한 요청은 들어온다면서도 다만 지원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고 부연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3.22 18:02

[전라감사 100인 열전] 세종의 장인 심온 사건으로 희생된 박습

박습(朴習, 1367~1418)은 태종 15년(1415) 3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그 해 11월경 이임하였다. 그는 전라감사 재임시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였으며, 세종이 즉위하던 해에 형조판서에 올라 세종의 국구 심온 사건에 연루되어 상왕 태종에 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박습은 태종과 같은 해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던 동방급제자요 태종대 원종공신이었다. 박습은 함양 박씨로 아버지는 이부 상서 박덕상(朴德祥)이고, 할아버지는 호부 상서 박원렴이며, 증조부는 병부 상서 박인계이다. 박습의 아들 박의손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아버지 박습이 처형된 후 죽임을 당했다. 박의손의 4대손 박대립(朴大立)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좌찬성을 지냈다. 박습은 1383년(고려 우왕 9) 과거시험에 동진사(同進士) 19위로 급제하였다. 이때 그와 같이 합격한 동방급제자들이 태종 이방원,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 세자 방석의 장인 심효생 등이다. 김한로가 을과 1등 장원, 심효생이 을과 2등 방안(榜眼, 차석), 이방원은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다. 당시에는 갑과가 없어서 을과 1등이 장원이다. 동진사는 갑과, 을과, 병과로 나누면 병과에 해당한다. 동방급제한 이들의 운명은 새왕조 개창후 정치적 혼돈기에 기구하게 얽혔다. 심효생은 전주출신으로 개국공신이 되어 세자 방석의 장인이 되었는데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이방원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양녕대군은 태종에 의해 세자에서 폐위되고, 그 장인 김한로는 나주로 유배되었다. 박습은 태종이 양위후 세종의 장인 심온을 제거하면서 희생되었다. 박습은 태종과 나이도 같았고, 태종을 왕위에 올린 원종공신이었다. 박습은 좌간의ㆍ우산기 등 대간직을 지내고 국왕의 비서인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후 태종 11년에 강원감사로 나갔다. 태종 12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전라감사에 임용된 것은 태종 15년 2월 19일이며, 전라도 임지에 부임한 것은 3월이다. 이후 8개월정도 전라감사로 재임하다가 그해 11월경에 이임하였다. 전라감사로서 그의 가장 큰 치적은 김제 벽골제(碧骨堤)를 수축한 일이다. 『태종실록』, 15년 8월 1일, 전라감사 박습은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는 일과 왜구에 대비해 연해 3읍의 성을 수축할 것을 아뢰었으며, 태종은 벽골제를 우선 수축하라고 명하였다. 박습이 올린 소에, 벽골제 뚝을 쌓은 곳이 길이가 7천 1백 96척이고 넓이가 50척이며, 수문이 네 군데인데, 가운데 세 곳은 모두 돌기둥을 세웠고 뚝 위의 저수한 곳이 거의 일식(一息)이나 되고, 뚝 아래의 묵은 땅이 광활하기가 제(堤)의 3배나 됩니다.라고 하였다. 박습은 행정구역도 개편하여, 능성현 임내(任內)인 철야현을 남평현에 병합하고, 태인현의 치소(治所)를 거산역에 옮겼으며, 장사현의 치소를 무송현으로 옮겼다. 그는 또 전라감사 재임 중에 제주도의 말을 잘 키웠다고 하여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박습은 태종 16년에는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이듬해 경상감사를 지내고 대사헌에 임용되었다. 양녕대군을 폐위하기 직전 태종 18년 5월에 형조판서에 임용되었고, 이해 8월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직후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 병판 임용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태종은 공신과 외척을 제거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새왕조 정치체제의 기틀을 정립하였다. 태종의 외척제거는 그의 재위 4년에 이르러, 이전에 사병혁파에 따르지 않았던 왕실의 겹사돈 이거이ㆍ이저 부자를 제거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거이의 아들은 태조의 큰딸 경신공주와 혼인하였고, 다른 아들 이백강은 태종의 큰 딸 정순공주와 혼인하였다. 태종은 민씨 처남 넷을 또 모두 처단하였다. 태종 6년, 태종이 양위파동을 일으켰을 때 이를 적극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여 민무구ㆍ민무질이 유배되었다가 태종 10년에 자진의 명을 받고 죽었으며, 민무휼ㆍ민무회는 불충한 말을 했다고 하여 태종 15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자진의 명을 받고 죽었다. 태종비 원경왕후 여흥민씨 민제의 딸이고, 민제는 태종과 하륜을 연결시킨 인물이다. 태종 8년 민제가 죽은 후 그 아들들도 운명을 달리했다. 태종의 외척제거는 민씨처남들을 죽이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태종 18년 세자를 충녕으로 바꾸고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으로서 세종의 장인 심온을 처단하였다. 당시 심온은 왕의 국구에다가 벼슬이 영의정이었다. 그가 중국 사신으로 떠날 때 그를 마중하느라 한양이 텅텅 비었다고 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병조참판 강상인에게서 시작되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하였지만 군사권은 내주지 않았다. 태종은 군사권을 가지고 22살의 세종에게 정치적 경험을 쌓게 하였다. 왕은 세종이지만 군사는 태종에게 보고해야 했는데, 강상인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왕이 군사권이 없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체제로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태종은 결국 이를 문제삼아 병조참판 강상인만이 아니라 병조판서 박습을 처형하였다. 강상인과 박습은 태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태종이 강상인에게, 너는 나를 30년이나 따라 다녔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태종은 외척 제거를 위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이들은 죽어야 할 죄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강상인은 거열형으로 처형되면서,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죽이냐고 울부짖었다. 태종은 강상인과 박습을 죽이고 중국 사신으로 갔다 오는 심온을 이 사건과 연루시켜 바로 잡아들여 처형하였다. 강상인은 이미 죽어 대질할 수도 없었고, 심온은 이를 부인하였다. 유정현이 공의 지위와 권세로 보아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냐고 했고 이에 심온은 승복하였다. 태종으로서는 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심온을 제거해야 했고, 그 발판으로 강상인과 박습을 먼저 희생시켰다. 태종은 냉혈적이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도 있다. 박습의 자손들은 세조 때에 벼슬에 나오는 것이 허용되었다. 심온의 아들 심회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끝>

  • 문화일반
  • 기고
  • 2021.03.22 17:56

문화재아웃리치연구소 ‘바람따라 완주, 물 따라 문화유산’ 진행

(재)문화재아웃리치연구소 문화재활용사업단이 지난 19일부터 바람따라 완주, 물 따라 문화유산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완주군 중학생에게 지역문화유산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현장에서 교육하는 답사 프로그램으로 1년 동안 진행된다. 문화재청과 전북도, 완주군이 지원한다. 답사에서 소개하는 유적은 위봉산성과 완주 구 삼례 양곡창고, 화암사 극락전 등이다. 위봉산성은 태조 이성계 어진을 전란에서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삼례 양곡창고는 일제 강점기 수탈의 현장을 보여준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하앙양식(겹 서까래) 목조건축물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완주군이 가진 문화 DNA를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며 이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를 배우는 게 프로그램의 목적이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은 두 가지로 나눠서 진행된다 우선 꽃비 흘러 만경강을 이루다 는 문화재를 답사한 뒤, 이해하는 프로그램이다. 다른 하나는 신이 준 선물! 흙으로!, 나무로!로 학교 교실에서 단청수리기술자, 문화재보존전문가, 도시재생전략가 등 다양한 진로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완주 소양중학교의 지난 19일 답사를 시작으로 프로그램을 열었다며중학생들이 문화재를 알아가며 완주인으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또 진로를 모색해보는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여러명이 참가하는 답사프로그램인 만큼 코로나 방역지침을 철저하게 준수하며 진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3.21 18:12

춤 신예의 데뷔 2021 신인춤판

무용계 신진작가를 양성하기 위한 우진문화재단의 춤 신예의 데뷔 2021-신인춤판이 윤시내, 정동웅, 정민지 3인의 안무가와 함께 2020년 새 판을 연다. 이들은 오는 20일 오후 7시 전주 우진문화공간 예술극장에서 데뷔 공연을 올린다. 윤시내 씨는 이번 무대에서 창세계 2:16를 준비했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가진 신의 여러 가지 의미를 작품에 녹여낼 계획이다. 의미는 편안한 안식을 느끼는 신과 고통과 불안을 주는 신 등 다양하다. 게스트로 손무경, 신지안이 함께 한다. 정종웅 씨는 살면서 인간이 축적하는 경험을 춤으로 승화한다. 여행이라는 작품명처럼 꾸준하게 몸을 이동하면서 남기는 시간 속의 흔적들을 선보일 예정이며, 최정홍, 최태현씨가 게스트로 참여한다. 정민지 씨는 인생은 바다와 같다는 의미를 담은 공연 Ocean을 선보인다. 박은지, 이보람, 이수지, 김다희, 강동혁이 함께 무대에 오를 예정이며, 이들과 함께 바다의 숨과, 길, 말을 몸짓으로 묘사한다. 우진문화재단 관계자는 무용계에 첫발을 내딛는 신진무용가들의 데뷔공연을 통해 장르를 넘나드는 가장 젊은 춤의 유형을 보여줄 것이라며 우진문화재단은 신진작가 양성을 위한 신인춤판지원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3.18 18:08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학예실장의 전통문화 바라보기] 대한민국의 자존심

임방울 명창. /사진=한국전통연희사전 우리 한민족은 조상 대대로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해 온 민족이다. 그러므로 기쁜 일이 생기거나 슬픈 일이 닥쳤을 때도 노래를 부르며 함께 그 뜻과 의지를 다졌다.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란 프로그램은 벌써 방송 30주년을 지나 32년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 방송에서 흘러나온 전통 구전민요는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았고 같이 콧소리 한번 흥얼거리며 흉내 내 보았을 것이다. 이렇듯 전국 어느 지역이든 선조들이 부르던 구전민요는 풍성했고 우리 민족과 함께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고 시간은 빠르게 지났고 환경도 많이 변했다. 문화 환경도 시대에 변화하다 보니 부르는 노래의 개념도 변해갔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지나 우리는 빠른 서양 문화를 받아들였고 익숙해져만 갔다. 음악적인 실 예로 이제 우리가 아는 가곡은 이미 세계적인 성악가 파바로티가 부른 슈베르트의 보리수와 같은 서양 가곡으로 인지되고 있으며, 그리운 금강산과 같은 새로운 서양식 창작 가곡을 만들고 한국의 가곡이라 부르고 있다. 물론 서양음악 형식의 가곡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이 태평성대를 꿈꾸며 부르던 가곡 태평가는 서양음악의 가곡 형식이 들어오면서 점점 잊혀만 갔고, 진정 우리 선조들이 부르던 <가곡>은 오래된 우리 전통의 가곡이 아닌 다른 의미의 서양음악 명사로 되어 버렸다. 현시대에 파바로티를 물으면 모두가 아. 그 분 알아요!라고 대답을 하며 그의 명성과 더불어 음악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판소리 명창 임방울에 대하여 논하면 그리 많지 않은 분들만이 호응하며 판소리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서양음악에 대한 전통음악의 열등의식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이미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그들의 문화 말살 정책에 닫힌 전통음악의 그늘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일제강점기 수십 년간 전통을 빼앗기며 어려운 시기를 지내왔다. 이제 우리는 전통음악을 국민들에게 더욱더 깊게 되찾아 안겨드릴 시대에 도래했다. 한국의 전통문화가 세계를 향하고 있다. K-pop 스타인 방탄소년단이 idol이란 곡으로 세계를 누비며 전통예술인 오고무, 봉산탈춤 등을 접목해 사랑을 받았다. 또한, 우리의 전통예술가들도 세계를 향해 다양한 시도와 경험으로 변화, 도전하고 있다. 이제 다시금 우리 전통의 자존심을 드높이자.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얼마나 민족적 자존심이 강한지 미국에서 오랜 생활을 한 드보르작보다 순수한 체코 토종인 스메타나를 훨씬 더 훌륭한 음악가로 평가하고 있다. 우리와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파바로티 같은 유명한 테너는 유럽인들의 자존심이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은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명창 임방울이 있으며 그의 판소리 눈 대목 쑥대머리가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3.18 18:08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의 본향 만경강유역

전북의 서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만경강유역은 마한의 본향이라 일컬을 만큼 마한의 성립과 성장에 관련된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익산 미륵산, 남쪽으로는 김제 모악산을 경계로 하고, 동쪽으로는 노령산맥이 막아주고 있어서 분지와 같은 지형이지만, 서쪽으로는 지평선이 보일만큼 널따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평야로 형성된 분지와 같은 지형의 중앙으로 만경강이 흐르면서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기에 농경을 영위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천혜의 지역이다. 만경강의 북쪽 익산지역은 일찍이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마한의 고도로 인식되어 오면서도 금강유역의 백제문화권역에 포함되어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가 증가함에 따라 익산지역의 대부분 유적들은 금강이 아니라 만경강 수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유역과는 다른 문화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만경강문화권역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만경강 남쪽의 전주완주김제 지역에서 마한관련 유적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전주 혁신도시 건설과정에서 완주 갈동유적이 발견된 이후 마한 성립을 뒷받침하는 토광묘 유적들이 130여기 이상 봇물 터지듯 잇달아 확인되었다. 완주 갈동유적은 2003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전주 혁신도시를 관통하는 서부우회도로 개설과정에서 17기의 토광묘가 확인되었다. 이후 갈동과 인접한 덕동유적에서는 5기의 토광묘에서 조문경과 세문경, 동과 등이 출토되었고, 원장동유적에서는 5기의 토광묘 가운데 1호분에서 세형동검 5점과 세문경 2점, 그리고 동부와 검파두식 등이 확인되어 이 지역 단일 유구 가운데 가장 많은 청동유물이 출토되어 주목되고 있다. 2011년 국내 최대 규모의 밀집도를 보이는 신풍유적에서는 81기의 토광묘가 확인되었고 각각의 분묘에서 점토대토기, 흑도장경호, 세형동검, 동경, 철기류가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혁신도시의 유적들보다 위계가 낮은 것으로 추정되는 소규모의 토광묘들이 중인동에서 9기, 중화산동에서 15기가 확인되었다. 한편 군집을 이루고 축조된 토광묘 유적과 동일한 공간 내에서 발견되고 있는 구상유구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와 제의와 관련되는 두형토기가 파쇄되어 공반되고 있다. 두형토기가 토광묘에서는 부장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장송의례와 다른 형태의 제의 의례가 구상유구를 중심으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후대의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마한사회의 제의의례를 유추할 수 있다. 구상유구에서 보이는 제의 행위는 변화 발전되어 왔을 것인데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과 같은 존재는 농경사회에서 파종기와 수확기에 귀신에 제사를 주관하는 자와는 격이 매우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곧 천군은 당시 사회통합의 리더로서 마한 사회의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만경강유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새롭게 전개된 토광묘라는 묘제와 제의관련 유구를 통해 볼 때, 이 지역은 B.C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마한의 성립지로서 가히 마한의 본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문화일반
  • 기고
  • 2021.03.16 18:29

전북 공석 문화기관장 자리 무형유산원 ‘곧’, 익산 ‘미정’

지난 1월 공석이 된 국립무형원장 자리가 곧 채워질 예정이다. 반면 같은 기간 자리가 빈 국립 익산박물관장 자리는 여전히 미정이다. 문화재청은 무형유산원장 선임절차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고 15일 밝혔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청내 보통심사위원회는 최근 후보군 9명(3급 이상 고위공무원) 가운데 일부 후보를 뽑았다. 이후 후보 명단을 인사혁신처 고위공무원 임용심사위원회에 넘겼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마지막 단계인 인사혁신처 심사절차만 남았다며 3월 29일이 있는 주에 선임된 관장이 최종 발령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익산박물관장 인선시점은 여전히 미정이다. 특정 후보군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올 2분기나 3분기 안에 선임될 수 있다는 게 상위 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의 의견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 관계자는 익산박물관장 인선은 중앙박물관 내부 인사이동과 같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며 이 때문에 아직 인사안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수장 공백이 장기화 될 경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를 두고는 당연히 관장 공석이 지연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다행히 연고지 업무 경력이 긴 최흥선 학예실장이 관장 직무대행을 맡아 현재까지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고 밝혔다.

  • 문화일반
  • 김세희
  • 2021.03.15 18:15

[이승우의 미술 이야기] 우리가 알아야 할 색채 ⑦

괴테 샘물이 떨어지는 소리/ 아름다운 무늬의 날아가는 잠자리/ 나는 이미 긴 시간 지켜보고 있었다/ 짙어지기도 하고 옅은 색이 되기도 하고/ 카멜레온처럼/ 또는 빨갛게 또는 파랗게/ 또는 파랗게 또는 초록으로/ 아! 가까이 다가가 저 색을 보고 싶구나/ 휘익 날아서 떠오르고 조금도 쉬지 않아/ 그러나 조용히 잠자리가 버드나무에 앉는다/ 자, 잡았다 잡았다/ 그런데 응달에서 잘 보면 음기의 어두운 파랑의 한색/ 온갖 기쁨을 분석하는 너도 같은 생각을 맛보겠지.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명성을 얻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기쁨>이란 시다. 번역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시는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보면 잠자리의 몸이 변하여 환상적인 여러 가지의 색으로 보이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보인다. 나중에 괴테는 이러한 자연 관찰과 당시 예술의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미술품의 색채 조형에도 몰두하였다. 이를 토대로 20년에 걸쳐 「색채론」을 3부작으로 펴냈다. 1부는 색의 정의 및 관찰한 내용에 기인한 색채론을, 2부에서는 토론을 3부에서는 색의 역사를 다루었다. 괴테의 색채 관이 기술되어있는 것은 1부이다. 1부는 다시 6편으로 나뉘며 생리적 색채, 물리적 색채 등으로 시작하여 색채의 감각과 정신적 작용으로 끝난다. 1부 1편 1장 생리적 색채에서 그는 눈에 대한 빛과 어두움의 관계나 2장 눈에 대한 검정과 흰색의 상(像)의 관계를 말했는데 색채는 빛과 어둠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말한 색은 빛과 어둠의 혼합에서 만들어진다와 같은 맥락이다. 3편은 색채 심리를 다루었는데 색채를 객관적인 각도거나 물리학적으로 다루지 않고 우리에게 색채가 보이는 방법에 대하여 통찰하고 있어 지금으로 말하면 지각심리학이나 색채심리학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괴테는 스스로 색상환을 만들고 노랑과 파랑을 주축으로 하는 색채론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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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5 17:56

[전라감사 100인 열전]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 유관

유관은 조선건국후 17번째 전라감사로 태종 5년(1405) 7월에 부임하여 이듬해 2월에 이임하였다. 전라감사를 거쳐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세종대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데, 부안 우반동에서 실학을 개창한 반계 유형원이 그의 후예이다. 반계가 우반동으로 낙향한 것은 유관의 사패지가 있었던 것에 인연한다. 전남 영암의 모산유씨 영의정 유상운, 좌의정 유봉휘 부자도 유관의 후예로, 유관이 전라감사를 지내면서 인연을 맺어 그의 장자가 모산에 뿌리를 내렸다. 유관(柳寬, 1346~1433)의 본관은 문화, 초명은 관(觀), 자는 몽사(夢思)ㆍ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이다. 고려 명종 때 정당문학을 지낸 유공권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삼사판관 유안택이다. 이름자를 觀으로 쓰다가 세종 8년(1426) 그 아들 유계문이 충청감사로 임용되자 관찰사의 관자가 유관의 이름 관자와 같다고 하여 寬으로 고치었다. 1371년(고려 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건국후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대사성,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태종 원년 사헌부 대사헌에 임용되어, 승려 수를 줄이고 5교 양종을 폐할 것을 상소하는 등 불교를 적극 배척하였다. 태종 2년 계림부윤으로 나갔다가 무고를 당해 그의 본향 황해도 문화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태종 5년(1405) 전라도관찰사에 임용되었으며, 태종 6년 예문관 대제학, 태종 7년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9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를 겸해 『태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세종 6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고려사』를 개수하여 올렸다. 세종 8년 1426년, 81세에 우의정으로 치사하여 88세에 졸하였다. 유관은 태종 5년(1405) 7월 8일에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어 7월 26일에 전라도 임지로 부임하였다. 후임 전라감사 박은이 이듬해 2월 29일에 부임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 유관은 이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7개월 정도 전라감사로 재임하였으며, 지방장관으로서 당시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내린 제문에 남쪽 지방에 순무하니 사람들은 (유관을) 자르지 말라는 노래를 불렀도다라고 하였다. 당시 전라도 사람들의 사정이 배우 곤궁하였다. 감사 부임 직전 메뚜기떼가 기승을 부렸고, 태풍이 몰아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대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라, 경상, 충청도의 전답 측량이 이루어져 민폐가 컸다. 유관은 성품이 청렴하고 청빈하여 세종 때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유정승은 청렴하고 검소하여 두어 칸의 초가에서 지내면서도 태평이었다 몸가짐을 필부와 같이하고 사람이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로 짚신을 끌고 나가 보며,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마밭을 돌아다니면서도 전혀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우산으로 지붕에 새는 비를 가렸다는 유명한 일화는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실려 있다. 한달이 넘도록 장마가 졌는데, 삼대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유관이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 하니,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껄껄 웃었다. 서울 낙산 자락에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지은 초가삼간 비우당(庇雨堂)을 복원해 놓았다. 이 자리는 유관이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살았다는 집터이다. 유관은 이수광의 외가 5대조가 된다. 비우당은 겨우 비나 가리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성호 이익은 유관의 청렴을 정승의 손에 작은 우산 하나 들렸으니/ 지붕이 새는 비를 막기에 부족해서라 라고 노래하였다. 반계 유형원은 유관의 후예로 부안 우반동으로 낙향하여 실학의 문을 열었다. 그가 우반동에 자리한 것은 유관의 사패지로 전해지는 그 선조들의 땅이 우반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관에게 맹문ㆍ중문ㆍ계문 세 아들이 있었으며, 맹문과 계문 두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반계는 유계문의 후예이다. 반계의 8대조가 되는 유계문은 문과를 거쳐 충청감사와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반계의 아버지 유흠이 당쟁에 희생되어 이른 나이에 죽자 할아버지 유성민이 부안 우반동으로 내려가 잡목이 무성한 골짜기를 개간해 전답을 일구고 살았다. 우반동 하면 부안김씨를 떠올리지만 그 이전이 이미 유성민이 우반동에 들어가 살았다. 유성민은 부안김씨 김홍원에게 토지 30결을 매매하였는데 그 매매문기에 이 땅을 유관이 개국공신으로 태조로부터 받은 사패지라고 하였다. 반계는 이런 인연으로 우반동으로 내려가 그의 실학사상을 20여년에 걸쳐 집대성하여 반계수록을 편찬하였다. 유상운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고, 유상운의 아들 유봉휘는 경종대 신임사화 때 소론 4대신의 하나로 좌의정을 지냈다. 유봉휘는 숙종 23년 문과에 급제하고도 글이 격식에 맞지 않았는데 유상운의 아들이어서 급제했다고 하여 합격이 취소되었다가 숙종 25년 다시 문과에 응시해 급제하였다. 모산유씨(茅山柳氏)는 유관의 장남 유맹문의 후예들이다. 유맹문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을 지냈다. 그 유맹문의 후예들이 전라도 나주 모산리(현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대대로 세거하여 모산유씨(茅山柳氏)로 불렸다. 모산마을은 유상운과 유봉휘가 부자간에 정승을 지내 부자(父子) 정승마을이라고 한다. 모산유씨들이 이 자리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유관이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이곳 경치에 반하여 아들 유맹문에게 정자를 짓게 한 것에 유래하였다. 유관의 명으로 지었다는 영팔정(詠八亭, 전라남도기념물 105호)이 마을에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유관 신도비와 유상운 신도비가 있다. 영팔정을 중건한 인물이 영의정을 지낸 유상운이다. /이동희(예원예술대학교 교수, 전 전주역사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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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5 17:51

국립민속국악원, 2021년 주요 사업계획 발표

국립민속국악원(원장 왕기석)이 올해 주요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국악원은 우선 작품 제작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국악원의 대표 작품인 <춘향전>, 전국 우수 단체작품을 선보이는 <별별창극>, 그 시절 명인, 명무, 명창의 이야기 <토크옛설(藝設)>, 창극의 전성기를 누빈 전설들의 무대가 펼쳐지는 <명불허전> 등을 선보인다. 일상에서 누리는 공연문화 환경 조성을 위해서는 차와 이야기가 있는 <다담>, 다양한 장르의 전통예술공연인 <목요다락>, 판소리에 대한 인문학적 해설이 들어가는 공연 <담판>도 이뤄진다. 지역 관광활성화를 위해서는 <광한루원 음악회>를 완월정에서 개최한다. 춘향제, 흥부제 등 지역관광을 활용한 대외협력공연과 지역 간 공립 국악단체와의 교류 협력공연, 초청공연, 송년공연 등이 제공된다. 국악의 저변을 확대하는 활동도 벌인다. 지역민들이 1인 1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생활문화 환경을 조성할 예정이다. 해금, 가야금, 고법, 설장구, 한국무용장단 등 5개 강좌가 들어있는 일반인국악강좌<청출어람>을 3월부터 7월까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운영한다. 민속악 연구 기반을 강화하는 프로그램인 <제7회 민속악 포럼>도 개최된다. 왕기석 원장은 국악이 생활 속에서 향유될 수 있도록 다가가고, 더 나아가 국악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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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21.03.11 18:35

[김용호 전북도립국악원 학예실장의 전통문화 바라보기] “소리만 생각해라”

1975년 전주대사습대회 때의 이일주 열창 모습.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2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 이일주는 세습예인 출신으로 이날치 명창의 증손녀이자 이기중 명창의 딸이다. 8세(1943년)무렵 소리에 입문하여 14세부터 아버지에게 춘향가, 심청가의 대목소리와 숙영낭자전 한바탕을 공부했다. 28세 무렵 박초월 명창에게 흥보가를, 34세에 김소희 명창에게 심청가를, 38세엔 오정숙 명창에게 동초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를 배웠다. 이후 우리나라 판소리 등용문인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에 출전하여 1979년 영애의 대상인 대통령상을 받고 명창 반열에 오른다. 그녀가 조선후기 명맥이 끊긴 이후 부활한 전주대사습놀이에 네 번째로 최고의 상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나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실력이 출중하다는 의미로 그녀의 타고난 목구성과 심금을 울리는 소리의 서슬은 익히 만인이 인정한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서 출세하면 대도시로 상경하여 자신의 의지를 펼친다. 혹은 출세를 위해 현재 있는 곳보다 더 큰 도시로 거처를 옮겨 기세를 자랑한다. 국악뿐이겠냐마는 모든 업계 삶의 방식이 대부분 그렇다. 그 당시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명창들은 서울로 상경하여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일주 명창은 아니었다. 그녀는 1979년 전주대사습놀이에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후 한 번도 전주를 떠난 적이 없다. 이일주 명창을 처음 뵌 것은 35년 전인 1986년 진북동 어느 낡은 빌딩 선생님의 생활터이자 연습실인 작은 공간에서였다. 판소리가 좋아 무작정 서울에서 전주로 낙향한 필자는 이일주 명창을 찾았고, 집이자 전수소에서 3년간 함께 생활하며 소리공부를 했다. 선생님은 항상 새벽에 소리공부를 하셨는데 이른 5시가 되면 선생님의 목소리가 통성으로 먼저 울렸고 6시가 되면 제자를 깨워 가르치셨다. 제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작시면 선생님은 호통을 치시며 북채를 드셨다. 매서운 스승님의 소리는 그렇게 어느 전주의 새벽을 함께 깨웠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명창 중 스승 존함에 이일주란 성함이 들어가는 명창은 참으로 많다. 그렇듯 이일주 명창은 전라북도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꿋꿋이 전통예술의 본향을 지켰다. 이일주 명창은 제자에게 항상 하신 말씀이 있다. 노력한 만큼 나온다. 게으르지 마라, 소리만 생각해라 그러한 선생님의 말씀은 35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필자에게 마음 한구석 아쉬움과 미련으로 남았다. 소리를 공부하는 후학들이여, 현시대의 주어진 환경이 어렵고 힘들겠지만 소리만 생각해라라는 이일주 명창의 말씀을 되새겨 다시 한번 가슴속 깊이 각인해 보자. 대중음악인 트로트도 좋지만 그래도 여러분이 배우는 판소리가 이 세상을 웃고 울리는 시절이 더 많았으므로 다시금 그런 판을 우리 함께 만들어 가보자. 대도시의 거창하고 큰 무대는 아니지만, 우리 삶이 녹아난 현장에서 아름다운 소리판을 만들자. 그리고 우리 전라북도 전통예술을 소중히 지키며 소리의 본향임을 자랑스럽게 이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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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11 18:35

소리고장, 전북 트로트계 두각

소리의 본고장 전북에서 태어난 인물들이 트롯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최근 각 방송사에서 제작한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하거나 결승전에 진출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트롯이 대중음악계를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최근 전주 출신 별사랑(본명 윤정인29)은 TV조선이 제작한 미스트롯 2에서 1위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 진출자 7인 가운데 유일한 현역인 그는 나훈아의 공으로 미스트롯2의 엔딩무대를 장식했으며, 심사위원들로부터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있는 멋진 가수라는 호평을 받았다. 최종 결과에선 6위를 차지했다. 부안 출신인 김태연(정읍 동신초 2학년, 10)도 결승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김태연 양은 결승에서 바람길을 불러 심사위원들에게 981점 최고점을 받았으며, 결승전에서는 아버지의 강으로 무대를 위해 태어났다는 극찬을 받았다. 최종은 4위로 마무리했다. 순창 출신인 강문경 씨(36)는 지난해 SBS TV 예능 프로그램 트롯신이 떴다2-라스트 찬스(이하 트롯신2) 프로그램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2014년 아버지의 강으로 성인가요에 입문한 이후로 7년 동안 무명가수였던 강 씨는트롯신 2 프로그램을 통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 강 씨는 최종 우승으로 상금 1억원을 거머쥐었으며, 우승 이후 KBS1 가요무대 등 많은 무대에 얼굴을 선보이고 있다. 익산 출신인 장영우 군(원광중학교, 14)은 지난해 TV조선 미스터트롯 본선 1라운드에서 아깝게 떨어진 후, 시청자들로부터 재 소환됐다. 본선 당시 마스터에게 호평을 받은 장 군은 올 초 미스터트롯 무대를 재현한 다시 보고 싶은 트롯맨 특집 형식의 TV조선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사랑의 콜센타에서 다시 무대에 올랐다. 당시 주병선의 칠갑산으로 국악 트롯을 완벽히 표현하면서 99점을 받았다. 이후 장 군은 익산과 전북의 지역행사에서 섭외 1순위인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의 러브콜도 쇄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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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희
  • 2021.03.11 14:12

[최완규 교수의 '마한이야기'] 마한성립 전야(前夜)의 고고학 증거

인류가 남긴 인위적인 구조물이나 도구들은 당시 문화와 사회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들이다. 그 가운데 무덤유적은 전통성과 지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종족 집단의 출자나 성격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곧 새로운 묘제가 갑자기 출현하는 것은 집단의 이동을 의미하거나 강력한 문화적 영향을 가정할 수 있지만, 대부분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만경강 유역의 익산과 전주완주지역에서 점토대토기와 흑도장경호, 세형동검과 동경, 그리고 철기가 부장된 토광묘가 집단을 이루고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토광묘는 청동기시대의 묘제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철기문화의 유입과 더불어 새로이 축조된 묘제로 이해되고 있다. 이 묘제는 중국의 동북지방이나 한반도 서북지방에서 이주해온 집단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마한 성립의 주체세력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마한 성립의 주체인 토광묘 집단은 만경강 유역에 갑자기 안착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마중물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들의 흔적들이 속속 들어나고 있다. 이러한 선행적 집단에 의해 축조된 묘제는 토광묘를 기본 속성으로 하지만 내부에 목관을 안치하고 이를 돌로서 둘러싼 소위 적석목관묘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부장된 유물에서 보면 점토대토기나 세형동검을 비롯해서 토광묘의 출토유물과 성격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출자가 동일한 집단임을 알 수 있다. 적석목관묘는 한반도 서해안 일대의 경기 충청 전라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되고 있는데, 만경강유역의 토광묘처럼 군집을 이루지 않고 대부분 1기?2기 정도 분포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이 분묘에서는 세형동검이 다수 부장되고, 특히 기원전 4세기경에 해당하는 나팔형동기, 방패형동기, 검파형동기와 더불어 팔주령, 동경, 간두령 등 의기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곧 적석목관묘의 피장자는 종교적 제의를 주관하는 오늘날 사제와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적석목관묘의 분포 의미는 만경강유역에 토광묘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선행적으로 들어온 집단으로서 청동기를 비롯한 문물을 분배해 주고, 제의를 주관함으로서 세력화와 집단화를 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통성이 강한 지석묘와 송국리 묘제 영역에서는 강한 배타성이 작용했을 것으로 세력화를 꾀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적석목관묘를 축조한 피장자는 풍부한 제의적인 청동기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장으로서의 자리매김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기층 송국리문화나 지석묘 사회와는 차별되는 제의 주관자로서 이후 토광묘 축조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올 수 있는 정보나 기회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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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9 19:4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2) 초속(超俗)의 달관, 참선비 근정(槿丁) 조두현 시인

근정(槿丁) 조두현 선생(1925.7.30.~1989.12.28.)은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211번지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4년 전북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삼례중 고교 교사, 1954년 익산 남성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77년 전주대학교 교수, 1978년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선생의 제3 시집 『책장을 넘기다가』의 발문을 쓴 이상비 교수의 글에는 근정(槿丁) 집안의 자녀교육에 관련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선생의 증조부가 황소로 밭을 갈고 있는데, 한 장사꾼이 책을 짊어지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증조부가 그를 불러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 칠서(七書), 즉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 대답하니 즉석에서 자신의 황소와 책을 바꿔왔다는 이야기다. 황소 한 마리면 당시로는 매우 큰돈이었기에 이를 본 이웃들이 모두 놀랐다는 것이다. 이렇듯 황금보다 학문을 중시했던 집안의 전통은 자연스럽게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근정(槿丁)의 구남매(九男妹)가 모두 각 분야에서 훌륭하게 된 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집안 내력 아닌가. 선생은 1958년 『현대문학』에 「애가」 외 세 편의 시와 「한시신역」으로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으며, 1967년 『어느 門 밖에서』를 비롯하여 『증언』, 『책장을 넘기다가』 등 세 권의 시집을 펴냈다. 또한, 근정(槿丁) 선생은 한문학에 조예가 깊어 1971년부터 일지사, 동아출판사, 금성출판사 등에서 중고등학생용 한문 교과서 저자로 활동했으며, 다수의 한문학 연구서와 대학교재 등을 출간하여 한문학과 한문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생은 고달픈 삶 가운데에서도 생명 의지를 지적으로 승화시킨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시 「청명절(淸明節)」은 자연과 인생에 대한 무심한 관조와 달관의 자세를 잘 드러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어제 밤에 비가 부슬거리더니 새벽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노곤하여 달력을 바라보니 모레가 청명(淸明)이 아닌가 창을 열어놓고 뜰을 걷다가 백목련이 봉곳이 방울져 지금 잎이 돋아나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내 머리털이 더욱 희어져 보이는 것은 이 봄의 탓이 아닌가 이 세월의 탓이 아닌가 -청명절(淸明節) 전문 홍석영 교수는 근정(槿丁) 선생을 평생 삶의 도반(道伴)이라고 생각하면서 함께했다. 특히, 남중동 황새골에서 대문을 마주하고 살 만큼 늘 가깝게 살았다. 두 분은 9.28 수복 이후 익산의 남성학교에서 만났는데, 당시 남성학교에는 장순하, 천이두, 이동주, 박항식, 최학규, 김영협 등 훗날 한국문학의 대들보가 된 분들이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풍(南風) 동인회를 조직하여 문학과 인생을 논했고, 어쩌다 논쟁이 치열해지면 근정(槿丁) 선생은 그건 아녀, 아녀.하며 장자풍(莊子風)의 푸근한 인간미를 보였다고 한다. 천이두 교수은 근정(槿丁)의 첫 시집 『어느 門 앞에서』의 발문에서 선생은 재학 중에 연비동인회(燕飛同人會)를 결성하여 좌장이 되었는데, 당시 동기들은 만학(晩學)의 선생에게서 형장(兄丈)다움을 느꼈다고 했다. 항상 따뜻이 보듬고 아우르는 온후한 선생에게는 어느 구석에도 문사연(文士然)하는 모서리가 없었다고 했다. 당시 함께한 국문과 1회 동기들이 박병순, 이기반, 조두현, 진을주, 최승범, 최진성, 김영협 등 모두 거목이었으니 얼마나 든든했을까. 이보영 교수는 그의 제3시집 『책장을 넘기다가』의 발문에서 근정(槿丁)의 시는 아름다운 자연과 사물의 완상과 찬미, 조촐한 선비다운 자적(自適), 초속적(超俗的)인 달관과 범용(凡庸)의 진덕(眞德)에 대한 긍정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내가 한 그루 나무로 서 있을 때 그 나무에서 돋는 이파리는 어떤 빛깔일까 내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때 그 꽃에서 풍기는 향기는 어떤 냄새일까. 내가 한 마리 새로 울음을 울 때 그 새의 부리에서 울리는 소리는 무슨 가락일까. 내가 한 개의 열매로 맺을 때 그 열매의 속에서 타고 있는 불은 무슨 이야기일까 -「열매」시 전문 - 이 시는 2000년 솜리예술회관 뒤뜰에 세워진 선생의 시비에 새겨진 시다. 이 시에는 늘 성찰하면서 청아한 삶은 누리고자 했던 선생의 학수천년(鶴壽千年)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송남 이병기 시인은 근정(槿丁)선생 송수(頌壽) 시문집에서 「걸어 다니는 무궁화」라는 시에서 선생의 삶을 기린 바 있다. 겉으로 하얀 꽃 이파리 / 깊은 마음일수록 속으로 타는 불덩어리 / 이웃을 깨우치고 / 들뜬 선잠을 사랑으로 재우던 자장가를 불러주셨던 분이 선생이라고 했다. 근정(槿丁)의 제자 송하춘 교수는 「우리 조두현 선생님」이라는 글에서 스승을 높이 우러렀으며 김병기 교수도 생아지부(生我之父)에 견줄 만큼 큰 스승의 사랑을 회고하였다. 이렇게 높은 학덕과 훌륭한 인품을 보여준 선생의 참 선비상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그의 고향 비봉공원 무궁화 동산에 빗돌 하나 세워줄 것을 제안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참고 : 근정 조두현 선생 송수 시문집 『학수천년(鶴壽千年)』 외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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