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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백제] (125) 7장 전쟁 ①

그로부터 이틀 후, 사비도성의 내궁(內宮) 대왕전 침전 옆방에 의자왕을 중심으로 넷이 둘러앉았다. 성충과 흥수, 계백과 협보다. 계백이 수군항에서 말을 달려 도성으로 온 것이다. 먼저 밀사 하도리를 성충에게 보내 내막을 알려준 터라 의자의 앞에는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신라여왕의 밀서가 놓여져 있다. 때는 밤 술시(8시) 무렵, 방에는 양초를 여러개 밝혀놓아서 밝다. 그러나 모두의 표정은 무겁다. 앞에 놓인 붉은색 비단 보자기가 무슨 흉물(凶物)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선들이 스치기만 한다. 이윽고 성충이 손을 뻗쳐 보자기를 집으면서 말했다. 대왕, 소신이 먼저 보겠습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성충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편지에 독을 묻혔을지도 모르니까요. 헛헛, 신라 여왕이라면 그럴만 하지. 의자가 팔받침에 몸을 기대면서 웃었다. 좌평이 읽어보라. 예, 알겠습니다. 헛기침을 한 성충이 보자기를 풀고 접혀진 밀서를 펴더니 읽었다. 신라여왕이 백제 수군항장에게 보낸다. 신라국 이찬 김춘추는 당(唐)에 여왕의 밀서를 소지하고 당 황제를 만나러 가는 바, 이를 저지, 나포한다면 대전(大戰)의 단초가 될 수가 있다. 그러니 이 편지를 너희 대왕께 보여 결정을 하시도록 하는 것이 낫다. 편지에서 눈을 뗀 성충이 의자에게 말했다. 여왕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 대왕. 그게 끝이냐? 더 남았습니다. 읽겠습니다. 다시 숨을 고른 성충이 읽는다. 그리고 이것은 신라여왕이 백제왕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머리를 든 성충이 의자에게 말했다. 대왕, 그렇게 쓰여있습니다. 읽으라. 성충이 다시 읽는다. 백제왕 의자는 들으라. 너는 내 동생의 아들이니 내가 네 이모가 된다. 너는 내 편지를 이미 갖고 있을테니 이 편지의 필체와 비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네 이모로서 말한다. 어느덧 이마에서 돋아난 땀을 손등으로 닦은 성충이 계속해서 읽는다. 너는 네 어미와 처를 연금시켜 놓았다고 들었다. 신라의 첩자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네 어미는 그 어느 편도 들지 않았고 내부의 허점을 나에게 발설한 적도 없다. 나와 네 어미는 부친의 뜻대로 신라와 백제의 합병, 통일을 추구했던 것이다. 네 아비가 그 증인이다. 네 아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네 어미를 놔둔 것이다. 그때 시선을 뗀 성충이 의자에게 물었다. 대왕, 계속해서 읽습니까? 왜 그러느냐? 교활합니다. 소신이 읽으면서 홀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럽니다. 그러자 의자가 웃었다. 계속해서 읽으라.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으니, 점점 재미있어진다. 성충이 다시 읽는다. 의자, 들어라. 김춘추를 그대로 당으로 보내다오. 김춘추가 소지한 당황제에게 보내는 친서에는 안부만 적혀 있다. 김춘추는 여왕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제 미래를 위해서 가는 것이다. 머리를 든 성충이 의자를 보았다. 놀란 얼굴이다. 그때 의자가 소리없이 웃었다. 봐라, 재미있게 되지 않느냐? 대왕, 계속 읽겠습니다. 이제는 성충이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김춘추는 내 후계자가 되려고 하지만 부족하다. 그래서 너한테 더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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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8 19:50

[불멸의 백제] (124)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20

“이것을 받으시오.” 김춘추가 비단으로 감싼 서찰을 내밀면서 말했다. “여왕께서 보내신 서찰이오.” “나한테?” 계백이 눈을 크게 뜨면서 웃었다. “신라 여왕이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백제군의 침입을 알았다고 하더니 과연 그 신하에 그 여왕이구려.” 그러면서도 계백이 서찰을 받았다. 배 안의 모든 시선이 계백과 계백이 쥔 서찰로 모였다. 심지어 부사(副使) 김문생도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그때 계백 옆으로 나솔 윤진이 다가왔다. 윤진은 손에 장검을 쥐고 있었는데 두 눈이 번들거렸다. “덕솔, 궁금하오. 그 편지를 보시지요.” 그때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신라여왕이 바라는 대로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중에 읽겠다.” 머리를 돌린 계백이 김춘추를 보았다. “이제는 내가 수군항에서 김공을 대접하겠소. 백제로 돌아갑시다.” 김춘추는 대답하지 않았고 계백이 윤진에게 지시했다. “수군항으로 돌아가세.” 여왕의 편지를 급하게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곧 북이 울렸고 활기찬 수군들의 부르고 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세 척의 대선이 나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포한 신라 대선에는 계백이 올라 대장선(大將船)이 되었다. 생포한 신라 관인과 병사, 수군은 65인이 되었는데 다른 4척의 신라선은 침몰했고 그 배에 탔던 신라인은 모두 죽었다. 계백은 김춘추와 아들 김법민을 제외한 나머지 신라인을 모두 묶어서 선창에 가두었고 발에 족쇄까지 채워 놓았다. 선창 감옥은 배 밑바닥인 데다 올라오는 출구는 1개뿐이다. 갑판 위 2층 누각에는 계백과 나솔 윤진, 장덕 백용문까지 셋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김춘추 부자는 선미 쪽 창고에 가둬 놓았다. “덕솔, 김춘추가 여왕의 편지를 내민 순간에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났소. 여왕 자매는 귀신이 붙은 모양이오.” 윤진이 말하자 계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담로에 있을 때 당(唐)의 장수 하나가 귀신을 부린다는 소문이 났어. 그놈이 나타나기 전에는 꼭 불이 났네.” 둘의 시선을 받은 계백이 빙그레 웃었다. “다음날 그놈이 나타나면 군사들이 겁을 먹었지. 그래서 그놈 소문이 화귀(火鬼)였네.” “그놈이 미리 불을 질렀군요.” 백용문의 말에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미리 군사를 시켜 나타날 곳에 불을 지른 것이지. 난세에는 민심이 불안해서 쉽게 흔들리는 법이야.” “그래서 그 화귀는 어떻게 되었소?” 윤진이 묻자 계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불을 지른 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활로 쏘아 잡았네. 그래서 화귀(火鬼)가 제가 죽을 곳을 미리 알려준 셈이 되었지.” “여왕의 편지는 언제 읽으실 것입니까?” “이 편지가 바로 화귀의 불일세.” 가슴에 든 비단 보자기를 꺼낸 계백이 앞에 놓인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는 윤진과 백용문을 번갈아 보았다. 웃음 띤 얼굴이다. “병사 둘을 이 비단 보자기 경비로 세우고 하루 3교대를 시키게. 수군항에 도착하면 병사들이 이 비단 보자기를 함에 넣고 청으로 옮기라고 하게.” “알았습니다.” 윤진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여왕이 화귀였소. 김춘추는 불을 지르려고 온 화귀의 부하였고.” 그때 계백이 정색하고 말했다. “저 편지는 대왕이 계신 자리에서 읽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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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7 18:44

[불멸의 백제] (123)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19

신라선에서 백기(白旗)가 올랐을 때는 3번째 화전이 갑판에 박혔을 때였다. 그것을 본 앞쪽 백제선에서 목청 큰 병사가 소리쳤다. 모두 갑판에 나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라! 이제 백제선은 신라선의 좌우로 50보 거리까지 다가왔는데 배 크기는 비슷했지만 2층 누각이어서 10자(3m)는 더 높았다. 누각에서 10여명의 궁수가 활을 겨누고 있다. 계백은 신라인들이 갑판 위로 모여들더니 하나씩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다. 항복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사신선(使臣船)을 잡았다. 배 안의 장졸들은 기쁨에 넘쳐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있다. 그때 계백의 지시를 받은 목소리 큰 병사가 다시 소리쳤다. 무기는 모두 한곳에 모아 놓아라. 무기를 소지한 자는 가차없이 베어 죽일 것이다! 배가 흔들리면서 신라 전선에 점점 붙여졌다. 좌우에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거리는 이제 20여보로 가까워져서 양측의 얼굴까지 다 보인다. 누각 위에 서있던 계백은 갑판에 무릎을 꿇고 있는 신라인을 훑어보았다. 2층 맨 뒤쪽에 서있는 고관(高官)의 얼굴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 순간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청색 바탕에 금박을 입힌 관복 차림의 사내, 얼굴이 낯이 익은 얼굴이다. 어디서 보았던가? 그 순간 계백의 눈빛이 강해졌다. 저 해사한 용모, 짙은 눈썹과 단정한 입술, 잘 다듬은 콧수염과 턱수염, 바로 김춘추 아닌가? 그때 배가 신라 배와 부딪치면서 흔들렸다. 수군들이 익숙한 솜씨로 배를 묶고 병사들은 뱃전을 뛰어넘어 신라 배로 옮겨졌다. 앞장을 선 백용문은 장검을 치켜들고 있다. 잠시 후에 신라인은 모두 묶여서 갑판 위에 꿇려졌고 배 안의 수색까지 끝냈다. 계백의 지시에 따라 김춘추는 묶이지 않고 뒤쪽에 서있다. 바다 위에 3척의 대선(大船)이 나란히 묶여서 머물고 있다. 오후 유시(6시) 무렵, 어느덧 서쪽 수평선 위쪽에 태양이 걸렸고 바다는 은빛으로 반짝였다. 그때서야 계백이 백제선에서 신라선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거침없이 다가간 계백이 김춘추의 다섯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계백이 신라선으로 넘어온 순간부터 김춘추는 시선을 주고 있던 참이었다. 김춘추는 숨까지 멈춘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계백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계백이다. 김춘추에게는 철천지원수, 대야성에서 사위 김품석을 죽이고 딸을 자결하도록 만든 원수, 거기에다 고구려에서는 고구려 관리로 위장하고 자신을 조롱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 당에 사신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포로로 잡혔다. 그때 계백이 입을 열었다. 김춘추 공이 아니신가? 계백 공이시군. 김춘추가 바로 말을 받는다. 눈빛이 순식간에 풀리면서 어깨가 늘어졌다. 과연 수전산전 다 겪은 신라의 기둥이다.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김 공하고는 인연이 깊소. 과연 그렇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고구려에서는 고구려 관복을 입으셨길래 고구려에 투항하신 것으로 알았소. 그때 신라를 고구려에 바치려고 오셨다가 일이 풀리지 않으셨지요? 지금은 당에 바치려고 가시는 길입니까? 계백 공이 서부 수군항장이 되셨다고 해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소. 과연 신출귀몰하시는 분이시오. 그때 김춘추가 가슴에서 붉은색 비단에 싸인 서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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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6 20:47

[불멸의 백제] (122)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18

앗! 부선(副船)이 넘어가오! 부사 김문생이 소리쳤지만, 김춘추는 숨을 죽인 채 대선(大船)인 부선이 화염에 휩싸인 채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다. 백제 전함은 화전뿐만이 아니라 포차까지 싣고 있어서 날아온 어른 머리통만 한 돌덩이들이 배를 부쉈기 때문이다. 공격을 받은 지 한식경밖에 지나지 않았다. 백제 전선(戰船) 2척은 교활한 범이었다. 5백보 거리에서 더이상 좁혀 오지 않은채 화전과 돌덩이를 날려 불을 지른 배를 가차 없이 부쉈다. 이쪽은 궁수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이다. 김춘추가 탑승한 정선(正船)이 기를 쓰고 백제선에 접근했지만, 그쪽은 대선에도 노가 12개나 있어서 이쪽을 가볍게 떼어놓았다. 발을 굴렀지만 맨 처음에 병사들을 태운 중선(中船)이 먼저 침몰했고 이어서 쾌선 2척이 차례로 부서지더니 바다에서 사라졌다. 그리고서 대선 중 한척인 부선(副船)이 침몰한 것이다. 부선에는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제외한 사신단 관리들이 다 타고 있었다. 대감! 다급해진 김문생이 김춘추를 불렀다. 놈들이 다가옵니다! 김문생의 얼굴이 누렇게 굳어져 있다. 배 안은 금방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부선은 2백보쯤 앞에서 옆으로 잔뜩 기운 채 불덩이가 되어있다. 바다 위에는 뛰어내린 수군, 병사, 관리들이 가득차 있었지만, 이쪽은 구해낼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 김춘추는 2척의 백제 전함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거리가 처음으로 4백보 정도까지 좁혀졌다. 지금까지 김춘추가 탄 정사선(正使船), 즉 정선은 단 한대의 화살도 맞지 않았다. 백제선은 다른 4척만 공격했던 것이다. 대감! 김문생이 다시 소리쳐 불렀을 때 김춘추가 머리를 돌려 노려보았다. 잡찬, 그대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예에? 너도 3품 고관이며 부사 아닌가? 이때 어떻게 하는 것이 낫겠는가? 대감, 그, 그것은. 말해보라! 이제 김춘추 옆으로 김인문과 유해성, 경호장 김배선까지 모여들었다. 그때 백제 대선 2척은 2백보 거리까지 다가왔다. 이쪽에서 활을 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대적하려고 하지 않는다. 군사들은 우왕좌왕하는 상황이다. 모두 김춘추와 김문생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김춘추의 시선이 경호장 김배선에게 옮겨졌다. 경호장, 배에 군사가 얼마 남았느냐? 예, 50여명입니다. 백제선은? 예, 1백인은 넘을 것이오. 네 의견을 듣자, 싸워야겠느냐? 모,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 이놈! 소인은 싸우라면 싸웁니다! 그때 화전 하나가 날아왔다. 가까운 거리여서 배에서 외침 소리가 나자마자 화전이 돛대 옆에 박히면서 기름이 사방으로 번졌다. 김춘추는 숨을 들이켰다. 백제군은 화전에 불을 붙이지 않고 기름만 매달고 쏜 것이다. 시위를 했다. 그때 백제 대선 한척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앞쪽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선미에서 외치는 소리가 울렸다. 신라선은 멈춰라! 불에 태워 수장시키기 전에 멈추는 것이 나을 것이다! 목소리가 커서 배 안의 신라인은 다 들었다. 다시 백제인이 외쳤다. 신라 사신선(使臣船)의 정사(正使)에게 말한다! 개죽음하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돛을 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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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5 19:01

[불별의 백제] (121)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17

계백이 옆으로 비스듬히 지나가는 신라 선단을 보았다. 거리는 1천보 정도. 덕솔, 신라 사신선(使臣船)이요! 옆에 선 장덕 백용문이 소리쳤다. 앞쪽 대선(大船)에 사신이 탔을 것입니다! 백용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렸다. 어부가 대어(大漁)를 본 것이나 같다. 계백이 선장에게 지시했다. 전속으로 접근하라! 그 순간 북이 울리더니 전선의 아래쪽 좌우 덮개가 열리면서 노가 6개씩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북소리에 맞춰 노꾼들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더구나 돛은 바람을 가득 먹고 부푼 상태다. 신라 대선도 하물을 잔뜩 싣고 있는데다 노가 없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8백보, 7백보, 6백보. 그때 계백이 소리쳤다. 노를 멈춰라! 북소리와 함께 노가 일제히 올라가자 원진을 만들고 나아가던 신라 선단과의 거리가 5백보 정도에서 좁혀지지 않았다. 백용문이 앞쪽을 응시한 채 말했다. 5척이 모두 이쪽에 측면을 보이고 늘어서서 항진합니다. 측면에는 모두 궁수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계백의 눈에도 정연하게 늘어선 궁수들이 보였다. 모두 2백여명, 2백여대의 화살이 일제히 날아오면 위력적이다. 거기에다 불화살까지 날릴 것이다. 이쪽 2척의 전함에는 병사 80여 명이 타고 있을 뿐이다. 그때 계백이 백용문에게 지시했다. 앞쪽 대선 한척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격침시켜라. 예, 덕솔. 기운차게 대답한 백용문이 소리쳤다. 2번선(船)에 연락해라! 2번선은 적함 4번째 5번째를 격침시켜라! 1번선에서 쏘는 것을 신호로 사격하라! 2번선과의 거리는 1백보 정도였으므로 깃발과 고함 신호로 명령이 하달되는 동안 신라 선박은 반월형으로 둥글게 포진한 채 나아가고 있다. 지금 백제 전함 2척은 반월형 진에서 5백보 거리를 유지하면서 좌측으로 따라가는 중이다. 그때 준비가 된 1번선에서 백용문이 소리쳤다. 사격! 그 순간 우측 갑판으로 옮겨놓은 2대의 대궁(大弓)에서 화전(火箭)이 날아갔다. 거대한 불화살이다. 창날 밑에 감긴 아이 머리통만한 가죽 주머니에는 기름이 들었고 심지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 먼저 발사한 2대의 화전이 5백보를 날아가는 동안 다시 화전이 장착되었다. 1번전(箭)이 떨어진 것을 보고 각도를 조절하려는 것이다. 그때 2대의 화살 중 1대가 신라 전선의 2번선에 명중되었다. 와앗! 배 안에서 함성이 울렸다. 화전은 2번선 돛내 밑에 박히더니 불기둥이 솟아오른 것이다. 화전 하나는 옆 쪽 바다에 떨어졌다. 다시 사격! 백용문이 발을 구르며 소리친 순간 백제 2번선에서 화전이 날아갔다. 2개의 불덩이가 날아가는 것 같다. 잘 겨냥해라! 와앗! 옆쪽 2번선에서 함성이 울렸다. 2번선에서 쏜 화전 2대가 그대로 신라선 4번선에 명중된 것이다. 그때 다시 1번선에서 화전이 날아갔다. 이번에는 3대가 날아간다. 선미에 장착된 화전까지 옮겨와 발사한 것이다. 신라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반월형 진(陣)이 흐트러지더니 쾌선 1척은 뒤로 숨는다. 그때 다시 함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다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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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4 19:50

[불멸의 백제] (120)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16

출항 엿새째, 그동안 바다는 잔잔해서 남서풍을 탄 5척의 함대는 순항했다. 쾌선은 노를 젓지도 않았고 대선(大船)의 앞뒤로 오가면서 심부름을 했다. 함대는 백제령에 들어가 해안을 우측에 두고 북상하는 중이다. 이틀 후면 대양(大洋)으로 나간다. 대륙과 반도 사이의 태양은 폭풍이 잦아서 겨울철에는 위험하다. 다행히 지금은 8월, 함대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북상하고 있다. 대양을 건너려면 순풍을 만나도 보름은 걸린다. 바람이 없거나 역풍을 만나면 한달이 걸릴 때도 있다. “잡찬, 선장한테 속력을 더 내라고 이르게.” 오후 미시(2시)무렵, 선미에 선 김춘추가 부사 김문생에게 일렀다. 김문생은 28세, 진골 왕족인 덕분으로 3품 잡찬 직위에 종을 1백명이나 소유한 부호였는데 상대등 비담의 일족이다. 김문생이 대답도 없이 몸을 돌렸을 때 뒤쪽에 서 있던 시위군관 유해성이 말했다. “나리, 경호장 김배선이 데리고 온 군관 6명중 4명이 전에 데리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심복들이지요.” “놔둬라.” 쓴웃음을 지은 김춘추가 힐끗 앞쪽을 보았다. 그렇다면 군사 태반이 비담의 무리인 셈이다. 김배선은 비담이 신임하는 장수였기 때문이다. 입맛을 다신 유해성이 말을 이었다. “부사(副使)이하 경호장, 군관들까지 모두 상대등 나리의 일파인 것을 여왕께서 아시는지나 모르겠소.” “아시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상대등을 사신으로 보내실 것이지. 도대체….” 그때 왼쪽 난간에 서 있던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이 손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저기 배가 옵니다.” “무엇이?” 놀란 김춘추가 그쪽을 보았다. 맑은 날씨다.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가 맞닿은 대양(大洋)의 수평선을 김인문이 가리키고 있다. “어디 말이냐?” “저쪽입니다. 두척인데요.” “어허,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유해성도 눈썹 위에 손바닥을 붙이고 보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소인도 안 보이는데요.” 젊은 놈이 시력이 좋은 거냐?” 김춘추가 아직 17살인 김인문을 놀리듯이 말했다. 김인문도 이번에 사신단에 끼어있는 것이다. 견문을 넓혀 주겠다고 참가시켰는데 비담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때 앞쪽에서 선장의 외침이 울렸다. “배다! 전함이다!” 놀란 김춘추가 그쪽으로 다가가며 소리쳐 물었다. “어디 전함이냐?” 김춘추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다. 그때 선장이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백제 전함이요! 이쪽으로 옵니다!” 선장의 손끝을 본 김춘추가 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보인다. 김인문이 잘 보았다. 2척, 돛대가 2대인 것도 보인다. “원진을 만들어라!” 김춘추가 탄 대선의 선장이 선단의 대장 노릇을 한다. 선장이 소리치자 기수가 깃발을 흔들었고 곧 북소리가 바다 위로 퍼져갔다. 그때는 5척의 배가 모두 다가오는 백제선을 본 터라 금방 대열 정돈이 시작되었다. “궁수는 우측 측면으로!” 선장이 다시 소리쳤다. 해전(海戰)의 시작은 궁수가 한다. 불화살과 화살로 일제 사격을 한 후에 배를 붙여 백병전이다. 상대가 대선 2척뿐이라는 것에 신라군은 사기가 올랐다. 이쪽은 정예로 5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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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1 20:57

[불멸의 백제] (119)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⑮

자시(밤 12시) 무렵, 내궁(內宮) 안은 무거운 정적에 덮여져 있다. 방안 분위기가 무거웠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어둡다. 상석에 앉은 의자왕도 그렇고 성충과 흥수, 계백, 그리고 말석에 시립한 위사장 협보의 얼굴도 납덩이같다. 방금 의자는 계백으로부터 태왕비 시녀 서진의 이야기에다 선덕여왕이 준 편지까지 읽은 것이다. 붉은 색 기둥에 달린 황초 불꽃이 흔들리고 있다. 이곳은 대왕의 침전 옆 대기실, 사방의 문은 굳게 닫혀졌지만 어디선가 바람이 새어드는 것 같다. 이윽고 의자가 입을 열었다. “그랬었구나.” 탄식하는 것 같다. 의자가 흐려진 눈으로 성충과 계백까지를 차례로 보았다. “그래서 대왕께서 어머니 기를 세워주시려고 애쓰셨구나.” 대왕이란 의자왕의 부친인 무왕(武王)을 말한다. 의자가 말을 이었다. “신라를 복속시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이유가 이것이었다.” “대왕.” 마침내 성충이 입을 열었다. 눈빛이 강했고 어깨가 부풀려져 있다. “대왕, 연기신이 여왕의 말을 듣고 왔다지만 믿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신라 내부의 사정으로 보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담, 김춘추의 세력을 견딜 수가 없을 것이오.” 그때 의자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상좌평, 그대는 신라여왕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구나. 당왕(唐王)처럼 여자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대왕.” 당황한 성충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렇다. 의자가 부른 당왕(唐王)이란 당황제 태종을 말한다. 태종 이세민을 의자는 당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의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까지 신라가 태왕비와 왕비를 부추겨 백제의 내분을 일으켰다면 이제는 백제가 신라 왕가(王家)를 뒤흔들 차례다.” “대왕, 신라인은 교활합니다.” 흥수가 나섰다. “김춘추는 단신으로 고구려까지 다녀온 지용을 겸비한 후계자입니다. 아예 상종을 안하시는 것이 낫습니다.” “태왕비와 왕비는 보내는 것이 어떨까?” 의자가 자르듯 말하자 방안에 다시 정적이 덮여졌다. 이 경우도 예상하고 온 것이다. 덮어놓고 보고만을 할 고관들이 아니다. 그때 흥수가 입을 열었다. “대왕, 태왕비께서는 선왕이 돌아가신지 3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한 번도 그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의자의 시선을 받은 흥수가 말을 이었다. “그러시다가 이번에 연기신 등 첩자 무리가 색출되자 그때서야 신라여왕의 친필 서한을 내보이시며 선왕께서도 알고 계셨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흥수의 말을 성충이 받았다. “대왕, 지금 태왕비 마마를 돌려보내지 마시고 신라에 세력을 굳힐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낫습니다.” “…….” “그리고 신라여왕이 어떤 복안으로 태왕비마마를 후계자로 만드실 지도 알아야 될 것입니다.” “과연, 그대들 말이 옳다.” 의자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내 어머니가 신라왕이 된다면 좋은 일이지. 선왕께서 이루지 못하신 꿈이었으니까.” 머리를 돌린 의자가 계백을 보았다. “달솔, 네가 잡아두고 있는 그 시녀년을 놓치지 마라. 난 여기서 둘을 놓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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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20 20:36

[불멸의 백제] (118)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⑭

“이럴 수가 있나?” 계백이 말이 끝났을 때 성충이 반쯤 입을 벌리고는 옆에 앉은 흥수를 보았다. 오후 유시(6시) 무렵, 이곳은 도성 중부에 위치한 영빈관 안이다. 오늘도 한산성에서 말을 달려온 계백이 성충과 흥수를 만나고 있다. 계백이 급한 보고를 할 것이 있다고 했더니 성충이 흥수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때 흥수가 탄식했다. “허어, 괴이하구나.” 성충과 흥수는 외부 12부, 내부 12부로 나뉘어 있는 백제 24개부(部)의 각각 수장(首長)이다. 성충은 외부(外部)의 수석인 병관부의 좌평이며 5좌평의 수장인 상좌평이니 관리 중 최고위직이다. 흥수는 내부(內部) 12부의 수석인 전내부(前內部)의 장으로 왕명 출납과 인사를 맡는다. 계백은 둘을 함께 만나는 중이다. 계백이 품에서 서전한테서 받은 편지를 꺼내 성충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6년 전, 신라여왕이 태왕비께 보낸 친필 서한이랍니다. 보시지요.” 그러자 성충이 편지를 받더니 빨려드는 것처럼 읽는다. 그리고는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은 얼굴로 편지를 흥수에게 넘겨주었다. 흥수까지 편지를 읽는 동안 방안에서는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흥수가 머리를 들었을 때 계백이 먼저 말했다. “그 편지를 선왕(先王)께서는 읽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왕께는 말씀드리지 못했다는군요.” “요사하군.” 성충이 겨우 그렇게 말을 뱉었을 때 흥수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렇다면 태왕비께선 신라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이신가?” “그렇습니다. 좌평나리.” “신라에 가면 여왕의 후계자가 된다는 보장이 있을까?” “지난번에 연기신이 신라에 갔을 때 여왕한테서 약속을 받았다고 합니다.” “죽은 놈은 말을 할 수가 없지.” 그때 성충이 어깨를 펴고 말했다. “궁중에 요괴가 활보하고 있었구나. 큰일이다.” “덕솔, 지금 그년을 잡아놓고 있나?” 다시 흥수가 묻자 계백이 대답했다. “예, 좌평나리.” “베어 죽입시다.” 불쑥 성충이 말하더니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태왕비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서 궁 안에서 죽든 살든 할 것 아니오? 우선 날개부터 잘라냅시다.” 흥수는 숨만 쉬었고 성충의 말이 이어졌다. “얼마 전부터 궁안에 여우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소. 또 언젠가는 대백제는 안에서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소. 이것이 다 이 여우들 때문이오.” “이보시오. 상좌평.” 흥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제 사건의 근원을 알게 되었으니 현명하게 대처 하십시다. 그런데 이 내막을 대왕께 말씀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때 성충이 숨을 들이켜고 나서 말했다. “태왕비께서 신라여왕의 후계자가 되어서 신라왕이 된다고 합시다. 그리고서 신라가 백제에 합병이 될 것 같소?” 계백이 시선을 내렸다. 성충이 과격하지만 지용을 겸비한 무장(武將)이다. 앞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흥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신라에 김춘추, 김유신, 비담 같은 무리가 왕위를 노리고 있는 상황에 태왕비께서 어떻게 견디실지 불안하오.” 그러자 성충이 말을 맺었다. “대왕께 은밀하게 말씀 올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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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9 20:55

[불멸의 백제] (117)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⑬

“마마, 부르셨습니까?” 김춘추가 허리를 굽히면서 묻자 선덕여왕이 손을 까닥여 가깝게 오라는 시늉을 했다. 당(唐)에 사신으로 출발하기 이틀 전, 배 5척에 당 황제에게 바칠 서신과 공물도 싣고 고관(高官)들에게 은밀히 줄 선물도 실었다. 사신은 정사(正使)에 이찬 김춘추, 부사(副使)에 잡찬 김문생이 지명되었는데 김문생도 진골 왕족으로 비담 일파에 속한다. 비담이 김문생과 그 수하 6명을 끼워넣은 것이다. 사신은 35명, 수행하는 장졸들까지 122명이며 공물을 포함한 짐은 130상자나 된다. 그래서 대선(大船) 2척에 중선 1척, 쾌선 2척의 선단을 구성하고 떠나는 것이다. 김춘추가 두 손을 모으고 여왕의 다섯걸음 앞으로 다가가 섰다. 이 자리가 최고 관직인 상대등, 이벌찬의 위치다. 청 안에는 여왕 뒤에 시녀 둘만 서있을 뿐이다. 오후 미시(2시) 무렵, 저택에 있던 김춘추는 여왕의 부름을 받고 말을 달려온 참이다. 그대 여왕이 더 가깝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긴장한 김춘추가 다시 두 걸음을 떼어 다가갔을 때 여왕이 낮게 말했다. “더 가깝게 오라.” “예, 마마.” 김춘추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다시 한걸음 다가갔다. 4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여왕은 미모다. 결혼도 하지 않은 터라 아직 피부도 윤기가 흐른다. 그대 여왕이 입을 열었다. “백제 서부 앞바다를 지나게 되겠지?” “예, 마마.” “매년 그 앞바다를 지났지만 백제 수군과 부딪치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가?” 김춘추가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예, 수군항에 첩자가 있어서 수군의 출항 일정을 알려주기 때문이 아닙니까?” 수군 일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김춘추는 생각나는대로 대답했다. 여왕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아예 수군 선단을 띄우지 않아서 신라 함선과 바다에서 부딪치지 않았다.” 김춘추는 눈만 껌벅였고 여왕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번은 백제 수군과 바다에서 만날 것 같다.” “마마, 어찌 아십니까?” “백제 서부 수군항 항장으로 계백이란 백제 장수가 왔기 때문이다.” “계백이 말씀입니까?” “그렇다. 그대의 사위와 딸을 죽인 놈 아닌가?” “예, 마마.” 김춘추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상기되었다. “소신을 고구려에서도 능멸을 한 놈입니다. 마마.” “그대와 전생(前生)에 악연이 있었던 것 같구나.” 여왕은 독실한 불교신자다. 전생과 극락을 믿는다. 김춘추가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마마, 바다에서 만나 일전(一戰)을 하더라도 당에 가야만 합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머뭇거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 일 때문에 불렀다.” 여왕이 똑바로 김춘추를 보았다. 왕위 계승 문제로 화백회의에서 연일 갑론을박을 해도 여왕은 놔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여왕의 권위가 떨어지고 있는데도 김춘추도 도와주지 않았다. 당(唐) 황제도 “신라는 여왕이 다스리기 때문에 약해진다”고 대놓고 사신에게 말할 정도가 되었다. 그때 여왕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나라에 대한 충심(忠心)이 기특하구나. 그렇다면 내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도록 도와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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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8 21:26

[불멸의 백제] (116)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⑫

서진이 머리를 들고 계백을 보았다. 눈이 깊은 우물처럼 느껴졌고 계백은 자신의 몸이 그 우물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을 받는다. 눈을 감았다 뜬 계백이 말을 이었다. “이년, 요사스러운 말로 홀리려고 드는구나. 멀쩡한 관리들이 대역죄를 범한 이유를 이제 알겠다.” “덕솔께서 저를 죽이셔도 됩니다. 하지만 먼저 이것을 보시지요.” 서진이 저고리 안에서 붉은색 비단 주머니를 꺼내더니 안에서 잘 접힌 종이를 꺼내 두 손으로 계백에게 내밀었다. “태왕비께서 이것을 덕솔께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6년 전, 신라여왕이 태왕비께 보내신 편지입니다.” 숨을 들이켠 계백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쳐 편지를 펼쳤다. 질이 좋은 종이였지만 오래되어서 접힌 자국이 깊다. 안에 글이 적혀져 있다. “내가 신라왕이 된지 6년, 아직도 전쟁으로 수많은 양국 백성이 고통을 받는구나. 아버님의 뜻이 어서 이루어져서 신라, 백제가 한 나라가 되어야 할 텐데. 동생을 그리는 언니 선덕이 선화에게 보낸다. 선덕 씀.” 읽고 나서 머리를 든 계백에게 서진이 말했다. “그 편지를 선왕(先王)께서도 읽으셨습니다. 덕솔.” 계백은 숨만 쉬었고 서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선왕께서는 신라 공격을 삼가시고 신라여왕의 기반을 굳혀주시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옥문곡에서 군사를 되돌려 신라여왕의 계략이 맞도록 만들어주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 후로 신라여왕의 권위가 살아났지요.” “…….” “그런데 선왕이 돌아가시기 전에 대왕께 그 사실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왕께선 즉위하신 후부터 신라를 계속해서 공격하셨지요.” “…….” “나리.” 서진이 다시 깊은 물 같은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습기가 찬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신라여왕이 죽으면 뒤를 이을 성골 후계자는 태왕비마마 뿐이십니다. 이제 선왕께서도 극락에 가셨으니 태왕비께서 신라로 돌아가 신라왕이 되셔야 합니다.” “무엇이?” 계백이 어깨를 부풀리며 물었다. 머리끝이 솟는 느낌이 든 계백이 서진을 노려보았다. “신라로 가신다고 했느냐?” “예, 그러나 대왕께서 보내주실 리가 없으니 몰래 가셔야 합니다.” “허어.” 쓴웃음을 지은 계백이 옆에 내려놓은 장검의 칼자루를 쥐었다.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이년, 단칼에 베어 죽일테다. 입에서 뱀이 나오는 년이구나.” “지난번에 덕솔 연기신이 신라여왕을 만나고 왔습니다. 신라는 비담과 김춘추가 왕위를 노리지만 둘 다 왕이 될 그릇이 아니라고 신라왕이 말했다는군요. 만일 태왕비께서 백제를 탈출해서 돌아오시면 후계자로 지명을 받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나한테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를 듣자.” “이곳 수군항을 통해 배로 신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말을 대왕께 말씀드린다는 것은 예상하고 있겠지?” “예, 덕솔.” 서진이 바로 대답하더니 어깨를 늘어뜨렸다. 계백은 아직도 쥐고 있던 장검을 내려놓았다. 눈동자가 흐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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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7 19:39

[불멸의 백제] (115)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11

“나리.” 관저로 들어선 계백을 고화가 먼저 맞았다. 얼굴이 상기되었고 웃음 띤 눈이 가늘어졌다. “오느라고 고생했어.” 계백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화를 보았다. 청으로 올라간 계백의 옆으로 고화가 다가서며 물었다. “들으셨지요?” “들었어.” 청에 앉은 계백에게 가장 먼저 우덕이 와서 인사를 했다. 반가운지 활짝 웃는다. “주인자리, 관직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오. 넌 몰라보게 고와졌구나.” 계백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더니 고화는 외면했고 우덕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덕조와 우덕은 이제 한방을 쓰는 것이다. 청 아래에 서있던 덕조가 헛기침을 하면서 시치미를 떼었고 우덕은 도망치듯이 청에서 내려갔다. 이어서 남녀 종들이 차례로 올라와 계백에게 인사를 했다. 계백과 고화가 나란히 앉아서 인사를 받는다. 이윽고 10여 명의 종들 인사가 끝났을 때 청에는 두 부부가 남았다. 그때까지 청 아래에 서있던 덕조가 계백에게 물었다. “주인, 부를까요?” “내가 안으로 들어갈 테니 객실로 오라고 해라.” 태왕비의 시녀 서진을 만나려는 것이다. 계백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고화가 말했다. “저는 내실에 가 있겠습니다.” 자리를 피해 주겠다는 말이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안쪽 객실로 들어섰다. 손님을 맞는 방이다. 계백이 자리 잡고 앉았을 때 곧 상민 차림의 여자가 들어섰다. 분홍색으로 물들인 저고리와 남색 바지를 입었는데 얼굴을 본 순간 계백은 숨을 들이켰다. 미인이다. 흰 얼굴, 검은 눈동자, 곧은 콧날과 단정한 입술, 조금 상기된 얼굴로 들어선 여자가 계백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바닥을 짚은 두 손이 눈부시게 희다. 절을 한 여자가 머리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태왕비마마의 시녀 서진입니다.” 낮지만 맑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다. 계백이 시선만 주었고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마마께서 저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계백은 보료에 한쪽 팔을 기대고 앉아서 시선만 준다. 머리도 끄덕이지 않는다. 서진이 당황한 듯 두어 번 눈을 깜박였는데 속눈썹이 길어서 창이 닫혔다가 열리는 것 같다. 서진이 말을 잇는다. “마마께서는 신라 여왕마마의 친동생이십니다. 다 아는 사실이나 마마께선 먼저 그것부터 말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 “그동안 마마께선 언니인 신라 여왕께 자주 연락을 하셨습니다. 이번에 죽은 덕솔 연기신이 갈 때도 있었고 때로는 제가 남장을 하고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서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점점 열기가 띄워졌다. 반짝이는 두 눈이 계백을 응시한 채 떼어지지 않는다. “선왕(先王)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때로는 선왕께서 마마를 통해 신라 여왕께 말씀을 전한 적도 있었습니다.” “……” “신라여왕께서 돌아가시면 후사가 없는 터라 태왕비마마께서 왕위를 이으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몇년 전까지만 해도 신라여왕과 태왕비마마께선 그런 약조를 하셨습니다.”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뱉었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말을 뱉는다. “이년, 그것이 가능할 것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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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4 19:52

[불멸의 백제] (114)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⑩

“주인, 마님 모시고 왔습니다.” 덕조가 인사를 했을 때는 오시(12시)무렵, 계백이 수군(水軍) 조련을 마치고 수군항의 진영으로 돌와왔을 때다. “오, 왔느냐?” 두 달 만에 보는 덕조다. 덕조가 도성에서 고화를 모시고 온 것이다. 도성의 저택이 크고 잘 갖춰진 데다 시장에는 온갖 귀물(貴物)이 넘쳤고 의식주가 편리한데도 고화는 이곳으로 오기를 고집했다. 그래서 마침내 저택에 집 지키는 종만 남겨두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내가 저녁때 들어간다고 해라.” “네, 주인.” 대답한 덕조가 꾸물거리더니 상석에 앉은 계백을 보았다. 정색한 표정이다. “주인.” “뭐냐?” “마님이 한분을 모시고 왔습니다.” “모시고 와?” 그때 덕조가 무릎걸음으로 두걸음 다가와 앞쪽에 엎드렸다. 청의 마루방에는 둘 뿐이다. 계백과 집안 집사인 덕조가 만나는 터라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덕조가 목소리를 낮췄다. “주인, 마님의 친척 행세를 하고 따라왔지만 실은 태왕비 마마의 시녀입니다.” “……” “태왕비께서 마님께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시녀를 나리께 데려가라고 부탁을 하신 것이지요.” “태왕비께서?” 계백은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는 것을 들었다. 태왕비 선화공주는 지금 궁 안에서 연금상태다. 그러나 변복을 하고 궁 밖으로 나오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대왕의 모친인 것이다. 가끔 선왕(先王)의 묘에도 가고 사찰에서 불공도 드린다. 덕조가 말을 이었다. “예, 열흘쯤 전 저녁 무렵에 찾아오셨습니다. 불사에 가셨다가 들렸다고 하셨는데 변복을 하고 계셨지요.” “……” “그때 시녀 서진을 두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전할 것도 알고 계시더군요. 서진을 데려가 나리를 만나게 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 “서진을 만나고 나서 대왕께 사실을 말씀드려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괴이하다.” 마침내 어깨를 편 계백이 덕조를 보았다.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라 있다. “태왕비께서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시는구나.” 덕조도 계백의 주도하에 신라 첩자 일당이 소탕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 일에 태왕비와 왕비가 연루되어 둘 다 연금상태라는 것도 아는 것이다. 덕조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주인,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마님께서도 주인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시녀인 서진님도 주인의 뜻에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계백이 물었다. “이 일을 집안에서 누가 아느냐?” “네, 저하고 마님, 그리고 우덕이까지 셋입니다.” “셋이라고?” “집안 종들은 서진님을 마님이 도성에서 만난 먼 친척인줄로 압니다.” “그걸 믿겠느냐?” “태왕비께서 대갓집 부인 행세를 하고 계셔서 모두 깜박 속았습니다. 시녀 서진님도 재치가 있으셔서 다른 종들이 모두 마침 친척인줄 믿습니다.” 그때 계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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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3 20:18

[불멸의 백제] (113)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⑨

“마마, 소신이 당에 가겠습니다.” 김춘추가 말하자 선덕여왕이 시선만 주었다. 청안에 잠깐 정적이 덮여졌다. 김춘추는 석달전 고구려에 들어가 연개소문을 만나 신라와의 동맹을 제의했다가 오히려 잡혀 죽을 뻔했다. 겨우 도망쳐 나왔지만 신라 조정에서 김춘추를 비난하는 무리는 없다. 진골(眞骨) 왕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에서도 김춘추의 용기를 칭찬했다. 이윽고 선덕이 입을 열었다. “가서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김춘추는 선덕을 보았다. 미인이다. 여왕의 수심에 잠긴 것 같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즉위 12년, 선덕은 진평왕의 맏딸로 신라에 남은 유일한 성골(聖骨) 왕족이다. 또 하나의 성골은 지금 백제 의자왕의 어머니인 선화공주다. 그러니 의자왕의 부친 무왕(武王)이 신라와의 합병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선덕의 다음 차례는 자신의 왕비 선화공주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를 점령하면 신라 백성들은 합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그때 김춘추가 대답했다. “마마, 당 황제께서 고구려와 백제왕에게 친서를 내려 신라를 더 이상 침공하지 말도록 청원하겠습니다.” “이보시오, 이찬.” 김춘추 앞쪽에 서있던 이찬 비담이 나섰다. 비담은 진골 왕족으로 구성된 화백회의의 좌장이다. “이찬은 모르시오? 이제 바닷길이 막혀서 사신을 싣고 갈 배가 영락없이 백제 수군에게 나포될 상황이오.” 김춘추가 머리를 저었다. “그렇다고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겁니까? 바다는 넓습니다. 피해가면 됩니다.” “그리고 사신이 간다고 해도 당 황제께서는 청을 들어주지 않으실 거요.” 선덕도 단하에서 두 신하가 갑론을박하는 것을 듣기만 했다. 백제에서 첩자가 달려온 것은 열흘 전이다. 백제 서부(西部) 수군항의 항장 이하 지휘관 10여명이 도륙을 당했고 조정에 잠입시켰던 신라첩자 13명이 잡혀 처형당한 것이다. 첩자 중 4명은 간신히 신라로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내막을 알게 되었다. 이제 백제 서부 수군항이 백제군의 수중에 들어왔으니 신라 사신이 탄 배 10중 8, 9는 나포될 것이었다. 그때 김춘추가 머리를 들고 선덕을 보았다. “마마, 소신이 이번에도 목숨을 걸고 당에 가서 청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구석에 박혀만 있다가는 사직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의 말이 옳다.” 마침내 선덕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에 서서 남 탓이나 하고 신세 한탄을 하면 빼앗긴 땅이 돌아오기라도 한단 말이냐?” 선덕의 시선이 비담에게로 옮겨졌다. “그렇다면 경의 의견을 듣자.” “마마.” “어찌하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가 있겠는가?” “마마, 그것은…….” 당황한 비담이 눈을 부릅떴다가 곧 내렸다. 선덕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담은 여왕 사후(死後)의 왕위 계승 1순위자다. 선덕이 다시 김춘추를 보았다. “이찬, 곧 떠나라.” “예, 마마.”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지 못하면 곧 당은 등 뒤를 찔려 수나라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전해라.” “예, 마마.” 김춘추는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당장에 목이 잘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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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2 18:49

[불멸의 백제] (112)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⑧

“대선(大船)이 5척, 중선(中船)이 7척, 쾌선(快船) 18척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나솔 윤진이 대선 위에서 계백에게 설명했다. 수군항의 전력(戰力)을 말한다. “대선과 중선, 쾌선으로 진이 되어야 대해(大海)로 나갈 수가 있지요. 대선 2척, 중선 4척, 쾌선 6척을 1진(陳)이라고 부릅니다.”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부터 백제는 해상강국이었다. 동성왕 때 대륙의 담로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면서 수군(水軍)도 양성시켰기 때문이다. 대선은 길이가 200자(60m), 폭이 60자(18m), 높이가 40자(12m)였고 돗대가 2개, 수부가 20명, 수군을 60명까지 실을 수 있다. 중선은 길이가 150자(45m), 폭이 40자(12m), 높이가 25자(7.5m)이며 돗은 2개 ,수부가 12명에 수군 35명을 싣는다. 쾌선은 길이가 100자(30m), 폭이 20자(6m), 높이가 15자(4.5m)인데 수부가 22명, 수군이 20명이다. 수부가 많은 이유는 배 양편에 노가 3개씩 있어서 수부 12명이 저으면 빠르게 달릴 수가 있는 것이다. 윤진이 말을 이었다. “대선과 중선이 해전(海戰)을 벌이고 쾌선은 연락과 정찰, 또는 기습 역할을 맡았지요. 그러나 요즘 몇 년 동안 대해로 진(陣)을 펼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계백이 묻자 윤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해적선은 3척씩 무리지어 오는 데다 노꾼이 많아서 우리 쾌선보다 빠릅니다. 대해에서 잡지 못하고 놀림감만 되는 바람에 아예 근해만 순시하고 있었습니다.” “방법을 찾지 못했단 말인가?” “쾌선에 노잡이를 배로 늘리고 대선과 중선에 대궁을 장착하자고 진즉부터 건의했지만 묵살되었지요.”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신라 선박도 백제 연안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백제 연안은 대륙과 멀리 인도, 페르시아로 통하는 상로(商路)인 것이다. 다음날부터 수군항에서는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선박을 수리하고 한편으로는 수군을 조련시켰기 때문에 수군항 주변에는 밤이 새도록 불빛이 휘황했다. 병관좌평 겸 상좌평 성충이 수군항에 도착한 것은 공사를 시작한 지 열흘이 되었을 때다. 대선(大船)에 오른 성충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내가 6년쯤 전에 대선을 타고 담로 안남군에 갔었어. 그때 선왕(先王) 마마의 사신으로 갔었는데 도중에 해적선을 만났지.” 대선에 장착된 대궁(大弓)을 쓸면서 성충이 말을 이었다. “그때는 이 대궁이 육지에서 공성전 때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야. 이 대궁만 있었다면 그 해적선을 잡았을 텐데.” “마침 알맞은 나무가 있어서 솜씨좋은 군사들이 만들 수 있었습니다.” 대궁은 길이가 15자(4.5m), 시윗줄은 삼줄과 가죽을 꼬아 만들었고 화살은 두께가 1치(3cm)에 길이는 12자(3.6m)다. 화살 끝에 창날이 꽂혔는데 주위에 기름을 넣은 가죽 주머니를 붙여서 쏘도록 했다. 가죽 주머니 끝에는 불이 붙은 심지를 매달아 화살이 박힌 순간에 기름 주머니가 터지면서 불이 붙는 것이다. 육지에서는 공성전에 자주 사용했지만 배에 장착하는 것은 처음이다. 계백이 옆에 선 나솔 윤진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솔 윤진이 함선용 대궁을 착안했습니다.” “장하다.” 상좌평 성충한테서 칭찬을 받은 윤진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대선에는 대궁이 선수에 2대, 선미에 1대를 장착했고 아래쪽에 노 구멍을 만들고 노를 6개씩 넣었다. 노꾼으로 24명을 충원시켰지만 공간은 넉넉하다. 중선도 대궁을 2대, 노꾼을 20명, 쾌선은 대궁 1대에 노꾼을 20명으로 늘려서 그야말로 쾌속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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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1 19:26

[불멸의 백제] (111)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⑦

두 번째 시녀의 목에 칼을 대었을 때 비명처럼 말이 터져 나왔다. “수군항 궁수장 대덕입니다!” 왕비전의 시녀 단월이다. 위사장 협보가 칼을 단월의 목에서 떼었다가 다시 붙이면서 물었다. “지금 그놈이 어디 있느냐?” “조금 전까지 다리가 아프다면서 부식창고 옆방에 있었습니다!” “잡아라!” 협보가 소리치자 위사들이 달려갔다. 내궁 마당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햇볕이 환한 사시(10시) 무렵, 마당에는 방금 목이 잘린 왕비전 시녀의 시체가 처참한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다. 구석에 잡아놓은 시녀들은 50여명이나 된다. 주위를 위사들이 칼을 빼든 채 둘러서 있어서 흉흉한 분위기다. 잠시 후에 달려갔던 위사들이 대덕 종해를 끌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대덕은 반항을 했는지 얼굴이 피투성이다. “덕솔, 도망치려는 것을 잡았습니다.” 위사부장이 보고했다. 머리를 끄덕인 협보가 지시했다. “그놈을 마당에 꿇려라. 곧 대왕을 모시고 나오겠다.” 협보는 종해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로부터 한 식경쯤이 지났을 때 의자가 대왕전의 청에서 문무 관리들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내궁(內宮)에 신라 첩자가 들락였기 때문에 그와 연관된 역적무리를 토벌했다.” 모두 숨을 죽였고 의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병관부 달솔 진재덕, 내신부 덕솔 연기신 등 17명을 위사대가 잡아 처형했고 그 가족은 종으로 배분될 것이며 재산은 몰수한다.” 단하의 성충, 흥수 등은 의자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곧 생모(生母)인 태왕비와 왕비의 조처가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의자가 말했다. “신라 첩자가 태왕비와 왕비전을 들락였다는 증거가 있다. 지금 잡아놓은 서부 수군항 대덕 종해가 자신이 첩자이며 태왕비와 왕비의 지시를 받아 왔다고 자백을 했다.” “……” “증거가 확실한 바 태왕비전을 봉쇄하고 왕비는 폐비함과 동시에 궁 안에 감금한다. 둘은 악의 근원이었다.” 청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때 성충의 목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대왕, 대왕께 이렇게 수족을 자르시는 고통을 드린 죄를 제가 받겠습니다.” 의자가 눈만 크게 떴고 성충이 말을 이었다. “신하로서 사전에 일을 막지 못한 죄를 소신이 받겠습니다.” “당치 않은 말이다.” 혀를 찬 의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 내가 우유부단하게 질질 끌어왔기 때문이야.” “대왕, 신하들의 우두머리인 상좌평이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난국에 상좌평이 공석이면 되겠는가? 입을 다물어라.” 의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임금이 지은 잘못을 왜 신하가 받느냐? 임금이 뼈를 깎아내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대왕.” “지금은 내부 수습이 시급하다. 상좌평.” 의자가 정색하고 성충을 보았다. “신라 첩자들이 그동안 수군항에 집중적으로 도당을 배치시켰다. 이를 더 색출하고 수군(水軍)을 예전의 전력으로 되살리는 것이 상좌평 그대가 할 일이다.” 의자의 논리정연함이 되살아났다. 의자는 결코 혼군(混君), 폭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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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10 18:54

[불멸의 백제] (110)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⑥

“오, 왔느냐?” 의자의 절을 받은 태왕비 선화공주가 잔잔한 표정으로 맞는다. “어마마마 부르셨습니까?” 절을 하고 머리를 든 의자는 태왕비 옆에 앉아있는 왕비 교지를 보았다. 의자가 절을 하는 사이에 옆으로 온 것 같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교지가 눈웃음을 쳤다. 그 순간 의자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아름답다. 교지의 나이도 42세, 20대 자식이 있는 나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요염해졌다. 그때 태왕비가 의자에게 물었다. “대왕, 서부 수군항의 항장 이하 지휘관급 11명이 몰사한 사실을 아느냐?” “예, 어마마마.” 허리를 편 의자가 똑바로 태왕비를 보았다. 부친인 선왕(先王) 무왕도 왕비인 선화공주를 어려워했다. 자색을 겸비한 선화공주는 결단력과 용기까지 갖춘 여장부이기도 하다. 백제왕이 되기 전에 소를 키우던 서동과 결혼을 할 만큼 과단성이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부친인 진평왕이 시켰다고 따르는 성품이 아니다. 태왕비의 눈빛이 강해졌다. “그럼 그 극악무도한 범인이 한산성주이며 수군항 항장을 겸임하게 된 덕솔 계백인지도 알겠구나?” “처음 듣습니다.” 놀란 의자가 눈을 크게 떴다. “신라 자객들의 소행이란 보고를 듣고 한산성주 계백에게 시급히 자객단을 잡으라는 전령을 보낸 참입니다. 도대체 누구한테서 들으셨습니까?” “수군항에서 밀사가 왔었다.” “저에게 밀사가 오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왔다.” “어마마마께 밀사가 오다니요?” 의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임금을 젖혀놓고 태왕비께 밀사가 갔다는 말씀입니까?” “대왕.” 태왕비가 불렀지만 의자가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위사장!” “예, 대왕.” 청 밖에서 다 듣고 있던 위사장 협보가 금방 소리쳐 대답했다. 의자가 다시 소리쳐 지시한다. “서부 수군항에서 태왕비께 온 밀사는 신라 첩자가 분명하다. 그놈은 나와 태왕비마마의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는 목적으로 온 것이다.” “예, 대왕.” “태왕비마마 전을 샅샅이 뒤져서 찾으라.” “예, 대왕.” “태왕비전과 왕비전을 위사로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외인의 입출을 금한다.” “예, 대왕.” “찾지 못하면 시녀들을 잡아 한 년씩 목을 베어라. 그러면 누군지 밝혀질 것이다. 알았느냐!” “예, 대왕.” 그때 의자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태왕비를 보았다. 왕비 교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는다. “태왕비마마,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오늘 중으로 첩자를 찾아낼 것입니다.” “대왕.” 의자의 말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얼굴이 굳어졌던 태왕비가 겨우 불렀지만 곧 입을 다물었다. 사태를 짐작한 것이다. 의자가 태왕비를 향해 머리를 숙여 절을 했다. “태왕비마마, 옥체를 보중하시옵소서.” “…….” “긴 세월이었습니다. 태왕비마마.” 허리를 편 의자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태왕비를 보았다. “소자도 30여년을 인내하고 있었습니다.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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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7 20:26

[불멸의 백제] (109)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⑤

다음날 아침, 의자가 후궁 백씨의 침전에서 조반을 마친 후에 청에 나가려고 옷을 입을 때 문 밖에서 기척이 났다. “대왕, 태왕비께서 부르십니다.” 태왕비의 시녀다. “그러냐? 곧 뵌다고 말씀드려라.” 소리쳐 대답한 의자가 옆에서 얼굴을 굳히고 선 백씨에게 말했다. “위사장을 부르라.” 백씨가 서둘러 물러나더니 잠시 후에 위사장 협보가 소리 없이 다가와 옆에 섰다. 협보는 덕솔 관등으로 의자가 태자 시절부터 호위를 맡았던 복심이다. 항상 그림자처럼 의자를 따르면서 겉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서 얼굴을 보지 못한 고관들도 많다. 의자가 허리끈을 매면서 협보에게 물었다. “태왕비께서 나를 부르시는 이유를 알겠느냐?” “덕솔 계백이 서부 수군항 지휘관들을 몰사시킨 죄를 주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임금이 된 지 올해로 몇 년째인가?” “3년이 되셨습니다.” “내 나이가 몇인가?” “43세가 되셨지요.” “내가 태자 생활을 몇 년 했지?” “27년을 하셨습니다.” “긴 세월이었어.” “예, 대왕.” “네가 태자 시절부터 내 위사장이었으니 몇 년째냐?” “예, 18년째올시다.” “네 나이가 몇이든가?” “45살입니다.” “그렇지, 나보다 두 살 위였지.” 머리를 끄덕인 의자가 몸을 돌려 협보를 보았다. 눈동자가 깊은 물 속 같다. “내가 너무 어마마마께 주눅이 들어 있었지 않느냐?” “예, 대왕.” 대답은 했지만 협보는 외면했다. 그러나 의자가 말을 잇는다. “태자 위치는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았지. 어마마마의 한마디면 태자 자리에서 밀려날 수도 있었으니까.” “……” “내가 임금이 되고 나서도 그 버릇이 남아 있는 것 같구나. 어마마마가 부르시면 대답부터 하고나서 가슴이 무거워지는 걸 보니까 말이다.” “……” “왕비도 어마마마 등에 업혀서 날 가볍게 보았고.” “대왕.” “말 안 해도 안다.” 눈동자의 초점을 잡은 의자가 협보를 보았다. “위사대를 시켜 병관부 달솔 진재덕, 전내부 덕솔 연기신, 그리고 왕비, 태왕비와 내통한 혐의가 있는 고관을 모두 잡아들여라. 모두 17명이었지?” “예, 대왕.” 협보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눈빛이 강해졌다. “대왕, 반항하면 베리까?” “베어라.” 숨을 고른 의자가 말을 이었다. “너는 내 경호로 남고 부장들을 보내도록 하라. 모두 믿을만한 자들이겠지?” “모두 대왕께 목숨을 바칠 무장들입니다. 염려 마시옵소서.” “그럼 그동안에 나는 태왕비가 부르셨으니 가 뵈어야지.” 의자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방을 나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선 후궁 백씨의 어깨를 어루만진 의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묻는다. “내가 오늘, 달라 보이지 않느냐?” 의자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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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6 18:35

[불별의 백제] (108)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④

그 시간에 대왕전 뒤쪽의 방 안에서 의자왕이 앞에 앉은 세 신하를 응시하고 있다. 세 신하란 바로 성충과 계백, 흥수다. 오른쪽에서부터 앉은 순서대로 말한 것이다. 계백은 대왕을 만나는 자리여서 옷은 자색 겉옷을 걸쳤지만 흥수한테서 빌린 옷이라 작았다. 계백도 이른 아침에 하도리와 함께 말을 달려 도성으로 온 것이다. 국가대사(國家大事)다. 한산성주겸 서부 수군항 항장 덕솔 계백이 나솔급 관리 둘, 장덕 셋을 사살한 것이다. 또한 수군항 항장 은솔이하 관리 여섯을 수군, 수부(水夫) 수십명과 함께 수장시킨 혐의도 있다. 계백은 두손을 마룻바닥에 짚은 채 의자를 올려다 보았고 성충 흥수는 굳게 입을 다문 얼굴로 의자를 응시하고 있다. 붉은색 기둥에 양초등을 둥글게 붙여서 방앞은 환하지만 넷의 표정은 무겁다. 방금 계백은 국창을 죽인 사실부터 어젯밤 문자성 일당까지 죽인것까지 모두 말한 것이다. 이윽고 의자가 조금 충혈된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내가 우유부단했다.” 의자의 얼굴에 일그러진 웃음이 떠올랐다. “태자 시절부터 태왕비 마마와 왕비가 신라측과 교류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 “선왕(先王)께서 처리하시리라고 믿었지만 놔두시더구나.” “……” “선왕 말년에 신라 접수에 대한 꿈을 버리신 터라 태왕비께서 더 기세를 올리시도록 한 것이다.” 태왕비란 선왕(先王)이며 의자왕의 부친 무왕(武王)의 왕비를 말한다. 무왕의 왕비가 되기 전에는 선화공주로 불린 신라 진평왕의 딸이었으며 지금 신라여왕인 선덕여왕의 동생이다. 무왕은 왕비를 무마하여 신라와의 합병을 공략했다. 선덕여왕도 후사가 없는 터라 그 다음은 선화공주가 될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백제와 신라는 합병이 된다. 이것이 딸만 두었던 신라 진평왕의 의도이기도 했다. 신라왕은 선덕에서 성골(聖骨)인 왕족이 끊기게 된다. 김춘추 등은 무수한 진골(眞骨) 왕족중의 하나일 뿐이다. 왕이 계백을 보았다. “덕솔, 네가 마침내 칼을 뽑았구나. 잘했다.” “황공하오.” “국창이 왕비의 사주를 받아 신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를 잡지 못했지만 아니땐 굴뚝에 연기가 날리가 없는 법. 네가 잘 처리했다.” 머리를 든 의자가 성충과 흥수를 번갈아 보았다. “왕비가 이 사실을 모를리가 없다. 이미 한산성의 변( )을 보고 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왕비께서 대왕께 직보하실 성품입니다. 계백이 무고한 장수들을 처단했으니 죽여 마땅해야 된다고 하시겠지요.” 흥수가 말했을때 성충이 거들었다. “태왕비 마마를 모시고 대왕을 압박하실 것입니다. 조정의 대신 몇몇도 합세하겠지요.” 의자가 시선만 주었고 흥수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 조정의 실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동안 태왕비마마 시절부터 포용했던 친(親)신라파 관리들이 모두 힘을 합쳐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때 의자의 시선이 다시 계백에게 옮겨졌다. “계백이 불씨를 살렸구나.” 의자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기둥에 매단 등불의 불꽃이 바람이 없는데도 흔들렸다. 의자가 말을 이었다. “내부 단속을 하지 않고 외부로 나갈 수는 없는 법. 이제 결단을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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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5 19:48

[불멸의 백제] (107)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③

그러나 수군항에서 빠져나간 국창 일당이 있다. 수병(水兵) 궁수장 적임인 11품 대덕 종해, 이른 새벽에 수군항을 빠져나온 종해는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 오후 유시(6시) 무렵에 사비도성에 도착했다. 도중에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뛰다 걷다 하면서 기어코 도성 문이 닫치기 직전에 들어온 것이다. 종해가 왕비 교지 앞에 엎드렸을 때는 술시(8시)가 넘었을 무렵이다. 종해가 왔다는 보고를 받은 왕비는 식솔 연기신과 병관부 달솔 진재덕까지 불러 종해를 맞은 것이다. 왕궁 뒤쪽의 별당 안이다. 상석에 그림처럼 앉은 교지의 아래쪽 좌우에 연기신과 진재덕이 자리잡고 종해를 내려다 본다. 별당은 토지신과 조상신을 모신 곳으로 태왕비의 전용이다. 이곳은 태왕비와 왕비만 사용할 수가 있다. 그때 교지가 말했다. “서부 수군항에 급변이 일어났다니, 듣자. 빠짐없이 말하라.” “예, 마마.” 머리를 든 용해가 교지를 보았다. 온몸이 땀과 먼지로 덮여 거지꼴이다. “한산성주 계백이 덕솔 축하연에서 수군항의 지휘관 다섯을 죽였습니다.” 용해의 목소리가 별당을 울렸다. 모두 숨을 죽였고 용해가 말을 잇는다. “미리 궁수를 잠복시킨 후에 항장의 일당이라고 짐작되는 지휘관 다섯을 겨냥하고 있다가 계백의 신호를 받고 쏘아죽인 것입니다.” “누가 죽었느냐?” 교지가 묻자 용해가 바로 대답했다. “나솔 문자성, 나솔 정길도, 장덕 육반, 장덕 장호기, 장덕 온성입니다.” “그전에 실종된 국창이하 지휘관은 몇명이냐?” “여섯명입니다.” “모두 십여명이 죽었구나.” “예, 이제 국창님 휘하의 지휘관은 다 죽었소이다.” 용해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교지를 보았다. “나솔 윤진, 장덕 백용문 등이 계백에게 국창님 휘하의 지휘관을 낱낱이 알려주었기 때문이오.” “이 역적 같은 놈 계백.” 교지가 잇사이로 말했다. “내가 이놈을 꼭 죽일 것이다.” “마마.” 병관부 달솔 진재덕이 조심스런 표정으로 교지를 보았다. “계백이 실상을 알았으니 이미 도성과 대왕께 손을 썼을 것입니다.” “아니, 대왕은 아직 모르신다.” 교지가 반짝이는 눈으로 진재덕을 보았다. “아마 성충과 흥수 무리에게는 기별을 했겠지. 아마 그들과 공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마께서 대왕께 먼저 손을 쓰셔야 됩니다.” “이번에는 연기신이 말하자 교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오늘밤에라도 대왕을 만나야지.” “먼저 머리를 잘라야 됩니다.” 진재덕이 눈을 가늘게 뜨고 교지에게 충고했다. “몸둥이를 자르면 늦습니다. 독니가 있는 머리부터 자르셔야 하오.” “그 머리가 성충 아니냐?” “그렇습니다.” “성충이 죽으면 그대가 병관좌평이 될 것이다.” 자리를 차고 일어선 교지가 흰창이 커진 눈으로 셋을 둘러보았다. “계백이 국창과 휘하 지휘관을 죽인 것이 분명하다. 우선 성충을 제거하여 그 배후를 없앤 후에 그놈을 대역죄로 잡아들여 멸족 시키기로 하자.” 교지의 목소리는 차갑고 눈빛은 날카롭다. 왕궁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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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4 20:04

[불멸의 백제] (106) 6장 해상강국(海上强國) ②

예, 있습니다. 하면서 손을 든 장수가 있다. 수군항의 선단장(船團將)인 나솔 문자성. 손을 들고 계백을 응시하고 있다. 청 안에는 한산성과 수군항의 지휘관 30여명이 둘러앉아 있는 것이다. 밤 술시(8시) 무렵, 마당에는 장작더미에 불을 질러서 청 안까지 환해졌다. 계백이 문자성에게 다시 물었다. 시인한다니 반역을 시인한다는 것인가? 문자성은 국창의 일파로 분류된 인간이다. 도성의 왕비에게 보낸 밀서에 제 이름도 써놓고 수결(手決)을 했다. 그때 문자성이 계백을 똑바로 보았다. 말씀하신 반역도의 수장(首將)은 바로 왕비이십니다. 그러나 여러 번 이 사실이 대왕께 보고 되었지만 선왕(先王)시대부터 조치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왕의 묵인으로 여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계백은 듣기만 했고 문자성의 말이 이어졌다. 소장은 대왕께 반역했습니다. 따라서 대왕 앞에서 죄를 심판받고 싶습니다. 그때 계백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교활한 놈. 대왕 앞에 설 때까지 시간을 벌어보려는 수작이구나. 그순간 계백이 번쩍 손을 들었다. 쳐라! 그때다. 마당쪽에서 밧발같은 화살이 날아와 수군항 장수 다섯명의 몸에 꽂혔다. 미리 궁수들에게 표적을 알려준 터라 실수가 없다. 마당 건너편 담장 위에 상반신을 내놓은 궁수 20여명이 쏜 것이다. 거리는 30보 미만이었으니 단 한발도 빗나가지 않았다. 주연 좌석이 술렁거렸다가 곧 잠잠해졌다. 그때 화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이 더러운 놈들의 시체를 치워라! 그러자 청 안채에서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시체들을 떠메고 내려갔다. 다시 청 안이 조용해졌을 때 계백이 입을 열었다. 대왕께는 내가 따로 말씀 올리겠다. 수군항의 역적 무리는 이것으로 소탕한 셈으로 치겠다. 계백의 시선이 수군항의 남은 장수들에게 옮겨졌다. 너희들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을 것 아닌가? 방관은 동조보다 더 비겁하고 나쁘다. 계백의 목소리가 엄격해졌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국창의 반역에 가담한 무리만 제외하고 내가 사면을 해줄 테니 그것을 대왕에 대한 충성으로 보답하라. 남은 수군항 장수들이 머리를 숙였고 윤진이 대표하듯이 말했다. 덕솔께서 수군항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이제는 마음 놓고 육지의 군사들과 함께 해적을 격멸시킬 수 있습니다. 주연이 끝난 후에 청 안에는 계백화 화청, 육기천과 윤진, 백용문 등 한산성과 수군항의 주요 지휘관만 남았다. 덕솔, 수군항의 장졸이 뒤숭숭 할 것입니다, 하룻밤에 지휘관 다섯이 떼죽음을 당한 데다 지난번에는 국창 이하 지휘관 여섯이 몰사했지 않습니까? 윤진이 말을 이었다. 남은 장졸을 위무시켜 주셔야 됩니다. 윤진은 35세. 10여년간 전장을 누빈 무장이다. 수군항의 수병장(水兵將)으로 배속받은 것은 3년전. 그동안 전선을 타고 바다 건너 담로까지 여러 번 다녀왔다고 했다. 그때 계백이 말했다. 기강이 풀린 군대를 위무해준답시고 어루만지면 더 느슨해지는 법. 이번에 전 선단을 이끌고 해상 순찰을 나가도록 하지. 계백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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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6.03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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