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4-11-29 01:51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문화 chevron_right 불멸의 백제

[불멸의 백제] (145) 8장 안시성 ①

고구려는 대국(大國)이다. 그래서 수양제가 수천 리 원정길에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결국 패퇴했다. 이번에는 안시성이다. 요동성까지 함락시켰지만 당군은 안시성에 막혔다. 고구려 중심에 위치한 요동성,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않고 대군을 진입시켰다가 퇴로가 막히면 전멸이다. 그래서 대국인 것이다. 하루 이틀에 고구려 도성까지 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양제는 군량미 수송마차가 수천 리에 뻗쳤기 때문에 수만 명의 병사가 굶어죽었다. 그 긴 수송로를 고구려군이 토막을 내었기 때문이다. 안시성, 이제 당황제 이세민이 안시성 앞에 와 있다. “백제군 대장이 누구라고 했느냐?” 진막 안에서 이세민이 묻자 우성문이 먼저 대답했다. “예, 은솔 벼슬의 계백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놈이 동쪽의 백제령 출신이라고 했던가?” “예, 연남군 출신입니다.” “으음, 거머리 같은 족속들.” 둘러앉은 장수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우성문에 이어서 당황제 이세민이 주력군을 이끌고 온지 열흘째, 어제는 30만 대군이 성을 둘러쌓고 하루종일 공성전(功城戰)을 펼쳤지만 사상자만 수천을 내고 물러났다. 안시성 안의 고구려 백제 연합군은 4만이 안 되고 주민은 3만여 명, 군민(軍民)이 힘을 합쳤다고 하지만 하루 이틀에 함락시킬 작정이었는데 만만치가 않다. 이세민이 머리를 돌려 요동총독 서위를 보았다. “그놈의 용병술이 대단한가?” “백제왕의 총애를 받는 무장(武將)이라고 합니다.” “백제왕이 총신을 연개소문한테 보낸 것이군.” “예, 연개소문과 백제왕 의자가 뜻이 맞은 것입니다.” “두 놈이 동맹을 맺고 천하를 차지하겠다는 말인가?” 서위가 숨만 삼켰고 둘러선 장수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당(唐)도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 첩자를 보내거나 심어놓은 간자(間者)를 통해 양국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이세민이 물었다. “서위, 그대는 양광시대에도 장군을 지냈으니 잘 알 것이다. 양광이 고구려에 친정(親征)한 것과 내가 친정을 한 것이 무엇이 다르냐?” 서위가 머리를 들었다. 양광(楊廣)은 수(隋)의 양제(煬帝)를 말한다. 서위는 이때 65세, 노신(老臣)이다. “폐하, 양광은 말년에 황음무도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었지만 폐하는 성군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다른 점입니다.” “두 번째 다른 점도 있는가?” “예, 당군(唐軍)은 수군(隋軍)에 비하여 기동력이 강하고 전의(戰意)가 투철하며 용병입니다. 수는 농민을 끌어모아 숫자만 채운 잡군이었습니다.” “또 있는가?” “예, 그 당시의 고구려는 영양왕이 을지문덕과 함께 수군을 맞았으나 지금은 연개소문이 정권을 탈취하여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대당(大唐)과 대적하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고구려 민심은 연개소문을 떠나 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안시성주 양만춘을 회유할 수는 없느냐?” 그때 서위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이세민이 말을 이었다. “고구려는 대국(大國)이다. 당과 맞설 대국이 있다면 천하에 고구려와 백제 두 왕국 뿐이다. 수의 양광은 오만했기 때문에 멸망했다. 나는 양광과 다른 방법을 쓰겠다.” 이세민이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양만춘에게 밀사를 보내라. 계백에게도 밀사를 보내 회유해보도록 하라. 연개소문에게 불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계백에게는 담로의 왕으로 봉해준다고 해라.”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26 17:28

[불멸의 백제] (144) 7장 전쟁 20

난전(亂戰), 7천의 당군을 5천의 백제군이 어지럽게 물어뜯었다. “백제군 대덕 윤창이 당의 장수를 베어 죽였노라!” 가끔 소리쳐서 무공을 뽐내는 장수가 있다. “군사 막태가 은투구를 쓴 장수의 목을 베고 머리통을 차지했다!” 그때마다 함성이 울렸다. 당군 측에서도 외침이 울렸지만 이미 백제군에 밀려 사분오열이 된 상태, 백제군은 소규모 기마대로 나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당군은 이리 몰리고 저리 기는 상황이다. “당군 중심의 장수를 베었다!” 외침이 일어났을 때는 한식경쯤이 지난 후다. 그 이후부터 당군은 더욱 혼란에 휩싸여 흩어졌다. 다시 한식경이 지났을 때 계백이 소리쳤다. “회군!” 호각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면서 백제군이 대별(隊別)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진퇴가 재빠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무엇이? 석범이 죽었어? 유충도?” 버럭 소리친 우성문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던졌다. 술잔이 날아가 부장의 가슴에 맞고 떨어졌다. 깊은 밤 인시(오전 4시) 무렵이다. 목책 밖으로 나간 기마군 7천은 하나둘씩 귀환했는데 모두 2천여기밖에 안되었다. 5천기가 죽거나 황무지에 버려져 있는 것이다. 말도 1천여기밖에 돌아오지 못했으니 참담한 패전이다. 더구나 장군 셋이 나가서 부장 하나만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때 옆에 서 있던 감군 곽영탁이 말했다. “대장군, 기마군 3만 5천에서 7천을 잃었으나 2만 8천기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사기에 영향이 있으니 오늘밤의 전황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과연.” 우성문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감군은 현명하시오.” “모두 폐하께 승전보를 바치려는 일념을 품고 있지 않습니까?” 곽명탁은 우성문이 이세민의 최측근인 줄 아는 것이다. 감군으로 우성문을 감독하는 입장이었지만 아부를 한다. 군사 7천쯤은 안중에 없는 것이다. 안시성으로 돌아온 계백이 마당에서 내리지 않은 채 기마군을 점검했다. 백제군의 부사령 역할인 나솔 화청이 점검을 마치고 계백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고덕 하용과 문독 용비, 좌군 연신, 사현이 죽고 덕품(德品) 3명, 12품 이하 4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212명이 전사했거나 귀환하지 못했고 248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계백이 듣기만 했고 화청의 말이 이어졌다. “은솔, 쉬게 하겠소.” “잘 싸웠어.” “힘껏 싸웠습니다.” 사방에 횃불을 켜 놓아서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펴고 화청이 말을 이었다. “잘 싸웠으니 사기가 일어날 것이오.” 화청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계백 옆에 말 없이 서있던 양만춘이 입을 열었다. “강군(强軍)이오.” 계백의 시선을 받은 양만춘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용장 밑에 약졸이 없다는 말을 실감하였소.” “과찬의 말씀이오.” “당군의 말 1천여필까지 끌고 오다니 백제군의 기동은 놀랍습니다.” 백제군은 성으로 돌아오면서 주인을 잃고 떠도는 당군의 말 1천여필을 전리품으로 끌고 온 것이다. 양만춘이 길게 숨을 품으면서 말했다. “지원군이 패퇴해서 사기가 떨어진 상황에 백제군의 대승은 가뭄에 내린 소낙비 같소. 대륙에 백제군의 용명을 떨치셨습니다.” 동맹군에게도 가볍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25 20:31

[불멸의 백제] (143) 7장 전쟁 19

밤하늘에 솟은 불화살 2개, 그리고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4번 울렸다. 황무지 끝쪽의 당군 목책을 돌아가던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가자! 적 기마군이 나왔다! 계백이 말에 박차를 넣으면서 소리쳤다. 기마군의 방향은 북쪽이다! 불화살은 기마군이 나왔다는 표시고 호각소리 4번은 북쪽이다. 그것은 10개 기마부대가 들었을 테니 모두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것이다. 이것이 백제군의 전략이다. 5백기씩 10개 부대로 나뉘어 사방의 진지를 어지럽게 밖에서 화공(火攻)을 퍼부은 후에 적이 나오면 순식간에 모이는 것이다. 불을 꺼라! 목책 밖에서 스쳐 지나면서 불화살을 쏜 터라 이쪽은 진막이 불에 탔다. 불화살은 날아오는 불덩이다. 소경이 아닌 이상 불덩이에 맞는 군사는 없다. 진막과 쌓아놓은 군량, 모아놓은 말떼를 겨냥하고 쏘아서 어떤 부대는 말떼가 목책 밖으로 달아났다. 당군의 진영은 혼란에 휩싸였지만 인명 피해는 적다. 기마군 7천이 나갔습니다! 부장 하나가 달려와 보고 했을 때는 화공이 시작된지 한식경쯤이 지난 후다. 장군 석범이 중랑장 유충, 빈우장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우성문이 머리만 끄덕였다. 물자 피해는 예상보다 적다. 목책 안의 진막 3할 정도가 불에 탔고 군량은 거의 잃지 않았다. 말떼도 5백여필이 도망쳤지만 소란에 비하면 약소하다. 그때 우성문이 호각소리를 또 들었다. 이번에는 3번이 계속 울린다. 저 호각소리가 귀에 익다. 우성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남쪽에서 들은 것 같은데. 머리를 기울였던 우성문이 혀를 찼다. 나이가 들면 약해지는 부분이 있다. 기억력이다. 호각소리 4번이 물에만 밥을 삼키는 간격으로 세번째 울렸을 때 백제군 3천이 사방에서 당군을 압박했다. 사방에 퍼져있던 5백기씩의 백제 기동군이 호각소리를 듣고 모여든 것이다. 마치 피냄새를 맡고 달려든 상어떼와 같다. 피냄새는 호각이다. 네번째 울렸을 때는 8개대(隊) 4천 기마군이 달려들었고 다섯번째 울렸을 때의 광경은 장관이었다. 처음에 당군 중심부에 설치된 중군(中軍)의 거대한 진지에서 목책 밖으로 뛰어나온 기마군 7천은 우선 앞에서 불화살을 쏴대고 도망치던 백제 기마군 제4대(隊)를 쫓았다. 장덕 백용문이 이끄는 5백기다. 백용문의 기마대가 즉시 북쪽으로 도망치면서 밤하늘에 불화살을 쏘았고 호각을 불어 재낀 것이다. 그러나 제 4대는 미끼다. 뒤에서 물려고 달려오는 대어(大漁)를 끌고 가는 미끼다. 그래서 꼬리 부분이 다 뜯겼고 몸통까지 손상을 입었다. 5백 기마군중 2백여기가 희생되었다. 그 사이에 백용문은 당군을 굴곡이 많은 북쪽 황무지로 유인했고 그 사이에 계백까지 지휘하는 백제 기마군 10개대에 둘러싸이게 된 것이다. 쳐라! 적이 눈앞에 펼쳐지자 장졸의 눈이 뒤집혔다. 와앗! 외침과 탄성이 함께 일어났고 사방에서 백제군이 달려들었다. 같은 밤, 당군은 기마군 7천의 대군이다. 7천이 한개의 목표로 돌입하면 10만도 깨뜨릴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양상이다. 7천 기마군은 목표를 잃었고 사방 열 군데에서 물어 뜯기기 시작했다. 시력을 잃은 고래가 10마리의 상어에게 물어뜯기는 것과 같다. 같은 밤, 대륙에서 피바람이 불고 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24 19:36

[불멸의 백제] (142) 7장 전쟁 18

“경비를 배로 늘려라.” 우성문이 부장에게 지시했다. “사방에 목책을 쌓고 통로는 한 면에 한 곳만 만들어라. 적진 앞에 도착한 첫날에 대부분 야습을 당한다.” 우성문은 수십 번 전쟁을 치른 용장이다. 세월이 지나면 살아남은 용장(勇將)이 지장(智將)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른바 지용을 겸비한 장수가 되는 것이다. 우성문이 바로 그 예다. 19년 전,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이세민이 태자인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였을 때 우성문은 원길을 베어 죽였다. 이세민에게는 피보다도 진한 심복이다. 그때는 하루종일 싸워도 지치지 않았던 20대의 장수였지만 지금은 경륜까지 쌓은 대장군이다. 밤 해시 무렵, 술과 고기를 좋아하는 우성문이 술에 취해 마악 잠이 들 무렵에 수선거리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소리쳐 물었더니 곧 위사장이 진막 안으로 들어서서 보고했다. “적 정탐병들이 목책 밖을 지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 그놈들이 귀머거리에 장님이 아니다.” 그러나 우성문이 침상에서 일어나 비스듬히 앉았다. 진막의 불은 켜 놓아서 위사장의 긴장한 얼굴이 드러났다. “대장군, 사방의 목책 주위에 정탐병이 있습니다.” “사방에?” 우성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초저녁, 유시(6시) 경에 이곳 황무지에 도착해서 해시(10시)기 되었을 때까지 진(陣)의 목책 공사를 한 후에 마악 전군이 쉬고 있는 참이다. 10만 군사의 진은 사방 20여리에 걸쳐서 수십개의 진(陣)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우성문이 곧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안시성의 전 군사가 나와도 우리 진을 포위 못한다. 목책을 굳게 지키고 기마군을 보내 쫓아라.” 그때다. 밖에서 함성과 북소리가 울렸기 때문에 우성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만큼 소음이 컸기 때문이다. “무엇이냐!” 우성문이 소리쳤을 때 진막 안으로 당직 사령이 들어섰다. “대장군! 화공이요!” 소리친 사령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놈들이 사방에서 불화살을 쏩니다!” “쏘아라!” 화청이 소리치고는 달리는 말에서 시위를 힘껏 당겼다가 놓았다. 화살촉에 기름뭉치를 낀 불화살이 어둠속을 날아갔다. 밤하늘에 수백대의 불화살이 마치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당군 진지로 쏟아졌다. 목책 밖을 내달리면서 쏘는 불화살이다. 벌써 진막 10여개는 불이 붙어 화광이 치솟고 있다. 화청이 이끄는 5백기의 기마군이 당군 진지 하나를 지나 옆쪽 진지로 다가간다. 옆쪽 진지도 불길이 솟고 있었는데 이미 일대(一隊)의 백제 기마군이 불화살을 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백제 기마군은 각각 5백기씩 10대(隊)로 나뉘어져 당군의 진지를 밖에서 휩쓸고 지나간다. 한곳에 멈추지 않는 것이다. 당군 진지는 사방으로 목책이 둘러쳐져 있어서 들어가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나오기도 어렵다. 겨우 서너명이 들락일 수 있도록 출구가 좁은데다 4방에 각각 하나씩만 출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기마군이 나온다!” 외침소리가 들렸을 때는 진지 10여 곳에서 화광이 충천했을 때였다. 중군(中軍) 진영에서 일대의 기마군이 쏟아져 나와 백제군을 쫓기 시작했다. 기세가 사납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23 20:01

[불멸의 백제] (141) 7장 전쟁 17

근래의 3백년 동안 사마씨(氏)의 동진(東晉)이 겨우 1백년 간 왕조를 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북방의 5개 이민족은 130년간에 걸쳐 16개 왕조를 세웠으니 매년 전쟁이 일어난 것과 같습니다. 양만춘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었다. 허나 고구려, 백제는 이미 대국(大國)으로 600년이 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소. 대륙 북방과 동방을 차지한 고구려, 백제가 천하를 통일할 기반이 갖춰진 것과 같습니다. 과연. 감동한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왕국의 역사는 연륜(年輪)과 같다. 나이든 고목처럼 뿌리가 깊게 번지고 가지가 넓게 퍼지며 잎이 번성한다. 중원의 역사는 어떤가. 천하를 통일했다는 수(隨)는 대륙의 중부와 남부만 소유했는데도 겨우 3대 37년에 멸망했고 그 뒤를 이은 당(唐)은 이제 30년도 안 된다. 백제, 고구려는 단일민족으로 1천만이 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수십개 이민족과 왕국을 조합한 당은 인구가 4천만 남짓이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그날 밤 백제, 고구려 양국의 장수들은 대취했다. 사기가 충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날 오전, 안시성 동북방 50리 지점의 황무지를 통과하던 안시성의 지원군 5만이 매복하고 있던 당군(唐軍)의 기습을 받았다. 고구려군을 이끌던 고성군, 고영모 두 대장군이 필사적으로 응전했지만 대패하고 군사는 사분오열이 되었다. 안시성의 지원군은 먼저 달려온 백제군 5천뿐이었다. 패잔병의 전갈을 들은 양만춘이 비장한 표정으로 계백에게 말했다. 장군, 당군이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시키고 이제 지원군까지 패퇴시켰으니 사기가 충천해 있을 것이오. 묘책이 없겠습니까?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제가 백제군을 이끌고 당군을 기습하고 돌아오지요. 성루에 서서 앞쪽을 응시하는 장졸들은 곧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구름을 보았다. 계백이 말을 이었다. 곧 당의 주력군이 오기 전에 기습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남쪽 성문으로 나가서 북쪽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미 성 밖 지리는 눈에 익혀둔 계백이다. 양만춘이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기마군 얼마를 끌고 가실 겁니까? 5천을 다 끌고 갑니다. 계백이 손을 눈 위에 붙이고 태양을 보았다. 오후 미시(2시) 무렵이다. 주위에 둘러선 장수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아직 당군의 전력은 알 수가 없다. 밤에 야습을 하겠습니다. 계백이 머리를 돌려 양만춘을 보았다. 전장에 도착한 날은 진지가 허술한 법입니다. 그 첫날 밤에 적진을 흔들어 놓지요. 담로에서 여러번 당군과 접전 해보셨을 테니 맡기겠습니다. 당군은 이세민이 서북방 이민족의 전술을 자주 쓰는 바람에 이제는 밤에 기동하는 적이 드뭅니다. 허어. 감탄한 양만춘이 계백을 보았다. 이세민이 동생의 처를 빼앗아서 황후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선비족 풍습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하더니 전쟁도 선비족 전술을 쓰는군요. 만난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양만춘이 아직 20대인 계백에게 점점 진심으로 감동하는 기색을 내보였다. 계백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대륙의 한족도 곧 백제, 고구려 족(族)의 지배하에 들 것입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22 19:25

[불멸의 백제] (140) 7장 전쟁 16

“안시성이오!” 척후장이 달려와 소리쳤을 때는 해시(오후 10시)가 되어 갈 무렵이다. 기마군은 아침에 본대에서 떼어져 2백여 리를 주파한 후에 안시성에 가까워진 것이다. “10리 거리입니다!” 다가온 척후장이 말고삐를 채어 계백과 나란히 걸으면서 말을 이었다. “성 안으로 전령을 보냈으니 곧 마중을 나올 것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뒤를 따르는 전령장에게 말했다. “대오를 정비하고 평보(平步)로!” 곧 전령이 앞뒤로 뛰면서 외침이 울렸고 기마군은 속보에서 평보로 걸음을 늦췄다. 잘 훈련된 기마군이다. 선봉, 중군, 후위, 3개 대(隊)로 나뉘어 행군을 하면서도 계백은 수시로 진용을 바꾸었다. 선봉을 기마군 1500, 중군을 2000, 후미 1500으로 나누었다가 1000, 3000, 1000으로 또는 500, 3500, 1000으로 달리면서 변형을 시키는 것이다. 아침에 출발하여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십 번 진용을 바꾸고 수십 번 공격 연습을 했다. 이제는 진군(進軍) 자체가 공격이며 방어가 된다. 북소리, 날카롭게 부는 호적 소리 몇 번으로 대군이 움직이는 것이다. 기마군이 짙게 어둠이 덮인 산기슭을 돌아 갔을 때다. 다시 앞에서 대열이 흐트러지더니 다가오는 수십 기의 말굽소리가 울렸다. 그때 먼저 달려온 전령이 소리쳤다. “안시성주께서 오시오!” “성주가?” 성주가 성 밖까지 마중을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백이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곧 앞쪽에 불빛이 보이더니 횃불을 든 기마군 셋이 달려왔고 그 뒤를 일대의 기마대가 따라왔다. 그 중심에 선 장수가 안시성주인 것 같다. 계백이 말을 멈췄을 때 그쪽도 다가와 마신(馬身)의 거리를 두고 멈췄다. “안시성주 양만춘이오!” 턱수염이 짙은 장수가 소리쳐 인사를 했다. 어둠속에서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백제국 은솔 계백이오! 대막리지 전하의 명으로 지원군으로 왔습니다.” 계백도 소리쳐 말하자 장수가 웃음 띤 얼굴로 다가와 말고삐를 틀었다. “잘 오셨소.” “이렇게 나와 주셔서 반갑습니다.” 이제 두 장수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안시성으로 다가간다. 곧 눈앞에 안시성의 위용이 드러났다. 성벽에 횃불을 켜 놓아서 윤곽이 다 드러났다. 깃발이 정연하게 꽂혀있고 군사들도 보인다. 그때 양만춘이 말했다. “대막리지께서 은솔이 떠나신 후에 지원군 3만을 더 보내셨다고 합니다.” “안시성의 수비군은 얼마나 됩니까?” 계백이 묻자 양만춘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기마군 5천에 보군 3만입니다. 이제 기마군 1만이 되었으니 공수(攻守)를 함께 운용할 수가 있겠소.” 안시성은 평지에 세워진 평성(平城)이다. 그러나 화강암으로 기반을 굳힌 성벽의 높이는 30자(9m), 성벽 위의 넓이가 15자(4.5m)나 되어서 성벽 위로 마차가 다닐 수가 있고 군사의 이동이 가능했다. 그날 밤, 안시성주 양만춘 이하 장수들과 백제군 장수들이 둘러앉아 주연이 벌어졌다. 성안의 넓은 청에는 1백 명 가까운 장수들이 모였다. 양만춘은 미리 소, 돼지, 양을 수백 마리 잡아서 군사들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에 성안은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요동성, 백암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에 위축되었던 고구려군에게 활기가 일어났다. 장수들끼리 인사를 마쳤을 때 술잔을 든 양만춘이 계백에게 말했다. “중원(中原)에 수많은 왕조가 일어났다가 수십 년만에 멸망을 했소.” 양만춘의 말이 이어졌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19 19:53

[불멸의 백제] (139) 7장 전쟁 ⑮

자, 그때 이세민은 어쩌고 있었는가? 요동성에 이어서 백암성까지 함락시킨 이세민은 그야말로 사기가 충천한 상태이다. 여기는 백암성 옆쪽 황무지에 세워놓은 황제의 진막 안이다. 백암성도 길이가 20여리나 되는 대성(大城)이지만 장안성의 황궁에 비하면 오두막이라 이세민은 원정 기간동안 진막을 치고 기거했다. 그 진막이 길이가 2백자(60m)요, 넓이도 그만하고 높이는 20자(6m)로 1백명이 들어가도 빈자리가 많은 임시궁전이다. 진막은 겉을 양가죽과 비단을 이중으로 겹대었고 침상은 원정용으로 특별 제작했다. 황제의 진막을 운반하는 데만 마차 1백대가 필요했고 거기에 시중드는 시녀가 10여 인이다. “이제 안시성만 거치면 평양성까지는 골짜기에서 물 쏟아지듯이 진군하게 된다.” 이세민이 술잔을 들고 말했다. 술기운이 오른 이세민의 얼굴빛이 붉다. “연개소문이 백제의 지원군과 함께 요동성으로 가려다가 안시성으로 방향을 돌리겠구나.” “예, 폐하. 지금 요동성 동쪽 1백여리 지점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안시성까지는 2백여리, 이곳에서도 그 정도의 거리다. 이세민이 앞쪽에 앉은 대장군 우성문에게 말했다. 우성문은 현무문의 난 때 공을 세운 이세민의 측근이다. “대장군, 그대가 10만 군사를 끌고 가서 안시성으로 오는 연개소문의 지원군을 격멸시켜라.” “예, 폐하.” “연개소문의 군사가 10만에서 15만이라고 하니 5만쯤을 안시성으로 보냈을 것이다.” “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겠습니다. 폐하.” “네가 안시성의 지원군을 차단하면 이번 전쟁의 1등공이 될 것이다.” “목숨을 걸고 차단하겠소.” “백제의 지원군 규모가 기마군 5천이라고 했으니 시늉만 낸 것이야.” 이세민이 원정군의 부장(副將)격인 요동총독 서위에게 물었다. 서위는 65세로 수양제의 장수로 고구려 원정에 나갔다가 요동성에서 패퇴한 전력이 있다. 33년 전이다. “총독, 그대는 백제군 담로와의 전쟁도 겪어보았을 것이다. 백제군의 전력이 어떠냐?” “소장이 백제군의 지원군 대장 계백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서위가 말하자 이세민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이 가늘어져 있다. 곧 서위의 말이 이어졌다. “백제령 담로 연남군의 기마대장을 지내다가 본국으로 간 놈인데 임기응변이 능하고 용맹합니다.” “그대의 칭찬을 받을만한가?” “예, 소장하고는 접전이 없었지만, 그자를 겪은 여러 무장한테서 들었습니다.” “기마군 5천을 이끈다니 선봉으로 쓰기는 적당하겠다.” 혼잣말한 이세민이 손짓을 하자 곧 옆쪽 장막이 젖혀지더니 휘황한 옷차림의 귀인(貴人)이 나타났다. 둘러앉은 장수들이 모두 머리를 숙였고 시녀 둘의 부축을 받은 귀인이 하늘거리며 다가와 이세민의 옆자리에 앉는다. 불빛을 받은 얼굴이 요염했다. 전장이었기 때문인지 더욱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미녀다. 이세민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 여자는 이세민이 19년전 현무문의 난 때 죽인 동생 원길의 처 양씨(楊氏)다. 이세민은 동생의 처를 빈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전처인 은덕황후가 죽은 후로 양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지만, 중신들이 반대해서 성사되지 않았다. 형제를 죽이고 그 처를 차지한 이세민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18 21:20

[불멸의 백제] (138) 7장 전쟁 ⑮

요하를 건넌 당(唐)의 대군은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수 양제가 함락시키지 못했던 요동성이다. 이번에는 당군의 기세가 맹렬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요동성 수비군이 방심했던 것이 함락의 원인이었다. 수 양제는 1백만이 넘는 대군을 지휘하여 요동성을 석달 이상 공략했다가 결국 패퇴했던 것이다. 요동성은 성벽 높이가 30자(9m)에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서 포차의 돌에 맞아도 부서지지 않았고 구름사다리인 운제가 소용이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다. 요동성주는 당군의 기만술에 속아 성밖으로 공격해 나왔다가 성문이 닫치기도 전에 당군이 밀고 들어가는 바람에 어이없이 함락을 당했다. 요동성 옆의 백암성까지 함락당했을 때 당군의 사기는 충천했고 고구려군은 당황했다. 적을 가볍게 본 결과가 이것이다. 연개소문이 진막 안에서 말했다. 저녁 술시(8시) 무렵, 이곳은 요동성에서 1백여리 떨어진 황무지, 려제의 기마군 10만이 주둔하고 있는 터라 황무지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연개소문이 모여 앉은 1백여명의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요동성주가 수성(守城)만 했다면 1년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 말이 없다. 맞는 말이다. 요동성 안에는 7만 가까운 병사가 있었던 것이다. 7만으로 1백만의 공격도 막아낼 수가 있다. 이세민은 10만의 병력으로 요동성을 공격 시켰다가 사흘안에 함락시켰다. 난공불락의 성이 아니더라도 성을 함락시키려면 최소한으로 수비군의 3배 이상의 병력을 가져야 가능한 것이다. 이세민이 30만을 다 풀었어도 요동성은 견딜 수가 있었다. 그때 이번에 부장군(副將軍)으로 참전한 남부대인이며 막리지인 양성덕이 말했다. 안시성(安市城)이 당군의 진로(進路)에 있습니다. 안시성에서 당군을 저지시키면 됩니다. 연개소문이 머리를 들었다. 그렇다. 이세민을 그곳에서 막고 우리는 우회해서 장안성을 친다.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이 건무의 처단에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다. 막리지인 연정토가 말을 이었다. 지난번 왕의 부름을 받고도 오지 않았습니다. 대막리지 전하. 그놈이 건무의 측근이었지. 쓴웃음을 지은 연개소문의 시선이 계백을 스치고 지났다가 돌아왔다. 은솔, 그대가 가 주겠는가? 어디로 말씀입니까? 안시성으로 가주게. 가지요. 대번에 승낙한 계백이 말을 이었다. 지원군으로 가서 싸우겠습니다. 그대는 백제군 사령관이야. 양만춘의 휘하에서 지원군 역할은 맞지 않는다. 연개소문이 엄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는 독전군(督戰軍) 사령으로 임명할테니 백제군을 이끌고 가서 양만춘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감독하라. 예, 대막리지. 기막힌 용인술이다. 양만춘은 고구려군 장수가 독전군으로 온다면 반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맹군인 백제군 장수가 기마군 5천을 이끌고 독원군 역할로 와서 독전을 한다면 부담이 없을 것이다. 연개소문이 말을 이었다. 내가 양만춘을 알아. 그놈은 고구려를 배신할 놈은 아니야. 그대와 손발이 맞을 것이다. 내일 일찍 떠나지요. 당군을 격파하면 백제군을 이끌고 내게로 오게. 내가 장안성의 미녀를 다 모아 놓겠네. 연개소문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17 18:36

[불멸의 백제] (137) 7장 전쟁 ⑬

재상 저수량(楮遂良)은 이세민이 친히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출정 전날까지 진막에 찾아와 간했다. 폐하, 수나라가 멸망한 것을 교훈으로 삼으소서. 친정을 하시겠다면 5년만 더 기다렸다가 하시옵소서. 5년? 이세민이 턱을 들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관 19년, 현무문의 난을 일으켜 형이며 태자인 이건성을 죽이고 동생 원길까지 참살한지 19년이 되었다. 이제 이세민의 나이 47세, 제위에 오른지 19년,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천하를 지배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봐라, 그럼 너는 고구려, 백제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느냐? 이세민이 묻자 저수량은 당황해서 엎드렸다. 폐하,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오. 어찌 그 야만국이 대당(大唐)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고구려는 대륙의 3할을 차지한데다 백제의 담로는 대륙 동부에 22개나 영역을 뻗쳐놓았다. 당(唐)은 그 가운데 낀 소국(小國)이다. 그렇지 않으냐? 아니옵니다. 저수량이 이마를 땅바닥에 붙였다가 떼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대당(大唐)은 390만호에 4천만 가까운 인구를 가진 대국(大國)으로써 고구려, 백제는 합하면 150만호에 1500만 가깝게 된다. 더구나 같은 말을 쓰는 같은 뿌리의 민족이야. 우리처럼 10여개 영역에다 수십개 민족으로 만들어진 혼성국이 아니란 말이다. 이세민의 목소리가 진막을 울렸고 제장, 대신들은 숨을 죽였다. 고구려, 백제가 연합했다. 놈들의 연합이 더 굳어지기 전에 깨뜨려야 되지 않겠는가? 그놈들이 신라까지 병합시킨다면 당(唐)은 중원을 잃고 서쪽으로 밀려나야 되지 않겠는가? 저수량이 마침내 입을 다물었고 이세민이 머리를 들었다. 충심(忠心)은 알겠다. 그러나 내 나이가 5년을 더 기다리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이세민이 마지막으로 나이를 내세웠기 때문에 더 말하는 자는 참형을 당할 것이었다. 황제 생전의 숙원을 무시한 역적으로 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자, 여기는 고구려, 려제(麗濟)동맹군이 요동을 향해 서진(西進)하고 있다. 평양성을 떠난지 15일, 이제 동맹군은 기마군 7만으로 늘어났다. 중군(中軍)에 위치한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과 백제군 사령단 계백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속보로 말을 걸린다. 이보게 은솔. 연개소문이 계백을 불렀다. 우리 대(代)에는 기필코 우리가 대륙의 중심이 되어야 하네. 계백의 시선을 받은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백제의 동성대왕이 대륙에 진출하여 담로를 건설한지 170년이 되어가는가? 그렇습니다.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제가 태어난 연남군도 그때 백제령이 되었습니다. 담로가 없어지면 대륙 왕조의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을 거네. 연개소문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네. 이긴 자가 역사를 차지하고 패자는 흔적도 없이 기록에 지워진다네. 그리고 전설이나 야사로 남다가 그것도 지워질 것이다.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문득 김춘추의 얼굴이 떠올랐다.

  • 문화일반
  • 기고
  • 2018.07.16 20:29

[불멸의 백제] (136) 7장 전쟁 ⑫

계백이 연개소문을 만난 것은 황산벌에서 출발한 지 열흘 후다. 평양성 남쪽 벌판에서 기다리던 연개소문이 계백의 인사를 받고 활짝 웃었다. 이보게 은솔, 백제군(軍)의 기동력이 뛰어나구만. 전령의 보고를 받고 서둘러 나왔다네. 치중대에 맞추느라 늦은 편입니다. 기마군만으로는 하루 4백리도 갈 수 있지만 군량을 실은 치중대까지 함께 움직이는 터라 그 절반 속도밖에 내지 못했던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까지 기마군이 발달하여 당(唐)에서는 3국(國)을 기마족이라고도 부른다. 휘하 장수들을 인사시킨 계백과 연개소문은 진막 안으로 들어섰다. 연개소문이 이끌고 온 고구려군 3만도 황야에 포진되어 있다. 1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진막 안에는 고구려, 백제군 장수들이 둘러앉았다. 오후 유시(6시)무렵이다. 연개소문이 먼저 계백에게 말했다. 은솔, 첩자의 보고에 의하면 김춘추가 이번에는 장안성에 갔다네. 아마 지금쯤 이세민을 만나고 나서 신라로 돌아가는 중일 거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연개소문을 보았다. 당에 가는 김춘추를 잡았다가 놓아 주었지요. 무슨 말인가? 놀란 연개소문이 눈을 치켜떴고 고구려 장수들이 웅성거렸다. 계백이 김춘추를 생포하고 의자왕 앞으로 끌고 간 후에 해상에서 놓아준 사연을 이야기하는 동안 진막 안은 탄성이 자주 일어났다. 김춘추가 헤어지기 전에 부사(副使) 일행을 처치해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에서는 연개소문까지 신음을 뱉었다. 이윽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연개소문이 머리를 저었다. 죽였어야 했어. 나도, 백제왕께서도 실수를 한 것 같네. 여왕 다음에 비담이 신라왕으로 되는 것보다 김춘추가 낫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김춘추, 그놈이 나는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네. 정색한 연개소문이 흐려진 눈으로 계백을 보았다. 그놈을 한신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온갖 수모도 견딜 놈이야. 그런 놈의 약속을 믿는 자가 결국은 바보가 되지. 그자의 목적은 손바닥만 한 땅덩이의 신라왕일 뿐입니다. 계백이 웃음 띤 얼굴로 연개소문을 보았다. 대막리지께서는 신라보다 1백배나 더 큰 대륙을 딛고 계십니다. 대륙을 정벌하고 나시면 신라는 저절로 복속되어 올 것입니다. 그것이 백제왕 전하께서도 생각하신 것인가? 연개소문이 소리 내어 웃더니 그동안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자, 고구려 백제의 동맹군의 건승을 위하여 건배를 하세. 계백이 술잔을 들었고 둘러앉은 양국 장수들도 따라서 건배를 했다. 당황제 이세민은 대륙 동쪽과 북방을 지배하고 있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킨 것이다. 수양제가 1백만 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선 때가 서기 612년, 양제의 대업 7년째요 고구려 영양왕 23년째다. 그러나 고구려 을지문덕에 대패하고 총사령관 우문술은 목숨만 겨우 건졌다. 그것이 수의 패망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32년이 지난 서기 644년 당의 태종 18년째에 또다시 고구려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고구려, 백제를 멸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대륙 통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15 20:03

[불멸의 백제] (135) 7장 전쟁 ⑪

숙소로 돌아온 김춘추가 김법민에게 말했다. “너, 이세민 아래쪽에 낮은 이치(李治)를 보았느냐?” “예, 아버님.” “돼지도 그런 돼지가 없더구나. 어쨌든 그놈이 다음 황제가 될테니 놈의 비위를 잘 맞춰주도록 해라.” “예, 아버님.” 김법민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이제 김법민은 이세민의 시종으로 발탁이 된 것이다. 김춘추가 긴 숨을 뱉었다. “그놈, 이세민이 한 말을 들었겠지? 달콤한 말을 늘어놓은 자는 진심이 가볍다는 말 말이다.” “예, 아버님.” “나는 그것이 수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세민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달콤한 말에 중독이 걸린 놈이다.” 김춘추의 눈빛이 강해졌다. “지금은 지금 당이 고구려와 전쟁을 할 시기가 아니다. 위징의 말대로 국력을 더 길렀다가 나서야 한다.” “……” “이세민은 이제 교만해져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숙소의 방에는 둘 뿐이다. 이세민은 신라의 사신인 이찬 김춘추에게 영빈관도 내주지 않았다. 변방의 부족장이 공물을 바치려고 왔을 때 묵은 여관 한채를 정해주었을 뿐이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이세민이 30여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나간다고 하니 우리 신라한테는 잘된 일이야. 고구려와 백제가 당을 맞아 싸우느라고 신라를 넘볼 생각은 못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예, 아버님.” “이세민이나 돼지 이치가 너한테 고구려 백제에 대해서 묻거든 그놈들 때문에 조공길이 막혔다고 하거라. 신라인은 당의 속령이 되는 것을 소원이라고 하고.” “예, 아버님.” 머리를 든 김법민이 김춘추를 보았다. “아버님, 당황제께 신라군이 고구려, 백제의 후방을 공격할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지 않습니까? 아버님이 진두에 설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걱정이 됩니다.” “흐흐흐.” 짧게 웃은 김춘추가 곧 정색했다. “시늉만 내면 된다. 이세민이는 확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아.” “내가 이곳에 군관 셋을 남겨두고 갈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수시로 나에게 연락을 해야 된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너한테 대업(大業)을 맡겼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신라의 왕이 된다면 너는 그 뒤를 잇게 될 것이다.” 마침내 김춘추가 속심을 털어 놓았다.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김법민은 긴장했다.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비담이 왕위를 노리고 있으니 그놈 일당과 한번은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야.” 비담은 상대등으로 신라 제1의 실력자다. 진골 왕족들의 모임인 화백회의의 수장이기도 한 것이다. 화백회의에서 차기 왕을 뽑는 터라 수장은 왕 다음의 서열이다. 김춘추가 김법민을 보았다. “네가 이세민의 시종으로 있으면 비담 일파가 당의 지원을 얻으려고 오가는 것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살피고나서 나한테 연락을 해라.” “예, 아버님.” 김법민이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장안성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김춘추 부자(父子)의 밀담은 계속되는 중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12 19:59

[불멸의 백제] (134) 7장 전쟁 ⑩

“네가 김춘추냐?” 당황제 이세민이 물었다. 장안성 안 황궁의 청은 넓다. 붉은색 기둥이 늘어선 청 바닥은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대리석을 깔았다. 오늘은 황제의 친정 준비 때문에 문무백관이 다 모였다. 수백명의 신하가 좌우로 갈라져서 고관(高官) 순(順)으로 늘어선 광경은 보는 이들에게 위압감을 주고도 남는다. 화려한 장식,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청, 그러나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때는 정관 18년, 태종 이세민이 현무문의 난을 일으켜 태조 이연의 장남인 이승건, 막내아들 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된지 18년이 되었다. 형과 동생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지만 이세민은 당제국의 기초를 착실하게 닦았다. 그리고 이제 고구려 원정에 직접 나서려는 것이다. “예. 황제폐하.” 물음에 대답한 김춘추가 청 바닥에 부복했다. 뒤쪽의 김법민도 납작 엎드린다. 용상에 앉아있는 이세민과의 거리는 30보 정도. 김춘추는 이세민이 잡무를 처리 할 때까지 한시진 정도나 뒤에서 기다려야 했다. 16계단 위의 용상에 앉은 이세민이 김춘추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오다가 백제 해적을 만나 조공품을 다 빼앗기고 관리들까지 죽었다고?” “예, 황제폐하. 백제 해적이 아니라 백제 수군(水軍)이었습니다.” 머리를 든 김춘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臣)은 황제폐하의 은덕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이렇게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세민이 한계단 아래쪽에 앉은 황태자 이치(李治)에게 말했다. “태자, 잘 들어라.” “예, 폐하.” 이치는 작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세민은 황자가 14명 있었는데 그중 정비인 문덕황후가 낳은 황자는 장남인 황태자 이승건과 넷째아들 태(泰), 아홉째아들 치(治)였다. 그런데 이승건이 다리 병신인데다 행동이 괴팍했고 동성애자여서 결국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아끼던 태를 황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자 이승건과 이태가 서로 다투는 바람에 마지못해서 치(治)를 황태자로 책봉한 것이다. 그것이 작년이다. 이세민이 말을 이었다. “저런 달콤한 말을 늘어놓는자는 진심이 가볍다. 주의해야 한다.” “예, 폐하.” 대답한 이치가 지그시 김춘추를 노려보았다. 그때 이세민이 김춘추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여왕은 문제가 많다. 여왕이 다스리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의 무시를 받아서 빈번하게 침략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사내놈들이 그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단 말이냐?” “황공합니다, 폐하. 밀서를 실은 배를 백제 수군이 침몰시켜서 소신이 직접 여왕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하라.” “신라가 당의 속령으로 천년만년 남기 위해서는 백제 고구려를 멸해야 됩니다. 통촉하시옵소서.” “그래서 내가 고구려를 징벌하려고 준비했지 않느냐? 고구려 다음은 백제다.” “대당(大唐)은 천하를 통일할 것이옵니다.” “네가 귀국하면 후방에서 백제, 고구려를 쳐라. 네가 신라군 주장(主將)으로 당과 호응하도록 해라.” “예, 폐하.” 김춘추가 뒤에 엎드린 김법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 자식을 폐하를 모시는 시동으로 부려주시옵소서. 그것이 제 충심(忠心)이오니 부디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이세민이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과연 충신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11 17:36

[불멸의 백제] (133) 7장 전쟁 ⑨

황산벌에서 기마군 조련과 함께 출정 준비를 마친 계백의 5천 기마군은 엿새째 되는날 아침에 고구려로 출발했다. “은솔, 장졸들에게 중원의 지리를 읽히고 당군(唐軍)의 피맛을 보여줘라.” 황산벌까지 찾아온 의자가 계백에게 말했다. “곧 대륙이 우리 차지가 될테니까 말이다.” “예, 대왕. 명심하겠습니다.” 마상에서 절을 한 계백이 말에 박차를 넣었다. 백제 기마군 5천기가 떠난다. 각각 예비마를 2필씩 끌고 있는 데다 치중대도 말이 끄는 수레로 따르고 있어서 마필만 2만필 가까운 터라 땅이 울린다. 첨병대, 선봉군, 중군(中軍), 후군, 치중대로 정연하게 구분된 기마군의 전진 속도는 빠르다. 백제, 고구려는 기마군이 발달되어서 하루에 300리씩 진군할 수가 있다. 백제군은 사흘만에 고구려 영토로 진입했고 엿새가 되는날 오후에 고구려 도성에서 30여리쯤 떨어진 들판에서 고구려군과 만났다. 고구려군 장수는 남부대인 양성덕 휘하에 기마군 3천여기를 이끌고 백제군을 맞으려고 기다린 것이다. “장군, 대막리지께서 요동으로 떠나셨소. 제가 장군을 대막리지께 안내하겠소.” 인사를 마친 양성덕이 말했다. 양성덕과는 지난번 고구려에 갔을 때 얼굴을 익힌 사이다. “요동으로 가시다니? 당군이 침입했습니까?” 장수들과 인사를 마친 계백이 양성덕의 안내를 받고 진막으로 들어와 물었다. “당의 정탐대가 수시로 들락이는 상황이라 국경의 주민들을 피란시키고 있지요.” 양성덕이 말을 이었다. “이세민이 30만 군사를 장안에서 출발시켰다고 합니다. 이세민의 친정이요.” 당황제 이세민이 직접 지휘한다는 말이다.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이세민이 수양제의 전철을 밟으려고 하는군요.” “이 기회에 중원을 통일하겠다고 대막리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양성덕이 호기있게 말했다. “더구나 백제의 지원군까지 왔으니 천하통일은 눈앞에 왔습니다.” 곧 진막 안으로 양성덕이 준비한 술과 안주가 들어왔고 백제와 고구려 장수들이 어울려 주연이 벌어졌다.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졌고 진막안은 떠들썩해졌다. 술잔을 든 양성덕이 계백에게 물었다. “은솔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뒤늦게 축하드리오.” “감사합니다. 대인께서도 막리지가 되셨더군요.” 양성덕은 연개소문의 심복이다. 한모금에 술을 삼킨 양성덕이 계백을 보았다. “신라가 등을 칠 여유는 없겠지요?” “경계는 하고 있습니다.” “김춘추를 잡았다가 놓아 주셨지요?” 양성덕이 묻자 계백이 빙그레 웃었다. 김춘추는 당의 도성인 장안성에 들어갔을 것이다. 다시 술잔을 든 양성덕이 따라 웃었다. “그 소식을 듣고 대막리지께서도 웃으셨습니다. 김춘추가 신라 왕으로는 적합한 인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대왕도 그러셨지요.” “비담이 신라왕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요. 김춘추는 사태가 불리하면 제 목숨을 살리려고 신라를 내놓을 위인입니다.” 계백이 머리를 끄덕였다. 고구려에서는 신라와 백제의 합병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백제는 합병에 김춘추가 유리하다고 보고있는 것이다. 김춘추는 당왕 이세민을 만나기는 했을까?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10 20:36

[불멸의 백제] (132) 7장 전쟁 ⑧

“너는 은솔(恩率)이다.” 의자가 계백에게 말했다. 다음날 오전, 도성의 대왕전 안,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계백의 인사를 받은 의자가 말한 것이다. 이미 성충과 흥수로부터 귀띔을 받은 계백이 허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대왕.” 성충은 사양하지 말라고 했다. 너는 은솔이 되고도 남으니 당당하게 받으라고도 했다. 의자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받는구나. 상좌평이 그러라고 시키더냐?” “예, 대왕.” 도열해 앉은 백관들 사이에서 웃음이 번졌지만 성충은 물론 흥수, 의직 등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의자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정색했다. “도성에 기마군 5천이 모일 것이다. 열흘 간 조련을 하고 나서 고구려로 떠나도록 하라.” “예, 대왕.” “너는 연남군 기마군 대장으로 당군(唐軍)과 접전을 한 경험이 많다. 그래서 선발한 것이다.” “예, 대왕.” “연개소문 공(公)에게 대백제군의 위용을 보이도록 하라.” 이제는 의자의 표정이 엄격해졌다. 이것이 백제 지원군 파견의 주목적인 것이다. 당(唐) 태종 이세민은 내부 정비를 마치고 숙원인 고구려 원정을 떠나려는 것이다. 중원을 통일한 수 양제가 대륙 북부를 지배하고 있는 고구려를 정복하여 천하통일을 이루려다가 패망했다. 이제 수를 이어받은 당이 다시 천하통일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을 통합하면 대략 2천만 인구가 된다. 수 양제가 중원을 통일했을 때의 인구가 대략 4800만이었다. 그것도 10여 개의 이민족까지 모은 숫자다. 북방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단일민족으로 2천만인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더라도 천하통일이 가능하다. 그날 밤부터 계백은 도성에서 50여리 떨어진 들판의 진막에서 야영을 했다. 이곳에 기마군 5천이 모이는 것이다. 계백의 부장이 된 나솔 윤진이 진막 밖에서 어둠이 덮인 들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왼쪽이 장동석성(壯洞石城)이며, 가운데 있는 곳이 웅치산성(熊峙山城), 오른쪽이 황령토성(黃嶺土城)입니다.” 윤진이 이 근처가 고향인 터라 말을 이었다. “이 3개 성이 오래전에 세워졌지만 지금은 허물어지고 보수를 안 해서 수비군 백여명씩만 남아 있습니다.” 계백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에 산 윤곽만 드러난 산성들을 보았다. 도성 동쪽으로 가로막듯이 세워진 산성(山城)들이다. 계백이 앞쪽 들판을 눈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들판 이름이 뭔가?” “예, 황산벌이라고 합니다.” 계백은 3개 산성을 바라보며 서있다. 앞쪽에는 황산벌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윽고 머리를 든 계백이 윤진에게 지시했다. “나솔, 5천 군사를 각각 1500, 2000, 1500씩 나눠서 3개 산성에 주둔시키도록 하라.” “예, 은솔.” “주둔하면서 산성을 고치고 각 대별로 황산벌에 나와 기마군 훈련을 한다.” “예, 은솔.” 계백이 둘러선 장수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3개 대 대장은 윤진과 화청, 정찬이고 나는 정찬과 함께 중군을 맡겠다.” 계백이 손으로 3개 산성을 가리켰다. “나는 중심에 있는 웅치산성으로 가겠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09 20:08

[불멸의 백제] 7장 전쟁 ⑦

넌 태왕비께 돌아가라. 다음날 아침, 서진을 부른 계백이 말했다. 지금까지 태왕비의 시녀 서진은 계백의 관저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서진이 머리를 들고 계백을 보았다. 관저의 마룻방 안이다. 계백의 옆에는 고화가 서있다. 나리, 태왕비께서 찾지도 않으시니 저는 이곳에서 살겠습니다. 서진이 말하자 계백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고화도 놀라 듯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말이냐? 이곳에서 살다니? 예, 나리를 모시고 살게 해주십시오. 나를? 계백이 쓴웃음을 지었다. 태왕비의 시녀가 덕솔인 내 시중을 들겠다고? 예, 나리. 태왕비께서 허락하실까? 이미 태왕비 마마를 떠난 몸입니다. 그럼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라. 이곳만 빼고. 몸을 돌린 계백이 고화에게 말했다. 그대가 오늘 중으로 내보내도록 하시오. 아침에 한산성을 떠난 계백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 사비도성에 도착했다. 먼저 상좌평 겸 병관좌평 성충을 찾아가 인사를 한 계백이 그날은 성충의 저택에서 묵었다. 성충이 내신좌평 흥수와 도성에 와있는 동방방령 의직, 남방방령 윤충까지 저택으로 불러 그날 밤 주연이 벌어졌다. 다섯 명만이 모인 주연을 겸한 회의나 같다. 술잔을 든 성충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왕비와 왕비 마마를 연금시키고 신라 첩자로 의심을 받던 무리를 주살시켰으니 일단 내부(內部)의 불씨는 꺼진 셈이오. 소문도 가라앉았습니다. 흥수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백제는 내무 분란으로 망(亡)한다는 등 소문이 무성했지만 지금은 씻은 듯이 없어졌소. 민심(民心)이 가라앉았다는 뜻이지요. 의직이 말했다. 민심이 흉흉하면 온갖 소문이 무성한 법입니다. 덕솔의 공이 컸어. 이번에는 윤충이 계백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 김춘추까지 잡았다니 덕솔은 김춘추 가문과는 악연일세. 살려 보낸 것이 잘못 된 것 같소. 의직이 불쑥 말하자 방안에 잠깐 어색한 분위기가 덮였다. 머리를 든 의직이 말을 이었다. 비담보다 감춘추가 합병에 더 유리할 것이라는 발상은 신라를 너무 모르고 하신 것이오. 달솔, 다 끝난 일이오. 흥수가 말렸다. 대왕께선 선왕(先王) 마마의 유지를 받들어 합병을 밀고 나가시는 거요. 김춘추는 10번이라도 배신할 놈입니다. 그때 성충이 눈을 부릅떴다. 이봐, 달솔.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 것 같나? 그놈을 죽이나 살려 보내나 대세에 변동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야. 계백은 고위직의 갑론을박을 듣기만 했다. 모두 중신들이요, 책략과 지모가 뛰어난 노신(老臣)들이다. 의직의 말에도 이해가 갔지만 성충의 생각과 같았다. 김춘추는 왕(王)의 재목이 아니다. 신라왕이 된다고 해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말을 쓰는 이 3국(三國)을 이끌어갈 위인이 아닌 것이다. 의자대왕이 아니면 연개소문이라도 3국을 통일해서 대륙을 통치해야 한다. 그래서 의자대왕이 연개소문을 도와 우선 당(唐)과의 전쟁에 나서는 것이 아닌가?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08 19:00

[불멸의 백제] (130) 7장 전쟁 ⑥

사비도성에서 전령이 왔을 때는 계백이 김춘추를 보내고 열흘쯤이 지난 후다. 전령은 병관좌평 명의의 임명장을 가져왔는데 대왕의 직인까지 찍혀졌다. 계백을 ‘백제 기마군대장’으로 임명하며 도성으로 돌아와 신고하라는 내용이다. 청에 앉은 계백이 사령장을 읽고나서 전령에게 물었다. “대왕의 명이니 받겠네. 그런데 수군항장에게 난데없는 기마군대장 임명장을 주다니, 무슨 일인가?” “예, 각 방에서 선발한 기마군 5천의 대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기마군 5천?” “예, 닷새 안에 도성에 집결할 예정이오.” 9품 공덕 벼슬의 전령이 말을 이었다. “병관좌평께서 덕솔이 휘하 장수들을 데려와도 된다고 하셨소.” 계백의 서신을 받은 전령이 말을 이었다. “고구려에서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대왕께서는 덕솔을 선발하신 것입니다.” “고구려에서 전쟁이 났는가?” “당왕(唐王)이 고구려 원정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수나라처럼 당나라도 망하겠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계백의 표정이 굳어졌다. 수(隨)는 양제의 고구려 원정에서 대패를 함으로써 3대(代) 37년 만에 멸망했다. 그 후에 세워진 당(唐)은 현재 2대(代) 태종 이세민의 정관 18년, 건국 27년째다. 전령이 말을 이었다. “곧 새 수군항장, 한산성주가 부임해 올 것입니다. 덕솔께서는 닷새 안에 도성에 도착해주시지요.” “알았네.” “그리고.” 전령이 잊었다는 얼굴로 계백을 보았다. “이번 고구려 지원군 대장이 되신 것은 고구려 대막리지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상좌평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연개소문이다. 계백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연개소문과 함께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이다. 그날 저녁 한산성의 청에는 수군항의 장수들까지 다 모였다. 모두 계백이 고구려 지원군의 기마군 대장으로 선발이 된 것을 아는 터라 들뜬 분위기다. 더구나 계백이 휘하 장수를 데려간다는 소문이 쫙 퍼진 상황이다. 계백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화청이 나섰다. “성주, 저는 오랫동안 성주와 함께 전장(戰場)을 누볐고 대야성에서 머리가 떨어진 김품석도 보았습니다. 수(隨)의 항장 출신으로 소장이 이만큼 공을 세운 것도 모두 덕솔의 보살핌 때문이요.” 모두 조용해졌을 때 계백의 혀 차는 소리가 청을 울렸다. “나솔, 그대 나이가 몇인가?” “50이요.” “장수로는 좀 늙지 않았는가?” “하루에 고기 10근을 먹고 말 위에 올라 6백리를 달리는 것을 덕솔도 보셨지 않소?” 분이 난 화청이 눈을 치켜떴고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소장이 지쳐 늘어진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시오?” “그럼 같이 고구려로 가세.” “그게 제 평생 소원이었소.” 갑자기 화청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은 계백도 아는 것이다. 일부러 청 안의 열기를 띄우려고 한 소리다. 계백은 한산성과 수군항의 장수 여럿을 선발했다. 모두 지원자들이다. 하도리와 곽성, 수군항의 윤진과 백용문도 지원했다. 그날밤 계백의 말을 들은 고화만이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나리, 그럼 저는 도성에서 기다려야 되겠네요.” 고화가 계백의 가슴에 안기면서 말을 이었다. “서진이가 좋아하겠어요.”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05 21:02

[불멸의 백제] (129) 7장 전쟁 ⑤

바다는 오늘도 잔잔하다. 백제해(百濟海)를 나아가는 5척의 선단은 돛을 펴고는 있었지만 바람이 약해서 그냥 떠있는 것 같다. 앞쪽 대선(大船)의 선수에 서있던 계백이 머리를 돌려 김춘추를 보았다. 이 배는 신라선(船)이다. 김춘추가 타고 온 배인 것이다. 김춘추는 의자왕의 지시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대선에 올라 다시 당(唐)을 향해 떠나는 중이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김춘추가 입을 열었다. “서약서에 쓴대로 내가 신라왕이 되고 나면 바로 백제와 합병을 할 것이오.” 계백은 시선만 주었고 김춘추가 말을 이었다. “그것이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안돈시키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오.” 계백은 시선만 주었고 김춘추의 말에 열기가 띠어졌다. “합병에 장애물이 되는 놈들은 제거해야 되겠소. 덕솔이 도와주시오.” “어떻게 말이오?” 계백이 입을 떼었더니 김춘추가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이 배안에도 부사(副使) 김문생, 경호장 김배선, 그리고 그가 데려온 비담 일파의 군관들까지 10여명이나 타고 있소. 그놈들이 귀국하고 나면 내가 백제와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을 낼 것이 분명하오.” “……” “덕솔이 그놈들을 없애주시오.” 계백이 한동안 김춘추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계백이 손을 들자 옆으로 나솔 윤진, 장덕 백용문, 하도리까지 다가와 섰다. “배에 탄 신라 관리를 모두 갑판으로 모아라.” 그리고는 김춘추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비담 일파가 누군지 적어주시오.” “알겠소.” 김춘추가 아래쪽에 선 아들 김인문을 눈짓으로 부르더니 서둘러 위쪽 누각으로 올라갔다. 명단을 작성하려는 것이다. 이른바 살생부다. 잠시 후에 갑판에 모인 사신 일행중에 정사선(正使船)에 남아있던 관리들의 살육이 일어났다. 김춘추가 적어준 명단대로 비담 일파로 지목된 관리와 군관을 차례로 베어 죽인 것이다. 시체는 바로 바다에 던졌기 때문에 배에는 핏자국만 남았다. 살육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계백이 휘하 장수들과 함께 신라 정사선을 떠난다. 백제 전함을 옆에 붙여놓고 나서 계백이 김춘추에게 말했다. “이찬, 부디 왕위에 오르시오.” “그렇게 되면 1년 안에 신라는 백제와 합병이 될 것이오.” 김춘추가 바로 대답했다. 머리를 끄덕인 계백이 백제선과 연결된 널빤지를 타고 옮겨 갔다. 이윽고 장수들과 군사들까지 모두 옮겨가고 널빤지가 치워졌다. 배가 흔들거리면서 신라선은 동쪽으로 백제 함선은 서쪽으로 떼어져 간다. 거리가 50보쯤 떨어졌을 때 김춘추가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계백에게 인사를 했다. 정중한 인사다. 계백과 뒤에 선 장수들이 답례를 했고 배들은 점점 더 멀어졌다. 곧 1백보 거리쯤이 되었을 때 김춘추는 몸을 돌렸다. 그때 김인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님, 합병을 하실 것입니까?” “당연히.” 머리까지 끄덕인 김춘추가 웃음 띤 얼굴로 김인문을 보았다. “신라가 백제를 합병한다. 저 머저리같은 놈들은 그때 모두 죽었거나 아니면 내 발밑에 엎드려 있을 것이다.” 그 시간에 계백이 멀어져가는 신라선을 바라보며 옆에 선 장수들에게 말했다. “김춘추는 지금 우리를 속였다고 웃고 있을 거야.”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04 20:38

[불멸의 백제] (128) 7장 전쟁 ④

김춘추는 입을 다물었고 의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 전(前)에는 왜에도 가서 원군을 요청했다. 그래서 왜에서는 걸사(乞使)가 왔다고 비웃지 않았느냐?” 의자가 김춘추를 노려보았다. “네 용기는 가상하나 믿을만한 위인은 아니다. 너는 오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라를 멸망에서 구해내고 왕이 되려는 욕심뿐이다.” 쓴웃음을 지은 의자의 말이 이어졌다. “교묘한 말재주와 임기응변으로 지금까지 버티어 왔겠지만, 오늘로 네 목을 베어 욕망을 끝내주마. 신라와의 합병을 너에게 맡길 수는 없겠다.” 이제 김춘추는 머리를 숙인 채 말을 잃었고 의자가 말을 맺는다. “일국(一國)의 왕이 되겠다면 제아무리 소국(小國)이라고 해도 신의를 바탕으로 덕을 보여야 하는 법, 너는 세치 혀만으로 지금까지 잘도 버티어 왔구나.” 그리고는 의자가 협보에게 말했다. “청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목을 베어라. 그리고 그 머리를 상자에 담아 편지와 함께 여왕한테 돌려보내라.” “예, 대왕.” 협보의 대답이 끝났을 때 김춘추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대왕, 살려주십시오!” 김춘추의 얼굴을 본 계백이 숨을 들이켰다. 김춘추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김춘추가 울부짖듯이 말했다. “제가 신라 진골 왕족의 가계표와 조직도를 갖고 있습니다. 비담파와 저한테 우호적인 왕족의 도표가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신라군의 배치도와 병력, 그리고 성(成)의 위치, 허실까지 모두 기록한 자료도 있습니다.” “…….” “만일에 대비해서 품고 다녔던 자료인데 대왕께 바치지요. 신라의 기밀자료를 다 드리는 셈입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김춘추가 부르짖었다. “대왕,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 서류는 제 자식 인문의 몸에 감아 놓았으니 지금 당장 보실 수가 있습니다!” 의자가 성충과 흥수, 계백까지 시선을 마주쳤다. 넷의 표정은 모두 다르다. 의자는 더러운 것을 보았다는 얼굴이 되어 있는가 하면 성충은 토할 것 같은 표정이다. 흥수는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다. 계백만이 김춘추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마악 칼을 내려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때 의자가 협보에게 말했다. “이놈 아들을 데려와라.” 잠시 후에 청 안에 김인문이 앉아있다. 겁에 질린 김인문은 옷이 벗겨지고 가슴에 감아놓은 헝겊이 풀려 서류가 나올 때까지 몸을 떨기만 했다. 협보가 서류를 바치자 의자와 성충, 흥수, 계백까지 차례로 읽는다. 서류는 여러 장이었고 김춘추의 말대로 다 적혀 있었다. 이윽고 머리를 든 의자가 협보에게 말했다. “저 부자(父子)를 마당으로 데려가서 기다려라.” 협보가 김춘추 옆으로 다가가 목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대왕, 살려주십시오.” 김춘추가 겨우 그렇게 말하더니 김인문과 함께 끌려나갔다. 잠시 청 안에 정적이 덮여졌고 흥수는 아직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때 의자가 말했다. “그래, 저놈이 신라왕이 될 수도 있겠지.” 의자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비담이 왕이 되는 것보다 저런 놈이 왕위를 잇는 것이 낫겠다.” 계백은 길게 숨을 뱉었다. 이것이 운명이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03 20:32

[불멸의 백제] (127) 7장 전쟁 ③

“내가 김춘추를 보겠다.” 의자가 말했을 때 성충은 한숨을 쉬었지만 흥수의 눈빛이 밝아졌다. 협보가 말을 받는다. “밀행을 하시겠습니까?” “그렇다. 그놈을 도성까지 끌고 온다면 백성들이 구경한다고 소동이 일어날 거다.” “그렇습니다. 대왕, 하지만 기마군 5백기는 끌고 가셔야 합니다.” “1백기로 줄여라. 예비마는 3필씩.” “예, 대왕” 전장에서의 대담처럼 위사장 협보와의 대화는 거침이 없다. 그때 성충이 나섰다. “대왕, 제가 모시지요.” “저도 모셔야 합니다.” 흥수가 거들자 의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있어야지. 함께 만나서 현장에서 그놈의 생사(生死)를 결정하자.” 의자는 나이 40이 넘어서 왕위에 오른 터라 쓸데없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강압이나 회유로 만들어진 권위는 돌아서면 끝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진정한 권위는 존경과 공감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체험해온 의자다. 측근 대신들에게 격조없이 대하는 것도 그런 자신감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서부 수군항에 밀진의 기마대가 들이닥쳤다. 깃발도, 병참대도 따르지 않는 기동대 1백여기였는데 예비마가 3여필이 따랐고 수군함장 계백이 앞장을 서고 있었다. 계백이 대왕을 모시고 온 것이다. 잠시 후에 수군항의 청에는 삼엄한 경비가 둘러싸였고 곧 성안에 감금되었던 김춘추가 청으로 끌려 들어왔다. 청의 안쪽 수군함장의 자리에 의자가 앉았으며 그 아래쪽 좌우에 성충과 흥수, 계백은 더 아래쪽에 옆모습을 보이고 앉았다. 협보는 청의 출입구 옆쪽에 당검을 쥔채 서있다. 김춘추를 데려온 군사들은 청 아래에서 돌아갔기 때문에 김춘추는 혼자 올라왔다. 이제 넓은 청 안에는 김춘추까지 여섯 명이다. 청의 양쪽은 있었지만 아래쪽으로 경비병들이 이쪽에 등을 보인채 도열하고 있다. 그때 협보가 김춘추에게 말했다. “백제 대왕이시다. 10보 앞에서 꿇고 엎드려라.” “예.” 숨을 들이켜 김춘추가 바로 그자리에서 무릎을 꿇더니 두손으로 청바닥을 짚었다. 그러더니 이마를 청바닥에 붙인채 소리치듯 말했다. “신라의 김춘추가 삼가 백제대왕을 우러러 뵙습니다!” 의자가 지그시 김춘추를 내려다본채 입을 열지 않는다. 머리를 든 김춘추가 의자를 보았다. 얼굴은 상기되었고 두눈이 번들거린다. “대왕, 이렇게 뵙게 되어서 광명이올시다. 이제 김춘추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의자는 표정없는 얼굴로 쳐다만 보았고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소인의 생사(生死)를 직접 결정하시려고 이렇게 친히 왕림하셨으니 더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말씀해 주시옵소서.” 그때 의자가 물었다. “네가 신라왕이 되고 싶으냐?” “신라왕이 되고나서 백제와 합병하겠습니다.” 김춘추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전쟁으로 생업을 잃고 굶주린 백성들은 안돈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왕위를 버린다는 것이냐?” “그것이 여왕과 선왕(先王)의 뜻이기도 합니다. 대왕.” “그 뜻을 받들어서 네 왕위를 버린다고?” “예, 서약서를 쓰지요.” 그때 의자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는 고구려에서도 서약서를 썼지 않느냐?”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02 18:20

[불멸의 백제] (126) 7장 전쟁 ②

편지에서 시선을 뗀 성충이 곧 두손으로 의자에게 내밀었다. “대왕, 이것이 끝입니다.” 편지를 받은 의자가 훑어 보고 나서 청바닥에 던졌다. 의자의 시선이 계백에게 옮겨졌다. “포로들은 수군항에 감금하고 있느냐?” “예, 대왕” 계백이 말을 이었다. “김춘추와 아들 김인문, 부사(副使) 김문생은 따로 성안에 격리했고 나머지는 모두 옥에 가두었습니다.” “잘했다.” 의자가 다시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다. “이 여우 같은 이모의 제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기탄없이 말해보라.” “보내시지요.” 바로 흥수가 말했는데 얼굴이 굳어져 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흥수가 말을 이었다. “당왕 이세민은 여왕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신라 사신에게 너희들은 여왕 치하에 있으니 국력이 쇠잔해진다고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김춘추는 제 미래를 위해 당왕에게 가는 것이지만 숙적 비담 세력에 비교하면 역부족입니다.” 흥수는 신중하고 사려가 깊은 성품이다. 의자는 경청했고 흥수의 말이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김춘추를 베어 죽인다면 상대등 비담이 바로 여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입니다. 김춘추를 비담의 견제 세력으로 남겨 두는것이 이롭습니다. 여왕의 말이 맞습니다.” “어허.” 성충이 탄식부터 하고 나섰다. “역시 내신좌평은 순진해, 사내는 전장에서 칼을 휘둘러봐야 살기(殺氣)를 느낄 수가 있는 거요. 나는 이 여왕의 글 뒤에 숨은 살기를 느낍니다.” 뒷말은 의자에게 했다. 의자가 듣기만 했고 성충의 말이 이어졌다. “여왕은 지난 수십 년간 후계자가 되려는 진골 뼈다귀들의 압박을 견디면서 오직 간계만 늘어났습니다. 이 간계 뒤에 숨은 살기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백제와 신라를 합병한다는 진심이 있었다면 선왕(先王)때 이루고도 남았습니다. 김춘추 이하 사신단을 모두 죽이고 저 편지는 불에 태우는 것이 이롭습니다.” “으음.” 이번에는 의자가 탄식했다. 의자의 시선이 계백에게로 옮겨졌다. “달솔, 네 생각은 어떠냐? 너는 고구려에서부터 김춘추를 겪었을 뿐 아니라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을 죽인 악연이 있다. 네가 본 김춘추는 어떠냐?” “김춘추는 고구려에 갔을 뿐만 아니라 그 전(前)에는 왜에도 다녀갔습니다.” 계백이 말하자 의자는 물론이고 성충과 흥수, 협보까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왜에도 갔단 말인가?” “예, 이번에 잡은 사신단의 경호대장한테서 들었습니다.” 비담 측근 무장인 김배선한테서 들은 것이다. 김배선은 김춘추의 행적을 거침없이 털어 놓았다. 의자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무서운 놈이다. 목숨을 걸고 적지(敵地)에 뛰어드는 이자를 여왕이 가볍게 본 것같다. 왜, 고구려에 이어서 당, 거기에다 지금은 백제땅에 들어와 있는가?” “죽여야 합니다. 대왕.” 성충이 말을 받았다. “비담보다 더 간특한 놈입니다. 그놈이 여왕의 후계자가 되면 합병은 더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이제는 흥수도 입을 다물었고 의자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 문학·출판
  • 기고
  • 2018.07.01 19:05
문화섹션