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용의 기행에세이] (17)국토 최서남단 가거도
가거도는 먼 섬이다.목포에서 하루에 한 번 열리는 뱃길로 육백 리 다섯 시간… 직선거리 상으로는 목포에서 150킬로 남짓이라고 하지만 비금도, 흑산도, 만재도 등을 모두 거쳐 돌아가는 길이라, 시속 50킬로의 쾌속선이 들렀다 쉬었다 휘어들어가는 뱃길은, 부러 뱃멀미로 고생하자는 길이다. 두 시간을 달려간 흑산도를 지난 뒤로도 또 세 시간, 배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은 난바다에서 출렁거려야 한다.이 이동 거리와 시간은 '나는 왜 이 섬을 찾는 것인가' 묻고 대답하기에 충분한 거리이며, 동시에 밀려드는 후회와 기대 사이를 우왕좌왕하다보면 절로 맥이 풀리는 그런 시간이다.한반도 영해기선이 'ㄴ'자로 꺾어지는 최서남단에 위치한 가거도는 국경의 기준이 되는 곳 중 하나이다. 국경의 안과 밖…사실상 상상력의 안팎이기도 하다. 블랙 아프리카의 최근 역사를 안다고 하여, 그들의 삶과 심경의 내면까지 상상하긴 힘든 일… 이는 다빈치가 날것이나 탈것은 상상할 수 있어도, 그 속도감마저 실감나게 '시물라시옹'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상상력의 국경처음 동해를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갯벌 없는 바다라니…!동해는 수직의 바다이다. 가파른 해안선과 급작스러운 일출의 상승감이 그렇다. 그에 비하면 서남해는 수평의 미학 속에 느릿느릿 해가 지는 곳이다. 일출의 상쾌함과 돌연함이 반가운 나이도 있고, 어쩐지 일몰이 서럽다가 차츰 그 다채로운 해거름에 넋을 놓는 나이도 있다. 여튼, 내게는 동해-오호츠크해보다는 서남해-동지나해가 심정적으로 훨씬 가깝다.이런 점에서 바다에 관한 내 상상력은 서남해에 갇혔거나 혹은 서남해로 뻗어나간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가거도를 찾는 직접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 상상력의 영토 순례 같은 것… 올연, 서해 바다에 만나는 낯선 동해의 풍경.섬 사람들의 낭만적인 설명에 따르면 세상의 섬들은 사랑을 찾아 온바다를 부유한다던가, 자신의 사랑이 착근할 해저의 한 지점에 뿌리를 내릴 때까지… 그렇다면 가거도는 우리 나라 섬 중에서 가장 멀리 떠밀려온 사랑의 열망, 끝내 혼자 견뎌야 하는 외로움의 표상과 같은 곳이다.그래서 그런가. 가거도는 우리 나라 섬 중 드물게 등반할 수 있는 높은 산을 갖고 있는 섬이다, 외로우면 까치발을 딛는 법이다. 바다를 맨발로 딛는 것처럼 산의 날등을 둥실둥실 밟고 가야 한다. 무서움이 또한 고독의 다른 얼굴… 독실산을 지나 섬등반도로 이어지는 이 섬의 길은 갈수록 위태롭고, 때때로 아찔아찔한 날등을 통과할 것을 요구한다.한라산이나 남해 금산을 나는 오래 사랑해왔다. 하지만, 한라산은 너무 커서 긴박감이 없고, 남해 금산은 먼 해안선 조망에 더 어울리는 산이다. 등반의 재미만으로 보자면, 독실산(犢實山, 해발 639m) 등반과 비길만한 것은 울릉도 성인봉 등반 정도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섬 등반은 해발 0미터에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해발 639미터는 결코 만만한 높이가 아니다. 등반 초입부터 45도에서 60도 이상의 경사를 넘어서야 한다.▲서쪽으로 달려가는 내 열망의 형상가장 늦게 해가 뜨는 대신 맨 나중에 해가 지는 섬, 서쪽으로 달려 나가는 열망의 형세를 따라 걷는 것이 가거도 종주의 방법이 되어야 할 터… 대리항에서 향리 섬등반도 쪽으로 해를 등에 지고 걷는다.대리, 향리, 대풍리 3개 마을로 이루어진 섬 전체 일주 거리는 20킬로미터 정도 된다. 꼬박 24시간 체류한다고 했을 때, 첫날 산줄기를 따라 12킬로미터 정도, 다음날 일주도로를 따라 8킬로미터 남짓 이동하는 게 배 시간 맞추기에 적당하다. 외진 탓에 거의 찾는 사람들이 없던 이 곳은 최근 영화나 방송 촬영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면서, 홍도나 대흑산도와 함께 묶이는 일종의 '패키지 여행 코스'가 되어가고 있다. 이 섬은 간혹 일제 때 명칭인 소흑산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곳 500여 주민들은 이 명칭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 어차피 흑산면에 속했는데, 또 소흑산도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닌 게 아니라 이 섬에 모욕적인 처우가 될 것 같다.사람들이 가히 살만하다라는 뜻의 가거도(可居島)란 이름은 오히려 뭍과 이 섬의 먼 거리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곳 저곳 섬을 몇 차례 드나들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섬을 찾아 들어온 이들 중에 채약(採藥)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었다.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사약을 구하러 떠났다는 서복(혹은, 서불)의 흔적이 우리 섬 곳곳에 남아있는 것 또한 바다를 건넌 채약의 오랜 내력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귀한 것은 언제나 멀고 험한 경계 너머에 숨어 있다.가거도는 약재 자생지로 유명한 곳이다. 음양곽, 현삼, 목단피 등의 희귀 약재는 물론, 한때는 이 나라에서 쓰이는 한약재 용도의 후박나무 껍질 70%가 이 섬에서 났다고 한다.(지금은 중국산에 밀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한다고 하는데, 등산을 하면서 보니 독실산 전역이 후박나무 천지였다.) '다희네민박' 아주머니 말로는 목이버섯이나 가을 달래도 유명하다 하고, 자료를 보니 이 섬에서 자생하는 식물 종수만 700여종이다.석기시대 패총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가거도에 본격적으로 많은 사람이 거주하게 된 것은 조선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장보고 사후 청해진이 와해되고, 서남해의 많은 섬들에서는 민간인 강제 철거와 입도금지령이 내려진 바 있다.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조까지 왕조가 세 번 바뀔 때까지도 이같은 조치에는 변함이 없어, 태종 시절이 되어서야 보통 사람들은 다시 바다에 나갈 수 있었다. 국토 최서남단에 위치한 가거도야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멀고 먼 곳.▲섬등반도, 염소가 추는 새벽 춤살아가는 이유가 내 자신이 할 바 혹은 운명 같은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면, 이 섬에 들어온 이들도, 마찬가지, 이 섬도 그러할 것이다. 풍랑에 제 몸을 맡긴지 수만, 수억 년 이 섬은 여기 출렁이며 제 존재의 이유를 물었을 것이다.따라서, 이런 곳에서 '외롭다'는 표현은 아주 유치하거나 무척 장엄하다. 말로 내뱉어 자초하거나 과장하는 외로움이 아닌 순수한 쓸쓸함… 외롭다는 외마디에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고통과 아름다움, 위엄과 위험이 이 섬에서는 보다 가파르고 선명하다.새벽까지 바람이 쉬질 않는다. 지붕의 고생이 자심하다. 먼지 한 점 내려앉을 틈도 주지 않고 길 위에 부는 바람… 결국,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섬등반도 머리칼이 불불~ 일어선다, 날등 위로 난 길은 열렸다, 닫혔다… 새벽빛 속으로 이어지더니 순식간에 바닷길로 푹 꺼져 들어간다. 백척간두!바람은 대체 뉘를 부르려고 이렇게 쉬지 않고 휘몰아쳤단 말인가?… 돌아서는 순간, 아득한 절벽 아래 까만 점이 몇 개 보인다.염소들…?!염소들이 가파른 절벽 틈에서 훌쩍훌쩍 뛰고 있었다. 염소 발길질을 따라 섬등반도 가장자리 세찬 여울 소리가 절벽을 거슬러 철썩인다. 바람 소리, 물지는 소리… 염소는 마치 자맥질하듯 그 소리 속을 탄주라도 하듯 뛰고 있었다. 아주 짓이 났다. 모름지기 혼자 논다면 이 정도는 놀아야 하리, 그걸 보여주기라도 하는 양…문득, 나는 무섭고 부끄러웠다. /김병용(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