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52)“시(詩)를 종교로 시작(詩作)을 신앙”으로 살아온 시인 이기반
이기반 시인 이기반(李基班) 시인은 1931년 5월 25일, 전북 완주군 조촌면 반월리에서 출생하였다. 시인은 전주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 국문학과에서 공부했고, 1956년 전북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골든 스테이트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신석정 시인이 『자유문학』에 「설화」, 「가마귀 울어도」, 「말 없는 반항」 등을 추천함으로써 등단하였다. 1961년 『삼남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었다. 시인은 1955년 삼례고등학교에서 근무였고, 전북대 강사를 거쳤으며 1976년부터는 전주대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대학신문?방송주간, 사범대학장 등을 역임하였고, 정년퇴임 후에는 전주대학교 교회 장로로 활동하였다.
시인은 1958년 조재섭 시인과 함께 첫 시집 『두 날개』를 펴낸 후, 『대합실의 얼굴들』, 『내 마음밭의 꽃말』, 『겨울 나그네』 등 20여 권의 시집과 수필집 『은하의 모래알들』, 연구서 『한국현대시연구』, 『언어예술의 시간과 공간』, 『현대시론』 등 수십 편을 펴냈다. 시인은 전북 문학 발전과 작가적 역량이 높이 평가되어 전북문학상과 전북대상, 노산문학상, 백양촌문학상, 한국시문학대상, 목정문화상 한림문학상, 국민훈장동백장, 기독교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시인은 신석정 시인의 1세대 제자로서 석정문학을 계승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석정문학』과 『기린문학』을 발간하여 후학들의 문학 활동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시인이 언제부터 시를 썼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형제를 잃은 슬픔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시인의 수필 「월촌 이야기」에는 열다섯에 누이동생을 잃은 슬픔으로 마을에 뜨는 달을 바라보며 한숨과 슬픔을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시인의 나이 오십 즈음에는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장성한 둘째 아들을 잃게 된다. 시인의 표현대로 파랑새로 훌훌 날려 보내는 아픔은 그의 시 여러 편에서 감지된다. 시인이 허무와 생명의 본향을 뼈저리기 느끼면서 기다림으로 일관했던 것은 어쩌면 가슴 한구석에 못이 박히듯 지울 수 없었던 아픔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1980년에 출간한 시집 『아침의 눈망울』에서 시에는 더욱 높은 차원의 약동하는 생명력이 시 속에 투영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아울러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기를 추구했다.
최승범(전, 전북대학교 인문대학장)은 시를 종교(宗敎)로, 시작(詩作)을 신앙(信仰)으로 한결같이 정진해 온 시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시를 향한 그의 정열(情熱)은 실로 무섭기까지 하다. 어떠한 오브제이거나 그 정열의 도가니를 거쳐 나오기만 하면 바로 우리의 심장과 영혼에 잔잔하고도 해맑은 종소리의 시행(詩行)이 되고 만다. 특히 시인(詩人)의 시는 공해(公害)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은하(銀河)」 「모래알」 같은 「꿈밭」을 펼쳐주리라 믿는다.
1993년에 출간한 그의 열여섯 번째 시집 『강물로 흐르려네』의 자서(自序)에도 이런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이 험난한 세상을 시와 함께 산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외로울 때 시를 생각하고, 피곤할 때 시를 읽고, 괴로울 때 시를 쓴다. 그러니까 나에게 시가 있는 한, 외롭지도 피곤하지도 괴롭지도 않다. 이처럼 충만한 내면의 풍요를 행복으로 거둘 수 있는 그 열매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거룩한 것이다. 엉킨 실타래
올올이 풀어내어
한 줄기 강물로 흐르려네. 메마른 땅 촉촉이 적셔 씨 뿌리고
가꾸어서 크낙한 열매 거두게 하려네. 저마다 굽이굽이 막히고 서린 한을
생명의 젖줄로 뚫어서 풀어 보려네. 공해에 시달리는 구석구석
얼룩진 자국을 씻어내며 거침새 없이
맑히려 하네. 온갖 잡소리 다 거두어 버리고 새 소리랑
물소리만 노래하게 하려네. 눈 멀고 귀 먹고 벙어리된 사람들 일깨워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말하게 하려네. 강물로 흐르면서
고향 마을 두루 돌고 돌아
정일랑 사랑으로 물들이게 하려네.
-「강물로 흐르려네」(전문) 또한, 이기반의 시에는 전원의 풀 내음과 꽃내음이 있고, 보리밭의 이랑을 나르는 노래가 있다. 그것은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것이 전원(田園)이기에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인의 고향 반월리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운중반월(雲中半月)>의 형상이라고 한다. 구름 가운데 있는 반달의 의미니 그 풀이가 마음에 들어 스스로 호를 월촌(月村)으로 지었으며, 전주 시내로 이사하고서도 고향 마을 같은 느낌이 드는 서학동(棲鶴洞)을 오래도록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부는 바람은
토끼풀이랑 쑥 내음이
숨어 있어서 순이가 생각나고
복남이가 그립지만, 바람은 색깔이 없어
보이지 않은 얼굴들이 구름 따라
어디론가 날아간
그 자리마다
이야기만 남아서 올봄엔
민들레꽃이 피네 -「고향에서 부는 바람」 한평생 후학의 지도와 창작에 몰입하였던 시인은 많은 시집과 연구서를 남기고, 2015년 11월 18일 영면하였다. 전북문단의 중책을 많으면서 전북문단을 크게 활성화했고, 영생대학과 전주대학교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맥(文脈)의 중심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조명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시인이 집대성한 많은 작품이 재평가되고 조명됨으로써 후학과 독자들에게 많이 알려지고 읽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