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삼현승무 문정근 명인 "춤은 인연이자 운명…흐름따라 자연에 맡겨야 "
조지훈 시인의 시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승무(僧舞)는 한국 전통춤의 백미다. 번뇌의 범속(凡俗)을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이르려는 불교 예술의 경지를 형상화 한, 인간 내면의 기쁨과 슬픔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이지적(理智的)인 춤이 승무다. 관객을 등지고 북을 향한다거나, 머리에 고깔을 써 얼굴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는 등의 동작은 무용수가 자신의 내면에 보다 집중해 예술 본연의 멋을 추구하고 자아낸다는 점에서 더욱 진솔한 메시지를 전한다.승무는 각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 양태로 발전했다. 전라감영 소재지 전주에서는 농삼현(弄三絃)과 민삼현(民三鉉) 음악에 따른 승무가 발달했고, 이를 전라삼현승무라 한다. 잠시 명맥이 끊겼던 전라삼현승무는 문정근(63) 선생에 의해 복원재현돼 오늘에 이른다.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52호 문정근 명인은 이매방한영숙 선생으로부터 현존하는 2종의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승무를 이수했고, 전라삼현승무의 정자선-정형인-전광옥 선생과 정자선-박금슬 선생 양대 계보까지도 모두 섭렵한 유일한 무용인이다. 그를 지난 29일 전주시 덕진동 연습실에서 만났다. 약 60년 춤 세월의 도구가 돼 준 문 명인의 손목과 무릎에는 커다란 압박붕대가 자랑처럼 감겨있었다.버텨준 몸이 고맙습니다. 그래서 몸 마디마디를 고맙다고 만져줄 때가 있어요. 관절이 사실 많이 상했습니다. 수술은 안 했고, 치료 많이 받고 있습니다.-춤과의 첫 인연이 궁금합니다.서너 살 애기 때 할머니가 절 업고 나가면 그 때부터 춤을 추기를 좋아했대요. 초등학교 1학년 학예회 때, 당시 완주 용덕 참 시골학교였는데도 남자인 저를 선생님이 무용을 시키셨어요. 생각해보면 그 때부터 계속 인연입니다. 선이 예쁘거나 하는 게 보이셨는지, 공연히 무용을 시켰겠어요. 5학년부터는 동생들 삼삼오오 모아놓고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를 동작을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제대로 무용학원에 간 것은 고교 때 최선 선생님께 간 것이에요. 그런데 무용과가 아닌 전주교대로 진학했지요.-교단을 떠나 무용인의 길을 걷게 되셨단 말씀인데.교직에 7년을 몸담으며 참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싫지 않았어요. 특히 특별활동에서 무용을 맡아 아이들을 주말에도 불러 지도했는데, 다들 너무 잘하고 저도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운명이 이렇게 이끌었나, 인연 따라 가는 것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아 이게 인연이었구나 하는 생각, 모든 것을 초월했나 하는 생각입니다.(문 명인은 한성대 학부와 경희대 대학원을 거쳐 전북대에서 전라삼현승무 복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선생님께 춤이란 무엇인가요.인연이자 삶입니다. 춤을 좋아했고 열심히 노력했고, 나름대로 소품이든 대작이든 많이 만들어 발표했습니다. 지금도 열심히 하고 싶어요. 그런데 아직도 잘 못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아침에 항상 이곳에서 연습을 합니다. 승무는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춤이기 때문에 15분 정도 추면 땀이 이렇게 납니다.-승무에 임하는 마음이 궁금합니다.20대 후반에 가톨릭 신자가 됐는데 오히려 불교 책을 더 많이 읽습니다(웃음). 가톨릭 입교 전부터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간이 왜 왔다 가는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 고민, 그래서 그걸 다 깨달으려하기보다는 내 마음을 선하게 이끌어 누구에게 마음이 끄달리지(꺼둘리지) 않는, 주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잔잔한 텅 빈 마음 자체를 찾아서 가는 것이지요. 사실 젊을 때는 욕심을 내서 무조건 열심히 해야겠다, 남보다 한 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다 과정 같습니다. 지금은 다 비운 허허로운 상태에서 흘러가는 자연 그대로의 마음을 가지고 자연대로 추는 게 좋겠다, 자연의 일부가 돼서 그대로 추는 게 좋겠다는 마음입니다.-전라삼현승무 복원과 재현에 어려움이 크셨을 텐데.지난 2001년 착수해 약 4년 걸렸습니다. 문헌 기록 없이 전승돼 옛 선생들의 후손 주소를 수소문해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전광옥 선생님이 무용에 관심이 많아 전주농고시절 추시던 승무를 되살려내 고증을 받고, 이리 저리 해보시고 그 동작을 토대로 제가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과정들 속에서 이게 기네 아니네 하며 마음고생도 많았고, 포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뭔데 전주 승무를 찾겠다고 이 고생을 할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서울 이매방 선생님께는 크게 혼이났습니다. 선생님은 당신 것을 추길 원했는데, 전주까지 오셔서 한참 절 나무라셨어요.-전라삼현승무 복원에 큰 의지가 있으셨군요.예술은 그 지방 생활환경의 표현이기 때문에 각 지방마다의 춤이, 특히 승무와 살풀이는 뚜렷이 있어요. 근데 사람들은 남의 것만 좋게 보입니다. 사실 서울의 춤이 화려하고 작품도 좋아요. 본시 좋은 쪽으로만 따라가기 마련이잖아요. 그래서 우리 것을 잃어버린 거예요. 전라삼현승무가 덜 화려하더라도 찾아내야 하고, 더 좋은 작품으로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원본과 아주 같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동작을 찾아낸 것 자체에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스승 복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전주에서는 최선김강수 선생님께 기본을 배웠고, 서울 가서 박금슬조흥동이매방배정혜김진걸 선생님, 김천흥 선생님께는 궁중정제도 배웠습니다. 정말 우리나라 일류 선생님들을 다 섭렵했네요. 한영숙 선생님께 직접 승무를 배운 게 얼마나 큰 복인가요. 이매방한영숙박금슬, 세 승무를 다 뗀 사람은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을 겁니다.-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즘 예술 해서 먹고살기 힘들다보니 후배들이 많지 않아요. 자기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서두르지 말고, 편안히 생각하면서 꾸준히 연구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전라삼현승무를 다듬고 발전시킬 수 있는, 춤을 갈고 다듬고 발표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문화, 특히 예술 하는 사람들은 많이 힘듭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서 삶 자체도 힘들어요. 주변의 애정과 응원이 필요합니다.● [전라삼현승무는] 파계승이 번뇌 잊으려는 춤경기 승무보다 강하고 센 맛승무와 전라삼현승무 모두 대삼소삼(大三小三, 강과 약)의 리듬과 춤사위가 오묘하게 조화돼 있다.승무는 불교가 한국에 수입됨과 동시에 전래된 무용으로, 춤사위는 장단의 변화에 따라 7마당으로 구성된다. 정중동동중정이 잘 표현돼 민속 무용의 정수로 꼽히며, 말미의 북 연타는 주술적인 힘을 발휘해 관객을 무아지경으로 이끈다.승무의 연원은 불교의식무용 중 법고춤 유래설과 민속무용 유래설 등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이 중 민속무용설에는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하려고 춘 데서 비롯됐다는 설과, 파계승이 번뇌를 잊으려고 북을 치며 추기 시작했다는 설, 김만중의 구운몽 유래설 등이 있다.문정근 명인에 따르면 전라삼현승무는 파계승이 번뇌를 잊으려는 춤에 가깝다. 내면에 감춰진 정신과 심리적 갈등을 투박하고 당차게, 하지만 치밀하고 멋스럽게 승화시킨 작품이다. 또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대부분의 승무는 경기삼현음악을 쓰지만, 전북의 승무는 전라삼현음악을 사용해 큰 차이를 보인다. 삼현은 거문고가야금향비파의 3가지 현악기를 일컫는데, 전라삼현승무는 전라삼현육각(피리2, 대금1, 해금1, 장고1, 북1)에 맞춰 춘다. 이 중 전주 농삼현은 우조에 가까우며 관아에서 행했고, 백성들의 민삼현은 계면조에 가까웠다.맑고 낭창낭창한 경기 승무에 비해 전주 승무는 강하고 센 맛이 있다. 전라도의 경우 신명나는 농악과 판소리에 비해 풍류음악의 발달은 비교적 더뎠다. 예술은 삶의 반영인 만큼, 지역민들의 삶이 한 많고 힘들었을 것이라는 문 명인의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