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용의 기행에세이] (16)부안 역사 기행
갈 때마다 더 깊어지는 맛한 걸음에 한 풍경, 부안은 눈길과 발길이 모두 호사하는 곳이다. 변산, 상록, 고사포, 격포, 모항, 위도 해수욕장이 그렇고 내소사와 개암사, 월명암과 봉래구곡이 그러하며, 이들을 모두 하나의 흐름으로 엮고 있는 해안일주도로까지… 부안은 한반도의 아름다움을 축약해놓은 '종합선물세트'와 같아 좀 더 오래 머물고, 좀 더 깊이 들어갈수록 아름다움에 대한 체감이 더해가는 곳이다.이같은 자연적 조건 탓이리라, 부안 땅에는 사람살이의 오랜 내력이 빚어놓은 시간의 풍경들이 여러 장의 역사적 탁본(拓本)으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현재 부안이 드러내는 색감은 4도 인쇄의 색 분해와 재조합과 비슷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풍광은 늘 역사의 앞에 존재하지만, 거기 미묘한 무늬결을 새기는 것은 대개 인간들이었다.▲사실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가 된다는 말장면 ① : 369년, 백제 근초고왕 시절.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양국의 장수들이 변산, 방장산과 함께 호남 삼신산 중 하나인 두승산에 올라 김제, 정읍 일원과 변산과 그 너머 서해를 바라보며 영원한 동맹을 약속했다고 한다. 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한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이때이며, 칠지도(七支刀)가 일본으로 건네진 때도 이 무렵이다. '백제'는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준말이라던가, 백제와 일본은 고대 동아시아 뱃길로 우의를 이어갔다.장면 ② : 660년, 나당 연합군의 기습에 의해 의자왕은 전쟁 포로로 당나라로 압송되었지만, 저항군의 기세는 오히려 들불처럼 거셌다. 도침, 복신, 흑치상지 등과 일본에서 급거 귀국한 백제의 왕자 부여풍이 연합, 군사작전을 감행하여 순식간에 고토 200여 성을 회복한다. 그러나 거기서 그만… 663년, 나당연합군과 제일연합군은 주류성과 백(촌)강 등지에서 난전을 거듭하는데, 3만여 명에 이르는 일본 병력 대부분과 백제 부흥군은 서해 바다에서 몰사하고 만다. 일본군은 죽음으로서 선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장면 ③ : 임진왜란을 통해 호남의 중요성을 절감한 일본군은 1597년 정유재란 시, 호남 공략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이 전란의 아픔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호벌치 '코무덤'이다. 일본 오카야마 비젠시에 일종의 전공탑처럼 세워져 있던 코무덤은 1993년, 주류성과 지척인 호벌치로 옮겨졌다. 죽임을 당한 뒤에도 코가 잘렸던 2만여 원혼들이 400여년만에 귀국한 셈이다. 반석처럼 단단할 것 같던 우정의 약속은 세월 속에서 빛이 바랬다.장면 ④ : 부안의 아름다운 기생 매창과도 인연이 있는 허균의 홍길동전, 특히 율도국에 관련된 이야기는 부안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믿는 이들이 많다. 이 이야기는 후대, 박지원이 지은 허생전의 변산군도邊山群盜와 연결되어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영조 시대, 변산에는 9천 명의 적도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지리산구월산과 더불어 변산은 조선의 3대 적굴賊窟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이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받으면 신화나 전설이 된다던가, 홍길동전과 허생전이라는 허구의 행간에는 이 땅에 살았던 이들의 곤궁함이 배어 있다.▲역사적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한일관계사의 측면에서 보면 ①과 ②는 장쾌한 의리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전 국력을 기울여 백제를 구하고자 애를 썼다.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를 두고 충남 홍성과 서산, 변산이 서로 각축을 벌이지만, 역사가 전하는 백제부흥운동의 기세로 보아, 어느 한 곳에서 거점 농성했다기보다는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 게릴라전을 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같다. 동아시아해전이 벌어진 백촌강은 현 동진강 하구로 추정된다. 보급과 수송, 은닉 등을 감안하면 주류성과 백촌강은 한 묶음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을 터…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패배감과 종말의식에 허덕였을 것이다. 부안 곳곳, 이 당시 고승들이었던 의상과 원효 그리고 진표대사의 흔적이 배어 있는 것이 이 같은 참화의 풍경을 간접적으로 웅변해준다. 당대 최고의 선지식들이 모두 여기 몰려와 사람들을 위무하고 또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야말로, 여기 전라도 개땅쇠들의 한과 울분과 절망의 아득한 깊이를 보여준다. 절실한 곳에 절실한 깨달음이 있다.①,②를 읽고 ③을 읽으면 절로 배신의 잔혹함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이곳 부안 땅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과 함께 왜 하필이면 역사는 이곳을 다시 나라의 운명을 건 격전지로 택했나 하는 안타까움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조상들이 피 흘린 자리에서 후손들이 또 피를 흘리는 모진 운명… 이와 같은 시련은 살기 좋은 땅은 누구나 탐낸다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개암사와 내소사를 잇는 길 중간에 곰소 염전이 있다. 소금은 아무 데서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다와 햇빛과 땅과 바람… 그리고, 이 모든 자연적 조건을 조합해낼 수 있는 사람의 힘이 더해져야 소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은 천혜의 조건이 거기 사는 이들을 힘들게 한다. 한 말의 땀을 흘려야 한 줌의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소금밭 노역, 염노鹽奴라는 단어를 통해 그 고됨을 우리는 짐작만 할 뿐이다.④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변산반도에 왠 도적들이 이리도 많이 출몰했단 말인가?먼저,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 도적이 되었다고 하면, 먹고 살 것을 찾아 모여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백제부흥군이 울금산성을 전략적 요충으로 삼은 것은 만경과 동진강의 유역을 배후 보급지로 삼으려는 의도였을 것이고, 그로부터 천 년이 지난 뒤 이곳에 수천 명 배고픈 도적들이 군집한 것 또한 같은 연유였을 것이다. 부안과 정읍과 고창이 만나는 고부에서 동학혁명의 불씨가 당겨진 것 또한 '수탈당할 것이 많아 억울한 일도 많았던' 이땅의 운명과 무관치 않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신사적 측면에서, 부당한 침탈 앞에서는 참지 않았던 '개땅쇠'들의 강인함이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월명암'의 창건 고사에 배인 준열한 핏빛이나 부안이 자랑하는 문인, 매창과 석정의 문학에 배인 절의가 또 다른 담론의 형식으로 이 땅의 매운 정신을 증명한다.그리고 또… 아마도 이들은 모두 만경창파를 맨땅 밟듯 누비고 다녔던 뱃사람들, 백제의 후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홍길동'이든 '허생'이든 어떻게 율도국과 이상국을 찾아 나설 엄두를 냈겠는가. 결기 하나만으로 자신의 새로운 터전을 흙길도 산길도 아닌 바닷길에서 찾으려 들 수 있겠는가.이처럼, 이 아름다고 풍족한 산하를 지키기 위해 역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했다. 아름다움의 이면은 그래서 늘 축축하다. 난 부안을 낙조와 달빛의 고장이라고 부르고 싶은 때가 많다. 역사의 전면에서 부안은 승자의 땅이었던 적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분법적으로 패자의 땅이라고 할 수도 없다.직설적으로 아름다운 이곳의 풍경 뒤에 역사의 숨은 이면들이 빚어놓은 은유의 무늬가 일렁인다. 상처 위에 가라앉은 딱지의 상상력, 육지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지평, 처연한 슬픔을 딛고 선 서늘함 같은 것은 달빛 아래서 만나는 것이 좋다. 월명암 낙조대에서 달을 기다린다./김병용(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